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데사의 계단
송명화
거대한 설치작품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계단이었다. 차곡차곡 쌓인 계단 곳곳에 쓰레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에 이끌려 구석구석 살피는데 작가의 의도 가까이 가기가 쉽지 않다. 이 너저분한 조형물이 전시작품이란 말이지. 비엔날레의 마지막 날, 가까스로 찾은 전시실에서 아침부터 서둘렀던 황망한 내 일정만큼이나 당황스러워한다. 내 감식안의 흐림을 탓하고 섰다가 안경을 닦고 다시금 감각의 현미경을 들이댄다.
계단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은 청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일까. 명상테이프들은 가장 낮은 층에서 버림받았구나. 쫓기는 심정으로 명상의 느긋함을 즐기지는 못하리라. 그 위층에는 놀이의 도구로 쓰이던 골프공들이 지금은 무기의 얼굴을 한 채 구겨진 채 처박힌 융단 위에 군림하고 있다. 뜯겨진 창문이 누운 위층을 본다. 벽에 보관된 권총이 소리 없이 염탐을 한다. 두세 개의 층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올라선 이동식 카트에는 대포알이 실린 채 지금이라도 굴러 내려올 차비를 하고 있다. 저 무서운 것이 수레에 실린 채 계단을 굴러 내려오면 어떻게 될까. 청소를 한다면 이틀은 해야 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비엔날레 작품이니 유심히 살핀다.
어디서 보았더라. 영화 <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이 신경을 훑어내린다. 계단에서 수레가 굴러 내려오는 장면이라면 이 계단은 <오데사의 계단>이라 이름 붙여도 될 법하다. 흑해에 위치한 오데사 항구의 노동자들이 짜르의 폭압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진압을 명령받은 해병들조차 노동자들에 동조하여 전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짜르의 군대가 진격하여 수천 명의 사람을 학살한다.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된 이 사건이 오늘 이곳에서 새로운 옷을 입은 까닭은 무엇일까.
아기가 탄 유모차가 까마득한 계단을 굴러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형벌에 가까운 일이다. 그것도 살육의 현장에서 널브러진 시체들 가운데로…….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구르다니. 관객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리라. 흑백영화의 이 가공할 장면은 오늘날까지 온갖 패러디의 대상으로 쓰이고 있다. 바퀴는 얼마나 견딜까. 아기가 느끼는 공포는 어느 정도일까. 몇 계단 쯤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엄마는 비명을 지르고 있겠지. 어쩌다 손잡이를 놓쳤냐고! 실수였을까. 군인들의 총대 개머리판에 밀려서일까. 그리고 아기는 살 수 있을까?
작년 여름에 영화 연수를 받을 때 내가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이 영화를 혁명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다거나 감독이 이용한 몽타주 기법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형식상의 혁명과도 같았다는 것이 영화학도도 아닌 내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아기는 어찌 되었을까. 답은 알 수 없지만 오직 그 생각으로 못내 찜찜하였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다 죽은 이들 사이로 가속도가 붙으며 굴러 내려오는 유모차 속의 아기는 보존해야할 가치에 대한 갈급한 호소로 보였으니. 패러디는 멋지지만 지금 이 작품 속 수레에는 아기 대신 폭탄이 실려 있다.
도슨트를 찾았다. 총칼로 국민을 제어했던 전직 권력자의 집을 수리하는 곳에서 작가가 가져온 쓰레기들이란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실명을 거론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는 도슨트를 괴롭힐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사 속의 피비린내 나는 한 장면이 떠올라 명치가 저릿하다. 다시 계단을 살핀다. 저 골프공들은 숨겨놓아야 한다. 저 권총은 총알을 빼놓아야 한다. 성질 급한 사람이 이성을 잃고 방아쇠를 당긴다면 그 불행을 어찌할까. 저 수레는 절대로 구르지 않게 고정시켜야 한다. 상상 속에서나마 역사를 몇 십 년 전으로 돌려놓고 싶다.
이 계단은 더 이상 번쩍거리지 않는다. 한때는 번득이는 지휘봉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그가 쌓은 계단이 맨얼굴을 드러냈다. 추락한 계단은 역사의 증거물이 되었다. 아무리 닦아도 지울 수 없는 무서운 얼룩을 지닌 채 미술관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선 그의 계단은 수인이 된 것인가. 뉴스에서 본 것보다 훨씬 놀라운 전언들로 인해 공포에 떨었던 그 시절에 나는 무기력한 소시민이었다. 겨우 분노의 말 몇 마디로 내게 닥치지 않은 불행을 다행스러워했던 기억이 떠올라 이 계단 앞을 쉬이 떠나지 못한다. 권력의 휘장 안에서는 사람들의 입에 마스크를 씌울 수 있다 하여도 세월이 기억하는 그의 이름 <오데사의 계단>은 결코 얻고 싶지 않을 새로운 생명을 얻고 만다.
바벨탑이 향하던 곳, 교회의 첨탑이 오르고자 하던 곳, 위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숨을 곳은 없다. 권력자는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점령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아래를 내려다본다. 넝마들이 널브러진 계단에 서서 그는 다시 발을 옮긴다. 점점 더 위의 계단을 향해……. 꼭대기의 깃발이 신이 되어 손을 흔들고 그 손을 잡으려 발버둥치는 사이 그는 점점 아래로부터 멀어졌다. 제 발아래 뒹구는 쓰레기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러나 작품 <오데사의 계단>의 맨 위층에서 이제는 굳어 쓸모없어진 허영의 빈껍데기들을 본다. 굳어버린 석고덩이가 납빛을 띤다.
계단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주인의 쇠사슬을 대신 진 ‘오데사의 계단’은 세상 사람들의 눈총이 두려운 것만 같다. 넝마가 되어 너덜대는 주인의 삶,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는 없겠지. 수레바퀴를 구르지 않게 꼭 붙잡고 있는 계단이 안쓰러워 카메라 속에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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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척박한 땅에서도 굴하지 않고 생명의 아름다움을, 존재의 소중함을 말하는 민들레처럼 꿋꿋하게 한 길을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