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4장은 사무엘서의 부록입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21장에는 다윗이 다스리던 시대에 일어났던 잡다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사울의 후손들을 처형한 사건과,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이장해 온 일,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19 또 곱에서 블레셋 사람과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에는, 베들레헴 사람인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자루는 베틀 앞다리같이 굵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죽인 것으로 알려진 골리앗을 엘하난이라는 사람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윗의 손에 죽은 것으로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골리앗이 엘하난에 의해 죽었다는 기록이 성서 본문에 또 하나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전승이 성서에 함께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골리앗이 실존 인물이고 이스라엘 장수 누군가에 의해 죽은 것도 사실인데, 그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졌다가, 어느 시점에서 기록되었다가, 최종편집자에 의해 사무엘서에 함께 기록된 것이라면, 실제로 골리앗을 죽인 장수는 다윗과 엘하난 중에 누구일까요? 이럴 경우에 학자들은 덜 극적이고 감동이 적은 쪽이 사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실제 사건이라면 골리앗을 죽인 사람은 엘하난인데, 그 설화를 다윗에게 적용시킨 후대의 설화가 성서에 담겨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본에는 이 내용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본문을 개역개정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9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개역개정본은 ‘골리앗’ 이라는 히브리 원어본의 표현을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 라고 번역이 아닌 왜곡을 했습니다. 다만 ‘골리앗’ 이라는 단어만 본래의 크기로 적고 ‘의 아후 라흐미’ 라는 말은 작은 글자로 써서 원본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각주를 달아서 설명을 해야 하는데 각주는 없습니다. 성서의 권위가 훼손되는 듯한 부분이 나오면 은근슬쩍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고 공동번역의 단점을 몇 번 지적했는데, 이번에는 개역개정본이 이런 짓을 했네요.
22장 1절부터 23장 7절까지는 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시이지요. 22장 1~4절을 보겠습니다.
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셨을 때에, 다윗이 이 노래로 주께 아뢰었다.
2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3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십니다.
4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꽤 긴 시라 앞부분만 조금 소개해 드렸는데, 이 시는 시편 18편에도 표현만 조금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다윗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천진한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을 찬양합니다.
창세기를 강해할 때, 성서의 영웅들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아브라함도 그렇고 특히 야곱은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때로는 격하게 흥분하기도 했고, 이 짓 못해먹겠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다윗 역시 도덕적으로 많은 약점을 노출한 사람입니다. 전쟁터에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가차 없이 약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성군의 모델로 아직까지 추앙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을 상징하는 육각형의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믿음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심지어 이슬람에서도 선지자로 대우를 받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는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믿음은 복음, 즉 복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도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만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종교로 위상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인 책임감이 아예 없이 살아간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몇 십 년 전, 그러니까 1960~70년대만 해도 기독교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종교였고 존경받는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주 언급한 내용이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