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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물건박물관 용산구 용산 전쟁기념관 내 기획전시실 (2층)http://www.funmuseum.com/
별난물건박물관은 홍대에 있던 모 IT 벤처 기업에서 시작했다. 애초에 박물관을 내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젊은 IT 기업답게 해외 출장을 다녀온 직원들이 출장길에 특이한 소품들을 하나씩 사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불문율처럼 자리해 출장 가는 직원들은 어김없이 재미난 물건을 하나씩 들고 돌아왔다. 그것이 모이고 모여 박물관 기획으로 발전한 것이다
보라매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12&lang=kr
보신각[普信閣]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84&lang=kr
보신각종(보물 제2호)은 조선 세조14년(1468)에 주조되어 원각사에 있다가 절이 폐사된 후 광해군 11년(1619)에 현재의 보신각 자리(서울 종로)에 옮겨져 왔다.
새벽이 열리는 4대문을 여는 파루(罷漏)는(오전4시)에 33번 타종, 인정(人定)는(오후10시)에 28번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각을 알리는데 쓰였다. 타종 횟수는 불교의 우주관인 '28계 33천' 신앙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정 때 28번은 불교 철학에서 천체를 28개로 분류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에 있는 별에게 밤의 안녕을 부탁한다는 의미가 있다. 파루 때 종을 33번 울리는 것은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 날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도리천(忉利天)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의역한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있으며 제석천(帝釋天:Indra)의 천궁(天宮)이 있다. 사방에 봉우리가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에 8천이 있기 때문에 제석천과 합하여 33천이 된다. 중앙에는 선견천(善見天)이라는 궁전이 있다. 선견천 안에는 제석천(帝釋天)이 머무르면서 사방 32성의 신(神)들을 지배한다. 이러한 사상이 불교에 수용되어 하나의 우주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제석천(帝釋天) 불교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고대 인도 힌두교의 신 인드라(고대 인도의 무용신(武勇神)·영웅신)를 불교에서 수용한 것이다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은 원래 고대 인도의 천신 중에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등장하였던 인드라신(Indra神)으로서, 부처의 감화를 입어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부처와 그 제자를 옹호하는 강력한 존재로 성격이 변화되었으며, 현실세계인 사바세계를 다스리는 천왕으로 지적되고 있다
조선시대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던 제도. 밤 10시경 종을 28번 쳐서 통행금지를 알렸다. 이것을 인정(人定)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새벽 4시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고 4대문을 열었다.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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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각종 몸체에 조선 세조 14년인 1468년에 만들어진 범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높이 318㎝에 이르는 대형 작품으로 성덕대왕신종과 연복사종 다음으로 큰 범종이다. 보신각(普信閣)종으로 불리우던 이 종은 원래 태조의 제 2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 곁의 원찰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정릉사가 폐사되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놓았다가 임진왜란 직후인 1597년에 원래의 종각과 종이 불타면서 이 종을 다시 종각에 걸게 되었다. 고종 32년(1895), 종루가 보신각으로 이름이 바뀜에 따라, 보신각 종이라 불리게 되었고, 현재의 종은 또다시 새로 조성된 것이다
봉은사[奉恩寺] http://www.bongeunsa.org/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25&lang=kr
북촌한옥마을 http://bukchon.seoul.go.kr/
원래 이 지역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옥이 많이 지어졌고, 1994년 고도제한이 풀리면서 일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총 2,297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408동이 한옥이고 나머지는 일반 건물이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북촌 거리에 북촌양반생활문화전시관과 북촌 한옥촌 상징조형물을 설치, 옛 선조의 생활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가회동 전통 마을축제를 열린다. 주변에 경복궁·창덕궁·덕수궁·금원·삼청공원·국립중앙박물관 등의 관광지가 있다.
북촌에 조선의 상류층이 살았다면 서촌에는 역관 등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
서울 북촌·삼청동·인사동 전통문화 거리(한국8경)
북촌문화센터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54&lang=kr
북촌/서촌의 문화
서촌의 가장 큰 매력은 인왕산. 18세기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국보 216호)에 나오는 그 인왕산이다. 인왕산 아래 옥인아파트에 가면 청계천 발원지도 만날 수 있다. 서촌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 아회(雅會·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모임)를 열었던 곳, 근대기 문인들과 화가들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다. 따라서 서촌에는 조선시대 이래 예술의 전통과 흔적이 전해오고 있다.
통인동에는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1937)의 집터, 누하동에는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가옥과 화실, 누상동에는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이 생활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가옥, 옥인동에는 한국화 분야의 원로 박노수 화백(82)의 가옥 등이 남아 있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사육신공원 노량진의 한강변 인근에 자리한다.
사직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56&lang=kr
살곶이다리(전곶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84&lang=kr
삼청공원
서대문독립공원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9미터에 이르는 공룡 모형 화석이 눈길을 끈다. 육식 공룡인 아크로칸토사우루스의 거대 골격인데 2억여 원이 든 작품으로, 박물관에서 가장 비싼 전시물이다. 이를 포함해 공룡 골격과 발자국, 암모나이트 같은 고생물에서 21세기 한강에서 볼 수 있는 토종 어류까지 3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광물과 암석, 공룡을 포함한 화석, 동식물 및 곤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물 표본들도 흥미롭다. 이 같은 전시물을 모형이나 디오라마, 입체 영상 등을 통해 재현해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한 측면도 두드러진 장점이다..
서울랜드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16&lang=kr
매표소를 지나면 세계 각국의 유명한 건축 양식의 건축물과 서울랜드의 상징인 지구별 돔이 있는 세계의 광장이 나온다. 길가에는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을 심어놓아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세계의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서부 개척시대의 풍물을 배경으로 연중 새로운 공연을 하는, 통나무 무대로 유명한 모험의 나라가 펼쳐진다.
서울 성곽
서울성곽길 :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07859
성에는 사대문(四大門 : 東―興仁之門, 西―敦義門, 南―崇禮門, 北―肅淸門)과 사소문(四小門:北東―弘化門, 南東―光熙門, 北西―彰義門, 南西―昭德門)을 냈다.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공사는 이렇게 끝났으나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의 도성 수축공사 때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성벽의 수리는 1451년(문종 1)에도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참변을 당하였고 1616년(광해군 8) 일부가 수리되었다. 그 후 1704년(숙종 30), 1743년(영조 19) 부분적 보수를 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끝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현재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대에 성벽이 남아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어질고 착함을 흥하게 하는 대문(동대문). 오행 중 목(木)에 해당되는 인(仁)을 표시하였다. 목은 동쪽이므로 풍수지리 적으로 약한 동쪽을 보완 해주기 위해 흥인(興仁)이라 하고 지(之)자를 더 넣었다. 또 옹성을 쌓아 허함을 보강하였다.
돈의문(敦義門) 의를 숭상하고 돈독하게 하라는 문 (서대문). 오행 중 금(金)에 해당되는 의(義)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중국과 통하므로 중국과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의미다.
숭례문(嵩禮門) 예를숭상 하라는 의미 (남대문). 오행 중 화(火)에 해당되는 예(禮)를 표시하였다.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서 다스린다는 의미고, 불이 잘 타오르도록 세로로 현판을 하였다.
숙정문(肅靖門) 맑고 고운 마음을 가지란 의미 (북대문). 이 문은 사람의 출입을 위하여 사용한 적은 거의 없이 수 백년 동안 닫혀 있었다. 이 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은 수기(水氣) 즉 음기(陰氣) 많아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해지고 놀아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엄숙히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지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 문이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의 주산인 응봉으로 통하기 때문에 지맥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문을 닫아 놓았다.
사대문은 이런 개념이며 음양오행에 마추어 신(信) 믿고 따르고 신뢰한다는 의미로 중간에 둔것이 현재 보신각 입니다
홍지문(弘智門) 지혜를 넓히고 알리자는 의미 이문은 사대문은 아닙니다. 성루입니다
또한 비가 오지 않는 한재에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은 것은 남쪽은 火에 배속되고 북쪽은 水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기운이 많은 숭례문을 닫고 물 기운에 해당되는 북쪽의 숙청문을 열게 한 것이다.
肅靖의 뜻을 풀어보면 ‘엄숙하게 다스린다’, 또는 ‘엄숙하고 고요하다’는 의미로 지혜(智)를 나타낸다. 참고로 모든 대문은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이라고 쓰지만 숙정문인 북대문만은 북대문이라고 안씁니다. 왜? 북쪽은 귀신이 다니는 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http://seoulmoa.seoul.go.kr/
서울역사박물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86&lang=kr
석파정(石坡亭) 흥선대원군 별장
이 별장에 눈독을 들인 석파 대원군이 술수(임금(고종)이 머문 곳을 사저로 쓸 수 없다)를 써서 손에 넣습니다. 이름도 자신의 아호를 따서 ‘석파정’으로 바꿉니다. 후손에게 대물림되던 정자는 주인이 바뀐 후 훼손이 됩니다. 1958년 서예가 손재형(추사 김정희 선생의 그림 '세한도'(歲寒圖)를 일본에서 천신만고 끝에 되찾아온 분)이 사랑채 부속 건물을 사서 계곡 아래 자신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지금은 석파랑이란 식당의 별채가 되어 석파정과 헷갈리게 합니다. 석파정은 개인 소유로 출입이 어렵습니다.
석파랑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계비가 살고 있던 집을 옮겨지은 것인데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건물에 품위기 느껴지는 곳인데 궁중한정식집을 하기에는 분위기가 정말 그만입니다.
석파랑을 들어서면 특이한 건물, 벽에 암.수 학 두마리가 날개를 활짝펴서 우아한 날개짓을 하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 벽돌로 된 만세문이 세워져 있는데 이 문은 1863년 고종황제가 즉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문으로 경복궁에 세워져 있었는데 무슨 연유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가능하면 다시 원래 세워져 있던 곳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정릉(삼릉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38&lang=kr
원래 정릉은 고양시에 있었다. 중종의 부인 문정왕후가 풍수지리에 입각해 선릉 곁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지세가 낮은 까닭에 침수가 잦았고 결국 무덤을 조성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은 태릉 옆에 안장해야 했다. 선릉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때는 도굴을 당했고 재궁이 불탔으며, 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또다시 화재가 일어났다. 이듬해 또 한 번 화재를 겪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약 400년이 지난 지금은 도시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로 거듭나, 우리 가장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
성균관[成均館] http://www.skkok.com/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721&lang=kr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세검정은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심 속 트레킹 코스의 종착점이자, 현대와 공존하는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다. 세검정의 명칭 유래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1623년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다. 이귀, 김류 등 반정군들이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한 후 반정을 모의했다. 그리고 거사가 성공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세종대왕기념관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175번지
세종대왕 일대기실은 세종대왕의 재위 기간 동안 업적을 그림을 통해 알려주는데, 글과 설명 대신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글실에는 세종대왕 재위 당시와 이후의 보물급 한글 관계 문헌 100여 종과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참고문헌, 한글 기계화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세종문화회관 http://www.sejongpac.or.kr/
세계 10대 공연장으로 인정받으며 한국 공연예술의 등용문이자 1970~80년대에는 한국 순수예술의 요람으로서 대한민국 대표 공연장으로 거듭났다. 20여 년간 명성을 유지해오던 세종문화회관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재단법인으로 체제를 전환했다. 2004년 3월 보수 공사를 마치고 서울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쇳대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16121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20&lang=kr
전시실은 총 3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의 열쇠란 열쇠는 다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열쇠와 자물쇠에 대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철제 자물쇠에서 조선 시대 비밀 자물쇠까지 다채롭기 그지없다. 조선 시대 유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심우장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34&lang=kr
안중근의사기념관 중구 남대문로5가 471번지
혈서를 쓰기 위해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른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도장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先史住居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92&lang=kr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63&lang=kr
어린이대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60&lang=kr
1973년 개장한 어린이대공원은 가족 나들이 코스로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다. 개장 후 36년이 지난 2009년 5월에는 2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새 단장을 마치고 어린이들을 맞이했다
1955년 시작된 제등행진이 1996년 새롭게 단장되어 문화축제로 발전된 것이 연등축제이다. 1,500여 년 간 이어져 온 연등문화를 주제로 한 종교축제이자 전통문화축제로 삶의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고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새 세상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국민축제로 승화한 행사이다.
행사는 시청앞 점등식을 시작으로 각양각색의 전통등 전시회, 관람객이 직접 등을 만들고 전통놀이와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거리행사, 연등법회, 수만 명이 등을 들고 행진하는 제등행진과 모든 염원을 하나로 모으는 회향 한마당이 종로와 우정국로에서 열린다.
연등법회는 3만 여명의 제등행진 참가자들이 만든 등과 악기, 깃발을 들고 노래와 함성으로 제등행진의 출발을 알리는 법회이다. 식전행사로 연합합창단과 관현악단의 공연, 연등축제 깃발과 전통 장엄등을 앞세운 단체별 연희단 입장식, 대중율동 시간을 갖는다. 법요식은 이운(移運) 및 관불의식, 명종3추, 삼귀의, 반야심경, 개회사, 경전봉독, 대통령축하메시지, 남북공동발원문, 기원문, 행진선언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등행진은 법회가 끝난 후 취타(吹打:만파정식지곡)와 사물놀이가 분위기를 돋우고 흰코끼리, 용, 연꽃 모양의 장엄등과 깃발, 10만여 개의 오색등이 물결을 이룬 가운데 종로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회향한마당은 연등축제를 마무리하는 잔치마당으로 연희단놀이마당, 발원지소지의식, 풍등비상식, 강강술래, 난장마당이 펼쳐진다.
영화사[永華寺]
예술의 전당 http://www.sac.or.kr/
1988년 음악당과 서예박물관을 시작으로 단계별 개관이 이루어진 예술의 전당은 1993년에 이르러 전체 개관을 마무리했다. 우리 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국제적 문화예술의 연대성을 높이기 위해 1982년부터 추진해왔던 사업이다.
오페라하우스와 음악당, 한가람미술관,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서울서예박물관 등 예술의 전반적인 영역을 두루 수용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원형 광장을 비롯해 만남의 거리, 전통 한국 정원, 야외극 공연장 등 옥외 공간에도 힘을 쏟았다. 예술 아카데미를 열어 예술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동시에 지원하는 공간도 마련했다. 미술 아카데미, 음악 아카데미, 서예 아카데미 등을 통해 대중들이 예술에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술의 전당을 대표하는 건물은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오페라하우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갓을 형상화한 건물로 예술의 전당 내 전체 건물 중 제일 마지막으로 완성되었다. 세계 유수의 공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손색없을 만큼 그 규모와 시설이 훌륭하며 예술의 전당 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조성한 공원이다. 올림픽공원은 흔히 몽촌토성과 헷갈리는 일이 많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공원이고 토성인지 모호하다. 실상 굳이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올림픽공원 조성이 발표되면서 148만 5000제곱미터 대지에 몽촌토성의 복원도 함께 이뤄졌다. 쉽게 설명하자면 몽촌토성을 중심에 두고 올림픽 관련 기념 시설들이 주위로 들어선 형국이다.
올림픽대교(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우정총국[郵征總局]
그러나 12월 4일 우정총국 청사의 개업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12월 9일(양력) 폐쇄되었으며, 1895년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舊制)인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운현궁[雲峴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35&lang=kr
원각사지 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국보 제2호]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尹奉吉義士 記念館) http://www.yunbonggil.or.kr/
국기게양대에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 전에 농촌발전을 위해 설립했던 월진회 깃발이 게양되어 있다. 월진회기(旗)는 태극기와 같은 하얀바탕에 3개의 초록색 굵은선이 있고 그 사이에 무궁화를 넣은 깃발이다.
율곡로(미지(美知)의 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이 길이 지나는 관훈동에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이(李珥)가 살았던 곳이 있어 그의 호를 붙여 율곡로라 명칭하게 되었다. 동십자각에서 이화동4거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폭 30m' 연장 3㎞의 동서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이다.
이화장[梨花莊] 배꽃이 피던 동네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86&lang=kr
인사동 길(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1986년 대학로가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된 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4월 13일부터는 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거리축제가 열린다. 고미술품·골동품·골동서화뿐 아니라 선인들의 생활도구·장신구 등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갖가지 전통공예품 등이 집결되어 있어 옛 정취가 그윽하다.
인사동전통문화보존회와 종로구 주최로 1987년부터 해마다 4∼5월 무렵에 인사동전통문화축제가 열려 한국전통예술공연·문화상품특별전 및 화랑 20개소에서 기획전시를 연다.
조선 말기의 정치가인 박영효(朴泳孝)가 살았던 부마도위박영효가옥(서울민속자료 18)을 개조하여 꾸민 경인미술관이 있으며, 미술관 안에 전통적인 한옥의 안채를 개조하여 꾸민 다원이라는 찻집이 있다. 당시의 생가는 1996년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통째로 옮겨졌다.
장충단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98&lang=kr
전쟁기념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64&lang=kr
정동제일교회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07&lang=kr
이토록 오랜 역사 속에 있었던 정동제일교회를 혹자는‘벽돌로 쓴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한말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동길을 따라 일어났으니 이곳에서 근현대사를 탐방해볼 만하다
정릉
조계사[曹溪寺] http://www.jogyesa.kr/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87&lang=kr
종묘[宗廟]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67&lang=kr
문화재청 한국의 세계유산 종묘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3.html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해인사 장경판전,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 정전(正殿)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동·서월랑을 포함하여 길이가 101미터가 되는 길고 장중한 건물입니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세 부분으로 된 이 길의 중앙길을 신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 좌편은 왕이, 우편은 왕세자가 걷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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