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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24일 수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 사제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태중에서 성별하시어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 새들에게 먹히고, 돌밭에 떨어져 말라버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복음).
제1독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 예레미야서의 시작입니다. 1,1.4-10
1 벤야민 땅 아나톳에 살던 사제들 가운데 하나인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열매는 백 배가 되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앗은 고르게 뿌려집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도 그리고 좋은 땅에도 뿌려진 씨앗은 모두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위로와 감동만을 주고자 주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구원을 위하여 온 삶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복음의 질서를 우리 마음 안에 ‘세우고 심기’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하는 말씀일수록, 생각의 틀과 가치 기준을 완전히 뒤엎게 하는 말씀일수록,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말하며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 또한 구원을 위한 은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도,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 사로잡혀도, 하느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많은 삶 가운데 머물더라도, 주님께서는 오늘도 구원의 열매를 맺어 줄 말씀의 씨앗을 고르게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믿음의 밭에 뿌려 주신 말씀으로 우리 삶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올려다볼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무 가혹하다 싶은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지요? 너무나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주님의 초대 앞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던 적은요?
때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는 볼이 발그레한 미소년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리고 자신감이 없었던지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다. 일단 한번 가보자.”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 7-8)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나이의 소년 예레미야의 고달픈 예언자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서 유다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같은 듣기 좋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 저라도 흔쾌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예언의 내용은 유다 민족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이스라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완고한 이 백성, 이 땅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예언자가 유다 고관대작들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예언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뭐 이런 애송이가 와서 헛소리?’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가서 외치니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도 무리로부터 쫓겨난 한 마리 들개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광야를 떠돌던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쓴소리를 자꾸 내뱉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혹독했던지 나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까지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이렇게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생애 내내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었습니다. 오로지 올려다볼 곳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지,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지, 사방이 원수요 적군이지,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주님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님께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떻게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실수 있냐?’며 그분께 따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기도하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선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는 훨씬 크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정통은 이렇게 구분하시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열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길과 돌밭과 가시밭과 같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잉태하시고 광야에 나아가 40일 동안 세속-육신-마귀의 욕망과 싸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을 때 받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길과 같아서 말씀이 떨어져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육신은 그러한 강론을 들을 때 잠깐 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내려고 하면 아까워서 내지 못합니다. 세속은 가시밭처럼 돈에 대한 걱정으로 몇 번 내고 있던 십일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은 사이비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단과 무엇이 다른지, 또 정통 종교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이비는 우선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랑의 수준’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독사가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수준은 어떻게 증가할까요? ‘믿음’으로 증가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자랄 수 있도록 ‘은총과 진리’를 내어줍니다. 이 은총과 진리로 아이는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며 모기와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 성장의 과정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숫자 ‘40’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평생이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비는 항상 성적인 부분의 행동(정명석)과 폭력적인 성향(오대양),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적 행동이 보입니다(다미 선교회). 그런데 그런 사이비의 성향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열매를 맺는 목적보다는 세속-육신-마귀의 목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입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실로 밝혀졌고 이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사제가 되어 동성애를 즐기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와 신학교가 폐쇄된 일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제가 고해성사를 빌미로 성추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사이비입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고 세속-육신-마귀를 이용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말씀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단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한번은 개신교의 가이드가 바티칸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바티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 보이는 큰 성당이 바티칸 대성당입니다. 면죄부를 팔아서 지은 성당이죠.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장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교회가 이방신인 태양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쓰던 것인데 남자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천주교가 얼마나 이교들과의 혼합주의가 심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히 성체를 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는 삼구를 섬기는 이들이라면, 이단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줄 수 없다고 여겨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거부합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고 어떤 잘못도 덮어주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실 정도로 자비롭지 못하실까요?
그런데 가톨릭 내에서도 제가 인간이 성모님처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고 곧 하느님이 된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교리서에서도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도록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단적인 생각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사이비와 이단들입니다. 이들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우리 교회도 끊임없이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리랑을 모르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의 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분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선율이 무척 아름다웠고, 서정적이었습니다. 그 뒤로 북한의 악단이 연주한 ‘아리랑’도 들었습니다. 선율이 장엄하면서도,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아리랑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아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아리랑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되겠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그런데 혹시 ‘아리랑’의 참뜻을 알고 계신지요? 우리는 ‘아리랑’의 뜻에 대해 외국인이 물으면,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알고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요? ‘아리랑’은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민요로써 남녀노소 누구나 잘 알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아리랑’을 흔히 사랑에 버림받은 어느 한 맺힌 여인의 슬픔을 표현한 노래로 대충 그리 알고 생각하는데, ‘아리랑’ 이라는 민요 속에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 참뜻은 <참 나를 깨달아 인간 완성에 이르는 기쁨을 노래한 깨달음의 노래>입니다. ‘아’(我)는 참된 나(眞我)를 의미합니다. ‘리’(理)는 알다, 다스리다, 통한다는 뜻입니다. ‘랑’(朗)은 즐겁다, 다스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我理朗)은 참<된 나(眞我)를 찾는 즐거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나를 찾기 위해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의미이고,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피안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의 뜻은 진리를 외면하는 자는 얼마 못가서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진리를 외면하고 오욕락(五慾樂)을 쫓아 생활하는 자는 그 과보로 얼마 못 가서 고통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이치(理致)와 도리(道理)를 알고 나면 ‘아리랑’은 '한(限)의 노래'나 저급한 노래가 아님은 물론이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아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지만 어디에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먼저 깨달은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세례자 요한도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말씀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갈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여 마음이 움직였지만 세상의 것들에 곧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마음입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지만 성당을 나서면 곧 세상 사람들의 마음처럼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가시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평소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로 변화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마음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의 마음입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의 마음입니다. 좋은 땅은 직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신분과 재산이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갈망입니다. 좋은 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헌신입니다. 좋은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저는 아이입니다.’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오늘의 성인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푸(Charbel Makhlouf)
신분 : 신부, 은수자
활동지역 : 레바논(Lebanon)
활동연도 : 1828-1898년
같은이름 : 마클루프, 사르벨리우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Sarbellius Makhlouf, 또는 사르벨리오 마클루푸)는 1828년 5월 8일 레바논의 베카아 카프라(Bekaa-Kafra)에서 노새를 끄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요셉 자룬 마클루푸(Josephus Zaroun Makhlouf)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요셉에 비해 그의 삼촌은 그렇지 못했다. 소년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준주성범”이었다.
23살이 되었을 때 요셉은 집을 빠져나와 비블로스(Byblos) 북쪽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853년, 2년간의 수련을 마친 그는 안나야(Annaya)에 있는 성 마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첫 서원을 하며 2세기의 순교자 성 사르벨리우스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선택했다. 그는 1853년 장엄 서원을 하고 1859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모범적인 수도승으로 살았지만 그가 꿈꾼 것은 고대 사막의 교부들과 같은 삶이었다. 그래서 1875년부터 죽을 때까지 23년 동안 5세기의 수도원장 성 마로(Maron, 2월 14일)의 모범을 따라 은수자로서 매우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이 커지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상담이나 축복을 청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가끔 수도원장이 인근 마을에 가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도록 했을 때 그는 매우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기도 중에 몸이 공중에 뜨는 은총도 받았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는 1898년 12월 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날 늦은 오후에 안나야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사후 몇 차례의 치유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의 무덤은 레바논 사람이건 아니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들의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7년 10월 9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종종 교회는 두 개의 허파(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 둘로부터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푸 같은 성인이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다양성과 일치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사르벨 마클루푸(Charbel Makhlouf)로도 불리는 그의 축일은 12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 글렙 (Gleb)
활동년도 : +1015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러시아(Russia)
같은 이름 : 글레프
러시아의 첫 번째 신자 왕자였던 성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 대공이 1015년에 죽자, 그의 맏아들인 스비야토폴크는 자신의 위치를 염려하여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인 성 보리스(Boris)와 글렙을 제거하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삽시간에 이 형제들을 살해하였다. 형으로부터 제거의 위협을 받게 된 계기는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형에 대하여 정의를 요구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등의 말을 했기 때문이지, 장자의 권리에 반기를 든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이들 두 사람을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은 자’로서 공경하였다. 이들의 축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교회에서 엄수되고 있다. 성 보리스와 성 글렙은 러시아 이름이고, 신자명은 로마누스(Romanus)와 다윗(David)이다. 보리스는 모스크바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쿠네군다(Cunegundes)
신분 : 수녀, 왕비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연도 : 1234-1292년
같은이름 : 구네군다, 구네군데스, 구네군디스, 쿠네군데스, 쿠네군디스, 킨가, 킹가
마걀 이름으로 킹가(Kinga)로 불리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또는 구네군다)는 헝가리의 국왕 벨라 4세의 딸이자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의 조카딸이었다.
쿠네군다는 궁중에서 ‘라틴어와 하느님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랐고 16세 때 폴란드 국왕 볼레슬라우스(Boleslaus)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비록 결혼에는 동의하였으나 결혼한 밤에 왕에게 정절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왕은 1년 동안만 지키자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왕과 왕비는 크라쿠프(Krakow)의 주교 앞에서 평생 동정을 서약하였다.
쿠네군다 왕비는 궁중의상 아래에 허름한 옷을 입고 엄격한 생활을 하였고, 수시로 병자와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1279년에 남편이 서거하자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라는 귀족들의 청을 물리치고, 자신이 스타리 사치(Stary Sacz)에 세운 클라라 봉쇄 수녀원에 들어가서 여생을 지내다가 1292년 7월 24일 선종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성당과 병원을 지었으며, 작은 형제회를 위해 많은 경비를 지출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그녀 주위에 수많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서 그녀의 출중한 덕행이 더욱 빛났다고 한다.
성녀 쿠네군다에 대한 공경은 이미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허락되었고,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는 그녀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8년 7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녀를 복자품에 올렸고, 이듬해인 1999년 6월 16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스타리 사치에서 그녀에 대한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성녀 크리스티나 (Christina)
활동년도 : +연대미상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볼세나(Bolsena), 투스카니,이탈리아
같은 이름 : 끄리스띠나, 크리스띠나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라티움(Latium)의 볼세나에서 성녀 크리스티나를 공경하는 전설은 너무 단순하여 그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성은 희박하지만 유명한 재판과 기적에 관한 전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볼세나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무덤들이 남아 있으나 그곳이 순교자 크리스티나가 묻힌 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볼세냐의 성녀 크리스티나(St. Christina of Bolsena, 7월 24일)
하늘 천사들의 친구, 아버지에게 고문 당하다 화살 맞아 순교
3~5세기경, 이탈리아 볼세냐 지역에서 순교.
성녀 크리스티나는 어린 나이에 갖은 고문으로 고통을 당했다.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살아날 수 있었다.
성녀는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녀 아버지는 우상숭배를 좋아하는 이도교인이었다. 성녀 아버지는 황금으로 만든 조각들을 집안 곳곳에 놓아두고 기도하곤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녀는 어느 날 황금 우상 조각들을 부숴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이를 알아 챈 성녀 아버지는 성녀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하인들을 시켜 불에 달군 꼬챙이로 성녀를 고문하라고 시켰다. 그 와중에도 성녀는 한 번도 신앙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성녀 아버지는 딸을 죽이려고 마음 먹고 성녀 목에 무거운 바위를 매달아 볼세냐 호수에 빠뜨렸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성녀를 구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성녀는 그 후에도 몇 번씩이나 감당하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 성녀는 결국 목에 화살을 맞아 순교했다.
성녀의 무덤은 19세기 때 볼세냐 지방에서 발견됐고 성녀 유해는 현재 시칠리아 팔레르모 지방에 모셔져 있다.
한편 7월 24일은 '놀라운 사람'으로 알려진 성녀 크리스티나(St. Christina the Astonishing, 1150~1224) 축일이기도 하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성녀는 천국과 연옥, 지옥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녀 루도비카 (Louise)
활동년도 : 1462-1503년
신분 : 과부
지역 : 사보이아(Savoia)
같은 이름 : 루도비까, 루이즈
상류사회의 우아한 귀부인이던 루도비카(Ludovica)는 클라라 회원이 될 은혜를 미리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인 복자 아마데우스의 9세(Amadeus IX, 3월 30일)의 딸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지만 어머니에 의하여 훌륭히 자랐으니, 특히 뛰어난 영적 지위에 있었다. 18세 때에 그녀는 위고 드 샬롱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집은 마치 수도원처럼 거룩하였고 부부생활은 사랑으로 가득하였다. 그녀는 최초로 자선함을 설치한 인물로 기록된다. 자선함에 모인 기금으로 그녀는 고아와 과부 특히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이제 완전히 세속과 결별하였다. 그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입고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밤중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오르베(Orbe)의 클라라 수녀회에서 살게 되었다.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그녀는 수녀원 내의 부엌일을 비롯하여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철저히 겸손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1503년 7월 24일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여,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주소서” 하며 선종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