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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딛고 우뚝 서다
이우현
우리 주방 대표
전국검정고시 대구동문회 회장
대구대학교 가정법률 대학 수료
영진전문대학 외식 프랜차이즈 수료
계명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대구시장 표창
대한민국 청소년 지도 대상
…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마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희망가 中 / 문병란
전투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군인,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계곡에서 구조된 산악인, 끔찍한 병마를 이겨내거나 불황의 늪을 빠져 나온 사람들… 그들은 말한다. “나는 한 순간도 희망을 저버린 적이 없다.” 희망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절망이라는 어둠 속에 갇혔을 때, 다시 나아갈 한 줄기 빛이 되어준다. 나는 연약해 보이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희망의 힘을 믿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희망이다.
따뜻한 쌀밥이라는 희망
1960년 11월 7일, 나는 경북 고령군 촌마을에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성품이 인자하시고 다정한 분이셨지만, 술을 좋아해 농번기가 끝나면 매일 주막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곤 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데려오라고 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만취 상태의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를 데리러 주막으로 갔는데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 이상해보였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웃으며 어머니와 나를 반겼었는데, 그 날은 술잔을 손에 든 채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 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빚보증을 여러 군데 서주었던 아버지는 그 날 친구 분들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과 전 재산을 빚쟁이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야했고, 우리는 고향을 떠나 성주군 용암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당시 할머니는 90세가 넘으셨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일구어 놓은 전 재산을 허공에 날려버리고, 고향을 떠나게 된 것에 크게 상심하셨다. 할머니는 음독을 시도하셨지만, 다행히 이웃 주민에게 발견되어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술김에 빚보증을 선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렇게 가난은 우리 가족을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셋방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당장 먹을거리가 없었기에 아버지는 1년 동안 머슴 생활을 하기로 하고 주인에게 돈을 선 지급 받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좋아하시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으시고는 이웃동네에 머슴을 살며, 과일과 채소 등 닥치는 대로 행상을 했다. 어머니도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행상을 했지만,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학교에 점심 도시락을 싸갈 수도 없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는 가정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의 도시락을 나눠 먹었고, 친구들도 내 도시락까지 챙겨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장이 점심시간에 자기 집으로 가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급장의 부모님은 학교 인근에서 슈퍼와 문방구를 했는데, 친구 어머니는 우리에게 따뜻한 쌀밥과 멸치볶음, 계란말이를 내어주셨다. 여름인데도 따뜻한 쌀밥과 반찬을 먹는 게 신기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숟가락을 들었는데 갑자기 집에 있는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굶고 있을 동생들과 부모님, 할머니를 생각하니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게 너무 죄스러웠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날 이 후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도시락을 먹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혼자 뒷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그러고 나면 속이 쓰려 수돗가에 가서 물을 한바가지 마시며 배를 채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점심도시락은 소나무 껍질과 수돗물이었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굶기를 밥 먹듯 했으니 내 얼굴은 항상 누렇게 떠있었고 힘이 없어 늘 비실 거렸다.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가끔 학교에서 옥수수 빵과 분유가루를 학생들에게 지급해주었는데, 나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도 참아야했다. 집에는 나보다 어린 동생들이 매일 배고픔에 울고 있었다. 나는 동생들을 생각하며 빵과 분유가루를 내 뱃속이 아닌 가방에 집어넣었다.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품에 안고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내가 활짝 웃으며 방문을 열면 동생들은 이내 눈치를 채고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신나게 빵과 분유가루를 먹는 동생들을 볼 때면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가 밥을 먹을 때면 당신은 늘 배가 고프지 않다며 식사를 거르곤 했는데, 아마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 따뜻한 쌀밥 먹게 해줄게.”
동생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신이나 웃었다. 나는 중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나는 가난이라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도 모를 나이였다. 하지만 나는 동생들이 굶지 않기를 바랐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동생들에게 옥수수 빵이 아닌 따뜻한 쌀밥을 먹일 수 있다는 작은 희망 하나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4년 2월 16일, 막상 집을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 중학교 교복을 사러 부모님과 시장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어린 내가 왜 돈을 벌어야하는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결정은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나는 무거운 마음을 누르고 시외버스를 탔다. 나의 첫 직장은 대구에서 주물공장을 운영하는 종고모부 공장이었다. 14살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견습공으로 공장에서 철판을 옮기는 작업자의 보조역할을 했는데, 보조 일에 사소한 잡일과 심부름까지 해야 했다.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면서 늘 어른들의 기분과 눈치를 살피며 억울함과 서러움 속에 일을 해야 했지만, 월급을 받을 때면 그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조금만 더 견디자.’ 힘을 내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 취직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일을 하다가 나의 부주위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멍하니 손만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흐르는 피가 거짓말 같았다. 나는 손이 나을 때까지 집에서 쉬며 병원치료를 받기로 했지만 손이 나아도 공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손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던 것 같다. 그렇게 며칠을 방에만 처박혀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주방 그릇이랑 연탄 불 마개를 사러 시장에 가려는데 같이 갈래?” 내가 살던 자취방의 주인집 아주머니는 나를 자식처럼 아껴주셨는데,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있는 내가 안쓰러웠던 것 같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서문시장 동산상가에 갔고, 오랜만의 외출은 내 우울함을 날려주었다. 물건을 살 동안 시장을 구경하고 오라며 아주머니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평소 접해보지 못한 그릇들과 물건들이 신기하고 생소해 시장을 뛰어 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러다 번개처럼 눈앞에 스쳐가는 글을 보게 되었다.
「종업원 구함」
종업원? 나는 구경을 멈추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종업원으로 일을 할 기회를 달라고 했지만, 사장님은 내가 너무 어리고 키가 작아 일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시켜만 주시면 성실히 일하겠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장님은 곤란해 하시며 “여기는 배달 업무가 많아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나는 사장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비록 키도 작고 다리도 짧지만! 자전거를 탈 때 다리 한발은 올리고 한발은 내리면서 잘 탈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사장님은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나는 물건을 배달하다 파손되면 100% 책임을 진다는 조건하에 그릇가게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위험한 주물 공장보다 나을 거라며, 어린 나이에 스스로 일을 찾아 낸 나를 기특해하며 칭찬해주셨다. 아주머니와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공장에 가서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고, 종고모부님은 “너의 근면 성실함이면 어떤 일이든 잘 할 것이라 믿는다.”며 날 응원해주셨다. 종고모부님은 그동안의 수고비를 챙겨주시며, 손가락이 절단 된 것에 크게 마음 아파하셨다. 그렇게 나는 1974년 9월 19일 서문시장 동산상가에 위치한 「미광상회」에 첫 출근을 했다. 첫 출근을 하는 날 나는 결심했다.
‘내 가게를 내자!’
나는 가난이라는 절망과 싸우기로 했다. 가난을 꺾지 않으면 평생 가난에 짓눌려 살 것이 분명했다. 14살의 나이에 나는 손가락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단단한 의지를 얻었다. 훗날 내 가게를 경영하겠다는 목표는, 가게 일을 하는데 있어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다. 나는 종업원이었지만 가게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고, 다른 동료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했다. 사장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장사 노하우를 보고 듣고 배웠다. 어떤 손님이든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했고, 그릇 하나하나를 내 것이라 생각하며 소중히 관리했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 후 거래처 리스크관리와 금융권 자금조달까지, 가게 경영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나는 치열하게 내 것을 축적하며 희망을 키워나갔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으로
두 기둥을 떠나보내며
할머니가 운명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나는 가게에서 일을 하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영문도 모른 채 아침 일찍부터 대성통곡하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정신을 차려 사장님과 사모님께 할머니의 비보를 전했다. 두 분의 배려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갈 수 있었다. 눈물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는 맏손자인 나를 아주 아꼈고 나도 그런 할머니를 가장 의지하고 따랐었다. 할머니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죄책감은 지금도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셨는데, 노년에 깊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으셨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전 재산을 모두 잃고 극단적 선택까지 하셨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크셨을까.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할머니는 늘 손자손녀들을 챙기셨고, 사랑으로 배불려주셨다. 장례식 날, 할머니가 누워계신 봉분 앞에서 산천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의 실수로 우리 가족 모두가 엉망이 된 것 같았다. 할머니가 떠나간 것도, 내가 손을 다친 것도,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도 모두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았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가게로 돌아와 동료들과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꾸 슬픔이 올라와 쉴 수가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매장정리를 하고 다른 동료를 대신해서 배달을 갔다. 몸을 혹사시켜야 잠을 잘 수 있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나는 한동안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골 병원으로 달려가니 동생들이 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에 모여 울먹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보였다. 부인과 7남매를 남겨두고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해주세요.
아버지를 미워한 마음 봄날에 눈 녹듯 녹여주시고
그 못 다한 무거운 짐 편히 내려놓으세요.
어머님과 동생들은 이제 제 어깨에 맡겨 주세요.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지만 그 마지막은 아주 조금 편안해보였다. 향년 50세.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친구 분들의 도박 빚보증을 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찍 세상과 이별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먼저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 고된 머슴살이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었는데, 아버지가 떠나니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픈 현실과 지독한 가난이 미웠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보내며 나는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피겠다고 다짐했고, 고생 많았던 우리 아버지 부디 근심걱정 없는 곳에서 편히 영면하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어린 시절 아픔을 겪으며 나는 지금까지 도박을 해본 적도, 도박을 하는 친구도 두지 않았다. 아픔을 겪었기에 올바르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실수로 집이 무너져 긴 시간 절망 속에 살아야 했지만, 그러한 절망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손을 다쳤기에 그릇 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내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이를 더 악물었다. ‘우리 집의 든든한 두 기둥을 떠나보냈으니 이제 내가 기둥이 되어야 한다.’ 어깨가 무거웠지만 이를 견뎌내면 분명 난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겐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고 꿈과 용기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가난 속의 행복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월급을 어머니께 보내드리며 이 돈은 꼭 동생들의 학비에 써 달라고 부탁했다. 동생들만은 배우지 못한 서러움을 몰랐으면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내 가슴 한 편에는 늘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자리해 있었다. 다른 것보다 영어를 꼭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면 해야지 하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아 묻어두곤 했었다. 어느 날 출근길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상점에 자주 오시는 단골 고객님을 만났다. 버스를 기다리며 손님은 내게 종교가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한 며칠 후 토요일, 그 단골손님이 가게에 와 내일 일요일에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다. 휴무일에 할 일도 없고 해서 함께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서 야학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담당 선생님께 문의를 하니 학력을 인정받는 수업이 아니라 생활야학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공부를 했다. 생활야학을 수료하고 나니 조금이지만 용기가 생겼고 나는 대구검정고시 학원을 찾아갔다. 막상 학원 앞에 서니 부끄럽다는 생각에 한참을 학원 건물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건물 앞에 서서 한숨만 쉬고 돌아가기를 여러 번한 후에야 나는 학원 문을 열 수 있었다. 상담원과 간단히 얘기를 나누고 검정고시 담당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내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초가 없어도 차근차근 천천히 시작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내 학원을 등록했다.
학원 수업 첫날은 꿈에 그리던 영어시간이었다. 나는 알파벳을 몰랐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칠판을 보고 아이가 그림을 그리듯 알파벳을 그려 나갔다. 주위 학생들은 나이가 많은 나를 안타까워하며 그림을 그리지 말고 알파벳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칠판만 보며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기초가 하나도 없었던 나는 좀처럼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다. “졸업장을 미루더라도 알파벳부터 외운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날 이 후 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시장 모퉁이에 앉아 영어 알파벳을 소리 내어 읽고 눈으로 익혔다. 꾸준함과 성실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금세 알파벳을 떼고 영어단어와 문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근무를 하면서 수학공식을 외우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실력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니 공부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다. 일을 마치고 식사도 거르고 학원에 달려가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잠도 자지 않고 복습하고 또 복습했다. 나는 작은 자취방 천장과 벽면에 수학공식과 영어단어로 도배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천장과 벽면에 인사를 하고 잠이 들었다. 자나 깨나 공부할 수 있는 수학책과 영어책이 되어주어 고맙다고 말이다. 고입검정 시험에 원서를 제출하고 나서는 한 번도 저녁 약속을 잡아본 적이 없다. 일을 하면서도, 일이 끝나고도 책과 씨름을 하며 공부에 매진하고 또 매진했다. 그렇게 시험 발표가 나던 날, 출근을 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 뿐 아니라 동료직원들과 시장 사람들, 사장님까지 모두 떨리는 가슴으로 하루를 보냈다. 퇴근을 해서 학원에 가니 선생님이 “이우현 축하한다. 합격이다.”하며 합격증을 건네주셨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보다 몇 배는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다음날 우리 상점과 시장은 내 합격소식에 떠들썩해졌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함을 느꼈다.
이어 나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학문에 눈을 뜨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준 검정고시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도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검정고시를 하며 느꼈던 건 도전과 노력 없이는 그 무엇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꿈과 열정이 있는 자만이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가난 속에서도 행복이 피어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행복은 내게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휴일 오후면 대구 수성호수에 가곤 했는데, 잔잔한 호수의 산책길을 걸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었다. 여느 때처럼 산책길을 걸을 때였다. 연인들이 행복하게 오리 배를 타는 모습을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는데,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갔다. 오늘의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 후 나는 호수에 갈 때마다 그녀를 기다렸고 그녀는 나를 알아보았다.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고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휴일마다 그녀를 만나면서 나는 휴일이 아닌, 매일을 그녀와 매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결혼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고 했다. 부모님이 계시지만 능력이 없어 언니와 함께 가계를 책임지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래로 동생이 6명이라며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았다.
“우리 함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자.”
사랑 앞에 가난은 이유가 될 수 없었고, 그녀와 나는 비슷한 처지인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했다. 화려한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행복한 마음으로 1985년 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집은 남구 대명동에 거실에 방 하나 있는 셋방이었다. 양가 집안이 모두 빈곤했기에 우리는 저축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모든 것을 아껴야했지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다.
“아랫목이라도 뜨끈하게 연탄 좀 더 때자.”
임신한 아내가 걱정되어 연탄을 때자고 하면 아내는 괜찮다며 연탄 한 장이라도 아끼자고 했다. 나는 아내 몰래 새벽에 일어나 연탄을 때며, 연탄구멍으로 솟아오르는 따뜻한 불길에 아내와 아이의 건강을 빌었다. 다음날 연탄이 많이 들어갔다며 아내에게 야단을 들어야했지만 나는 아내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알뜰한 사람이었다.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찡해온다. 내가 돈을 벌어서 아내를 호강시켜 준다고 하면 아내는 그 돈을 모아서 날 호강을 시켜준다고 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서로를 다독이며 누구보다 행복했다.
긴 시간 동안 나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고 사는 것이 먼저였기에 어린 나이에 학교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내는 데 급급했던 내가 미래를 꿈꾸며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가난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혼자라는 외로움을 떨쳐버린 것만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한여름의 찌는 무더위와 엄동설한의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느낀 행복은 내 삶을 지탱해 준 힘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행복을 떠올리며 많은 시간을 위로받곤 한다.
나는 작은 거인
내 별명은 작은 거인이다. 성장기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된 일에 시달리다 보니 키도 크지 못했고 몸집도 외소한 편이다. 시장 상점 점주님들은 작은 몸집에도 무거운 짐을 당차게 들고, 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내게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 몸을 써야했던 일이었기에 퇴근 후 집에 가면 몸은 늘 천근만근이었고 저녁을 먹을 힘도 없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추운 겨울날 퇴근해 집에 가면 꺼진 연탄불을 피울 힘도 없어 차가운 바닥에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 냉수에 씻고 출근을 했던 적도 많았다. 밀린 집안일에 세탁물을 빨고 집안 정리를 하느라 휴일에도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19년 8개월을 쉬지 않고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 그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1980년 12월 「재래시장 모범 종업원」으로 선정되어 대구시장 표창을 받기도 했었다. 지금도 서문시장의 작은 거인이라면 오래된 상점 주인들은 나를 기억한다고 한다.
19년 8개월이란 세월을 뒤로하고 가게를 그만 두던 날, 사장님과 사모님은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셨다. “정말 수고 많았다. 따뜻하게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앞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두 분은 약소하지만 사업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금일봉까지 챙겨주셨다. 두 분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상점을 나오니 이웃 점포 사장님과 사모님, 주변 상인 분들 모두 내게 인사를 하기 위해 나와 계셨다.
“이군! 자주 놀러와!”
“여기서 일한 거 반 만해도 성공할 거야!”
“성공했다고 나 잊으면 안 돼”
“작은 거인! 파이팅!”
그 날 흘린 눈물과 감회는 오늘 날 나를 우뚝 서게 만든 힘이 되어주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 보상의 대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경동상회」
1997년 4월, 나는 평생 꿈꿔왔던 나의 가게를 열었다. 그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며, 동생들 공부를 시키고 내 집을 마련하고 드디어 내 가게까지 갖게 된 것이다. 가난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었기에 자식에게는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나는 무조건 성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선 초대형 시설에 밀려 쇠퇴 일로에 처한 상가 재건이 급선무였다. 나는 가게에 경영을 접목시키기로 했다. 재래시장 상가의 획기적인 변신을 위해, 신용카드 단말기 도입과 상품 정찰제실시를 상가 번영회 회장님과 이사님들께 꾸준히 건의했다. 이 후 승낙을 받아 신용카드 결제를 실시했고, 이는 재래시장에 대한 신뢰 회복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IMF 경제 위기 때에도 수입품그릇과 분청 질그릇을 전략상품으로 도입해 경영의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했다.
이 후 나는 상가 번영회 회장과 이사님들께 계획을 수립하여 전달하며 시장 환경의 변화에 앞장섰다. 무질서하고 협소했던 상가통로를 정리하고 확장하여 쇼핑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어둡고 침침하던 실내조명을 밝은 조명으로 바꾸었다. 변화를 싫어했던 상인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고객들의 쇼핑요구를 충족시키는 환경이 중요하다며 설득했다. 편의시설도 늘렸는데, 출입구의 작은 공간을 아늑한 쉼터로 만들어 고객들의 발길을 유인했다. 그 후 시장 상권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상인들은 재래시장이 현대식 쇼핑 시설과 당당히 경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동산상가를 재래시장의 이미지가 아닌 현대식 그릇 백화점으로 탈바꿈하고 싶었다. 이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하고, 소매 유통전문인 양성과정을 이수하는 등 대구 경제 포럼에 가입해 경영 마인드와 마케팅 방법을 익혔다. 시장재건을 위해 번영회이사로 관계기관을 방문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 결과 서문시장에서 실시하는 친절 매장 1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친절한 웃음으로 고객을 맞이하는 건 종업원 시절부터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내 가게를 낸 이 후에도 나는 친절교육을 수시로 받았고, 직원들도 선진 판매기법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투자를 했다. 교육 덕분인지는 몰라도 매출은 날로 성장했고, 상인들은 점원 출신의 작은 거인이 성공의 신화를 창조했다며 이구동성으로 날 칭찬했다.
나는 내 인생에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고, 은행 대출을 받아 인근 점포를 매입해 사업을 확장하고 종업원을 충원했다. 이 후 무리한 대출과 사업 확장이 날 무너뜨릴 것을 생각지도 못한 채…
나의 가족, 나의 생명
아들은 꿈은 연예인이었다. 배우지 못한 아픔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당시 예술대학에 다니던 아들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지인의 소개로 서울의 모 기획사를 방문해 아들의 면접을 성사시켰고, 기획사에서는 아들의 소질과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계약을 하자고 했다. 나와 아들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서울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계약을 하는데, 나는 여러 장의 계약서 내용을 충분히 숙지도 않은 채 기획사 측의 말만 믿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나의 삶은 그 날 이 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사업을 맡기고 아들 뒷바라지에 모든 걸 걸었다. 기획사 측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각종 프로그램 교육을 이수하고, 유능한 매니저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요구한 금액을 지급하고 또 지급했다. 기대에 부풀어 기획사를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방송에 출연할 것이라며 거액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지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잘못 디딘 발이 흙탕물에 빠져 시커먼 암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기획사의 말에, 수중에 돈이 없어 지인에게 차용까지 해 큰 금액을 건넸는데 그 이틀 후 저녁 9시 뉴스에 기획사의 부도 소식이 나왔다. 그 때 받은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심장이 내려앉고 온 몸이 떨렸다. 내 눈과 귀를 의심했지만 뉴스는 사실이었다. 다음날 새벽 열차를 타고 기획사로 달려갔지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곧 이어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무실에 달려왔고 사무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고성이 오갔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그 일이 있은 후 사업도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은행에서 거래처 물건 판대 대금으로 받은 유가증권(당좌,어음)이 부도가 났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이 왔다. 거래처의 연쇄부도로 자금 압박까지 받게 되었는데, 물건을 구입한 공장에서 결재를 요구하면 당장에 돈이 없어 물건을 헐값에 팔아 대금을 지급해야 했다. 지인들과 일가친척들에게 사채를 빌려 결재를 하며 갖은 방법을 강구했지만 자금융통의 어려움으로 나의 사업은 10년 만에 도산의 아픔을 겪어야했다.
부도 후 우리 가족은 정들었던 보금자리와 점포, 기물들을 채권자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애지중지 아끼던 물건들을 버리고 돌아서는 가족들의 눈물은 지금도 내 가슴을 칼로 찌르는 아픔이다. 나와 아내는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우리 가족은 남산동 자동차골목 2층에 셋방을 얻었다. 아직 변제해야 할 잔여 채권이 있었기에 아내는 심신이 망가진 상태로 통닭집 알바를 해야 했고 아들과 딸도 산업현장에 투입되어야했다. 연예인의 꿈을 접고 방황의 터널에서 힘들어하는 아들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된 나의 자식들, 그리고 다시 가난의 고생을 시작하게 된 나의 아내… 모든 게 내 탓이었고 나는 가족을 볼 면목이 없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노숙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왔다. 낮에는 일용직 잡부로 일을 하고 밤에는 문화예술관 야외무대에서 신문지 몇 장을 이불삼아 잠을 잤다. 무대 구석에 신문지를 덮고 누울 때면 나는 어둡고 텅 빈 무대가 꼭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외무대에서 무료로 하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어두운 밤, 어두운 무대에 조명이 비추는 걸 본 나는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도 다시 빛이 비춰질까?’생각했다. 나는 일이 끝난 밤이면 늘 무대를 찾았고 가끔 켜지는 따뜻한 조명에 큰 위로를 받았다. 후일 연극을 배워 지금도 가끔 연극인으로 무대에 오르곤 하는데, 생명을 잃은 것 같은 무대에 발을 딛고 조명을 받으면 내가 다시금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노숙생활은 긴 시간 이어졌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날 찾아왔다.
“함께 이겨내자. 그 옛날 가난했지만 서로의 힘이 되어주었을 때처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밉고 또 미웠다. 하지만 내게도 위로가 필요했고 가족이 필요했다. 당시의 나는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채권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가족들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를 붙잡아준 가족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의 힘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나의 생명이었다.
검정고시인의 기적
바닥까지 무너진 나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수중에는 돈도 없었고 신용불량자라 금융권 대출도 받을 수 없고, 사채도 빌릴 수 없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했기에 시장에서 일당을 받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검정동문회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자네 영업실력이면 조그만 가게를 임대해 사업을 재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친구는 내게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수중에 10원도 없고 지금도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라 사업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사업을 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해?” 물었지만 나는 사업은 생각도 하기 싫다며 친구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날 친구의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던 내게 작은 빛이 되어주었다.
‘작은 거인답게 다시 일어서자!’
며칠을 생각하고 고민했다. 이렇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느니 다시 도전해서 일어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무너져있을 시간에 일어나고 싶었다.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근처 커피 가게에서 다시 만났다.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친구를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사업하는 거 생각해 봤어?” 친구가 내 의중을 읽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는 얼마 전 승합자동차를 판 돈 1,500만원을 은행에 예치했는데, 내가 필요하다면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며 뭐든 도와주겠다고 했다. 눈물이 흘렀다. 여전히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사업을 시작해 성공하면 반드시 이 은혜와 감사를 갚겠다며 눈물을 닦았다.
신용불량자였던 나는 사업자 명의나 은행 통장도 친구의 명의로 개설해야 했고, 나는 친구에게 체계적인 영업 전략과 사업 실행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친구는 그런 나를 믿어주었고 우리는 사업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나는 8개월간의 떠돌이 생활과 일용직을 접고, 공실 점포를 임대하기 위해 칠성시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공실 점포가 없었고 정품 장사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냈다. 나는 중고물품을 판매하기로 사업 방향을 바꿔 중고물품을 취급할 수 있는 판매장을 임대했다. 친구가 차용해준 1,500만원으로 점포 임대 보증금과 판매 진열장, 간판을 주문했는데 그러고 나니 사업운영자금이 부족했다. 여러 군데 돈을 빌리러 다녔지만 부도 후 빈털터리가 된 나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오래 전 내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도움을 주었던 김복중 검정동문인이 떠올랐다.
대구검정고시 동문회 10대 회장을 역임한 김복중 검정동문은 내가 경동상회의 문을 열 당시, 금융권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나의 사업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나는 김복중 동문을 찾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는 얼마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나는 급한 대로 500만원이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복중 동문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500만원 가지고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내 통장에 300만원이 있는데 그 돈과 대출 500만원을 받아 모레 오전까지 800만원을 빌려 드리겠습니다.” 김복중 동문은 차용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사업에 매진해 후일 원금만 갚아달라고 했다.
“우리, 가시밭길도 맨발로 걸어갈 수 있는 의지의 검정고시인 아닙니까? 지난날의 아픔을 거울삼아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식사 값을 지불하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성공하기로 했다. 기필코 사업에 재기해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 봉사와 나눔을 하는 삶을 살리라! 나는 겸손과 배려로 일한다는 마음으로 상호를 「우리 주방」으로 정했다. 충분한 시장조사와 물건 구매에 판매까지 신중을 가하고 또 가했다. 식당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철거하고, 중고 기물을 판매장에 가져와 세척해 상품으로 만들어 진열했다. 퇴근 후에는 식당으로 명함을 뿌리며 쉬지 않고 영업을 했고 이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40여 년 동안 해왔던 그릇판매와 영업실력은 내가 다시 일어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주방」의 판매율을 점점 높아져 알바를 하던 아내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성실과 책임, 신용을 바탕으로 물건을 구매하고 판매했고, 이를 신뢰한 고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육체적 노동이 힘들긴 했지만 쉴 수 없었고, 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았다. 물량이 많아 적재할 곳이 부족해 새로운 창고를 임대했지만, 자만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정도만을 걷기로 했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주방용품의 모든 것을 취급하며 식당신설 주방설비설계, 제작, 시공, 창업컨설팅까지 체계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사업 시스템이 정착되었을 즈음, 사업의 종자돈을 마련해 준 800만원을 변제하기로 마음을 먹은 나는 김복중 검정동문을 만났다. 원금과 이자를 넉넉히 준비해 선물로 양주 한 병을 건넸다. “나는 이 동문님이 꼭 성공하리라 확신 했어요. 원금은 받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술 선물도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 후 제가 동문님께 신세를 질지도 모르니 이자는 사양하겠습니다.” 김복중 동문은 극구 이자를 사양하며 “우리 검정동문 아닙니까”하며 웃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나는 변제하지 못한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돈을 갚고 용서를 빌었다. 나의 사업파트너가 되어준 친구는 독립하여 사업을 키워나갔고, 나는 공장과 도매상회, 은행권 채무를 모두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부도 후 11년 만에 신용불량자가 해제되었고, 은행통장과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실하고 근면하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의지의 검정고시인이라는 것만으로 나를 믿고 아무런 담보도 없이 큰돈을 빌려준 검정고시인들은 내가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함께 만들어 준 소중한 분들이다. 나는 검정동문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 독거노인 분들과 재활원에 정기적으로 현금과 생필품을 보내고, 각종 사회 봉사단체에 가입 해 봉사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검정동문의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기적은 바로 검정고시인의 기적이다.
내 인생의 선물
1988년 3월이었다. 봄과 가을 중·고등학교 주위를 지날 때마다 교문에 걸려있는 동문체육대회나 동창모임이 부러웠던 나는, 검정고시 공부를 함께한 친구들 10여명을 만나 동문회 발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여러 번의 회합 끝에 동문회 발기를 하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고 회장에 60년 이해일 동문을 추대했다. 모임을 결성하던 날,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허전함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러했던지 우리는 밤을 세워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대구 동문회가 발기 된 후, 우리는 동문들을 찾기 위해 일간 벼룩신문과 교차로에 ‘검정동문을 찾는다’는 광고를 냈고, 검정고시 전문학원과 실업학교, 야학 선생님을 찾아 검정고시 합격자명단을 수집하여 우편물을 발송했다. 시내 통행이 빈번한 곳에 구청의 협조를 얻어 검정고시 동문참여를 유도했다. 기대만큼 성과는 좋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서울에서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가 발족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해진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끼기도 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동문들은 어떤 동문회보다 더 정감이 넘쳤고, 만나기만 하면 헤어지기 아쉬워 늘 밤을 지세우곤 했었다.
나와 동문들은 「허 병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허준영 원장님이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장님께 초대 대구검정고시동문회 회장을 맡아 주실 것을 요청 드렸다. 꾸준한 방문 끝에 원장님은 이를 승낙하셨고, 우리는 ‘대구동문회 창립총회’를 열게 되었다. 초대회장님으로 취임하신 허준영 원장님 덕분에 동문 회칙을 만들고 동문회의 새로운 조직 기구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회장님은 사비를 내어 전폭적인 지원을 하셨고, 우리는 수시로 모임을 가지며 동문회 활성화에 많은 고민을 했다.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새로운 동문들이 동문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대회장님의 헌신적인 봉사와 회원들의 노력으로 오늘 날 대구동문회는 400여명의 동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 검정고시 대구동문회 10대회장을 역임한 김복중 동문을 만나게 된 것도 검정고시의 힘이었다. 내가 경동상회를 운영할 때였다. 나는 매장에서 월간조선이라는 잡지를 보고 있었고 김복중 동문은 손님으로 매장에 들렸었다. 고교검정고시출신 강운태 농수산부장관이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있는데, 이를 본 김복중 동문이 “검정고시동문이 있습니까?”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있습니다. 저도 검정고시 출신입니다.”라고 했고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수십 년을 함께한 죽마고우처럼 느껴졌다. 김복중 동문은 그 자리에서 동문회 가입의사를 밝혔고, 나는 회장과 총무에게 사실을 알리고 김복중 동문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김복중 동문이 가입한 후 동문회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김복중 동문은 사비로 대구 동문회 깃발을 만들고 동문들의 애경사에 앞장 서 참석을 독려했고, 동문배가 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며 대구검정 부흥의 선봉장 역할을 감당했다.
이에 힘을 받은 우리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 팔공산 산행을 개최했는데, 그 준비만 6개월이 걸렸다. 먼저 대구 동문회 제12대 이영세 회장과 김복중 추진위원장, 나와 김대환 사무국장, 준비위원들은 행사준비자금으로 3,000만원의 예산을 수립했다. 이영세 행사 집행위원장의 500만원 협찬과 임원진들의 분담금, 동문들의 자발적 참여로 예산을 조기에 수립할 수 있었다. 2018년 5월 16일 우리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 초대 박영립 회장님과 현재 220만 검우인들의 수장이신 문주현 총회장님, 대구지역 400여 동문들의 우상이신 허준영회장님과 시·도 동문회 회장님, 그리고 500여명의 동문들을 한자리에 모셔 총동문회 산행 대회를 개최하였다.
문주현동문회총회장님은 인사말씀에 창립 이래 가장 성대하고 가장 많은 동문이 참석한 행사라며, 이영세 회장을 비롯한 대구동문들의 뛰어난 기획력과 단합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셨다. 500여명이 넘는 동문들의 박수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산행을 마치고 팔공산 유스호텔에서 전국동문들이 한자리에 모여 점심식사를 먹었는데, 뷔페 메뉴는 모두 훌륭했지만 특히 포항에서 공수해 온 문어가 아주 싱싱했다. 식사 후 시·도 동문들의 한마당 잔치가 열렸고, 우리는 여흥을 즐기며 지난날의 애환을 팔공산 자락에 날려 보냈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대구에서 또 한 번의 대회를 개최하고자 마음을 먹었었지만,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대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내가 회장이 된 후 가장 큰 아쉬움이다.
대구검정동문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32년 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금은 400여명의 동문들이 동문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지역동문회로써 최고의 동문회가 되었지만, 그 처음은 10여명의 작은 모임이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검정고시 출신은 누구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동시대에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아픔에 깊은 공감대와 동질감을 가진다. 오늘 날 내가 있기까지 검정고시라는 인연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저 암담할 뿐이다. 검정고시는 내 인생의 가장 값진 선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고 했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고 했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고 했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마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이 글을 읽는 그대들 모두 한 순간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