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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코타 키나발루 한인 천주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눈덮인산의장미
지난 해 어느 날 주일저녁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평소 우리가 존경하는 임 언기[안드레아]신부님이
소금창고를 방문하시어
동행하신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한인성당 주임으로 계신
최 상기[레오]신부님을 우리 창고지기들에게 소개해 주셨다.
소금창고에서의 두 분 신부님
최 신부님은 말레이시아 현지인들을 위한 고아원 설립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기금마련을 위해 이곳에서 의류를 수집해 현지에서 바자회를 열 예정이라 하셨다.
신부님의 고귀하신 이웃사랑 나눔 정신에 감동한 우리 창고지기들은
그 후 헌 옷, 새 옷 구분치 않고 기증 할 의류를 모아 몇 차례 보내드렸었다.
이번에도 코타 키나발루로 보낼 의류를 실어가려고 수사님께서 차를 가지고
지난 4월 24일 오후에 창고로 오셨다.
코타로 보낼 의류를 차에 옮겨 실으시는 강가밀로 수사님
[곁의 도우미는 창고지기 막달레나]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 강 가밀로 수사님께서
소금창고를 떠나시기 직전 뜻밖의 뉴스를 전하셨다.
당신은 내일 모레 그러니까 26일 저녁비행기로 코타 키나발루를 가신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28일~29일 이틀 동안 고아원 설립기금 마련 바자회가 열리므로
미리 가서 준비해야 한다기에 나도 불쑥 튀어나온 말이
‘수사님 나도 따라 갈래요.’ 이 한마디는 지상낙원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다음날 항공비 송금하고 친구 막달레나는 신부님께 전해드릴 물건 챙기느라 몸도 아픈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묵주팔찌 만들고, 어린이드레스 손질하고,
세례선물로 제공 할 서적도 이 십권을 챙겨 담은 별도의 여행가방을 마련해 주었다.
창고지기 막달레나가 별도로 준비해 준 여행가방 [묵주팔찌, 와인오픈 셑, 드레스, 신앙서적등]
인천공항에서 이스타항공 편으로 한국을 출발 코타 키나발루 공항에 도착하니
그곳 시간으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니
반가운 얼굴 최 상기레오신부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바주의 야경을 차창 밖으로 구경하며 우리 일행은 숙소인 천주성삼 교육관에 도착했다.
3층은 사제관으로 사용되며, 아래층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용되는 장소였다.
우리의 숙소는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평화스런 이국적 풍경.
조용한 휴양지의 호젓함을 누릴 수 있었다.
박 진원베드로형제와 내가 일주일을 머물렀던 2층 숙소
==================================== 코타 키나발루 첫째 날================================
우리 일행은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으려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런 세상에!~~
식탁에는 우리일행 세 사람을 위한 삼 인분의 아침상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수박, 망고 토마토등 후식도 곁들여서.
레오신부님은 시내에서 어학공부하시는 김 보니파시오 신부님을 학원에 태워다 드리려
일찍 나가신 모양이다. 웬일인지 밑반찬도 온통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뿐이었다.
젓갈, 김, 멸치조림등 이국 땅에서의 첫날 아침을 맛있게 먹고나니,
마음 속에 드는 느낌이 신부님은 사제가 아니라 내게는 우렁각시였다.
김신부님을 학원에 태워다 주고 레오 신부님이 들어오셨다.
잠시 후 어떤 형제가 차를 몰고 교육관에 도착했다.
신부님께 여쭤봤더니 이곳 국립대학교 교수로 계신 여 영환바오로 형제님이라 하셨다.
교육관을 숙소로 쓰면서 나는 자주 여 바오로형제를 접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신부님이 급할 때마다 오셔서 차량봉사를 해 주셨다.
신부님차량은 본당 고유 업무도 있고, 후배 신부님 학원 통학도 시켜야하며
게다가 우리까지 신경써야할 판이니 쉴 틈이 없었다.
외부에서 오신 방문객의 수송은 그때마다 바오로 형제님차량이 큰 몫을 감당해 주고 있었다.
같은 수도회에서 수녀님 한 분이 명동성동 교우이신 예쁜 자매님이랑 나들이 하실 때도,
서울 잠원동성당 교우로서 신학생들을 위해 오래도록 후원해 주신 가족이 오셨을 때도
바오로 형제님의 차량은 그 분들의 기사가 포함 된? 발이 되어주셨다.
나중에 레오신부님을 통하여 듣게 되었다.
현지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께 여 바오로 형제님은 조력자이자 위로자로서 커다란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신부님께 붙여주신 협조자 성령이셨다.
내 눈에는 신부님 향후사목에 꼭 필요한 존재,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한 것 같았다.
KASIH SAYANG 레스토랑에서의 여 영환[바오로]형제님
오후에 교육관을 찾아오신 자매님이
바로 나를 먼저 알아보시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카페를 통해 내 모습을 익히 알고 계셨던 이 진희 안젤라님이셨다.
지금은 본당에서 홍보분과장직을 맡아 봉사하고 계셨는데,
교육관에서 신부님과 나누는 얘기를 훔쳐 듣다보니
초중등부 아이들 교육프로그램 운영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계신 듯 했다.
본당 발전에 꼭 필요한, 카페활성화에도 없어서는 아니 될 소중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몬시뇰서품 32주년 기념 만찬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홍보분과장 이 진희[안젤라]님-
소금창고에서 선물한 묵주팔찌를 봉사자 자매님과 함께 고르시는 모습[교육관에서]
================================== 코타 키나발루 둘째 날=================================
드디어 고아원설립 기금마련 바자회 첫날 아침이 밝아왔다.
우린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와 바자회가 열릴 장소인 주교좌성당에 도착했다.
넓은 체육관이자 공연장같이 보였다.
이제 준비하는 시점인지 박스에 담긴 옷을 꺼내고,
일부는 옷걸이에 걸어 행거에 진열하고 있었다.
행사장소를 둘러보고 있는 중에 어느 분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내 손을 잡아 흔든다.
내 속에서는 혹시 ‘라이징 선’ 하고 신호가 오지만
확신이 서질 않아 나도 그저 반갑게 호칭 없이
환대에 감사하는 인사만을 주고받았다.
뒤돌아서 레오신부님께 살며시 물었다.
“혹시 저분이 사목회장님 아니세요?” 맞단다.
유 갑종티모테오 사목회장님!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
내가 먼저 다가가 자신 있게 말을 걸었다.
‘티모테오회장님, 큰일 치르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린 급격히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다.
우린 이미 카페활동을 통해 라이징 선과 눈덮인 산의 장미로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있었던 터이다.
행사장에서 가격표를 붙이고 계신 로렌조형제와 디모테오회당님
일일 점원으로 봉사하시는 회장님! 현지인에게 옷을 골라주고있다.
대장금에서의 푸짐한 저녁식사
나는 서울서 시작한 의류 나눔 공동체 소금창고 창고지기생활
3년 동안의 노하우를 이곳서 마음껏 펼쳐 놓을 수 있었다.
현지인 봉사자들과 협조해서 기쁘고 활기찬 마음으로 봉사에 돌입하였다.
행거는 바닥 라인에 맞추어 세우도록 하여 질서감이 돋보이게 하였고,
행거의 앞 뒤 간격은 넉넉하게 떼어놓아 구매자가 서로
부딪치는 일없이 물건을 고를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옷걸이는 같은 방향으로 걸도록 알려주어 옷을 꺼내어볼 때
엉키는 일이 없게끔 조정해 주었고. 같은 종류의 새 옷이 많을 경우는
바닥에 쌓아두는 것 보다는 같은 색깔별로 나란히 걸어두는 것이
더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사실도 알려주어 내 스스로 그렇게 해 보았다.
5링깃 짜리는 바닥에 라인을 맞추어 진열하고있다. 행사 첫날 아침모습.
1차 진열과 행거 정리작업을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르는 창고지기 '눈덮인 산의 장미'
첫날 행사를 통해 하느님은 나에게
성실한 친구를 한명 선물해 주셨다.
그는 현지인인 말레이시안으로서 로렌조라 하였다.
그는 나와 나이가 동갑이었고,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쉽게 친밀감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바자회 현장에서 그 친구는 수시로 다가와 내가 최고라며
씽긋 웃는 얼굴로 엄지를 치켜 보이고는 하였다.
또한 그 친구 로렌조,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대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 친구는 현장의 보물이었다.
현지인 봉사자들을 잘 다독여 이끌어 갔으며
자기 자신도 땀흘려가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너무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나도 다가가 한마디 격려의 추임새를 넣었다.
"You! my good good friend."라고 등을 두드려주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더니
그도 애기처럼 마냥 즐거워하였다.
힘든 일도 기쁘게 임하면 이렇게 미소를 낳지요.
5링깃코너 앞에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내 친구 로렌조,
첫날행사를 마무리하며 성령께서는 나에게 한 가지 지혜를 넣어 주셨다.
내일은 주일이라 미사를 마친 후 많은 교우들이 올 것이다.
비록 5링키트짜리 싸구려라 하더라도 오늘처럼 마룻바닥에 늘어놓으면
가치가 없어 보이니 내일은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고르는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거나 쪼구려 앉아 고르는 불편함을 없애주도록 제안했다.
다음날 확인 되었다
이 제안은 성공적이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5링깃짜리 의류가 쌓여진
테이블 주위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 코타 키나발루 셋째 날================================
4월 29일 주일이자 바자회 둘째 날이 밝아왔다.
이날 아침 나는 남국의 예수님을 만났다.
신심이 남달리 깊은 이곳 현지인들을 위해
바자회에서 수고하는 로렌조형제와 현지인 자매 두 명을
교육관으로 초대하여 아침 7시에 특별히
별도의 주일미사를 집전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교육관에서 세 사람에게 아침을 대접해 주신다음
그들을 바자회 현장으로 미리 보내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스한 예수님의 사랑인가!
레오신부님을 통해 나는 예수님을 보았다.
우린 본당인 코타키나발루한인성당에서
주일미사를 참례한 후 그곳에서 교우들과 점심을 나누고 나서
바자회 현장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본당에 도착하니 아직도 현지인들의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미사가 끝난 후 현지인 교우들이 성당을 나서고있다.
어느 소녀의 기도[참 귀여운 모습이다]
앞서 미사를 참석한 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나는 본당 맨 앞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 이곳 성당의 분위기를 몸으로 마음으로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 때 왼쪽 반주자석에 앉아계시던 자매님이 내게로 다가와 감탄사를 터트리며 반갑게 말을 건넨다.
‘눈덮인산의 장미님 아니시냐고.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고 하셨다.’
세상에 이 날씬하고 젊은 아가씨는 나보고 내가 카페에 올린 글 ‘이끄심’도 읽었다며
그렇게도 높이 추켜세워 주시는 바람에 내심 부끄러웠다.
달의 맑고 깨끗한 앞면만 보셨기에 그렇지 사실 남이 모르는 내 뒷모습은 추하기 이를 데 없는 죄인인데,
더구나 나는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그 자리에서는 부인도 못하고 온갖 칭찬 그냥 받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미사 시작 전 제대를 준비하시는 반백의 품위가 고상해 보이는 자매님도 만났다.
카페를 통해 나를 익히 알고 있었다며 무척 정겹게 대해 주셨다.
나에게 '언제 가시는지 가기 전에 꼭 한번 초대할 것'이라며 차후 만남을 예약하셨다.
미사가 시작도 되기 전인데 내게는 이미 성당 안에서 미사의 은총이 쏟아진다.
김 정남보니파시오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는 시작되었다.
강론 말씀 중에 이민자 주일에 맞는 예화로써 공항에 도착하신 수녀님 일행 픽업 나가셨다가 겪게 된 얘기를 들려주셨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기에 어디서건 겪게 될 난처함 앞에서 한번만 봐달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Look at me one time! 인가? 아닐꺼야?’ 남의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동말레이시아에서 바치는 주일미사 제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이곳에 한인성당이 있고 한국인 사제가 존재하기에 한국말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미사를 마친 후는 언제나 점심을 함께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교회의 모습이 이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메뉴는 국밥이었다, 식사 전 성당 안에서 만났던 반주자 자매님은 박 스텔라라고 하셨다.
카페에서는 백설마녀로 알려졌던---. 그런데 역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
날씬하고 예쁜 아가씨로 알았던 자매님이 두 딸을 소개시킨다.
이렇게 다 큰 딸을 둔 엄마를 아가씨로 착각하다니 보는 눈은 바보나 다름없다.
할머니로 보여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하며 속으로 위안했다.
박 스텔라자매님께서도 나에게 행복한 주문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피섬 들어가서 씨워킹도 체험해 보시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모든 일정은 주님 뜻대로 움직이니 그분께 모든 것을 위탁하고 박 스텔라자매님의 주문을 수락했다.
늘 교우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이는 대장금의 여주인이신 이 향범 요한보스코 자매님이셨다.
참으로 훌륭하신 몫을 행하고 계신 분으로서 내 기억에 생생하다.
옷을 고르시는 신부님과 보스코자매님
왜냐면 불가에서도 말하기를
배곯는 이에게 한 끼 공양 베푸는 것이 부처님 전에 쌓는 최고의 보시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자매님은 몇 십명분의 음식을 손수 제공하니 하늘나라에 보화를 가득히 쌓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허긴 보스코자매님 배포나 마음그릇의 크기로 본다면 여건만 주어진다면
동말레이시아인 전체를 배불리 먹게 해드리고도 남을 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점심을 마친 다음 우리는 바자회장으로 갔다. 역시 예상대로 행사장이 활기차다.
5링키트 코너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아쉽게도 백설줌마님은 이렇게 뒷 모습만 잡혔네요.
혹시 뒷모습만 보이는 두분은! 비신자+릴리안님 맞지요?
본당식구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서울에 가 계신 조크리스티나 자매님 대신 신랑과 따님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늦은 저녁 바자회의 모든 일정을 무사히 잘 마쳤다.
행사 관계자와 이틀 동안 고생한 현지인 봉사자들이 함께 유 갑종티모테오 회장님이 운영하시는
한국식당 대장금에서 쫑 파티겸 회식으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나누었다.
행사의 모든 일정을 성황리에 순조롭게 마치고 나서야 우리는 신부님 차량 편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셋 째 날이 지나갔다.
================================= 코타 키나발루 넷째 날=================================
4월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관광이 시작 될 모양이다.
여 바오로 형제님이 호텔에서 후원자가족을 픽업해 교육관으로 오셨다.
세분 가족은 아빠는 빈첸시오, 엄마는 레지나,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딸은 엘리사벳이라 했다.
오늘의 행선지는 연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시사양[KASIH SAYANG]이란다.
워낙 가파른 오르막 코스라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풍만하신 수사님과 나는 갈라서 타게 되었다.
수사님은 신부님 차를 타고, 나는 복이 많은 탓인지 여바오로 형제님이 운전하시는 좋은 차를
레지나자매님 일행과 타게 되었다.
산을 향해 가는 동안 레지나자매님의 질문에 답하는 여바오로 형제님의 대답은
신앙간증이 되어 나는 차중에서 피정을 받은 셈이었다.
듣고 보니 바오로 형제님은 하느님께서 철저히 준비시켜
레오신부님께 동역자로 붙여주신 성령의 이끄심이었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장관이었다.
그곳에서 차와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갑자기 세찬 빗줄기가 계속 한참 동안이나 퍼부어 내렸다.
산정 레스토랑에서 듣는 시원한 빗소리는 청량감마져 들었다.
비 구름 저 멀리 시내와 바다, 그리고 섬들이 희미하게 내려다보인다.
후원자 가족과 신부님[왼쪽부터 : 딸 엘리사벳, 아빠 빈첸시오, 신부님, 엄마 레지나님]
산을 내려와서는 시내 쇼핑을 다녀왔다.
나와 동행한 강가밀로 수사님은 정말 살림꾼이다.
서울서 도착한 뒤부터 수사님은 신부님의 부엌살림을 총 점검해 주셨다.
냉장고 속의 음식도 모두 꺼내 버릴 것은 버리고 남은 것도 일일이 냄새를 맡아보고 구분해서
깔끔히 정리해 두셨는데 시장을 따라 다녀보니 쇼핑하는 모습도 여지없는 엄마다.
일일이 가격 체크해 보고, 이리저리 모양도보고 냄새로서 신선도도 확인하고
따라다니는 나는 솔직히 지루해서 혼났다.
수사님을 보고도 생각했다.
예수님의 각기 다른 지체의 모습들이 모여서 수도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구나하고,
쇼핑을 마친 후 우리는 릴리안 자매님의 식사초대 장소로 이동 중 이었다.
가는 동안 점차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했다.
약속시간 맞추기도 빡빡한 시간인데 신부님은 차를 급히 몰아서 어느 호텔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시더니
이런 선셋[sun set]은 일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것이라며 바닷가 쪽으로 우릴 이끌었다.
낮에 한 줄기 폭우가 쏟아진 뒤라 그런지 정말 장관이었다.
황홀한 신비감마져 들 정도로 멋진 경치였다. 모두들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최 경애 릴리안님 부부가 우리를 반긴다.
남편이신 정 갑식형제님이 나에게 정겹고 겸손하게 한 말씀 건네신다.
'요 앞에 호텔에 좋은 식당도 있지만 이곳까지 오셨으니 전통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곳으로 정했다'고 말씀하셨다.
인상도 서글서글하신 분이 그렇게 미리 말문을 열어주시니 마음이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얘기 중에 자신은 비신자라고 당당하게 밝히시기에 나도 당당하게 맞받아 응수했다.
아닙니다. 정선생님은 이미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십니다.
아내가 성당에 오 갈데 운전해 주시고 미사 중에도 늘 뒤에서 함께하시니
울타리 안에 있는 신자들 보다 어쩌면 더 본당의 실정을 잘 아실 수도 있습니다.
릴리안은 백합이요, 이는 순수한 마리아의 표상이니
아내인 릴리안의 모든 것을 침묵 가운데 지켜주시는 요셉성인과 다름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이 다음 세례를 받으신다면 세례명은 요셉으로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더니
당신은 3년 뒤 쯤이나 생각해 본다 말씀하셨다.
그도 좋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삼년이 삼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스스로 말씀하신 ‘비신자’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정선생님은 ’비상시에 신자들을 대신해서 자신을 불태울 남자‘라고!
어쨌든 음식도 맛있고, 대화도 부드러웠다.
최 경애[릴리안]님 옆 모습과, 곁의 형제는 이번여행의 동행자 박 진원[베드로]형제.
비상시 신자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 할 남자! 정 갑식요셉님과 김 정남보니파시오신부님
두 분은 정이 많으신 것인지 사랑이 넘치는 것인지 쉽게 우리를 보내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바닷가에서 2차로 생맥주를 한 잔씩 나누며 나는 늦은 밤 남국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레오신부님은 하노이에서 오신 분과의 선약으로 자리를 옮기신 터라,
우리 일행 숙소로 돌아가는 귀가 길 차량봉사는 다정다감하신 정 갑식요셉 형제님께서 도와주셨다.
마침 최 경애 릴리안님 자택이 교육관 인근이었다.
두 분은 헤어짐이 아쉬워 우리를 자택으로 올라가서 잠시 더 머무르길 강력히 권고하였으나
밤 10시 이후 방문은 예의가 아니라며 점잖게 사양하신 수사님 덕분에 나는 바로 숙소에서 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넷째 날이 지나갔다.
=============================== 코타 키나발루 다섯째 날================================
오늘은 아침부터 모두 분주하다. 왜냐면?
8시까지 선착장으로 가야한다. 사피섬 들어가는 보트를 타야하기에,
사제관에 차량이 한 대뿐인지라 우리 최 신부님 교통정리 하시느라 바쁘시다.
학원 가야하는 김정남 보니파시오 신부님께는 오늘만 버스타고 가 달라고 부탁하셨다.
모시러 갈 차가 없으니 호텔에 머무르시는 후원자 가족에게는 전화해서 택시편으로
선착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신다. 난 속으로 화살기도 했다.
‘예수님 신부님에게 차 한 대만 보내주세요.
이왕이면 정글, 산악 다니시며 선교 사목하시는데 도움이 될
크라이슬러의 Jeep로 마련해 주세요!’하고,
내 기도는 응답률이 100%기에 이 지향도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나는 신부님을 알고 지내는 덕분에 백설줌마를 만났고 그 덕분에 우린 완전 VIP였다.
일반 관광객의 배 편이 아니라, 우린 직원 전용보트로 사피섬을 들어갔다.
박 스텔라님을 대신해 선착장 출발서 부터사피 섬을 나올 때까지 함께 동행하시며 최고의 친절을 베풀어 주신 자매님과
[sea walking을 마친 후 흠뻑젖은 T셔츠와 줄무늬 반바지는 고아원설립 기금마련 바자회 인기상품이었다]
아! ~~~~~~~~~~~~~~~~~~ 비취 빛깔의 저 맑은 바다. 또 가고파라. 머나 먼 남쪽바다!
씨 워킹[바닷속을 걸으며---]
씨 워킹 인증서
섬에서 일찍 나왔기에 오늘은 개인자유시간이 많았다. 후원자 가족과도 헤어졌다.
저녁 때 야시장 구경하기로하고, 우린 왔다갔다하면 신부님만 바쁘게 해 드릴 것 같아
그냥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신부님이 저녁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고하시며 내 손에 50링키트짜리 지폐를 쥐어주신다.
구경하다가 맛있는 것 있으면 사 먹으라고, 내 사양했지만 신부님 사랑의 고집을 평신도가 어찌 이기랴.
돈을 주머니에 넣고 수사님을 따라다니길 몇 시간인가?
하여튼 가밀로 수사님과 젊은이 박 베드로형제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쉼 없이 이곳 저곳 복잡한 시장터를 잘도 다니신다.
돌아다니다 나는 노점상에서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 메모꽂이 세 개를 10링키트에 샀다.
수사님 따라다니다 결국 지쳤다.
난 선착장바닷가에서 신부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한 6시 반까지 쉬고 있을테니
두 사람이 시장귀경 실컷하시다 오라고 배려? 했다.
솔직히 난 서울서도 쇼핑 따라다니며 우두커니 서 있는 거 질색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 외톨이를 자초해 자유를 누렸다.
난 그냥 혼자 놀았다. 셀카로 찰칵! 시장통을 답사하시는 수사님은 나의 이 호젓함을 아실까?
신부님이 후원자 가족을 태우고 오셨다.
우린 함께 뭉쳐 야시장의 정취와 남국의 밤 문화를 즐기며 놀았다.
이날은 숙소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한 후 신부님에게 편지를 썼다.
내일 밤 이곳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전해 드려야지 마음먹고,
이렇게 해서 다섯째 날이 지나 갔다.
야시장에서
================================ 코타 키나발루 여섯째 날================================
다음 날 이른 아침 코타키나발루산 관광을 위해
신부님께서 렌트한 봉고차가 가이더와 함께 호텔 들려 후원자가족 세 분을 태우고 교육관에 도착한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참 좋다.
산이 보이는 전망대 1.500M 지점에서 우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신부님말씀이 우리가 복이 많단다. 이렇게 한 번에 올라와 정상을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란다.
2000년 말레이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키나발루산 [해발 1.901M] 전경
가이더 다니엘이란 친구가 선심을 쓰듯 말한다.
현지인 운전기사가 이곳서 정상 쪽으로 더 올라가 준단다. 1.800M 지점까지.
우린 내려오며 점심을 먹고 온천을 들렸다.
마침 비가 이슬이슬, 가랑가랑하고 많지 않게 내렸다.
유황 온천이라 몸에 참 좋단다. 더구나 노천탕이라 더욱 운치가 느껴졌다.
우리 일행들 뜨거운 온천수에 발만 담그고 있다.
족욕만 하고 가기엔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깝지 않나?
주변에 현지인과 외국인도 있었지만 나는 겉옷을 벗고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팬티와 메리야스만 입은 채, 뜨겁지만 시원했다.
피부에 닿는 물결의 매끄러움이 즉시 느껴져 난 머리까지 온몸을 물속에 텀벙 잠수했었다.
정말 효능이 있나 보다.
지금까지 내 피부가 웬지 매끄럽고 부드럽다 했더니 그 유황온천수 덕분인 것이 분명하다.
다음엔 제대로 하고 와야지!
키나발루산 트레킹을 한 후에는 주변에 위치한 이곳 포링온천에서 피로를 푼다고한다.
아무도 없는 원두막에서 난 속옷을 벗어 널어 놓아 말리고있었다.
노천온천탕에 풍덩들어 갈 용기는
어쩜 군용메리야쓰와 짙은 색깔의 트렁크팬티 덕분일 것이다.
숙소로 귀환 길에 길가 토속상품점 에서 미니 쇼핑을 했다.
모두들 이것저것 샀는데 나는 구경만 했다.
나중에 레오신부님이 나에게 꿀 한 병을 주시며 이곳 원주민들이 키나발루 산에서 딴 꿀이니
소금창고 가셔서 막달레나랑 먹으라고 건네 주셨다. 이럴 때보면 친정아버지 같다. 신부님은!
교육관 도착 씻고 누워있는데 신부님께서 아예 짐 챙겨서 나가자 하신다.
7시에 약속이 있으니 그곳서 저녁 같이하고 공항 데려다 준다하셨다.
교육관을 나오면서 함께 간 베드로형제가 마트 들려가잔다. 아직도 쇼핑할 것이 있나보다.
가까운 슈퍼 들렸다. 역시 나는 아이쇼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살 것이 없다.
물건, 특히 먹 거리는 서울도 많은데,
그 때 레오신부님이 비닐쇼핑백에 무언가 한 봉다리를 사서주셨다.
이곳에선 커피가 유명하다며 역시 나는 거절할 기운이 없었다.
가서 딸들에게 여행 기념으로 주라는 신부님 사랑이 더 강했기에,
다음 이동하는 장소는 몬시뇰과의 저녁 약속이라기에
그곳에 가면 레오신부님과 석별의 정을 나눌 개인적 기회가 없으리란 예감이 스쳤다.
그래서 가는 차 중에서 운전하는 신부님 가방에 어젯밤 쓴 편지봉투를 미리 넣어드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시내의 큰 연회식당이었다.
그곳 성당의 몬시뇰 서품 32주년 기념 만찬장이었다. 참석인원이 천명도 넘는 것 같았다.
난 그 순간 상상 속에서 긍정의 법칙으로 기분을 누렸다.
몬시뇰께서 내가 오늘 조금 있으면 서울로 돌아갈 걸 아시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환송식을 마련해 주다니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곁에서는 디모테오 회장님이 새롭게 나오는 음식마다 설명해주시고 챙겨주셨다.
더구나 이 자리도 초대받은 누군가가 불참했기에
우리 세 사람이 참석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 축복 온통 누리고 지내는 정말 행복한 바보이다.
어제는 바닷 속 깊은 곳을 걷게 하시더니
오늘 낮에는 동남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을 구경시켜 주시고,
지금은 높은 분?의 서품기념일에 동참해 맛있는 음식 맛보며
흥겨운 음악을 듣고 있으니 나도 속에선 50번 성가가 콧노래로 나오누나.
‘야~~훼, 나의 목자, 아 ---쉬울 것 없노라!’
맞은편 형제를 확실히 기억하고 싶어 곁의 사목회장님에게 물었다.
본명이 어떻게 되냐고? 좌 덕수[안드레아]라고 하셨다.
본당 총무님이라 알려주었다. 맞다, 기억난다.
지난 주일미사 때 성가대에 우뚝 솟았던 코타키나발루산! 바로 그 형제였구나.
성가대 최후의 보루이자 총각이라던 좌안드레아 형제!
장가가서 아들 낳으면 수영이와 의정이로 지으면 자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벼슬길에 드는 셈이겠죠.
[좌수영=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진영, 例:전라좌수영 이 순신]
[좌의정=조선시대 정일품벼슬로서 영의정보다는 낮고, 우의정보다는 높은 벼슬]
안드레아형제는 kk한인성당의 미래입니다.
지금 열심히 사목회장님을 보좌해 봉사하시다 보면 나중엔 큰 일을 맡게되리라 믿습니다.
열띤 강좌가 열리다[강가밀로+좌안드레아]
바자회장에서 박 베드로형제와 대담중인 안드레아형제.
잔치는 길어지고 우린 공항을 향해 가야하고,
모두가 빠져나오면 원형테이블 모양의 분화구가 생겨 주최 측에 예의가 아닌지라
한 사람씩 작별의 인사를 안에서 나눈 후 개별적으로 밖으로 나왔다.
공항까지의 운전과 이동은 김 정남보니파시오 신부님이 봉사해 주셨다.
레오사제께서는 개척자 정신으로 밀림과 산악에 길을 닦아 놓이시고
귀공자풍의 보니파시오사제는 그 길 위에서 세례의 열매를 거두소서.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도착 체크인 후 기내에 오르니 자정이 넘었다.
이렇게 해서 엿새 날이 지났다.
기내에서 잠들기 전 코타키나발루에서의 일주일을 회상하니 참 좋았다.
이번에 내가 다녀온 코타키나발루는
보르네오 섬 북단에 위치한 동말레이시아였다.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있는 본토는 서말레이시아로 불린다.
참고로 이곳 보르네오는
하단의 인도네시아와 위로는 부루나이왕국이 공존하는
천혜의 땅으로서
아마죤과 더불어 지구의 허파라 부린다.
=======코타 키나발루 한인성당 신부님들과 교우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후안디에고형님. 봉사도 하시고 여행도 하시고 좋은분들도 많이 만나시고 .. 행복한 여정이었겠네요. 계속 건강하시기 바라고 이런 행복한 활동 주욱~~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