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원만큼 벌어요.” 지난 10월23일 브레이크댄스 세계대회에서 1등한 한국 댄스팀 ‘갬블러’(gambler) 멤버들의 한마디다.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개최된 15회 세계 브레이크댄스대회에는 전세계 18개국에서 예선을 통과한 각국 최고들만이 참가했다. 한국팀은 이 대회에서 브레이크댄스 종주국인 미국조차 꺾어버리고 세계 최강자로 거듭났다.
독일에서 열린 세계대회의 공식명칭은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였다. 전쟁 치르듯 경쟁팀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는 의미에서 ‘댄스 배틀’이라고 불린다. 얼마 전 가수 세븐이 등장한 삼성 애니콜 CF가 바로 ‘댄스 배틀’의 춤대결 모습이다.
어느 날부터 한국사회에 자리잡기 시작한 단어 ‘비보이’(B-BoyㆍBreak in Boy). 바로 이들 갬블러와 같이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브레이크댄스 중에서도 가장 고난이도로 분류되는 ‘비보잉’(B-Boying)이라는 장르를 추는 사람들이 바로 비보이다. 비보잉은 다른 브레이크댄스에 비해 액션이 강하고 몸을 자유자재로 써야 한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다리를 하늘로 뻗어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몸을 흐느적거리는 동시에 툭툭 강하게 끊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비보잉이 처음 들어온 것은 약 10년 전이다. 현재 국내에는 100여개의 비보이팀이 활동 중이다. 이중에서 일정 수입을 올리며 방송과 CF 출연 등으로 이름을 알린 팀은 3개 정도다. 지난 2002년 세계대회인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우승한 ‘익스프레션’(expression!)과 올해 세계대회 우승자 ‘갬블러’, 익스프레션 멤버 일부가 재결성한 ‘드리프터스’(drifters)가 이들이다. 현재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인 비보이 1세대들은 90년대 초중반 여느 중고생처럼 ‘서태지와 아이들’의 브레이크댄서 이주노를 보고 자랐다. 이들은 대부분 중고생 때부터 비보이 세계에 뛰어들어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비보잉 장르를 개척해 왔다.
1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대회를 제패, 이제는 ‘브레이크댄스’ 기술을 이끌어나갈 정도가 된 비보이들은 고성장 비결을 ‘오직 연습’이라고 강조한다.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춤 연습을 한 비보이도 있고, 춤을 추기 위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들도 있다. 이론 공부 또한 충실히 해 ‘스터디그룹’을 결성, 해외 비디오와 교재를 보면서 연습을 한다. 이제는 ‘비보잉 이론 강국’ 한국이 돼 이론이 강한 만큼 부상도 예전만큼 당하지 않는다.
춤을 위해 술과 담배에는 입조차 대지 않는 비보이들도 적지 않다. 부모님 등 주변사람에게 ‘춤에 미쳤다’는 비난과 걱정을 사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춤으로 1인자가 되겠다’는 근성으로 버틴다. 일부 비보이들은 “군대를 다녀오면 몸이 굳는다”며 “군대 가기 전 승부를 보겠다”고 저력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한국의 비보이들은 최근 1~2년 사이에 각종 세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국내 비보이대회 실황 비디오가 유럽 비보이들의 교과서로 불릴 정도다.
비보이들은 한국이 단기간에 ‘비보이’ 강국이 된 비결을 ‘과열된 비보잉 문화로 인한 맹렬한 연습’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청소년 문화가 미미한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춤’이 하나의 중요한 탈출구이자 키워드가 된 결과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앞서 언급한 갬블러와 익스프레션, 드리프터스 등 상위 3팀은 일정 수입을 올리고 있다. 주 수입원은 대회상금과 기업이 주관하는 이벤트 참가비, 비보잉 스쿨 강사비 등이다. 이벤트에 참가하면 팀의 수준에 따라 참가비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A급 팀을 기준으로 팀당 평균 200~3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벤트를 연 기업의 규모가 더 클 경우에는 500만원까지도 받는다.
최근에는 방송출연도 잦아져 익스프레션은 대종상 축하공연팀으로 초청받기도 했다. 이들의 유명세가 10, 20대 사이에서 대단한 것을 포착한 일부 기업은 CF 모델로 비보이를 기용하기도 한다. 갬블러의 멤버 박지훈씨는 모토롤라 CF 모델로, 드리프터스 멤버인 김덕현씨는 삼성 애니콜의 모델로 등장했다. 또 익스프레션 멤버는 베지밀 CF을 찍었다. 출연료는 1,000만원 단위. 연예인에 비해서는 적은 액수지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인 비보이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결코 적잖은 금액을 벌어들이는 셈이다.
비보잉이라는 새로움 춤이 하나의 문화코드로 자리잡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점도 많다. 먼저 비보이들의 세계적 수준과는 달리 이들의 공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획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공연전문 배급사인 아츠플레이의 이성환 팀장은 “아츠플레이는 익스프레션, 드리프터스와 제휴를 맺고 있다”며 “일정 수입을 거두는 팀이 몇 개 없는 현시점에서는 비보이팀과 전속계약을 맺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오히려 비보이팀 자체적으로 문화 벤처 형식의 기획사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군대를 들 수 있다. 운동선수와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비보이도 전성기인 20대 초중반에 입대해야 한다. 군대에서 관련업무를 맡기도 하는 운동선수와 연예인과는 달리 비보이의 경우 군입대해도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이 현재로서는 없다.
비보이를 향한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선 또한 개선돼야 한다. 비보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하나의 독립된 문화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길을 감지할 수 있다. 브레이크댄스를 음지의 문화로 치부해 ‘거리의 아이들’로 여기는 인식을 타파할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성환 아츠플레이 팀장은 “문화관광부에서 일부 공연팀에 연 3회 1,000만원 지원하는 ‘찾아가는 문화활동’이라는 프로그램 등이 있다”며 “국악 등 일부 문화장르에만 지원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비보이의 문화장르를 취미활동 수준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비보이들의 거리공연은 공연장에 들어가기 더욱 어렵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정대 갬블러 팀장은 “정책을 탓하기 전에 비보이들이 먼저 우리의 문화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며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인지도를 높여 비보잉이 프로의 세계로 인식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INTERVIEW / 비보이팀 갬블러 ‘유럽인도 한국 비보이에 태극기 들고 환호’
“서울대 나와도 취직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본인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분야에 뛰어들어야죠.”
17살부터 24살의 비보이 10명으로 구성된 갬블러는 국내 최강의 팀이라고 자부한다. 퓨마(Puma)가 지난 7월 개최한 ‘배틀 오브 더 이어 2004 코리아’(Battle of the year 2004 Korea)에서 1등을 차지한 데 이어 지난 10월에는 비보잉 세계대회에서 1등 했다. 2002년 결성된 갬블러는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는 프리스타일이 강한 팀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인 95년 춤을 시작한 김정대 갬블러 팀장(24)이 전국을 다니며 각팀마다 가장 잘 추는 ‘인재’를 추려 만든 덕택이다.
독일 세계대회에서는 갬블러의 실력에 반한 유럽인 관람객이 어디에서 구했는지 태극기를 휘날리며 갬블러에 환호하기까지 했다. 댄스계의 ‘한류’인 셈이다. “외국 비보이들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신체조건이 좋아요. 선천적인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1등 한 이유는 오로지 연습이었죠. 처음에는 연습실이 없어서 밤늦게 지하주차장에서 연습했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춤을 추던 날들을 헤아릴 수도 없어요. 하루 12시간 연습한 적도 있습니다.”
글로벌 1인자라고 인정받은 뒤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비보잉에 대한 기성세대의 오해와 반감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며 프로다운 모습을 보이자 이들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늘었다. 처음에는 한사코 말리던 부모들도 이제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비보잉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하는 아들에게 흐뭇해하신다. “1번에 7~8번은 일본과 홍콩, 독일, 프랑스 등에 나가요. 해외대회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죠.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국한 적도 있습니다. 이미 내년 3월까지 4~5개의 해외공연 스케줄이 잡혀 있어요.”
각종 대회와 이벤트 참석, 비보잉스쿨에 강사로 참가해 벌어들이는 돈을 최근 환산해 보니 1인당 219만원이었다. 서울 강남역에 위치한 SMS댄스아카데미와는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어 외부강사로 참여, 원생을 교육시킨다. “세계대회를 제패한 덕에 춤으로는 더 이상 이룰 게 없어요. 이제는 비보잉 비즈니스 발판을 닦는 게 목표예요. 독일의 경우 세계대회 때 가족단위로 관람을 오며 2만명이 참석하더군요.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어요. 비보잉으로 세계대회 1위에 올랐을 때도 신문 1면에 나도록 만들 겁니다.”
김정대 팀장은 내년 봄 정도에 국내에 전무한 비보잉 기획사를 만들 생각이다. 벤처정신으로 시작하는 것.
“기존 기획사 관계자들은 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춤을 제대로 알아야 비즈니스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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