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장의 첫 본문에는, 갈릴리 가나에서 벌어진 혼인 잔치에서 준비한 포도주가 다 떨어졌는데,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셔서 잔치를 더욱 흥겹게 해주셨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6~11절을 보겠습니다.
6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7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그대로 하였다.
9 잔치를 맡은 이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물을 떠온 일꾼들은 알았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이는 신랑을 불러서
10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11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니라 신화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에는 여러 종교전통에서 널리 회자된 이야기였습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본문에서 읽어야 할 것은, 이런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물은 옛 언약, 즉 유대종교체제를 의미하고, 포도주는 새 언약, 그러니까 기독교신앙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신학자들 중에도 그 해석을 지지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그런 영적 의미를 바탕에 두고 쓰여진 영적 복음서라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해석할 때는 그 특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기적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에 그 속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miracle’ 즉 이적이나 기적이라는 말보다 ‘sign’ 즉 표적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 나타나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이야기도 하나의 sign으로 읽어야 되는데, 그 속뜻은 ‘이제 유대교의 시대는 사라지고 기독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담아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영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지만, 요한복음을 영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의 흥을 돋구어주셨다는 본문의 기록에서, 민중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삶을 흥겹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호방함과 자유로움을 읽고 싶습니다. 이 본문이 60년 전에 갈릴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 전승되어 요한이 자기신학으로 해석해서 기록한 본문이라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황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예수께서 민중들과 기꺼이 어울려 술을 마시며 잔치집의 흥을 돋구어주신 사건이 그 전승의 원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시고 그들을 쫓아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다 나오는데, 글의 도입부는 다른 복음서와 매우 유사하게 전개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요한의 독특성이 두드러집니다. 18~22절을 보겠습니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묻기를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도 하셨답니다. 실제의 성전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랍니다. 성전을 허물라는 말씀은 유대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일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뜻하는 상징과 비유일 텐데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요한만의 이 기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현대 신학자 중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중에서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20%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머지 80%는 복음서를 기록한 일세기 교회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입을 빌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들 중에,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이 거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 신학자들의 생각이고 주장일 뿐입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 모든 현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그분들의 주장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성전중심의 신앙에서 예수님 중심의 신앙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3~25절을 보겠습니다.
23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신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다 알고 계셨으므로,
25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셨답니다. 그런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피하여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피눈물이 나도록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기도하셨노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속마음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실 리가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이 간절한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도피하라고 권했을 때 ‘악법도 법이다.’ 라고 말하면서 의연히 독배를 마셨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고 사실이다 아니다 말들이 많지만,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우리 예수님이 소크라테스보다 한 수 아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래도 저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의연히 독배를 마셨다는 소크라테스보다, 죽음이 두렵다고, 십자가의 고통이 무섭다고, 하늘 향해 호소하시는 연약하신 예수님이 그 어느 위대한 철학자나 현인들보다 좋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연약하기도 하신 분이었기에, 저 역시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분을 본받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