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파벌탐구’ 씨리즈를 마치고
나서
종단 혁신할 새로운 대안집단 등장 절실 승려교육체제 혁신, 공부·봉사하는
스님 우대 풍토 조성돼야
지난 23일 중앙종회에선 간선의원선출위원회가 열렸다. 낙산사 지홍스님이 사퇴해 궐석이 된 선원 몫 종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원회가 시작되자마자 한동안 입씨름이 계속됐다. 투표로 뽑자느니 합의로 뽑자느니, 합의 도출을 위해 선출 날짜를 연기하자느니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느니 다소 격앙된 논의가 계속됐다. 투표 연기와 합의 선출을 요청하던 금강회와 보림회쪽 위원은 여당이 일승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투표
직전 자리를 뜨거나 백지투표를 던졌다. 반쪽 투표였다. 결과는 재적 9명 가운데 5명이 찬성으로 종열스님이 당선(?)됐다. 종단내 중진스님들과
두루 관계가 좋은 명진스님은 떨어졌다.
지난 7월초 열려 새 이사를 뽑은 동국학원 재단이사회의 재판이었다. 당시 재단이사회 회의는 일승회쪽 이사가 불참하고, 영담 영배스님 등
보림회쪽 이사만이 참석한 가운데 새 이사를 선출했다. 새 이사는 보림회나 금강회쪽에서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공방이다. 그러나
누구도 즐거울 리 없는, 부끄러운 공방이고 승패였다. 세상에 대해서는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승가 안에서는 병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이고 있는 셈이고, 대외적으로는 원융살림을 강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파벌살림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내부문제 감시집단 부재
이런 종단내 파벌적 양상과 관련해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것은 이런 반불교적인 행태를 가열차게 비판하고 감시할 집단이 없다는 것이다.
서의현 체제 때 종단에는 불교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에서 불교의 자주화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대안세력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종단에는 파벌화되어가는 비불교적인 양상을 지적하고 비판할 양심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없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결사체 또한 없다. 개혁불사 당시 개혁에 헌신했던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종단 상부기구에 입성해 종권을 놓고 각축하고 있다. ‘우리가
종권을 잡는 것이 곧 개혁’이라고 한사코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겐 종권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새로운 종단상 정립을 위한 청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른바 개혁세력이 모두 종단정치 안에서 각축하다보니, 온당한 비판이나 합리적인 대안이라 하더라도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 것으로 낙인
찍힌다. 실천승가회와는 물론 다른 종파와도 거리를 두고 포교에 푹 빠져있는 금강 스님이나, 생명평화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도법스님도 특정 파벌
소속으로 내몰린다. 때문에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도 선뜻 종단 현실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새로운 대안집단 갈망
때문에 종단 안팎에선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대안집단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다. 대승불교승가회든 정토구현승가회든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던질 젊은 승려들로 구성된 결사체가 그것이다. 불가에는 고려때의 수선결사 정혜결사로부터 시작해 20세기의 봉암사결사 등 정법 구현을 위한
결사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선우도량도 그 맥을 잇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 결사체는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법대로 수행하며, 법대로
원융살림을 살고, 법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수행과 경전에 근거해 새로운 종단상을 몸소 실천하는 모임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꼽히는 대안은 승려교육체제의 혁신이다. 제대로 된 스님을 만들 수 있도록 승려 교육의 내용과 체제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스님들이 종권이나 주지 주변에 얼씬거리는 이유는 바람직한 승려상이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사실 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자학을 가르친다. 어린이들이 배우는 <명심보감>은 선악과 상하를 구분하는 법, 어른을 모시고 아랫사람을 가르치는 법
등을 가르친다. <소학>은 청소년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담겨 있으며, <논어>는 군자의 바탕인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
특히 仁(인)과 義(의)]을 가르치고 <맹자>는 義(의)에 집중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인성 교육프로그램이 없다. 깨달음 지상주의로
흐르다보니 깨달음 이전에 성직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해야 하는지, 지켜야 할 예의범절의 내용과 교리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승려로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과정이 없다. 그저 여법하게 살라고만 할 뿐 무엇이 여법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다.
“스님들이 염불이나 선이나 교학이나 봉사 등 무언가 하나씩 전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다 보니 스님들에게
전공이란 게 없고, 그러다보니 대부분 스님들은 종단 주변에 얼씬거리거나 주지 자리나 차지하려고 기를 쓰게 되는 겁니다. 가만히 보세요.
권승들에겐 전공이 없습니다.”(윤창화 <민족사> 사장)
세번째로는 공부하고 봉사하는 스님들이 우대받도록 관행과 제도의 혁신에 대한 요청이 많다. 각 사찰의 법회에서 하는 법문은 공부하는 스님에게
맡기는 것은 기본이다. 주지는 법상에 올라서는 안 되고, 법문을 할 스님을 초빙하고 모시는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보살행이나 포교 등
대사회적 활동을 열심히하는 스님을 지원하고 편리를 봐주는 게 주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스님들은 행정직을 기피했다고 한다. 주지 맡으라고 하면 두세번 사양하는 게 관례였다. 석주스님이나 지관스님은 교계
원로들이 총무원장으로 추대했음에도 이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주지 한 자리 얻기 위해 칼부림이 일기 시작했고, 지금도 주지
자리다툼은 파벌 혹은 문중 갈등의 뿌리가 되고 있다. 주지 한번 맡으면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보호막 구실을 해준 파벌부터 찾아다니고,
종회의원 한 자리를 놓고 계파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신세계의 토양
불교는 우리나라 유형문화재의 70%를 보유하고 관리한다. 토착신앙과 결합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형성해온 뿌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불교는
한국에서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적 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남방불교나 티벳불교,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한국의
불교는 불교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이 믿는 종교를 떠나 한국 불교에 거는 기대는 크다.
청빈을 자랑삼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눈푸른 납자들이 구름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출재가 혹은 불자 비불자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이 결코 더럽혀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내안의 불성을 찾아가듯이, 우리 정신세계의 토양을 이루는 불교문화의 빛나는 모습을 함께 드러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충고와 질책에 감사드리며
연재물 ‘조계종 파벌탐구’를 진행하는 동안 애정어린 충고와 질책이 잇따랐다. 대부분 조계종 종단이 한국적 정신세계의 지킴이로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더러 과도한 표현이나, 잘못된 사실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오보도 있었다. 사퇴한
종회의원은 낙산사 지홍스님이었으며(기사 속에서는 조계사 전 주지 지홍스님), 정대스님과 지선스님이 대결한 총무원장 선거는 1999년이었고(기사
속에서는 1998년), 금강회의 전신인 청림회는 이 선거 때부터 결성돼 활동하기 시작했다(기사 속에선 결성시기가 애매했음). 해량해주시기를
빈다.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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