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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의 노래 서정주
`거시기'의 노래
팔자 사난 `거시기'가 옛날 옛적에
대국으로 조공 가는 뱃사공으로
시험 봐서 뽑히어 배 타고 갔네.
삐그덕 삐그덕 창피하지만
아무렴 세때 밥도 얻어먹으며…….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렇지만 요만큼한 팔자에다도
바다는 잔잔키만 하지도 않아,
어디만큼 가다가는 폭풍을 만나
거 있거라 으릉대는 파도에 몰려
아무데나 뵈는 섬에 배를 대었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제아무리 시장한 용왕이라도
한 사람만 잡수시면 요기될 테니
제비 뽑아 누구 하나 바치고 빌자'
사공들은 작정하고 제비 뽑는데
거시기가 또 걸렸네. 불쌍한 녀석.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비는 것도 효력은 있던 때였지.
바다는 잔잔해져 배는 떠나고
거시기만 혼자서 섬에 남았네.
먹을테면 먹어 봐라 힘줄 돋우며
이왕이면 버텨보자 버티어 섰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용왕이 나와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보다 센 마귀가, 우리 식구를
다 잡아먹고, 나와 딸만 겨우 남았다.
그대는 활 잘 쏘는 화랑 아닌가?
우리 다음은 네 차례니 맘대로 해라'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거시기는 이판사판 생각을 했네―.
`힘 안 주고 물렁물렁 먹히기보다
힘 다하다 덩그렇게 죽는 게 낫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귀가 오자
젖먹이 힘 다해서 활줄 당겼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럭허면 맞힐 수도 있기는 있지.
어째서 안 맞기만 하고 말손가?
배내기 때 힘까지 모두 합쳐서
거시기가 쏜 화살이 마귀 맞혔네.
어쩌다가 운 좋게시리 마귀 맞혔네.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그래설랑 그 상으로 용왕 딸 얻어
가슴팍에 꽃가지 끼리인 듯이
끼리고 살았다네, 오손―도손.
사난 팔자 상팔자로 오손―도손.
마누라도 없갔느냐, 오손―도손.
거시기, 거시기, 저 거시기…….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꼬끼오!' 우는 스위스 회중시계 서정주
`꼬끼오!' 우는 스위스 회중시계
알프스 산 여신님에 눈을 맞춰서
융프라우 선녀님에 입을 맞춰서
리노강 인어하곤 목욕을 같이 해서
왕노릇도 종노릇도 시시해 다 그만두고
해와 달빛하고만 함께 살아 오면서
정확하게 정확하게만 만든 시계니,
나그네여 노자가 남았거들랑
이백 불만 내고서 하나 가져 보겠나?
주네브의 시계장수 말씀이 하도나 좋아
그 수만 개 귀뚜라미 수풀 같은 시계들 중에서
때맞추어 `꼬끼오……' 수탉 소리도 내시는
울음 좋은 회중시계를 하나 사서 차고 가나니.
인제는 벌써나 저승에 드신
우리 무애 양주동 교수도 `됐다'고 하시겠군.
시간 되면 조끼주머니에서 찌르릉 울어대던
회중시계만 믿고 살던 양주동 교수.
너무나 싼 강사료니 많이나 해 살아 보자고
다음 강의에 늦을세라, 찌르릉 우는 회중만 믿고 살았던
무애 양주동 교수도 `썩 잘됐다' 하시겠군.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간통사건과 우물 서정주
간통사건과 우물
간통사건이 질마재 마을에 생기는 일은 물론 꿈에 떡 얻어먹기같이 드물었지만 이것이 어쩌다가 주마담(走馬痰) 터지듯이 터지는 날은 먼저 하늘은 아파야만 하였습니다. 한정 없는 땡삐떼에 쏘이는 것처럼 하늘은 웨―하니 쏘여 몸서리가 나야만 했던 건 사실입니다.
`누구네 마누라허고 누구네 남정네허고 붙었다네!' 소문만 나는 날은 맨 먼저 동네 나팔이란 나팔은 있는 대로 다 나와서 `뚜왈랄랄 뚜왈랄랄' 막 불어 젖히고, 꽹과리도, 징도, 소고(小鼓)도, 북도 모조리 그대로 가만 있진 못하고, 퉁기쳐 나와 법석을 떨고, 남녀노소, 심지어는 강아지 닭들까지 풍겨져 나와 외치고 달리고, 하늘도 아플 밖에는 별 수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픈 하늘을 데불고 가축 오양깐으로 가서 가축용의 여물을 날라 마을의 우물들에 모조리 뿌려 메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어느 것도 길어 마시지 못하고, 산골에 들판에 따로 따로 생수 구먹을 찾아서 갈증을 달래어 마실 물을 대어갔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걸궁배미 서정주
걸궁배미
세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지.
농부가 속의 이 구절을 보면, 모 심다가 남은 논을 하늘에 뜬 반달에다가 비유했다가 냉큼 그것을 취소하고 아무래도 진짜 초생달만큼이야 할소냐는 느낌으로 고쳐 가지는 농부들의 약간 겸손하는 듯한 마음의 모양이 눈에 선히 잘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이 논배미 다 심고서 걸궁배미로 넘어가세.
하는 데에 오면
네가 무슨 걸궁이냐, 무당음악이 걸궁이지.
하고 고치는 구절은 전연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 걸궁배미라는 논배미만큼은 하나 에누리할 것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무당의 성악이요, 기악이요, 또 그 병창인 것이다. 그 질척질척한 검은 흙은 물론, 거기 주어진 오물의 거름, 거기 숨어 농부의 다리의 피를 빠는 찰거머리까지 두루 합쳐서 송두리째 신나디 신난 무당의 음악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고, 걸궁에는 중들이 하는 걸궁도 있는 것이고, 중의 걸궁이란 결국 부처님의 고오고오 음악, 부처님의 고오고오 춤 바로 그런 것이니까, 이런 쪽에서 이걸 느껴 보자면, 야! 참 이것 상당타.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겁*의 때 서정주
겁(劫)*의 때
석가모니의 조국 네팔의 사람들은
히말라야 산골 물로만 그 몸을 씻을 뿐
아직도 거의 세숫비누를 쓰지 않아
삼삼하게는 고운 때가 산 그림자처럼 끼었다.
오억 삼천 이백만 년쯤을
하루쯤으로 잡아 살기 마련이라면
이건
제절로 그리 되는 아주 썩 좋은 것이라고 한다.
* 불교의 한 시간 단위인 겁(劫)―칼파(Kalpa)의 하나씩의 길이는 이 땅의 시간 수로 치면 5억 3천 2백만 년에 해당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고려 호일 서정주
고려(高麗) 호일(好日)
숙종 삼 년 시월 상달 휘영청히 밝은 날.
고려 땅에 죄수는 하나도 없어
감옥 속은 모조리 텡텡 비이고,
그 빈 자리 황국(黃菊)처럼 피는 햇살들.
그 햇살에 배어나는 단군의 웃음.
그 웃음에 다시 열린 하늘의 신시(神市)!
그 신시에 물들여 구운 청자들!
운학문(雲鶴文)의 운학문(雲鶴文)의 고려청자들!
―『고려사절요』 제7권, 「숙종명효대왕 10년」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고요 서정주
고요&
이 고요 속에
눈물만 가지고 앉았던 이는
이 고요 다 보지 못하였네.
이 고요 속에
이슥한 삼경의 시름
지니고 누웠던 이도
이 고요 다 보지는 못하였네.
눈물,
이슥한 삼경의 시름,
그것들은
고요의 그늘에 깔리는
한낱 혼곤한 꿈일 뿐,
이 꿈에서 아주 깨어난 이가
비로소
만길 물 깊이의
벼락의
향기의
꽃새벽의
옹달샘 속 금동앗줄을
타고 올라오면서
임 마중 가는 만세 만세를
침묵으로 부르네.
동천, 민중서관, 1968
고향 난초 서정주
고향 난초
내 고향 아버님 산소 옆에서 캐어 온 난초에는
내 장래를 반도 안심 못하고 숨 거두신 아버님의
반도 채 다 못 감긴 두 눈이 들어 있다.
내 이 난초 보며 으시시한 이 황혼을
반도 안심 못 하는 자식들 앞일 생각타가
또 반도 눈 안 감기어 멀룩멀룩 눈감으면
내 자식들도 이 난초에서 그런 나를 볼 것인가.
아니, 내 못 보았고, 또 못 볼 것이지만
이 난초에는 그런 내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눈,
또 내 아들과 손자 증손자들의 눈도
그렇게 들어 있는 것이고, 들어 있을 것인가.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국화 옆에서 서정주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귀촉도 서정주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三萬里).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육날 메투리: 육날 메투리는, 신 중에서는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었다.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 그런 발음(發音)으로써 우는 것이라고 지하(地下)에 돌아간 우리들의 조상(祖上)의 때부터 들어온 데서 생긴 말씀이다.
귀촉도, 정음사, 1948
그애가 물동이의 물을... 서정주
그애가 물동이의 물을...
원제 : 그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애의 이마에 들어 그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와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기다림 서정주
기다림&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굽이를 넘어간 뒤
인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소만(小滿)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승의 꿈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신라초, 정음사, 1961
기억 서정주
기억
그애는 육날 메투릴 신고
손톱에는 모싯물이 들어 있었지.
고구려 때 모싯물이 들어 있었지.
그애 손톱의 반달 속으로
저녁때 잦아들던 뻐꾹새 소리
나와 둘이 숨 모아 받아들이고,
그애 손톱의 반달 속에서 다시 뻗쳐 나가는 뻐꾹새 소리
나와 둘이 숨 모아 뻗쳐 보내던
그 계집아이는…….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꽃 서정주
꽃&
가신 이들의 헐떡이는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 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 그 기름 묻은 머리빡 낱낱이 더워
땀 흘리고 간 옛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위에 있어라.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어서 가자
만나는 샘물마다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 볼 하늘을 보자.
귀촉도, 정음사, 1948
꽃밭의 독백 서정주
꽃밭의 독백(獨白)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山)돼지, 매[鷹]로 잡은 산(山)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門)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門) 열어라 꽃아. 문(門)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門) 열어라 꽃아. 문(門) 열어라 꽃아.
* 사소(娑蘇): 사소(娑蘇)는 신라(新羅)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 처녀(處女)로 잉태(孕胎)하여, 산으로 신선수행(神仙修行)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獨白).
신라초, 정음사, 1961
나그네의 꽃다발 서정주
나그네의 꽃다발
내 어느 해던가 적적하여 못 견디어서
나그네 되어 호올로 산골을 헤매다가
스스로워 꺾어 모은 한 옹큼의 꽃다발―
그 꽃다발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에게 주었느니.
그 이름 모를 길가의 아이는
지금쯤은 얼마나 커서
제 적적해 따 모은 꽃다발을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몇십 년 뒤
이 꽃다발의 선사는 또 한 다리를 건네어서
내가 못 본 또 어떤 아이에게 전해질 것인가?
그리하여
천년이나 천오백 년이 지난 어느 날에도
비 오다가 개이는 산 변두리나
막막한 벌판의 해 어스름을
새 나그네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을 쥐이고
그걸 받을 아이는 오고 있을 것인가?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나의 시 서정주
나의 시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아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落花)가 안쓰러워 주워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 놓았습니다.
쉬임 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 뒤 나는 년년(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워다 드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아줄 이가 땅 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 모은 꽃들은 저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내가 돌이 되면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동천, 민중서관, 1968
내 아내 서정주
내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내 영원은 서정주
내 영원은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쁜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동천, 민중서관, 1968
눈 오시는 날 서정주
눈 오시는 날
내 연인은 잠든 지 오래다.
아마 한 천년쯤 전에…….
그는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
그 꿈의 빛만을 나한테 보낸다.
분홍, 분홍, 연분홍, 분홍,
그 봄 꿈의 진달래꽃 빛깔들.
다홍, 다홍, 또 느티나무빛,
짙은 여름 꿈의 소리나는 빛깔들.
그리고 인제는 눈이 오누나…….
눈은 와서 내리 쌓이고,
우리는 제마다 뿔뿔이 혼자인데
아 내 곁에 누워 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
동천, 민중서관, 1968
님은 주무시고 서정주
님은 주무시고
님은
주무시고,
나는
그의 베갯모에
하이옇게 수놓여 날으는
한 마리의 학이다.
그의 꿈 속의 붉은 보석들은
그의 꿈 속의 바닷속으로
하나 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보석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
님이 자며 벗어 놓은 순금의 반지
그 가느다란 반지는
이미 내 하늘을 둘러 끼우고
그의 꿈을 고이는
그의 베갯모의 금실의 테두리 안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는 또 한 이별을 갖는다.
동천, 민중서관, 1968
대낮 서정주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아편의 종류.
화사집, 남만서고, 1941
동천 서정주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민중서관, 1968
두 향나무 사이 서정주
두 향나무 사이
두 향나무 사이, 걸린 해마냥
지, 징, 지, 따, 찡,
가슴아
인젠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내 각씨는 이미 물도 피도 아니라
마지막 꽃밭 증발하여 괴인
시퍼렇디 시퍼런 한 마지기 이내[嵐]!
간대도, 간대도,
서방(西方) 금색계(金色界)라든가 뭣이라든가
그런 데로밖엔 쏠릴 길조차 없으니.
가슴아. 가슴아.
너같이 말라 말라 광맥 앙상한
메마른 각씨를 오늘 아침엔 데리고
지, 징, 지, 따, 찡
무슨 금은(金銀)의 소리라도 해 보려무나.
신라초, 정음사, 1961
멕시코에 와서 서정주
멕시코에 와서
뱀하고
호랑이가
맞붙어 싸우다가,
뱀이
이겨서
해가 되시고,
호랑이가 져서
달이 된 나라.
참
괴짜인 나라.
이런 멕시코에 와서 살자면
낮에는 칭칭 동여감으며
밤에는 호식(虎食)도 잘 해 내야 할 텐데.
이것
여(余)는
뱀도 호랑이도 팔자엔 없어
지니고 온 피나 왁 왁 토하군
우선은 병원에 가 드러누워서
멕시코 사람 피나 꾸어 담으며
생리가 변할 날만 기다리고 있노라.
* 날개 돋친 뱀과 호랑이의 승부 이야기는 멕시코의 옛 신화에 있는 것으로, 멕시코 시에서 동북으로 51킬로미터의 교외에 나가면 테오티와칸―즉, 유적인 신의 도시 한쪽엔 아직 그 날개 돋친 뱀 케찰코아틀 신전이 남아 있다. D.H. 로렌스가 이 이름으로 소설을 쓴 것도 있다. 나는 이 멕시코 시에서 1978년 2월 11일 황혼, 내가 몸에 지닌 피의 45퍼센트를 객혈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여기 사람의 피를 구해 수혈을 받았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몽블랑의 신화 서정주
몽블랑의 신화
신부와 신랑이 겨울 몽블랑 산 속으로 신혼여행을 왔었는데요. 가파른 어느 낭떠러지에서 신랑이 실족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 것이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영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몽블랑의 산신녀가 그 신랑이 탐나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지요만은…….
해가 바뀌도록 찾고 찾고 또 찾았지만 신랑의 모양은 어느 바위 틈에도, 흙 위에도, 냇물 속에도, 아무데도 나타나 보이질 않아,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몽블랑 산골에 초막을 엮어 살며, 그를 찾아 기다리노라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다섯 해가 가고, 열 해가 가고, 여러 10년의 세월이 첩첩이 흘러서 드디어는 파뿌릿빛 머리털의 할마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초봄 산골의 눈녹이 때의 일인데요. 눈 녹은 물이 새로 흘러내리는 어느 골짜기의 개울가에서 신부는 그 물 속에 잠기어 떠내려오고 있는 그네의 신랑을 겨우 다시 보게는 됐는데, 그건 하도나 오랜만이라서 숨결이사 날아간 지 오래였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이나 머리털이나 살결의 젊음은 그때 신혼 때 그대로더라구요.
몽블랑 산의 중턱부터 위에는 일년 내내 눈이 덮여 꽁꽁 얼어 있으니, 신랑은 그 어디 바위 사이에 걸려 냉장(冷藏)되어 있다가, 여러 10년 만의 이상난춘(異常暖春)의 드문 기온에 풀려 흘러내려온 것이리라고, 사람들은 말씀을 하기도 하고, 또 `아닐 거다. 그건 몽블랑의 산신녀의 짓일 것이다'고 하기도 합지요만은…….
* 스위스와의 국경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몽블랑 산맥의 산봉은 4천 몇백 미터 되는 것으로, 그 3천 몇백까지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있다. 이곳 산골들은 아주 한가하고 고요하고 깨끗해서, 우리나라 청년 하나도 한동안 여기 살며 산을 타다가 연전에 조난당해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이 시에서 다룬 이야기는 이 산골의 구전의 전설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무등*을 보며 서정주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무등(無等): 호남 광주의 산 이름.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무제 -1- 서정주
무제 -1-&
여기는 어쩌면 지극히 꽝꽝하고 못 견디게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날센 쟁깃날로도 갈고 갈 수 없는 새파란 새파란 바위 속일 것이다.
여기는 어쩌면 하늘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베짱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골일 것이다.
아 여기는 대체 몇만리이냐. 산과 바다의 몇만리이냐. 팍팍해서 못 가겠는 몇만리이냐.
여기는 어쩌면 꿈이다. 귀비(貴妃)의 묘 등 앞에 막걸리집도 있는 어여쁘디 어여쁜 꿈이다.
귀촉도, 정음사, 1948
무제 -2- 서정주
무제 -2-&
매가
꿩의 일로서
울던 데를 이야기할 테니
우리나라 수(繡)실로
마누라 보고 베갯모에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눈물을 아주 잘 수(繡)놓아 달래서
베고 쉬게나.
동천, 민중서관, 1968
문둥이 서정주
문둥이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밀어 서정주
밀어(密語)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리ㄹ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차일을 물은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ㄹ 보아라
귀촉도, 정음사, 1948
박용래 서정주
박용래
아내와 아이들 다 직장에 나가는
밝은 낮은 홀로 남아 시 쓰며 빈집 지키고
해 어스름 겨우 풀려 친구 만나러 나온다는
박용래더러 `장 속의 새로다' 하니,
그렇기사 하기는 하지만서두 지혜는 있는 새라고 한다.
요렇처럼 어렵사리 만나러도 나왔으니,
지혜는 있는 새지 뭣이냐 한다.
왜 아니리요.
대한민국에서
그중 지혜 있는 장 속의 시(詩)의 새는
아무래도 우리 박용래인가 하노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백일홍 필 무렵 서정주
백일홍 필 무렵
주춧돌이 하나 녹아서
환장한 구름이 되어서
동구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지.
칠월이어서 보름나마 굶어서
백일홍이 피어서
밥상 받은 아이같이 너무 좋아서
비석 옆에 잠시 서서 웃고 있었지.
다듬잇돌도
또 하나 녹아서
동구로 떠나오는 구름이 되어서…….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보릿고개 서정주
보릿고개
사월 초파일 뻐꾹새 새로 울어
물든 청보리
깎인 수정같이 마른 네 몸에
오슬한 비취의 그리메를 드리우더니
어느만큼 갔느냐, 굶주리어 간 아이.
오월 단오는
네 발바닥 빛깔로 보리는 익어
우리 가슴마다 그 까슬한 가시라기를 비비는데…….
뻐꾹새 소리도 고추장 다 되어
창자에 배는데…….
문드러진 손톱 발톱 끝까지
얼얼히 배는데…….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부활 서정주
부활
내 너를 찾아왔다……유나(臾娜).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유나(臾娜), 이것이 몇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부 산(山)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 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촉(燭)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문을 열고 가면 강물은 또 몇천 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유나(臾娜)! 유나(臾娜)! 유나(臾娜)!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화사집, 남만서고, 1941
비엔나 서정주
비엔나
비엔나의 중년신사는 아직도 중절모를 쓰고
허리 굽혀 인사를 정중히 하지.
나 같은 코리안을 즈이 집에 맞이할 때는
태극기를 꺼내어 깨끗이 꽂고
자기 마누라까지 믿고서 맡겨 주시지.
비엔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돈이 약간은 모자라더래도
에누리로 또 그냥 받아도 주고,
그래, 그래, 머리빗도 비엔나 껏은
그 끝이 안 날카로워 아프지 않고,
푸른 다뉴브강의 그 강물빛은
사실은 구중충히 흐린 거지만
첼로에 맞춰서 노래부를 땐
거짓말로 아주 그만 푸른 걸로 해
정말보다 거짓말이 낫게 만들지.
그래서 신경질의 악성 베토벤도
이 수수한 여기가 마음 편안해
객지에 무덤으로까지 남아 있는 중이지.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사경 서정주
사경(四更)
이 고요에
묻은
나의 손때를
누군가
소리 없이
씻어 헤우고
그 씻긴 자리
새로
벙그는
새벽
지샐 녘
난초 한 송이.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상가수의 소리 서정주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질마재 상가수(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上歌手)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 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상파울루의 히피 시장 유감 서정주
상파울루의 히피 시장 유감(有感)
브라질에서 제일 싼 소가죽으로
브라질에서 제일 싼 한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제일 이쁜 가방을 만들어 놓고,
눈물 때문인가, 그보다도 또 더한 무엇 때문인가,
아주 검은 안경으로 두 눈을 가리고
상파울루 히피 시장에서 서서 팔고 있음이여!
하필이면 이 세계의 늙은 떠돌이―내가
또 그걸 사서 등에다 걸머지고
더 먼 길로 떠나가고 있음이여!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반아의 가가대소 서정주
서반아(西班牙)의 가가대소(呵呵大笑)
부제: 『돈키호테』의 작자 세르반테스의 고택(故宅) 옆 골목에서 들은바
고요하고 잔잔한 한국 미소보다야
상품(上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서두
서반아의 가가대소(呵呵大笑)라는 것도
들어 볼수록 한 맛은 있더군.
`중세 천년의 팔도 수호 명목의
갑옷 입고 창칼 든 정의의 기사
고것들은 고 을마나 웃기는 거였냐?
병신들 지랄했네!
돈키호테가 차라리 훨씬 좋겠다.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이차대전이니 뭐니 뭐니 하는 건
또 그 을마나 육시(六屍) 팥밥이었냐?
발 싸악 씻고 들어앉아서
우리는 거저 구경이나 했노라.
불쐬주(酒)에 훌라멩고 춤이나 추시며
넌지시 멀찍이서 구경이나 했노라.
우리가 못났냐?! 어?! 우리가 못났어?!
잡것들 지랄 마라.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말씀이사 바루 말씀이지만
싸움이사 우리가 먼저 선수들로서
남아메리카 전부를 도살장도 만들었다만
그게 뭐였냐? 그따윗 즛이 뭐였어?
인디오건 깜둥이건 마구 쑤셔서
모레노의 깡패들, 모레나의 창녀들,
그런 거나 구석구석 까 퍼뜨려 놓았네!
아이구 하누님 마시옵소사
그 따위 낭비는 죽어도 인젠 다시는 안 해야지.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이십세기의 대유행 동족상잔 같은 것도
우리가 일찍이 1930년대에
뻔보이기로 해보기사 했지만서두
행여나 너무 나삔 보지 말아라.
알아주건 말건 맘대로 하게마는,
우리 푸랑코와 인민전선파의 혈전
그것은 순수 스페인적인
조끔 과한 스포츠에 불과했었네.
아닌가 긴가 공동묘지에 가 보렴.
푸랑코는 죽을 때 유언한 대로
인민전선파들하고 한 묘지에 가 묻혔노라.
영원히 나란히 의좋게 묻혔노라.
원수가 따로 없네 잉?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가가가(呵呵呵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가(呵呵呵呵) 가가가(呵呵呵)!'
* 이 시의 제3연에 보이는 `육시(六屍) 팥밥'이라는 것은 우리 이왕조 때의 사형의 일종인 육시형(六屍刑), 즉 인신을 사지와 머리와 동체(胴體) 여섯 구분으로 찢어죽이는 형(刑) 시행 직전에 그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먹여주던 `팥밥' 그것이다. 제4연에 보이는 스페인말 `인디오'는 인디언이라는 뜻이고, 모레노는 백인과 흑인 또는 인디오 사이의 혼혈남이고, 모레나는 또 그 혼혈녀이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보이는 푸랑코와 그 적이었던 인민전선파의 공동의 묘지는 물론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서풍부 서정주
서풍부(西風賦)&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 발톱에 상채기와
퉁수 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석녀 한물댁의 한숨 서정주
석녀(石女) 한물댁의 한숨
아이를 낳지 못해 자진해서 남편에게 소실을 얻어 주고, 언덕 위 솔밭 옆에 홀로 살던 한물댁은 물이 많아서 붙여졌을 것인 한물이란 그네 친정 마을의 이름과는 또 달리 무척은 차지고 단단하게 살찐 옥같이 생긴 여인이었습니다. 질마재 마을 여인들의 눈과 눈썹 이빨과 가르마 중에서는 그네 것이 그 중 단정하게 이쁜 것이라 했고, 힘도 또 그 중 아마 실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 바람 부는 날 그네가 그득한 옥수수 광우리를 머리에 이고 모시밭 사잇길을 지날 때, 모시 잎들이 바람에 그 흰 배때기를 뒤집어 보이며 파닥거리면 그것도 `한물댁 힘 때문이다.'고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우겼습니다.
그네 얼굴에서는 언제나 소리도 없는 엣비식한 웃음만이 옥 속에서 핀 꽃같이 벙글어져 나와서 그 어려움으론 듯 그 쉬움으론 듯 그걸 보는 남녀노소들의 웃입술을 두루 위로 약간씩은 비끄러 올리게 하고, 그 속에 웃이빨들을 어쩔 수 없이 잠깐씩 드러내놓게 하는 막강한 힘을 가졌었기 때문에, 그걸 당하는 사람들은 힘에 겨워선지 그네의 그 웃음을 오래 보지는 못하고 이내 슬쩍 눈을 돌려 한눈들을 팔아야 했습니다. 사람들뿐 아니라, 개나 고양이도 보고는 그렇더라는 소문도 있어요. `한물댁같이 웃기고나 살아라.' 모두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 웃음이 마흔 몇 살쯤 하여 무슨 지독한 열병이라던가로 세상을 뜨자, 마을에는 또 다른 소문 하나가 퍼져서 시방까지도 아직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한물댁이 한숨 쉬는 소리를 누가 들었다는 것인데, 그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어둔 밤도 궂은 날도 해 어스름도 아니고 아침 해가 마악 올라올락말락한 아주 밝고 밝은 어떤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네 집 한 치 뒷산의 마침 이는 솔바람 소리에 아주 썩 잘 포개어져서만 비로소 제대로 사운거리더라고요.
그래 시방도 밝은 아침에 이는 솔바람 소리가 들리면 마을 사람들은 말해 오고 있습니다. `하아 저런! 한몰댁이 일찌감치 일어나 한숨을 또 도맡아서 쉬시는구나! 오늘 하루도 그렁저렁 웃기는 웃고 지낼라는가부다.'고……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석류꽃 서정주
석류꽃
춘향이
눈썹
넘어
광한루 넘어
다홍치마 빛으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
무주 남원 석류꽃을……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구름 넘어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
우리는 뜨내기
나무 기러기
소리도 없이
그 꽃가마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나니……
동천, 민중서관, 1968
선덕여왕의 말씀 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
짐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欲界) 제이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터잡는데 ―그런 하늘 속.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柴糧)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살[肉體]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 중 빛나는 황금 팔찌를 그 가슴 위에,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스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
서라벌 천년의 지혜가 가꾼 국법보다도 국법의 불보다도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
짐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欲界) 제이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터잡는 데―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 선덕여왕은 지귀(志鬼)라는 자의 여왕에 대한 짝사랑을 위로해, 그 누워 자는 데 가까이 가, 가슴에 그의 팔찌를 벗어 놓은 일이 있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동천, 민중서관, 1968
소년왕 단종의 마지막 모습 서정주
소년왕 단종의 마지막 모습
강원도 영월에 온 17세 소년왕 단종은
피리 소리와
소쩍새 소리를 유난히 좋아해
시를 짓고 지내다가,
마지막 날은 흰 말을 타고
동쪽 산골짜기로 오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옵니까?'
이곳 촌사람이 물으니
`샛별 속으로 놀러 갑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그의 숙부 세조의 뜻대로
가느다란 활줄에 목이 졸려
아주 이쁘게 죽어 있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육신모복상왕」조. 「단종상승」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소자 이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서정주
소자 이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원제 :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무우밭은요, 질마재 마을에서도 제일로 무성하고 밑둥거리가 굵다고 소문이 났었는데요. 그건 이 소자(小者) 이(李)생원네 집 식구들 가운데서도 이 집 마누라님의 오줌 기운이 아주 센 때문이라고 모두들 말했습니다.
옛날에 신라 적에 지도로대왕(智度路大王)은 연장이 너무 커서 짝이 없다가 겨울 늙은 나무 밑에 장고만한 똥을 눈 색시를 만나서 같이 살았는데, 여기 이 마누라님의 오줌 속에도 장고만큼 무우밭까지 고무시키는 무슨 그런 신바람도 있었는지 모르지. 마을의 아이들이 길을 빨리 가려고 이 댁 무우밭을 밟아 질러가다가 이 댁 마누라님한테 들키는 때는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아이들도 할 수 없이 알게 되었습니다. ―`네 이놈 게 있거라. 저놈을 사타구니에 집어넣고 더운 오줌을 대가리에다 몽땅 깔기어놀라!' 그러면 아이들은 꿩새끼들같이 풍기어 달아나면서 그 오줌의 힘이 얼마나 더울까를 똑똑히 잘 알 밖에 없었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술통촌 마을의 경사 서정주
술통촌 마을의 경사
고구려 산상왕이 하늘에다 제사할 때 쓰려고 가두어 둔 돼지 한 마리가 도망쳐서, 술을 잘 만드는 술통촌이라는 마을로 들어갔사온데요. 산에 철쭉꽃 나뭇가지 구부러져 오고가듯, 그놈의 돼지가 어찌나 되게는 왔다갔다하는지 잡히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나이 스무 살쯤 되었을까 후녀라는 이름의 토실토실한 과년한 처녀가 나와 아주 썩 든든히 이쁘게는 웃으면서 보기 좋게 이것의 뒷다리를 잡아 냉큼 붙들어 매 놓았습지요.
산상왕이 뒤에 이 이야기에 반해서 밤에 그네 집에 스며들어가 붙어 애기를 만들었다 하는데, 이것은, 참, 한 번 찬성해 볼 일이옵지요. 더더구나 요로코롬 해 만든 애기가 뒤에 커서 제법 왕까지도 됐다니, 이거야말로 술통촌 마을 뒷산의 철쭉꽃 나무가 그 구불구불한 가지 위에다 피우고 있는 꽃만큼이나 재미나긴 꽤나 재미난 이야깁지요.
―『삼국사기』 제16권, 고구려본기 4, 「산상왕 12년」조 참고.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시론 서정주
시론(詩論)&
바닷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詩)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신라유가의 제일문사 강수선생 소전 서정주
신라유가의 제일문사 강수선생 소전
원제 : 신라유가(儒家)의 제일문사(第一文士) 강수선생(强首先生) 소전(小傳)
깡수는 찌끄만 귀족집 청년이지만
마음이사 귀족인 것보다 행결 더 힘이 세어
애인일랑 쌍놈의 철공장집 딸을 골라
남몰래 풀섶에서 야합하고 지내다가
남들의 손가락질 본체만체하구서
조강지처로 맞아들였던 자로,
글도 또한 그만큼한 힘이 있어서
그가 글을 쓰고 있으면 그 압력으로
일월(日月) 같은 이쁜 혹이 하나
하늘가에 꼼짝없이 새로 돋아날 만도 했더라.
우리 문무대왕께서도 칭찬하셨듯이,
대국 당나라의 황제폐하도
깡수의 편지만은 거절하지를 못했더라.
그가 죽은 뒤에 마누라만 남았을 때
왕은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네는 쌀 한 톨도 받지를 않고
그 힘센 가난 속으로 그저 물러섰다는 바,
이 역시나 깡수 문장의 여력인가 하노매라.
―『삼국사기』, 「열전」 6.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신록 서정주
신록
어이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제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 번 나-ㄹ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나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나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나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신발 서정주
신발
나보고 명절날 신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내 신발을 나는 먼 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邊山)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놀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그것 대신의 신발을 또 한 켤레 사다가 신겨 주시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 그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내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신부 서정주
신부(新婦)
신부는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니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서정주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아라비아 사막도 서정주
아라비아 사막도(圖)
곧은 칼도 휘어들어 환도(環刀)가 되는,
모래 불타는,
연애도 술도 자비도 용서도 다 처형되는,
아하! 섭씨 50도의 누깔 끓는, 누깔 끓는,
끝없는 사막!
이 환장할 어디선가?
남몰래 붙었다가 들킨 남녀가
모가지까지 모래 속에 묻힌 채
그 머리통 돌에 맞아 죽으며 외치는 소리만이
매우 아픈 꽃소리처럼 들릴 뿐,
거지 거지 상거지 도둑질한 거지가
그 손목 칼에 잘리며 울부짖는 소리만이
그 다음 꽃소리처럼 불하늘에 꼬슬릴 뿐,
알라신의 특별 허가로
아내를 네 명씩이나 끼고 누워 낮잠 자는
오아시스 가장자리나
홍해가의 밀방 속 복인(福人)들만이
비지땀 목욕하는 얄궂은 웃음 웃는다.
* 아라비아의 한여름 낮을 가서 겪어 본 이는 잘 알겠지만 섭씨 40도에서 50도가 되는 더위는 왕왕 있다. 그늘에 둔 차도 어쩌다간 쾅! 쾅! 폭발해 터지기도 한다.
*여기 법은, 간음 남녀를 하체로부터 그 모가지까지 사막의 모래 속에 묻은 다음에, 그 드러내고 있는 머리통은 처벌자들이 에워싸고 삥 둘러서서 돌들을 던져 쳐죽이도록 하고 있고, 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들의 손은 그 손목에서 몽땅 싹둑 칼로 잘라 버리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여기 법은 아내를 4명까지는 데리고 사는 것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아일랜드의 두 사랑 서정주
아일랜드의 두 사랑
□ 1. W.B.예이츠의 사랑
한 처녀를 사랑했다가 그 처녀 시집가서
20년 상사병으로 하늘 땅에 뒹굴다가,
그 처녀가 낳은 딸이 그 처녀를 닮아서
50인지 60인지 제 나이도 잊고서
그 딸 이어 사랑하여 그 곁을 맴돌며,
`너도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없냐?'며
또 채어선 채인 대로 시늠시늠하다가,
저승으로 저승으로 끝도 없는 저승으로
비척비척 발걸음 옮겨 들어가 버리고 만
예이츠! 예이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당신 참 대단히는 사랑하던 시인이여!
애란(愛蘭) 하늘 삼삼한 게 그대 때문이로다.
□ 2. 어떤 아일랜드 귀공자의 고백
이 천지에서 제일 이쁜 엄마를 나는 제일 좋아했는데요. 엄마는 무엇 때문인지 서방질을 해서 아버지한테 쫓겨나고 나처럼 그네를 사랑하던 아버지는 미치광이 떠돌이가 돼 버렸어요.
도깨비 잘 나오는 성과 집들이 달린 몇천만 평의 우리 장원에서 아빠와 엄마는 다 떠나 버리고, 나와 내 형 둘이서 고아로 자랐는데, 상속자인 내 형이 또 무슨 병으로 죽어 버려서, 여기서 아주 사라진 뒤엔, 소르본느의 철학 대학생 나 혼자 여기 남아 사시장천(四時長天) 밤낮으로 앉아서 있었지요.
제 눈을 좀 보세요. 쓸쓸했던 게 몇만 길인지요?
저는 장가가는 걸 작파하기로 했어요. 내 아버지보다도 더 못 견딜 것 같아서요.
그러구 나서는 저는 쓸쓸한 게 어려우면 각국의 여자들을 한 달만큼에 하나씩은 갈아 들이지요. 영국 여자, 불란서 여자, 스페인 여자, 인도 여자, 일본 여자, 또 아프리카의 깜둥이 색시까지도…….
그런데 아직도 영 보이지 않아요. 언제나 서방질 안하고, 나와 둘이서만 죽도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날 것인지…….
눈 씻고 볼래야 어디 보여요?
* 1978년 6월 16일 나는 아일랜드의 젊은 시인인 내 친구 리처드 라이언 군의 안내로 W.B. 예이츠가 살던 집을 잠시 둘러보면서 그 예이츠의 2대에 걸쳤던 사랑의 이야기를 라이언 군에게서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날 밤 그의 친구인 어떤 백작 3세의 장원 만찬에 초대되어, 마침 한 일본 여자와 잠시 동거중인 아주 잘 생긴 서러운 얼굴의 장년 총각인 주인을 만나 보고 신비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뒤에 라이언 군의 말을 들으니, 그는 이 시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를 생각하며 서정주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를 생각하며
암스테르담에 와서 하루만 지내어 보면
하눌님은 여자인 것을,
여자라도 끝없이 뇌쇄(惱殺)하는 제일 이쁜 여자인 것을
할 수 없이 알 수가 있네.
하늘에다가 여러 가지 꽃빛의
여러 빛 별들을 못 두는 대신
이곳에 꽃피워 놓은 억천만 송이의 튜울립꽃들
그것들이 모두 이 미인의 뇌쇄(惱殺)하는 눈초리의
기막히디 기막힌 그늘들인 걸 알 수가 있네.
그리하여 이 뇌쇄(惱殺)에 놀아난 사람들은
죄라도 질라치면 너무나 무식꿍하게는 져서
감옥이라도 보통에 넣으면 뚫고 나오기 때문에
이빨 사나운 상어떼가 우굴거리는
아주 짭찔한 바다 운하가에 바짝
두두룩한 쇠창살을 먹여 가두어 두고,
그리고 우리 직관의 철인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날이 날마다 말간 말간 안경알만 다듬고 앉아서
그 미인과 단둘이서만 조용히
골똘히 눈 맞추고 있었던 것도
알 수가 있네. 얼추는 알 수가 있네.
* 아시다시피 암스테르담은 제2의 베니스라는 별명 그대로, 바다의 운하가 시중의 여러 곳을 누비고 있는데, 그 운하의 수면에 바짝 가까운 여러 곳엔 옛날의 석조의 감옥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보인다. 물론 지금은 이것들을 쓰지는 않지만.
**스피노자(Spinoza, 1632~77):`신은 능식적(能識的) 자연이고, 자연은 소산적(所産的) 자연이므로, 신은 자연이다'라는 범신론(汎神論) 사상을 세운 네덜란드의 철인. 그는 그의 그런 신을 향한 지적인 사랑이 인간 윤리의 극치를 이룬다고 직관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애기의 꿈 서정주
애기의 꿈
애기의 꿈 속에 나비 한 마리
어디론지 날아가고 햇빛만이 남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난 애기는
창구멍으로 방바닥에 스며든 햇빛을
눈 대보고, 뺨 대보고, 만져 보고 웃는다.
엄마도 애기같이 이렇다면은
세상은 정말로 좋을 것이다.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애기의 웃음 서정주
애기의 웃음
애기는 방에 든 햇살을 보고
낄낄낄 꽃웃음 혼자 웃는다.
햇살엔 애기만 혼자서 아는
우스운 얘기가 들어 있는가.
애기는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
또 한 번 낄낄낄 웃음을 편다.
개미네 허리에도 애기만 아는
배꼽 웃길 얘기가 들어 있는가.
애기는 어둔 밤 이불 속에서
자면서도 낄낄낄 혼자 웃는다.
잠에도 꿈에도 애기만 아는
우스운 하늘 얘긴 꽃펴 있는가.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애를 밸 때, 낳을 때 서정주
애를 밸 때, 낳을 때
신라 상대(上代) 여자들 가운데는
밤에 어둔 밤길을 가다가
하늘에 별빛을 입으로 읏더먹고 와서
사내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
애기를 배는 색시도 있었네.
그것 참 무척은 황홀해 좋았을 거야!
그래서 애기가 생겨날 때는
열 달 전에 읏더먹은 그 별 내음새가
창구멍이 빵빵 나게 풍겼다는데,
노고지리 한 천 마리 하늘 날아오르듯
이것도 참 매우 매우 쌍그러웠을 거야!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2, 「유례왕 원년」조 참고.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어머니 서정주
어머니&
`애기야……'
해 넘어가, 길 잃은 애기를
어머니가 부르시면
머언 밤 수풀은 허리 굽혀서
앞으로 다가오며
그 가슴 속 켜지는 불로
애기의 발부리를 지키고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돌아온 애기를 껴안으시면
꽃 뒤에 꽃들
별 뒤에 별들
번개 뒤에 번개들
바다에 밀물 다가오듯
그 품으로 모조리 밀려들어오고
애기야
네가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쏘오같이
어머니의 임종을 내버려두고
벼락 속에 들어앉아 꿈을 꿀 때에도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
영원과, 그리고는 어머니뿐이다.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동천, 민중서관, 1968
영산홍 서정주
영산홍(映山紅)
영산홍 꽃잎에는
산(山)이 어리고
산(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山) 너머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동천, 민중서관, 1968
왕 금와의 사주팔자 서정주
왕(王) 금와(金蛙)의 사주팔자
이것, 참, 되게는 헤성헤성한 천지에
큰 돌 두 개가
별 딴 이유도 없이
마주보고 울고 있나니,
그런 언저리에서 생겨난
노오란 똥빛의 두꺼비 모양을 한 그대여.
그대는 될랴면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대왕까지는 몰라도 왕쯤은 하나 돼야 하지 안카ㅆ나?
그리고 또
물색 좋은 물귀신의 딸 같은,
난들난들한 버들가지 꽃 같은
그런 미인도 하나 가져야지 안카ㅆ나?
되깎이*라도 하나 갖긴 가져야지 안카ㅆ나?
* 되깎이란 중이 환속했다가 다시 또 중이 된다는 뜻인데, 이 뜻을 한 번 더 굴려서, 남의 아내였던 여자가 재혼하는 뜻으로도 쓰인다. 왕 금와의 아내 유화는 금와의 양조부 해모수와 통한 바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니, `되깎이'인 셈이지.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소설문학사, 1982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 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서정주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내가 아직 못다 부른
노래가 살고 있어요.
그 노래를
못 다하고
떠나 올 적에
미닫이 밖 해 어스름 세레나드 위
새로 떠 올라오는 달이 있어요.
그 달하고
같이 와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나는
G선의 멜로디가 들어 있어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전생(前生)의 제일로 고요한 날의
사둔댁 눈웃음도 들어 있지만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이승의 비바람 휘모는 날에
꾸다 꾸다 못 다 꾼
내 꿈이 서리어 살고 있어요.
동천, 민중서관, 1968
우리 데이트는 서정주
우리 데이트는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해야지―
내가 어느 절간에 가 불공을 하면
그대는 그 어디 돌탑에 기대어
한 낮잠 잘 주무시고,
그대 좋은 낮잠의 상으로
나는 내 금팔찌나 한 짝
그대 자는 가슴 위에 벗어서 얹어 놓고,
그리곤 그대 깨어나거든
시원한 바다나 하나
우리 둘 사이에 두어야지.
―우리 데이트는 인젠 이렇게 하지.
햇볕 아늑하고
영원도 잘 보이는 날.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서정주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부제: 코린토스 장에서 산 갈피리를 불고 있으니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소 세 마리 데불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피리를 불고 섰는
목신(牧神) 팬이 하라는 대로 코린토스 장에서
나도 그 피리 하나 사 들고
이오니아 바닷가에 가 불고 서 있었더니,
그 거칠던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바다에서 솟아올라 귀띔해 주는 말이
`사실은 나도 요즘은 세월이 달라져서
그것이나 불고 소일하고 지낸다'면서
`듣고 싶건 나 따라서 들어와 봐라'더군.
그래서 어렸을 때 배운 개구리 헤엄으로
머리까지 몽땅 바다에 빠져들었더니
곡조는 뭍의 것과 좀 다르지만서두
피리 소린 틀림없이 그 피리 소린데
옛 희랍이 만들어 낸 모든 것 중에서
이것 하나 철저힌 간절히 살아
바닷속 깊이까지 아직 스며 있더군.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인도의 여인 서정주
인도의 여인
인도의 여자더러는 시간을 묻지 마라.
낮인가 밤인가 그것만 묻고,
오늘인가 어젠가 내일인가도
아예 아예 묻지를 마라.
낮이때거든
잘 피어 보이는 꽃을,
밤이거들랑
잘 숨어서 안 보이는 꽃을,
자세히 자세히 물어 보아라.
그것만을 자세히 소근거릴 것이다.
`너이 값이 얼마치냐?'고 해도
그런 것은 더구나 그네들은 모른다.
플러스 무한정이나
마이너스 무한정이나
주먹구구로 거의 거의 마찬가지로 안다.
가령 어느 외국의 잡팽이 사내가
인도 창녀를 하나 데리고 자고 나서
`얼마 주랴?'고 물어 보아도
그런 액수조차도 그네는 깡그리 모를 것이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인연설화조 서정주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 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어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 속에 괴어 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 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에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 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또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샐 사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두 양주가 그 새고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영아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
뜰에 내린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현생(現生)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자화상 서정주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저무는 황혼 서정주
저무는 황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너머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구 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엣비슥히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동천, 민중서관, 1968
조국 서정주
조국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조심조심 떠받들고
걸어오고 계시는 이.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 들고 오시는 이.
구름 머흐는 육자배기의 영원을,
세계의 가장 큰 고요 속을,
차라리 끼니도 아니 드시고
끊임없이 떠받들고 걸어오고만 계시는 이.
누군가.
이미 형상도 없는 하늘 속 텔레비로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밤낮으로 쉬임없이 받쳐 들고 오시는 이.
누군가
한 그릇의 옛날 냉수를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받쳐들고 오시는 이.
조국아.
네 그 모양 아니었더면
내 벌써 그 마지막 피리를
길가에 팽개치고 말았으리라.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진주 가서 서정주
진주 가서
백일홍 꽃망울만한 백일홍 꽃빛 구름이
하늘에 가 열려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암수의 느티나무가 오백년을 의(誼) 안 상하고
사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기생이 청강(淸江)의 신이 되어 정말로 살고 계시는 것을
보았는가.
1․4후퇴 때 나는 진주 가서 보았다.
그의 가진 것에다 살을 비비면 병이 낫는다고,
아직도 귀때기가 새파란 새댁이 논개의 강(江)물에다 두 손을 적시고 있는 것을
시인 설창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어서 보았다.
신라초, 정음사, 1961
찬술 서정주
찬술
밤 새워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잣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추석 서정주
추석&
대춧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비수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은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꺼내 들고
기왓장 넘어오는고.
동천, 민중서관, 1968
추일미음 서정주
추일미음(秋日微吟)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규(蜀葵)는 붉은 물이 들었다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아내 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 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으면 좋을꼬.
신라초, 정음사, 1961
추천사 서정주
추천사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뉘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춘궁 서정주
춘궁(春窮)
보름을 굶은 아이가
산 한 개로 낯을 가리고
바위에 앉아서
너무 높은 나무의 꽃을
밥상을 받은 듯 보고 웃으면,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두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을
구름 끝 바람에서
겸상한 양 듣고 웃고,
또 보름을 더 굶은 아이는
산 세 개로 낯을 가리고
그 소식의 소식을 알아들었는가
인제는 다 먹고 난 아이처럼
부시시 일어서 가며 피식 웃는다.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춘향유문 서정주
춘향유문(春香遺文)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 도솔천: 불교의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제사천(第四天).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침향 서정주
침향(沈香)
침향(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가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궈 넣어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다만, 아무리 짧아도 2~3백년은 수저(水底)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내다가 육수와 조류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는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뿐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질마재신화, 일지사, 1975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 서정주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한때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킬리만자로의 세 산봉우리는
무엇을 이심전심 합의하는 것일까?
기린의 키만큼 한 `새벽나무' 옆
그 잎을 뜯어먹다 또 사랑 기억하는
가시버시 기린의 입맞춤을 보인다.
고요하디 고요한 입맞춤을 보인다.
* 이 세계에서 네팔의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높은 영산(靈山) 킬리만자로는 7천 몇백 미터나 되는, 봉우리는 언제나 흰 눈에 덮여 있는 산. 나그네들은 흔히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이 산이 잘 보이는 암보셀리까지 가서 거기에서 하룻밤 천막 신세를 지며 아침의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를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아, 참, 이 킬리만자로산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주봉(主峰)의 왼쪽으로 한참을 내려와서 주봉보다 작은 봉우리가 하나 보이고, 거기서 또 한참을 내려온 곳에 더 작은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인다. 이 세 개의 산봉우리를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 삼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고 느끼고 있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태국 코끼리 서정주
태국 코끼리
태국 코끼리는 절을 잘 합니다.
즈이 엄마 아빠에게는 물론,
즈이 새끼들한테도 아주 썩 잘 절을 합니다.
친한 중생들에겐 물론,
안 친한 중생들에게도 언제나 절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엔 무엇에게나,
눈에 영 안 보이는 것한테도
매양 빈틈없이 절을 잘 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과 공간의 원근 사이에서
그들은 비교적 무사한 독립을 누립니다.
* 태국 방콕의 메남강(江)가에서 굽신굽신 절을 잘 하는 코끼리를 보니, 몇 해 전인가 우리 해인사 백련암의 수도 노승 성철 스님이 `절을 잘 할 줄 알면 시(詩)에도 좋을 것이다. 우선 한 삼천 번만 먼저 해보아라.' 말씀으로 내게 극진히 권해 주시던 게 생각이 났다. 원래 절을 잘 할 줄 모르던 나인지라, 이 태국 코끼리의 끊임없는 절과 이 태국의 무사했던 독립과 성철 스님의 말씀을 아울러 곰곰히 생각해 보노라니 그게 많이 그럴싸하게 느끼어졌었다.
서으로 가는 달처럼, 문학사상사, 1980
푸르른 날 서정주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귀촉도, 정음사, 1948
풀리는 한강가에서 서정주
풀리는 한강가에서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잎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피는 꽃 서정주
피는 꽃
사발에 냉수도
부셔버리고
빈 그릇만 남겨요.
아주 엷은 구름하고도 이별해 버려요.
햇볕에 새붉은 꽃 피어나지만
이것은 그저 한낱 당신 눈의 그늘일 뿐,
두 번짼가 세 번째로 접히는 그늘일 뿐,
당신 눈의 작디 작은 그늘일 뿐이어니…….
동천, 민중서관, 1968
학 서정주
학&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날은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다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繡)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 큰 제사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 땐들 골라 못 추랴
긴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서정주시선, 정음사, 1956
한 발 고여 해오리 서정주
한 발 고여 해오리
이동백이 새타령에
`월명(月明) 추수(秋水) 찬 모래
한 발 고여 해오리' 있지?
세상이 두루두루 늦가을 찬물이면
두 발 다 시리게스리 적시고 있어서야 쓰는가?
한 발은 치켜들어 덜 시리게 고였다가
물 속에 시린 발이 아주 저려 오거든
바꾸어서 물에 넣고 저린 발 또 고여야지.
아무렴 아무렴 그렇고말고,
슬기가 별 슬기가 또 어디 있나?
떠돌이의 시, 민음사, 1976
한양호일 서정주
한양호일(漢陽好日)
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꽃을 한아름 자전거 뒤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을 지나가면서 연계(軟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외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들여진 옥색(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 사려 꽃 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외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가오.
동천, 민중서관, 1968
할머니의 인상 서정주
할머니의 인상
할머니는 단군 적 박달나무 신발을 신고
두루미 우는 손톱들을 가졌었나니…….
쑥 같고 마늘 같고 수숫대 같은
숨쉬는 걸 조금 때 가르쳐 준 할머니는…….
서정주문학전집, 일지사, 1972
행진곡 서정주
행진곡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귀촉도, 정음사, 1948
화사 서정주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 듯…… 석유(石油)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화사집, 남만서고, 1941
황룡사 큰 부처님상이 되기까지 서정주
황룡사 큰 부처님상이 되기까지
부처님이거나, 보살이거나, 시(詩)거나, 또 무엇이거나, 영원히 놓아 두고 보고 싶은 예술품을 만들다가 신퉁찮으면 신퉁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넘겨 줘야지, 신퉁찮은 그대로 어리무던하게 만들고 있지 마라. 절대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차라리 쇠붙이라든지 금이라든지 하는 그 재료들을 단단한 배에 실어 돛을 달아서 머언 먼 시간과 공간 위에 띄워 보내라. 그리하여 이 배는 여러 백 년 여러 천년을 이 땅 위의 온갖 나라를 표착(漂着)하여 돌면서, 마침내는 그 어디매 한 군데서 가장 적합한 창조의 예술가를 만나 비로소 그 아주 신퉁한 모습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신라 황룡사의 큰 부처님 조상(彫像)의 재료들이 인도에서 `만들다 잘 안되건 딴 데로 보내시오' 하는 쪽지와 함께 배에 실려 먼 바닷길을 떠나, 이 땅 위의 온갖 나라의 예술가를 찾아 헤매 돌다가, 일천하고도 삼백여 년이 지난 뒤에사 신라에 와 비로소 그 임자를 만나 창작되어 놓이듯이…….
―『삼국유사』 3, 「황룡사복」 6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황진이 서정주
황진이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이 보고
`선생님하고 제가 그래도
개성 사람들 중엔 으뜸일 거예요.
선생 곁에서 벌써 여러 해를
때때로 무람없이 굴어먹었어도
선생은 저를 붙어먹진 않았으니깐.
그러고 우리 사이
또 하나 으뜸을 끼워 놓자면
저 시원히 늘 쏟아지는 박연폭포쯤이겠습죠?'
선언했다는 것은 단순한 한자리의 농담이었을까?
이건 아무래도 진담이었던 것만 같다.
금강산으로, 태백산으로, 지리산으로, 어디로, 어디로,
황진이가 우의(羽衣) 잃은 선녀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전라도 나주 부사의 잔치판에 끼어들었을 때,
시 읊고 거문고 타며 노래부르기에 앞서
방약무인하게도 너무나 한가하게
그 옷 속에서 이를 잡아내 죽이고 있었던 걸로 보면
늘 그만콤 했던 그 시적(詩的) 자존심으로 보아
화담한테 한 그 말은 역시나 진담이었던 것 같다.
―식소록(識小錄),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중종조유일」조.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