|
|
출처: 비공개 입니다
| 낙랑, 대방, 현도 고지(故地)의 고구려 귀속(歸屬) | |||
대방의 새로운 개념낙랑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임둔(臨屯)]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한사군 중 임둔군의 위치가 위 지도처럼 발해(서해 위 바다) 북부로 비정될 때
자동적으로 한사군은 모두 발해 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겠다.
즉 한반도에는 한사군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겠다.
낙랑과 대방은 대략 저 위치에 있었다고 비정되고
대방, 낙랑 등 이른바 한사군도 모두 원래는 고조선의 지역나라들.
이는 지금 미국이 무슨 주, 무슨 주 하면서 수십개의 주들로 이루어져있고
중국이 무슨 성, 무슨 성 하면서 여러개의 성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고조선 연방]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고조선 산하의 대방 지역 (대방국), 낙랑 지역 (낙랑국) 등이 후에 한나라에 합방되면서
대방군, 낙랑군이 되었다 하겠다.
당시 고조선 서부지역이던 대방, 낙랑의 고조선인들은
한나라의 저기를 피해서 대거 한반도로 이주해온 정황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주는 사실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평양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낙랑 대방의 유물들이 발견되는 것은
그 이주해온 낙랑 대방인들의 유물이라 하겠다.
그 낙랑인들의 일부는 동해안 지역으로도 이동하여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낙랑국]을 이루었다 하겠는데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낙랑이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라는 독립국 이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낙랑 대방인들이 평양 일대로 많이 이동해 온 것은
평양이 고조선의 원래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고조선은 최소한 2천 수백년 존재했는데
그 수도는 대동강변 평양에서 시작하여 몇번 천도를 하는데
마지막에 다시 대동강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비정되고 있다.
이처럼 낙랑 유물이 평양 일대에서 나온다고 하여
한사군이 거기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삼국유사에 보면
" 한나라가 3군을 두었는데 현도, 낙랑, 대방(북대방(北帶方))이다."
[漢分置三郡 謂玄 樂浪帶方(北帶方)]라 나오는데
여기서 [북대방(北帶方)]은 발해 북부 (북경 일대)에 존재하던 대방이요
후에 한반도로 들어온 대방 사람들이 세운 대방
즉 [남대방]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낙랑 역시 발해 북부에 존재하던 낙랑은 [북낙랑]이요
한반도로 들어 온 낙랑은 [남낙랑]이라 하겠다.
[평양]이라는 지명의 경우도 원 평양은 대동강변 평양인데
고조선이 수도를 옮기면서 압록강 유역, 요하(혹은 난하)유역 (발해 북부)에도
평양이라 불리던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다 하겠다.
차차 중국 세력이 밀려오면서 결국 대동강변 평양으로 고조선의 수도가 다시 돌아왔다고 비정된다 하겠다.
삼국유사에도 " 후에 (마지막 단군이)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다"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고 나오듯이.
국보 제89호 -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平壤 石巖里 金製鉸具)
위 유물은 북한 평양에서 발견되었는데 낙랑 유물로 알려져 있다.
아래는 확대한 사진.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경악스러운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10 센티도 안되는 크기의 바클(허리띠 머리)에 놀랍도록 정교한 작품을 만들었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발해북부 였을 때 그 지역의 문명이 많이 발전했고
위 유물은 고조선 문명을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라 하겠다.
위 유물은 중원(당시 중국의 중심지)의 유물들과는 많이 다른 고조선 고유의 유물.
또한 고조선의 유물 중 하나가 아래의 [다뉴세문경]
[고조선의 다뉴세문경 - 전북 완주 갈동유적]
[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 지름 21.2㎝ : 충남 논산 출토 ]
다뉴세문경은 한국특산품.
한국 고유의 유물.
위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불과 지름 21㎝ 정도 되는 크기 안에
0.3㎜ 간격으로 가는 선들이 무려 약 1만3000개가 있다.
그것도 송곳 같은 것으로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물로 떠서 만들었다.
즉 틀을 만들고 거기다가 쇳물을 부어서 만든 것.
기술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현대과학으로도 아직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위 다뉴세문경들은 2007년도에 전북 완주에서 발견된 것들.
초현대적 기하학적 무늬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난 뒤, 동북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한군현을 설치한다. 그런데, 이 한사군의 위치나 그 존재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사료적 근거를 통해 한반도 북부존재설을 채택한다1). 한사군은 때에 따라 고구려에 의해 일차적으로 철폐되어 이동하기도 하였고, 다시 설치되기도 하는 등의 여러 과정을 겪어왔다. 여기서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낙랑, 대방군을 귀속시켰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미천왕의 한군현(漢郡縣) 공략(攻略) 14년(313) 가을 8월에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구를 사로잡았다.
진(晋)이 동북지방에 설치한 행정구역인 평주소속 5군 중에서 창려군과 요동군 등은 4세기 초에 이르러 모용씨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나머지인 낙랑 대방 현도 등 3군의 성쇠는 그들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고구려의 세력신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결국 4세기 초에 이르러 평주는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평주고지에서는 모용씨와 고구려간의 쟁탈전이 전개된다.
요동출신의 장통이 낙랑 대방의 2군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싸웠는데 몇 년이 지나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백성 천여호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권 88, 진 민제 건흥원년(313) 이 기사는 당시 낙랑과 대방을 장악하고 있던 장통과 미천왕이 상쟁(相爭)하였는데 마침내 장통이 낙랑민을 이끌고 요서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모용씨에게로 옮겨갔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낙랑군이 한반도에서 옮겨져 모용씨에게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바로 미천왕 14년에 행해진 낙랑침공이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의 공식적인 멸망기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모용외에 의해 새로이 설치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는 북위대의 낙랑 관련 사료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대방군의 경우에도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모용씨에게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되지만,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313년 장통과 왕준이 모용씨에게 귀속되었을 때, 대방군도 함께 이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3). 그런데《자치통감》을 보면
6월에 (모용황이) 낭중령 고후를 현도태수로 삼았다. 또한 (모용)황은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로 삼고...
한편, 현도군의 모용씨 이동사실은 《자치통감》의 기록에 모용씨의 속료 중에 현도태수라는 직명이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도군이 모용씨에게 편입된 시기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단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313년 당시 진의 현도태수였던 배무가 죽자 그의 동생 및 아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요동군의 치소인 상평에서는 이미 309년 진의 관리들끼리의 분열로 살육전이 전개되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모용외가 요동에서의 내분을 수습해 주고, 311년 경에 이르러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서는 미천왕 16년대의 현도성 공략사실이 주목된다. 이 기사는 313년 현도태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313년 배무가 죽은 이후 진에 의해 후임 현도태수의 임명기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에 의한 현도군지배는 313년 배무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고구려가 이와 같은 현도군의 내부사정을 탐지하고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현도군은 31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되었고, 그 후에 상평주변에 모용씨에 의한 현도군이 다시 설치된 것이다. 모용씨에 의한 현도군의 설치시기는 구체적으로 상평(평주자사의 처소)에 있던 동이교위 평주자사인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한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모용씨가 최비의 도망사건 후 요동지방을 장악하자, 진에서 모용외에게 작위를 제수하여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요동에 있던 현도군은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어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3)고구려의 낙랑, 대방군 고지(故地) 영유
앞선 글에서는 낙랑,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멸망되기까지의 문헌적 검토를 통해 고구려와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고구려가 낙랑, 대방군을 멸망시킨 이후 어떻게 이 지역에 진출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양군고지에 대한 고구려 세력의 진출과정은 크게 2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양군멸망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와의 첫 번째 접촉기사가 나타나는 4세기 중엽(369)까지이다. 둘째 단계는 369년 이후 고구려가 백제와 투쟁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추진해 나가는 광개토대왕대까지이다. 이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낙랑, 대방군 고지에 대한 지배 및 경영문제 등에 대하여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 단계는 낙랑, 대방군이 한반도에서 멸망된 이후(313-314)부터 고구려가 백제와의 투쟁을 개시하는 고국원왕 39년(369)까지가 해당된다. 369년까지를 하한으로 설정한 이유는 고구려-백제간에 있었던 전쟁기사(369)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4). 그것은 고구려가 백제간의 중간에 위치한 양군고지에 대한 세력확장을 어느정도 마무리한데 따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가 양군지역에 대해 세력을 어떻게 확장해 나갔는지를 전해 주는 문헌사료가 없기에, 양군고지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들을 근거로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낙랑, 대방군 고지의 일부지역에는 벽돌을 이용한 중국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을 사용하고 있는 세력집단이 존재 하였다. 즉, 이 집단들은 돌무지무덤(積石冢)의 특색을 지닌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신라와 다른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 각국의 연호를 채용함으로서 서로의 정치적 관련성을 암시하였다5). 또한 비록 허구화된 관직이긴 하지만 중국계의 고위관직을 자칭함6)으로서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하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고구려는 313-314년 양군을 멸망시켰으나 곧 이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행정통치를 실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구려는 이 지역에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양군지역의 토착집단에 대해서는 직접통치를 감행하지 않고 이들의 기존 사회질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채 간접지배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7). 양군지역은 4세기 이상이나 중국의 행정적인 지배를 받았으며, 고구려와 역사적 문화적 전통이 달랐고, 기존의 양군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토착호족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를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북중국의 정치상황에 편승하여 능동적으로 요동지방 진출을 수행하였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양군고지에 대한 지배 통제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313년 당시 진의 현도군 태수가 사망하자, 고구려는 현도성을 공격, 점령함으로서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또한 고구려는 이후 요동지방에서의 세력 확대를 위해 동이교위 평주자사인 최비와 손을 잡기도 하면서, 요동지방에서 모용씨와의 피나는 투쟁을 전개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부사정이 양군고지에 대해 힘을 분산시킬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연의 모용씨와의 이러한 투쟁은 342년에 일어난 모용황의 침략으로 인한 치명적인 타격으로, 고구려는 한동안 요동지방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따라, 고국원왕은 요동으로의 진출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남방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함으로서 방향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369년부터 계속되는 고국원왕에 의한 백제침공기사에서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양군고지 진출 또한 이때에 적극적으로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369년의 백제와의 접전은 고구려의 양군고지에 대한 진출노력이 어느정도 성과를 본데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고구려의 양군고지 진출과 관련하여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평양관계 기사이다. 《삼국사기》에는 평양관계 기록이 247년부터 보이고 있다. 관계 기록을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①(동천왕)21년(247) 왕은 (앞서)환도성이 난리를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축조하여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②(미천왕)3년(302) 왕은 군사 3만명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③(고국원왕)4년(334)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④(고국원왕)13년(343) 평양의 동황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⑤(고국원왕)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돌아가셨다.
위의 사료 중 ⑤에 보이는 평양성이 오늘의 평양이라는데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즉, ⑤는 고구려가 이미 평양지방을 근거지로 확보하였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평양에 평양성을 쌓고 남진정책의 주요 근거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과연 어느 시기까지 올라갈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가중된다. 이 점은 ①과 ④를 해석하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즉 ①은 고구려의 평양성에 대해 제일 오래된 기록이고, ④는 ⑤ 이전에 보이는 평양관계 기록이기 때문이다. ①은 위의 관구검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훼손되자 평양성을 쌓고 천도했다는 기록이다. 이때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때의 평양은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평양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평양지방에는 낙랑군세력이 존재하여 이들이 백제8), 고구려9)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한 기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의 천도는 국내성 인근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당시 옥저방면으로 도망갔던 동천왕이 되돌아오던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강계에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이는 강계주변을 흐르는 독로강변에는 당시 고구려의 특징적 묘제인 적석총이 다량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강계지역이 고구려의 주요한 거점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④는 고국원왕이 평양의 동황성에 이거하였음을 전하는 기록이다. 이거(移居)의 배경은 ①의 배경과 비슷하다. 즉 전연 모용씨의 침입으로 국도가 파괴되는 등의 치명적 피해를 입은 고국원왕은 이듬해(343) 7월에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는 단순한 왕의 이거로 보아야 한다. 천도나 이도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에 잠시 이거하였다가 곧 국내성으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10). 요컨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수도는 국내성이다. 또한 광개토왕대의 수도 역시 국내성이었음은 광개토대왕비의 존재 및 비문에 보이는 ‘아래로 평양을 순시했다(巡下平壤)’기사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④를 고국원왕에 의한 일시적인 이거기사로 생각할 때, 평양 동황성의 위치비정문제를 추정할 수 있다. 종래 평양동황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계부근설, 현 평양설 등으로 비정하여 왔는데, 앞선 근거들을 추론 해 볼 때 강계부근설이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고국원왕대의 평양 경영은 ④기사(343)이후에 추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 북중국에서의 정치상황 즉 고구려가 342년 이후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을 중단하고 남방으로의 진출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게 되는 내부사정과도 연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단계는 369년 이후부터 광개토왕대까지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낙랑 대방군 고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직접적인 통제력을 강화, 확립해 나가는 시기이다. 고구려는 남진과정에서 백제와의 공방전을 계속하게 된다. 즉,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의 투쟁과 더불어 양군고지에 대해 직접통치를 실현해 나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먼저 양군고지에서 발견된 고분들을 조사해 보면, 369년 이후에도 벽돌을 사용한 중국식 무덤이 일부나마 계속 조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광개토대왕대인 5세기초를 한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즉, 광개토대왕대를 하한으로 하여 양군고지의 토착 호족세력들의 정치, 사회적 질서가 ‘완전히’해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추론을 가능케 해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덕흥리고분이다. 이 무덤의 주인인 진(鎭) 은 중국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온 망명객이었는데, 그는 고구려의 관직인 국소대형(國小大兄)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고구려의 연호를 채용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안악 3호분의 주인인 동수(冬壽)의 묘인데, 그는 중국 동진의 연호를 쓰고 중국식의 관직을 썼던 것이다. 즉, 이는 357(동수)년에서 408(진)까지의 50여년동안 양군고지에 대한 고구려 세력의 변화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권 24, 백제본기 2, 근초고왕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중략)...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