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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을 나서지 않고 천하를 안다고 했지만 러너는 문밖을 나가 주로에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대면한다. 나를 만나고, 그 내가 다시 세상을 대면하는 달리기의 현장. 오늘은 시즌마감 42.195다. 2주전 달린 ytn손기정마라톤과 같은 코스다. 2주 간격으로 풀코스에 참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마의 참담했던 실험(게시판 글, 중마복기-자기기만의 메커니즘)으로 인한 내상을 치료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좌표를 확인하고, 다시 담금질을 하려는 것이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중마는 쓴 약이다.
2주전처럼 오늘도 철저히 보수적인 페이스운영을 다짐하며 길을 나선다. 라디오에선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흘러나온다. 그래, 달리는 것도 즉흥곡처럼 평온한 것이다. 달리기에만 집중한다면 옆에서 포탄이 터져고 피가 튀어도 한걸음 한걸음 저 피안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이 달리기가 아닌가? 오늘 그렇게 달려보자. 골인 지점엔 언제나처럼 스콧 주렉이 코트를 걸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0km 울트라마라톤을 우승하고 나서 골인지점에 외투를 걸친 채 마지막 주자가 들어올 때 까지 서서 응원을 했다는 불굴의 정신, 마라톤이란 그런 것이니까. 마라톤이란 온갖 잡스런 것들을 한순간에 살라버리는 죽비 같은, 불립문자의 메타포니까.
옷을 갈아입는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해서 좋다. 서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서늘함이 좋다. 간편하게 차리고 나서는 이 느낌이 좋다. 맨몸으로 바람을 가르고 나갈 42km의 출발선에 선 이 순간이 좋다. 대회장은 어수선하지만 마음만은 담담하다. 곧 만나게 될 나, 던져진 나, 내가 만나게 될 수많은 나를 기다리며 담담할 뿐이다. 담백하게 보리라. 슬퍼하지도 환호하지도 않으리라. 나니까. 출발한다. 사람들이 밀려나간다. 그 가운데 한 사내가 끼어 있다. 출발이다.
0-5km 대칭
아름다움은 곧 진리라는 대칭적 세계관으로 보면 달리기의 출발과 완성도 자세로 귀결된다. 도구를 사용하는 비대칭운동에 비해 달리기와 같은 대칭운동의 자세는 비교적 간명한 편에 속하지만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과학은 아직 어떻게 착지해야하는지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느낌에 맡길 뿐이다.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오늘 초반 페이스를 잡는 건 시계가 아니라 자세다. 아주 가벼운 느낌을 주는 자세를 찾는 것이다. 허리를 곧추세워도 보고, 몸을 띄우듯 사뿐사뿐하게 뛰어보기도 한다. 팔을 올려도 보고 내려도 본다. 시선을 내려도 보고 올려도 본다. 그렇게 자세를 잡아가며 달리다보니 한강주로로 나왔다. 구비치는 물결처럼 러너들의 줄기가 상류로 길게 뻗어있다. 한강은 넓고 고요한데 러너들의 줄기는 시냇물처럼 꼬물거리며 가늘고 길게 펼쳐진다.
자세가 어색하다. 가벼운 느낌이 드는 자세를 찾으려고 하지만 느낌이 오지 않는다. 몸이 무거운 것인가? 몸이 데워지지 않은 탓인가? 순간, 그냥 뛰면 되는데, 뭔 자세를 찾겠다고 이 법석을 떠나 싶었다. 본투런 아닌가. 호모러너스 아닌가. 가장 본능적인 행위를 하며 이것저것 계산하며 따져야 할 만큼 순치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야생의 삶을 동경하며 야성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했던 지난날들의 ‘나의 투쟁’이 고작 이븐페이스 따위를 염려하고, 완주시간에 연연하여 팔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따위의 자세나 잡고 앉았으니. 찌찔한 사내여! 차라리 그 목을 자르고, 형천처럼 젖꼭지를 눈으로 삼고, 배꼽을 입으로 삼아 달려라. 달리고 달려 바다에 이르거든 그 물을 다 들이켜라!
그래도 따질 건 따진다. 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므로. 마라톤은 멘탈게임이 아니니까. 앞서 달리는 러너들의 자세도 제각각이다.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기운 채 달리는 사람, 오른쪽 팔을 유난히 크게 흔드는 사람, 좌에서 우로 팔을 흔드는 사람....대칭적인 자세는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세를 비대칭으로 만드는 것은 몸의 비대칭 때문일 것이다. 좌우 장기의 배치도 다르고, 뇌의 기능도 다르다. 순환과 신경의 배선이 좌우 다르니 좌우 사지의 크기도 약간씩 차이가 난다. 난 왼쪽발이 약간 더 크다. 그리고 살아오며 습속화된 행동양식들로 인해 좌우 손발을 쓰는 강도와 방식의 차이는 더 커졌다. 그렇다, 어쩌면 비대칭이 물질의 존재양식인지 모른다. 부상도 왼쪽 다리에서 시작하고, 그 부담이 오른쪽으로 옮겨가곤 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시 왼쪽으로. 그 순환이 비대칭의 균형을 유지해주는지 모른다. 하지만 좌우는 서로를 믿는다. 서로를 믿고 한쪽 발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교대한다는 것, 시간적으로 보면 그 행위만큼은 철저히 대칭적이다. 그렇다. 나는 거리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달리고 있다.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좌우 다리가 교대한다는 것은 현재적이고 대칭은 완성형이다.
바람이 좋다. 하나 둘, 거리표지판이 지나간다. 한 무리의 러너들이 앞서 달리고 있다. 4분 30-40초/km, 산수주륜팀이다. 해맑은 얼굴의 그녀를 둘러싸고 십여명이 달린다. 그녀의 호위무사처럼 달린다. 그녀가 거느리고 달린다. 지난해 잠시 남산 밑에 거처를 두었을 때 남산주로에서 자주 스쳤던 낯익은 러너들이다. 그래, 저 맛이다. 패를 지어 달리는 저 맛, 나도 언젠간 페메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 무리를 놓치지 말고 달려보자. 나보단 다들 잘 달리는 사람들이니 꼬리나 놓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들과 10여미터 거리를 유지하고 달린다. 뒤에서 따라 달리니 마치 후퇴를 용서하지 않는 독전사령관 같다. 뒤처지지 마라! 페이스를 남에게 의지하여 걱정을 던다.
5-20km 만남
주로에서 자주 만나는 러너들의 이미지는 언제나 뒷모습이다. 뒷모습은 익숙하지만 얼굴은 낯설다. 골인후 가끔씩 얼굴을 스쳐 지나칠 때 느끼는 낯선 느낌, 곤혹스러움은 기나긴 시간 달리며 봐온 뒷모습만으로 얼마나 강하게 그/그녀의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다. 뒷모습만으로 그/그녀는 어떤 사람일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추정하고 단정해, 마침표를 찍어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다른 러너들은 뒷모습만 존재하는 평면적인 존재다. 정면을 응시하도록 설계된 우리 눈을 모든 입체를 평면화한다.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평면을 입체로 추정, 상상하여 보이지 않는 부분을 완성하고 있지만, 경험이란 주관적일 뿐이다. 내가 지금 뒤따라 달리고 있는 무리의 러너들도 내겐 뒷모습으로 존재한다. 남산주로처럼 맞은편으로 달리며 잠깐이나마 얼굴을 마주쳐야하는 순간들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앞과 뒤가 내겐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얼굴을 마주봐도 되는가? 눈을 마주쳐도 되는가? 주먹이 날아오는 건 아닌가? 그만큼 얼굴은 생경하고, 내게 러너는 항상 내 앞을 달리는 뒷모습의 존재다.
러너들이 평면인 것처럼 전방의 풍경도 평면이다. 정물화고 풍경화다. 하지만 눈을 약간만 옆으로 돌리면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풍경화가 동영상으로 바뀐다. 타인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동영상이 아니라 내 초점에 따라 변하는 동영상이다. 그 동영상은 세상을 평면에서 입체로 변하게 한다. 초점에 어디에 맞춰지는가가 중요하다. 초점내 반경의 물체는 빠르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이내 뒤로 밀려나는 반면, 초점외의 물체는 오히려 멀어지게 보인다. 내가 달려가고 있으니 전방의 물체가 다가와야하지만 시각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초점내의 물체는 다가오고 초점밖의 물체는 멀어진다. 그것이 달리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인식론적 진실이다. 물리적세계와 모순하지만.
나는 그 모순을 즐기기 위해 초점을 30m쯤으로 맞추고 달리고 있다. 그 정도 거리가 가장 속도감을 느끼기에 좋고, 나와 초점사이의 회전운동이 빚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달리고 있는 지금, 시속 13km의 속도가 얼마나 현기증나게 빠른 속도인가 절감한다. 5초에 한번씩은 초점을 바꿔야할 만큼. 그래서 내가 꾸준히 달려보았던 최대속도, 시속 14km이상은 실상 뇌의 인식체계에서는 무의하다고 생각한다. 13km만으로도 충분히 현기증날만큼 사물의 변화는 빠르고, 그 변화의 대부분은 놓치니 말이다. 현생인류의 몸은 여전히 석기시대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다는 학자들의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의 감각, 인식체계는 여전히 달리기가 가장 빠른 이동수단인 원시인이다.
나는 어디쯤 초점을 맞추고 살아오고 있는가? 초점의 지점에 따라 물리적으로 명백한 현상도 다르게 인식되는 것처럼, 세상살이도 그러할진대 나의 초점은 어디쯤일까? 나의 세상은 20명인가, 100명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공동체’ 거기까지 뻗어있는가?
구간마라톤이 동시에 진행중이다. 나는 달리며 구간마라톤을 관전하고 있다. 완전히 다른 페이스, 구간마라톤 참가자는 날 추월하고, 또 추월당하기를 반복한다. 전혀 다른 게임을 하고 있으니 난 관전자가 되어 응원한다. 또 관전자들이 몰려있는 곳, 교대지점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응원을 받는다. 나의 2분의 1이 속한 클럽 사람들이다. 그 인연으로 대회에서 인사를 나누고, 국밥도 얻어먹곤 하는데 오늘은 응원까지. 그러고 보면 사회부적응자를 자처하며 외톨이처럼 살아가는 나의 세상도 넓다. 초점거리는 더 멀다. 그들에게 의지하며,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달리며 스치는 모든 이들이, 모든 것들이 나를 있게 한다.
20-30km 그냥 달린다
무리는 출발지인 잠실운동장을 지나 양재천으로 접어들었다. 속도의 변화도 없다. 하프지점을 지나며 난 무리에 합류했다. 이탈자들이 하나둘 생기며 무리의 수가 줄면서 말석을 차지하고 올라온 것이다. 몸의 반응은 평온하다. 아니 평화롭다. 시속 13km로 달리며 마치 가볍게 물수제비뜨듯 사뿐사뿐 날아가는 느낌이다. 좋다. 한바탕 바람이 분다. 초겨울, 나뭇잎 하나가 가지에서 이탈해 바람을 타고 있다. 조용하다. 이렇게 고요할 수 있는가. 이건 꿈일 터. 꿈이 아니라면 피안의 세계다. 열반이다. 몰아일체다. 나뭇잎은 바람을 타고, 물은 흘러내린다. 정적을 가르는 발소리, 한 무리의 러너들이 물을 거슬러 포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호흡과 발소리만 정적을 가른다. 러너들이 지나간 자리엔 다시 적막이 깃들겠지.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그렇게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양재천길, 내가 처음으로 달렸던 길이다. 5년전이다. 나와 2분의 1의 유전자를 공유한 그로부터 달리라는 명을 받고 양재러너스클럽에서 런닝화를 선물받아 처음으로 달렸던 길이다. 2km를 채 달리지 못했다. 그가 중마 다음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던 시월의 어느날 또 다른 2분의1 앞에서 나는 투덜거렸다. “난 있으나마나한 쭉정이 같은 존잰데, 그냥 가버려도 그만인데.”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뭔 소리? 갈 때 가더라도 서브3는 하고 가야지.” 그래, 서브3는 한번 하고 가자. 그때 그렇게 맘먹었다. 그리고 중마에서 처절하게 깨지고 두어 시간 후 그로부터 잘 뛰었냐고 묻는 문자가 왔다. 힘들었다는 내 대답에 “인생에 도움이 안되더라. 달리기 그만해라.” 그것이 그와 주고받은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가 살았던 아파트가 보이고, 5년전 그와 함께 달렸던 5년전의 양재천이 겹쳐져 밀려온다. 얼마나 달려야 과거로 갈 수 있나. 달리기가 시간을 달리는 것이라면. 어느 속도로 달려야 5년전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한 달전으로, 불과 한 달 전으로. 시간의 절대성, 그 선을 타고 달리고 싶다.
선물 받은 운동화로부터 우연히 시작한 달리기였다. 건강도, 살을 빼야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그저 달렸다. 달리기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무엇이 무엇인지 찾아내 밝혀볼 요량으로. 달리기를 수단화하지 않았다. 그러니 달리기가 인생에 도움이 되고 안되고는 나와 관계없다.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가 삶과 같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달리기도 곧 삶이다. 삶이 주어진 것처럼 달리기도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내게 주어진 것일 뿐, 유불리를 따질 생각이 없다. 그래서 난 또 달리고 있다. 난 운명을 개척해 나갈만큼 잘난 놈이 못된다.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살뿐. 운명이다!
2차반환점을 돈다. 30km가 넘어서며 무리에서 하나둘 이탈자가 생겨나고 있다. 이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몸은 여전히 가볍다.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급수대에서 바나나를 하나 집어들었다. 배고픈 느낌은 없지만 먹어두자, 싶었다. 아직 갈 길이 머니까.
30-42.195km 고통과 쾌락
컨디션은 좋다. 남은 12km가 가깝게 느껴진다. 한번 발동을 걸면 골인지점이 나올 것만 같다. 무리의 페이스가 약간씩 늦어지고 있다. 이탈자도 늘고 있다. 몸이 자꾸 앞으로 나가려고 한다. 그걸 제어하고 있다. 치고 나갔다가 다시 추월을 당하면 또 만용을 부렸구나 하는 자책으로 멘탈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인사라도 하고 헤어질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32km지점을 지나고 있다. 그래, 내가 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추월당하는 것을 창피해할 일도 없고, 자책할 일도 없다. 최선을, 죽어라고 달리자고 나선 길이 아니던가. 미련 없이 내 모든 걸 짜내서 주로에 뿌리자고 뛰어든 길이 아니던가? 가자, 가자, 본능대로 가는 거다. 무리와 이별이다. 이제 내가 저들의 좌표가 되는거다. 이젠 달리는거다. 힘껏, 숨이 턱에 차도록 밀어부치는거다. 두려워할 것은 탈진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질까를 두려워하는 비겁함이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했던 말 “나는 인생을 깊이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다. 강인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삶의 비천함이나 숭고한 모습을 낱낱이 보고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 느낌 그대로 구석으로 나를 밀어붙이는 것이다. 기껏해야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이다. 고통의 시간은 예정돼 있고 그 끝은 평온하다. 끝을 모르는 삶도 밀어붙이고 살았는데 한 시간쯤이야 싶었다. 고통이 밀려온다. 호흡은 거칠어진다. 몸 깊은 곳 여기저기 신경망에서 스파크가 인다. 쾌락이다. 고통과 쾌락은 그렇게 함께 손을 내밀며 내게 다가왔다. 아니 내가 그 지점으로 달려갔다. 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내려다보면 참 느리게 달리고 있구나 싶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느낌은 화살처럼 빠르다. 나는 그 느낌을 즐기며 양재천을 빠져나와 다시 한강으로 접어든다. 피날레다. 피날레는 비유컨대 차이코프스키 5번이 될 수도 있고 6번이 될 수도 있다. 오늘은 5번이다. 그것도 증기기관차가 질주하는 속도라는 므라빈스키의 연주로 말이다. 휘몰아친다. 왜 내가 그렇게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밀어부치며 보조경기장 트랙으로 들어왔다. 단지 그 느낌 때문에. 사회부적응자건, 있으나마나한 쭉정이 같은 존재건, 달리는 순간만은 내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조금도. 달리고 있는 한 실패로 점철된 내 지난 시간들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는다. 달리는 한 난 결코 인생의 실패자가 아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것에서의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달릴 수만 있다면. 트랙으로 들어오니 트랙의 탄력에 몸이 더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트랙을 둘러싼 인파들의 시선도 황홀하다. 트랙을 돌며 맞는 바람에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 벗겨져 나가는 느낌이다. 내가 지나온 길에는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허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까? 아! 골인이다.
첫댓글 인간 승리


그 끝에 열매는
느낌은 오래도록 자양분으로 남아 에너지가 되어주니
그 또한 행복
거의 작가수준의 감동적인 참가후기 잘 읽었습니다.
부산 갔다 올라오는길에 ktx안에서 읽으며
달리면서 즐겁고 고통스럽기도 하였던 기억이
나면서 울먹이게 되네요
사무장님 멋진 형님이 계셔서 좋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즐런하시길 함께 응원합니다
철학적인 문장들이 많아 혼란스러웠지만 무지하게 좋은 내용입니다.
풀코스 한번 도전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