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문학청춘} 봄호(제23호)
꽃 진 자리/ 성선경
봄날에 꽃이 지면 석장승도 돌아앉지
울다가
절벽(絶壁)에 서면
홀아비냐
과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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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거울/ 감태준
허공은 문을 달지 않는다.
들끓는 욕망과 수없는 탄식
로켓, 새, 항공기들이 제멋대로 드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다.
구름의 낯빛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군소리 없이 감싸고,
얽히고설킨 거미줄 통신망
123층짜리 타워가 늑골을 파고들어도
품 사리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참 부끄럽게 살았다
나 하나 감싸지 못하고
고향 가는 열차를 놓치고 자책하고,
그런 걸 가지고 속 끓일 건 뭔가
투덜대다 또 자책하고,
문 밖으로 퍼준 것도 없으면서
허공의 너른 가슴에 그리움이나 칠했다.
빈 깡통이 되어버린 희망은 또 어떻게 하고.
통 큰 척, 너그러운 척
대인(大人)의 발아래 숨차게 기어 다니는
개미 하나,
사리고 말고 할 몸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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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이상교
토끼를 생전 처음
안아 보았다.
내게 잡힌
토끼 심장이 도근도근
토끼를 잡은
내 심장이 두근두근
토끼와 나,
심장끼리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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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학청춘} 여름호
빈집의 뒤안같이/ 이하석
빈집의 뒤안같이
기억마다 죽음이 파랗게
우거졌다.
우체부 안 오는
빈집의 뒤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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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줄박이/ 조창환
1.
곤줄박이 참 이쁘다
이마는 희고
얼굴에서 목까지는 넓은 검은색 띠가 지나고
등은 진회색, 옆구리는 밤색인데
박새 비슷하지만 박새보다 더 화사하고
참새 비슷하지만 참새보다 더 날렵하다
2.
홍천군 북면 산골짜기 감자옹심이식당 주인아저씨 박무순 씨 집 부엌에 드나드는 곤줄박이는 그 집 귀염둥이다
박무순 씨가 땅콩이나 잣을 손등에 올려놓고 제리야 하고 부르면 포르릉 날아와서 작은 부리로 콕 찍어 물고 포릉 포릉 날아오른다
엽엽해서, 땅콩을 허공에 던지면 허공에서 받아먹고 혀끝이나 코끝에 올려놓으면 혀끝이나 코끝은 안 건드리고 땅콩만 살짝 채 간다
귀염둥이 제리는 박무순 씨가 저를 귀애하는 줄 안다
모이도 없고 미끼도 없이 그냥 빈손 벌리고 제리야 하고 불러도 스스럼없이 빈손에 내려온다, 와서 마음껏 놀다 마음 내킬 때 날아오른다
눈 많이 내려 하늘 캄캄한 날은 이 집 부엌 선반 위에서 웅크리고 자고 가기도 한다
둘은 전생에 부자지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곤줄박이 제리가 조금 온전치 못한 정신을 지닌 새 같기도 하고
박무순 씨에게 타고난 사육사나 조련사 솜씨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감자옹심이 먹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박무순 씨가 옛날 먼 나라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환생한 것 같아서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새만도 못한 인생 부디 거두어줍소서 하고
거지수도회의 불목하니로라도 들어가 몽당 빗자루 하나 들고 아침마당이나 쓸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3.
감자옹심이 먹고 강원도 산길 운전하는데
가을 단풍이 발갛게 수줍어하고
늦게 핀 산국화가 괜스레 흥얼흥얼
앞가슴 살짝 들켜 보여준 숫처녀처럼
부끄럽고도 설레고
설레고도 기뻐서
마른 햇빛과 붉은 단풍과 검은 돌멩이들에서
포르릉 포르릉 곤줄박이 날아오는 소리가 나고
삼라만상에서 쓰쓰 삐이삐이 곤줄박이 지저귀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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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타자기/ 이월춘
칠십 년대였지. 기찻길 옆 이층 셋방, 중일짜리 과외로 어렵게 장만한 마라톤타자기. 키보드를 힘껏 찍어 눌러야 선명한 세상이 보였던 값싼 문명이었어. 전신전화국에서 교환원으로 일했던 진숙이도 그때 알았지. 보유 자체가 근대였고, 도시화였고, 화이트칼라의 대명사였던 수동 타자기. 주산부기타자학원이 성업 중이었지만 원조 독수리타법으로 서툰 시를 쓰느라 숱한 밤을 샜지. 전동타자기와 이팔육컴을 지나 최신 디지털컴을 쓰는 지금도 그 타법을 고수하고 있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먼지 덮어쓴 타자기를 꺼낸다. 종이를 끼우고, 자판을 두드리고, 줄을 바꾸고, 문서 작성은 아무나 하나. 틀려도 지울 수 없고, 저장은 언감생심. 여백이 다하면 아직도 띵! 하고 우는 마라톤타자기. 공화국을 바꾸어도 세상은 저 홀로 가는데, 내 생에 대통령을 몇 번 갈아야 하나. 오, 희미한 옛 추억의 최루탄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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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 최서림
봄은 손톱이 길다.
참말로 무서운 애인이다
할퀴고 간 것들의 마음자리마다
꽃들이 붉게 피어난다
호접의 꿈처럼 봄을 건너가게 해달라고
가만가만 따먹어 보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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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누운 똥을 먹는 개를 보면서/ 고영민
개가 방금 자기가 누운 똥을
다시 먹는다
나는 개를 부르지 않는다
똥은 다시 개를 돌아
똥으로 나올 터인데
관문을 통과한 똥이
몸을 칭칭 감고 나올 터인데
더 진부하고 식상한 똥이 되어 나올 터인데
더러운 개새끼
밥은 안 처먹고 왜 똥을 처먹어*
발길질에 가장 비참하게
깨갱, 소리를 한 번 내지르겠다는 듯
개가 온몸으로 꾸욱 꾹 눌러 뭉친 똥을
다시 먹는다
*옮기면서: 원문은 ‘안쳐먹고’ ‘쳐 먹어’로 되어 있음. 옮기면서 ‘안 처먹고’ ‘처먹고’로 고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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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지성찬
아침저녁 밥을 담는 만만한 게 밥그릇이다
매일 물에 씻고 닦다 보면 흠집이 나
싸구려 물감으로 그린 이파리도 뭉개지고
잘 생긴 뽀얀 얼굴 그 비싼 도자기야
물 한 번 안 묻혀도 귀한 대접 받으면서
깊숙한 진열장 속에 송장처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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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학청춘} 가을호(제25호)
청양고추/ 성선경
붉은 치마에 푸른 저고리
녹의홍상 새댁이
눈 한 번 치뜨지 않아도
아 맵다 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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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신달자
책상에 몸이 달라붙지 않아
생각이 줄줄 세어 흐르네
식탁에 몸이 달라붙지 않아
식욕이 구물꾸물 누워 버리네
생각이 저 하늘에 떠 있네
삶의 발이 땅에 착 붙지 않네
저 구름덩이로 흐르는 생각과 사는 일
내 원고지로 옮기는
이 난관
오늘의 매듭
*옮기면서: 왜 ‘세어’일까? 문맥은 ‘새어’일 듯하나 원문대로 옮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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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지 않은 고백/ 한분순
명랑한 아랫입술
수줍은 그 윗입술
허망이 파고든
바람,
봄날이 혀와 같아
고백을 들으려 드는
내 우울한
저(低)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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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김영주
썼다간 지웠다가
지웠다간 다시 쓴다
보낼까
아니,
말까
망설이다 꾸욱 누른
널 향해 떠난 메시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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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나근희
아무도 넘지 않는 높은 담을
달팽이 기어기어 담을 오른다
산고개 넘던 달도 쉬어 가는데
달팽이 뉘엿뉘엿 담벼락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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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문학청춘} 겨울호(제26호)
거미줄/ 성선경
내 평생 매달려 온 생활이 이것이냐
썩 하니 댓가지 하나로 걷어치우는 저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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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 함민복
이웃사촌이란 카페에 시를 연재하며
번역시를 옮기다가
쉼표인지 마침표인지
구분되지 않아
아내의 돋보기안경을 쓰고
시집을 멀리했다가 가까이했다가
초점을 맞춘다
마침표 같은 눈동자로 세계를 열어 왔는데
쉼표 같은 숨으로 생명을 이어 왔는데
이제
쉼표와 마침표가 구분되지 않으니
죽음도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란 훈수이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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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신미균
반짝이 하트 문양이
붙어 있는
파리채로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파리 한 마리를
내리친다.
미안해
널
몹시
사랑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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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공 푸념/ 이성구
지로에는
요금이지
세금이 아니란다
그 짜실한
요금이
석 달쯤 괴롭히고
촛불을
켜야만 했던
한 가족을 태웠다
그 후로
전등 하나는 켤 수 있게
해준단다
베푼다고
베푼 거지만
먹먹함이 더 자란다
밥솥도
목소리 잊고
외등도 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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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5년 {문학청춘} 가을호 특집- 고형진 <백석 시 어휘의 빈도수와 내용적 특징에 관하여>.
권온 <백석 연구의 처음과 끝- 고형진의 일념>.
백석 시를 읽은 독자라면 흥미진진할 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