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복음전도 : 은사중심의 접근
--------------------------------------------------------------------------------
도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하는 대담한 증언은 이 장의 주제인 복음전도전략의 형식이다. 최근에 은사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도의 수단인 공동예배의 역할을 재고해왔고 공적 증거(public demonstrations)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증언으로 재소개하였다. 이 장은 이 전략과 예배와의 밀접한 관계를 관찰하면서 이 전략을 설명하겠다.
--------------------------------------------------------------------------------
1. 예배복음전도
예배복음전도(Worship Evangelism)라는 용어 그 자체는 예배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중심에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고자하는 깊은 욕구를 지닌 그리스도교 예배의 비전을 서술한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언어로 예배를 표현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됨으로 예배 그 자체는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예배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를 관찰해 보라. 강조점, 형식,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이 즉각 드러난다. 전통적인 음악을 기초한 예배로부터 개인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복음적인 파노라마(the evangelical panorama)는 연구할 대상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 그림이 변해가고 있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가 결론을 내린 것처럼, "타가(他家)수정(Cross-Fertilization)이 일어나서 한 전통이 다른 전통의 영향을 받고 있다"(Signs of Wonder: The Phenomenon of Convergence in Modern Liturgical and Charismatic Churches [Nashiville: Abbott martyn, 1992], 55).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을 예배에 표현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대이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이 창조적인 요소덕분이다. 예배전통을 분리하는 벽들이 무너질 때 예배를 성소 밖의 삶에서 분리시키는 벽들도 한 가지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페러다임의 원리이다. 그 예배는 우선 첫째로 삶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삶 - 완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된 삶이다. 그리고 비록 중간마다 연이은 사건들, 즉 우리가 전형적으로 예배라고 부르는 사건들에 대해 구획지어 지는 삶이지만, 진정한 예배는 여전히 삶 자체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둘째로, 새로운 패러다임은 예배는 곧 증언임을 강조한다. 온전한 예배를 드린 자들은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편승하고 있는 자기 도취적인 해체사회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이 한 주간 동안 산제물로서 사명을 감당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믿지 않는 자들, 이웃들, 동역자들 그리고 친척들에게 적극적인 호기심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갖는 기쁨과 준비된 자세는 복음에 빛을 던져줄 것이다. 신약성경은 이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도다. 우리는 구원얻은 자들에게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4-15)
셋째, 증인으로서의 예배는 또한 연합적인 사건에도 적용된다. 이런 환경 안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축하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인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우리는 빌립보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증거된 바울과 실라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가에 대한 그림을 보게 된다. "밤중 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모든 사람들이 듣더라"(25절)
여기서 우리는 매맞고 족쇄에 매인 두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배를 드렸다?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죄수들은 듣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입술과 삶으로 예배했다. 그리고 그들이 칭송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찬양 속에 임재해 계셨다.
오늘날 죽어가는 잃은 영혼들이 귀머거리로 교회에 돌아올 때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할까? 우리는 어떻게 냉소적인 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바로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를 주창하는가 하면, 또 어떤이들은 "좀 더 실질적이며 시대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내세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해결책으로 대규모의 매혹적인 시설을 말하기도 한다. 예배 그 자체는 인기상승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흥회나 대중집회가 아닌 건전하고 문화적으로 상관성있는 예배가 지닌 복음전도의 잠재능력을 생각해 보라(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방법으로 이런 특별한 사건을 만드실 수 있고 또 만드신다). 지금 우리는 주간별(week-to-week), 주일별(sunday-to-sunday) 예배와 증언을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 금기시된 질문 하나가 있다. 무엇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리에 불신자들을 교묘히 제외시키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실제적으로 어느 누구의 얼굴을 향해서도 문을 닫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환영순서를 제단 앞에서 갖지만 불신자는 대게 55분간 지속되는 외래어의 홍수 속에 빠져야만 한다.
미신자
불신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아버지께서 나에게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의 마음에 회심이 일어나기 전 하나님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만일 우리들의 주장이 불신자는 예배드릴 수 없다는 것이면 성경이 우리들의 주장에 동의를 했을 것이다. 요한 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구도자(the Seeker)는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는 예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일들은 계시된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불신자는 최소한의 영적 이행과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까지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었다(요3:1-2). 그리고 이 분별력은 회심을 이끌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가장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사도 베드로와 같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일을 확장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데 둔한 모습을 보인다. 불신자는 예배를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논리를 세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쉽겠는가? 그와 같은 범주는 현재 입장을 더 고수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백미러에 고정시킨 채 미래를 향해 곤두박질한다"는 톰 시네(Tom Sine)의 교회에 대한 묘사를 본받는 것이다(Wild Hope [Dallas: Word Publishing, 1992], 4).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 의해 인기가 높아진 구도자예배모델(The Seeker-Service Model)은 불신자들에게 교회의 문을 여는 대담하고도 혁신적인 시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열어지고 있는 문들은 예배에 대한 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시범환경(a presentation environment)에 대한 문 -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주장을 탐구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편안한 장소, 좀처럼 이해하거나 음미할 수 없는 예배로 불리는 종교활동으로부터 자유로운 환경에 대해 여는 문이다. 이 장소는 고도로 통제된 공간이다. 한 번 노래하고 박수를 보내는 극장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라면 그 누구도 참여하거나 응답할 수 없다. 은사를 지닌 프로들과 평신도들이 다방면의 웅장함으로 그리스도의 주장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배는 그러한 면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왜 그런가? 통상적인 설명은 구도자들과 예배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예배 패러다임은 불신자가 예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불신자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주장"(the claims of Christ)을 탐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Us)를 찾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회, 후합리주의적 사회(Christian, Post-rationalistic society)에서,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깨어진 자들, 성령에 의해 공백과 무기력을 치료받아야 할 자들이기 때문에 교회문을 어둡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자기들을 온전케 해 줄 수 있는 초자연적인 것을 갈망한다. 웨버(Webber)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신비의 경험을 희구한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가?"(Webber 23).
변증론과 접대는 복음의 기본개념을 훌륭하게 전달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뜨거운 마음으로 예배하는 신자들은 변증론과 접대가 할 수 없는 세 가지 차원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는 원래의 목적으로 회복된 인간이다. 흠없는 예배(authentic worship)의 창문을 통하여 불신자들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사에 응답할 수 있다. 신자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관망함으로써 그들은 감동 받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찬양속에 거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시22:3).
예배가 역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면 아마도 그것은 하부 문화적이며 배타적이며, 그리고 무절제한 예배를 규범으로 삼는 우리 자신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구도자예배모델이 올바르게 이루어 놓은 것들 가운데 한 가지는 어떤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표준을 제기한 것이다. 실상, 윌로우 크릭에서 빌 히벨(Bill Hybel)이 목회자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던지는 중심적인 간청은 "우리들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 즉 불신자들에게 나눌 것이 있으면 항상 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 사역이 우리 나라에 사는 불신자들에게 왜 "최근접한" 사역이 되는가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진영에서 지금 부상하고 있는 질문은 이렇다. 만일 복음전도사역에 헌신한 교회들이 이 동일한 의도적인 "노력"(elbow-grease), 그 어떤 것도 좋다는 태도를 예배에 적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오스트레일리아의 교회지도자요 사회분석가인 존 스미스(John Smith)에 의하면, "우리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고통스런 문화적 할례를 경험하도록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종교는 전통적으로 사회를 위해 "문화 유지자"가 되어왔다. 그는 대부분의 세계 사회에서 종교는 여전히 문화를 내포한다고 말한다("Bringing the Gospel to a Secular World," Christian Music Seminar taped lecture no. E43; 425W. 115th Ave., Denver, Co 80234). 이런 설명은 대략 40년 이전의 미국 기독교회에서 사실이었다. 이제 미국교회 문화는 뒷걸음질쳐서 시대착오적이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인정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해석없는 사역(ministry-without translation)을 계속 고집한다면 외국 선교는 한낱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될 것이다.
에베소서 3장 20절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에 따라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해드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삶의 현장으로 옮길 시간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기 위해 그 어떤 방식이 예배축제도 가질 시간이다. 지금은 좀 더 진실해질 시간이다.
------------------------변화를 위한 청사진----------------------
공예배를 통하여 당신은 어떻게 불신자에게 접근하는가? 첫 단계는 증언하는 예배원리를 명확히 규명하는 일이다.
원리 1. 증언하는 예배는 불신자들이 사용하는 예술적 음성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므로써 그들의 문화를 긍정하는 것이다. 존 스미스(John Smith)는 "우리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그들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언하면, 우리는 불신자들의 삶의 스타일을 연구하고 그들의 읽고 보고 듣는 습관을 이해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한다. 스미스는 바울이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변증하는 사도행전 17장 16-34절을 인용한다.
스미스는 바울이 문화적으로 아테네 철학자들을 긍정한 후에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나누었던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로 깊은 상처를 입었으나 그들에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들아, 내가 보니 너희는 종교성이 많도다.'" 그들의 문화를 긍정한 후, 바울은 그 문화의 결점을 부드럽게 지적했다. 그가 복음을 전했을 때 히브리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철학적 지성이 담긴 헬라어를 사용했다.
증언하는 예배는 오로지 예배의 상황 안에서 바울이 행했던 것을 과감히 행한다. 증언하는 예배는 불신자들의 문화를 긍정함으로써 그들의 의복과 음악스타일, 언어양식, 삶의 축제방식을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전한다. 도시에 사는 아프리카계-미국인에게든 타운에 사는 히스페닉인에게든, 중산계층의 백인들에게든, 또는 시골에 사는 독일계 사람들에게든 우리는 먼저 그들의 문화양식을 긍정하고 그것을 복음으로 해석하여 효과적인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 스미스는 그것을 "진리를 깨어진 세계의 자국어(自國語)안으로 침투시키는 것(encuturation)"이라고 부른다.
원리 2. 증언하는 예배는 참여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응답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를 제시하는 믿는 자 전체의 제사장직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전도는 사람을 지향하는 반면에 예배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와 예배는 결코 혼합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사고의 경향을 따른다면 복음전도적인 성격을 띈 예배는 참여적(participative)이기 때문에 예배가 될 수 없다. 그 대신 복음전도적 "예배"(evangelistic worship)는 본질적으로 중생하지 못한 죄인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자 하는 그/그녀의 욕구에 고정된 수동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부흥회가 되든지 아니면 대중전도집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에 관한 이런 그림은 너무 협소하지 않은가? 그러한 정의에 의하면, 복음전도는 단순히 입으로 하는 설득(verbal persuasion)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앙의 삶을 사는 어떤 시간에도 복음전도는 일어난다! 증언하는 예배는 예배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확실히 참여적이다.
원리 3. 증언하는 예배는 본질이 진리인 예배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로마서 12장 1-2절의 예배"이다. 그 예배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인하여 찬양드리며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제게 주시는 위대한 긍휼을 찬양합니다. 저를 깨끗케 하소서. 변화시켜 주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당신의 도구로 쓰소서." 그와 같은 예배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은 - 구원과 새로운 삶을 사는 능력 - 단순한 "속죄"로서 제단에 포함되거나 또 제단 주변에 자리할 것이 아니라 바로 제단 중심에 위치한다.
우리는 가끔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복음이 예배와 관련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예배드리는 회중 가운데 불신자가 있다면 그와 같은 생각은 위험스럽다. 그러나 복음을 신자와는 관련성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실제적으로 복음이 의미하는 바를 심각하게 감소시킨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죄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 아니라 바로 여기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죽음에 순종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정결케 된 자들과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2)이라고 한 바울의 말을 주목하라. 다시 한 번 히브리서를 보라.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더러 "눈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에게 고정하라"고 말한다(히12;2).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말한 것처럼, "예수 자신과 초기 제자들의 메시지는 죄의 용서 하나만이 아니라 삶의 갱신(newness of life)이었다"(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36).
이 모든 것이 예배복음전도(Worship evangelism)의 요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은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 - 왜냐하면 종교 그 자체는 그 누구도 복음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삶의 중심점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 - 종교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거의 확실히 메시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우리는 아무런 근거 있는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갖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삶의 갱신을 위한 그 어떤 힘도 없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미약하고 왜소한 자기(自己)를 가질 뿐이다.
이번 주일을 위해 당신이 계획하는 예배를 생각해 보라. 뉴에이지운동(New Age Practices)에 관련되어 있는 멜린다(Melinda)의 구원받지 못한 이웃은 당신의 교회가 믿는 바를 "여러 가지 길들 가운데 하나"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찬양을 받은 이후 그녀는 자신의 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알까? 하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알까? 환각중독자인 젊은 죠이(Joey)를 생각해 보자. "자아 통제의 발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습관을 끊어버릴 동기를 부여받을까? 지난주에 빌(Bill)이 기도한 좌절해 버린 빌의 동역자 단(Don)은 어떤가? 만일 성령을 보내시는 사랑과 치유의 구속자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이 성령이 임재하시는 성찬에 의해 격려받을 것인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용서와 정결과 갱신을 추구하는 삶을 볼 것인가?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은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하고 풍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과 생명은 우리들과 불신자들을 구분하는 메시지이다. 만일 예배가 진정 그리스도교적이 되려면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선포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이런 사랑과 생명을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와 초자연적, 변화시키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해질 것이고 불신자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사모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희구할 것이다.
셀리 모르겐 달러(Salley Morgen Thaller)
-------------예배 복음전도를 위한 몇 가지 지침들------------
(1) 예배를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상징하는 "통풍구멍"(funnel)으로 생각하라. 하나님의 성품(거룩, 의, 전능 등)을 찬양하되 통풍구멍의 넓은데서 시작하자.
2. 복음전도와 찬양행진
예수를 위한 행진은 -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광범위한 수단이 되어왔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기쁨을 보여줄 의도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 기사는 예수를 위한 행진을 설명하고 찬양이 어떻게 행진(March)에 필요한 것인가를 설명한다.
예수를 위한 행진은 항의가 아니며, 대중적인 묘기곡예도 아니며, 한 프로그램이나 대중적인 교회봉사도 아니다. 행진은 온 세상에 그리스도주님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예수를 위한 행진은 도시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한 방법이다. 그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이다. 예수를 위한 행진은 도시 전체를 사랑의 하나님께로 환영해 들이는 방법이다. 그것은 복음전도가 화재보험을 파는 것과 같은 미미한 행위가 아니라 영광으로 초대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도시 전체가 애정이 깃들인 경배의 광상곡으로 점점 채워지는 것을 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도시 전체가 그와 같은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역의 무대라면 거기에 사는 전체 백성의 모습은 어떨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얻는 것, 그리고 순종하는 예배(obedient worship)에 사용되는 언어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을 제재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종려주일----------------------------
종려주일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곳곳에 흩으시고 또 모으셔서 성도(聖都)의 거리를 따라 부르는 찬양속에 당신의 진리를 선포하는 놀라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환상의 우위점(the best vantage point)이다.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종려주일은 교회월력에 나타난 다른 많은 사건들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에 비해 다소 기울어진 것 같다. 확실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것의 중심이지만, 예수의 지상사역의 놀라운 관쓰심의 사건을 다시 한 번 주목해보자.
예수님은 다른 군중들을 거의 피하셨으나, 성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사건을 조직한 분으로 제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망아지를 타셨다. 예수님은 앞으로 남은 몇 주간의 운명을 알게 하셨다. 그의 출발점은 그가 행하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곳이었다. 그분은 계획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계획하시는 분 같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당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지도자들은 군중이 꾸지람을 듣기 원했다. 예수님은 그러한 태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39-40). 제사장들과 학사들은 어린아이들의 찬양이 중단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의도하신 것을 그들이 행한다고 말씀하셨다(마21:15-16).
의심할 나위없이 이런 행동은 예수님께서 취하신 가장 공적인 행동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기를 원하셨던가? 거기에 있는 자들은 곧 예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이전에 하신 예언을 "성취하고" 계심을 알았다. 당신은 예수께서 생각하신 바를 상상하겠는가?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나귀를 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이제 한 주간의 삶의 남겨놓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오늘의 세상을 향해 어떻게 말씀하시겠는가? 행동 그 자체가 예언이었는가?
예수님이 받으실만한 환영을 세상에 증거한 찬양행렬은 역사 안에서 당신의 사역을 끝마치기 전 성취될 예배의 크레센도(the crescendo of worship)의 반향이었다.
역사 안에(이런 희망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충분하다)있는 모든 족속과 언어로부터 하나님이 취하신 예배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믿는데 필요한 어떠한 경고가 있다면, 예수 자신의 찬양행진은 오늘 우리에게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왜 그런가?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서 성령이 우리를 이 사건의 빛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교회로 만드시고자 하는 교훈을 받는다.
---------------------------찬양, 전도, 기도----------------------
종려주일 찬양행진처럼 오늘날의 찬양행진은 찬양, 선포 그리고 기도로 특징지워진다.
찬양, 하나님 앞의 축제. 찬양행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제자들의 큰 무리가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눅19:37). 그것은 자발적인 파티였으나 목적없는 군중이었다. 그들은 대관식 축제의 복주머니에서 그리고 군사퍼레이드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절기에서 노래와 상징들을 빌어왔다.
찬양의 초점은 "그들이 본 모든 기적들"에 대한 감사였다(눅19:37). 찬양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회고하는 것이었으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장차 보고 믿게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있으라!"(눅19:39, 마21:15-16)고 외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실수이건 사실이건, 예수님은 찬양하는 군중을 강압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달라는 군중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하나님의 승리 나라를 가져오고 계셨다. 찬양하던 군중들의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기대의 수준을 좀 더 높이지 못한 것이다.
축제는 힘있고 야단법석하고 장엄한 사건이었다. 얼마나 많은 옷자락들을 길거리에 깔았겠는가? 그것은 질서있는 모임이었으나 지도자들의 눈에는 벗어난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이 군중들 틈에 있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던 것 같고(눅19:39), 아니면 예수를 이단으로 들었던 호기심에 찬 관람객들이 느닷없이 그를 주님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개의치 않으셨던 것 같다(요12:9-12). 그것은 예수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중앙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
예수님은 또한 그들이 부르는 찬송은 그들을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아셨다. 시편 8편이 예수님의 마음 바닥에 있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입술을 강하게 하신 것은 대적의 힘을 끊게 하게 하심이라"(시8:2,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인용은 마21:15-16). 이 찬양행진에는 그 어떤 순수함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핵심적인 통일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의 말은 급진적이고 무엄한 주장이었다. 종교적으로 거슬린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운명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대중적인 행진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단순하고, 축제적이고, 감사에 찬 것이어야 하며 예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자신의 왕국을 증가시킬 것에 대한 기대에 찬 것이라야 한다. 단순 명료한 원리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 힘있는 초점은 제자들 편에서 갖도록 기대되는 그 어떤 흥분도 요구하지 않는 축제가 지닌 엄청난 힘을 과시한다. 사람들에게 음성을 높이거나 대열 앞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강권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가 없다. 예수는 앞장서고 군중은 그를 뒤따르고 있다. 예수의 행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렬과 대오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개념에 도전한다. 만일 스포트라이트(조명등)가 예수에게 비추인다면 그 반대현실이 진실로 드러날지 모른다. 그를 칭송하고 그를 사랑하라. 예수는 사랑이 충만하며 자기 백성들을 실망시키거나 독단적으로 조작함이 없이 자신에게로 이끌 수 있다.
선포 : 천상의 것들을 통한 진술 그들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선포한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의 감정에 진실했던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영원과 힘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어느 정도 "작용하는" 마술적인 성육화(magic incarnations)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무엇을 행하시고 계셨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꼭 필요했을까? 좀 멀찍이서 바라보면 그것은 어느 정도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에 관해서 이미 아는 바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주 여호와를 "칭송"(to bless)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립하는 것이다. 음성으로서 진리를 선포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고백과 찬송을 "진리의 선물"(truth gift)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단순 명료한 원리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을 불신자들이 듣고 "이는 누구인가?"(마21:10)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질문공세를 퍼붓는 자들에게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할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포된 진리, 변명이나 논쟁으로 채색되지 않은 진리는 비판의 여지가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닌다.
진리의 선포는 천상의 존재들 전체를 통하여서도 들리어진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찬양행진 행동은 어둠의 권세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들어선 그들이 철저히 패했다는 사실을 들려준다.
얼핏보면 이런 일은 일종의 미치광이 같은 종교 퍼레이드로 보일 수 있다. 세속인이 보기에는 그럴지도 모른다. 악한 자들은 우리를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땅위의 바보들은 실상 하늘의 최대 기적이다.
예수께서 그의 행진을 어디에서 시작하였는가를 주목해 보라! 그것은 성전 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가서 뵈옵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고 있다. 그와 같은 물리적인 예배, 교회 건물에 의해 담장이 쳐있지 않은 예배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하늘 뜻에 봉사한다. 악한 세력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목도할 수 있게 하자. 지상의 악의 대행자들이 지나가시는 예수를 볼 때,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12:19)라고 말했던 것처럼 저희들은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하라.
기도 : 감정을 담은 호소. 예수의 찬양대행진 때에 사람들은 기도했다. 바디메오라는 소경의 집요한 부르짖음이 있었다(핵심 절기 이전이었던 것 같으나 이미 예수를 뒤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막10:46-52]. 이 사람은 위대한 순간을 포착하여 자비를 간절히 구했다. 그가 한 기본적인 기도는 우리가 하는 입심좋은 기도를 재조정하게 해준다. 어떤 기도회는 마치 시장상품 관람목록을 점검하는 것처럼 열렬하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예수께서 바디메오에게 접근하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행렬은 멈추었고 예수님은 물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에게 있어서 행진은 자비를 구하기 위해 큰 소리를 높일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들의 가족과 도시와 국가를 치유하실 희망을 품고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바가 예수께 알려지도록 할 수 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다.
예수께서는 사건의 분위기를 놓치신 것 같다. 이것은 축제가 아니었던가? 왜 행진을 멈추시고 자신의 비애를 나타내셨는가(눅19:41-44)? 예수님은 인간의 영 안에 있는 온전한 것들, 심원하고 파도치는 슬픔과 잃어버린 시간과 삶에 대한 개탄이 찬란하고 즐거운 희망과 위로와 뒤범벅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예수는 도시 전체를 보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보는 것을 보게 하셨고, 당신이 느낀 슬픔을 느끼게 하셨다. 성도들이 눈을 열고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거리를 활보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당신의 슬픔을 느끼도록 하시는 것에 이상이 있는가?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것을 우리는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이라 부른다. 그 슬픔은 회개의 기적으로 이끈다. 회개는 단순히 몇 가지 실수에 대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능력이 있는 행동이다. 도시 전체도 회개할 수 있다(마11:20). 예수를 위한 행진은 예수의 눈으로 도시를 보고 우리를 향해 그분이 느끼시는 슬픔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기도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핵심적인 원리는 예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회개는 예수 자신의 고뇌에서 비롯된다. 첫째, 우리 가족과 도시에서 "평화를 만드는 것들"인 슬픔이 거부당했다(눅19:41-4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신실성을 주셔서 우리가 사는 도시에 하늘의 평화를 주시도록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예수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문제는 방문에 대해 하시는 자신의 말에 계속 편승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의 깊은 실의를 감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위해 준비된 진노를 걷어 달라고 하나님께 자비를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도시는 그들이 해야 할 방문시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부르짖어 하나님께서 전체 도시와 사람들을 찾아오시도록 할 신앙을 가질 수 있다! "호산나!"라는 부르짖음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구원해 달라는 고뇌깊은 부르짖음이다. 그 부르짖음은 예수께서 오셨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더더욱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호소일 수 있다.
----------행동주의의 두 면 : 복음전도와 영적 전투---------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와 영적 전투보다 더 성도들을 자극시키신 적이 없다. 우리가 찬양을 복음전도와 영적 전투를 위한 놀라운 힘으로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찬양행진은 마치 하나님께서 비밀스런 무기를 이제 막 펼치시는 것 같지는 않다. 쉽게 범할 수 있는 큰 실수는 예수를 위한 행진을 하나의 무기로, 예배를 우리가 손으로 다룰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다.
영적 전투인 예수를 위한 행진, 우리가 싸우는 전투는 득점판이 없다. 우리는 단순히 지옥에 갈 사람들의 수를 격감시키거나 영적으로 나쁜 친구들을 혼내주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투는 예배를 위한 전투이다. 어떤 방법이 사람들의 애정과 충성을 되돌려 놓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하겠는가?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심을 받은 이 사람들은 누구를 섬기고 사랑하겠는가?
복음전도와 영적 전투의 위기를 누가 구원받고 누가 저주받는가 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관점에서 잠깐동안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실 자격이 있는 예배를 받고 계시는가? 아니면 예배자들이 마음을 돌려 영원한 소비로 돌아섰는가? 예배는 영원한 시간 채우기(eternal time-filler)가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구속을 받았다. "그들이 나를 예배하도록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전투는 예배를 위한 것이다. 예배는 궁극적으로 무기가 아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패배당한다. 그러나 예배는 사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것이다.
영적 전투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차원들이 있다. 예수를 위한 그 어떤 행진에도 우리가 악에 대항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수반되고 뒤따른다. 그러나 모여든 신자들의 행보가 감당할 올바른 전투는 예수를 높이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찬양행진은 모든 사람을 위한 영적 전투의 입문과정이 된다. 귀신의 두목을 좇던 자들이 하나님을 높여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때 지하세계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복음전도인 예수를 위한 행진. 복음전도의 기회가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로 여러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회중의자에 앉아있는 보통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지 않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대해 왔다. 추측컨대, 사람들은 관심을 잃을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하고, 기꺼이 어리석은 자와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며, 그들의 영혼을 영광의 소망에 단단히 묶어둔 자들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넉넉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인도하신다면 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왜 지금 그 일을 하시지 않겠는가?
예수를 위한 행진이 복음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찬양행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전도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수치, 열등감이 사라진다. 공적으로 예수를 고백하는데 수반되는 당황감이 사라진다.
찬양행진은 영적 분위기를 쇄신하면서 대도시에 복음전도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예수 자신의 찬양대행진을 뒤따라서 "온 성이 소동하여 이가 누구뇨?"라고 말한다(마21:10). 사건 그 자체가 예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검증해 주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할만큼 왜 어리석은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자.
예수를 찾았던 갈릴리 밖의 사람들, 즉 헬라인들의 질문에는 예언적 의미가 담겨있다(요12:21). 이것은 예수를 본 후 알고 예배하기 위해 찾아 온 나라들 가운데 한 중요한 나라가 아닌가?
종려주일 찬양대행진이 지닌 특출한 모습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행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대한 교사요 지도자이셨다. 실로 하나님의 영이 예수로 하여금 우리가 사는 실용주의적이며 인간미가 없는 교회생활에 의해 거의 식상해 버린 수백만에 달하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도록 하실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순종하는 예배를 드리는 우주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행진할 때 조심스레 듣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과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열국 백성들의 찬송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롬15:5-13). 이 행렬을 잘 따라가면, 우리는 열국을 섬기는 제사장들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선물로 드리는 일을 도울 것이다.
스티브 호돈(Steve Hawthorne)
3. 찬양대행진의 역사
대중적인 대행진과 시범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역사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 대중적인 선포가 중요한 사회적 목표를 진행시키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전1:9)고 전도서의 기자는 말하고 있다. 바깥에서 드리는 예배는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도 시행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에 예배가 이뤄진 곳은 종교적인 부흥운동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있었던 바깥에서 사용된 기독교 노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A. D. 675년이다. 알프레드 대제(Alfred the Great)의 핸드북 기록은 말메스베리 수도원장(the Abbott of Malmesbury)인 알드헬름(Aldhelm)이 만일 백성들의 메시지를 들으러 오지 않는다면 메시지가 그들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알드헬름은 로마에서 음악을 연구했다. 그가 웨섹스(wessex)로 되돌아 왔을 때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사랑탖지만, 설교가 시작될 때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들이 바깥으로 나갈 때, 알드헬름은 기독교 메시지를 담은 팝송을 불러 회중을 모았다.
중세 수도사들은 당시에 전도자들이었고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성(聖) 버나드 클레어복스(St. Bernard Clairvaux, 1090-1152)는 그 자신의 수도원을 건립하여 위대한 교회개혁가가 되었으나, 그 역시 보통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농장과 도회 길모퉁이에 서서 설교하고 노래하고 표적과 이적을 행했다.
아마도 이 무시간적(無時間的) 찬송은 제일 먼저 프랑스 변경의 시골 농부들 사이에 인기있게 되었다:
예수여, 당신은 사랑하는 마음의 기쁨,
당신은 생명샘, 사람들을 비추는 빛,
우리에게 내리시는 최상의 복,
채움받기 위해 우리는 당신에게로 돌아서나이다.
15세기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존 후스(John Huss)는 그의 고향 크체크(Czech)에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시장, 들녘, 고원에서 만날 때 부르도록 민요를 지었다.
카톨릭교회와 정통주의 교회들은 아직도 여러 곳, 특히 순례와 관계된 곳에서 행진의 전통을 계속하고 있다. 성공회 교회 내부에 걸려 있는 기(旗)들은 그 목적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교구를 순회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강림주일(White Sunday)은 항상 그리스도인이 행진하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특히 북잉글랜드와 중부지역을 행진했다.
구세군은 19세기에 악단을 거리에 동원하였다. 그들은 항상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83년에 출판될 읽을 가치가 있는 신문(The Worthing Gazette)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성결을 위해 준 종교적 환락(guasi-religious revelry)을 창안한 흥분한 젊은 남성들과 히스테리적인 젊은 여성"으로 묘사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유머잡지인 펀치는 "자선"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행진은 어느 때나 불쾌한 것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되는 예외적인 행사였다. 쉬는 날 이웃들이 누리는 평화와 고요를 깨뜨린 성가신 종교 봉사행사에서,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소음을 방해하기 위해 국회법의 제약에 대해 자신들의 성전, 켐프, 교회 혹은 비밀집회소의 네 벽에 갇혀야만 했다.
12달 이내에 669명의 구세군 군대가 공격을 받았고, 56개의 구세군 건물들이 돌에 맞아 파괴되었고, 86명의 신도들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구세군은 계속 성장했다. 10년 이내에 20배의 성장율을 기록하였다. 구세군은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사회에 대한 큰 관심과 사회행동으로 잡음이 뒤로 감춰졌기 때문이다.
구세군이 행하는 가장 큰 대행진 가운데 하나는 1885년에 있었던 행진이었다. 그것은 아동매춘의 중지를 요구하면서 34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가지고 2마일을 걸어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한 행진이었다. 그들은 성공했고 삶은 변화되었다. 술주정뱅이들이 맑은 정신을 가다듬어 그들의 가족을 보살폈다. 창녀들은 그들의 삶의 길을 청산하고 존경받는 직장인이 되었다. 구세군은 그들의 인생을 180도 돌려놓았다. 회심한 탄광부들은 그 경험을 이렇게 요약했다. "금연, 금주, 서약금지행위 등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상 역시 이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1904년 웨일스(Wales)위에 임재했을 때, 사회는 그 충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분간 사법소에는 감옥이 필요 없었고 텅비었다. 한 보도는 말했다. "아마도 두드러진 현상은 술주정꾼들이 감소되어 밤거리를 흥청거리지 않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회심자들은 그들의 악한 길을 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느 논평가는 기록했다. "1904년의 부흥은 여러 교파를 하나로 결속시켰고, 예배당은 갱신된 가족들로 찼고, 탄광이나 공장에서의 삶은 변화되었다. 길거리는 행진하는 군중들로 메워졌고 사회악은 감소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지하수처럼 교회 안에 역사하셔서 새로운 성장과 활력을 일으키고 계신다. 이것은 단지 새로운 물결의 시작에 불과하다. 교회는 다시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는 들을만한 소리를 내고 있다. 다시 한 번 거리에서 대행진을 할 시간이 도래했다.
그라함 켄드릭(Graham Kendrick))
4. 기도행진
예수를 위한 대행진처럼, 기도행진(prayer walking)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공적 행사이다. 그것이 끼치는 독특한 공헌은 기도하며 걸어야 하는 대상인 공동체와 세상의 필요를 위해 하는 기도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위한 대행진사역을 보충하는 매일의 기도 전략일 수 있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에서 평범한 신자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거리를 통하여 기도하며 걷는 일(prayerwalking)을 하고 있다. 그들은 걷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각성에 대한 안목을 지니고서 기도한다.
우리는 이 사역을 "통찰력있는 기도"로 정의한다. 거기에는 어떤 고정된 양식이나 형식이 없다. 기도하며 걷는 자들은 각기 나름의 양식을 취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 어떤 특별한 마술적인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응답될 상황 가운데 역사하시며 지속적인 자발성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그분에게로 가까이 나아간다.
공동체에 근접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기도에 집중한다. 우리는 특별한 가정과 가족들에게 집중하므로써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더욱 예리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의 신유의 임재를 알도록 간구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더욱 확대해 나간다.
기도행진(praywalks)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대행진과 의미심장한 유사성을 갖는다. 예배와 영적 전투는 그리스도께서 도시 전체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주님으로 환영받으시도록 하는 간구와도 협력한다. 조용한 기도행진은 대장관을 이루는 찬양대행진의 어떤 부분보다도 앞선다.
기도행진은 우리에게 일년 365일 기도로 거리를 채우면서 예수를 위한 대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단순한 길을 제공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거리에서 조그만 밴드와 함께 도시-규모의 기도를 하고 있다. 기도행진은 우리로 하여금 변화시키는 봉사(transforming service)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서 도시에 사는 수많은 이웃과 계속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도시를 변화시키실 때 조용한 승리가 뒤따른다.
예수를 위한 대행진은 가끔 도시 위에 느닷없이 내리는 소나기같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준다. 그와 같은 축복의 강림은 우리가 드리는 간구의 물결과 연합을 이룬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리라"(합2;14)
-------------------------기도행진사역의 출발--------------------
타신자들과의 제휴. 당신의 신앙을 대화스타일의 기도흐름에 융합시켜라. 대그룹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지 못한다. 쌍을 이루면 사역은 훨씬 효과상승된다.
시간을 떼 놓으라. 기도행진 사역자들에게 한 두 시간의 충분한 시간을 주어서 준비하고 토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라.
지역을 선택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도하시도록 구하라. 낯이 익지 않은 이웃들이 사는 지역을 선택하므로 기쁨을 배우는 것이 낫다. 가까이 있는 이웃을 위해 비전을 갖고 그들에게 재빨리 돌아가라. 상업과 종교중심지들은 매력적이지만, 주거지역인 가족과 학교, 그리고 교회와 같지는 않다.
통찰력을 갖고서 기도하라. 당신이 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당신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을 그의 민감성으로 소생시키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전에 이뤄진 탐구를 활용하여 당신의 응답하는 통찰력을 고양시켜라. 도고를 위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경향 또는 풍조에 관한 지식을 사용하라. 무엇보다도, 성경을 기도하라. 만일 기도를 시작하는 분명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면, 성경에 수록된 어떤 기도를 선택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 기도자체가 기도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라. 사탄의 계획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의 기도를 고양시키도록 하라. 그것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지도가 싸우도록 하라. 사탄의 권세에 직접 대항하기 전에 하나님의 보좌에 직접 호소하는 단순성을 생각하라. 악의 세력 우위에 있는 하늘로부터 비롯된 질서를 추구하므로써 하나님께서 강화시킨 백성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축복을 도시에 내리도록 하라.
다시 모으고 보고하라. 당신이 기도하고 경험한 바를 나누도록 하라. 당신이 가진 통찰력과 신앙을 표현하는 일은 당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것이다. 이 다음에 추진할 기도행진을 계획하라.
-------------------------기도를 위한 제언------------------------
모든 기도를 당신이 통과하는 특수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라.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당신이 하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국가와 세계를 향해 진전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의 주제구절을 활용하라. 만일 당신이 다른 성경귀절을 활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도하지 않는다면, 디모데전서 2장 1절부터 6절을 활용하라. 많은 사람들이 기도행진을 위하여 유익한 출발점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됨을 발견하였다. 그 성경구절을 기록하여 길을 걷는 동안 수차례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하라. 다음의 기도는 디모데전서 2장 16절에서 비롯된 관점들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한 분 중보자이시며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 되심을 선포하라. 그리스도를 이웃의 주님으로 그리고 당신의 삶의 주님으로 아뢰라.
지도자들에 관하여. 권세 있는 그 어떤 책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교사들, 경찰들, 행정가들 그리고 부모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평화에 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과 성결이 평화를 진작시키도록 부르짖으라.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하라.
진리에 관하여.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영원한 실재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하라.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축하하라(딤전2:7). 사탄에 의해 소경이 된 지성인들의 눈이 열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간구하라.
복음에 관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서 이 해(年)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적당한 시간"임을 알리시도록 기도하라. 기도시간에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라.
하나님의 축복에 관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감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당신이 방문하는 가정들 위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분명한 감사를 드리라. 하나님의 눈으로 도시를 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엇이 선과 즐거움인지, 뿐만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시는 지를 알기 위해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영적 각성을 계속 주시도록 간구하라.
스티브 호돈(Steve Hawthor ne), 그레함 켄드릭(Graham Kendrick)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하남평화교회
https://cafe.daum.net/hanampeace
최신글 보기
|
인기글 보기
|
이미지 보기
|
동영상 보기
검색
카페정보
하남평화교회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204
방문수
2
카페앱수
0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예배 관련 연구
스크랩
예배와 복음전도 : 은사중심의 접근
그리여-_-
추천 0
조회 3
09.01.01 21:56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댓글
0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