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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몬드리안의 집안은 엄격한 칼빈주의였습니다.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에 대한 부담감과 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힘든 갈등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한 몬드리안은 잠시 미술교사로도 활동하였고,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성직에 나갈 생각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화가의 길을 선택하였고, 심지어 멀고 먼 한국이라는 나라의 한 은행 (한미은행) 로고에까지 사용되는 유명한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몬드리안의 초기작들은 나무와 교회 건물 등과 같은 풍경화로서, 인상주의에서 보여지는 자연주의 화풍이었습니다. 그 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야수파의 마티스, 입체파의 피카소 등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추상파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모든 자연의 외형에서 벗어나 색채와 선만으로 표현되는 절대적 순수미 였습니다. 몬드리안의 작품 스타일을 보게 되면 처음에는 나무와 같은 사물에서 시작된 형상들이 단계적으로 변형되어가며 추상작업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에는 사물의 형태가 사라지고 어떤 의미인지 파악조차 어려운 수직과 수평의 선들만이 남게 되죠. 그 사이를 절대적 색채들이 메꾸게 되는 것이구요. 순수한 선과 색의 결합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한 그의 예술관이 엿보입니다.
사실 그의 그림을 보면 무슨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추상그림들 중에서 가장 감정이 결여되어 보이기도 하고 그림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몬드리안의 수직선은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에 향한 인간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수평선은 모든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포용을 의미하죠. 이러한 그의 기하학적 추상은 무한한 우주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자연의 외형을 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 그림 속의 수평과 수직선들은 어느 것에도 제약 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표현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형식의 타파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어느 정도 쉽게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20세기 초였으며 민주주의 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몬드리안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엄격한 규율 속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미술계를 이끌어 가던 많은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파격 그 자체 였죠. 몬드리안 말년에는 1,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을 거치면서도 참혹한 인간사나 사회상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구성만을 추구하는 신조형주의 일명 데슈틸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캔버스 라는 공간 안에서 수평과 수직의 선들로만 독립된 구성체를 만들어 나가고, 그 안에서 색채와의 관계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데슈틸 운동은 건축, 디자인 등 여러 응용예술 분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 |
[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1912) ]
몬드리안의 초기 작품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입체주의자들의 전시회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잔과 입체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그는 순수구성의 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서서히 형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 꽃핀 사과나무 (1912) ]
유명한 사과나무의 해체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나무와 같이 그리다가 점차로 수평선과 수직선만이 남게 발전되어가는 과정 중 중간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보라색과 연한 하늘색의 화사함이 사과나무에 핀 꽃을 보며 느끼는 화사함으로 전달됩니다.
타원형 속의 색면들 (1914) ]
몬드리안이 파리에 머물면서 추상화로의 발전을 위한 여러 습작 중 하나입니다. 풍경과 나무, 건물, 사람들을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색채의 선택도 아직은 분명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직관과 감각을 통한 추상화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 (1914) ]
몬드리안 초기의 작품으로 바다의 수평선 이미지를 보다 잘 나타내기 위해 수직선은 짧게 하고 수평선을 길게 표현하였습니다. 순수한 조형적 세계의 항해를 시작하는 시기의 조심스러운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색에 의한 구성 A (1917) ]
점차로 사물의 형태를 부정하기 시작하는 몬드리안의 예술작업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질서를 방해할 지도 모른다는 실재의 형태를 없애기 시작한 것이죠. 불규칙적인 사각형의 나열은 자연을 초월한 보편적 질서의 확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자화상 (1918) ]
몬드리안의 작품들 중 흔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엄격한 칼빈주의자 였던 그의 청빈하고 고독한 삶이 어둡고 칙칙한 색과 반쯤 뒤돌아 선 인물의 자세로 표현되어 지고 있습니다. 굳게 입을 다문 그림 속 인물의 인상이 삶과 예술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 (1920) ]
우리나라의 한미은행 로고로 사용되고 있으며 초등학교 미술책에도 나와있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본 구성작품입니다. 인간의 해방은 탈 자연, 탈 형태에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몬드리안의 작품관이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순수 직관에서 출발하여 순수 관계로 인한 균형만이 가장 완전한 것이며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 그의 사고관 이였습니다.
[ 적색과 황색 및 청색의 구성 (1921) ]
모든 자연의 외형을 버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이 작가의 창조력에 의해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고 주장한 몬드리안은 단순한 선과 면 그리고 색으로만 이루어지는 순수 구성을 추구하였습니다.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말이죠. 작품을 보세요....자연이 느껴지십니까?
구성 X (1940) ]
색채보다는 선을 중심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몬드리안은 색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적,황,청색과 수직, 수평선 만을 이용하여 추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어느 것에도 제약받지 않고 싶어하는 자연에 대한 보편적인 마음을 선에 담아 표현하였습니다.
[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3) ]
몬드리안의 작품 중에서 매우 유명한 것으로서 뉴욕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보편과 균형의 심오한 작가 정신을 보여주는 이 작품 속의 화려한 색채와 차가운 기하학적 선이 새로운 시대 정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색채의 변화를 즐기다 보면 그 안에서 흥겨운 리듬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명은 피터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며, 1872년 암스테르담 부근의 아멜스포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정통적 '칼빈파'였다. 태어날 때부터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서의 성장이 몬드리안 예술을 결정지은 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숙부인 푸리츠 몬드리안에게서 그림의 초보를 배운 뒤 1892년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회화에 매혹되었던 그는 처음에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풍경과 정물을 그렸으나 1908년 마티스에 감명을 받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순수색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dis 프로푸와 알게되어 1909년에는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1910년 파리로 나와 들로네, 레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큐비즘으로 전향하여 대상의 추상화를 지향함으로 비구상적 경향의 연작(나무)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대상을 그 기본형태에까지 환원하려는 의욕이 현저하게 엿보이고 있다. 1914년 아버지의 병으로 귀국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면서 1917년에는 반 되스부르크, 반 데르 레크 등과 함께 '데슈틸' 그룹을 결성하였다.
1918년 재차 파리로 나와 1920년 신(新)조형주의를 창시하여 순수추상을 지향하는 유력한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따라서 1914년-1919년 동안 몬드리안의 추상적 세계로의 진입기라고 여기서 신 조형주의는 점차 화면에 수직선, 수평선만 남겨 이들을 가지고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만으로 팽팽하게 칠해진 화면을 분할토록 하는 것이다. 즉 명백함과 표현수단 사용의 엄격한 절제라는 원칙에 지배되는 사조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더불어 기하학적 추상의 원류를 이룬다. 이처럼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한층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1925년 이념적 갈등으로 데슈틸을 떠난 몬드리안은 독자적인 신 조형주의 이념 체제를 구현해 나갔다. 1931년에는 파리에서 국제적인 추상미술의 결집인 추상창조에 가담했다. 1938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벤 니콜슨과 그의 부인 바바라 헤프위스와 나움가보, 레슬리, 마르틴과 합류하여 영국에서 추상미술의 전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독일 나치군의 폭격이 격화되자 1940년 10월 3일 안정된 곳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왔다.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뉴욕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때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빅토리 부기우기를 제작하였는데 마지막 작품이었던 이 그림에선 검은색의 직각망 조직은 사라지고 빨강, 노랑, 파란색의 수많이 채색된 작은 정사각형이 그 자리를 대신 하였다.
1940-1944년, 작고하기까지 몬드리안 세계는 분명 20-30년대의 단순하고도 엄격한 기하학적 포름의 연장은 아니었다. 수평, 수직, 삼원색, 삼비색이란 기본적 조형요소를 간직하면서도 더욱 복잡하고 더욱 경쾌한 리듬과 구조의 풍부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엄격하고 무거운 구성과 절제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감성과 생애 즐거움을 표현했다.
특히 빅토리 부기우기 작품은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하는 염원으로, 제작의도는 확실히 이전의 제작태도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합군의 승리를 보지 못한 채 1944년 2월 1일 72세의 나이로 머레이힐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몬드리안은 자연주의 화풍이 철저했으며, 쓸쓸한 겨울 풍경과 정물 등을 그렸는데 특히 뭉크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면서도 어딘지 병적이었다. 그 후 신비주의 화가 얀 투로프를 알게되어, 나무의 연작을 권유받아 차차 추상으로 바뀌었다. 칸딘스키의 우발적인 비대상의 추상에 비교하면, 그는 나무면 나무, 모래언덕이면 모래언덕의 핵의 추상으로 탄생한다.
1917년 데 슈틸 운동을 일으켰으며, 끝내는 수평과 수직의 순수추상으로 향하였다. 이는 질서와 비율과 균형의 미이며, 그 자신도 평생토록 고독과 청빈에 만족하며, 종교적이고 엄격한 경지를 지냈다. 몬드리안은 가장 단순한 요소인 직선과 원색으로 그림을 만들어내고자 했고, 우주의 객관적인 법칙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명료하고 절도 있는 회화를 열망하였다.
첫댓글 몬드리안이야 말로 구성 작가이지요. 선으로 구분하고 그 사이를 채웠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1920)"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좋은 자료를 올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자화상이 아주 일품이네요. 본인의 인상을 강열하게 잘 표현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