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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종 24년(1493) 6월 무진(6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일본의 범경(梵慶)과 야차랑(夜次郞)이란 자가 유구 국왕 상원(尙圓)의 신임장인 서계(書契)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기존의 조선왕조실록 번역문에 따르면 그 서계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구 국왕 상원은 조선 국왕 전하께 엎드려 아룁니다. 삼가 우리 작은 부용(附傭)의 나라를 큰 섬이라고 여겼었는데, 근래에 일본의 갑병(甲兵)이 와서 빼앗고자 하므로, 이로 인하여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싸움할 때마다 이긴 것이 십중팔구여서 천리(千里)에서 적의 예봉(銳鋒)을 꺾었습니다.
이 번역문을 읽으면, 유구 국왕이 자신의 나라를 조선에 대해 ‘작은 부용의 나라’로 자처하되, 일본에 대해서는 ‘큰 섬’이라고 자부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15세기 말의 조선은 유구를 외교적으로 지배한 강국이었던 셈이니, 이 기사는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북돋워 줄만하다. 이 기사를 근거로, 저 1609년에 일본 사쓰마 번이 수리(首里) 성을 함락시키고 유구의 아마미(奄美) 제도를 할양받은 사실에 대해 그 부당함을 항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성종실록』의 원문을 되읽는 순간에 무참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태백산사고본의 원문은 이러하다.
琉球國王尙圓拜覆朝鮮國王殿下(유구국왕상원배복조선국왕전하) 宓以吾陋邦(복이오누방) 附傭曰大島(부용왈대도) 近來日本甲兵來欲奪之(근래일본갑병래욕탈지), 由是戰死者甚多(유시전사자심다). 雖然每戰勝之者十八九(수연매전승지자십팔구), 折衝於千里(절충어천리)
우선 배복(拜覆)은 문후(問候)할 때의 상투어이거나 답장할 때의 상투어이므로 ‘엎드려 아룁니다’라고 극히 겸양해서 말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복(宓)은 밀(密)이나 복(伏)과 통하는 글자인데, 복이(伏以)는 신하가 군주에게 공경의 말을 꺼낼 때 쓰는 말이므로 배복(拜覆)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문제는 그 다음의 ‘以吾陋邦, 附傭曰大島’라는 구절이다. 곧 번역본에서 “우리 작은 부용(附傭)의 나라를 큰 섬이라고 여겼었는데”라고 풀이한 부분이다. ‘여겼었는데’라면 ‘曰’의 글자는 ‘爲’이어야 한다. 曰은 직접인용의 어구를 가져오거나, 고유명사 혹은 강조어를 제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2. 2010년 9월 9일, 오키나와의 아마미 섬을 방문하게 되면서 오랜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그날 밤 아마미 나세(名瀨)시의 호텔 방에서, 어째서 우리 학계는 이 오류를 25년 동안이나 방치했던가 생각하면서 가슴을 앓았다. 대도(大島)란 유구의 오랜 부용이었던 아마미를 가리킨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아마미를 아마미 오시마라고도 하고 그냥 오시마라고도 한다. 유구는 현이므로 섬이라 하지 않으며, 현재 일본 주권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 가장 큰 섬이 오시마, 곧 아마미인 것이다.
문제의 단락은 오누방(吾陋邦)과 부용(附傭)의 사이에 쉼표를 두지 말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삼가 우리나라의 부용인 대도는 근래 일본의 갑병이 와서 빼앗고자 하므로, 이로 인하여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아마미를 대도라고 일컬은 유래가 오래라는 사실은 1471년(성종 2)에 신숙주가 엮은 『해동제국기』의 ‘유구국지도(琉球國之島)’에서 알 수가 있다. 『해동제국기』는 아마미를 ‘대도’라 적고, ‘에라부[惠羅武]로부터 145리, 유구에 속한다’라고 밝혀두었다.
아마미 오시마가 유구에 입공한 것은 1266년이라고 한다. 이것은 유구의 정사(正史)인 『구양(球陽)』에 나온다. 한편 사쓰마는 1609년에 이르러 수리 성을 함락하기 이전에 그 병참기지가 될 수 있는 아마미를 거듭 침공해서 유구와 영유권을 다투었다. 아마미에는 사쓰마 선단이 접안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곡이 여러 곳에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마쿠라 시대의 군담소설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서 몰락한 헤이케의 후예가 아마미에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이야기가 섬 곳곳에 편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전설은 문헌 사실보다 더 진실성을 전해주기도 하므로, 이른바 귀종(貴種)이 유리(遊離)하여 섬으로 들어왔다는 전설이 편재한다는 사실은 외부의 침투 사실을 전하는 구비(口碑)의 자료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구는 아마미 오시마를 지배하는 방법으로 민속신앙인 노로 제사를 이용했다. 곧, 제7 상녕(尙寧) 왕은 신녀 조직의 노로를 신역(神役)으로 임명하는 사령장을 지급했다. 현재 우겐손(宇檢村) 자료관에는 1594년의 사령장이 보관되어 있다. 수리지인(首里之印)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으며, 명나라 연호인 만력을 사용해서 발급 날짜를 기록했다. 크기는 가로 40cm 세로 30cm 정도여서 크지 않지만, 이 문서야말로 유구의 아마미 지배 방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게다가 유구의 왕조가 당시 중국에 조공을 하며 만력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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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4년 유구 국왕이 아마미 오시마의 노로에게 내린 사령장
(우겐손 자료관 소장 귀중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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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은 일본의 사쓰마 번이나 이후의 메이지 정부도 노로 제사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민속신앙을 온존시켜 지역주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면서 지역지배를 관철해왔던 것이다. 2010년의 9월 13일(월요일)은 바로 경노의 날이었는데, 이날 아키나(秋名)에서는 새벽의 쇼쵸가마 제사와 저녁의 히라세만카이 제사가 거행되었다. 이 두 제사는 모두 풍년굿이자 풍어굿을 겸한 것이니, 우리 민속과 유사한 점이 꽤 많은 듯했다. 지금은 아마미 뿐 아니라 그 부속 섬인 가케로마지마(加計呂麻島)에서도 노로 제사를 지내는데, 지역자치회는 이날 아동들의 스모 경기나 지역주민의 춤판을 벌여 흥을 돋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마미나 유구의 주민들은 일본에의 예속을 긍정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해왔다. 하지만 메이지(明治) 이후로는 지역주민들 사이에 본토보다도 더 황국신민으로서 인정받아야 하겠다는 의식이 대두되었다.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가 『해상의 길(海上の道)』을 집필하여 일본의 조상이 쌀농사 짓는 남방 민족이 해류를 타고 이동해 왔다고 주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교토대학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인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는 1911년의 오키나와 조사 때 오키나와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가 충군애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일도 있다.
3. 1493년 6월 6일, 범경과 야차랑이 유구 국왕의 신임장이라는 것을 들고 왔을 때, 조선 조정은 그 대처 방안을 상당히 오래 숙의했다. 결국 좌승지 김응기와 도승지 조위의 견해를 따라, 인신(印信)이나 서계가 종전의 양식과 다르므로 그 두 사람을 통신 사절로 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은 범경 등이 지참한 서계를 보면, 그들은 유구에서 큰 불사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황금·동철·목향·주홍 등을 구매해 막대한 차익을 보려고 꾀한 듯하다. 배후에는 쓰시마 도주(島主)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493년 당시에 유구의 국왕은 상원이 아니라 그 아들 상진(尙眞)이었다. 제2 상씨 왕조의 개조(開祖)인 상원이 1476년에 죽자, 신하들은 세자 상진이 어리다는 이유로 상원의 아우 상선위(尙宣威)를 제2대 왕으로 삼았다. 하지만 상선위는 즉위 후 곧 상원의 왕비 오기야카의 책략으로 퇴위당하고 1477년에 12살의 상진이 제3대 왕에 올랐다. 상진은 1526년에 죽기까지 상업을 일으켜 유구를 대단히 번성하게 만들었다. 김응기와 조위, 그리고 예조의 관료들은 상원과 상진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는 해도 범경 등이 가져온 서계를 위조로 판단한 것은 정말 옳았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9월 9일부터 14일까지 전문가(타카하시 이치로 씨)의 도움으로 아마미 일대와 『해동제국기』에서 ‘귀계도(鬼界島)’로 표기한 기카이시마(喜界島)를 돌아보면서, 유구와 아마미, 쓰시마와 사쓰마, 중국과 조선 등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공부할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로 『해동제국기』는 유구 제도의 지도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작성한 귀중하고도 위대한 문헌이다. 당시에는 ‘『해동제국기』의 세계’라는 말이 성립할 정도로, 조선 조정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유구 일대를 포함하는 광활하고 웅대한 지역을 시야에 넣고 있었다. 그렇거늘 현대의 우리는 그와 같은 광대한 천하관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또 조선왕조실록이 어떤 문헌인데 번역문의 오류를 그대로 방치한단 말인가.
참고로, 북한의 『이조실록』 번역본은 앞서 든 성종 24년 6월 무진의 실록 원문을 제대로 번역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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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주요저서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일지사, 1999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3 증보역주 지천선생집, 선비, 2007 내면기행, 이가서, 2009 서포만필, 문학동네, 2010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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