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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복 '저잣길'- 대구의 유통은 지금의 시장인 주로 장시를 통해 이뤄졌고, 조선후기 장시가 발달하면서 대구 유통도 확대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 어량·방렴 이용해 바다서 낚은 대구
- 반쯤 말린 상태가 가장 높이 평가돼
- 탕·구이·포·채·편·젓갈·김치·누르미
- 지금과는 다르게 다양한 요리 눈길
- 점점 몸값 올라가 제사상서 사라져
- 그 자리엔 값 싼 북어가 냉큼 차지
■대구, 옥에 갇히다
조선시대에 대구는 낚시나 그물보다는 어량(魚梁)을 이용해 잡았다. 어량은 '어전(漁箭)', 혹은 우리말로 '어살', '살'이라고도 부르는데, 나무·대·갈대 등으로 엮은 발을 조수가 흘러오는 쪽을 향하여 V자형으로 벌려 세워 말목으로 고정시킨 뒤 양쪽 날개의 거리가 좁혀진 곳에 함정인 임통을 설치한 기구다.
어량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의 유속이 빠르며, 간석지가 넓은 서해안이 설치에 보다 적합해 충청도와 황해도에 특히 많았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전국 350여 개소의 어량 중 263개소가 충청도와 황해도에 나뉘어 분포하고 있었다. 물론 경상도에도 어량이 적지는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7개소만 나타나지만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는 동래현, 기장현, 진해현, 거제현 등 41개소에 어량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동래현의 경우 남쪽 내포(乃浦)에 1개소가 설치되어 대구와 청어를 잡았으며 진해현, 거제현, 고성현, 칠원현, 거창현, 청하현, 장기현, 영일현 등에서도 바다·포구·섬 등에 어량을 설치해 대구를 잡았다.
대구는 방렴(防簾)으로도 잡았다. 방렴은 어량과 비슷한 기구인데, 간석지가 아니라 유속이 빠른 바닷물 속에 설치했다. 방렴은 경상도에서 성행했는데, 대구렴과 청어렴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진해에서는 방렴을 '어뢰(漁牢)'라고 불렀다. 방렴이 물고기를 가둔 옥(獄)처럼 보여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김려(金鑢)는 1803년 진해 유배생활 중 지은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서 "진해 바다에 어뢰가 수십 곳이 있어 마치 바둑판같다"고 했다. 겨울이 되면 얼마나 많은 대구들이 영어의 몸이 되었을까. 대략 짐작되고도 남는다.
■제사상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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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 '어장'- 조선시대에는 어량을 이용해 대구를 잡았다. 나무로 엮은 발을 조수가 흘러오는 쪽을 향해 세워 고정시킨 후 함정을 설치하는 방식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대구는 배를 갈라 알과 내장을 들어내거나, 아니면 배를 가르지 않은 채로 말려 저장했다. 이때 소금은 치기도 했고 안치기도 했다. 건조도 그 정도를 달리 해 바짝 말리기도 했고 덜 말려 꾸덕꾸덕한 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전자는 '건대구어', 후자는 '반건대구어'라고 불렀다. 유중림(柳重臨)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 "대구는 겨울에 반쯤 건조한 것이 가장 좋다"고 해 반건대구어의 맛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배를 갈라 꺼낸 알과 내장도 버리지 않고 소금에 절여 젓갈로 만들어 저장했다.
건조와 염장을 거친 대구는 산지를 떠나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진상을 빼면 유통은 대개 수증(受贈)이나 장시(場市)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수증이란 양반 관료가 자신의 정치·사회적 역량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16세기 중앙의 고위 관직을 지낸 유희춘(柳希春)이 여러 명의 지방 관리로부터 대구를 받았던 것이 이에 해당한다. 요즘이야 뇌물로 의심받기 십상일 테지만 전근대사회에서 수증은 경제활동의 한 영역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대구의 주된 유통 창구는 역시 장시였다. 오희문(吳希文)이 쓴 일기를 보면, 그는 식자재로 55종의 어패류를 구매했는데, 이 중 대구는 1595~1601년 사이 75마리를 소비해 세 번째로 소비량이 많았다. 어패류는 주로 장시에서 구매하거나 교환했다. 1596년 8~9월 목화 12근과 대구 20마리, 고도어(古刀魚, 고등어) 4마리를 교환했고, 1600년 2월에 쌀 5되로 대구 2마리를 샀다는 기록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이처럼 대구 유통은 주로 장시를 통해 이루어졌고, 조선후기 장시가 발달하면서 대구 유통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유통이 확대되고 유교의례에 따른 각종 제사문화가 발달하면서 대구는 제사상에도 올랐다. 다만, 몸값이 높다 보니 서민의 제사상에까지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대구가 감소했고, 그만큼 가격도 더 뛰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구를 제수로 사용해 온 지배층에서도 명태(북어)를 대신 제사상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명태는 대구와 달리 대량으로 어획되었고 가격도 헐한 데다 생김새마저 대구와 비슷하니 대체 어물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명태가 제사상에 오르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한때 속된 말로 "개도 안 물어간다"던 명태로서는 대구 덕에 제사상에까지 오르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그저 감사해야 할 일이다. 반면 명태에게 제 자리를 내어준 대구로서는 모르긴 해도 그 심사가 꽤나 복잡할 터다. 이제부터 제사상의 명태를 마주할 때마다 대구의 처지를 한번쯤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대구에게 자그마한 위안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를 테니 말이다.
■조선판 대구 레시피
'대구탕' 이나 '대구뽈찜'이 유명세를 탄 탓인지 요즘은 대구 요리하면 이것들 외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요즘 우리와 다르게 탕, 구이, 포, 채, 누르미, 편, 젓갈, 장, 김치, 다식 등 다양한 조리법으로 대구 요리를 만들어 그 맛을 즐겼다.
탕, 구이, 포는 말 그대로 끓이고, 굽고, 말리는 조리법이다. 가장 기본적인 조리법이어서인지 당시 음식을 소개하는 문헌이나 조리서에서도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관련 요리와 그 요리의 구체적인 조리법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전순의(全循義)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대구어피탕(大口魚皮湯)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어 대구 탕 요리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다. 대구어피탕은 날 꿩고기를 삶은 물에 대구 껍질, 도라지, 마른 새우가루를 넣고 다시 끓인 요리다. 요즘 우리가 즐겨 먹는 대구탕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식재료로 볼 때 보신을 위한 대구 요리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1670년)에는 채, 누르미, 편으로 만든 요리와 구체적인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를 더한다. 음식디미방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구 요리는 대구껍질채, 대구껍질누르미, 닭대구편 세 가지 요리다. 대구껍질채는 삶아서 가늘게 썬 대구 껍질과 석이버섯을 파를 채 썰어 넣은 단간장과 섞어 무치거나 가늘게 썬 파를 삶아서 가늘게 썬 대구 껍질로 둘러 말아 초간장에 밀가루즙을 섞어 익힌 요리다. 대구껍질누르미는 물에 담갔다 빨아서 사각형으로 썬 대구 껍질에 석이·표고·송이·참버섯과 후추·천초가루로 양념한 다진 꿩고기를 싸서 삶은 다음 꿩 삶은 물에 밀가루와 골파를 넣어 만든 즙을 끼얹은 요리다. 닭대구편은 닭 2마리와 건대구 3마리를 삶아서 진간장으로 간을 하여 굳힌 음식으로 요즘의 족편과 비슷하다. 요즘은 고급 식당에 가서도 맛보기 어려운 가히 일품요리들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증보산림경제'(1766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9세기 중엽)에도 대구 알젓, 대구를 넣어 담근 장, 어육김치, 어다식(魚茶食) 등의 요리와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대구를 이용해 이처럼 다양한 요리와 조리법을 선보인 우리 선조들의 음식문화에 탄복이 절로 나온다.
조선시대 다양했던 대구 조리법은 오늘날 빈약해져가는 음식문화와 대조적이어서 씁쓸함마저 들게 한다. 바삐 살다 보니 식탁을 돌아 볼 여유가 사라진 탓도 있겠으나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소홀히 해 온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물론, 조선시대 음식문화로 회귀할 수도,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음식문화의 다양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볼 필요는 있다. 대구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며 던지는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