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싸움의 현장 촉석루를 찾아
정운일
진주 문화 탐방을 하게 되니 어릴 때 자주 부르던 ‘진주라 천리 길’이 생각난다. 진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가요로 이운정 작곡에 이규남이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에 얽힌 가공의 스토리가 1940년대 초에 진주를 중심으로 영남지방에 널리 퍼졌다. 노래의 가사가 서정적이라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던 지식인들도 즐겨 불렸다고 한다. 필자도 어릴 때 부르기 쉬워 손쉽게 따라 부르던 기억이 난다. 가사를 아래에 적어보면
1.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 가/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위로할 줄 모르나.
2.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 가/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아 모래알을 만지며/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철리길’ 노래 말에 촉석루에 달빛과 남강이 나온다. 남강에서 스쳐 오는 바람소리에 반주 맞추어 진주라 천리 길을 콧노래로 부르니 그 옛날의 정취가 절로 난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라는 말이 실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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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방문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촉석루를 찾는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자태의 촉석루가 남강을 굽어보고 있다. 촉석루는 남장대(南將臺),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한다. 전쟁 때에는 지휘본부로, 평화로운 때에는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쓰였다. 장원루라는 별칭에서도 그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 옛 전투의 상흔이 서린 촉석루는 진주 시민뿐 아니라 관람객들에게도 진주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상의 공간에서 걸어서 쉽게 닿을 수 있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축제의 현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규모가 장대하다.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인 화반의 무늬가 아름답다.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의 경치도 아름답지만, 진주성 맞은편에서 보는 촉석루의 모습은 강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곳 남강에서 매년 유등축제가 열린다. 촉석루는 무대가 되고 남강에 놓인 좌.우교량 사이가 유등행렬이 지나가는 곳이다. 캄캄한 밤중에 오색찬란한 남강의 물결위로 떠가는 유등행렬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나게 한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중요한 요충지다. 이 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다고 하지만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동쪽에 남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자연적인 해자로 둘러싸여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다. 이 성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잃게 되어 더욱 중요한 곳이다. 그래서 진주시민과 호남인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막으려고 했다. 일제시대에도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가기위해 군산에 철도 도로 항만시설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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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싸움이 벌어진 곳이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싸움은 왜군 2만 여명이 진수성을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3,800명으로 왜적을 물리쳐서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
1593년 9월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차 진수성 싸움에서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약 37,000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면서 2차 진주성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 군은 김천일 회경회 황진 장윤 등이 이끄는 3,400명의 병력과 7만여명의 민간인이 있었다. 왜적은 조총으로 공격하고 우리는 활과 재래식 무기로 대적했으니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군.관.민 7만명 전원이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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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은 촉석루에서 축하연을 벌였다. 이때 관기였던 논개는 울분을 참지 못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깍지 낀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게) 눈치를 살피며 왜장을 의암(義岩)으로 유인하였다. 의암에 도착한 논개는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왜군에게 조선 여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어 자랑스럽다. 본디 위암(危岩)이라 하였는데 논개의 충절을 기려 이름을 의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진주성문 앞에 세워진 논개의 시비에 적힌 시를 옮겨 적는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열정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이시를 논개가 구천에서라도 들으면 그날의 한이 풀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에 중건해서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1960년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중건했지만 국보지정은 상실됐다. 지금도 진주시민들은 국보 재지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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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사는 촉석루 옆에 있는 논개의 사당이다. 용모가 훤칠한 논개의 초상화 한 점이 모셔져 있다. 영정 앞에 서서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묵념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충단은 숙종 12년(1686)에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마련한 제단이다. 허술한 제단을 보고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은 만들어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7만 여명의 영령들의 충혼을 기리고 있어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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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때에는 한양의 정승들이 진주비빔밥을 먹기 위해 천리 길 진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으로 한양정승들이 즐겨먹었던 진주비빔밥을 먹었다. 놋그릇에 7가지나물과 고명으로 소고기 육회를 올려놓으니 마치 꽃처럼 아름답다. 무우를 넣어 끓인 소고기국이 감칠맛을 더해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있듯이 꽃처럼 아름다운 비빔밥을 먹으니 나도 조선의 정승이 되어보는 즐거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