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치머리 외2
살갗에 흰 소름 돋는 아침
시계방향으로 가마*가 선회하며 길을 낸다
돌아가는 자리마다
스쳐온 삶의 자국에 둥지 틀겠다고
말캉한 터널을 두꺼비 손끝 감각으로 헤집는다
묵혀둔 흔적 들썩이고
덮어둔 푸른 아픔 터져 나온다
차가운 공기가 정수리 위를 휘감아 도니
밑바닥이 휑하다
옷깃 위에 떨어진 몇 낱의 부스러기에서
흘러온 세월이 흘러갈 세월을 넘겨다 본다
은빛 훈장 달아놓은 듯한 밑자리가
한겨울 흩날리는 싸리눈을 만난 듯
왠지 허전해진다.
* 가마: 머리털이 한곳을 중심으로 남. 소용돌이 모양
황금빛 염색
창밖 너머 언덕 위 은행나무 한 그루
온종일 차렷 자세이다
눈부신 햇살 한 움큼 푹 짜넣고
간밤에 적당히 내린 빗물 섞어
넉살 좋게 불던 바람
긴팔 뻗듯 늘어진 가지에 걸터앉아
휘-휘 저어 염색물을 만든다
적당히 버무려진 은행잎 한 장 한 장
빛깔 곱게 샛노란 물 먹이더니
때마침 지나가는 참새 불러 모은다
시간 재듯 짹짹거리는 소리도 섞어 넣어
가을비에 촉촉이 적셔내고 행궈낸다
잎새 위로 뿌려지는 태양의 가루 눈부심
하늘거리는 황금빛 실루엣에
늙은 오후의 눈이 머문다.
가르마 (조선의 여인들)
진단기 화면 안에는
연한 청백색의 촉촉한 대지가
맑은 숨을 내쉰다
날 세우고 각 세운 빗머리가
이마에서 백회*까지
단숨에 트는 가르마 길
칠흑 같은 머리숱
빗살 지나가는 자리마다
잔잔히 펴지는 검푸른 물결
엄마 품안 같은 젖살 향기가
풋풋이 피어 오른다
정수리가 곱던 조선 여인들
망초꽃 미소가 하얗게 피었다.
* 백회: 두상 혈자리. 머리 꼭대기 정수리 부분
[김동주 프로필]
본명:김영혜((金英惠)/ 시 낭송가/ 머리카락 시인/ 한국 가체연구소 소장.
[심사평]
‘한국신춘문예 2024년 겨울호’ 시 부문 당선작으로 김동주 씨의 시 ‘가르마’ 외 2편을 선정한다.
시의 특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마디로 답을 굳이 물으면 ‘함축성’이라고 해도 무관하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짧으면서도 깊은, 그리고 아름다운 단어의 선택은 ‘아름다운 시’로 탄생한다.
연과 행의 배열이 부드러우면서도 물 흐르듯 막힘없이 흘러가면서 지루하지 않은, 그리고 마무리 연과 행의 조화는 비로소 ‘시’라는 문학의 정수를 읽는 이로 하여금 영혼의 갈증을 정서적 휴식을 갖게 한다.
김동주 씨의 시 ‘가르마’외 2편은 그러한 측면에서 매우 잘 지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제와 시 내용이 잘 어울리며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함축적인 글의 흐름 속에 아름다운 시어들이 잘 조화된 우수작이다.
시 ‘가르마’에서 3연의 –칠흑 같은 머리숱/빗살 지나가는 자리마다/잔잔히 퍼지는 검푸른 물결/-과, 시 ‘새치머리’에서 4연의 –옷깃 위에 떨어진 몇 날의 부스러기에서/흘러온 세월이 흘러갈 세월을 넘겨다 본다/-라든지 시 ‘황금빛 염색’의 마지막 연-하늘거리는 황금빛 실루엣에/늙은 오후의 눈이 머문다/ 등이 서정시의 정수를 잘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시작과 흐름 그리고 마무리 시어들이 잘 구성된 글로 이러한 자세와 시 작법으로 꾸준히 천착한다면 한국 문단에서 대성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멈추지 말고 사색하고 또 짓는, 아름다운 시인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석정희, 신인숙, 윤미숙, 박태국, 엄원지.
[당선 소감]
예로부터 미인의 조건으로 길고 윤이나는 검은 머리카락(Human Hair)을 꼽았습니다.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마지막 해결책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60. 70년대 가발 수출은 나라 경제살리기에 효도상품으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까지 하여 위기를 극복 나라 사랑으로 뭉친 힘은 한국인의 자랑이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는 각자의 소중한 삶의 희, 노, 애, 락이 묻어져 있습니다.
이런 머리카락을 시로 담아내어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머리카락 시인”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저의 시를 눈여겨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