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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온계후손홈페이지에서 퍼옴 李鎭東:1732(영조8)~1815(순조15). 眞城李氏 15세손. 자는 逸昇. 호는 欲寡齋,퇴계의 숙부이신 송재 이우 선생의 5대손으로 반초당(返招堂) 이명익(李溟翼)의 高孫으로 1732년(영조8년) 안동 녹전 원당리태생 1. 이진동은 서원에서 강독이 파하자 정신없이 바쁜 걸음으로 한티를 넘고 온혜 마을 앞을 지날 때는 노송정 종택이 저녁연기를 뿜으며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운곡 골짜기를 지나 갈골에 들어서니 이미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는데, 달무리가 火星을 둘렀고 남쪽 하늘의 은하수가 머리 위에서부터 빛의 고리같이 연속적으로 흐르면서 점점 짙어지더니 천갈궁天蠍宮(전갈자리)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자 서쪽 삿갓봉 위로 삼태성이 떨어졌다. 삼태성이 천갈궁(天蠍宮)을 하늘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아, 큰 일이 난 게 틀림없구나.’ 1800년 6월 28일. 도산서원 훈도 이진동은 아침에 세수를 하려고 마당에 내려서다가, 어제 서원에서 유생들로부터 들은 정조 임금의 연훈방(烟熏方) 처방이 생각나서 천기를 보더니 황급히 행장을 짊어지고 대문을 나섰다. 부인 권씨와 아들 며느리들 그리고 집안 권속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섰으나 그의 빠른 걸음을 따를 자가 없었다. “아버님, 어디를 바삐 가십니까?” 그의 넷째 아들 여구(汝龜)가 따라 나섰지만, 이진동은 이미 원당 마을을 벗어나서 구천 마을 야옹정 앞을 돌아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진동은 젊은 시절에는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걸음이 빨랐다. 그는 도학을 공부하면서 축지법에 매몰되어 매일 새벽 寅時에 일어나서 무(戊)자 발걸음으로 걸으면서 ‘새처럼 공간에 떠서 날아간다.’는 생각으로 걷는 경보를 익혔다. 젊은 이진동은 백리를 가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古稀를 바라보는 지금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이도 따라 갈 수 없을 정도로 걸음걸이가 빨랐다. 2. 유생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조 임금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등창이 나서 내의원에서 붙이는 고약을 계속 올렸으나 효험이 없다는 말을 듣고 하루 종일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조 임금의 환우가 여러 날이 지나도 차도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정조가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떠졌다.” 그러자, 내의원에서는 심인이 조제한 연훈방(烟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처방 하였다고 한다. 내의원이 임금의 등창에 연훈방과 성전고를 처방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이진동은 깜짝 놀랐다. 분명 연훈방은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성전고는 파두(巴豆)를 쓸 것인데, 경면주사는 수은이 들어 있어서 혈관을 타고 온 몸에 독성이 퍼져나가기 때문에 섣불리 써서는 안 되는 극약이다. 종기를 다스리려다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이 처방은 필시 서인 벽파들이 꾸민 흉계일지도 모른다.’ 이진동은 서원에서 강독이 파하자 정신없이 바쁜 걸음으로 한티를 넘고 온혜 마을 앞을 지날 때는 노송정 종택이 저녁연기를 뿜으며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운곡 골짜기를 지나 갈골에 들어서니 이미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하는데, 달무리가 火星을 둘렀고 남쪽 하늘의 은하수가 머리 위에서부터 빛의 고리같이 연속적으로 흐르면서 점점 짙어지더니 천갈궁(天蠍宮,전갈자리)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자 서쪽 삿갓봉 위로 삼태성이 떨어졌다. 삼태성이 천갈궁(天蠍宮)을 하늘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아, 큰 일이 난 게 틀림없구나.’ 그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면서 12년 전 영남 유생들의 무신년(戊申年) 萬人疏 때 그가 직접 만났던 정조 임금의 용안이 떠올랐다. “인물이 걸출하고 문장도 뛰어나지만 생각이 바르고 의지가 곧아서 장차 짐을 도울 재상감이구나.” 그 때, 자신을 바라보시던 임금의 눈길에서 무한한 신뢰와 인간적인 情을 느꼈으며 그윽히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외로움의 그늘을 읽을 수 있었다. ‘차라리 私家에서 태어 나셨더라면......’ 정조 임금을 만난 이후, 그에게 정조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애증으로 다가 왔다. 1800년 6월 28일 아침, 이진동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제의 일이 걱정이 되어서 마당에 나와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두 손을 펴서 손가락을 꼽아 日辰을 짚어 천기를 보던 그는 눈앞이 캄캄하고 팔다리가 떨렸다. ‘틀림없이 규괘(睽卦) 로구나...... ’ 그는 주역에서 일진이 규괘인 것을 알고서,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한 천기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 하고 탄식하였다. 이진동은 정조 임금을 구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단초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3. 6월의 이른 아침의 들녘은 이미 부지런한 농부들이 여기저기서 논을 매고 있었다. 싱그런 벼 그루 사이로 농부들이 학처럼 하얗게 움직인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아침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진동은 이미 구천을 지나 두월에서 내성천을 건넌 뒤 단숨에 榮川(영주의 옛지명)을 지나 순흥 소수서원 대문에 들어섰다. 그때 마침 김한동(金翰東,해저)도 서원으로 들어서려다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쳤다. ‘상의 위급함을 알고 왔구나.’ 진동과 한동은 서로의 눈빛에서 상대방의 심중을 간파하고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와은도?” “네.....” 김한동(金翰東)은 의성 김씨로서 호는 와은(臥隱)으로 봉화 바래미에서 정조의 환우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日辰을 짚어보고 급하게 한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진동과 김한동은 경인년 성시(省試)에 두 사람이 함께 과거에 실패한 후, 김한동은 다음 해에 대륜차(大輪次,과거의 불합격자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서 부(賦)에 수석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으나, 이진동은 그 이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李鎭東은 퇴계의 숙부이신 송재 이우 선생의 5대손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신 반초당(返招堂) 이명익(李溟翼)의 高孫으로 1732년(영조8년) 안동 녹전 원당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할아버지 이의겸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 하였다. 그는 도산서원의 훈감에 추대되어 고장 선비들에게 성리학과 도학을 강론하고 있었다. 이진동은 이상정, 이광정, 조진도, 류일춘, 정약용, 박지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 하였으며, 경학, 음양, 불학, 예학과 청나라 사신들이 들고 온 서구의 서적도 접하게 된다. 와은(臥隱) 김한동은 과거에 급제한 후 헌납이 되어 수해를 당한 영남지방 재해민의 기곤을 들어 환곡의 환수를 연기할 것을 진언하였고 대사간이 되었으나 파직하고 도학과 주역에 심취하였는데, 그날 순흥 소수 서원에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각자 천기를 보고서, 임금의 독살을 막으려는 충심이 이심전심으로 서로가 통했던 것이다. 이진동과 김한동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은 도산서원 유생으로서 서로의 학문과 인품을 존중하고 ‘만인소’를 올릴 때 두 사람이 의기투합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두 사람처럼 ‘바쁘거나 급해서 서두르는 것’을 ‘진동한동’이라고 하였다. 4. 1720년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숙종의 서세자 연잉군이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 되었다. 연잉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그 직급이 가장 낮아서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어린 연잉군은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제치고 정권을 독식하던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서 연잉군과 경종의 택군에 휘말렸다.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 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었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영조시대가 열렸으나 숙종 임금이 뿌려 놓은 씨앗은 영조 시대의 개막에 맞춰서 조선 정가는 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영조 임금이 즉위하자, 위협을 느낀 박필현, 정희량, 정세윤 등 소론 과격파들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효종의 형)의 증손자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경종은 연잉군이 보내준 개장을 먹고 독살 되었으며, 연잉군은 노론 김춘택의 아들이다.” 영조의 왕위 계승이 부당함을 알리는 흉서·괘서가 나도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인좌, 조성좌 등이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산 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키자, 안동, 대구 등의 영남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난군 세력 중에 문경 사람 이인좌, 순흥 사람 정희량이 주동하였기에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남인들의 협조설까지 확산되면서 영남을 반역 향으로 지목 했다. “깊은 밤 궁궐에 누워 생각이 영남의 일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영조는 영남 사람 보기를 마치 요시(遼豕)처럼 여겼다. 영조는 영남을 반역의 고장으로 지목해 향후 일체의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노론들은 무신란의 사상적 연원을 남명, 정인홍의 학통으로 소급해 특히 경상우도 사족을 철저히 탄압했던 것이다. 영남의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리게 된 발단은 영조의 즉위를 반대한 서인 일파가 무신년(1728)에 일으킨 무신난의 60주년인 무신년(1788)을 맞이하여 영남의 선비들이 그 동안 지역적 차별을 당한 억울한 무고의 진실과 당파의 고질적인 폐단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진동은 학식과 성품이 걸출하고 매사에 정의롭고 일처리가 명료하여 영남유생을 대표하는 소수(疏首)에 추대 되었다. 이진동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은 상소문과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작성하여 상경했는데 무신창의록은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유생들 모두가 이인좌에게 동조한 것이 아니라, 반군에 맞서 싸운 유생들도 많다면서 그 공적을 기록한 책자였다. 상소의 내용은 이인좌의 난 당시 영남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반란군과 맞서서 투쟁하였으며, 반란군은 소론과 남인 과격파이고 영남과는 무관한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점을 전제한 뒤, 영남의 사림들이 임오의리3) 문제의 진실을 알고 있으나 노론의 탄압으로 비밀리에 간직하던 중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도록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정조가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여악과 향락을 즐기러 갔다.” 유성한의 흉소가 있었고, “우리 노론은 경종에게는 신하의 의리가 없다.” 이러한 윤구종의 망언을 전해 듣고, 영남 유생들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상경 했으며, 사도세자의 평소 현명한 언행과 학식으로 보아 정신이상자일 리가 없고 세자와 영조와의 원만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벽파의 사악한 무리들에 의해 이간질 당하고 끝내 원통히 죽었으니 마땅히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역도들을 찾아내 처벌하여야 할 것이며, 임오의리 문제는 부자 또는 조손간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하는 사안이지만 영조가 금등 문서4)를 남긴 것처럼 그것은 충역을 가리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일은 더 차원 높은 효와 의리를 찾을 수 있으며, 전하께서 영남을 특별히 잊지 않고 권념해 주시고 파격적인 예우를 해주시니 영남의 사림들은 모두 전하를 위해 몸 바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선 세자(사도세자)를 위해 왕에게 변무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직간하는 것이며, 유성한과 윤구종의 경종에 대한 불충은 선 세자에 대한 불충과 다를 바 없으니 여러 신하의 주청대로 마땅히 그들을 역률로 다스려야 한다. 이 상소를 읽은 정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정조는 소수 이진동에게 상을 내리고 상소를 소중히 간직하였다. 이는 노론 벽파에게 충격적인 상소였기에 이후 이에 대한 노론벽파의 저항이 거세기도 했었다. 무신창의록은 무신년 (1728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상도에서 기병한 의병들에 대한 기록을 모은 책이다. 난이 일어난 지 60년 후인 무신년(1788 정조 12)년에 정조가 안동의 의병장 유승현(무실-박실)과 강좌 권만(닭실)에게 관작을 내리고 그 때의 사적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감사 등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진동이 도내의 인사들과 더불어 각 읍의 의병에 대한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편집한 후 정조 임금에게 바쳤다. 왕은 그 책을 경상도에서 간행하게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다가 19세기말에 이르러 간행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경상도 창의사적, 호소사 조덕린(주실)사적, 소모사 황익재사적 및 별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가 되는 내용은 경상도 무신창의사적으로 안동, 상주, 예천, 순흥, 영천(永川), 의성, 예안, 풍기, 영천(榮川), 진보, 영양, 봉화, 용궁 등 13개 지역의 창의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각 지방의 창의사적의 내용은 의병의 조직과 활동을 규정한 절목, 의병의 조직과정과 난의 경과를 기록한 일기, 의병조직에 참여를 호소하는 통문, 격문 등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도 군령, 전령, 방(榜)과 의병의 군량지원을 위해 각 지역의 院, 서당, 역원 등에서 보내온 쌀, 사환 등의 구체적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은 절목과 일기로서 절목은 장정의 의병참가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의병 기피자는 엄한 군율로 다스리고 있다. 일기의 내용은 3월 15일부터 난이 평정되어 의병을 파하는 4월 7일까지의 난의 발생과 의병조직, 통문의 수발, 난의 진행 동태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순흥, 영천(榮川) 등의 일기에는 관찬자료에서 언급되지 않은 구체적인 난의 진행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안음, 거창을 근거로 난을 일으킨 정희량 등에 대한 보고기록이 있다. 호소사 조덕린사적, 소모사 황익재사적은 경상도 각 지역의 의병호소와 의병조직을 중앙에 보고한 내용이며, 별록은 감란록 및 읍지 등에서 관련기사를 옮겨 적은 것으로 안동, 상주, 선산, 예안, 영천, 예천, 영해, 하동 등지 사인(士人)들의 활약상에 대한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의병을 조직한 자는 전관직자나 또는 지방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향교, 서원, 서당 등에서 물량과 인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진동과 김한동은 ‘무신창의 만인소’를 직접 들고 상경하여 8월부터 대궐 문 앞에 꿇어 엎드려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이 장악한 승정원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진동은 11월에야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시전 상공인들의 질고를 묻기 위해 御駕를 세운 틈을 타서 상소문과 무신창의록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1788년 11월 8일, 이진동은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던 중 정조의 부름을 받아서 대궐에 나가 좌상, 우상 및 예조 판서 이재간이 동석한 자리에서 上言하였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반란 진압에 참전한 영남 인사들의 명단이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진동은 창의한 이유와 억울함을 상언 하면서, “역적 정희량의 조카인 정의련의 초사(招辭)에 의하면, ‘3월 10일 뒤에 이능좌가 예천에 왔다가 크게 분노하여 돌아가면서,「이정소를 목베고 안동을 통괄 하려고 했으나 안동 놈들 때문에 나의 일을 이룰 수 없다.」하자,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안동 사람들이 꾸짖자, 이능좌가 이 때문에 분개하면서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안동 사람들이 역적을 꾸짖어 물리침으로써 역적이 분노하여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상이 우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영남은 바로 사부(士夫)의 고장이다. 그때 영남 사람 중에 속임과 유혹을 받아 역적이 된 자가 간혹 있었으나, 어찌 이 때문에 전체 영남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영남 유생이 올린 책자를 보건대 여러 사람들의 충의가 참으로 거룩한데 도신의 장계에 누락된 것은 자못 괴이하다. 임금의 정사에는 인재를 수습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대신의 사업은 인재를 천거해서 임금을 섬기는 데 있으니, 영남 사람 중에서 명성을 들어 알고 있는 사람 한 둘을 우선 천거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인재를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는 일을 신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영남 유생의 이번 상언은 조정에서 영남에도 충의의 선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덕린과 황익재가 아직까지 罪籍에 있다. 이들은 (악역)惡逆에 관계된 자들이 아니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니,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덕린은 무죄가 밝혀졌으나, 그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황익재도 그때 함께 무죄가 밝혀졌으나, 대계로 인하여 귀양 갔다가 얼마 뒤에 방면 되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초(歲抄)속에 들어 아직까지 방면자 명단에 끼는 은택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이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하니, 영의정 김치인은 아뢰기를, “김성탁(내앞), 조덕린, 황익재가 다 죄적에 있는데, 성탁은 명의(名義)에 죄를 얻어 장형을 받고 귀양가기까지 했으며, 덕린은 감히 말의 뜻이 음흉하고 참혹한 흉소를 올렸데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러 사람 가운데 함부로 끼워 넣어 조정의 생각을 떠보려는 꾀를 부렸으니 장두(狀頭)이진동(李鎭東)을 엄히 감죄(勘罪)해서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영남 유생들이 반드시 무신년에 창의한 것으로써 성상께서 한 번 보시도록 하고자 한 것은 그 뜻이 무엇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 적변을 당하여 충의가 발휘된 사적을 드러내 밝히고자 한 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올린 책자를 앞으로 인쇄해서 널리 배포하게 한다면 그 충의를 포장(褒奬)하는 것이 어찌 상례에 따라 추증하고 자손을 돌봐주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책자를 열람해 보고서 대신들에게 헌의하라고 명한 뜻이 어찌 공연한 것이었겠는가. 문교가 흥성했던 지방의 충현의 후예들로 하여금 60년 동안 쌓인 원한과 두터운 무고를 씻을 수 있게 하고자 해서였다. 대체로 변란의 와중에서 유능하고 뛰어난 사람을 추대하여 앞을 다투어 창의하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그 기절(氣節)과 충성이 다른 도와는 다르다 하겠다. 60주년을 맞아 당시의 유공자를 모두 기록하는 이때에 이런 책을 보았으니, 어찌 특례로 포장하여 가상히 여기는 은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본도로 하여금 중요한 것만을 뽑아서 인쇄해 배포하는 것을 모두 영상과 좌상의 헌의에 따라 시행하게 하라.” 상이 준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조덕린과 황익재는 그때 호소(號召)하고 안무(按撫)한 공이 진실로 있었다. 고 승지 경상도 號召使 조덕린과 고 목사 소모사(召募使)황익재의 죄명을 세초(歲抄)속에서 씻어내라. 이것이 바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신 선왕의 뜻을 잇는 것이니, 모든 나의 영남 사람들은 내가 오늘 간곡하게 이르는 뜻을 알아서 학문에 더욱 힘쓰고 집에서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여 자손 만대토록 막히지 않게 하여 우리 선대왕의 천지처럼 감싸주신 성대하신 은덕에 보답하라.” 상이 이진동에게 이르기를, “60주년을 맞아 충절을 포장하고 공적을 기록하는 날을 당하여, 책자 가운데 실려 있는 여러 사람들은 모두 명현의 후예들로 창의하는 일을 주도하였으니, 내 진실로 찬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당목(黨目)이 한 번 생겨난 뒤로 취미가 각기 달라져서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 나라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를 당하여 영남의 허다한 인사 중에는 반드시 등용할 만한 사람이 많을 것이니, 만약 수용해서 함께 조정에 늘어서게 한다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도에 부합할 것이다.” 상이 이진동에게 이르기를 “공은 인물이 걸출하고 문장도 뛰어나지만, 생각이 바르고 의지가 곧아서 장차 짐을 도울 재상감이구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이진동은 진실로 감읍 하였다. “그동안 남인들 중에는 학식이 출중해도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너도 과거를 보지 않았느냐?” 상이 하문하자, 이진동은 이미 오래 전에 성시(省試)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답안이 격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무효가 된 것을 정조 임금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는 지금, 그 때 서인들의 농간을 밝힌들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진동이 자신의 호를 욕과제(欲寡齊)라 한 것은 세상 명리의 욕심을 버리겠다는 그의 좌우명을 의미 한다. 세상 욕심에 초연하고 학문에만 몰두한 지 수십 년, 그의 학문은 경서에서 천문, 도학 그리고 외국의 새로운 문물을 섭렵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정조에게 ‘무신창의록’을 읽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정조는 밤 새워 다 읽은 다음 채제공에게 “그때 영남 사람 중에 속임과 유혹을 받아 역적이 된 자가 간혹 있었으나 어찌 이 때문에 전체 영남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정조는 무신창의록 간행과 대상자들의 포상을 명했다. 이진동의 상소는 수십 년간 묻혀있던 정치적인 문제들을 언급한 내용으로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 100년간의 영남 남인의 형편과 무신란 당시 영남 사림에 대한 무고를 바로 잡게 된다. 5. 이진동과 김한동은 이미 고희를 바라보는 노인이다. 축지를 하듯 다니던 젊은 시절과 다르게 지금의 그들에게 한양 길은 멀고 힘에 부치는 원로 遠路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진동이 무신년 상소 때 소수(疏首)로 뽑히어서 상소를 추진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걷는 길은 만감이 교차하였다. “만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는 만인소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 우선 그만큼 명분이 분명해야 했고, 그리고 자발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성사가 불가능 했지.” 이진동은 그때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였다. “욕과제께서는 그때, 소수(疏首, 疏頭)의 직임을 맡아서 각 지역의 疏任들과 상경봉소(上京捧疏)와 복합(伏閤)에 참여하는 배소유(陪疏儒)들을 잘 다스려서 소유들 모두가 참으로 열심이었지요.” “와은의 덕이었지요. 그리고 배소유가 아닌 단순히 이름만을 제출한 자들도 연락하여 격려해 주었지요......” 유소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한양까지의 왕복 노자에서부터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였다. 한양에서의 수십 일간의 숙식비는 당연하고, 만약 소수와 소임들이 귀양 가게 될 경우의 문제 등에서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자금은 이를 지지하는 재경인사들의 기부금으로도 일부 충당되었지만, 대부분은 각 지방의 향교나 서원, 문중 단위로 일정액을 갹출 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인소가 발의되어 최종적으로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는 것인데, 비답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복잡하고 험난하다. 유림의 대표들이 논의하여 상소를 발의하게 되면, 이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 개최를 알리는 통문이 각지의 서원이나 향교, 문중 등으로 발송하고, 도회는 주로 주관지역인 안동이나 서울 출입이 쉬운 문경, 상주향교 등에서 개최되었다. 통문을 받은 기관에서는 향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도회에 참석할 유생들을 선발하는 한편,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통답(答通)을 발송 하였다. 도회에서 상소가 결정되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데, 우선 상소를 위한 대표인 소두(疏頭 : 疏首라고도 한다)를 선정하고, 공사원(公事員), 장의(掌議), 사소(寫疏), 배소(陪疏), 日記有司 등의 다양한 疏任과 陪疏儒를 각 군현별 혹은 문중단위나 성씨별로 배정하고, 상소 전반을 관장하는 疏廳을 설치하는데 소청은 주로 향교나 서원이 이용되었다. 소청에서는 상소문을 마련하고 참여 유생들의 명단을 확보한다. 상소문은 학식과 문장력을 갖춘 명사가 작성하거나, 여러 사람들이 제출한 글들 중에서 선택하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소유들뿐 만 아니라 중앙의 관련 인사들의 검토 과정을 거치면서 수정되게 마련이었다. 상소문이 완성되면 각 향교와 서원, 혹은 가문별로 파악된 참여 유생의 명단을 연명으로 기록하여 상소문을 완성한다. 완성된 상소문은 소궤(疏櫃)에 보관하여 배소유들이 서울로 운반하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소유들은 우선 숙소를 마련하고 재경세력들과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봉소(捧疏)할 때를 정한다. 그런데 유소 혹은 만인소는 승정원에서 접수하여 어전에 올린다. 복합할 날짜가 정해지면 소두가 소임 및 배소유와 함께 소궤를 들고 대궐 앞에 복합하여 승정원에 상소의 대강 내용을 기록한 ‘대개(大槪)’를 전달한다. 입직승지들은 이 대개를 검토하여 정소(呈疏)여부를 결정해 疏本을 들이도록 하면 명첩(名帖)이 첨부된 상소문을 제출한다. 승정원에서는 봉입된 상소를 고의로 거부할 수 없지만, 왕명을 빙자하여 반대당파의 상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도 하였다. 상소가 정소되어 이를 검토한 임금은 즉시 비답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며칠 지체시키기도 하였다. 물론 비답을 받을 때까지 소수를 비롯한 배소유들이 복합하는 것이 통례이다. 임금의 비답은 우호적일 경우도 있지만, “疏를 보니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 알겠구나.”, “알았으니 돌아가서 생업에 충실하여라.” 등과 같이 아주 통상적인 답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바라는 바의 비답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2,3차에 걸쳐 복합을 계속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만약 국왕이나 집권층의 의사와 크게 어긋날 경우에는 소두를 비롯한 간부들이 형조에서 조사를 당하거나 무고죄로 유배되기도 한다. 이진동의 무신년 상소가 성공적이었음은 그 후 임자년에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본 것이었다. 정조는 임자년(1792) 3월 각신(규장각 신하) 이만수를 영남으로 보내어 도산서원에서 別試를 치르게 하였다. 별시장에 입장한 유생이 7200여 명, 시권이 5000여 장, 구경꾼까지 합쳐 1만여 명이 모여 ‘영남에 사대부가 만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각신이 과장을 열자, 1만 명 가까운 유생들이 시사단으로 들어왔고 시권을 합당하게 지은 자가 근 5천 명이나 되었다. “그때, 별시를 보러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유생들의 선비다운 행동은 참으로 자랑스럽지요.” 유생들의 질서정연한 행동을 떠올리며 김한동이 감격해 하자, “그렇지요. 우리 남인의 과거가 무신난 이후 무려 65년 만이지요. 각신 이만수가 가져온 시권을 정조 임금이 직접 채점하셨지요.” 이진동은 임자년 도산서원 別試를 상기하며,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 하면서 두 사람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죽령을 넘어서 단양에 당도하고 금수산을 돌아 넘어서 제천에 당도한 후 천둥산 박달제를 넘었다. 여주 이천을 지나서 장호원에서부터는 발바닥이 부르트고 몸살이 났다. 6. 이진동과 김한동은 7월 5일에야 한양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미 6월 28일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운명하였으며, 그날은 이진동과 김한동이 고향집에서 천기를 보고 정조 임금의 독살을 막기 위해 진동한동 상경한 바로 그날 이었다. 정조가 운명하던 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고 한다. 정조가 운명하던 며칠 전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벼가 임금의 상을 당한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이진동이 정조의 환우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안동에서 한양까지 500리 길을 진동한동 왔지만, 늙은이들의 걸음이 젊은 시절과는 달라서 이렛 만에 한양에 당도 했다. 그날 6월 28일 아침, 이진동이 그의 집 마당에서 짚어 본 주역의 64괘 중에 38번째 규괘(睽卦)는 단절과 이별, 죽음을 뜻하며, 그 전날 밤에 삼태성이 天蠍宮을 하늘에서 끌어내림은 임금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는 상경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하였지만, 주역의 규괘(睽卦)와 천갈궁(天蠍宮)의 천기를 죽음의 사자처럼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설마 했더니, 결국.....’ 그러나 이미 임금은 그가 출발하던 날 승하 하셨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한 슬픔을 가눌 길이 없었다. ‘선조 병술 년에 주상의 병환이 혼미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하루 밤낮을 넘기고 다시 회생하였으며, 갑오년에 또 그와 같은 증세가 있었으나 회복하였는데......’ 이진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혹시나 독살을 면하고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모두가 허사였다. 정조가 아직 49세의 젊고 왕성하므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할 수많은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 원통하도다. 국운이 다 한 것인가, 이 일을 어쩌랴....’ 이진동은 68세의 고령이다. 500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왔지만, 이제는 명의 화타인들 생명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여섯 살 아래이지만 김한동도 환갑의 노인이 아닌가. 두 노인이 대궐문 앞에 쓰러진 것을 발견한 정약용, 박지원 일행이 그들을 연암의 집으로 모셨다. 이들은 12년 전 무신년 만인소 때 한양의 유생들과 함께 파당을 넘어서 물심양면으로 이진동을 지원해 준 당시대의 최고 지식인들 이었으며 그 후 일생을 믿음으로 교유하였다. 이진동은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연훈방에 쓰이는 경면주사(鏡面朱砂)는 붉은 빛을 띠는 수은 성분의 천연 광물질로서 온천 근처에서 생성 되는 화산암이다. 이 경면주사는 가루로 만들어서 진정제, 해독, 해열에 효과가 있으며 다른 약제와 섞어서 써야 한다. 종기 치료에는 경면주사를 다른 약제와 섞어서 한지에 싸서 불에 태워서 훈방하는데, 고름이 잘 생기고 잘 빠져 나오게 하는 성질이 있다. 그런데 황화수은을 태우면 수은이 나올 수 있다. 명나라 본초강목에 의하면 불에 닿으면 황과 수은이 분리 되는데 0.2g이상이면 치명적인 물질이 나와서 환부에 수은이 유입 된다. 급성 수은중독은 구토, 기침, 피설사, 복통, 불면 증상이 생긴다. 종기 치료는 일반적으로 3∼5일 경과 후 농을 째고 고름을 빼고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하는데 정조는 치료시기를 놓쳤다. 특히 연훈방 치료를 하면서 경옥고로 보신하는 치료를 동시에 처방한 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처방이었다. 경옥고는 기력 회복 보약이므로 종기에는 해가 되기 때문이다. 정조의 병세가 6월 26일부터 혼수상태이면서 가미팔물탕, 독삼탕, 인삼차, 성향정기산 등을 처방하여 종기를 도리어 악화 시킨 결과가 되었다. 또 한 가지 독살의 의문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정순왕후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65세에 15세의 젊은 나이로 왕비에 직접 간택된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정조 즉위년 7월 28일 경희궁에 호위군관 강용휘, 천민출신 장사 전흥민이 홍상범(홍계희의 손자)의 사주를 받고 정조를 살해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가 정조에게 발각 되었으며, 홍계희의 조카 홍술해의 아내는 소문난 무당의 주술을 이용해 정조를 살해하려 하였다. 그들은 정조를 살해 후 은전군을 추대하기 위해 환관과 궁녀 가 역모를 꾸몄는데 고수애, 김귀주(정순왕후 오빠)가 주동자였으며, 김한구(정순왕후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바친 장본인이었다. 특히, 정조의 가족 중에 정조의 효의왕후 김씨의 의문사, 임신 중이었던 의빈 성씨 사망, 문효세자 사망, 수빈 박 씨의 사망 등 정조 가족의 의문사 사건은 정조의 심증에 정순왕후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삼권을 잡고 있는 정순왕후 일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쌓고 능행차를 한 것도 자신의 왕권 강화와 서인들에 대한 일종의 압력이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날 정조가 혼수상태일 때 정순왕후가 정조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자 정조가 승하한 것은 정조의 급사에 정순왕후의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다. 정순왕후가 정조가 누워 있는 침실 앞에 나타나서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조금 뒤에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리자 환지와 시수 등이 문 앞으로 바싹 다가가 큰소리로 번갈아 아뢰기를, “신들이 이와 같은 망극한 변을 만나 지금 4백 년의 종묘 사직의 안전이 극도로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우리 왕대비전하와 자궁저하(慈宮邸下)일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우리 자전전하와 자궁저하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한참 뒤에 정순왕후는 비로소 대내로 돌아갔다. ‘참으로 독살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을 떨칠 수가 없구나. 틀림없이 정순왕후가 혼수상태의 정조의 숨통을 틀어막아 질식시켰을 것이다.’ 정순왕후의 음흉한 계책은 어린 임금을 수렴 청정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함이란 것은 명약관화 한 일이다. 다산 정약용은 정승 심환지가 심연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려서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을 그는 장기로 유배 갔을 때 지은 ‘솔피의 노래海狼行’는 물고기의 왕 고래가 솔피 무리의 공격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정조의 죽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정조 대왕이 붕어(崩御)하시기에 이르러서 채홍원의 혈소(血疏) 내용을 대령(大嶺)의 밖에 널리 전파하고 역적 장시경의 계획이 이에 비로소 결정되었고, 행역(行役)이 김한동의 향리에 찾아갔으나 이미 인산(因山) 전에 시급히 떠나고 없었다. 김한동이 향리를 떠난 것은 장시경과 역적 모의를 한 것과 무관하며, 정조 대왕의 독살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이진동과 진동한동 상경하였기 때문이다. 인동의 장시경, 장현경 형제는 무기를 탈취하여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으로 인동 관아에 진입했으나 권원에 제지당하고 천생산으로 도주하여 자결 하였다. 정조 대왕이 운명하자 내시가 곤룡포를 받들고 창경궁 동쪽 처마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고복을 세 차례 부르고 곡하였다. 이미 대보(大寶)를 왕세자에게 넘겼고, 산릉을 현륭원 형국 안 강무당 옛터의 해좌(亥坐)에 정하고 11월 3일에 상여가 떠나서 11월 6일 자시에 건릉(健陵)에 장사지냈다. 정조의 영가(靈駕)가 지나는 길마다 연도에 엎드린 백성들의 슬픈 곡성이 공중에 메아리쳤다. ‘아, 위풍도 당당하시고 마음씨는 너그러우시며, 덕이 겉으로 빛을 발하고 의젓하고 거룩하신 그 님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네.’ 7. 이진동과 김한동은 11월 6일로 예정 된 정조의 장례식 때 까지 한양에 남아서 한양 일원의 선비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정약용의 초청을 받아서 한강의 두물머리 덕소 근처에 있는 정약용의 집에서 유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형제들을 비롯해서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완산 이긍익, 泠齋 유득공, 옥유당(玉蕤堂) 한치윤 등의 실학자들과 어울렸다. 연암 박지원은 이진동과 마찬가지로 첫 과거에서 시험 내용에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박명원과 연행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섭렵하였으며 당대의 실학자들과 어울렸다. 와은 김한동은 정약용 형제들의 영향을 받아서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승정원의 승지이면서 각종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1802년 10월 1일 지평 정언인의 탄핵을 받고 명천, 흡곡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1805년 3월 22일 방면 되었다. 욕과제 이진동은 명리와 재물에는 초연하였으나 슬하에 여간(汝幹), 여호(汝虎(, 여봉(汝鳳), 여구(汝龜), 여홍(汝鴻) 등 다섯 형제와 세 딸 등 8남매를 두었으며, 특히 호랑이, 봉, 거북이, 기러기 등으로 아들들의 이름을 작명한 것은 선비로서 자식에 대한 자애로움이 지나칠 만큼 과욕(寡欲)이다. 불천위 가문인 반초당(返招堂) 종가의 대를 잇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자식이 여럿인 것은 결코 과욕이 아니라, 가문을 유지하는데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 욕과제 이진동은 만인소의 소수가 된 이후 서인들의 핍박이 심했으나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氣槪)로 퇴계의 성리학 계승·발전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무효가 된 이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도산서원의 훈도로서 영남 사림을 선도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1815년(순조15년) 84세로 원당리 자택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長壽 하셨다. 욕과제 이진동은 사사로운 세상의 욕심을 버렸지만, 영남 사림의 100년 한을 풀어 준 의로운 선비로서 후세 사람들에게 기억 될 것이다. -------------------------------------------------------------------------------- 1) 노송정 종가 : 퇴계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1424-1488)의 종택이며, 퇴계가 태어났던 ‘퇴계태실’이 있다. 2) 임오의리 :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하다는 노론 벽파의 당론 3) 금등문서 : 영조는 사도세자 폐위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갔던 영상 채제공에게 한 통의 글을 신위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넣어두게 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금등 문서였다.
臥隱先生文集
김한동(金翰東):1740(영조 16, 경신)∼1811(순조 11, 신미).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아버지는 좌랑 경필(景泌).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1781년(정조 5) 경릉참봉이 되었다.
1787년 대륜차(大輪次: 과거의 불합격자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서 부(賦)에 수석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부교리·지평·정언을 거쳐, 1791년 헌납이 되어 수해를 당한 영남지방 재해민의 기곤(饑困)함을 들어 환곡(還穀)의 환수를 연기하여줄 것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수찬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1794년에는 순천부사를 지냈다.
1796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가 1799년에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승지를 지냈다. 저서:『臥隱集』
와은선생문집목록 ( 臥隱先生文集目錄 )
卷之一
年譜
卷之二
詩送春八角爐成內白外黑表方裏圓眞一奇玩鵲尾睡鴨何足羡哉遂吟一律次權如天 ( 思溥 )八角爐韻 易東書院謹次老先生精一齋韻
次再從姪公叔 ( 熙稷 )韻送公州權秀士歸櫬 淸心樓次板上韻壬辰秋, 自野城, 遵海而南, 入內延山, 山溪之窮處有龍湫三, 最上者最奇, 石門陡斷, 瀑流倒河, 沈吟李謫仙, 疑是銀河落九天之句, 仍成一絶. 觀海採鮑者輓崔進士( 光岳 )
三近次申君( 百煥 )韻次金錫之 ( 百朋 )韻呈如天兄以釋僑寓之愁贈錫之惜移寓歎小婢亡走別女甲午菊秋之初自洛還入仁山衙歸路尋俗離山 踰馬峴 沐浴泉 (泉在福泉洞口) 上山
福泉 輓李紹彦 ( 世猷 ) 公叔聞喜宴次姜子敬 ( 宅一 )老兄韻輓李纘卿 呈舂村 李(泰春) 丈輓高承旨( 裕 )令丈( 秋潭 ) 西郊戲成(壬寅, 除敬陵參奉. ) 聞公叔徑還不勝悵然次贐行韻齋居對月送春
齋居逢洪博士淸仲 次從兄素巖公( 鎭東 )贈行韻次僚丈識喜韻簡寄(二律) 呈姊兄權(思浩) 棣案僚丈擬郵承未蒙點戲呈疊前韻述懷次柳復如 ( 之源 )韻次公叔歸時投贈韻次梧軒投贈韻(二首) 自笑
述家人意自述次唐人晩秋詩贈李典籍義夾 ( 敬裕 )金監察君成 擬贈同福倅李(華國) 追步疑字 夜雨次唐人詩自解齋居元日偶題(甲辰) 久直
敬讀李義士遺蹟不勝感慨爲次軸中韻贈別李上舍學祖 敬次湖叟鄭先生韻送別鄭來休 輓活山南參奉鵬路 ( 龍萬 )丈送別李義夾赴求禮(乙巳) 送別李于麟 ( 甲龍 )赴旌義 輓申寬如 ( 弘敎 ) 南山烽火次南正郞寄示韻以贈次寄梧軒
輓李參判( 命俊 ) 輓李白川 ( 龜應 三絶) 輓李武夷翁 羽龍 玉署直中偶吟(庚戌) 輓洪進士( 錫疇 )丈(字繼道, 號方窩, 見立齋集 ) 七月晦日發北行出東小門溪水已沒馬腹馬上戲成一絶(辛亥秋除咸鏡道掌試時) 八月五日夜夢入侍前席天顔溫粹玉音如響有若眷念於潦水中行事朝起有感
摩天嶺 受降樓 (在鍾城城南) 皇帝塜 謁東岡從先祖書院在會寧鄕校傍號舊祠宇傍有顯忠祠卽本州義士之祠到明川憶從大父檢討公僦居不勝感懷敬次花字韻 七寶山 鬼門關歌(在鏡城南) 樂民樓
到鶴林主倅以試事出外獨坐空館偶見壁上韻且有諸益所和却喜向時之團圓而益悵今夜之孤寂忘拙追步以博一@ 叢石亭 三日浦 海山亭 歇惺樓夕陽望諸山 金剛山 出山權殿中季周 ( 訪 )有贈行詩二律次韻送別
輓許進士去非 ( 是 )遷葬輓洪判尹( 周萬 ) 謹伏賡御製賜美閤韻 貧谷 鱉巖旣望會(戊申) 滯廣州館罷賑後出遊郭外過玉溪 芝峯兩院贈齋儒晩春觀稼輓重表姪金英實 ( 宗華 二首) 輓艮翁李判尹( 獻慶 )
題丹壑老人金(敬魯) 詩軸七月旣望泛舟巫峽之下(出宰成川時) 輓蔡樊巖 卯洞別席酬晩谷趙丈( 述道 ) 輓申正言( 琬 ) 製進聞鄭輝國 ( 東璞 )葺治溪亭寄贈一律輓李進士幼珍 ( 宗儒 ) 哭晩谷趙丈輓具懿則 ( 五性 )
輓趙進士輓權姊兄( 思浩 ) 粵在肅廟戊午, 維我高祖考鶴汀公, 以曾王考觀察公, 在玉署, 推崇拜副護軍, 今年春, 三從兄以子 熙周在玉署, 又拜副護軍, 兼五衛將, 此實稀有之慶, 而吾家百年之間, 再有此慶, 甚晠事也. 日前從兄, 將作公賀席, 會中人, 用昔年臣字韻, 以和之, 從弟亦忘拙次呈, 今又改一句, 以呈, 蓋以受恩異, 而慶喜同故也. (庚申)
追記前冬十月四日夜夢入侍事不勝感泣和淚謹題 昭陽江舟中遇雨偶占 昌化道中望金剛山偶吟 北靑道中望磨雲嶺口占步下鐵嶺病脚顚仆追記辛苦之狀元日述懷 東岡先生謫會寧伯從大父謫此州小子今又來謫追感而題偶吟
夜投吉州城西店 數夜夢入侍感題正月夢得詩盡忘之只記一聯心似無雲日恩從不夜天足成一律北地無酒只有燒春而味薄不堪飮遂斷之憶酉山諸老憶從姪行( 熙璞 ) 見從姪書偶占讀書
寒食風土雜詠記夢中還家閏月初伏聞因慶赦量移歙谷感泣謹題 咸興路上逢從姪( 熙奮 ) 到歙谷 偶吟戲題(二絶) 次權季周投贈韻次從姪惜別韻
登後山東臨海水南望楓岳稍覺胸次豁然連得紫海倅書(三從姪熙周, 時爲寧海倅. ) 燈夕殘城亦燃燈憶在庚申是日直春坊頒下彩花燈夜又賜饌追感謹題聞棲碧翁夢與我遊金剛作詩以戲之移配適近金剛便成詩讖思之深故發之夢可見聲氣之感題一律以謝之海霧贈別成川朱生( 德鄰 ) 次權孟曄 ( 思晦 )投贈韻
山夜病起中元對月喜益兒自京來覲送益兒還鄕在明州奄過冬春諱辰在翕州又過十月仲父諱辰感泣述懷述逢別之懷贈蘇山李仲蘊 ( 輝玉 ) 田家樂次贈寧海衙山寺秋懷冬至
次菊翁投贈韻(二首) 次贈剛齋李丈( 承延 ) 甲子立春憶臥隱幽居述懷 棲碧翁和寄昌翁韻其意大同小異又次戲吟喜復兒至除夜春朝偶占(乙丑) 宥還
輓李幼文 ( 重祖 ) 輓李持憲義夾 春闌病起輓權上舍子晦 ( 褧 ) 輓鄭輝國 書答鄭立齋 士仰 ( 宗魯○甲子) 答鄭士仰 (丙寅) 與鄭士仰 與李穉春 ( 㙖 時爲廬江洞主○己未)
與李寢郞穉春 (丙寅) 與李穉春 與李穉春 答李承旨( 晩秀○壬子五月嶺疏時使政院以書札往復於金翰東以探疏儒去就之敎) 答靑鏡書院士林答崔仁同 ( 獻重○戊午) 與紹修書院道會士林答權佐郞其天權進士孟曄 (壬子疏行時) 與權孟曄 (乙卯)
答權孟曄 (甲子) 與李監察際可 ( 秉運○丙寅) 與鄭輝國 (丙午) 與鄭甥始如 ( 燧○丙辰) 與疏廳書(丙寅) 與成叔晦 ( 彦根○丙寅) 答金公輔 ( 東弼○甲子) 答鄭內從( 必濟○己未) 答素巖 ( 鎭東 )從兄答素巖從兄
答益兒寄益復兩兒寄兩兒寄復兒卷之三疏辭副校理疏(庚戌) 玉堂聯名箚子玉堂聯名疏辭獻納疏(辛亥)
請捧入儒疏疏(壬子以前, 銜呈疏) 辭修撰疏(五月陳疏徑出) 辭副應敎疏同副承旨時論嶺査疏同副承旨時未撤疏同副承旨時論尹永僖白放疏同副承旨時徑出疏辭大司諫疏(丙辰) 辭大司諫疏(戊午) 辭大司諫疏(己未)
辭右承旨疏辭敦寧都正疏嶺査後伸辨疏(代儒林作. ○戊申. ) 卷之四講義召對講義書筵講義疏行日
錄卷之五
雜著
仕行日錄北遊日錄卷之六說鼠猫說犬猫說捕鵲說序北遊錄序送李學士( 鼎運 )赴燕序
記 光州 柳(潗) 妻李氏孝烈旌閭記孝子韓(碩乃) 旌閭碑陰記 慶讓堂記 歇惺樓坐遊記 臥隱菴記 雲巖祠記 及時洞 墳菴記識 七峯集卷後識
荷塘集卷後識 槐潭子卷後識 續資治通鑑綱目跋 訥隱集卷後識書金孝子行錄後故 星州牧使諸末事蹟識上樑文 順天 東門樓上樑文 文山書院移建上樑文 臥隱菴上樑文
柏麓里社靜觀樓上樑文卷之七北遷時顚末丘墓文先祖嘉義大夫行湖南道兵馬節制使府君碣文 訥齋先生墓碑陰祝文製進七陵文(庚戌○修撰時) 製進弘陵告由文
製進毓祥宮 懿昭墓 文禧廟文邊孝子焚黃時告由祝文(代本孫作) 奉安文 仁溪書院移建奉安文 文山書院奉安文 龜山里社奉安文文山里社奉安文祭文製進贈贊成李墓致祭文(李郞 宣禧宮父○壬子修撰時)
製進忠原林將軍( 慶業 )祠致祭文(壬子○校理時) 祈雨祭文(甲寅○宰昇平時) 祭樊巖蔡相國文祭朴元擧 ( 漢翼 )文祭內舅鄭公文祭外姑淑人南陽洪氏文祭姊兄酉陽權公( 思浩 )文祭仲父西坡府君文祭從兄素巖公( 鎭東 )文祭再從姪學士( 熙洛 )文
祭長子熙益文(返柩時) 祭季子婦恭人延安李氏文卷之八附錄輓詞祭文行狀墓碣銘跋
臥隱先生文集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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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 年譜 )
有明朝鮮國英宗 顯孝大王十六年庚申
五月初三日丑時, 先生生于乃城 海底里第在安東府北九十里○先生之先, 聞韶人世居 星州之沙月里, 後移尙州之德只橋. 壬辰避兵于安東府乃城縣 虎坪里, 曾祖八吾先生, 始移寓海底, 子孫因居焉.
十七年辛酉, 先生二歲.
姿狀不凡, 瀅然如氷淸玉潔.
十八年壬戌, 先生三歲.
十九年癸亥, 先生四歲.
二十年甲子, 先生五歲.
二十一年乙丑, 先生六歲.
聰敏穎悟, 絶出等夷, 五六歲, 能屬文.
二十二年丙寅, 先生七歲.
十二月, 妣貞夫人鄭氏下世.
二十三年丁卯,
先生八歲. 始受學, 課日誦數百言, 讀生文如熟, 參判公奇愛之.
二十四年戊辰, 先生九歲.
丁參判公憂, 持服哀毁, 如成人.
二十五年己巳, 先生十歲.
就學于仲父西坡公(景澈), 德器深厚, 望重一世, 而於子姪中, 特鍾愛之, 嘗曰此兒必大吾門者也.
二十六年庚午, 先生十一歲.
朞年畢十九史, 嘗讀至成湯放桀掩卷嘆曰, 天下有大事變, 聞者異之. ○嘗問孤字義, 知其爲無父之稱, 因涕泣不能讀西坡公亦爲之掩泣廢卷
二十七年辛未, 先生十二歲.
著登千萬丈高峯憶千萬古英雄賦, 西坡公所命題也. 揮筆成百句, 詞藻粲然, 有老成口氣所不能道者, 西坡公大奇之, 持示訥隱李公, 公三復驚嘆曰, 眞文章才也, 因留案, 爲子弟勸.
二十八年壬申, 先生十三歲.
二十九年癸酉, 先生十四歲.
三十年甲戌先, 生十五歲.
聘夫人李氏, 退溪先生胄孫縣監世德女, 嘉柔維則, 克配無違.
三十一年乙亥, 先生十六歲.
三十二年丙子, 先生十七歲.
三十三年丁丑, 先生十八歲.
三十四年戊寅, 先生十九歲.
秋中鄕解, 自是肄程文, 踔厲疾捷, 投筆成章, 一時等輩, 推以爲首. ○長女生, 後適士人鄭燧.
三十五年己卯, 先生二十歲.
中東堂試別試
三十六年庚辰, 先生二十一歲.
三十七年辛巳, 先生二十二歲.
三十八年壬午, 先生二十三歲.
子百齡生, 有才性, 年十四夭,
二月夫人李氏卒, 葬村後城南谷負亥原.
三十九年癸未, 先生二十四歲.
春中司馬進士試等第人
○聘夫人全州 柳氏, 士人泰源女, 柔婉貞靜, 有女士行.
四十年甲申, 先生二十五歲.
冬遭西坡公喪, 先生早孤, 事西坡公如所生, 居常不違規度, 及喪悲戚過甚,
三年之內, 朝夕餽奠, 必躬自贊助, 非疾病, 未之或廢.
四十一年乙酉, 先生二十六歲.
四十二年丙戌, 先生二十七歲.
四十三年丁亥, 先生二十八歲.
十二月, 夫人柳氏卒, 葬于德皐 直洞負癸原.
四十四年戊子, 先生二十九歲.
聘夫人順天金氏, 右相襄景公承雪后, 士人聖鎰女, 婉順有婦德.
四十五年己丑, 先生三十歲.
四十六年庚寅, 先生三十一歲.
四十七年辛卯, 先生三十二歲.
仲女生, 後適士人柳致翊
四十八年壬辰, 先生三十三歲.
四十九年癸巳, 先生三十四歲.
長子熙益生
五十年甲午,先生三十五歲.
五十一年乙未, 先生三十六歲.
五十二年丙申, 先生三十七歲.
仲子熙復生. ○三月英宗大王昇遐
正宗莊孝大王元年丁酉, 先生三十八歲.
春中東堂試別試, 小成後, 屢擧不第, 因優遊鄕塾, 勸進後生, 考評如神, 遠邇風趨, 皆以一經品題爲榮.
二年戊戌, 先生三十九歲.
三年己亥, 先生四十歲.
四年庚子, 先生四十一歲.
五年辛丑, 先生四十二歲.
正月, 夫人金氏卒, 葬于德皐參判公墓下負癸原.
○十二月除敬陵參奉.
六年壬寅, 先生四十三歲.
正月詣闕. ○肅謝.
七年癸卯, 先生四十四歲.
八年甲辰, 先生四十五歲.
四月遷中部奉事.
○秋被侍直薦, 未蒙点.
○ 十二月, 陞平市署直長.
九年乙巳, 先生四十六歲.
十年丙午先生, 四十七歲.
春中東堂試別試.
○十二月, 陞尙衣院主簿.
○ 同日除司憲府監察.
十一年丁未, 先生四十八歲.
正月魁人日製, 直付殿試.
○辭職還鄕, 時蔭仕履歷已滿, 唱臚尙遠, 知舊皆勸勿遞, 以待得邑, 先生嫌於冒祿, 遂辭遞而歸.
十二年戊申, 先生四十九歲.
代儒林製嶺南戊申後伸辨疏.
○答靑城 鏡光 兩院倡義疏擧書.
十三年己酉, 先生五十歲.
三月中殿試.
○十二月, 承命入侍, 時榜中諸人, 同詣春堂臺, 上曰居中者, 是金翰東乎.
承旨李時秀問果否, 對曰然, 仍命退出, 十七日除成均館典籍, 同日移拜兵曹佐郞, 不肅謝, 蓋參判公, 嘗以此職喪歸故也.
○八月承筵敎赴京, 蓋因初八日次對,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上問嶺南人材, 誰某爲最, 右相 蔡濟恭, 以先生名對, 仍陳世閥, 上曰唱第時一見, 已知不草草, 今聞卿言, 果然矣. 欲召見, 承旨書報嶺伯, 使之起送故也.
○十月, 除司憲府持平, 牌不進, 有三司合啓, 因出肅, 尋還鄕.
十四年庚戌, 先生五十一歲.
四月除司諫院正言, 在外遞
○六月, 除弘文館副校理, 赴召以特除, 上辭疏不許.
○七月, 司謁口傳下敎曰, 遠人久直, 欲召見, 卽向政院, 命入侍, 隨上番入, 參贊官李敬五, 閣臣鄭大容史官許鞏白慶楷注書趙台榮, 以次進講貞觀政要 李大亮章訖, 上命加講, 又講貞觀十八年皇甫德章訖, 上命陳文義, 先生進曰, 大亮以藩臣密表進諫, 誠非異事, 然使 九成能諫者, 以太宗有從諫之美也. 大抵人主來諫之道, 貴在使人盡言, 伏願殿下, 於此等處, 體念焉. 上曰好矣. 參贊官及閣臣皆曰, 下番所奏來諫二字, 誠好矣. 上顧謂先生曰, 中批之意, 有在焉, 聞爾不特文詞踔厲, 頗有學識, 爾須敷衍文義, 至如衮闕朝政之可言, 邑弊民瘼之可聞者, 一一痛陳, 先生辭以蔑識, 上笑曰, 爾言太謙, 因問所經農形及上來之期.
○八月初一日, 隨駕詣宗廟, 行展拜禮, 以元子定號, 在明日, 設增廣試, 先生差參試官. ○初八日, 製進各陵修改告由文, 同日製進金海大成殿移安還安祭文, 及毓祥宮 懿昭墓文禧廟仲朔秋夕兼行祭文.
○初十日在直時, 先生有微恙, 夜摘奸宣傳來問病情, 有頃上使司謁, 下敎政院, 使之退送調理.
○九月初二日, 畿伯啓聞鄭妻擅離圍棘事, 與校理李貞運上聯箚入啓, 上下箚本于政院, 命洗草, 又與館僚陳箚徑出. 翌日諸玉堂竝遞, 獨先生移拜弘文館修撰.
○初九日, 親臨春塘臺, 設菊製增廣試, 以參試官進參.
○二十九日, 製進東郊 七陵祭文.
○十月, 與李應敎太亨成修撰鍾仁林修撰道浩韓校理光植, 聯名陳辭疏以鄭妻事, 三司合啓, 而批不下, 故引義也.
○十一月, 除校理.
○十二月, 除修撰, 在外遞.
十五年辛亥, 先生五十二歲.
正月二十三日, 除修撰, 有下諭, 赴召至 聞慶, 聞遞報還鄕.
○五月十二日, 除副校理, 有下諭, 赴召人泮, 本職遞, 而以大臣陳達, 特敎付軍銜.
○六月十九日, 除副校理, 隨牌入肅, 二十六日, 次對隨大臣備局諸宰, 入侍, 俯詢先生曰, 嶺南近日無爭競之端乎,對曰近日則稍定矣, 上顧謂大臣曰, 嶺南之向時紛紜, 只緣無宿德位望鎭安之故也. 又曰嶺人皆純直, 故所執或偏, 而不易其守, 雖取敗不悔, 此俗可尙, 予於此儒臣, 深有期待焉. 仍傳敎曰, 嶺人之曾至宰列者, 無出此儒臣右者, 速爲陞遷, 雖詮任, 可堪矣. 大臣奏曰, 嶺俗遞職, 卽去而不白衣踰嶺, 何以久仕乎. 上曰其俗固好, 而此儒臣不必速歸, 練習朝事可也, 仍命退, 顧先生曰姑徐, 敎曰何間欲歸, 對曰姑留供職, 遞後卽歸, 敎曰勿速歸, 仍命退.
○七月, 除咸鏡都事.
○八月, 差關北都事, 試畢而還, 未復命, 除修撰.
○十月, 除副修撰, 以承傳罷職, 還鄕.
○十一月, 除司諫院獻納, 赴召至豊基, 上辭疏, 兼陳荒年糴政煩苛, 特下十行優批.
○十二月, 除副修撰, 承召至豊基, 聞遞還, 十六日, 又除副校理, 旋遞. ○撰敬惺樓坐遊記.
十六年壬子, 先生五十三歲.
正月初十日, 除修撰, 旋遞, 十八日, 除修撰.
○二月初十日, 赴召至聞慶, 本職已遞, 而初 三日, 復除修撰, 仍赴未出肅, 差監試覆試官.
○二十七日, 製進贈贊成李墓致祭文. ( 宣禧宮之父)
○二十九日, 差講經覆試官.
○三月初九日, 製進弘陵告由文. ○初十日, 設三製于春塘臺, 以對讀進參. ○二十二日, 製進林將軍慶業祠致祭文. ○二十三日, 以館錄會圈事, 陳疏徑出, 蓋由館規以中批差除, 則不得參會之故, 而少頃還下疏, 責敎嚴峻, 不得已同入論圈事.
○四月初日, 還鄕, 十七日, 除修撰, 旋遞.
○閏四月初九日, 往三溪書院, 發文倡萬人疏, 蓋以正言柳星漢投進一疏, 上逼景慕宮, 掌令柳@啓請刊削, 上還下優批, 而三司噤默不言, 先生卽欲上疏嚴劾, 而不如萬人叫閽, 故遍通諭道內, 先生仍赴召. 十六日, 不肅謝, 十四日, 疏儒上來者, 自李㙖 金熙澤爲始, 合三十五員, 設疏會于四賢洞議疏, 二十七日, 封疏詣闕, 喉院以無太學謹悉抵搪之, 先生上章, 極詆其護逆之罪, 不移時, 特命捧入, 使疏首陞殿讀疏訖, 仍命搢紳章甫, 陞殿聽敎. 時先生適在首班, 與儒生若干員陞殿, 上默然久之, 下十行綸敎, 有時玉音悽斷, 不覺淚落. (當日事, 具在疏廳日錄. )○二十八日, 復除修撰, 牌不進, 是日會疏廳, 更敦再疏之議. ○二十九日, 復除校理, 牌不進.
○五月初七日, 再上疏, 初八日, 復會疏廳, 更議三疏.
○六月初九日夜, 以前望修撰承牌, 疏事未畢, 不可供仕, 而政院以謂不但皇壇望拜在明, 而玉堂缺方, 有上候不當言私, 不得已入肅參禮. 初十日, 罷祀後, 修呈省記, 以義理未伸, 前不敢承膺官職, 陳疏徑出, 上特命還給疏本, 更爲牌召, 一次違牌, 蒙罷承命, 入待政院, 聽敎有傾, 傳敎略曰, 嶺儒再疏後, 又有何事. 金翰東使之冠帶出仕, 而嶺儒使之當日捲歸. 十一日, 自賑廳, 給疏儒留糧, 入政院微稟, 適値此日此時, 願待念晦間決歸之意. 十二日司謁口傳, 以明日開門時, 來待政院云, 故曉進政院, 承命入侍進前, 上曰昨給留糧, 果何以爲之. 仍奏以昨稟之意, 上曰此不强迫, 然須宜速歸, 又敎曰, 諸儒可歸, 而汝則不可歸也. ○自政院有書, 促使疏儒歸鄕之示, 故先生修答書, 如筵達之意, 是日復除校理. ○二十二日, 承命入, 謝恩進前, 敎曰俄者有左相所奏出問, 而傳于諸儒, 遂退出, 歷入賓廳, 蔡相曰, 聖敎中, 先大王追悔一句, 卽是卞睿誣之大關捩也. 嶺儒抱此歸可矣, 遂入泮議撤還. 二十三日, 承命入政院, 謄筵本退出, 於是疏首以下, 皆回程先生作詩餞之.
○六月初十日, 除南學敎授, 有促敎, 遂肅謝. ○十一日, 有以暑濕疏放獄囚之命, 而柳星漢之父師文, 以在家亂言收繫者, 亦在放中, 假注書李彙卽爲擧行先生與玉堂諸僚, 箚請還收成命. ○十五日, 以別兼春秋, 摘奸西部城內, 頹壓人家. ○ 十八日, 卽惠慶宮誕辰也. 人參問安班, 頒賜靑囊一部. ○二十二日, 除掌令, 違牌許遞, 同日除弘文館副應敎, 勅敎嚴重, 遂出肅. ○李摠宰, 在簡罪廢身死, 人皆畏累莫往, 先生以有參判公喪時受惠, 獨往弔之.
○七月, 到記科, 上命先生對讀曰, 余欲聞此儒臣讀書聲, 讀至終券, 有時敎曰, 眞讀書人也, 及定第命, 諸試官各陳所見, 判書鄭昌順奏曰, 此 對讀官, 素習策工, 可質問, 上曰好矣, 先生辭不獲, 略陳一二, 上曰眞可謂名不虛得.
○八月初五日, 承旨趙錫㣎入侍, 上曰金翰東不 入承宣望何也, 對曰未經準職故也, 遂下敎, 除太常正. 二十日, 移除右副承旨, 二十一日, 有聖孫收用收議事, 先生議曰, 甚是晠德事也, 如其可堪仕官, 則錄用, 而不堪, 則世世復結表異之, 似合事宜.
○九月初五日, 陞拜同副承旨. 時以尹永僖特放事, 玉堂竝罷, 先生亦違牌卽遞, 十三日, 復除同副承旨, 詣闕肅謝, 十七日, 設抄啓文臣親試於春塘臺宣饌, 上特命先生飽食, 同日製進, 聯句連日, 承命入侍, 二十九日, 除同副承旨.
○十月, 安東鄕校 長安寵云者, 以義理相背, 使無賴儒生, 蹴破五月儒疏, 後奉聖敎, 奉安校櫃者, 道儒呈本營請査, 而營査亦乖實, 先生上疏論之, 上下嚴敎於嶺伯, 竄安寵. ○十四日, 次對時, 上使兩大臣和諧, 蔡左相引咎, 右相朴宗岳亦有和意, 而乃云左相於尹永僖, 似有營護意, 是則可慨矣, 於是備局諸宰, 及諸承宣, 請罪左相, 左相出 外處義, 諸宰及三司, 一倂罷出, 先生獨留, 呼寫遞差傳敎, 後退出政院, 備局諸宰及院僚, 皆以大臣事陳箚, 而問先生同參與否, 先生辭謝, 而獨呈疏遞差而出.
○十一月, 除同副承旨, 出肅, 時備局諸宰, 以尹永僖事, 聲討甚嚴, 政院又將聯疏, 語逼蔡相, 先生獨疏, 承優批, 時論快之.
○十二月初八日, 放歸田里, 時蔡相呈袖箚, 卽討逆事也. 李台益運請頒示, 上不允, 仍命遞出, 先生遂發聯疏之論, 李台幼文爲疏首, 其餘四十餘人, 以軍銜人呈進, 上命焚 疏, 竝放逐田里.
十七年癸丑, 先生五十四歲.
正月初十日, 除同副承旨, 十六日, 除右副承旨, 有勅敎, 將發之際, 李承旨益運, 以上意有銓官檢擬, 貽書促行, 先生遂辭以病, 其後赴召, 李公詰之, 先生曰, 令書尼之故也, 李卽嗟歎不已.
○三月初七日, 除同副承旨, 在外遞, 二十五日, 除右副承旨, 在外遞, 四月除同副, 在外遞, 二十三日, 復除同副, 在外遞.
○ 五月初五日, 復除同副, 下諭赴召, 二十二日, 除右副, 旌遞, 二十八日, 除同副, 承牌出肅, 二十九日, 承命入侍. 先是蔡領相上辭疏, 更申大義, 先生以該房捧入, 上敎若曰, 昨年嶺疏, 爲世道慮, 故予忍爲提說, 到今復提, 豈臣分所安乎. 嶺南則專委於同副, 俾各洞知予心, 夜以都承旨遞罷, 承牌入直, 傳諭左相金鍾秀于禁府待命, 與之偕入, 鍾秀疏斥蔡相及嶺儒無餘地, 先生遂陳疏徑出, 特敎甚嚴, 不得已更八.
○六月初六日, 除左副承旨. ○十五日, 除兵曹參議, 二十一日, 除右副承旨, 二十二日, 以闕里祠聖像陪進儒生擧案事退出, 二十九日, 以前望, 除右副承旨.
○七月初六日, 修呈省記, 特敎年老處暑前, 勿爲入直. ○七日, 金判府鍾秀, 以前疏之見斥喉院, 有依例禁推之命, 與承宣同往禁府, 照律勘放.
○八月, 以秋夕祭獻官受香.
○九月, 聞季子婦訃, 還鄕.
○十二月, 還朝參大妣殿五旬惠慶宮六旬賀班, 二十七日, 除右副承旨, 在外遞.
十八年甲寅, 先生五十五歲.
正月初四日, 除順天都護府使, 初八日, 承命入侍, 敎曰近日承宣說話, 多有入耳者, 未知被誰慫惥. 果爾, 則初頭收用之意, 安在. 須卽下去, 以爲圖報.
二月初九日, 赴任, 蠲除海役, 更定官需錢直三之二, 割捧以資養士.
○八月, 差監試副試官, 往古阜還官.
十九年乙卯, 先生五十六歲.
春設私賑于一境, 四月畢賑由還. 先是, 先生嘗嚴戢奸胥豪民, 繡衣鄭晩錫受其嗾誣, 啓論罷, 上不允, 特敎促赴, 其後鄭對人辭謝焉. ○題高麗淸吏金湜八馬碑, 製光州李孝烈婦旌閭碑閣記, 撰韓孝子( 碩乃 )旌閭碑陰記雲巖祠記.
○十二月, 以承旨遞還. ○設賑恤所於宗中, 以備荒. ○撰慶讓堂記, 撰順天 東門樓上樑文, 撰臥隱菴上樑文, 撰及時洞 墳菴記.
二十年丙辰, 先生五十七歲.
正月初五日, 除同副承旨, 初六日, 陞左副, 在外遞,
二月除右承旨, 下諭旋遞, 三月復除右承旨, 下諭旋遞,
五月初六日, 除左副, 在外遞, 二十七日, 除左副, 下諭旋遞,
六月 十五日, 除右承旨, 旋遞. 前此有下敎曰, 金翰東外任遞來後, 一不上來, 今番則雖遞, 必爲上來, 故十九日還朝, 二十三日除右承旨, 承牌入院, 仍入侍, 上問所經穡事, 又敎曰 嶺南古家, 亂前書冊, 有可觀者乎, 對曰嶺南書冊, 本來不備, 獨文穆公 鄭逑家藏, 有數千帙, 未知或有可觀者也. 遂有故家及院校書籍謄來之敎, 先生書通各院, 又書奉化倅, 使之輸送 琴胄伯家周禮.
○七月初六日, 除左副承旨, 尋移右承旨. 初八日, 入侍, 移拜兵曹參議, 謝恩就直. 十七日, 除左副承旨, 入侍便殿, 上問鄭宗魯官銜年紀, 仍問其人何如, 對曰家有淵源, 自少勅行, 實爲嶺中之重望, 又敎曰, 雖有某除拜, 嶺中無異辭乎, 對曰然矣, 仍命書傳敎, 鄭某當日內甄復事, 又敎曰, 左副雖鄕人, 事事不下於人, 院僚必不侮視矣, 何官不做. 十八日, 承命入侍, 上曰左副於金宇顒爲幾世孫, 對曰從七代孫也. 上曰續綱目 曾爲進覽, 而印刊見之乎, 對曰未也, 上曰文貞極是韙人, 而其書韙矣, 對曰此外有聖學六箴, 上曰然否, 仍命史官, 楷書以進. 又敎曰鄭宗魯所居何處, 對曰尙州, 上曰右道乎, 對曰然, 上曰左副居左道, 左道左副主之, 先生辭謝, 上曰豈其然乎, 又敎曰, 順天下去時, 時像極乖, 故欲爲調停, 非有他故也. ○八月初九日, 除左副承旨, 旋遞, 二十六日, 除右承旨, 同日以尙衣院提調蒙点. ○九月初五日, 承命入侍, 下敎曰, 近以文靖公 金麟厚陞廡事, 有紛紜之端, 蓋以金集 趙憲竝請, 非予沮抑, 誰能抑三歸一斥享之疏, 無所不可. 聞以宋相說話, 南人欲爲各疏云, 單擧文靖, 寔出予指敎於此論, 豈成說乎. 對曰以此無大端礙逼句語, 則務相和同己. 言及嶺儒也, 上曰承旨何解事至此也, 又敎曰承旨於嶺儒, 則可以周章, 而於京儒, 亦可勸沮乎. 先生辭遜, 上曰速圖之可也, 卽退出, 與諸相議. 翌日呈疏, 果皆聯參. 十三日, 以退溪先生祠板致祭, 受香祝, 蓋先生胄孫李志淳, 以永柔縣令, 奉祠板過都, 上遣禮官金熙周, 押班館學儒生, 祗迎于江郊, 奉入泮村, 使大臣以下, 至通朝, 皆參班致祭, 先生以大祝膺命.
○十月二十五日, 除司諫院 大司諫, 累違牌, 乃有嚴敎, 出肅.
○十一月, 上萬言疏, 首言習俗之奢靡, 次言守宰之貪濫, 次言刑獄之不審, 次言侍從無祿, 次言詮選不公, 末引朱子明義之學, 程子格致之說, 橫渠禮先之敎, 而以讀書窮理, 爲化民成俗之要, 大學 小學, 爲童習預養之本, 其他時弊, 一一條陳不避時諱, 上下批曰, 爾言皆指陳時弊, 可以採納者多, 當隨處試之, 其勿辭察職. 時吏判沈煥之以先生疏中, 論及詮選引義, 先生亦引嫌違牌. 上下傳敎曰, 諫長所論, 可謂無官不評, 而詮長不能樂聞, 作爲處義云者, 萬萬未安, 從 重推考. 傳敎後, 沈又陳辭疏, 上敎若曰, 臺閣之不得爲臺閣久矣, 今於寂寥之中, 諫長陳腐常談, 看作有意, 聞朝筵之敎, 尙不思顚倒@ 蹶之方, 卿等之罪, 合置何辟云云, 先生亦違 牌不進, 不得蒙遞, 至十餘次, 而有只推之命. 十二月二十日, 違牌始蒙特遞, 同日除 成川都護府使. 二十日, 牌招不進, 因促敎出肅. 二十五日, 自政院牌招, 使之當日辭朝,遂入闕下直.
二十一年丁巳, 先生五十八歲.
正月初八日, 赴任, 初十日, 謁聖, 仍謁鷲嶺書院院, 卽曺芝山鄭寒岡幷享也.
○五月, 除湖南道觀察使, 兼巡察使, 以方在遠邑, 迎送爲弊, 旋命仍任本職.
○八月, 差忠淸北道監試副試官, 試畢還官. ○邑有內人承傳者, 挾勢要官, 奪民塜, 葬其親者, 又要謁, 先生却之, 彼知計莫售, 掘去其塜, 一境快之. ○州有藍田縣, 先生因地名, 倣古呂氏鄕約設敎. ○邑俗尙奢華, 先生 禁胥吏衣苧, 廳妓錦靴. ○戒衙屬, 勿干私囑, 邑素稱山水鄕, 江山樓臺之勝, 甲於關西, 先生居二載, 未嘗一日無故遊宴, 曰不可以一己之樂, 貽弊庶民, 捐捧貿峙六百斛穀, 以備使客遊宴經費, 永爲民惠.
○十一月, 由還行, 追贈焚黃還官, 因勅敎選邑中有文識, 行鄕飮酒禮, 環橋觀者如堵咸, 曰弓馬之坊, 始見禮俗.
二十二年戊午, 先生五十九歲.
二月, 以右承旨召還.
○三月, 除大司諫, 上辭疏, 因陳時政得失, 首言山野之愁歎, 編戶之流亡, 次言正軍制, 均還穀, 嚴籍法, 明正學, 懲邪說, 愼通擬等十事, 承優批. ○以右參贊金文淳 對章事, 陳辭疏, 蓋先生前疏末端, 言忠良子孫往拜北庭, 歸參壇享, 義理虧欠, 請勿復差北使, 以敦風敎云云, 卽崇奬節義之意, 而文淳自以忠良後裔, 嘗應使命對章, 而發憤恚, 先生亦控辭遞, 而下批不允.
四月二日, 以過限遞差, 二十六日, 除右副承旨, 在外遞.
○六月十一日, 除左副承旨, 尋遞, 二十二日, 除右承旨, 尋遞.
○八月, 除左副承旨, 下諭旋遞.
○九月 除左承旨, 下諭旋遞.
○十月, 除左副承旨, 下諭尋遞.
○十一月, 除左承旨, 下諭曰, 左承旨金翰東, 每番除拜, 輒稱在外, 一不上來, 雖非金翰東, 豈無其人乎.
○十二月, 除左承旨, 尋遞. ○答仁同倅崔公獻重書, 以壬午事, 復議疏擧也. 又與紹修院道會書.
二十三年己未, 先生六十歲.
正月, 除右承旨, 下諭不赴召, 旋遞.
○三月, 除右承旨, 尋遞.
○四月初六日, 除右承旨, 旋遞, 十四日, 除右承旨, 下敎曰, 嶺俗雖 云無職不踰嶺, 歲飜後, 雖鄕里長老, 有問安之禮, 堂上侍從, 與他自別焉, 敢不來, 先生分義惶懍, 不得已發行西上. 十六日, 除左副承旨, 入京未拜命, 又敎曰左副承旨金翰東, 亦云在外, 禁推傳旨, 捧入禁府, 依例拿來草記, 若聞此, 則豈待府吏之下去後就理乎. 草記置之可也. 先生遂入禁府, 呈囚單, 仍有放送之命, 二十六日, 除右副承旨, 卽出肅謝恩.
○五月初二日, 書下惠陵端年祭獻官, 旋遞, 初六日, 持公事入侍, 敎曰柳相祚上來乎, 對曰 未也, 敎曰何以經年坐違乎, 先生起伏對曰, 臣則有實病, 不上來, 而柳相祚之上來, 亦未可必也. 上曰何謂也, 對曰嶺俗以無職不踰嶺相戒, 雖承下諭, 遞報至, 則與無職一也, 分義雖極惶懍, 朋友之責, 亦可畏也. 上笑曰, 朋友果責之耶. 對曰固無無職上來者, 故未之有聞, 然若有, 則必有責矣, 此蓋嶺南先輩遺風, 不敢毁壞也. 上笑曰, 予豈欲毁壞嶺風也. 但久不來故云耳. 仍敎曰, 柳尋春何如人也. 對曰此人家學世傳, 操行謹愼, 自少已有儒家氣味, 實爲嶺中望士也. 仍問先生所居村名, 及安東 科第幾何人, 人材盛衰, 農形市直, 以至鄕曲細微之事, 先生以次對, 下敎曰承旨以鄕人奏對如此, 極爲嘉尙, 如其在京, 何官不做. 特以下去不來, 故尙止此矣, 仍命退出. ○
五月十二日, 除左承旨, 二十九日, 除右承旨.
○七月初四日, 除大司諫, 初七日, 陳疏劾正言任㸁 幷及朴吉源, 後被修撰趙得永反劾, 自上有嚴敎, 施彼刊削之典, 二十日, 以未肅拜, 違牌許遞.
二十四年庚申, 先生六十一歲.
二月, 進參王世子冊禮賀班, 尋還鄕, 同月特除侍講院弼善.
○三月, 詣闕謝恩, 二十日, 召對集福外軒, 連日入參講義.
○五月, 聞從兄素巖 ( 鎭東 )公訃, 爲位哭之.
○六月, 正宗 大王昇遐.
○八月, 以因山退定暫還, 爲哭素巖公也. 十八日, 除左副承旨, 以在外遞.
○十一月, 進參因山靷, 夕差門橋祭官, 虞卒後, 無意仕進, 盡載朝具還鄕. ○製先祖兵使公碣文.
純宗大王元年辛酉, 先生六十二歲.
四月除左副承旨, 下諭不赴召.
○六月, 入府, 參哭班.
○七月, 除敦寧府都正, 數月不遞.
○八月, 拜右承旨, 旋遞.
○九月, 除左承旨, 尋遞, 又除敦寧都正, 縣道上辭疏, 承批旨, 疏辭下該曹稟處, 仍被姜時煥詆誣, 而自上嚴批, 事遂寢.
二年壬戌, 先生六十三歲.
二月, 除右承旨, 下諭不赴召, 時院相沈煥之用事, 漫漶義理, 眩惑國是, 先生無意當世,
就黃田山中, 築精舍, 蒔花種竹, 以書史自娛, 時崔公顯重尹東都來訪, 論時事, 先生語甚峻截, 崔公止之曰, 今與古異, 雖義理上事, 不必太露圭角, 恐有塞外之行, 蓋知柄臣意故也. 先生勵聲曰, 吾寧作嶺外行, 不忍爲媕婀態也. 崔公默然久之曰, 此令言論, 每尙如此, 令人可服云.
○ 六月, 入府, 參哭班.
○十月, 正言鄭彦仁疏誣先生曰, 承旨金翰東, 被家煥豢養, 甲寅一疏, 爲家煥立幟, 爲邪說護法, 再昨夏, 身在京輦, 奄遭天崩之痛, 而因山之前, 無端決歸, 大小祥 祀中月禫禮, 偃然在家, 一不來參, 潛懷怨懟, 不顧臣節, 請施島配之典. 答曰當詢大臣處之, 備局回啓曰, 前後疏章累矣, 未有如此疏之指陳罪狀, 極其嚴峻, 亟施竄典, 以謝嶺士何如. 傳曰允, 遂竄關北之明川府, 二月十二日發謫行, 明川距家數千里, 而爲生行死歸之地也. 遠近餞送者, 莫不齎咨涕洟, 而先生怡然就道.
○十一月二十六日, 到配所, 有感懷詩, 曰岡爺有廟豆江頭, ( 東岡先生, 嘗謫會寧, 有遺廟. )伯祖遺艻甲戌秋. (從祖檢討公, 曾謫明川 )雖敎壬人成貝錦, 非無聖主辨薰蕕. 消長世道元如此, 屈伸天機未暫休. 忝盡家傳淸白業, 殘孫何事又明州.
三年癸亥, 先生六十四歲.
正月, 移配關東之歙谷, 初因邦慶, 特命放釋, 右相徐龍輔啓曰, 此人素負嶺士之望, 若全釋, 無以懲, 遂命量移歙, 距家五百里, 風土亦佳, 比明川無異鄕關, 先生曰, 此亦天恩也, 有感恩詩一絶.
○七月, 先生伯胤熙益, 擊錚輦路, 又以時承旨洪羲運有時色, 往見之.
○八月, 刑曹判書蔡弘履及李義弼, 前後相啓 曰, 再昨動駕時, 取見安東幼學金熙益原情, 則爲其父鳴冤事也. 臺言之嚴斥, 備局之決案, 不啻嚴峻, 而善地量移, 特出寬典, 乃者鳴金上言, 尤極猥越, 金熙益自刑曹, 考律嚴勘何如. 傳曰雖甚駭, 然系是爲父勘律, 姑爲安徐, 先生聞之, 嚴責其妄動, 而於見洪事, 尤加叱責曰, 吾寧作嶺海鬼, 豈忍藉力於臧氏之子耶.
四年甲子, 先生六十五歲.
正月, 判義禁趙鎭寬啓曰, 金翰東年前上疏, 關系至重, 然所犯與聲罪, 不無混@者, 曾在庚申, 在京成服後下鄕, 但以不赴因山及小大祥, 爲罪案, 而旣受服下去, 則與初不奔問者有異, 又以悖疏爲斷案, 然罪名與陳疏, 年條相左, 臣意則上款事不必言, 下款事令政院考其年條釐整, 則名與罪合義理, 益嚴下詢大臣處之何如. 上曰大臣之意何如. 判府事李時秀奏曰, 重臣所奏, 似出於公論, 左議政金觀柱 奏曰, 因山不參, 古亦有先正已例, 而下款事, 果如重臣所奏, 釐正宜矣, 上曰釐正可也, 仍敎曰, 其子累次鳴冤, 可知其冤矣.
五年乙丑, 先生六十六歲.
上進參王大妃昏奠, 因命入禁府徒流案, 落点于先生名, 特賜放還, 因命敍用, 先生還家, 無復當世念, 壁上題商山紫芝歌和詩, 以寄意.
六年丙寅, 先生六十七歲.
先生生七歲丙寅, 遭先妣貞夫人喪, 平生以未服喪爲至痛, 當是年, 欲稅服, 而拘於禮制, 以心喪終三年. ○與鄭立齋 ( 宗魯 )書, 乞先銘. ○與紹修士林書, 論壬子疏事. ○與李監察( 永運 )書, 論 疏擧.
七年丁卯, 先生六十八歲.
撰文山書院移建上樑文. ○撰慵齋先生碑陰識 .
八年戊辰, 先生六十九歲.
時尹公( 光顔 )爲嶺伯, 卽先生舊要也. 胤子熙益 將赴夏科, 請一書, 先生却之曰, 雖由此得高官, 吾不爲也, 尹公聞之, 貽書先生曰, 弟爲道伯, 兄子觀光, 而不相知耶. 然今世, 猶見古人風範. ○ 撰訥隱先生卷後識. ○書金孝子( 潛 )行錄後. ○撰裵槐潭 ( 相說 )卷後識.
九年己巳, 先生七十歲.
十一月, 胤子熙益赴南省試, 染痘不起, 訃至, 先生哭數聲, 拊櫬三呼而止.
十年庚午, 先生七十一歲.
撰東岡先生續綱目跋. ○撰荷塘先生卷後識. ○撰仁溪書院移建及奉安祝文. ○撰龜山里社奉安文. ○撰柏麓里社上樑文.
十一年辛未, 先生七十二歲.
先生寢疾, 以世稿之役, 託從姪熙奮. ○奉化倅尹公東壽來候, 語及時事, 先生掩淚慨然, 尹公出語人曰, 公疾劇, 而爲國一念, 炳然如丹, 令人可服.
○五月初三日, 考終于寢.
○十一月初五日, 克襄于春陽縣 䯃峴負坎之原.
十二年壬申.
三月, 上遣禮官蔡弘韻致祭.
臥隱先生文集卷之一
와은선생문집 권지이
詩
送春
山北花光太半非, 依然一夜故人歸. 閒翁自此誰相伴, 留待明年谷鳥飛.
八角爐成內白外黑表方裏圓眞一奇玩鵲尾睡鴨何足羡哉遂吟一律
四足新爐八角齊, 剡溪藤合冀州泥. 香烟散翠詩脾入, 榾火藏紅客座携.
難過何須密室置, 極工還使博山低. 從今烟火吾無患, 更有南靈長數畦.
次權如天思溥八角爐韻
種得紅猉白塡爐, 書帷晝掩懶硏朱. 箇中自有修神訣, 密室風前戒我徒.
外方內直體還圓, 敬義工夫本是然. 解識盤銘存養意, 閉門端坐炷香烟.
易東書院謹次老先生精一齋韻
尙憶當年玩月明, 眼前風物百年情. 庭梧暗帶天根色, 江水遙傳閩洛聲.
西翠淡烟依舊爽, 南天寒影至今淸. 悠然獨坐絃歌地, 剛恨吾人不早生.
次再從姪公叔熙稷韻
浮世人心面面非, 百年携手爾同歸. 風流又得天時好, 黃鳥山南飛不飛.
送公州權秀士歸櫬
公山權君有疾, 尋醫而來, 僑寓靑霞洞屢月, 竟以是疾終, 年未滿三十, 無他昆季在, 使之死於家, 猶有非熊冥間之悲, 況於羈旅哉. 殮以薄棺, 舁以小車, 春府公號泣而隨之, 何其悲也. 於其靷也, 以數絶語誄之. 未死猶醫死若何, 湖西千里是君家. 白首阿翁榮下語, 今宵爾母占燈花.
招招魂氣柳車遲, 萬古延吳此去悲. 日暮長亭親友返, 勸公歸讀樂天詩.
淸心樓次板上韻
野城江海地, 譙角一樓明. 酒與黃花熟, 客來秋水淸.
欞虛重蜃氣, 沙淨認鷗情. 頓覺塵心滌, 風烟不足評.
壬辰秋, 自野城, 遵海而南, 入內延山, 山溪之窮處, 有龍湫三, 最上者最奇, 石門陡斷, 瀑流倒河, 沈吟李謫仙, 疑是銀河落九天之句, 仍成一絶.
飛雪却無理, 鳴雷何處起. 只看天一團, 上有銀河水.
觀海
芒鞋踏盡內延秋, 極目滄波萬里浮. 一氣涬溟流太古, 百川朝會學宗周.
漁舟晩出龍王宅, 蜃市朝開過客樓. 更上高樓聘遠目, 夕陽飛下兩三鷗.
採鮑者鮫人啼送一瓢撓劈出滄溟兩手攪萬死歸來猶笑語,明朝庖吏覓新鮑.不學秦樓弄玉簫,更堪東壁織鮫綃.何心嫁作漁家婦日日滄溟泛一瓢.
輓崔進士光岳
書帶遺芬綠野頭, 雲孫又見理箕裘. 醇眞氣味吾南士, 淸淑江山古善州.
已識升沈關世道, 那堪仁壽幻泡漚. 兩家誼分明霜雪, 哭望松湖落葉秋.
三近次申君百煥韻
咫尺蓬壼處士堂, 平泉草木繞幽庄. 山如文德當軒立, 竹有兒孫滿砌長.
市隱從知休處得, 郊居便覺此心凉. 請看高構重營地, 有是賢仍篤舊光.
次金錫之百朋韻呈如天兄以釋僑寓之愁
林居寥落無誰遊, 渭樹江雲思未休. 天地吾生元逆旅, 溪山今日摠名流.
親朋老去星相望, 詩料春來葉共抽. 伯强也解關人意, 一曲煙花好伴留.
悄悄索居似槁僧, 自君來矣喜難勝. 如今契誼誰心得, 從古人情易背憎.
頭白幾懸相思月, 眼靑偏愛伴春燈. 不須戚戚愁僑寓, 玉汝終看在折肱.
贈錫之惜移寓
一曲瀼溪十里家, 逢時未若別時多. 西山酒薄難爲客, 南岸花明却引車.
四海弟兄隨處樂, 三春烟月共誰誇. 新詩吟罷悄然坐, 遙見孤鴻下暖沙.
歎小婢亡走
赤脚蒼頭只一兒, 山樵水汲任渠爲. 今朝走入何村在, 頻問行人知不知
別女
嫁作他人子, 方知生女非. 臨分剌剌意, 鞶帨視無違.
甲午菊秋之初自洛還入仁山衙歸路尋俗離山
晩出仁山郭, 淸秋遠客情. 楓林經雨好, 隨處坐溪聲.
踰馬峴
落日騎驢子, 淸秋馬嶺間. 鳴鍾知古刹, 浮碧是仙山.
夜雨楓先醉, 西風雁獨還. 不知爲客久, 始覺此生閒.
沐浴泉泉在福泉洞口
僧道山中瀑, 光陵 沐浴泉. 鼎湖流水遠, 吾欲問遊仙.
上山
肩輿上碧山, 山在白雲邊. 坐憩産芝谷, 行尋種玉田.
地眞離世俗, 吾欲謝人烟. 天下無仙己, 有仙必此焉.
福泉
福泉今始得, 此地足烟霞. 菊意前宵雨, 楓光二月花.
警人幽鳥語, 肅客老禪叉. 盡日忘歸計, 前林棲暮鴉.
輓李紹彦世猷
溫溫氣味得天多, 生長東方夫子家. 今世古心何處見, 滿江秋月淨無沙.
平生愛讀白華詩, 二老堂前彩舞長. 一室雍和渾若夢, 可憐稚子拜晨床.
漁水樵山獨夜歸, 十年燈火下書帷. 如何玉殿修文會, 適在天門掛榜時.
公叔聞喜宴次姜子敬宅一老兄韻
聯翩蓮桂曲江仙, 滿室春光九闕連. 吾輩固難今日會, 親朋又是一時賢.
傳家舊業靑氊在, 曠世新榮白日懸. 多少前頭期望意, 須知忠孝貴雙全.
輓李纘卿
三日窺牛虎氣多, 聲名梁楚自嵯峨. 春來小巷風流遠, 冷落山南待火家.
靑氊遺業本來淸, 書劍平生枉費精. 夢蟻榮名君莫歎, 古今人說郢中聲.
河東舊誼後生餘, 浮世論交有爾予. 多少鶴南親友地, 小驢先入故人居
呈舂村李泰春丈
高名白峀較崢嶸, 架揷河東萬軸經. 詩句春濃花鳥語, 劍光秋薄斗牛精.
殘篇日月靈芝老, 浮世心期小櫟靑. 洛社風流渾寂寞, 誰人解識郢中聲.
輓高承旨裕令丈秋潭
賈終聲價龔黃治, 疏遠猶被聖主知. 除却姓名奴隸誦, 請看時宰亦同辭.
書帶遺芬也自香, 年來哭盡兩兒郞. 堪憐白老忘情物, 不能醫得斷猿腸.
河東深契宦遊時, 小子猶藏篋裏詩. 寢哭更添風樹感, 西門悵望淚垂垂.
西郊獻成壬寅, 除敬陵參奉.
書劍無成半世閒, 西陵一命愧騂顔. 悠悠驅馬長安道, 道上行人摠笑看. 曉漏丁東起着衣, 延英門外謝恩歸. 癡儓呵辟西門路, 羸得街童拍手譏. 右謝恩小輿扶上遠山回, 松檜陰中一路開. 守僕書員羅拜處, 隔林呼喚案前來. 右到齋烏紗角帶黑皮靴, 紅箭門前四拜過. 老僕朱衣先導去, 蒼梧深處五雲多. 右肅拜正殿高臨彩靄中, 珠簾紋席何玲瓏. 侍臣石立欄干曲, 紫禁春花輦路紅. 右丁字閣 六陵齋室接東西, 步屧肩輿處處携. 自是山中奇絶事, 不妨花下酒壼提. 右交隣客夢驚罷夜雨桐, 我來如昨已秋風. 西郊爭似錦城樂, 欲把新詩問杜翁.
聞公叔徑還不勝悵然次贐行韻
送爾南歸何處尋, 斷雲流水逈沈沈. 玄都物色無開眼, 碧峀烟霞會賞心.
終古世情同奕局, 祗今吾道摠山林. 不如共逐春江棹, 料理釣竿鶴汀陰.
千里還家不見歟, 楊之爲我無過於. 應知着處難成別, 割却情刀故自疏.
齋居對月
千里猶看月, 旅愁正若何. 斷雲黃耳路, 歸夢白鷗波.
爲問踏橋韻, 似聽對酒歌. 山薇新雨後, 樂事更應多.
送春
花落江城草色稠, 送春歸臥小齋幽. 陰陰谷樹鸎求友, 渺渺鄕園蝶化周.
客去尙憐碁在手, 愁來誰遣酒生蒭. 東君解識山人意, 庭畔殘紅躑躅留.
齋居逢洪博士淸仲
閒齋睡罷獨徘徊, 晨鵲槎槎小樹梅. 千里故人槐院至, 一壼淸酒杏村來.
春山花盡無誰語, 客榻塵生爲爾開. 往事曲江如夢裏, 香岑歸路莫相催.
次從兄素巖鎭東公贈行韻
蕭疏茅屋養心身, 今世吾兄似古人. 幽鳥聽經留作伴, 靑山排闥與爲隣.
採芝消息來何晩, 啖蔗工夫去益親. 對月看雲相思夜, 春來詩句幾篇新.
次僚丈識喜韻簡寄二律
百世派分本一身, 悠悠行路是何人. 鷄林萬葉連韋樹, 鳳里孤棲擇孟隣.
適會同僚眞可異, 遂令疏誼復還親. 兩家寶帖今猶在, 泥峴回望感意新.
漁水樵山自在身, 五陵三月未歸人. 課書有子離千里, 操耒無丁出四隣.
卯酌可能醫病渴, 晝眠爲是夢情親. 遙知鳳老歸園興, 花下携孫得句新.
呈姊兄權思浩棣案
自笑浮生不繫舟, 無端來泊㶚橋頭. 愁邊松檜多黃鳥, 夢裏江湖有白鷗.
尊酒難忘叢桂館, 閒棊誰着水明樓. 始知到老尤難別, 此意惟論古隱侯.
僚丈擬郵承末蒙點戲呈
雨過溪山澹夕烟, 五陵無樹不鳴蟬. 小驢慣索吟詩路, 肯識楊州鶴背錢.
疊前韻述懷
衣染城塵墨似烟, 白頭微宦冷於蟬. 歸歟太白山中宅, 澹月淸風不用錢.
盡日淸齋一炷烟, 邇來庭樹又寒蟬. 歸心添得秋光晩, 竹杖芒鞋掛百錢.
次柳復如之源韻
隔雲鄕社斷遊從, 殘夜靑燈賴爾同. 同土同心同作客, 五陵岑寂萬山中.
西來白髮與愁從, 孤直寒齋老釋同. 一笑相看千里外, 吾今不復夢南中.
次公叔歸時投贈韻
營營征魄欲何飛, 花落庭空午睡遲. 鷄肋情牽吾獨在, 槐安夢覺爾先歸.
故園消息雲邊雁, 浮世輸羸局外棊. 熟計不如從此逝, 山南水北掩春扉.
次梧軒投贈韻二首
秋風生客夜, 獨往飮無何. 露滴千林雨, 河垂萬里波.
故人於此遠, 山鳥爲誰歌. 一夢尋鄕社, 風流依舊多.
秋風颯颯井梧飛, 病客西陵苦滯遲. 遮眼雲山人不見, 驚心節序雁先歸.
詩成白嶽三更月, 夢入靑霞一局棊. 籬菊開時吾且去, 知君携酒倚巖扉.
自笑
白頭馳逐少年叢, 自笑腰間劍氣虹. 故里音書鴻影外, 新秋消息雨聲中.
吟詩勝似微官做, 賖酒猶堪大道通. 興到肩輿恣遠目, 涬西殘照半山紅.
述家人意
依依花樹繞蘿溪, 墻屋相連老少携. 流水棊聲隨白鶴, 短檠詩話聽孤鷄.
魚生舊穴遊邾莒, 酒壓新槽醉阮稽 .如此風流人少一, 雲山重隔五陵西.
自述
半百光陰老八溪, 無時無處不相携. 烟郊雨細行驅 @, 茆屋燈明坐聽鷄.
春草詩情人是謝, 竹林高興我非嵇. 如何來作萍遊跡, 雁已南歸客在西
次唐人晩秋詩
西郊寥落故人疏, 又是秋風小雨餘. 無邊露樹吟蟬際, 不盡雲山送雁初.
愁來酒泛陶翁菊, 病起丌看朱子書. 遙想田園饒趣味, 香粳炊伴小溪魚.
贈李典籍義夾敬裕金監察君成
二友淸秋至, 西陵問索居. 家山千里外, 泮水一年餘.
共坐蟬鳴處, 相逢雁來初. 王程留暇日, 場藿繫歸驢.
擬贈同福倅李華國
嶺士爲官山水州, 州人爭見載琴舟. 聖朝恩遇蒼翁後, 騷客風流赤壁秋.
梅閣春深看睡鶴, 桑郊雨暖問耕牛. 訟息政淸多暇日, 長安北望有高樓.
追步疑字
華髮愁容對鏡疑, 悠悠浮世覺衰遲. 新秋爭得山中夢, 多病難成枕上詩.
老樹如人守客夜, 歸鴻欺我負前期. 阮生哭處吾能笑, 大道如天不見岐.
夜雨次唐人詩
薄暮陰雲繞苑墻, 夜來疏雨聞池塘. 寒侵遠浦鴻聲濕, 秋入高山鶴夢凉.
已覺林楓稍變綠, 且看庭菊乍萌黃. 無眠政好窓間聽, 一任殘鈴和漏長.
自解
羈窓殘夢亂如麻, 笑起飜然浩浩歌. 宇宙此生都是客, 江山何處獨非家.
看書也好來人少, 得句無妨落葉多. 一角愁城終不下, 麯生談笑到昏鴉.
齋居元日偶題甲辰
倦遊爲客久, 三見五陵春. 日月更新歲, 山河隔故人.
佳辰未可負, 盃酒且相親. 一枕頹然臥, 家鄕夢裏身.
久直
西來已作三年淹, 冷落齋廚飽韱鹽. 流水聲中花落地, 靑蘿影裏鳥窺簾.
難忘盞酒吟詩渴, 無限家山入夢尖. 白髮休言公道在, 愁人偏得鬢絲添.
敬讀李義士遺蹟不勝感慨爲次軸中韻贈別李上舍學祖
憶曾風兩暗孤城, 義士腰間白羽橫. 身托列星朝北極, 魂歸故國掩空塋.
祗今褒獎風聲遠, 終古倫常日月明. 也識精英終不散, 晴虹夜夜發層溟.
敬次湖叟鄭先生韻送別鄭來休
倫綱日月海東頭, 劍氣崢嶸志士秋. 三郡義聲豺虎伏, 一山詩塜子規愁.
麒麟畫閣終誰屬, 鷗鷺淸江自在流. 聖代恩褒今有待, 百年公議不曾休.
輓活山南參奉鵬路龍萬丈
疏松翠竹歲寒村, 林下淸風剩灑然. 獨抱遺經窮歲月, 虛勞束帛賁丘園.
一瓢澹泊蔬仍水, 二子榮華桂又蓮. 哭望新阡題誄語, 山南宿德更誰存.
送別李義夾赴求禮乙巳
對酒高吟君馬黃, 湖山何處睡仙鄕. 專城孝養斑衣子, 如海君恩錦帳郞.
有蟹本非吾輩計, 烹鮮須用古人方. 朝廷素重南州士, 前路行看發軔長.
情中離別最難堪, 況復旅遊共苦甘. 孤客白頭淹漢北, 故人朱紱向湖南.
蕭蕭落葉飛遙浦, 杳杳歸鴻入暮嵐. 獨向望鄕臺上立, 不知山日已西含.
送別李于鱗甲龍赴旌義
吾友李于鱗釋褐二十餘年, 始得耽羅之旌義, 親友惜其屈, 乃酌而餞之曰,
士君子之事君也, 一燥濕, 等夷險, 惟其所在, 致力焉, 古人所以叱馭於九折, 禱雲於衡嶽也, 旌雖僻在海外, 自是域中土耳. 其山有漢挐, 上有金光之草, 甘露之泉, 服之者皆壽, 此固海中靈區, 而人之願遊者, 不下於中國人金剛之願, 則今子之行, 不必以燥濕夷險論, 亦可謂平生奇絶遊矣, 抑吾於子之行, 有私感焉. 昔我曾王考, 坐言事, 貶玆州, 及爪而還, 旌之民, 㓸石以寓去後之思, 今其遺蹟, 尙有未泯者, 子之歸, 幸爲我傳之, 詩曰. 終古仙官互往還, 送君南入漢挐山. 停盃笑指滄溟遠, 平地瞿塘較孰難.
輓申寬如弘敎
南郭蕭疏水竹林, 閒中日月下帷深. 寒梅不逐靑山去, 依舊床前歲暮心.
雌甲論交弱歲初, 兩家深誼未全疏. 那堪一別遂千古, 萍水前秋夢裏如.
南山烽火
萬點紅雲繞紫宸, 終南山色畫圖新. 山頭夜夜平安報, 散作烟花八域春.
次南正郞寄示韻以贈
盡日搘頤坐旅窓, 靜聽風鐸響錚摐. 鄕思謾托漆園蝶, 嶺信難憑黃耳狵.
久病身同籠裏羽, 劇愁心似風中幢. 看他時儁摠隆棟, 愧殺朽材等枿樁.
齟齬世情殊冷暖, 摧頹志業轉紛哤. 山深太白是吾宅, 水出黃池連碧江.
種秫猶堪療渴肺, 採洲可以啖馨茳. 那知蹩躄市門隱, 反使僬僥鼎呂扛.
未有涓埃酬聖德, 只將芹曝效微腔. 愁人正値九秋節, 落木紛飛萬壑矼.
雁塞寒聲來竟夜, 龍山物色滯殊方. 忽看喜鵲風前立, 疑是癯僧月下撞.
璨爾瓊琚驚眩目, 豁然蓬籊喜聞跫. 運斤妙手誰稱堊, 穿葉勁鋒非獨逄.
始信金光換骨髓, 不令葷血點胸肛. 神移白嶽秋容淡, 響轉三淸流水淙.
武庫森如萬甲峙, 騷壇爭見一旙降. 三回圭復作奇玩, 十襲珍藏如美玒.
最是相憐北客意, 何時共逐南流瀧. 華門塵土鬢毛化, 世路瞿塘魂夢@.
隔歲松楸連楚望, 入秋菰菜憶吳艭. 無緣金粟幻身百, 却羡雲鴻飛翮雙.
仙觀遙吟白雪曲, 荒村獨對黃花缸. 萍鄕又隔月千里, 隣壁誰分燈一釭.
險句攀來懷黯黯, 鄙心萌處歎悾悾. 多慙未報慇懃意, 徒仰詩豪筆力杠.
次寄梧軒
羈窓月色照心寒, 一樹梅花繞夢殘. 忽得故人千里面, 此身忘却在長安.
輓李參判命俊
落落梗樟出鄧丘, 綿綿葛藟在河洲. 人門最出衣冠上, 風槪元非齷齪流.
六珮銅符民頌作, 晩橫魚袋聖恩優. 攀嵇御李今陳迹, 謾與邦人殄瘁愁.
輓李白川龜應 三絶
陶山鬱鬱水沄沄, 夫子東方百世尊. 百世之宗其責大, 梅翁人道稱家孫.
梅翁於世少相知, 獨有寒梅歲暮期. 花發春來人不 見, 精神猶在十分枝.
深深窾木斂縗衣, 哭送靑山孝子歸. 孝子之過過於孝, 知公無憾奈人唏.
輓李武夷翁羽龍
悠哉大嶺南, 終古多名碩. 先輩日以遠, 吾道久已厄.
獨有李處士, 囂然慕古昔. 湖翁曁淵老, 家聲何奕舃.
天資自近道, 詩禮又傳嫡. 持身若處子, 守道遵繩尺.
圖書靜四壁, 逈與塵喧隔. 愛讀孔子書, 義理窮探索.
暫遊泮水春, 歸臥故山碧. 靈芝歲云暮, 采采終昕夕.
空使混泥塗, 奈彼重燕石. 何天亦不假, 斯道嗟漸窄.
寂寞武夷曲, 風雨淵明宅. 嗟余躡後塵, 托契心無斁.
追遊半百年, 已矣成陳迹. 孤琴獨自傷, 空懸樑月白.
玉署直中偶吟庚戌
窈窕樓臺松桂陰, 金華亦有小山林. 臣愚愧乏瀛洲望, 聖渥還同海瀆深.
銀盞細斟花下酒, 玉燈寒照卷中心. 淸宵敬誦庭梅句, 陶老遺芬何處尋.
輓洪進士錫疇丈字繼道, 號方窩, 見立齋集.
儒雅風流一世尊, 斯翁端稱木翁孫. 邦家搜剔多疏漏, 終古賢材老杞園.
小子長悲蓼蓼章, 百年瞻仰阻龐床. 如今又哭先庚盡, 風樹餘懷倍愴傷.
七月晦日發北行出東小門溪水已沒馬腹馬上戲成一絶(辛亥秋, 除咸鏡道掌試時)
驛亭殘酒笑相酬, 萬水千山擁馬頭. 朝廷爲念風流士, 許我公程辦勝遊.
八月五日夜夢入侍前席天顔溫粹玉音如響有若眷念於潦水中行事朝起有感
東方絶地最咸關, 況是秋霖泥路斑. 一水經來仍一水, 千山行過又千山.
聞鷄覓火投孤店, 帶月扶輿渡石灣. 回首都門看漸遠, 夢魂猶得侍龍顔.
摩天嶺
莫高天可近, 玆嶺爲山雄. 東壓滄溟勢, 西當長白風.
行人依木末, 去馬出雲中. 盡日到窮巚, 登臨始盪胸.
受降樓在鍾城城南.
漠漠臨胡塞, 登登消遠愁. 山河經百戰, 天地有高樓.
極目黃茅野, 驚心白雁秋. 腐儒猶壯志, 倚劍看旄頭.
皇帝塜在會寧北華楓山下, 去五國城三十里, 田夫耕田, 或得銅爐琉璃盃之屬云.
海上君王未乳羝, 玉淸仙觀夢中迷. 金繒歲入三河北, 梧檟秋深五國西.
風馬時從陰雨見, 瓊盃謾向野人携. 遙憐霞嶺南枝塜, 不盡鵑聲啼不啼.
岳王墓在樓霞嶺
謁東岡從先祖書院在會寧鄕校傍號舊祠宇傍有顯忠祠卽本州義士之祠
極北關山豆滿湄, 先生院宇在於斯. 百年吾道涪江日, 十室遺風畏壘時.
敎在絃歌城是武, 居因君子陋非夷. 荷翁 石老同堂地, 義士忠臣亦有祠.
到明川憶從大夫檢討公僦居不勝感懷敬次花字韻
說到明州感舊多, 明州來過意如何. 桑瀛往蹟無人問, 惟見山西雪作花.
七寶山在明川東南七十里, 山有下馬臺開心臺.
秋光踏盡北關來, 下馬開心眼始開. 翠壁丹崖千萬疊, 不妨呼作小蓬萊
鬼門關歌在鏡城南.
鬼門關危乎高, 有水如劍, 山如刀, 刀山劍水間, 一線懸鳥道, 行人到此, 輒損神, 手顫脚亂, 爭顚倒, 時秋八月, 積雨天, 我馬來到山之峭, 山石齒齒, 水黝黝, 登山臨水, 心膽掉, 太行摧輪, 是埋道, 邛坂叱馭, 非危蹈, 其險也如此, 所以得之鬼門號, 停車太息, 忽反顧鬼門,亦在世人間, 通津自是溺人海, 侯門深如蜀道棧, 貪 榮爭效鳳蹲池, 遠害未見鳥翾肆, 沒首滅頂胥及溺, 誰知風波起平地, 前車旣覆後車至, 入不出兮往不返, 奚啻鬼門路側身, 畏道愁扳挽寄語, 世間名利客, 莫怕鬼門關, 只怕名場榮, 道難於鬼門之劍水刀山.
樂民樓在咸興城南萬歲橋頭.
混元開闢日, 先設帝王州. 宮闕雲霞逈, 臺隍鎖鑰優.
海空天覺遠, 野闊地疑浮. 殘笛長橋夕, 秋風客倚樓.
到鶴林主倅以試事出外獨坐空館偶見壁上韻且有諸益所和却喜向時之團圓而益悵今
夜之孤寂忘拙追步以博一@(後鶴倅懸板印送一本. ) )
北盡關河東極溟, 江山無處小車停. 三秋作客頭添白, 千里逢人眼少靑.
今夜那堪空對月, 殘生元自等浮萍. 淸詩壁上謾相和, 慙愧荒詞葷血腥.
叢石亭傍有喚仙亭, 已頹廢.
削立浮于海, 良工琢不如. 根應鰲背着, 鑿似龍門餘.
舊物烟霞在, 新秋雁鶩疏. 支頤憑遠目, 更向喚仙墟.
三日浦
昨從叢石來, 今上四仙臺. 海口雲烟合, 湖心太乙開.
南述遊何處, 巖題字已苔. 悵望山日夕, 却棹小舟廻.
海山亭在高城衙後麓.
海山亭在海山頭, 鰲背精神七點浮. 我欲飄飄生羽翮, 蓬萊仙子與之遊.
歇惺樓夕陽望諸山仙人不我待, 獨上蓬萊山. 萬二千峯面, 虛樓夕照間.
金剛山
塵寰一笑訪眞仙, 瀛海東頭別有天. 萬瀑狂奔雷撼壑, 衆香高揷雪盈巓.
分明造化呈神技, 能使遊人斷俗緣. 從古帝王求不得, 我今三日白雲眠.
出山
下山生俗慮, 大笑出長安. 回瞻經過處, 不信在人間.
權殿中季周訪有贈行詩二律次韻送別壬子疏儒罷歸時.
一封腔血草茅臣, 泣訴幽冤徹昊旻. 惻愴絲綸傍有鬼, 肅淸宮禁夜無人.
東方百世知君父, 北面三朝幾縉紳. 從古大論吾嶺出, 鳶天造化一番新.
春秋讀盡卅年來, 一國公言萬口雷. 忍使人彝終斁絶, 縱知天道有傾培.
高懸白日朝鮮界, 遠屛妖魔嶺海隈. 父老山南扶杖聽, 涕洟交滴鬢毛皚.
輓許進士去非是遷葬
浮世滔滔泣路窮, 百年吾道有斯翁. 氷心徹底爭如鏡, 劍氣衝寒化作虹.
古篋文章堪範俗, 後生冥擿尙聞風. 白雲偃蹇行人式, 誰送玄和復此中.
輓洪判尹周萬
廓落今吾黨, 名家有是翁. 醇眞因本性, 文雅自流風.
卿月天恩重, 耆英地望隆. 傷心杞下宅, 春在舊梅叢.
謹伏賡御製賜美閤韻
巖巖維嶽氣鍾勍, 德業三朝允也卿. 雲出高山浮造化, 琴傳寶匣動希聲.
已將大雅鳴周晠, 共仰儒林主夏盟 華衮宸章明日月 相君何以報平生
貧谷
上無巖石峙, 下無源泉奫. 所以名貧谷, 山靈毋我嗔.
鱉巖旣望會戊申
天將坡老月, 來照虎溪頭. 霽影雲同白, 澄光水與流.
何山非赤壁, 今夜是淸秋. 醉臥瓊瑤窟, 浮生此會幽. (一云深更意轉幽. )
滯廣州館
無官嶺客等無橋, 風雨山城坐寂寥. 多謝主翁持贈意, 閉門終日讀兵要.罷賑後出遊郭外過玉溪芝峯兩院贈齋儒乙卯出宰順天時.
多時埋沒簿書塵, 半日尋閒小水濱. 春詔漢庭歌父老, 夏絃周序樂衿紳.
鳥飛魚泳留餘化, 竹翠松寒想 後身. 寄語諸生須努力,江南終古俗彬彬.
晩春觀稼
麟山之下王溪濆, 暇日淸遊懶使君. 四野農歌無菜色, 一年春事又黃雲.
繁華想像江南古, 樓閣參差畫裏分. 芳草輕陰隨處好, 不妨乘醉到微醺.
輓重表姪金英實宗華 ○二首
鬱鬱雲霞氣, 挺挺豫章材. 天若假之年, 斐然有所裁.
敍親吾爲叔, 論交爾是友. 斯道堪誰語, 獨望蘆山岰.
輓艮翁李判尹獻慶○丁未
一脈天潢毓氣全, 坡翁詩禮艮翁傳. 文涵東海魚龍變, 詞闢西天日月懸.
華髮逶迤臨八座, 英魂冥漠閉重泉. 山南人士遙相弔, 況我龍門舊執鞭.
題丹壑老人金敬魯詩軸
海闊河淸慶篤生, 先庚後甲屬休明. 丹丘復見華封老, 田野謳歌頌太平.
七月旣望泛舟巫峽之下出宰成川時.
矗矗層峯下, 江天泛小舟. 何山非赤壁, 有月是淸秋.
歌起驚棲鶻, 詩成問白鷗. 夜深乘興返, 更上降仙樓.
輓蔡樊巖己未
廊廟巍然見大人, 梧翁 漣老越爲隣. 孤忠不負三朝眷, 隻手終扶萬古倫.
華衮聯翩懸日月, 完名輝映畵麒麟. 一封腔血天監在, 歸拜瑤宮舊侍臣.
卯洞別席酬晩谷趙述道丈
月峀盤旋地, 吾南有老成. 襟期松桂靜, 眼目縷毫明.
病榻孤燈在, 山菴小會淸. 自慙先稿役, 不復聞高評.
輓申正言琬
風流詩酒老江湖, 浮世論交有爾吾. 特地聲名看綠竹, 自天恩遇耀靑蒲.
如將有意時無奈, 不與其年理却誣. 介石淸操何處得, 空山宿草謾長吁.
제진 ( 製進 )
正宗大王輓(庚申)
藝祖元年景運同, 篤生神聖御吾東. 挽回世界唐虞上, 扶植倫常義理中.
圓處萬川渾一月, 噓來寒谷摠和風. 天心未欲平治久, 忍向湖雲泣帝弓.
寧考傳心若合符, 文章禮樂大規模. 混淪再闢窮河洛, 師道重明接孔朱.
詎有詖淫干正脈, 遂將星日揭昏衢. 彌綸最是春秋義, 密付丁寧燕翼謨.
天日難摸聖德巍, 終身孝思百王稀. 喬山雨露沾枯樹, 長樂春風戲綵衣.
每値齋明無命戒, 須將誠禮盡精微. 那堪瞻覲門前路, 烟柳依依帶晩暉.
宮燭多年乙夜靑, 先臣遺語水州形. 天知聖孝慳千劫, 地爲關防護百靈.
大寶無關千乘國, 一心長往老來亭. 都民共戒吾君疾, 霜露春秋玉衮零.
邦家慶禮最今年, 尙憶春元陪賀筵. 新冕同輝三殿日, 前星增彩五雲天.
皇穹不弔唐民慟, 寶座新承夏后賢. 賴有女中堯舜在, 泰盤宗社卜於千.
雨泣江南血欲紅, 龍州此水十年中. 今春蹕路汀花擁, 萬事楓岑羽衛空.
泉裏承歡同月覲, 人間至慟奈慈宮. 雲旂回望元陵路, 凍雨霏微又自東.
爲是微身嶺外人, 愚憃偏荷寵榮新. 十年洪造恒鐫骨, 五夜溫綸尙珮紳.
寸管敢窺天莫大, 蹄涔圖報海無垠. 此心耿耿惟忠義, 得侍春坊又聖神.
聞鄭輝國東璞葺治溪亭寄贈一律
浮世營營歇處難, 故人新占洞天寬. 山連武屹藏書室, 水轉雙溪瀉玉盤.
淸福多君窮勝事, 白頭憐我負靑巒. 梅窓賴有同遊夢, 夢罷烟雲滿袖寒.
輓李進士幼珍宗儒
采采靈芝種玉田, 時從平地作眞仙. 寬柔氣度因天得, 敦睦規模自世傳.
滿室春風談笑裏, 連江樓閣畫圖邊. 吾鄕耆德今寥落, 遙向蘆江弔二連.
哭晩谷趙丈
月山深處下書帷, 南國衣冠仗老儒. 寂寞斯文公又逝, 士林相弔有誰依.
輓具懿則五性
緬憶松翁世, 殆乎中葉時. 維持門戶責, 微公幾不爲.
嘗聞長老語, 公性篤孝于. 未效老萊養, 終身小兒呼.
座中常有客, 客來酒亦有. 坡老爲人意, 曾是不在酒.
時拜山中宅, 盡日聽古談. 居然掩素帷, 西遊月纔三.
東方開壽域, 吾里少高年. 一老天又奪, 桑海遂茫然.
輓趙進士
高山日月白雲悠, 四未亭前水自流. 山白水淸依舊在, 哀君長逝不須臾.
玄髮論交到白紛, 醇眞氣味酒如醺. 古家型範今寥落, 謾把牙琴倚寢門.
輓權姊兄思浩
往年哭菊翁, 涕淚慰長公. 長公今又哭, 嗟吾獨自恫.
憶公入門日, 伶仃我纔童. 幈幪松下蔦, 麗資麻中蓬.
蒹葭水一方, 杖屨連十弓. 忻慼與冷暖, 無處不相同.
相同以相樂, 不知老將終. 此樂今安得, 仰天徒夢夢.
維公稟豈弟, 非比我倥侗. 疏松聳深壑, 特發凡林叢.
孤鳳出鷄群, 文彩何玲瓏. 胸次本澹蕩, 氣味自和沖.
天然去雕飾, 毋復費磨礱. 允矣雪翁後, 淳然古家風.
鄕隣賴矜式, 朋儕開瞽聾. 聞達在家邦, 聲譽徹宸聰.
暫試製錦手, 西南口碑豊. 蕭然齋馬返, 晩契雲水中.
詩韻暢幽襟, 圖書照明櫳. 淸福却被壞, 造物欠全功.
再哭麒麟兒, 高門摧棟隆. 荒凉叢桂館, 無人獨呼穹.
東峽送訣歸, 血淚枯雙瞳. 奇症祟肺腑, 無賴扁倉工.
診候未幾日, 仙馭遽匆匆. 咨惜弔士林, 涕泗及輿僮.
靑巖好水石, 寂寞烟花空. 漠漠山南洞, 鬱鬱閉幽宮.
親朋哭如沸, 山日爲矇曨. 竟違臨穴痛, 奈吾老病癃.
符到且當發, 不悲將無窮. 未知九泉裏, 倘復一氣通.
粵在肅廟戊午, 維我高祖考鶴汀公, 以曾王考觀察公, 在玉署, 推榮拜副護軍, 今年春, 三從兄以子 熙周在玉署, 又拜副護軍, 兼五衛將, 此實稀有之慶, 而吾家百年之間, 再有此慶, 甚晠事也. 日前從兄, 將作公賀席, 會中人, 以昔年臣字韻, 以和之, 從弟亦忘拙次呈, 今又改一句, 以呈, 蓋以受恩異, 而慶喜同故也. (庚申)
天恩偏重講筵臣, 緋玉煒煌壽老人. 追憶昔年詩韻在, 吾家飾喜又今春.
( 素巖從兄, 飾喜時韻宗祊大慶, 逮微臣. )
追記前冬十月四日夜夢入侍事不勝感泣和淚謹題(壬戌冬, 因臺彈, 配明川時)
禁林深處黼筵開, 天笑溫溫命進來. 適有榦當惟爾可, 應無疾病趁時廻.
猥陳血懇離前席, 頻顧晷陰語老台. 不盡仁恩同宿昔, 夢魂驚起淚盈腮.
昭陽江舟中遇雨偶占
一死猶遲褥蟻身, 三年不哭是何人. 臺言罔極虛如實, 臣罪當誅譴是仁.
北望頑雲爭蔽日, 南來微雨好淸塵. 篙工報道昭陽水, 此水明朝入漢津.
昌化道中望金剛山偶吟
暮過金剛路, 孤烟蓮浦生. 漫天皆雪幕, 隨處有氷城.
水盡西歸漢, 吾今北入明. 衆香仙侶在, 應笑此營營.
北靑道中望磨雲嶺口占
去國已千里, 離家倏數旬. 松楸雲外隔, 親戚夢中頻.
海闊時停馬, 山高輒問人. 長安望不見, 鄕思却逡巡.
步下鐵嶺病脚顚仆追記辛苦之狀
倚筇長嘯躡風䬞, 雪積如山山益高. 大地渾成瓊玉窟, 此身怳入羽仙曹.
天寒更覺精神爽, 坂峻能令志氣豪. 最是奇觀扶醉漢, 可堪描畫禦牢騷.
元日述懷
我行如昨已新年, 嶺海漫漫路二千. 吾輩如今多退散, 明州從古有因緣.
萍逢何處非吾地, 霜露由來摠是天. 一夢田園歸去早, 酒壼棊局杏花邊.
(夜做歸夢, 見花事爛漫, 故末聯云. )
東岡先生謫會寧, 伯從大父謫此州, 小子今又來謫, 追感而題.
岡爺有廟豆江頭, 伯祖遺芬甲戌秋. 誰敎壬人成貝錦, 非無聖主辨薰蕕.
消長世道元如此, 伸屈天機未暫休. 忝盡家傳淸白業, 殘孫何事又明州.
偶吟
往歲遊關北, 金鑾殿裏身. 重尋前去路, 嶺海一孤臣.
天道關時運, 今吾非別人. 且須加飯饌, 塵刹報昌辰.
夜投吉州城西店
昨過磨天嶺, 暮投防禦營. 山高重雪色, 野曠多風聲.
殘店行人少, 老翁出戶迎. 慇懃如致意, 脫粟小盤淸.
數夜夢入侍感題
疊嶺重遮望眼寒, 寸心遙薄斗牛間. 夢中不識終南 遠, 頻入脩門侍燕閒.
正月夢得詩盡忘之只記一聯心似無雲日恩從不夜天足成一律
風波起白地, 流放到明川. 心似無雲日, 恩從不夜天.
群陰焉敢蔽, 一鑑自高懸. 吉夢詩先讖, 歸之造化邊.
北地無酒只有燒春而味薄不堪飮遂斷之
扶藜獨上望鄕臺, 目送歸鴻手撫盃. 瓊液誰分靑鳥至, 花籬空待白衣來.
玄都春物方新態, 蓮社禪心已死灰. 從此長卿消渴甚, 甕間吏部不須咍.
憶酉山諸老夜夢會石泉
寒燈歌白雪, 歸夢入靑霞. 波動丙魚穴, 花開亥酒家.
詩成看浴鷺, 棋罷伴棲鴉. 何處騎驢子, 低徊石逕斜.
憶從姪行熙璞
强笑臨歧路, 迢迢送客亭. 固知難久滯, 叵耐獨飄零.
密雪從西下, 征駒向北停. 君應眠未着, 吾亦坐看星.
見從姪書
誰道磨天隔, 書緘逐日開. 墨濃應淚漬, 辭懇摠愁裁.
疊嶺陰雲障, 羸驂亂雪堆. 無人論此抱, 庭畔獨徘徊.
偶占
流水高山不識名, 㗳然僧定坐忘情. 鏡臨衰鬢千莖長, 燈照孤心一寸明.
時有客來多眼白, 晝常雲合少神淸. 只須忍耐隨緣度, 不必瓊茅占枯榮.
讀書
愁生如草苦難除, 自愧衰慵學力疏. 靜夜窮探河洛數, 淸朝敬讀涪江書.
沈潛義理幾微際, 收斂身心疾病餘. 聊以優遊消世慮, 不須顦顇弔湘閭.
寒食
殊方驚節序, 是日又淸明. 宿草經新雨, 今人祭古塋.
終身孤露感, 何處白雲生. 支頤空遠望, 耿耿到殘更.
風土雜詠
氏族混淸濁, 文章無卑尊. 盛門與華閥, 鄕任吏校論. 右土俗疾病無醫藥, 山家多老翁. 誰知石田粟, 敎耕自神農. 右無藥複壁爲房舍, 煖@竈陘中. 寢處於斯足, 六畜與之同. 右家舍無錢又無市, 有沽粟易之. 粗粗布如網, 網利爲陶猗. 右無市有女工織麻, 輕細勝綺羅. 盡輸富貴宅, 卒歲無褐何. 右布麥麯醅粟米, 茶湯反不如. 渴者難爲飮, 孤客謾自歔. 右酒揉木爲勃車, 駕牛狀如機. 飛下雪山頂, 薪蘇滿載歸. 右勃車朔風勁知矢觸處皆離披可憐山上樹無樹不南枝右風積雪塡窮壑銀海接天浮若使子猷見應回剡溪舟 右雪冬盡寒猶在, 春歸人不知. 到得三四月, 山南見花奇. 右寒
記夢中還家
天恩欲說海無涯, 死罪臣今生到家. 癡僕迎門爭辟易, 小孫扶杖任欹斜.
葡萄水綠盈樽酒, 桃李春深滿院花. 從此優遊謌聖澤, 一筇一榻老烟霞.
閏月初伏聞因慶赦量移歙谷感泣謹題
日月容光必照焉, 孤臣頭上亦森然. 固知罪積容無地, 敢望恩移隕自天.
桃觀物華尋道士, 水調歌曲愧詞仙. 毋論榮辱與甘苦, 一暴幽冤死得全.
咸興路上逢從姪熙奮
不意咸關夕, 相逢隔歲顔. 君能到嶺外, 吾亦在人間.
細瑣家鄕語, 蒼茫道路艱. 聯翩投野店, 林鳥聽관관(口+官)
到歙谷
善地湖山勝, 仁天雨露承. 路分徂北雁, 飛逐圖南鵬.
始聞家鄕似, 及來嶺海仍. 金剛靑入望, 寧欲託高僧.
偶吟
下不尤人上不天, 光風霽月浩無邊. 丈夫心事當如是, 鷺白烏玄付自然
戲題二絶
瀛海飛塵一劫灰, 偶隨華鶴到蓬萊. 蓬萊誤入迷歸路, 帝遣巫陽導我來.
爲別三山上太淸, 玉壼浮蟻便忘情. 夕陽返照天風起, 流水桃花一帆輕.
次權季周投贈韻
愁裏方以不醉爲憂, 詩中乃以愛飮爲戒, 吾友愛我者也, 憂其無以滌去碨磊, 添作幽鬱之疾, 然豈欲使我長作楚纍之醒, 見笑於漁父耶. 仙靈知我不能醉, 分與蓬山一半地. 山皆白王玉液流, 源自靑城金菊水. 琪花結子八千春, 璀璨明珠似薏苡. 摘來和水釀爲酒, 謫仙希夷相驚喜. 酒醒爛讀 黃庭經, 群仙亦不爲非是.
次從姪惜別韻
誰唱驪駒一曲長, 武陵花浪倚風檣. 歸雲杳杳浮天際, 征馬蕭蕭立夕陽.
別語欲成還口澁, 和顔强作奈心傷. 君詩勝似湘花讖, 倘占黎翁 衡嶽祥.
登後山東臨海水南望楓岳稍覺胸次豁然
如年客曰不勝閒, 獨上高丘縱遠觀. 滄海竝呑天下水, 毗盧孤壓域中山.
茫茫今古經千劫, 渺渺寰區寄一丸. 盪滌煩胸歌浩浩, 暮雲歸鳥與相還.
連得紫海倅書三從姪熙周, 時爲寧海倅.
重得千金信, 南來一月餘. 親親憂疾病, 老老惜居諸.
海內無兄弟, 天涯有爾余 商船稀近日, 何以報瓊琚.
燈夕殘城亦燃燈憶在庚申是日直春坊頒下彩花燈夜又賜饌追感謹題
往年今夕直春宮, 頒正花燈錦繡籠. 孤客殊方還令節, 疏星殘郭散西東.
九枝蓮燭先天外, 一點松明此夜中. 遙想玉樓宣醞處, 侍臣環拱彩雲紅.
聞棲碧翁夢與我遊金剛作, 請以識之, 移配適近金剛, 便成詩讖, 思之深, 故發之夢, 可見聲氣之感, 感題一律, 以謝之.
君夢我時我夢君, 夢魂忘了各天分. 詩成太白山中月, 神逐蓬萊鶴上雲.
度石穿林行執袂, 落花流水坐論文. 休言吉故徵先讖, 自是心交到白紛.
海霧
海國多雲霧, 幽人看畫圖. 聯綿彌遠近, 散合任須臾.
白日還明晦, 靑山忽有無. 天風吹捲去, 魍魎也驚呼.
贈別成川朱生德鄰
窮道之交, 亦難矣. 古有趙德, 從黎公於潮, 亦有卓師訪坡老于惠, 今子不以千里爲難, 往年訪我鄕廬, 今又來問荒徼窮途, 交情可見, 以老親倚門, 不多日, 辭去不得挽, 書此以贈. 驚起跫音寂寞濱, 一筇千里躡行塵. 蘿溪茅屋靑眸舊, 蜒海殘燈白髮新. 世道如今多變態, 人情卽此見天眞. 送君歸去仙樓遠, 巫峽山光入夢頻.
次權孟曄思晦投贈韻
千里神交有夢魂, 夢中時見笑開門. 江山地古烟霞勝, 花柳春深雨露恩.
那得親朋成一會, 獨憐衰病淹荒村. 遙知水石靑巖上, 雲樹孤吟對酒樽.
山寺病起中元對月
久客忘時序, 中元見月知. 天淸流照活, 山近上來遲.
此地無多勝, 今宵也自奇. 更深聽磬坐, 幽興可新詩.
喜益兒自京來覲
長林路左別, 經歲眼中森. 喫盡風霜苦, 行過虎豹深.
神明倘見護, 天日自昭臨. 勿復憂形色, 吾能保至今.
送益兒還鄕
秋風動萬壑, 朔雁正南飛. 嶺海吾猶在, 關山爾獨歸.
臨門催上馬, 回首欲牽衣. 去釀新春酒, 來迎舊釣磯.
在明州奄過冬春諱辰在歙州又過十月仲父諱辰感泣述懷
痛哭喪餘日, 飄零在鬼門. 今朝桑海淚, 又是漳江村.
詎識三年愛, 終孤十起恩. 愚懵墜敎訓, 忠孝兩無論.
述逢別之懷贈蘇山李仲蘊輝玉
風雨重陽尙滿城, 君行能得幾時晴. 天公却會關人意, 嘉客還忘縶馬誠.
流水亂山泥滑滑, 羸驂倦僕日營營. 羈愁別恨都閒漫, 可惜衰年枉費精.
田家樂
婦織兒耕翁牧牛, 抱孫阿姐餉西疇. 田家樂事無奇特, 只是不知離別愁.
次贈寧海衙
森森落木立如矛, 爲解愁圍强上樓. 日暮寒鴉爭亂樹, 天淸遠雁早驚秋.
思鄕夢入靑山宅, 望美歌成赤壁舟. 東海使君能會意, 詩來爭得一場遊.
山寺秋懷
秋來客意絶無佳, 獨倚山樓鬢髮髿. 白雁霜前還舊國, 丹楓雨後減新花.
一身冷落華藏寺, 孤夢尋常醉菊家. 賴有同安鍾磬韻, 淸明夜氣乍萌芽.
冬至
是日又冬至, 何時見客歸. 年光催舊節, 陽意長新暉.
物理無終極, 天心有幾微. 漸看添一線, 誰補舜衣裳.
次菊翁投贈韻二首
客意殊寥落, 逢秋不復詩. 山容霜後澹, 虫語夜來悲.
萬事看棊局, 殘生立路岐. 風前多過雁, 叫侶爾何之.
吹送長風宿霧開, 天容海色絶纖埃. 百年多病空催老, 九日登高始盪懷.
黃菊何心孤客笑, 靑山到處六郞臺. 愁雲一抹長隨我, 其奈無人送酒來.
次贈剛齋李承延丈癸亥
瓊琚雜珮畫中聲, 寫出隱侯未盡情. 寒月獨懸雲樹影, 古琴遙響海山鳴.
商顔日永靈芝老, 淇澳春深孤 竹生. 滿幅慇懃行患戒, 屢回莊誦點屛明.
甲子立春
天機滾滾一元春, 是日東君到海濱. 化裏江山新氣色, 雪中梅柳舊精神.
烟沙雁意橫飛翮, 雷雨龍工動蟄鱗. 詩帖淸晨何所祝, 故園千里未歸人.
憶臥隱幽居述懷
窈窕陶巖洞, 蕭疏臥隱菴. 松陰依壁老, 花影倒泉甘.
山水孤琴遠, 乾坤一枕酣. 無人問所思, 隨柳過溪南.
棲碧翁和寄昌翁韻其意大同小異又次
我欲沈冥與世醉, 故人憂我瘴癘地. 勸我飮水苟無渴, 七寶蓬萊多乳水.
然觀世人多白謗, 爭將明珠眩薏苡. 安知此水不變酒, 譏我甕間狂也已.
何況靈液利於病, 惠飯未必章子喜. 我將兩忘酒與水, 使人無非亦無是.
戲吟
憶曾騎鶴上瑤臺, 浮世居然一劫灰. 却笑眞緣終未了, 謫居猶得近蓬萊
喜復兒至
三年始一見, 相對意何如. 長道知多怕, 惟憂得少紓.
扶携同寢食, 論說又詩書. 最是難忘處, 爾兄今獨居
除夜
孤燭殘更聽打灰, 送年如送故人催. 寒從柏葉三盃盡, 春入鷄聲半夜來.
逆旅光陰如水逝, 天心物理共環回. 林園占得新消息, 好向東風有早梅.
春朝偶占乙丑
曈曈瑞旭照窓紅, 睡罷寒床起病翁. 雪色千山經夜雨, 花心萬樹動春風.
平臨海水連天外, 盪滌塵愁滿腹中. 會待陽和乘興去, 名區踏盡海之東.
宥還
自愧明時獲罪多, 死生榮辱於吾何. 身歸華表千年柱, 春入桃源二月花.
絶地風霜休問我, 從天雨露向人誇. 稚孫解識離情苦, 笑道翁今勿出家.
輓李幼文重祖
瘴海歸來匹馬尋, 一壼新酒盡情斟. 應知宿草空山裏, 尙記孤燈話此心.
聖朝多雨露, 誠孝徹高深. 天道詎無必, 人生竟有今.
未暝泉下目, 空抱夢中心. 不散精靈在, 長號漢水潯.
輓李持憲義夾
妙歲靑雲器, 淸朝錦帳郞. 沈淪隨本分, 馳逐恥名場.
海郡玄琴響, 烏臺玉珮光. 驥蹄猶未展, 仙馭去何忙.
春闌病起
雪盡山容小, 春深鳥語多. 老夫能出戶, 枯木亦生花.
輓權上舍子晦褧
蘇湖東畔碩人居, 山有靈芝采采於. 一室圖書觀理處, 百年詩禮過庭餘.
向來欣戚隨緣度, 老去風流與世疏. 鄕黨于今耆舊盡, 朋交古誼倍欷歔.
輓鄭輝國
渺然人物此乾坤, 又向靑山哭警軒. 孝友源來家政遠, 風流疏處薄夫敦.
有誰切齒邵翁事, 無不披心司馬言. 一疾無端壽夭促, 神明我欲訴煩冤.
兩家先祖昔隣芳, 七點山前是我鄕. 百歲舊交同建婺, 一番新契又潘楊.
滄桑宿感今何說, 雲樹苦吟老轉狂. 多少餘生相仗計, 漫將哀淚灑牛岡.
書
答鄭立齋士仰宗魯○甲子
德門洊禍, 尊叔母夫人, 奄忽違世, 賢閤夫人, 繼又喪逝, 想惟摧痛悲悼, 無以堪抑, 顧此遠寄窮荒, 未及修慰, 乃先施遠訊, 感愧交至, 書出已久, 不審秋凉, 服履 起居, 更如何. 區區旋切溯慮. 翰東得罪, 明時遷謫關塞, 宿祟轉痼, 形殼猶存, 能自支, 過時月, 亦是異事. 禍福死生, 都付造化翁處分, 而但病情如右, 尋常書籍, 無以探討, 此間絶無識字士友, 無可與語, 日夜孤坐, 㗳然若木偶, 最是難堪. 楓嶽形勝, 曾所一遊, 實有餘債, 而放浪山水, 尤非逐臣事, 只自杜門吟病, 萬無消遣之道. 松楸之感, 家國之戀, 種種消鑠心神, 愧無平日素養, 以致隨處攪撓, 無足以奉聞於知舊相切之間也. 從姪之喪, 慘惜無以爲心. 權甥又逝, 姊兄晩境情地, 尤不忍想得奈何. 先祖遺稿, 近纔收拾刊出, 而弁首之文, 得蒙大筆揄揚, 感鐫無已. 南宗伯, 連得追隨耶. 念其年來, 所遭慘然, 果能理遣, 不至損鑠否.
1804년(순조 4) 강원도 歙谷縣 유배지에서 立齋 鄭宗魯(1738~1816)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공의 숙모가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나는 먼 유배지에서 위로의 편지도 보내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가을 서늘한 날씨에 상중에 있는 공은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빈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인간세상의 禍福生死는 모두 조물주의 처분에 맡길 뿐이다. 이곳은 글공부를 한 사람이 없어 더불어 대화를 할 사람이 없다. 先祖의 유고를 이제 거의 다 수습하여 간행하려고 하는데 공께서 서문을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다.
答鄭士仰丙寅
地纔數舍, 尙阻一識, 衰病日甚, 瞻悵倍切, 卽於便中, 獲承先施之問, 感慰交摯, 仍審旱炎, 靜養節宣增衛, 向時僑寓, 已得撤還, 種種慰仰之至. 翰東一疾支離, 已滿周歲, 近又宿暍添肆, 僵臥不起, 莫可收拾, 只合恭俟符到奈何. 一番拜敍, 積年經營, 而顧此病勢, 雖尋醫之行, 不得生意, 若待秋風, 稍有可强之勢, 竊欲迤進仙庄, 做得一場團圓, 而姑未可必, 只自悵歎. 李寢郞宥還, 不但爲吾嶺之幸, 感頌天恩, 雖在病縶, 若有生意, 此則吾嶺人士, 想必同然也.
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집에 머물면서 정종노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더운 여름철에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계속 병이 들어 누워 있다. 하지만 가을 서늘한 바람이 들어 병세에 차도가 있으면 한 번 찾아가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寢郞 李穉春이 사면되어 돌아왔는데 우리 영남 사람으로서는 다행한 일이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鄭士仰
寒事漸緊, 不審靜養節宣, 對時增衛. 仰慰且溯. 翰東 宿祟轉劇, 添得毒感, 出入人鬼, 符到猶遲, 苦狀難堪, 奈何就控. 先人行蹟, 久將泯沒, 而無傳, 墓道顯刻, 迄今未遑, 都是不肖之罪. 久謀一進拜敍, 以遂宿昔之願, 仍陳私懇, 而病勢萬無振作之望, 至今遷就, 或恐一朝溘然, 抱恨以終, 不得已替送迷豚, 敢此乞銘, 事欠誠實, 只切慙悚. 事行一通錄呈, 而疏略如是, 恐不足以採擇也. 且仲父平日行誼, 不宜湮沒, 想或有聽聞於知舊間傳說矣. 只恃情誼, 拜請碣文, 伏望憐察, 而恕諒焉.
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집에 머물면서 정종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추위가 심해지는데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고질병이 더 심해지고 또 독감에 걸려 괴롭기만 하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르겠다. 부득이 아들을 보내니 先父와 仲父의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與李穉春㙖時爲廬江洞主. ○己未
積歲阻闊, 尋常瞻悵, 卽惟至寒, 齋中起居, 增重慰仰. 區區翰東, 疾病侵尋, 已判衰廢奈何. 今秋使行時, 購朱書傳敎, 卽闡大義扶正學之苦心晠意, 則吾南諸君子, 正宜與聞, 而歌誦之也. 爲此送呈一件, 幸爲廣施於吾鄕士林, 要使家傳而戶誦之如何. 事系闡揚之萬一, 抑亦爲圖報塵刹之一端耳. 餘無緣合幷, 臨紙增悵. 此本留作院藏, 時與過從士友奉玩, 而傳布是望.
1799년(정조 23)에 穉春 李㙖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해 항상 그립다. 동지 추위에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질병이 항상 끊이지를 않는다. 이번 가을 사신 행차편을 통해 朱子書를 구입했으니 이 책을 보낸다. 영남의 여러 친구들에게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李寢郞穉春丙寅
世間事, 如水益深, 又見兄所遭, 只自仰屋而已. 然嶺海不必死人, 竊想平日素養, 必不以是, 而有所震剝, 恃此而無憂, 而儕友之同罪者, 烏得無慨惜之懷耶. 此時起居何如. 道里殆近八百餘里, 水土又不佳, 必須擇其稍淨處, 隨處愼攝如何如何. 翰東病勢日益添劇, 萬無復起之望, 不知此生果有更會之期耶. 聞便甚劇, 力疾艱草.
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보낸 편지이다. 공과 나와의 거리는 8백 여 리이다. 좋은 자리를 택해서 몸 조심하기를 바란다. 나는 질병이 더욱 심해져 다시 일어날 희망이 없다. 과연 다시 만날 기약이 있겠느냐는 등의 내용이다. 『순조실록』에 1806년 1월 8일 기사에 의하면 康津縣 古今島에 이우를 귀양보낸다는 내용이 있다. 이우는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에 영남지역에서 10,057명의 사람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린 영남만인소의 疏頭이다. 純祖로 임금이 바뀌고, 정권도 노론 일색으로 바뀌게 되자 당시 疏頭로 활약한 일이 원인이 되어 유배간 것으로 여겨진다
與李穉春
千里瘴海之行, 旣不得携手同歸, 又不得馳往奉別, 雖緣病蟄, 强起不得, 此心耿悵, 實愧古人兩得之意, 病中懷想, 惟以行李爲憂際, 可還後, 始聞諸節頗詳, 多日馳驅之餘, 得無大端損節, 益信君子行違之道. 水土風俗, 果如霽山公所錄, 稍以寬心, 更不審春爛起居候, 一向萬重. 賢允在傍, 相對討論, 足以消遣否. 素養有定, 必無他慮, 而親友相切之心, 終不能釋慮, 所恃者, 惟蒼蒼耳. 翰東病意日甚, 一日轉到十分地頭, 初意春和, 則或得少歇, 而落席昏倒, 反甚於冬間, 勢將符到卽發, 恐不能少須臾苟延, 迎笑於賜環
之日, 是可歎也. 自頃以來, 士論峻發, 其意非不盛矣, 而專以痛迫爲主, 還失正中之意, 極爲憂憫, 遠地聞此, 想亦咄咄也.
연대는 나와 있지 않지만 편지 내용상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중인 치춘 이우에게 보내는 것으로 1806년(순조 6)으로 추측된다. 천리길 바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공의 아들이 옆에 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나는 나이가 들어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 공이 유배지에 풀리는 날 웃음으로 환영하고 싶다고 하였다.
與李穉春
士君子生平世, 無論有罪無罪, 布衣島配, 固榮矣. 俯臨萬里風濤, 奇詭之觀, 浩淼之勝, 可駭而可愕, 可喜而可驚者, 無非足以開盪我心胸, 助發我志氣者, 則兄之今行, 固可賀也. 況聖明在上, 天日下臨, 曾未數月, 特蒙恩宥, 此則不獨爲兄賀也, 爲吾嶺相賀也. 第念衰境遠役, 重以塗道之虞返稅後, 靜候起居不瑕, 有損害否. 且聞愼可中路有病, 病涉危疑, 是爲區區仰慮. 弟病勢愈往愈劇, 了無回甦之望, 當此跛躄皆起之日, 無計一鞭馳進, 握手相笑, 如是而豈可曰生在世間乎. 只自憐歎而已.
앞 편지와 마찬가지로 유배중인 치춘 이우에게 보내는 것으로 1806년(순조 6)으로 추측된다. 일반 평민의 신분으로 유배가게 됨은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다. 바닷가의 좋은 경치를 많이 보기를 바란다. 나는 병이 더욱 심해져 회생할 기미가 없다. 형편이 이러하니 한 번 만나서 손을 잡고 즐겁게 웃지를 못하겠다. 이것이 어찌 세상을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울 뿐이라고 하였다.
答李承旨晩秀○壬子五月嶺疏時, 使政院以書札往復於金翰東, 以探疏儒去就之敎.
伏承筵中下敎, 歸與諸生齊會一處, 縷縷開諭, 則諸生皆以爲聖敎若是嚴重, 揆以義分, 固當卽日退歸, 而惟是區區抑鬱之私, 一道同心, 千里裹足, 在家父兄之送子送弟者, 謂可以伸大義理, 而忱誠淺薄, 未蒙允, 愈群情之掩抑, 固無可言, 況値此月此時, 尤不勝悲鬱徊徨, 咸願小須臾無歸, 以過齋日後去就, 此則翰東之所已告達於朝筵者也. 最是惶懍者, 旣不得祗受回糧, 則留糧之祗受, 尤非義分之所敢, 方與聚首兢惶, 罔知攸措, 翰東敢不詳細曉諭, 而諸生之意, 終始如一, 只伏切惶恐隕越之至. (書報後, 有留糧還收之命. )
承旨 李晩秀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에 영남 지역에서 10,057명의 사람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영남 출신인 공으로 하여금 상소의 전말을 보고하라고 하자, 그간의 사정을 승지인 이만수에게 편지로 대답한 것이다.
答靑鏡書院士林
迺者戊申, 義蹟搜訪之擧, 特出我聖上無遠不燭之盛意, 而實爲吾鄕闡揚幽鬱之一機會也. 夫以吾鄕先父老忠義之風, 値戊申無前之變, 明目張膽, 不謀同聲, 上以膺號召之命, 下以倡義烈之擧, 薦出將佐, 分定任員, 同心協贊, 雪涕布檄, 誓不與此賊俱生, 雖不戰旋罷未效裹革之誠, 而有國無身無愧立殣之節, 則其所以聳一世之觀聽, 樹百代之風聲者, 可謂不負聖朝菁莪之化也. 時移世變, 往蹟寢遠, 堂堂忠義之蹟, 將歸於泯滅而無徵, 則凡爲吾鄕後生之所抑鬱, 而慨歎者, 幾許年哉何. 幸聖明在上, 追感舊甲, 詢訪之命, 遍及草野, 生等聞令下, 聚首感泣, 收錄文蹟, 䝴送鄕堂, 私竊以爲吾鄕忠義之 蹟, 可以因此上徹, 而先父兄苦心血忱, 庶幾一暴之有日, 此豈有一分妄想於其間哉. 誠以秉彝之所同, 出於百年積鬱之餘也. 不意修報之際, 大謬初料, 不采鄕議, 全沒事實, 使朝家搜訪之命, 閼而不行, 噫, 當日先倡協贊之諸爺, 獨無可紀之蹟, 而反不及於列邑從軍之士乎. 有百世扶倫之義, 而未得顯揚於當時, 値千載難得之會, 而又復泯沒於今日, 生等始惑終歎, 索然無語, 只自歸於鄕運而已. 今承來諭, 辭旨鄭重, 始信吾鄕亦有此箇義理也. 生等卽宜齊進, 參聽末席, 而各以事牽, 姑未遂計, 先送一二儒生,
以聽餘論, 倘蒙恕諒而休咎耶.
1788년(정조 12)에 靑城書院과 鏡光書院 두 곳의 유생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1728년(영조 4) 戊申亂(李麟佐亂) 이후 60년이 지났다. 당시 우리 영남 지역에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현재의 임금은 지혜로우시니 우리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등의 내용이다.
答崔仁同獻重○戊午 ) (주)초명은 현중(顯重)
南還已久, 而病伏窮巷, 尙阻一會, 只切瞻耿, 卽承惠札, 仍審令政候, 增重仰慰. 翰東經年關西, 疾病侵尋, 解官歸家, 可以隨緣調息, 而歸路觸寒, 宿祟添肆, 長第委頓憐悶. 道內事, 誠如來諭, 翰東雖無似, 豈敢恝然無意哉. 六七年來, 爲此會者, 亦五六次, 而在遠則以書, 在近則以言, 隨事勉戒, 隨處彌縫者, 亦已多矣. 今番之會, 欲挽而不得, 則又以書報, 期於調停, 而亦不諧, 此將奈何. 蓋吾嶺士氣, 近不如古, 緩者失之柔懦, 峻者失之高激, 不知梗着所守, 勿忘勿助, 爲眞正義理, 而有此紛紜, 初不念事體義分之如何, 翰東之於此, 不勝私憂過慮, 或於過從知友, 每每吐盡心肝, 同志之人, 幾乎太半持重, 而甚峻者, 卽因此愈峻, 畢竟無止泊, 時起滅無常, 提說無難, 極是悚悶. 然其論蓄之已久, 其鋒發之甚銳, 有難卽地摧沮, 故向日伊院之會, 使之姑緩, 日昨雲院之會, 亦使之審愼, 諸議殆或停息矣. 旋聞至於爬任之擧云, 雖未詳其事實, 而必有所以然, 良可仰屋. 翰東自數年來, 大被江右士林情外之誚, 於道內大小事, 初不欲開喙, 但此一 事, 則雖更被誚責, 不敢退避, 歸來數朔, 舌欲廢矣, 筆已禿矣, 而不有愚見, 竟至爬出諸任, 喧傳道內, 誠有大未安者. 然不如是, 則其鋒不可遏, 第當委曲宛轉, 竭心盡力, 未知果能如計否也. 來書辭意嚴重, 而吾嶺之人, 亦豈有不知此兩件義理者乎. 說出太露, 恐或未安, 故翰東則初不敢顯言, 只及審愼待時之意, 而亦爲之拂鬱, 今番之事, 安知不激於令與翰東之書耶. 還可悶歎.
1798년(정조 22)에 仁同 수령 崔獻重에게 보낸 편지이다. 영남 지역 사림들의 기상이 예전과 같지 못하다. 논의도 하나로 잘 통일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紹修書院道會士林
今番會席, 遠近章甫, 果得團會否. 吾黨之苦心血忱, 惟在於念念闡揮之道, 上以副朝家期待之意, 下不負許多年結轖之忱, 而丙辰夏應旨之行, 未免虛歸, 嶺中抑鬱之情, 一倍層激, 而年來大論, 發於無端, 仍或旋止, 辭說紛紜, 論議轉激, 今日之會, 實出於不可已者, 遠邇同席, 爛熳商確, 一以爲講明之道, 一以爲整頓之地, 正爲急先務, 而第惟事在重大精微處, 則宜加審愼周詳之道, 前後此會, 非止一再, 而一道未能合席, 凡節或涉輕遽, 前之累發而累止, 未必不由於此, 今於齊會之時, 幸須十分商量, 十分稱停, 務從從容做措, 緩急遲速, 惟在事會之當否, 然後可 以有辭於天下後世, 竊想僉議, 亦必不謀而同矣.
1806년(순조 6)에 소수서원에서 회합을 하고 있는 영남의 儒林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번 모임은 실로 중요하다. 위로는 조정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아래로는 몇 년 동안 쌓인 정성을 헛되이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원근의 사람들이 同席하였으니 道를 밝히는 좋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하였다.
答權佐郞其天權進士孟曄壬子疏行時
續承僉札, 以審僉起居, 增重仰慰. 翰東入城後, 不免閉門牢臥, 日前纔得卸免耳. 疏儒數日之內, 江左右齊到, 殆近數十餘員, 吾南士氣之未盡摧沮, 於此可見, 但留資凡節, 茫如捕風, 給餽之道, 不容少緩, 須拔例速圖如何. 將以今朝呈疏, 向後事, 惟天在耳. 但凶逆層生, 日間又有九宗事, 豈意世變之至此極耶. 周姪小報, 覽可悉矣.
1792년(정조 16) 佐郞 권사호(權思浩)와 進士 권사회(權思晦)에게 보낸 편지이다. 우리 영남 사림들의 기상이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공급해야 할 음식은 조금도 늦출 수가 없으니, 속히 도모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與權孟曄乙卯
前便書, 計已關聽. 不審近日靜履起居增重. 翰東宿祟自頃少歇, 蓋以賑事已畢, 民憂少紓故也. 方請由於營家, 姑未見回報, 而要之必遞乃已, 倘能脫去塵簿, 倘佯於社酒寒燈之間, 則沈痾亦可以袪體耶.
1795년(정조 19)에 권사회(權思晦)에게 보낸 편지이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는가? 나는 고질병이 요즈음에는 조금 차도가 있는데 대개 賑事(백성를 구휼하는 일)가 끝났고, 백성들의 근심이 조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언제 관직을 벗어던질 수 있겠는가라는 등의 내용이다.
與權孟曄丁巳
官隸之回, 槪聞近候, 頗以爲慰, 卽惟近間兄履起居, 增重溯仰. 區區翰東客店迎新, 感懷倍深, 西關遠出, 鄕思轉切, 但幸登途之後, 宿苦漸歇, 到衙以來, 稍覺蘇醒, 蓋緣江山樓臺之勝, 足以暢敍幽情, 而邑僻事簡, 亦可以隨意將息, 莫非恩數, 感頌何極. 惟是兒輩無憂, 種種關心奈何. 此地形勝, 果爲東方第一, 吾儕中百許年間, 無一人出宰於此, 故足跡罕到, 今得可遊之便, 而族親知舊, 亦無一會之勢, 獨坐悄然, 雖有好樓臺好江山, 豈可獨樂. 還可笑也. 兄每以遠役爲苦, 而此處則不可不一遊, 姑待時和無事之日, 與鄙中有志之人, 一鞭西出, 以做萍水奇會如何如何.
관청의 하인이 돌아와 대개 소식은 들었다. 이곳의 경치는 무척 아름다운데 친구들과 같이 모이지 못함이 항상 안타깝다. 좋은 누대와 강산이 있지만 혼자 즐기니 도리어 우습기만 하다. 한 번 이곳으로 와서 좋은 모임을 만드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보낸 편지이다.
答權孟曄甲子
潦雨阻人, 三月無便, 愁寂中, 懷仰政苦, 卽承惠札, 慰敵一晤, 仍審潦暑, 靜履起居增重. 區區仰慰. 翰東海上蒸炎, 倍於南土, 過夏辛苦之狀, 不可勝言, 而尙能無大段疾病, 極是異事, 自近日, 爲晩炎所困, 泄症大發, 已經一朔, 眞元漸陷, 抵當不得, 良苦良苦. 歸心已久絶矣, 病意又如此, 只自坐待符到而已. 家兒輩不識聽天所命, 又聞妄擧呼籲云, 煩猥之罪, 恐不免可悶耳.
1804년(순조 4) 유배지인 강원도 歙谷縣에서 보낸 편지이다. 장마로 소식이 끊겼는데 보내준 서신을 보니 참으로 위로된다. 이곳의 고생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설사로 몸 안의 힘이 다 빠졌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李監察際可秉運○丙寅
嚮時病伏涔涔之中, 忽聞急報, 不能往別, 祗以草草替書, 未盡蘊, 只覺歉恨, 日夜耿耿, 輒以行李爲憂, 今見抵從姪書, 始知陪到配所, 行事安穩, 始知君子素養有定, 不以夷險而有貳, 稍慰憂慮之懷. 且本島水土風俗, 曾所詳知於霽山集中, 今聞果然矣. 尤以爲慰. 不審千里往還之餘, 起居得無損憊耶. 旋切溯念. 翰東一病支離, 經冬及春, 到得十分地頭, 勢將符到 卽發, 亦且奈何. 近聞道內大論峻發, 至設疏擧, 此實秉彝之所同, 孰敢有異議哉. 第念儒疏體重, 有別於臺章, 有所痛冤, 而易失其正, 有所憤激, 而易失其正, 有所好惡, 而或失於正, 有所恐懼, 而或失於正, 此山野好高之見, 未免爲處士之大言, 而終歸於僨事者多矣. 今此疏論, 其志氣, 則非不誠高且盛矣, 以此志氣, 何不於往年姜櫟悖疏後, 出一口氣, 乃於達賊自干天誅之後, 始乃敢下井陘, 其可謂士氣乎. 至其義理精微處, 則少有挾雜, 已不是義理之正, 少有過激, 亦不是義理之正, 此豈非可戒而可懼處耶. 壬子一疏, 出於迫不得已, 而冒萬死, 出一言, 聖明在上, 賢相在側, 得以少伸義理, 粗洩三十年痛冤, 而顧今至精至微之義理, 愈往而愈精, 愈八而愈微, 朝廷之間, 無非投石之人, 則雖欲卞忠逆, 而明義理, 是豈嶺中憤激士類之所可容易辦得者乎. 只合斂手堅壁, 以 觀時變而已, 何可容易着手, 混入於其中耶. 且今島配之行, 曾未月日萬人疏擧, 又復紛紜, 則不但涉於 猥越之科, 將不免終歸於憑逞之嫌, 使一端轉移之機, 至於莫可收拾之境, 則不但爲全嶺之羞, 恐不無添罪之慮, 此又非可憂之甚者乎. 弟於此議論, 何可有一毫持貳之計, 而目下急務, 莫急於保護孤謫, 謹守秉執, 幸得扶持吾嶺大義理而已, 都在嘿會之如何耳.
1806년(순조 6) 監察을 지낸 際可 李秉運(1766~1841)이 유배를 가자 위로로 보낸 편지이다. 오늘 조카의 편지를 받고 공께서 配所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군자는 평소에 교양이 있고 마음의 안정이 있으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근심하는 일이 없다. 천 리 먼 길로 가면서 몸에 손상은 없느냐? 지금은 시국적인 변화를 잘 지켜 보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鄭輝國丙午
漠然相阻, 不知爲幾箇月日, 便遞之無憑, 勢所固然, 而憧憧瞻詠, 顧何嘗少弛耶. 㬉餘寒緊, 伏未審此時靜中棣履起居增重否. 仰溯. 區區近聞占得溪山佳處, 葺治園亭, 景致幽靜, 此固人人之所欲, 而未得者, 而兄獨有之, 晩界頤閒, 何樂可以代此. 深恨不能一往遊賞, 與同其樂也. 翰東旅遊恰滿, 五年客苦, 去益難堪, 見今齒牙已落, 鬢髮俱化, 客中所得, 只是衰相而已. 異日相對, 當爲發一笑也. 且家信久不聞知, 種種憂慮, 益覺催老, 獨不能脫却羈絆, 浩然南歸, 鷄肋之欺人, 果如是耶. 只自笑歎, 適憑崔兄行, 暫此草候, 遙想幽居, 不覺神往, 偶得拙韻以呈, 亦可見相愛之情, 幸勿掛人眼, 一@屛去如何.
鄭東璞에게 보낸 편지이다.
몇 개월 동안 소식이 끊겼다. 근래 좋은 산수에서 정자를 짓고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형께서 노년에 그런 즐거움을 혼자 누린단 말인가? 나는 지금 이가 다 빠지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했다. 어느 날인가 만난다면 한 번 웃을 것이다. 마침 崔兄이 그쪽으로 간다고 하므로 잠시 문안 편지를 보낸다. 시도 한 수 보내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고 한 번 웃기를 바란다는 등의 내용으로 1786년(정조 10)에 보냈다.
與鄭甥始如燧○丙辰
向日修書檜院時, 坐直忙擾, 未付一字, 方以爲恨. 卽奉來札, 以審老炎, 省履一安慰慰. 此中來時中暑, 近又多日供劇, 積備深祟, 長事委痛, 歸計有難, 任意極爲愁悶. 輝祖行止, 想多惶蹙, 洛中物議, 不聞可知. 潦霽飢飽之義, 必有素講, 須與金君聲探知, 而同去就, 似無妨矣. 再昨日入侍時, 下詢鄭士仰, 仍命復職, 別提柳尋春, 昨因遞差, 草記爲間司相換, 頃於武屹書籍奏達時, 轉及於奉祀孫, 奏以蔭仕久闕, 而別無更詢, 微察旨意, 槪因道薦, 而已知之矣. 晨起病眩, 只此不一.
1796년(정조 20)에 맏사위 始如 鄭燧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전에 바빠서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늦더위에 잘 지내고 있느냐? 엊그제 入侍하였을 때 鄭宗魯에게 別提를 내린다고 하였다. 柳尋春(1762~1834)은 어제 관직이 갈렸다. 새벽에 일어나 편지를 쓰니 어지러워 이만 줄인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疏廳書丙寅
伏惟春霖, 僉候動止, 增重慰溯. 區區翰東, 一病支離, 轉到十分地頭, 憐歎奈何. 就今番大論, 實是吾嶺大擧, 凡有彝性者, 孰不聳動而欽歎哉. 第私憂過計, 不得無鄭重於其間者, 此論旣不及於達賊筵奏之初, 則到今誠晩矣. 旣失之晩, 則毋寧姑緩時日, 以待可言之會, 何其使一道大論, 未免草率輕遽, 不量末後收拾之圖也. 蓋此義理, 不容他人勸禁, 有所進退, 亦不可苟從, 他人脚迹下盤旋, 只合堅吾所守, 行吾所當爲而已. 顧今時象蠻蜀相攻之日, 不必混入其中, 自取譏侮, 未知於僉意如何. 日前見疏廳輪通, 有搢紳合擧之議, 而今年與壬子有異, 若使可言, 則搢紳自爲一疏, 恐是當然底道理, 旣不得圖此, 又不得竝轡西上, 則事面恐涉如何, 此則淺見之所不能苟同者也. 無論如此如彼, 莫如江左右老少章甫, 一番聚會, 爛熳商確, 俾無後悔, 最爲十分亭當, 況疏首有故, 數十日前, 有難發行, 則疏首未發之前, 疏儒先動, 亦未知其穩當也. 病昏特甚, 不能成語, 略陳愚見, 伏惟僉尊, 照諒之幸甚.
1806년(순조 6)에 疏廳에 보내는 편지이다. 소청은 상소하기 위하여 선비들이 모여서 의논하는 집을 말한다. 지금은 임자년(1792년 윤4월 27일에 영남지역에서 10,057명의 사람이 연명하여 상소한 일)의 상황과 다르다. 후회가 없도록 충분히 의견을 수렴해야 된다는 등의 내용이다.
與成叔晦彦根○丙寅
積阻之懷病, 中倍覺難, 聊卽承舌諭, 謹審有感候, 日前竹溪之行, 適値風寒, 致此愼候耶. 仰慮區區翰東 病意日甚, 一日貼席, 委頓憐歎奈何. 疏廳消息, 近復有聞耶. 姑緩旬月亦幸矣. 來月十三日, 又復漸近, 末稍事, 恐無下落, 將何以爲計也. 莫如姑爲停止, 靜以竢之, 而道中諸論, 果能回聽耶. 日昨見李際可書, 鄭重之意, 適與相符, 要使此近老成, 發文急通, 此言甚嫮, 而無可相議可悶, 此是一國大義理, 又是吾嶺生死路頭, 不可不爛商, 故前後多少書辭, 費盡精力, 而但聽之藐藐間, 多有浮謗云, 此則細節, 只自任之, 而還可笑歎, 無由面議, 壅菀無已, 餘眩甚不宣.
1806년(순조 6)에 叔晦 成彦根에게 보낸 편지이다. 보내 준 편지를 받고 감기가 들었음을 알았다. 나는 병세가 하루하루 더욱 심하여 침상에 누워 있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疏廳의 소식은 근래 들었는가? 지금은 일단 정지하고 관망할 때이다. 際可 李秉運의 의견도 나와 같은데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答金公輔東弼○甲子
積歲阻候, 在家時, 懷仰尙不勝, 況此竄伏窮徼, 祗切瞻望之思, 春初惠問, 遠落天涯, 慰豁何等. 謹審彼時靜候起居增衛, 尤庸仰慰. 區區翰東獲罪明時, 放逐嶺海, 于今三年矣. 死生禍福, 惟在造物處分, 不必爲心, 而霜露松楸之感, 親戚睽離之恨, 終有所排遣不得者奈何. 書中勉戒, 旨意鄭重, 敢不佩服, 而本無所養於中者, 一切憂愁窮苦, 又皆由於鑠我, 恐將因此頹廢, 無足以奉問於相愛之間也. 還爲愧歎. 鷹洞便,作滄桑界, 隣比情誼, 尤別想爲之慘然傷心也. 還歸無期, 衰朽轉甚, 拜候未可必也, 臨書增悵.
1804년(순조 4) 配所인 강원도 歙谷縣에서 公輔 金東弼에게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유배중인 자신에게 김동필이 편지를 보내자 답장으로 보낸 것이다. 이곳 바닷가로 온 지 이미 3년이 되었다. 生死禍福은 조물주의 처분에 있다. 유배가 풀릴 기약이 없는데 쇠약한 몸은 더욱 나빠진다. 한 번 만날 길이 없으니 안타깝다는 등의 내용이다.
答(鄭)內從必濟○己未
今春如經兵燹, 尋常慮念, 伯從來得, 奉手字, 慰如一晤, 仍審近日省下, 學履連勝, 尤慰慰. 向來輪症, 付之已過, 不足更提, 而惟是順經爲慶幸耳. 表從本有重病, 仍添毒感, 自正月至今, 彌留元症, 雖纔減歇, 而餘憂尙多, 耳聾眼眵, 已作虐廢樣, 雖緣毒證, 亦觀衰相, 可悶可歎.
1799년(정조 23)에 鄭必濟에게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근래 부모님 모시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하니 더욱 위로된다는 등의 안부를 묻고 있다.
答素巖從兄鎭東
奴至承書, 伏審氣候久欠寧節, 似是元氣虛損之致, 伏慮. 從弟旅中調遣, 比前倍難, 而飮食居處, 不適於冷煖飢飽, 以致諸症交攻, 此莫非衰相悶歎, 歸事不敢, 遽然呈告, 至今留滯, 極爲愁悶. 抄啓兩姪, 近或有課試奔走之日, 而但見其無益之事, 只爲喫辛苦之資, 洛姪經過, 尤難堪可悶, 尙州祠宇, 已至奉安甚幸. 別廟之役, 渠輩亦樂聞尤幸, 而生財無路, 實非容易, 但爲子孫者, 人人皆有此心, 則從當必成而後已, 不然則香火將闕, 豈非痛泣處耶. 先考文字, 初欲求之道內, 而至今未果, 誠是不敏之罪, 無已則亦欲乞諸
樊翁 海左兩老手, 而樊翁無㞃可乘, 海左明春上來, 可以面托耶. 書堂之役, 尙未蓋瓦, 吾家事, 每每有始無終, 所謂義租, 想必有如此之慮, 此雖細瑣之物, 前頭將爲緊切之用, 由是細瑣, 而後復爲添助, 則安知後日不終止於細瑣耶. 須使年少輩, 加意收刷如何.
사촌형 素巖 金鎭東에게 답장으로 보내는 편지이다. 하인이 와서 보내준 편지를 받고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나는 지금 객지에 나와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음식과 거처가 모두 맞지 않는다. 先考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道內 여러 곳으로 글을 모으고 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樊巖 蔡濟恭(1720~1799)과 海左 丁範朝(1723~1801) 두 분에게 부탁해 두었다는 등의 내용이다.
答素巖從兄庚申
續承下書, 伏審近日有惡寒不寐之症, 必是氣虛之致, 極爲憂慮. 書齋往來, 決非可堪, 須還頓家中, 以俟愼節快復如何. 從弟春間所苦, 轉成暑症, 飮啖專廢, 氣息萎薾, 莫如歸臥調息, 而陳疏, 則不敢待遞, 則無期, 姑觀病勢, 當冒死求遞, 而私義亦有難安, 姑此鄭重奈何. 一月五六日, 入直書筵, 而睿學漸有將就之喜, 文義問難, 有非老宿之所可及, 自顧謏聞, 未足以仰裨萬一, 而舞蹈之誠, 有倍於人, 以是稍忘客苦, 得以耐過, 但恨此時無嶺人可堪者, 得以備員, 頃因文義奏對, 以求之山林讀書之人, 縷縷陳達, 未知果有效應否耶. 興陽已於廾五辭陛, 七日當上官, 而對渠說盡, 居官報效之道, 想必無慮也. 板輿之奉, 日氣不至甚熱, 須卽治發如何. 嶺外寒雋, 蒙此恩渥, 榮感益深, 而戒懼尤切.
보내준 편지를 받고 근래 추운 날씨에 건강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빨리 집에 가서 몸조리를 함이 어떠하겠느냐? 나도 건강이 좋지 않아 사직서를 올렸는데 허락이 나지 않았으며, 1월에는 世子侍講院 弼善으로 임명되었다는 등의 내용으로 1800년(정조 24)에 보낸 편지이다.
答益兒甲寅
隸還見書, 知近況連安可慰. 做工能免浪遊可幸, 而觀其所作, 似不免藉於同接, 若爾則無長進之勢, 必焦思勤做爲望. 吾近日別無痛處, 而終日聽理, 夜輒叫苦, 猶不至委臥, 何必遠慮也. 官用逐月負逋, 萬無秋前收刷之道, 官事不可知, 甚可念也. 此時汝書中, 有買土之言, 還可笑也. 居官者, 先爲家計, 已非好消息, 況無着手處乎. 此後則勿爲此等事可也. 聞朝夕乞米於隣家云, 何不前期措置, 以爲繼糧之道耶.
장남 熙益에게 1794년(정조 18)에 보낸 것이다. 하인이 돌아와서 편지를 보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네가 토지를 구입했다니 가소로운 일이다. 앞으로는 그런 일 하지 마라는 등의 내용이다.
寄益復兩兒丁巳
回便得見來書, 爲況連安慰喜. 吾八日到衙, 新到之初, 自多勞碌, 而所苦漸次向歇可幸. 此地水土, 近峽甚佳, 民俗巧悍, 而尙能知畏官長, 簿帖則一日所呈, 多不過數百, 自可隨意調息, 而江山之勝, 樓觀之樂, 儘是東方第一, 時時登賞, 足以暢敍, 但無可意人同賞爲恨耳.
장남 熙益과 차남 熙復에게 1797년(정조 21)에 보낸 것이다. 인편이 돌아와 보내준 편지를 보았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나는 이곳[호남관찰사]에 부임한 이후 처음에는 고생하였으나 점차로 상황이 좋아지니 다행이다. 이곳의 경치가 무척 뛰어나 때때로 감상하지만 같이 즐길 사람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寄兩兒丁巳
月餘不得音, 紆鬱難堪, 未知寓況連安, 乾井尙安保耶. 炎節湫屋, 雖是難耐, 旣未經疫, 則烏能免此等苦狀也. 雖非未疫, 蝸屋惡食, 自是士子本分, 何足爲苦也. 吾亦年前挈寓者屢矣, 而寓中經過, 還勝於在家苦楚矣. 今汝輩, 則必不食全麥, 亦不絶魚味, 而猶以爲苦耶. 必須絶去此念, 堅坐讀書, 勿爲浪遊, 亦勿頻通本村, 十分愼攝, 母貽遠慮爲可. 向日完伯, 朝除夕遞, 遞改之恩, 還重於除拜, 感祝無已. 又有追恩之例, 尤爲感泣, 所可恨者, 不爲仍任, 則可以歸臥故山, 而未免蹲坐世間, 事不如意者, 果如是耶.
장남 熙益과 차남 熙復에게 보낸 것이다. 한 달 넘어 소식을 받지 못해 매우 우울하다. 시간 낭비는 하지 않고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느냐는 등의 내용으로 발신 연도는 1797년(정조 21)이다.
寄復兒甲子
彦奴歸後, 金君見到, 雖是後書前信, 猶可慰也, 但聞汝病終未快袪, 有瘦黃之態, 是爲憂慮, 未知服藥後,或有效應耶. 持平之病, 亦得臍灸效應耶. 種種慮念. 吾近日連事委苦, 元氣積敗, 不能抵敵, 以致轉轉沈痼, 男飯澗水, 未必非害, 故方謀從近, 還歸村舍, 而居處經過之道, 則不如在此, 是可悶也. 汝兄之歷事干請, 無益於事, 只受疲惱之名, 士大夫, 豈可爲此耶. 汝輩學識未到, 有此妄想, 極爲浩歎. 只當謹守家法, 安坐聽天而已, 何必無端勞費耶. 第俟之可也.
차남 熙復에게 보낸 것이다. 너의 병이 완쾌되지 않았다니 매우 걱정이다. 약을 복용한 후에 효험이 있느냐? 나는 요즈음 몸이 굉장히 좋지 않다. 너의 형이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다. 그렇지만 편안히 운명에 맡길 뿐이라는 내용으로 配所인 강원도 歙谷縣에서 1804년(순조 4)에 보냈다
와은선생문집권지삼
疏
辭副校理疏庚戌
伏以皇天眷佑我東方, 元良誕降, 名號己定, 賀儀載擧, 由是而國本丕建, 由是而邦籙永昌, 臣民蹈抃, 曷有其極. 伏念臣窮鄕一措大耳. 終身肄習, 不外功令之業, 平居行誼, 素無矜式之實, 生儒賢輩出之鄕, 聞先輩緖餘之論, 未嘗不欿然內忸, 惕然自懼, 惟以不求沽衒, 免欺當世, 爲一分自盡之方, 自補蔭路, 甘爲祿仕, 隨分供職, 棲遲數年, 不意一朝, 倖第策名淸時, 爰自釋褐之初, 偏蒙肉骨之恩, 臣由是感激, 惟知@蹶之爲義, 白衣踰嶺, 鄕風之所擯也, 而有命卽趨墨批, 登臺公義之當引也, 而有除則膺, 兼値崇岡之盛禮, 爲伸窮谷之餘哀, 不遑言私, 含默以退歸, 對鄕黨宗族, 歷敍前後恩數, 聚首感泣而已. 迺於千萬夢寐之外, 伏奉前月十三日所下有旨, 特授臣以弘文館副校理, 使之乘馹上來, 重以筵敎鄭重, 寵渥隆深, 臣驚惶震惕, 五內失守, 左右思量, 罔知攸措. 雖犯逋傲之罪, 實無冒進之路, 方謀投章縣道, 仰冀鐫免, 迺者邦慶無疆, 跛躃竝起, 臣於是
趣裝登道, 拚簾肅命, 仍齒起居之班, 得遂攢賀之誠, 於是乎臣之義分粗伸, 而臣之廉防則壞矣. 俯首慙恧, 將何置身. 臣竊惟玉署之職, 所以資論思, 備顧聞耳. 雖以臣耳目所逮言之, 昔在嶺南名賢巨儒, 其學問文章, 足以出入經幄, 啓沃君心, 猶莫不逡巡退縮, 若不堪承, 如臣之萬不近似者, 其何敢晏然冒膺, 以玷名器, 而辱聖簡哉. 行將復尋鄕路, 玆敢略陳短章, 仰暴微懇, 伏乞聖明, 特垂鑑諒, 亟收批旨, 卽削臣職, 以重公器, 以安微分焉. 臣以遐土賤蹤, 方乞免之不暇, 何敢贅及他說, 而第於目下一事, 有不容終默者, 敢此附陳, 惟聖上裁察焉. 臣竊念遇喜而赦, 所以同慶, 況今天人同和, 霈澤旁流, 臣亦欽頌之不己, 而至若罪關宗社, 名登逆案者, 不分輕重, 一切疏放, 又從以嚴立禁令, 使有司不敢爭, 臺閣不敢言, 隄防潰決, 義理晦塞, 臣竊不勝憂慨之至, 伏願殿下, 更加三思, 亟寢成命, 許令廟堂, 審理擧行, 使處分得中, 聖德無累, 不勝幸甚. 臣無任兢蹙祈懇之至. 答曰, 省疏具悉, 尾陳事, 不必然矣, 爾其勿辭察職.
1790년(정조 14) 6월 13일에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겠다고 올린 사직소이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시어 王世子가 태어났으며 나라의 기틀도 잡혔습니다. 저는 궁벽한 시골의 하찮은 서생입니다. 저를 특별히 부교리에 임명하셨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홍문관의 직책이란 학문이 뛰어난 사람도 감히 감당하지 못할 직책인데 저처럼 못난 사람이 어찌 그런 자리에 들어가겠습니까? 거듭 숙고하시어 내리신 명령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란다는 등의 내용이다
玉堂聯名箚子
伏以臣等俄者請對之擧, 豈得已哉. 目見無前之變怪事, 而骨顫心掉, 不敢晷刻緩聲, 乞借方寸, 仰請處分, 卽是秉彝之不容已, 殿下亦應俯燭, 而承宣, 則經賜遞改, 臺臣則重加退斥, 以殿下之聖明, 何爲而有此過中之擧也. 嘻嘻痛矣. 載籍以來, 豈有如鄭妻之窮凶極逆, 而尙此假息, 未伸王章, 又豈有如今日者哉. 三司之論, 至今幾年, 忍與國賊共戴一天, 莫非臣等不忠無狀之罪, 而至於今日擅行之擧, 實出於千萬夢寐之外, 今者此擧, 孰使之然也. 以殿下卓越高明之見, 決知此擧之千萬不當於理, 而今 又無難而行之, 不審何爲而有是擧也. 惟其亂本之依舊自在, 故以致處分之無限過中, 王章之無限陵夷, 輿憤之無限弸激, 聽聞之無限駭惑, 誠使識者觀之, 以今日朝廷, 看作何許世界也. 請對之批, 諭大臣, 則曰特從本意, 諭諸臣則曰事已妥貼, 臣等未敢知特從者何意, 妥貼者何事, 乃若諸臣之意, 皆不出於亟誅亂逆, 永絶禍本, 而聖敎中, 曰特從, 曰妥貼者, 其果在是耶. 爲今日臣子者, 沫血碎首, 得請乃已者, 卽是請對之本意, 而號籲路阻, 略先陳箚, 伏乞亟寢承宣臺臣遞差之命, 仍卽賜對, 俾伸諸臣驚惶 抑塞之忱, 取進止. (夜入啓下箚本于政院洗草. )
思悼世子의 동생인 鄭妻[和緩翁主]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임금인 正祖와 신하들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臺臣들이 처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강력히 나오자 정조는 그들을 교체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러한 때에 홍문관 관료들은 정조의 조치가 지나치다고 판단하여 교체 명령을 철회하라고 올린 箚子이다. 연대는 1790년(정조 14)이다
玉堂聯名疏
伏以皇穹默佑, 元嗣誕降, 百日纔過, 而岐嶷漸就, 時月彌久, 而歡抃愈切, 繼以仙寢祗告, 鑾蹕穩旋, 臣等區區之忱, 尤不勝慶幸之至. 仍伏念, 臣等向隨詣臺諸臣之後, 聯參於三司合辭, 而伊時臺臣, 未承批旨, 旋卽遞改, 臣等旣皆同參, 則其爲未承批一也. 噫, 合啓事體, 至爲嚴重, 而側聽屢日, 未有發落臣等抑鬱之忱, 姑且勿論, 揆以情地, 實無蹲冒之勢, 惟宜卽日引入, 不敢以官職自居, 而只緣連値承候之班, 且當動駕之時, 他不暇顧, 冒沒行公, 而內自循省, 若負大何, 今若諉以爲日已久, 因仍盤礴, 則壞損廉防, 無復餘地, 一國公共之義, 抑恐由臣等益晦矣. 玆敢聯陳短章, 仰請嚴譴, 伏乞聖慈俯垂諒察, 亟削臣等之職, 以存啓體, 以勵臣分焉.
王世子가 태어난 지 100일 지났으니 나라의 경사이다. 일전에 三司(司憲府‧司諫院‧弘文館)에서 합동으로 상소를 하여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교체하라는 명을 내렸다. 우리 홍문관 신하도 같이 참여하였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다. 우리 홍문관 신하들의 직책도 없애주기를 바란다면서 올린 연명 상소로, 연대는 1790년(정조 14)이다
辭獻納疏辛亥
伏以臣以地則疏逖之甚, 以人則駑下之極, 猥蒙謬恩, 備員經幄, 靦面隨行, 于今二年, 涓埃莫報, 醜拙隨露, 向日臺言, 果是着題, 幸蒙恩罷, 退伏故山, 祗自惶恧而己. 不意今月初三日, 伏奉前月十八日所下有旨, 以臣爲司諫院獻納, 使之乘馹上來, 獻替之任, 不輕而重, 如臣愚陋, 又何以得此. 恩出分外, 榮動鄕曲, 承命懍蹙, 不知攸措. 顧臣此身, 非臣所有, 旣不敢以冒進爲嫌, 惟自以竭蹶爲義, 有除輒膺, 聞命卽趨, 況今承諭差晩, 期日甚迫, 固宜促裝趨程, 恭埃嚴命, 見又此歲垂罄, 新正不遠, 尤宜趨趁賀班, 少伸微分, 而第臣稟質, 本自虛脃, 筋力早已衰竭, 尋常起居, 亦不猶人, 迺者數千里行役, 旣緣忙急, 屢經危險, 雖僅生, 還實難支吾, 重以素痼痰癖之症, 挾寒闖肆, 委頓床第, 殆已旬月, 以此病情, 無望自力, 惟是感激恩私, 怵畏義分, 扶曳登道, 纔到嶺底, 而風寒所觸, 感冒潻㞃, 雖欲强以寸進, 其勢末由, 伏枕惶懍, 無以爲心. 今臣旣不得趁限膺命, 則亦不敢遲廻隱默, 自阻於天地父母之前, 敢將疾痛之號, 仰瀆崇嚴之聽, 伏乞聖慈, 特加鑑諒, 亟遞臣新除之職, 仍治臣逋慢之罪, 千萬幸甚. 臣於丐免之餘, 敢以目下民憂, 略陳愚見, 伏惟聖明, 垂察焉. 今年潦水之災, 挽近所無, 八路之中, 三南尤甚, 三南之中, 嶺南尤甚, 野邑沿江之處, 或滙而浸, 峽郡濱水之地, 或潰而沙, 田疇墊沒, 閭閻漂溺, 自安東奉化, 至榮 順 龍 醴之間, 太半是大川之潰而沙者也, 自 尙州 善山, 至仁 漆 金海之上, 太半是大江之滙而浸者也. 風沙極目, 滿野無靑, 雖是素饒之家, 無以自活, 哀此煢獨之民, 其何能穀. 冬序未盡, 已多轉徒之苦, 及至春來, 難免餓殍之憂, 此實臣愚耳目之所逮者, 而民情魚喁, 氣像慘目, 臣未知廟堂之上, 有何籌畫, 可以爲明春賑濟之資耶. 然今年被災, 異於他年, 水害之有淺深, 而農形不一, 一道之中, 南北或殊, 一邑之中, 彼此差間, 至於一坊一里, 隨處不同, 間或有彼勝於此, 則稱以稍優, 優者亦非常年之優, 而譬諸偏甚之處, 猶可謂之差優, 故分以爲稍實之次, 尤甚三等, 凡諸擧行, 易致虛實之相蒙, 勢固然也. 今以糶糴一事而言之, 頃者分等停退之令, 實出於我聖上恤窮之至意, 而列邑奉行之際, 邑非尤甚, 則里雖尤甚, 未蒙實惠, 刮毛於龜背, 生水於槁木, 吏胥叫呼, 閭里騷擾, 無告之民, 豈不可哀耶. 先民有言, 催科無擾, 是催科中撫字, 今年催科, 正宜無擾, 臣則以爲及此糴政未畢之前, 被災尤甚之處, 一竝停退, 明春賑濟之策, 預先講究, 斷不可己也. 抑臣因此而思之, 近來民生之困瘁日甚, 戶口之減縮歲異者, 專由於糶糴之弊也. 夫國無三年之蓄, 不得以爲國, 還穀亦蓄儲耳, 窮春播種之資, 儉歲賙賑之具, 不可謂無利於民, 而但其前期與民, 及時徵責, 不免馭以刑獄, 驅以督迫, 宋臣蘇轍所謂錢入民手, 雖良民不免費用, 及其還納, 雖富民不免, 違限鞭笞, 必用州縣多事者, 不獨爲當時之憂, 而政是今日糶糴之謂也. 況其豆太米租, 名色無數, 營閫州鎭, 節制多門有缺, 與高捧之弊, 有那移換賣之弊, 有貧民流亡代徵隣族之弊, 有吏緣爲奸@受橫侵之弊, 種種弊端, 不一而足, 此弊 不袪, 則其所以利民者, 適足爲病民之資耳. 以故貧窮之民, 畏糴如虎, 必欲巧避戶籍, 苟免受糶, 每値式籍, 十室九空, 其罪固可責, 而其情則甚可矜, 臣則以爲今之還糴, 雖難盡爲變通, 亦宜稍加均平, 穀多民小, 則減其穀, 民多穀小, 則增其穀, 萬戶之邑, 約留六七萬斛, 千戶之邑, 約留六七千斛, 大則一戶歲給三四斛, 小則一戶歲給二三斛, 嚴立科條, 折半留儲, 以備不虞之費, 至如耗穀, 母論元會別會, 一切定式, 作錢代納, 計戶量穀, 逐歲爲常, 俾無升斗加減之弊, 則民知受食之定數, 吏絶幻弄之奸竇, 而民間切己之瘼, 可以少除矣. 伏願將臣所陳, 出付廟堂, 商確而裁處焉. 臣又有所懷, 敢復尾陳焉. 凡係辭職之例, 或以廉防, 或以疾病, 皆不得已者也. 有章必達, 乃所以使之自盡其情, 而近則不然, 除非言事, 不許捧進, 故輒以四無模稜者一二段, 依樣安排, 黽勉添附, 而後纔免退却, 下之所以事上者, 太欠誠實, 上之所以待下者, 亦近迫隘, 其在通下情, 開言路之道, 決不宜因循如此, 此後章牘, 無論緊慢, 幷令無滯, 此亦臣區區之望也. 臣無任兢惶屛營祈懇之至. 答曰省疏具悉, 停還事, 曾下朝令, 不啻申複, 則爾言如此, 此道伯守令之罪也. 守令之不勤, 莫能察飭, 尤豈非罪上添罪之端乎. 大抵停與代捧, 自秋間十行諄複, 眷眷於備豫之政, 而頒令緩期, 民間未知有多少容奸之弊, 一則道伯之不職, 二則道伯之辜負, 然歲飜不遠, 開倉在卽, 到今停糴二字, 非可論均穀事, 何待爾言. 已勤屢飭矣. 三司辭職, 非言事, 勿捧事, 雖似近例, 自有先朝定式受敎, 今不可容議.
저는 먼 시골 출생이고 재주도 없습니다. 우둔한 제가 어찌 이런 직책을 감당하겠습니까? 황송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질병이 있어 항상 병석에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저의 이러한 사정을 헤아려 저에게 내리신 직책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등의 내용이다. 司諫院 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겠다고 올린 사직소로 연대는 1791년(정조 15)이다
請捧入儒疏疏壬子以前, 銜呈疏
伏以義理日晦, 亂逆層生, 亘古今所未有之凶賊, 如 九宗 星漢, 接跡而起, 公肆悖口, 敢逞凶肚, 是豈今日臣子之所忍言所忍聞者哉. 臣跧伏鄕廬, 晩始聞知, 不勝忠憤, 約與搢紳章甫, 相率踰嶺, 瀝血呼籲, 冀徹天聽, 治疏將上, 則太學多般推諉, 不許謹悉, 喉院以無太學謹悉, 無意奉入, 蓋以嶺中儒紳, 一疏聯參, 而以章甫爲疏首故也. 噫, 主辱臣死, 秉彝所同, 而臣等此疏, 到處見阻, 今日義理之晦塞, 胡至此極. 臣目見多士之徊徨, 抑鬱憂憤之至, 敢控短章, 仰暴微悃, 伏乞聖明俯察輿情, 亟命捧入, 仍治臣瀆擾之罪, 千萬幸甚. 答曰省疏具悉, 仍命捧入儒疏.
柳星漢 등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영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문은 통로가 막히어 임금님께 들어가지 않았다. 영남 유생들의 상소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辭修撰疏五月陳疏徑出
伏以臣嶺人也. 目見義理之日晦, 亂逆之層生, 彝天所同, 忠憤弸激, 竊附一道士論之後, 敢暴積年鬱結之忱, 而半夜筵前, 辭敎惻怛, 再承批下, 旨意鄭重, 方與嶺外多士, 徊徨旅次, 相對掩抑, 不意玉署新命遽下, 此際庚牌嚴臨, 催召甚急, 更鼓轉深, 情私莫徹, 章皇出肅, 趨進陪班, 瞻望耿光, 粗伸義分, 而第臣區區情勢, 終有所按仰不得者, 蓋臣自鄕上來之日, 亦承除命, 而含默而待, 必自托於章甫之疏者, 欲以士論爲重, 而不欲以官職自居也. 嶺中人士, 雖甚輕淺, 所秉者, 百世之大義理, 所言者, 一國之大義理, 章甫首發, 而搢紳聯參, 則臣亦疏中一人, 義理未伸之前, 何敢晏然以官職承膺乎. 且伏念, 千里踰嶺, 相率而來, 瀝盡腔血, 未蒙允兪, 而疏儒未及退還, 臣獨供職如常, 不但道理之所不然, 抑亦分義之所不敢, 百爾思量, 無路仍冒, 玆敢冒入文字, 徑出禁扃, 伏乞聖慈俯垂鑑諒, 亟賜刊改, 仍治臣瀆擾擅離之罪, 以安微分, 以肅朝綱, 千萬幸甚. 臣無任懍蹙屛營之至. 命還給疏本.
53세 때인 1792년(정조 16)에 弘文館 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겠다고 올린 사직소이다. 영남 유생들이 올린 상소가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나 혼자만 관직에 있음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임금께서는 저의 입장을 잘 살피고, 저에게 죄를 내려주시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辭副應敎疏
伏以李柱國之罪, 可勝誅哉. 渠之得保今日, 是誰之賜也. 苟非梟腸狼肚, 宜卽革心改圖, 而忘恩負國, 乃至此極, 日前島配之典, 何其太恕, 而太輕也. 噫噫, 直領一事, 於渠猶屬細故耳. 夫以先朝之飭敎, 旣甚嚴截, 向日之批旨, 又極申明, 則爲今日大小武弁, 孰敢違越, 而渠獨何心, 乃敢肆發悖口, 力主橫議, 必欲使朝家法紀格而不行, 其蔑法背國之罪, 已在罔赦之科, 而伏況己酉秋大禮, 是何等至重而至大, 至尊而至敬, 則凡我八域臣民, 莫不拚號奔走, 思欲效力於畚鍤之間, 而渠獨何心, 反肆悖慢之心, 全沒殫竭之誠. 本營擧行, 率多慢忽, 舟橋船隻, 又不整待, 以渠所處, 有此所犯, 是豈有一分臣節者之所可敢乎. 前後曲保之洪造, 戒飭之溫諭, 寔出於我聖上化龍蛇孚豚魚之盛德至意, 而驕蹇之習, 在在益肆凶慝之情, 節節盡露, 以此負犯, 而一向寬假, 則豈不爲刑政之大失乎. 伏願殿下, 特加三思, 亟寢李柱國島配之命, 爲先施以洊棘之典, 以嚴邦憲焉. 於乎, 亂逆之層生, 未有如近日之甚, 而刑政之乖當, 亦未有如近日之甚, 九宗之劇逆, 而孥戮未施, 星漢 之凶賊, 而天誅尙稽, 三司之請, 一味靳持, 神人之憤, 無日可洩, 而終使凶醜之徒, 無所懲畏, 懲討之不嚴, 固是群下之罪, 而刑政之不擧, 實非有國之細憂, 以殿下之聖明, 何不念及於此也. 臣不勝區區憂歎之至. 仍竊伏念, 臣猥以庸愚, 偏蒙誤恩, 釋褐四年, 驟躋淸班, 迺者東壁陞拜, 尤是分外, 撫躬惶蹙, 實難叨冒, 而惟是感激恩私, 黽勉承膺, 已至數朔矣. 臣於是, 只合趨走班行, 粗效涓涘之報, 豈敢更事逡巡, 自占退伏之計, 而第臣素有狗馬之疾, 輒發於寒暑之交, 半歲旅邸, 一倍添㞃, 眞元澌敗, 神氣萎薾, 苟不趁今舁還, 隨分調息, 則恐將轉成膏肓, 無以蘇醒, 已是臣區區悶切之私, 而近接鄕信, 尤有私情之所不能按住者. 夏秋以來, 風水爲災, 臣之先壠, 莎土壞損, 楸檟摧拔, 神理之驚動, 已不勝痛泣, 而屬此省掃修治之節, 臣無他兄弟, 可以替行, 其爲悶迫悲愴之情, 又不但尋常霜露之感而已. 臣之歸計, 到此益切, 伏乞聖明, 俯賜憐察, 遞臣職名, 許臣省掃, 仍治臣瀆撓之罪, 以肅朝綱, 以安微分, 不勝幸甚. 臣無任兢蹙新懇之至. (政院不捧入退送. )
국법을 무시하고 임금의 은혜를 저버린 李柱國의 처벌이 너무 가볍다. 사도세자를 무함한 柳星漢과 景宗을 능멸한 尹九宗에게는 빨리 벌을 내려야 한다. 臣은 평소 고질병이 있어 중책을 감당하지 못한다. 신에게 내려준 弘文館 副應敎라는 직책을 거두어 주기를 바란다고 올린 사직소이다. 53세 때인 1792년(정조 16) 6월에 올렸으나 승정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同副承旨時論嶺査疏
伏以臣以畎畝之賤, 歷敡淸顯, 驟躋緋玉, 豈殿下則哲之明, 以臣爲有可取也. 特以臣嶺人也, 姑且優待臣, 以慰嶺中之望耳. 臣幸會承受, 因仍蹲冒, 以爲一己之私榮, 而反於嶺中人三十年明目張膽之大義理, 目見其隳亂, 而晦塞, 乃畏威戀榮, 囁嚅而不敢言, 則臣心之慙負姑舍, 是林嘲澗誚, 群起而交讁之, 永貽隴西之恥, 臣又安得不言乎. 臣於頃日筵退之後, 取見嶺査啓本, 則其所査勘, 大乖情實, 只以申旺 李時白等分作首, 從罪魁寵, 仍卽白放臣, 於是始而駭惋, 繼而噫吁也. 彼寵輩, 特鄕曲醜類耳. 不料其氣欿聲威, 乃能自脫於成命按査之下也. 寵之爲寵, 纔二世耳, 陰投勢利之窟, 煽壞仁里之俗, 翕張機括, 嫁禍挑亂, 其於善類, 若苖之有莠, 粟之有秕, 小大戰戰, 罔不懼于非辜, 厥惟舊矣. 戊申冬之拒逆恩敎者寵也, 己酉秋之搆陷疏儒者寵也, 其勵角磨牙, 左攖右噬, 雖嶺之婦孺, 擧知之, 逮夫今夏十行批旨, 及前後下敎, 字字哀痛, 節節森嚴, 嶺中之垂黃頒白, 莫不扶杖聳聽, 而獨寵與厥醜黨, 公肆狼懟, 潛設綢繆, 密伺宣布之日, 顯縱無賴之輩, 登樓伐鼓, 無 (劫)異接戰, 破鎖蹴@, 有若@盜, 直驅義理邊人, 反猲逆賊之目, 是又寵前後肆毒之所不能辦也. 渠雖隱身匿影, 如鬼如蜮, 證左昭列, 臟跡盡露, 一番査問, 焉敢逃也. 西澗院任, 及於賤流, 京洛逃身, 自詑周旋, 凶札之見執, 校僕之約束, 無非渠斷案, 而發縱指, 使之窩主, 待以高士, 䝱從趣利之殘孼, 偏被刑配, 査庭此擧, 其於奉朝, 令施私德, 均無當矣. 蓋自近年以來, 官人之摧沮士林, 若有私憾, 咸昌之事, 至今悸慄, 醴泉之人, 擧懷蕩柝, 每一番恩數, 增一倍摧抑, 故一鄕之人, 無不脅息重足, 未有安居樂生之念矣. 今於寵事, 又如是曲護全釋, 使一方人士, 不敢自是其秉執者, 抑何故也. 寵黨固可畏也. 獨不念義理之至嚴, 聖敎之至重, 而朝令之終不可不遵, 亂逆之終不可不懲也哉. 歲値饑荒, 固不可別遣按覈, 而亟令攸司逮致罪魁, 嚴査得情, 以絶梗化之本, 斷不可已, 苟聖明不於是嚴處, 則臣不敢束帶周行, 坐竊天祿, 宜亟削臣職, 使臣歸與鄕黨父老杜門自靖, 益講義理之奧, 永斷榮道之望, 不勝大願. 臣無任蹜踧祈懇之至. (疏入, 留中半日, 仍命從當下批, 留置啓版, 初三日入侍時, 命賤臣書傳敎, 退出命還給原疏. )
벌을 주어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총애하고 있으니 영남 사림들이 울분에 차 있다. 臣도 國祿을 먹는 자리에 있고 싶지 않으니 신의 직책을 없애주기를 바란다는 등의 내용이다. 承政院 同副承旨로 있을 때인 1792년(정조 16)에 올렸다
同副承旨時未徹疏十月初五日, 院僚以大臣事陳疏, 余則方搆獨疏, 未及呈, 以他疏捧入事遞改.
伏以尹永僖之罪, 大臣已言之, 卿宰已言之, 三司諸臣, 擧皆言之, 不待臣之一言, 而已爲說破無餘矣. 蓋其科場之事, 顯有營護之迹, 則諸臣之齊聲懲討, 實出於共憤之意, 以殿下翕受之聖度, 政宜亟允其請, 以嚴隄防, 而乃反沮抑之, 有若設禁者然, 輿憤之愈往而愈鬱, 勢固然矣. 伏願聖明, 亟治尹永僖之罪, 以從諸臣之請焉. 抑臣有區區之所懷, 敢此尾陳. 向日大臣之因李恒林之事, 提及尹永僖名姓者, 是豈有心於營護哉. 直是偶說到此, 而今日諸臣之所以仰奏者, 何其抑勒之過甚也. 方論永僖之罪, 而先攻大臣之失, 無心之奏, 而歸之有心, 偶發之端, 而臆以曲護, 衆咻紛紜, 雖欲爲一言自明, 而有不可得, 爲今日大臣亦難矣. 噫, 次對之進定, 實出於我聖上調和之聖德至意, 而畢竟轉成一番鬧端, 必欲使孤寄一老, 不得安於朝廷而後已, 寅協之風, 固無望矣. 朝象之潰裂, 將何以定鎭也. 臣於是, 竊不勝慨然, 而長吁也. 臣於院僚之啓, 有難苟同, 敢控短章, 仰暴愚忱, 伏願聖慈, 治臣瀆撓之罪, 亟削臣職, 以安微分, 不勝幸甚.
과거시험 부정의 元兇인 尹永僖를 모든 원로대신과 三司에서 벌을 내리고자 한다.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옹호하고 있는가?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承政院 同副承旨로 있을 때인 1792년(정조 16)에 올렸다
同副承旨時論尹永僖白放疏
伏以臣伏見金吾供辭判府下者, 有罪人尹永僖 白放之命, 竊不勝區區憂歎之至也. 噫噫痛矣, 亂逆之層生, 豈有如近年之甚者哉. 義理益晦, 而彝紀日斁, 凶醜接踵, 陰邪肆行, 暗護逆宗, 角勝國論, 罔念上逼之嫌, 闖呈絶悖之疏, 則驥顯窮凶之罪, 夫孰不明目張膽, 以明懲討之不暇, 而惟彼永僖者, 乃反爲陰護之計, 實是輿情之所共憤惋, 王章之所難容貸也. 今玆拿覈之擧, 雖乖嚴鞠之典, 而得因此會, 究覈其情節, 打破其窩窟, 實爲群下之所顒俟耳, 豈料一番平問, 旋卽放釋, 有若尋常輕囚之例問, 而例勘哉. 雖以渠之所供而觀之, 憤嫉之意小, 而懲討之辭緩, 發明之說窘, 而疑晦之跡綻, 此而卽放, 則竊恐亂逆無所懲畏, 有罪得以幸逭, 固非細憂也. 以殿下之聖明, 何不念及於此耶. 竊伏念, 我殿下, 德懋好生, 仁體乾元, 每於治逆之時, 兼施竝育之恩, 至於負犯之至大, 關係之至重, 亦不免從輕勘處, 其爲刑政之失當, 已無可言, 而亂賊之不戢, 凶孼之滋生, 未必不由於此, 五刑五用之意, 恐不容如是也. 臣職忝邇列, 不勝憂憤, 敢陳短章, 略控愚忱, 伏乞聖明, 亟加三思, 特寢永僖白放之命, 仍令王府, 嚴覈得情, 快施當律, 千萬幸甚. 臣於僚員之章, 未及隨參, 更漏已深, 不敢仰徹, 晩後之罪, 實無所逃, 罙切惶恧, 不知所喩, 臣無任激切屛營之至. 答曰省疏具悉, 一問卽釋, 猶嫌其不嚴於公法待, 再問無一分可疑, 然後乃有白放之命焉, 雖重於此之囚案, 若脫空必白放, 況自前疑之之事乎. 身佩安危之大臣, 忽於杜漸息紛, 而語到尹永僖, 輒未免有彼此激成之端, 此所以爲世道, 爲自家, 有向來處分, 至於爾等職在惟允, 但當知面前事理之可否, 而已起疑而更問, 更問而解疑, 解疑之後, 白放, 卽次第件當 然底事理爾, 焉敢妄論刑政乃爾. 況永僖事, 不問之前, 先有禁令, 到今尤宜遵守, 則越格之罪, 特以鄕人之故, 姑爲分揀.
과거시험 부정의 원흉인 尹永僖를 죄가 없다고 인정하여 석방시켰다. 아아 원통하다. 모든 사람들이 울분에 차 있다. 앞으로 亂逆이 일어날까 걱정이 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1792년(정조 16)에 올렸다
同副承旨時論尹永僖白放疏
同副承旨時徑出疏(癸丑, 左相金鍾秀入侍, 論斥捧入領相疏之失, 故陳疏. ) 伏以臣卽見僚員疏本, 則以日前領議政上疏捧入事, 大僚筵奏, 論斥甚峻, 若論捧入之失, 則臣實該房也, 臣於昨年是月, 頻登筵席, 親承聖敎, 愚衷掩抑, 感淚縱橫, 歸與鄕黨父老, 交相曉諭, 交相勸勉, 區區衷赤, 不後於人, 而緣臣愚憃, 致此罪戾, 聲討之至, 臣固自取, 以臣情蹤, 何敢晏然於官次乎. 玆敢略陳短章, 徑出禁扃, 伏乞聖慈, 俯垂鑑諒, 特遞臣職, 仍治臣罪負, 以肅朝綱, 以安微分, 千萬幸甚. 臣無任惶蹙震越祈懇之至. (命封給疏本, 催促入直, 後有筵敎, 在筵說中. )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金鍾秀가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에 영남 유림들이 올린 영남만인소와 영의정 蔡濟恭이 올린 상소문을 싸잡아 트집을 잡았다. 당시 동부승지로 재직 중에 있으면서 분개하여 올린 상소이다. 임금의 비답도 듣지 않고 곧장 궐 밖으로 나갔다. 1793년(정조 17) 5월의 일이다
辭大司諫疏丙辰
伏以臣今所叨, 卽古諫大夫之職, 將以規諫人主之闕失, 而裨其德化者, 顧其職不已重乎. 故先輩尙論之言, 常謂是職, 在古唯孔光周擧其人, 餘皆苟耳蓋非直諒忠謇之士, 顧不足以口犯顔, 而卒莫能弘贊政敎, 故爲難其人也. 今臣嶺外遐踪, 學素鹵莽, 性仍 疏鄙, 盡其所有而數之, 將無一可取, 特以蒙被不世之恩遇, 歷敡至此, 人雖榮之, 臣何堪哉. 臣之職分, 惟有退處田隴, 爲鄕黨士友, 宣布朝廷德意, 講明前賢義理, 竊庶幾少酬恩澤之萬一, 今玆諫大夫之職, 奚宜而至哉. 夫非其堪而據之, 臣固有愧, 亦非其堪而授之, 羞在淸朝, 伏願殿下, 特賜鑑諒, 亟收成命, 改選宿德, 圖所以新一世之耳目, 則臣之幸也. 臣方辭職職之所, 司臣不敢知, 第念古者@御有箴, 旅賁有戒, 百工執藝, 事以諫官, 罔非諫官, 臣罔非諫臣, 卽臣獨安得不言哉. 臣請先言殿下之所已行, 而次及其所未遑, 冀殿下擴充, 而推廣之. 昔齊 宣王, 以羊易牛, 本非異事, 然孟子爲是根於不忍人之心, 而欲擴而充之, 謂可以遂王天下, 蓋以其端雖微, 其推用甚廣也. 今我殿下, 盛德大業, 史不勝書, 試擧其一二, 雖堯 舜 湯 文之聖, 不可尙已, 則不獨微見其端而止, 苟擴而推之, 將塞于天地之間, 而王天下, 豈足道哉. 何功化所及, 邈然有遜於熙皞之世, 而卽漢唐少康之治, 亦有時岐及哉. 臣仰覩俯察, 每爲之憤悱愧恥, 而莫省厥咎也. 臣嘗聞, 朝行之間, 人有恒言曰, 吾君堯 舜, 然此殆諂耳. 若其眞正聖德之卓越百王, 人皆不識, 而不知此曷故焉. 書曰爾有嘉謨嘉猷, 則入告爾后于內, 爾乃順之於外, 曰斯謨斯猷, 惟我后之德, 人臣事君之道, 有如是也. 今世之人, 不惟不然, 或反于是, 入則阿謏, 出乃竊議, 而抑其眼力所及, 惟在乎眉睫嚬笑之間, 至若至善盡美, 出自積累淵涵之中者, 亦識趣未到, 故不能眞切體認, 亦不能眞切悅繹, 而所傳說流布者, 率多夸寵賣權之計, 聖德由是而掩翳, 俗尙由是而渝敗, 誠可歎也. 孟子曰宰我 子貢, 知足以知聖人, 夫知聖人, 固未易也, 況臣愚憃鈍滯下流之賤, 曷足以知聖人哉. 幸而生於淹中稷下之間, 得聞先哲人緖餘, 而妄自以爲天地之大, 日月之明, 亦夫婦之所宜知, 故竊於殿下政令做措之間, 或不無諦視其一二, 而深自悅慕, 時不覺手舞, 而足蹈者, 臣所願擴充而推廣之者, 蓋指是也. 先正臣李滉, 嘗於經筵奏曰, 內需司訟事, 快從公論, 慕義殿賞資, 亦許還收, 事盡如此, 堯 舜之治, 亦將不遠, 顧此數事, 在當時亦至微至易, 而先正之言, 直以此, 爲可以駕軼勛華, 夫豈不然, 而先正告之哉. 臣固知殿下之有爲也. 臣嘗於喉院直宿之夜, 見曉鼓纔動, 司鑰來請放鑰, 怪而問之, 人曰聖上每値朔望, 曉參眞殿, 風雨寒暑, 罔或有間, 二十年如一日, 臣於是感激贊歎, 蹶然起坐, 竊不自勝其欣幸之私, 何者. 奉先思孝, 人君之盛節, 而爲仁之大本也. 大本旣立, 百度皆正, 欲識聖人高處, 須於此等處, 認得眞切, 蓋我殿下區區一念, 唯先哲王陟降之靈, 克敬克祗, 聽於無聲, 視於無形, 純誠靡間, 一理交接, 每大廟將事奉薦而進, 其親也慤, 其行也趨, 恍惚彼此, 神明來享, 群臣百工, 濟濟漆漆, 逮乎閟宮之躬祼也, 威容怵惕, 焄蒿悽愴, 出戶周旋, 僾然逌然, 登歌疏緩, 如聞如覿, 涕泗汍瀾, 從官感泣, 五十而慕,臣於見之, 至誠所格, 下及臣隣, 陵園享祀, 諸官百執事, 恐懼奔奏, 罔有弗欽, 常若天顔不違, 咫尺固已盛矣. 臣又聞之, 或於享祀, 遣官攝行, 民曰吾君庶幾寧處, 而乃我殿下整衣齊居, 明燭達曙, 洞洞屬屬, 如在其位, 旣服禮畢, 方纔就寢, 凡此皆足以克享神人, 弘敷大德, 而臣又見之, 寢御之室, 不過數椽, 常膳之食, 不過數品, 以至燕衣䙝裘, 三澣四撋, 輦輿儀仗, 紅渝碧落, 窓紙則補罅而塗墨, 廳茵則編筦而綴蒲, 樸陋粗惡, 多礙觀瞻, 臣嘗以是歸語鄕里, 其長者感服咨歎, 婦孺之愚, 惝怳不信, 蓋遐土厖俗, 每謂君王所居, 必金闕玉樓, 珠簾綉帳, 種種奇麗, 不似人間, 故創聞是說, 駭而失圖也, 此皆殿下躬行儉德, 率勵群工, 將以風動一世者, 而何乃功化所及, 聲聞所被, 一切相反, 人昧禮義之敎, 家乏孝悌之行, 節文都晦, 威儀不攝, 反本追遠之誠, 飭躬蹈仁之操, 世無其人, 汶汶泯泯, 而奢侈之俗, 日滋月盛, 公卿却貂貉而不御, 武夫被文綉而自夸, 閭巷匹庶, 傳相慕效, 擧世靡麗, 禁之不聽, 於是乎遐外傳聞之人, 或疑殿下導率之方, 猶有未盡, 玆誠誤矣. 昔漢文帝, 身衣弋綈, 所幸愼夫人, 衣不曳地, 而庶人墻屋, 被文繡, 賣僮者繡衣絲履, 富人召客, 婢妾皆衣閒中, 此其習俗之染汚, 而不率躬敎, 古亦然矣. 今則訛言不懲, 惑亂滋深, 貪官汚吏之掊克生靈, 以自封殖者, 輒皆藉賣權貴, 連結勢威, 瞬目搖手, 以誑愚俗, 臣每念至此, 痛心疾首, 誠欲大聲, 而號於衆, 令得剖劈奸人之肝腸, 以昭萬目之所共瞻, 而遂得尊聖德於天下後世, 森乎若日星之麗天, 沛乎若江河之布地也, 顧今氛翳廓淸, 權綱總攬, 域中庶務, 咸決於四聰之明, 而無復向來壅閼偏枯之病, 宜其血脈流通, 眞元蘇復, 至化洋溢, 旁達四裔, 而何乃習尙之頹靡者, 收拾無望,風敎之渝敗者, 整頓沒策, 荏苒淟涊, 踰時度月, 臣恐殿下淬勵之志, 久或有懈, 而奮發之氣, 漸不如初, 卒莫能升大猷, 而致太平, 措一世於春臺之上也. 臣未知乾剛之德, 或不能純然一體乎天道之健行, 而振作鼓舞, 所以培養群物者, 或有所未盡耶. 抑在下者承流宣化之功, 多不徯志也, 有君無臣, 夫人之所言也, 第臣庸愚, 竊以爲堯 舜在上, 則皐 夔自至, 殿下若能寤寐思賢, 左右旁求, 則亦豈無俊哲之士, 應期而出, 樂爲時用者乎. 易曰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蓋其一氣相感, 理不可誣也. 昔宋臣文彦博請旌恬退, 而抑躁競, 至今識務之士, 皆以爲潞公 此言, 深得大臣之體, 自古爲國盡節之君子, 多出於難進易退之中, 蓋其輕爵祿, 而重名義, 自有素講于心者, 故及其出, 而爲當世也. 乃能擔負天下之重, 而不以被煖嚙肥, 蔭子封妻, 爲意也. 今通籍金閨者, 崇庳異秩, 不爲不盛, 而未聞有一箇恬雅之士, 能安其素履者, 外若逡巡, 內實貪戀, 東華軟塵, 逐逐汨汨, 患得患失, 五內熬煎, 豢養沈酣, 醉生夢死, 不復知人生斯世, 本有當行之則, 一切愛親敬兄忠君弟長, 日用彝倫之所不可不講者, 輒皆瞢不知爲何樣物事, 幼而不習, 長益浮靡, 世道至此, 良足太息. 詩云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 今民不好德, 是喪其彝也, 寧不悲哉. 以之居官臨民, 率逌是道, 內乏羔羊之操, 外多簠簋之謗, 一經腴籓, 富埒陶猗, 歷典雄府, 豪視金張, 察使而行販賈之術, 牧守而效吏胥之奸, 轉換穀簿, 竊弄文券, 自所謂文武近臣而已, 不免此等題目, 餘子紛紛, 何足道哉. 堂堂聖朝, 學士大夫之所聚會, 卽四方賓旅所仰望, 而慕倣之者也, 及觀其容止, 聽其譚論, 則或側弁而悸帶, 或儇步而跛倚, 評品資級之久近, 較看通擬之多寡, 而某籓之餽, 孰厚孰薄. 某邑之産, 何有何無, 錙銖是爭, 毫釐是析, 寮寀群居, 日孳孳爲此, 而數日待漏, 輒有苦色, 一宵持被, 如避死地, 昔汪信民有言曰, 咬得菜根, 百事可做, 今人旣不耐苦, 做得甚事. 臣嘗聞, 古相臣李元翼, 平居旁室, 不令塗紙, 坐處只安頓蒲團一面, 或問之, 答云欲勿臥也, 古人勞筋苦骨, 自取菲薄如此, 故得乃心王室, 鞠躬盡瘁, 今人能如是乎. 程子曰, 率氣者在志, 養志者在直內, 是其存諸中者, 或不能盡出於正直公平之理, 故其志無所養, 而其氣無以率也, 志不率氣, 顧安得耐苦乎. 洪惟我殿下, 盛德至善, 如彼其隆, 而習尙之漸染, 若是其汚, 臣所謂求其說, 而不得謂殿下擴充之工, 尙有所未至, 殿下試於乙丙之夜, 正襟危坐, 惕然警發, 提撕點綴, 常令本源, 湛然澄澈, 則萬理畢照, 物無遁形, 凡今日救藥之方, 皦然可見也. 於是乎身任師道, 矜彼群蒙, 或下鍼砭, 或投丹餌, 使之革舊圖新, 日遷善而不自知, 則我殿下作人成物之化, 囿一世於魚泳鳥飛之天, 而君臣上下, 共享其利, 豈不誠休哉. 書曰庶頑讒說, 若不在時, 候以明之, 撻以記之, 書庸識哉. 欲竝生哉. 此之謂也. 風俗旣變, 則庶事自康, 法綱之不立, 非所憂也. 然朱子庚申封事, 結之曰, 正君心, 以矯佞邪之習, 立紀綱, 以幸困窮之民, 卽上一節, 臣旣言之矣. 若乃紀綱之不立, 亦宜內自宮掖, 外察諸司, 臣請槪言之. 掖隸恣橫, 飭禁本嚴, 而每守宰新出, 持帖乞錢, 謬例已成, 貽羞實多, 彼雖下賤, 卽亦近習, 近者如此, 遠者可知. 婦女之髢髮, 卑官之乘轎, 列邑之宰殺, 何望其一遵法禁, 恪守而無失乎. 至如閭里富人, 嘉會請客, 綵花金勝, 交映左右, 油湯蜜果, 皆踰丈尺, 糜費日廣, 侈靡相尙, 臣謹按, 光廟元年, 惟客使燕享, 用油蜜果, 餘竝嚴禁, 逮我先朝, 毋論國婚與士婚, 亦禁油蜜果, 而用金銀露布花者, 杖八十, 亦載通編, 此皆列聖盛德, 推之躬儉之餘, 而欲化民成俗者, 不可以微事, 而忽之也. 法者當從易行處行之, 與其創新而益紊之, 曷若因舊而修明之乎. 詩云不愆不忘, 率由舊章, 正謂是也. 臺臣之逐日詣臺, 古法則然, 而一自臺選之不淸, 如臣巽軟, 咸玷是職, 臺廳一鎖, 無時可啓, 經筵之啓沃君德, 爲任不輕, 而鴻儒宿德, 今不如古, 召對時, 行討論無聞, 凡此皆非細故也. 臣嘗觀先輩文字, 有言某賢人入臺, 世道之幸也, 某奸人入幄, 世道之憂也, 苟如今也, 賢人入臺, 安能裨世, 奸人入幄, 亦安能敗世乎. 至若生民休戚, 專係於制産裕食, 而均廳之, 預貿貢米, 卽一巨瘼, 每値豊登, 販貿益夥, 而産米之鄕, 其害滋甚, 米價刁翔, 不異儉歲, 今宜嚴飭, 有司定數之外, 雖升斗之穀, 無得加貿, 使民知樂歲之可樂, 而膏澤淪於肥膚, 然後徐議通變, 永革弊規, 不可已也. 臣雖在草野之中, 亦嘗聞壯營之設, 是殿下遠觀之聖籌, 有非蠡管之見, 所敢仰測, 而公家之事, 絲牽繩連, 互有資濟, 俟其節制之稍成, 而不負經紀之本意, 則民蒙其利, 而積弊斯袪矣. 又如刑獄審理之政, 是殿下苦心至德之所著見者, 每殺越獄成, 疑晦多端, 守臣上之察使, 察使上之京司, 三反四閱, 不得其情者, 殿下迺躬執成案, 克明克愼, 惟恐一夫之有枉, 宮燭見跋, 御膳屢却, 而判司一出, 民服神明, 咸曰吾君洞見萬里, 歡呼出獄, 攢手祝天者, 項背相望, 書曰敬乃明罰, 乃有大罪, 非終乃惟眚災, 適爾旣道, 極厥辜時, 迺不可殺, 此卽我殿下審克之意, 而牧民之官, 乃或恣行威怒, 濫殺無辜, 諸路皆然, 而嶺南尤甚, 蓋黨論之壞人心術, 厥惟久矣, 苟其趨向不齊, 則凡有訟獄, 必文致其罪, 陰售厲虐, 向來一二守宰之事, 卽其驗也. 無辜之士民, 遇酷吏嗜殺之毒手, 而枉失性命, 有罪之守宰, 遇殿下恤刑之仁心, 而得保首領, 亦其幸不幸有異也. 我殿下欽恤之德, 固已深入於人, 而日前畿邑之所犯, 尙如是狼藉, 由是觀之, 風行草偃, 徒虛語耳. 此皆士大夫名義掃地, 識見昏塞, 不能服膺於古聖賢遺訓, 故其病根之隨處發見, 有如是也. 臣尙有一二事可言者, 昔我夫子, 以九經之義, 告於其君, 而其一曰忠信重祿, 所以勸士, 今三司侍從之臣, 多不食祿, 蓋員額之數, 倍於祿科, 而三司之職, 肅命旣難, 而順遞未易, 故名雖替受, 實則屢空, 或虛縻軍銜, 終歲而不得受者有之, 或懇囑騎曹數月, 而僅一受者有之, 堂堂千乘之國, 金華法從之臣, 乃不能繼其月廩, 誠不可使聞於鄰國也. 厚祿, 所以養廉也, 今絶其祿, 廉何能責. 擧世耽耽, 惟一麾是圖, 幸而得之, 貪攫無厭, 彼固有罪, 亦朝廷使然, 臣雖山野之人, 亦嘗知國用之不給也. 度支歲入米, 不過十萬石, 古者或所入過是, 而所出不及, 故僅充經費之用, 邇來或所入不及, 而所出過是, 則經費亦窘, 轉相稱貸, 以若國用, 制其祿食, 宜乎有損而無增, 第惟臣之愚見, 則百用可蠲, 惟士之廩祿, 不可以不給也. 臣嘗按, 國初制祿, 頗爲豊足, 自經亂後, 屢經裁減, 而至若遞受之法, 近始有之, 此非盛世之所宜有也. 今臣此言, 有司之臣, 必竊笑, 而議其迂, 然軍門伺候之卒, 各司皀隸之賤, 亦莫不繼其廩料, 顧獨於法從之列, 反如是乎. 今軍門之宂濫者, 尙多稍議變通, 而屬之地部, 顧安所不可乎. 至若科擧之制, 臣不敢妄議, 而大抵科之爲言, 有程臼之謂也. 擧之爲言, 有薦似之謂也. 今士之赴試, 旣無定額, 鄕之送士, 亦無貢法, 人擧我應之義, 果安在哉. 士趨之不端, 科場之淆雜, 未必不由於是, 今若定其額數, 申以薦法, 而文詞之外, 視其學行, 以之取舍, 則三物賓興之化, 亦將復見於今日也. 又如銓選之法, 國之大典, 我殿下搜羅剔抉, 野無遺逸, 歷觀前史, 淹滯之振拔, 莫今若也. 況今殿下, 以革舊俗改舊觀爲務, 夙夜嚴恭, 蕫正群下, 而任其事者, 多不能仰體晠念, 雖有對揚之名, 每歸應文之科, 黜陟或欠, 稱停激揚, 不厭人心卒未見聳, 萬夫之觀聽, 萃一代之精神, 若使一任沁泄, 竊恐世道朝象, 竟無丕變之日, 今宜申加飭勵, 以懋遠圖也. 朱子曰, 帝王之學, 雖與韋布不同, 其所以講明義理, 存體應用, 則未嘗不同, 夫義理之在天地間, 如飮食裘褐, 而只緣講治不明, 眞妄相混, 從違莫的, 不能治吾知於廣大高明之域, 而近以心身, 遠而家國, 卒無以立大本, 而行達道, 此古之聖人所以汲汲焉講明者, 而程子於格致章, 亦必以講明義理, 爲第一義, 夫聖經賢傳義理之淵府也. 故善學者, 每從經傳上探頤, 敬以明之, 誠以一之, 由知達行, 相涵相養, 無所處而不當, 張橫渠曰, 書所以維持此心, 一時放下, 則一時德性有懈, 李延平 語朱子曰, 欲盡此學, 須盡棄平日習氣, 朱子亦曰, 讀書之法, 當循序而有常, 致一而不懈, 此皆窮經之要法, 而其於義理之原, 庶可以盡之矣, 夫儒者之學, 以經傳爲本, 則爲正爲眞, 以新奇爲務, 則爲邪爲僞, 故古之敎者, 必先審乎趨向之分. 朱子曰孔氏之門人, 未必純善, 而也是白地多可愛, 正以是也. 在昔穆陵之世, 學校大興, 宏儒碩士, 霞蔚雲騰, 入而啓沃有補, 出而禮讓成俗, 玆所以治化之隆, 匹美於三代, 而近世之士, 工聲病, 爭新巧, 以爲立揚之計, 窮經問學, 看作詭異, 攝儀澡躬, 恬不爲意, 凡此俗弊, 皆由於蒙養之不端, 禮敎之不行, 此朱子所以深致意於小學 之敎, 而橫渠敎人之以禮爲先, 亦以是也. 夫小學之書, 卽大學之根基, 其規模節目, 實足以補治刑化, 而童習豫養, 自無扞格之患, 昔我先大王, 眷眷乎培養之敎, 而惟是書爲先, 今我殿下, 亦嘗遵而守之, 申明講規, 今宜更飭有司, 嚴立課條, 內則使敎官會于公廨, 月三考講, 外則擇其有文學地望者, 爲之塾師, 任其考課, 不專尙乎句讀之末, 而使之肄習乎揖讓進退之節, 則其於端本之功, 豈云小補. 至於禮之爲敎, 古今異宜, 固難輕議, 而三代之禮, 可按而行者, 惟鄕飮酒禮是已, 蓋其賓主介僎之位, 尊卑有序, 三讓四面之儀, 少長有別, 獻酬辭讓, 升降進退, 使人觀感, 知有據守, 終至於正身而化俗, 成敎而安國, 夫子所謂觀於鄕, 而知王道之易易者, 正以此也. 在昔我邦名碩之典州郡處鄕塾者, 皆行是禮, 而闕而不講, 今已久矣. 凡今之人, 不知禮義, 靡所據守, 廉恥不張, 趨向不正, 究其病源, 亶在於敎之不素, 今宜申明舊規, 內而館學, 外而校院, 使於春秋絃誦之暇, 肄習鄕飮之禮, 使之觀善而成敎, 則其爲辨上下, 定民志, 無有過於此者矣. 今臣所言, 皆魯莽陳譚, 固不足有槪於宸心, 而若其區區憂愛之誠, 亦莫不感發興起於殿下盛德至善之所發見, 欲其觸類引伸, 而推廣其功化也, 伏願殿下, 深留意焉. 臣無任兢蹙震懍 屛營祈懇之至. 答曰省疏具悉, 爾言萬言, 而言皆指陳時弊, 亦多實用之可以採納者, 當隨處而試爾之言, 爾其勿辭察職.
57세 때인 1796년(정조 20)에 司諫院 大司諫으로 임명되자 올린 사직소이다. 諫官이란 직책은 임금이 잘못이 있으면 올바른 말로 충고를 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臣은 영남의 볼 품 없는 선비로 학식이 없고 재주도 없으며 하나도 취할 바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직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니 거두어 달라고 하였다. 임금인 정조는 사양하지 말고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하라고 하였다
辭大司諫疏戊午
伏以臣待罪西邑, 已經周歲, 才諝素蔑, 涓涘莫效, 夙夜兢懼, 惟譴何是俟. 迺者湖臬之命, 特出夢想之外, 臣身光寵, 固無涯極, 而臣之父祖, 因有贈爵之典, 恩及泉塗, 榮動鄕曲, 臣感泣惶隕, 不知攸措. 請暇焚黃, 情私得伸, 而數月空衙, 癏曠是懼, 乃蒙聖
慈, 不加罪罰, 特賜恩遞, 隨處曲護, 莫非洪造, 如臣螻蛾之微, 何以得此於聖明之下哉. 臣從今以往, 祗思優遊田野, 歌詠聖澤, 以爲塵刹之報, 而無復榮道之望, 迺於前月十九日, 伏承十一日下諭, 以臣爲司諫院大司諫, 使之乘馹上來, 臣於年前, 冒忝是職, 而庸愚巽軟, 徒取嗤笑, 誠是已試而不驗, 何可晏然冒進, 更玷淸選哉. 然臣受恩如天, 圖報無地, 惟知竭蹶之爲義, 不復廉防之是顧, 況於經年積違之餘, 一覲耿光, 固臣至願, 今宜聞命登道, 刻期趨朝, 而第臣自前年冬末, 重患輪行之疾, 久益危毒, 素苦風眩之症, 乘虛挾攻, 四朔呻苦, 轉入膏肓, 眞元陷鑠, 藥餌無應, 戶庭之間, 尙不能運動, 以此病情, 萬無擔舁寸進之望, 旬日之間, 欲發而旋止者, 亦已屢矣. 淹滯時日, 期限已滿, 義分都虧, 惶懍罙切, 臣旣不得趁限膺命, 則亦不敢遲廻隱默, 自阻於天地父母之前, 敢將疾痛之呼, 仰瀆崇嚴之聽, 伏乞聖慈, 特垂鑑諒, 亟遞臣本職, 仍治臣逋慢之罪, 以安微分, 以肅朝綱, 千萬幸甚. 臣於乞免之章, 不容贅及他事, 而目下民憂世道, 竊不勝私憂過計, 敢此尾陳, 伏惟聖明, 垂察焉. 洪惟我殿下, 臨御以來, 一日萬機, 勤勤懇懇, 無一非恤民之政, 傳曰保民而王, 我殿下以之通編定制, 而刑政有金石之典, 字恤有則, 而街巷無遺棄之兒, 役重則薄斂以紓之, 歲飢則發粟以哺之, 有冤者伸之, 無告者恤之, 無微不燭, 無遠不被, 雖古聖后若保如傷之德, 無以加矣. 宜其惠澤之曁民, 各田爾田, 宅爾宅, 樂其樂, 利其利, 而奈之何功化所及, 反謬所圖, 山野之民, 或不免剝膚之災, 輒有愁歎之語. 曰吾君之恤民, 而吾何獨不見恤, 遂與之扶携而去, 其去也, 只是醫得眼前瘡耳, 傳曰無恒産者, 無恒心, 蓋無恒心, 則無恒居, 勢固然也. 名以士族者, 雖有水旱饑荒之災, 不得輕易遷徙, 而至如編戶平民, 無難流離, 其弊久矣. 臣以耳目之所逮, 百戶之村, 一過之, 則十存四五, 再過之, 則十存二三, 三過之, 則已墟矣. 問之隣, 曰彼爲避役而去, 彼爲避糴而去, 彼爲避籍而去, 民情大可見也. 且臣於年來歷見西南二邑, 每於納布奉糴之際, 簿牒紛紜, 請徵其隣里隣族之徵, 在所當禁, 而布糴之捧, 亦不可廢, 則直使之從便備納, 其隣族之弊, 佯若不知, 其苟且彌縫, 槪可知已, 一邑如此, 則他邑可知, 一路如此, 則八路可知, 由是而民無樂生安業之意, 率多轉徙流離之苦, 窮谷閒曠之土, 路傍市店之肆, 朝徙暮遷, 作爲逃役之逋藪, 乍聚旋虛, 便同避身之蘧廬, 逃必乘夜, 避必全家, 當此昇平之日, 反爲奔迸之擧, 以致訛言不懲, 民心胥動, 誠非細憂也, 徐究其本, 則專由於軍制之紊亂, 糴政之煩重, 籍法之不嚴, 欲救此弊, 先從軍制糴政, 而變通之, 然後籍法始可論也. 夫我朝軍制, 實倣寓農之意, 而名色多端, 代易無常, 有異於田賦出兵之制, 故簽丁之際, 自多擾民之端, 各邑吏胥, 額數無定, 末技遊食, 居住不常, 軍役之民, 不過十之二三, 以有限之民, 充許多軍額, 奈之何民不窮且盜也. 今若査定軍額, 宂雜者汰之, 窮殘者除之, 其不足之數, 列邑之閒遊吏屬, 額外軍校, 搜括移定, 則民無疊役之冤, 軍無闕伍之弊, 此政爲軍政之急先務也. 至於糶糴之政, 蓋爲水旱賑貸之資, 營邑支放之須, 所以利民, 非所以病民者, 而自有那移之弊, 列邑之穀, 簿不均, 穀多之邑, 統計結分, 則一家所受, 多至近百斛, 小不下十餘斛, 貧窮之民, 罄盡一年耕作, 不足以了糴, 則鞭撻隨之, 此則所以利民者, 適足以病民也. 今若量穀計戶, 穀多之邑, 分與民多之邑, 使無不均之患, 耗穀則無論元會別會, 逐年定式作錢, 不使升斗留置, 則還分自有定數, 受食亦無過濫, 民力可以少紓矣. 軍制還政, 旣無弊端, 則有戶斯有籍民, 何必漏於籍乎. 夫然後申嚴籍法, 計家立統, 十家爲里, 五家爲統, 俾無一夫之遺漏, 則八路之中, 可無無籍之人, 而軍額自可充數, 還穀自可均分, 豈非兩得乎. 今年政値式籍, 宜令有司之臣, 嚴飭諸路, 更加申明, 恐合事宜, 至如軍制之査正, 還穀之均排, 付之廟堂, 一定條例, 斷不可已也. 臣之如上所陳, 最是救瘼之急務, 而抑臣之所深憂, 而長慮者, 亦有大於此者. 顧今斁倫敗俗, 害正而亂眞者, 近所謂邪說是已, 名敎中間, 自有樂地, 彼亦人耳, 何苦而必爲是也. 臣未見其書, 未知其所言者何道, 所學者何事, 而以傳聞之所流播而推之, 則槪是老佛刑名之支流, 而濟以妖魔之術, 肆其邪暴之行, 誑惑愚迷, 驅一世於禽獸之域, 甚矣, 人之好怪也. 孟子曰吾爲此懼, 閒先聖之道, 距楊 墨, 放淫辭邪說者, 不得作, 若使聖人復起, 辭而闢之, 豈後於楊 墨者哉, 肆惟我殿下, 矜其愚懵, 黜其詖淫, 敎導而革之, 威罰而徵之, 火其書, 人其人, 彼若有一分未泯之天, 尙或知懼, 偕之大道, 而抑何心腸, 溺而忘返, 刑戮是甘, 而充塞仁義, 背正死
黨之習, 浮於遊俠, 斁彝亂常之害, 甚於洪水, 浸浸然欲與吾道而爲敵, 其爲世道之憂, 不可但以愚迷而忽之也. 向來姜彝天等事, 自有邪說以來, 最是慌怪, 臣在下土, 其負犯之何如, 援引之幾何, 雖未詳知, 而以臺啓中所發者而觀之, 可知其辭說之妖邪, 徒黨之式繁, 未及窮覈, 旋則放流數三人之外, 一不査治, 傳曰罪疑惟輕, 又曰眚災肆赦, 此則罪非疑也, 反用輕典, 罪非眚也, 反用肆赦, 刑政之失, 未有大於此, 惟彼淫邪之徒, 曷從而知畏哉. 臣請島配罪人姜彝天 金履白 金鑪等, 一倂拿來, 設鞠嚴覈, 依律處斷, 及其黨與, 亦爲嚴繩, 使邪說者, 不得肆行焉. 臣於近來, 亦有可言者, 夫陞品通擬, 勿論內外, 最宜難愼, 而頃於 會寧倅之差送也, 以凶逆切姻之類, 北寺關通之人, 一望竝擬, 抑何意也. 雖因曠蕩之特恩, 間或甄敍, 而政目一出, 物論大駭, 此堤防之日壞也. 嘻噫, 風泉起慕, 北苑設壇, 卽我先王義起之禮也. 一隅東土, 春秋可讀, 而每於壇享之日, 凡在駿奔之列者, 仰瞻黃幄肅穆, 焄蒿悽愴, 莫不肅敬震攝, 如在其上, 以我殿下繼述之誠, 親祼之日, 望拜之晨, 駐駕壇門, 來汝忠良之裔, 或賡載而志感, 或製試而示意, 此不但
今日在廷諸臣所共欽仰, 其將永有辭於天下萬世, 而近年歲幣之行, 忠良子孫間, 有膺使命者, 此豈樂赴而然哉. 必緣朝廷之上, 適乏專對之望, 而往拜北庭, 歸參壇享, 得無內省自疚, 而不免爲忝厥之歸乎. 此義理之無素講也. 臣誠爲朝廷爲其人慨惜, 而憂歎也. 臣謂會寧府使差出時, 赴政銓官, 施以譴罷之典, 忠良子孫, 勿差北使, 一以爲嚴堤防, 一以爲敦風敎, 亦未必無補於勵世警俗之政也. 臣無任惶蹙屛營祈懇之至. 答曰省疏具悉, 凡言今之民弊者, 孰不以爾所謂三者爲說, 而軍制整糴政精, 則籍法之正, 特次第件, 然軍制自有金石之典, 爲道臣守令者, 苟能奉法, 唉彼小民, 豈或相率之他, 使十室之里, 一過存四五, 再過存二三, 三過爲墟乎. 尤有切可矜者, 爾疏何不竝擧生且壯之類尙可之他, 而寄活黃白之徵, 身役有足干和, 近於畿甸十邑, 先施釐洗之勤慢, 未知諸路果聞風而動念乎. 第令廟堂諗其擧行之如何. 爲可糴政, 卽近日周諮紆謨中, 指必先僂, 而半留姑無論, 合錄尙未能, 年前臨軒之問, 未免爲紙上之無當空言, 然而驟決, 莫若爛商行, 且矯救, 寤寐念念, 邪學事, 職由正學之不明, 太陽中天, 自可不逢, 不若每曰闢異端, 先懋聖功云者, 雖出於治本之苦心, 而萬有一因此, 而禁㢮, 烏在乎禮樂刑政互爲輔治之具. 申命京外有司之臣, 莫或任他, 姜彝天等事, 不足以邪說言, 刮目之效, 不待更覈, 而當知之, 會寧府使差出時, 銓官譴罷事, 不允, 北使事, 古人之出處, 必有斟量者矣.
3월 11일에 저를 대사간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이 직책을 역임하였지만 다만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해 겨울에 심한 질병에 걸려 4달이나 크게 앓았기 때문에 온 몸의 힘이 다 빠진 상태입니다. 이런 병으로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으니 대사간을 사직한다는 내용이다. 이 상소문은 59세 때인 1798년(정조 22)에 올렸다
辭大司諫疏己未
伏以臣於旅舍病伏之中, 薇垣新命又下, 此是臣已試蔑效之地, 誤恩之隆, 又何以至此也. 署經有命, 庚牌嚴臨, 臣敢不竭蹶趨承之不暇, 而第臣稟賦素薄, 蒲柳先衰, 犬馬之質, 積祟在身, 輪行之症, 又復添劇, 春夏之交, 未分陽界者久矣. 自近以來, 重爲酷暑所苦, 諸般證形, 乘虛交發, 氣鬱而眩, 神耗而薾, 耳目聰明, 莫不受病, 四肢百骸, 無不疼痛, 委頓床笫, 運動不得, 雖欲强起奔走, 其勢末由, 若臣人器之不稱, 才具之不堪, 有不暇及, 而只以疾痛之呼, 仰瀆於天地父母之前, 伏願聖慈, 特加矜察, 亟賜鐫改, 俾得舁還鄕里, 隨便調息, 千萬幸甚. 且臣於實病之外, 又有難冒之端, 前年待罪本職時, 略及北使事, 而大爲一重臣所怒斥, 旨意深緊等語, 不但出於情外,疑之以侵及未嘗期望等句, 不特顯有譏意, 反加之輕侮, 若料如是臣之所言, 便覺多事, 今不必更爲分疏, 而臣雖無似, 其職則重, 豈可受人嘲侮, 而冒據淸朝之重任哉. 伏願聖明, 更加垂察焉. 臣於乞免之章, 不容贅及他說, 而第於目下時象, 不勝憂慨之至, 敢此尾陳焉. 臣之離違軒陞, 纔過數年, 而其間世道之波蕩, 朝象之潰裂, 殆有甚於曩時, 我殿下終始勤懇, 丁寧曉諭, 惟以鎭世道, 靖朝象, 爲急先務, 而是何承流之地, 不見對揚之美, 寅協之風, 尙矣無論, 而矯激之習, 若是漸痼也. 日昨正言任㸁之疏還收, 大槪卽賜出給, 臣未知其所言之爲何事, 所犯之爲何罪, 而第以傳敎中二字而觀之, 其冒犯受敎, 槪可揣知. 嗚呼, 此何等大義理關係處, 而到今百年之後, 尋常提及, 實是無嚴之甚者, 況又先大王臨門飭敎, 懇惻嚴重, 而其後四十餘年之間, 無敢更有說道者, 則渠是何人, 乃敢若是. 雖是急於搆人, 畢竟歸於故犯, 豈可諉以鄕曲之無知, 而不顧關係之至重乎. 臣謂前正言任㸁原疏, 亟賜頒下, 使中外之人, 曉然知其所犯之由, 爲先施以刊改之典宜矣. 抑臣於向日事, 竊有長吁却顧, 而按抑不得者, 卽前校理朴吉源疏中語是已. 初於會座之時, 突入擅斷, 徒濟己私, 已失議諡之體, 伊後對辨之章, 尤極駭悖, 乃曰故相之爲忠, 惟沈奎魯一人知之, 嘻噫, 此何言也. 故相臣文肅公 蔡濟恭之平生秉執, 自是撑天地, 亘宇宙, 而泯滅他不得, 環東土含生之倫, 少有知識者, 孰不知其爲忠, 而獨吉源輩不知耳, 此而不知, 則其可曰今日之臣子乎. 彼雖無知, 尙具彝天, 豈敢爲 此, 而見聞所濡, 罔念義理之重, 傾軋成習, 不顧忠逆之分, 縱恣無忌, 乃至於此, 若此不已, 則朝象無可靖之日, 世道無可鎭之時, 是豈細故也哉. 臣謂前校理朴吉源亟施竄配之典, 以爲懲一勵百之地, 斷不可已也. 雖以會座諸臣言之, 視若尋常, 初無一言論辨, 致使莫重議諡, 有此末後紛紜, 此亦不可置而不論, 臣謂參會諸臣, 竝施譴罷之典宜矣. 臣無任激切屛營祈懇之至. 答曰任㸁疏, 以違禁自在不捧中, 何以推來頒下乎. 不審之罪, 固有之, 刊改事依施. 朴吉源事, 其疏設有不擇語處, 其罪豈至於竄配乎. 此則爾言亦未免阿私, 況吉源已經處分, 尤豈可一事再勘乎. 參會諸臣, 則勿論沈奎魯 朴吉源及他餘人, 苟能善爲, 則若是乎. 譴罷事依施.
저를 사간원 대사간에 또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근래 온 몸에 병이 들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저의 이러한 형편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작고한 文肅公 蔡濟恭의 충성은 온 나라 백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朴吉源은 문숙공을 비방하였으니, 그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기를 바란다는 등의 내용이다. 올린 시기는 60세가 되는 1799년(정조 23) 7월 4일이다
辭右承旨疏
伏以臣伏見, 僚員辭疏中, 攙及臺言爲自引之端, 所謂臺言, 卽臣待罪薇垣時, 所論北使事也. 臣嘗見延勅拜表之班, 忠良後裔, 皆不進參, 而不以爲非, 朝廷之所以待之也如此, 後裔之所以自處也如此, 崇裝節義之道, 固可以永有辭於天下後世, 臣於是不勝欽歎之至. 至於北使膺命, 不能無惑焉. 妄意朝廷尙節之道, 名實易眩, 後裔處義之方, 外內殊跡, 年前疏末之略有所提及者此也. 使价本非華要, 故事未及詳聞, 則臣之爲言, 亦豈全沒商量, 而故爲此深緊之語哉. 夫行止非人所知, 惟義之與比, 則不必視人言爲去就之地, 而乃有所云云, 其後亦有膺是命者, 今不必更爲分疏, 而但於僚席之間, 有此自引之語, 臣何敢恬若不聞, 晏然而已乎. 伏乞聖慈, 俯垂鑑諒, 亟遞臣職, 以爲妄言者之戒. 仍伏念, 臣於積違之餘, 昵侍耿光, 旬日之間, 三入喉院, 方自榮幸感惶之不暇, 何敢遽爲退伏之計, 而第臣於春初, 重患輪疾, 數月沈痼, 尙未蘇完, 風@挾攻, 宿祟添@, 耳目聰明, 莫不受病, 今雖欲隨行供職, 實爲難强,特加矜察, 而遞罷之, 以便調養, 不勝幸甚. 臣無任屛營祈懇之至.
60세 때인 1799년(정조 23)에 우승지에 임명되자 사직하겠다고 올린 사직소이다. 사대부가 세상에 나아가서 벼슬할 때가 있고, 은거할 때가 있는데 오직 義理에 따라서 할 뿐입니다. 저는 봄 이후 병으로 고생하며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으니 직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辭敦寧都正疏
伏以日月寢遠, 霜露變遷, 伏惟聖孝追慕, 與時俱新, 竊伏念, 臣猥以庸陋, 遭値聖明, 自春阻秋, 除命荐降, 經歲積違之餘, 偏蒙曠絶之恩, 臣敢不竭蹶趨承, 以效古人不俟駕屢之義哉. 第臣自來, 貞疾積苦, 風痺自前年冬末, 轉益危篤, 春夏之交, 屢經蒼皇, 殘縷雖延, 而奄奄爲癃廢之物, 戶庭之間, 猶不能運動, 每承恩命, 欲起而還仆者屢矣. 引領雲天, 感涕自零, 蹙伏床褥, 譴何是俟. 不意本月二十二日, 伏承除旨, 以臣爲敦寧府都正, 銀臺下諭, 未滿旬日, 而又有此恩命, 威罰不加, 榮寵罙隆, 臣驚惶霣越, 不知措身之所也. 目下病情, 萬無擔舁趨朝之望, 則虛帶職名, 益添罪戾, 而臣於本職, 卽無敦寧, 揆以公格, 在所當遞, 敢以疾痛之實, 呼籲於天地父母之前, 伏願聖慈, 俯垂矜察, 特命該曹, 照例遞改, 以安微分, 仍治臣瀆擾之罪, 以肅朝綱, 不勝幸甚.
승정원의 좌승지로 임명된 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敦寧府 都正으로 임명되었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질병이 너무 심해 조정에 들어갈 희망이 없고 헛되이 직책만 가질 뿐이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전례를 잘 살펴서 직책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62세 때인 1801년(순조 1)에 올렸다. 敦寧府는 왕실 친척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아이며, 都正은 正3品이다
嶺査後伸辨疏代儒林作. ○戊申.
伏以當國家變亂之日, 激勵忠憤, 唱起義旅, 自是臣子之本分, 彝天之所同, 雖或有奇功顯績, 不必求知於人, 況如戊申義擧, 初無功績之可論, 則到今六十年之後, 何必追提往蹟, 以衒名天地父母之前哉. 恭惟我主上殿下, 追感涒漢之重回, 深軫義烈之或泯, 渙發綸音, 搜訪舊蹟, 臣等有以知我殿下彰善之至意, 出尋常萬萬也. 意謂守令方伯, 對揚休命, 從實上聞, 百年忠義之風, 庶幾一徹於四聰之下, 而嶺南之人, 得以自立於世間矣. 及觀本道道臣啓本, 只擧一二從軍之下流, 而至於道內唱義之蹟, 幷置不論, 臣等始而訝惑, 終而痛恨, 玆敢相率裹足, 瀝血籲閽, 不避干瀆之誅, 冒進抑鬱之私, 伏願聖明, 小垂察焉. 噫噫痛矣, 亂賊何代無之, 而豈有如戊申之變哉. 嘯聚弄池之兵, 敢肆射天之凶, 是固擧國神人之所共憤, 而不意一種凶孼, 近出嶺中, 此自有嶺南以來, 所未有之極變也. 三百年聖朝培養之效, 七十州名鄕忠孝之風, 反爲此賊所玷汚, 則當日嶺南人士之羞愧欲死, 何但建寧同鄕之恥而已哉. 於是號召使臣趙德隣召募使臣李衡祥, 膺命而出, 嶺中搢紳之士, 縫掖之倫, 奮袂而起, 明目張膽, 雪涕布檄, 數日之間, 一道同聲, 有位望, 則推以爲將佐, 有智略, 則協贊其籌畫, 有武力者, 效其武力, 有財穀者, 輸其財穀, 或釋衰絰而從軍, 或率家僮而赴陣, 大郡千百小縣, 次之節制, 聽於號召, 聲勢籍於官軍, 將爲勀日赴鬪, 必欲北首爭死, 向非列朝遺澤, 在人南嶺, 忠義成俗, 顧安能致此哉. 惟時按撫使臣朴師洙來觀義旅, 有軍律整肅之歎, 從使官臣朴文秀 聞嶺南起義, 喜曰亂賊無足憂矣, 是其樹百世之風聲, 聳一世之瞻聆, 而忠干義櫓, 澟然有遮截江淮之勢者, 槪可想矣. 何幸天佑宗社, 凶賊自潰, 不待義理之裹尸, 奄見官軍之獻䤋, 則當日唱義之擧, 誠勞之可紀矣, 然而當時有司之臣, 不以無功而不論, 特以數三首義之人, 登聞于朝, 英宗大王, 大加稱賞, 簡拔其表著者, 增秩而擢用之, 豈不以其勞固無 可賞, 而其心實有可褒者耶. 迺者因大臣陳達, 有安東義將柳升鉉 權萬䝯贈之褒, 激勸忠義, 闡發幽隱, 此可見我殿下繼志之盛節也. 臣等仍竊伏念, 英廟之所嘉賞者, 惟此倡義之蹟也, 殿下之所詢訪者, 亦維此倡義之蹟也, 則其於崇奬忠義之道, 若是其勤勤懇懇, 而居在承流宣化之地者, 乃反將有作無, 壅蔽是事, 列邑從征之伍不甚表著者, 則褒以揚之, 一道敵愾之士, 競勸忠赤者, 掩而泯之, 是果不審行會之本意, 眩於奉行而然歟. 抑亦以爲一方忠義, 不足爲登聞而然歟. 臣等於此, 竊有所抑鬱於中, 而不能終默者. 夫嶺南之爲嶺南者, 以其有忠義之風也. 家沐菁莪之澤, 士服儒賢之敎, 遺風未泯, 百世相傳, 奧自龍蛇之變, 逮至丙丁之亂, 名卿碩士, 在在起義, 或成睢陽之貞烈, 或收河朔之奇功, 競勸忠義之忱, 卒贊匡復之業, 而至今數百載之後, 流風餘俗, 猶有存者, 惟此戊申義擧, 實惟壬丙之義烈, 是追壬丙之條律是遵, 則今之嶺南, 猶不失爲古之嶺南矣. 世之不樂成人之美者, 厭聽嶺南之有忠義, 喜言 嶺南之出亂逆, 工訶巧詆, 觸事斷斷, 甚至於今番詢問之下, 亦爲之闕焉, 不論隱然歸之於二十四縣無一義士之科, 是欺聖聰也, 誣嶺南也, 道臣進啓文字, 何等可信, 而頒之朝紙, 書之國乘, 時人相傳, 後人皆見, 將以爲嶺南之人, 値戊申之變, 而曾無義擧云爾, 則是不但受誣於一時, 抑將受誣於百世, 未知嶺南之人, 有何見忤於人, 而受誣之至此也. 嗚呼, 忘身殉國, 人臣之職耳. 當日倡義之人, 只爲其職分之所當爲者而已, 則誣與不誣, 何足爲加損, 而抑臣等之所痛恨者, 臣等之於當日倡義之人, 非子若孫, 則乃鄕後生也. 目見前人之受誣, 可無一言以暴之乎. 倘殿下不以臣言爲妄, 特命該司, 收聚各邑所在倡義文蹟, 一經睿覽, 明示朝廷, 使一世之人, 曉然知今之嶺南, 猶不失爲忠義之鄕, 則臣等之所以感誦恩榮, 不啻如高山深海矣. 衷情所激, 語涉狂率, 臣等無任兢蹙屛營之至. 謹昧死以聞.
지난 1728년(영조 4)에 戊申亂(李麟佐亂)이 일어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백성은 충성심을 보여야 당연합니다. 당시에는 영남의 모든 백성들이 함께 반란을 진압하는데 참여했지, 한두 고을만이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임금께서는 당시 반란 진압에 참가한 고을들을 다시 살펴보시고, 영남이라는 고을이 忠義之鄕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삼가 글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1788년(정조 12) 지었다
臥隱先生文集卷之三
와은선생문집권지사
講義
召對講義
庚戌七月初八日, 以副校理入直, 上下敎院曰, 遠人久直, 欲爲召見, 召對爲之, 參贊官 李敬五閣臣鄭大容史官許鞏 白慶楷注書 趙台榮上番李殷模講貞觀政要. 進講貞觀三年李大亮章, 上曰加講, 又講貞觀八年陝縣丞皇甫德參章訖, 上曰陳文義, 對曰李大亮籓臣也, 以籓臣而密表進諫, 誠非易事, 然使九成而能諫者, 以唐太宗從諫之美也. 大抵來諫之道, 貴在使人盡言, 伏願殿下, 於此等處, 體念焉. 上曰好矣, 閣臣鄭大容奏曰, 下番所陳來諫二字, 誠好矣.
홍문관 부교리로 재직시 51세 때인 1790년(정조 14) 7월 8일에 召對에 참여하였을 때의 召對講義로 당시 교재는 『貞觀政要』이다. 참여한 사람은 李敬五‧鄭大容‧許鞏‧白慶楷‧趙台榮‧李殷模이다. 내용은 634년(貞觀 8년)에 李大亮이 당 태종에게 諫言을 하자 태종이 간언을 따랐다. 임금[정조]께서도 태종을 본받아 간언을 잘 받아들이고 따라야 된다는 내용이다. 召對는 임금이 시간을 정하지 않고 수시로 經筵을 열어서 공부를 하는 자리를 여는 일이다. 주로 經典과 歷史書의 중요한 한 부분을 뽑아서 집중적으로 토론한다
書筵講義
庚□三月十九日, 以侍講院弼善入直, 二十日朝, 召對于集福外軒, 講孟子, 自離婁之明, (止)可謂智乎. 臣 翰東奏曰, 詩云不愆不忘, 率由舊章, 遵先王之法, 而過者未之有也. 蓋先王之法, 道之用也,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而禮樂刑政, 典章法度, 都是仁心中做出來, 故遵而勿失, 則爲治也易, 違而不循, 則爲治也苟, 故曰遵先王之法, 而過者未之有也. 大抵祖宗之法, 皆是堯 舜之法也. 故先儒之言曰, 欲法堯 舜, 當法祖宗, 亦孟子此章之義也. 下問爲政不因先王之道, 可謂智乎. 不曰仁乎, 而曰智乎何也. 對曰爲高者, 因邱陵, 爲下者因川澤, 以其勢之易也. 爲政而因先王之道, 其勢亦然. 若舍易, 而爲難, 則非智也. 行其道仁也, 因其勢智也, 若曰仁乎則仁字較闊, 曰智乎則智字較緊矣. 二十三日, 召對于集福外軒, 講自是以惟仁者, (止)謂之賊臣. 翰東奏曰, 此章自仁心仁聞以下, 統論人君不能擴充仁心, 則不能行仁政, 而其害至於喪亡無日, 聖人訓戒之意, 固深且切矣, 而人主之爲治, 不能獨運於上, 故天之方蹶以下, 又就臣道上, 說出責難之意, 蓋先王之爲治, 君臣同德, 上下協恭, 而後可以行堯 舜之道, 而爲堯 舜之治也. 下問臣責難於君, 而君則不可責難於臣乎. 對曰人君之責難於臣, 順而常, 人臣之責難於君, 逆而難, 故孟子先從臣分上說, 其實責難臣隣之義, 亦在其中矣. 四月初十日, 晝講自公孫丑曰, (止) 曾子者可也. 臣翰東奏曰古者易子而敎, 父子主恩, 師道主義, 主義故雖責善, 而無害義之弊, 而父子之情, 恩愛甚重, 故其蘄望也切, 其蘄望也切, 故責善也深, 易致恩傷而情離, 所以易子而敎之. 然爲父, 而徒以傷恩爲戒, 而專無義方之敎導, 則是過於恩也. 故曰以身敎, 又曰人樂有賢父兄. 二十五日, 晝講自曾子居武城, (止) 堯 舜與人同. 臣翰東奏曰, 曾子以師道自任, 故寇至而去, 子思以臣分爲重, 故寇至而不去, 俱是義理權衡, 各得其中, 不容一毫參錯. 故曰易地則皆然矣. 又奏曰, 堯 舜與人同,泛觀此訓, 則只是言人形體容貌之同者耳. 若孟子 大意, 是道性善, 言必稱堯 舜之意, 而引而不發耳. 若使諸子, 更問其所以同, 則必曰同一性也. 惟是聖人, 盡其性, 衆人失其性, 初雖同稟, 終若宵壤, 甚可懼也. 故學者必先立其志, 自期以堯 舜之道, 然後希聖希賢之工, 始可論也. 韋布之學猶然, 況於帝王之學, 與韋布不同, 立志自期, 尤宜遠大, 必須深究其堯 舜與人同處, 只在於性善, 而堯 舜之道, 初非高遠難行之事, 則亦可以爲堯 舜矣. 故曰有爲者, 亦若是, 惟此與人同一句, 爲千古爲學之要切語, 伏願深加省察 焉. 閏四月十一日, 晝講自匹夫而有天下, (止)其義一也. 臣翰東奏曰唐虞之禪傳諸賢, 夏周之繼傳諸子, 傳賢傳子, 其事固異, 而天與之, 人歸之, 而後傳賢傳子, 則一, 是順天命也. 聖人豈容私意哉. 以事而論, 雖或不同, 以心而言, 未嘗不同. 故曰其義一也, 一也者, 一於天而已也. 下問仲尼不有天下, 旣曰天與之, 則 仲尼之聖, 而天不與之何也. 對曰夫子當衰周之世, 雖有聖德, 無天子薦之, 不得其位, 故先儒之論此, 有曰舜不遭堯如孔子老闕里, 蓋以天之與之者, 必待 天子之薦之也. 二十五日, 召對, 自口之於味, (止)猶芻豢之悅我口. 臣翰東奏曰, 此章以口耳目三者, 譬此心之所同然, 而理義悅心一句, 最是爲學緊切語. 蓋義理, 須悅而後得, 不悅則曷嘗有輔於自己工夫. 集註以爲須實體察得悅心猶悅口始得, 伏願此等處, 深加省察焉. 二十七日, 召對, 自孟子曰無惑乎王之不知也, (止) 患有所不避也. 臣翰東奏曰, 此前一章, 以一暴十寒, 譬諂諛之雜進, 後一章, 以不專心致志, 譬齊王之聽信不專, 究其病根, 專由於不能專心致志也. 夫專心致志, 最是爲學之大方, 讀書而心不專, 則無以窮其理, 格物而志不致, 則無以致其知, 凡大小大物事, 無處不然, 必須專精着意, 勿使放倒, 而後百事可做, 博奕猶然, 而況於爲學乎. 此一句, 正宜深玩也. 章下註 程子言於上曰云云, 臣翰東奏曰, 此訓是萬古人主之龜鑑, 夫人主生長深宮之中, 絶無師友遊從之益, 而日進於左右者, 只是宦官宮妾而已, 宦官宮妾, 豈盡是諂邪, 而但其逢迎將順之態, 足以養成人主傲惰之習, 甚可懼也. 誠能頻接賢士, 列於左右, 論道講學, 陳善閉邪, 則非僻之心自消, 阿諛之言不入, 自然有涵養薰陶之益矣. 諸葛武侯之言曰, 親賢臣, 遠小人, 前漢所以興隆也, 旨哉言乎. 亦與程子此訓, 同一義也. 今日書筵, 特使讀此章註, 臣不勝欽歎矣. 抑臣於文義之外, 竊有區區所懷, 敢此仰達矣. 恭惟我邸下, 睿質夙詣, 講筵日開, 政好延接賢士之時, 如臣愚魯空疏, 雖使備員隨行, 有何絲毫仰裨, 顧今賢才, 雖不及古, 而天生一世人, 足了一世事, 則求之山林讀書之人, 何患無賢士大夫乎. 伏願延訪搜羅, 布列宮僚, 頻接講筵, 討論經義, 以爲涵養薰陶之資焉.下問心有鴻鵠將至, 與衛靈公仰視鴻雁, 同歟. 對曰其不專心致志, 誠同矣. 下問涵養薰陶, 用何工歟. 對曰氣質之病, 在於偏處, 故須用敬字工夫, 克去偏弊, 則氣質自然涵養, 德性自然薰陶, 故涵養須用敬, 又曰君子大居敬, 而貴窮理, 古聖賢之訓, 大略如此矣. 五月二十五日, 溫繹召對曺交問章. 臣翰東奏曰此章大義, 不屑之敎誨也. 蓋曺交, 自是任俠底人, 而以曺君之弟, 有挾貴之意, 得見鄒君, 可以假館云者, 實無向學之誠, 故爲此不屑之敎, 以警其不誠不遜之失, 而曰堯 舜之道, 孝悌而已, 克明德, 親九族, 平章昭明, 莫非孝悌上做出來, 而大舜之孝, 實爲平治之本, 則此章之訓, 雖是爲曺交不屑之意, 而其實則明 堯 舜之道, 只是孝悌而已. 下問有餘師, 臣翰東奏曰, 此亦爲不屑之敎, 而卽爲學之要也. 學者若不反求諸心, 而徒以從遊爲務, 則易歸於空言無實, 苟能提掇此心, 反復硏究, 今日格得一理, 明日格得一事, 則不待師友之益, 自有長進之業, 此所謂有餘師也. 故先儒之言曰, 心爲嚴師. 六月十二日, 晝講, 自割烹要湯, (止)親見之哉. 臣翰東奏曰, 伊尹耕於有莘之野, 而樂堯 舜之道, 此樂字, 最宜玩味, 樂者, 欣慕愛悅之意, 則非眞知實見, 何由而樂乎. 正如顔子之不改其樂, 伊尹生於百世之下, 講 堯 舜之書, 學堯 舜之道, 而樂之而不已, 故雖以成湯 之德, 以弊聘之, 而猶不欲起, 其樂可知也. 及其幡然而改, 乃曰豈若於吾身親見之, 是亦樂其道也. 後來阿衡事業, 皆從此做得來, 儘乎樂其樂也. 何獨伊尹 爲然. 大凡爲學之要, 由樂而後得, 故孟子曰樂則生矣, 生則烏可已也, 烏可已, 則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 伏願讀書之際, 深究所以樂之之意焉.
世子侍講院 弼善으로 재직 시 61세 때인 1800년(순조 즉위) 書筵에 참가하여 강의한 기록이다. 3월 19일부터 6월 12일까지 총 10차례 참여하였다. 왕세자인 純祖는 당시 11세이며, 강의 교재는 『孟子』이다. 3월19일세자시강원 필선으로 入直하다. 3월 20일『맹자‧이루 상』에서 선왕의 법도를 준수하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자는 없다. 堯舜의 법도를 따르고 역대 선왕의 법도를 본받음이 곧 정치의 길이라고 하였다. 3월 23일『맹자‧이루 상』에서 임금이 仁心을 확충시키지 못하고, 仁政을 펼치지 못하면 즉시 나라를 잃는다. 임금과 신하는 항상 협심하여 나라를 이끌어야 된다고 하였다. 4월 10일『맹자‧이루 상』에서 군자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다 보면 화를 내기도 하며 나중에는 부자지간에 감정을 상하여 人倫을 도리어 그르치게 된다고 하였다. 4월 25일『맹자‧이루 하』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인 堯舜도 사람이다. 사람의 노력여하에 따라 누구나 요순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다만 자신이 가진 본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순 같은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윤4월 11일『맹자‧만장 상』에서 匹夫이지만 舜과 禹임금 같은 덕행이 있으면 천자가 될 수 있지만, 천자의 천거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윤4월 25일『맹자‧고자 상』에서 맛있는 음식은 입을 즐겁게 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귀를 기쁘게 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한다. 이와 같이 義理가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윤4월 27일『맹자‧고자 상』에서 장기는 작은 재주이지만 전심으로 배우지 않으면 높은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고, 온 정신을 기울였을 때 비로소 공부가 된다고 하였다. 5월 25일『맹자‧고자 하』의 不屑之敎誨(애써 가르치지 않고 분발하게 하여 스스로 깨우치도록 함)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오늘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내일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으면서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6월 12일『맹자‧만장 상』에서 伊尹은 有莘이라는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요순의 도를 즐겼다고 하면서 즐겼다는 의미의 ‘樂’자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疏行日錄壬子
壬子閏四月初四日,
伏承下諭, 以前望, 除修撰, 赴召之際, 得見朝紙, 則前月十八日, 正言柳星漢 投進凶疏, 語逼景慕宮, 大是不道, 左揆兩司, 相繼箚論, 而尙蘄允兪, 聞來不覺心骨俱顫, 吾輩自某年以後, 三十年結轖于中者, 只是此箇義理, 而尙今畏約多端, 不敢對人發口, 今逢可言之會, 豈可不明目張膽, 一卞睿誣乎. 遂與一二同志, 約會于三溪書院, 倡率多士, 爲指日叫閽之擧. 初九日, 仍與洞主主簿姪熙成從姪熙澤, 馳入院中, 會者凡七十餘人. 遂把定疏任. (製疏李敬儒 金是瓚, 寫疏金宗華 柳晦文 掌議李東@ 李鼎翊, 疏色李汝幹 柳台祚, 管行朴漢師 金熙澤 金宗範, 陪疏權思浩 趙沐洙 李㙖 鄭東弼 南漢朝 金顯運 成宗魯 趙居信 金慶進 崔鳳羽 李儉行 李泰淳 鄭必奎 金熙周, 疏首則要與搢紳相議, 故姑未定出. )發文道內, 其文曰, 近日變怪百出, 至柳星漢疏而極矣. 其措語用意之悖逆, 考其疏本, 可以見知, 而其所謂微意因噎等句語, 復逞宿慝, 忍言不忍言之事創出, 無形影之誣, 實是晩魯之凶肚, 麟能之逆腸, 上自公卿, 下至館學, 聲討方張, 而尙蘄兪允, 可勝抑鬱哉. 顧我嶠南, 數十年來, 相與飮泣, 而沫血者, 惟在於此, 不意今者復見此賊, 其爲憤迫痛惋, 想亦不謀, 而同然矣. 玆自會中, 倡起疏擧, 定出任員, 發伻走告, 到卽治發, 相會於中路, 以爲裹足西上之地云云.
十二日,
吾則以宣召有命, 先發肅行.
十六日,
始入泮, 而聞復有逆賊尹九宗者, 時爲正言不參, 星漢合啓, 前修撰崔顯重以此論啓, 且陳九賊, 曾爲崇陵別檢, 每過惠陵, 不下馬, 陵隸援例以告, 則曰此陵亦可下馬乎云云, 上命拿鞠, 其供招云, 臣老論也, 於景廟無臣節云云, 遲晩徑斃云, 此輩之凶謀逆節, 去而益肆, 豈勝痛惋. 仍不出仕, 姑待嶺人齊到.
十七日, 疏儒姑未到, 遂會在泮, 知舊共議疏事. (是日, 左相蔡又陳箚, 論九宗 星漢之逆, 而批旨懇惻嚴正, 奉讀者, 莫不掩抑流涕. )
二十三日,
疏行, 一齊見到. ( 安東 李㙖 金熙澤 李汝幹 柳台祚 金宗鎬 金熙周 柳晦文 權義度 禮安 金是瓚 李泰淳 榮川 成彦檝 金宗華 李儉行 醞泉 朴漢師 順興 成宗魯 善山 崔鳳羽 龍宮 鄭必奎 尙州 姜世鷹 南必錫 姜世綸 姜世魯 李敬儒 金宗範 英陽 趙居信 永川 李東謙, 嶺人在泮者, 李世胤 柳@, 李憲儒權訪 李基禎 李仁行 權就度 李景運 姜世揆 孫錫祉, 合三十五員. )而吾於日前遞職, 甚幸.
二十四日,
設疏會于四賢洞, 薦出疏首, 成持平彦檝 也. 以再明日, 伏閤事敦定.
二十六日,
早會, 將以明日呈疏, 而士論以爲今此疏擧, 雖衿紳合幷, 當以章甫爲主, 章甫中, 宜定疏首, 遂改薦幼學李㙖也. (製疏李汝幹 金是瓚 柳晦文, 寫疏金宗華 金熙周 柳台祚, 掌議趙居信 李泰淳, 管行成宗魯 李儉行 金宗鎬, 疏色權就度 李景運, 日記有司鄭必奎 權義度, 都廳崔鳳羽疏首旣以章甫改薦, 故疏任亦於章甫中改定. )旣以章甫爲疏首, 則宜受太學謹悉, 故往復于太學, 太學多般推託, 不許謹悉.
二十七日,
封疏詣闕, 名帖爲一萬五千餘人, 大槪裹足踰嶺, 瀝血陳章, 冀廓乾剛之斷, 永拔禍亂之本, 以明義理, 以植倫綱事, 辰時, 搢紳十餘人章甫二十六人伏閤, 守門將, 以無太學謹悉, 初不捧入疏, 槪屢屢往復于政院, 則政院亦無意捧入, 余遂搆短章 獨呈, 其疏曰伏以義理日晦, 亂逆層生, 亘古今所未有之凶變, 如九宗 星漢接迹而起, 公私悖口, 敢逞凶肚, 是豈今日臣子之所忍言所忍聞者哉. 臣跧伏鄕廬, 晩始聞知, 不勝忠憤, 搢紳章甫, 相率踰嶺, 瀝血呼籲, 冀徹天聽, 治疏將上, 則太學多般推諉, 不許謹悉, 喉院以無太學謹悉, 無意捧入. 噫, 主辱臣死, 秉彝所同, 而臣等此疏, 到處見阻, 今日義理之晦塞, 得至此極, 臣目見多士之徊徨, 憂憤之至, 敢控短章, 略暴微悃, 伏乞聖明, 俯察輿情, 亟命捧入, 仍治臣瀆擾之罪, 千萬幸甚. 疏入批下, 批曰省疏具悉, 遂特命捧入, 俄而命疏儒, 一幷入侍, 繼有搢紳同入之命, 搢紳章甫, 遂以次進, 伏熙政堂, 下命承旨林濟遠宣敎. 敎曰頃日李祉永疏, 雖不賜批, 爾等千里遠來, 今欲面諭, 故臨殿召見, 疏首陞殿, 讀奏可也. 疏首遂進, 伏讀其疏曰, 伏以臣等所居之地, 卽 世所稱名賢輩出之鄕也. 遺馥雖遠, 函丈之謦欬如聞, 善俗雖泯, 鄕里之典刑猶存, 以故如臣等之愚駿滅裂, 粗知自勉於民彝物則之間, 所愛者君父, 則竊比於向日之葵, 所講者義理, 則妄擬以疾風之草, 此豈臣等多上乎人而然哉. 實由於聖朝培養之化, 先輩導迪之訓, 是賴是藉耳. 嗚呼, 臣等有一副義理, 藏在方寸, 已三十餘年, 而對人則不敢開口, 拊心而只欲無生, 每讀詩, 至悠悠蒼天, 此何人哉, 未嘗不掩卷, 而太息也. 近因自京師至者, 始聞有柳星漢, 外託陳戒之名, 內售不道之心, 投疏於殿下之前矣. 嘻嘻, 臣等畏約多端, 雖不敢對人開口, 竊念殿下之於臣等, 君也父也, 何事之可諱, 何言之不可盡也. 況義理者, 天下公共之物, 雖百世, 猶可俟之, 今聖明在上, 萬理畢照, 臣等三十年抱持之義理, 當此亂賊接跡之時, 終不一聞於上, 豈不爲臣等沒身之恨, 而亦 何以有補於扶植綱常, 杜絶禍本之道哉. 玆敢裹足踰嶺, 瀝血叫閽, 非不知慼我宸衷之爲萬萬死罪, 而曲謹猶屬小物, 大義不暇他顧, 惟殿下俯恕而垂察焉. 嗚呼, 臣等, 卽英宗大王五十年化育之物也. 惟我莊獻世子, 以英廟冡嗣傳英廟 之心, 承英廟之命, 代理庶政, 十有四載, 臣等愛戴之心, 與愛戴英廟, 有何間焉. 況嶺人之昵侍春坊者, 間多有之, 而歸言睿學高明, 講說則多造精微, 禮容端莊, 接下則曲盡恩義, 臣等之延頸願死, 秉彝之天, 固應然也. 以英廟至仁之性至慈之情, 喜宗祏之有託, 慶邦運之無疆者, 容有其極, 而一種陰邪奰頑之徒, 潛懷恐懼於貳極之不假辭色, 乃以執權之黨, 密售撓國本之計, 醞釀則神鬼莫測, 排布則左右皆敵, 而專以譸張詤說, 爲欺天妙方, 指無謂有, 而凶圖是肆, 變白爲黑, 而眞境盡幻, 太淸雖高, 氛祲有時乎爲障, 太陽雖赫, 螮蝀有時乎敢干, 此上天之所不免也. 蓋自戊己以後, 五年之間, 伎倆無所不用, 手段無所不試, 締結綢繆者, 不知其幾十江充, 甚至於章奏詬辱者有之, 急書告訐者有之, 而奧援從而和應, 於是乎睿候或有憂愁鬱結之時, 則乃反以此作爲欛柄, 交煽內外, 投抵益巧, 疑眩遠近, 播聞益急, 以致畢竟不忍言之禍變矣. 此猶不足慮, 及於乾道回復, 憂深於殿下英明, 以其已用之伎倆, 復試已熟之手段, 遂有乙丙蚓結之群醜, 環東土含生茹血, 孰不有與此輩, 共戴一天之恨乎. 逮夫聖上御極, 如日中天, 八方之所期望者, 惟在於恭行天討, 快殄凶穢, 使義理昭揭, 而夫何十七年以來, 在廷之臣, 無一人建言, 以請睿誣之辨柝, 雖以殿下不匱之孝思, 亦未聞有誕降哀痛之綸, 明示當時事實, 仍擧太阿之柄, 快正諸賊之刑, 大聖人所商量,非蟣蝨愚賤所可仰度, 而蔀屋之下, 竊不無歎惜于中者, 近始伏見兩耆臣聯疏之批, 有曰㫰在御極之初, 次第大行誅討除非, 凶醜之倖已臥斃, 自餘未嘗假貸其腰領, 不以近戚俾, 與於八議之典, 臣等伏讀以來, 始知殿下未嘗不嚴於鋤治舊逆之義, 而又未嘗不眷眷於垂天下之大防, 立人紀於萬世, 猗歟晠哉. 如臣等之坐在井中者, 安能知上天之大也. 雖然, 臣等竊以爲殿下此擧, 盡美未盡善也. 嗚呼, 以殿下, 而治先世子之逆, 天地之所與, 神明之所監, 政宜明示其罪, 顯加其戮, 使一國之人, 咸知某人之爲, 某年劇逆, 當極律, 某人之爲某年, 隨從當次律, 然後義理可以大明於世, 刑政可以爲法於後, 今則不然, 殿下之心, 雖治某年之逆, 而死者不知其死之由, 於某年之罪, 況在廷之臣, 何以知之. 又況身居遐土之如臣等者, 尤何以知之. 殿下之義理明, 而人不以爲明, 殿下之刑政擧, 而人不以爲擧, 豈不可惜也哉. 或言殿下以事在先朝之故, 不敢顯言討先世子之逆臣等死罪, 竊以爲大不然. 伏聞先大王, 於某年之後, 旋卽追悔, 每以其時無安金藏一人, 泫然發歎, 又於重臣趙重晦入侍之際, 敎曰卿則得見李彝章, 何由而復見, 玉色愀然, 良久不語, 蓋李彝章, 時已作故也. 又伏聞進殿下於前而敎曰, 汝之讐尙魯是也. 以是言之, 先大王之追思伊日之諫臣, 痛疾當時之讒賊者, 有如是矣. 殿下雖以某年義理, 建諸天地, 干犯群凶, 按治如法, 此實爲奉承先大王之心, 顧何嘗有損於先大王止慈之德乎. 惟其殿下之所處置者, 微密難知, 故凶徒餘派, 猶敢狺然肆惡, 人有詆誣先世子, 則反謂之忠臣, 有衛護先世子, 則直謂之逆臣, 以故忠臣志士, 口欲發而旋閉, 淚欲下而先制, 此無他, 義理不明之故也. 春秋之義, 爲親者諱, 爲尊者諱, 尊親之地, 設有不可諱之事, 猶可諱之, 況以搆誣之言, 必欲暴揚於世者, 論以春秋之義, 其不爲人得以誅之歸乎. 噫, 暋不畏法之徒, 窩窟已深, 根柢已固, 公私凶言, 有若父傳子受, 以至今日, 而星漢之疏出矣. 其疏雖似陳勉講學, 而陳勉處, 都是隱映叵測之語, 雖似指陳衮闕, 而衮闕處, 都是譸張如前之習, 彼星漢特一卑微之類耳. 渠雖梟腸獍肚, 苟非習聞熟見, 看作茶飯, 則獨安能肆發凶悖之口, 不念宗族之湛乎. 此必有所恃而然矣. 大抵近年以來, 天網甚恢, 雖劇賊大懟, 殿下或慮逮捕延及, 蒼卒之際, 誅止其身, 雖以夏材之有, 君臣以來, 所未有之逆, 未或一聞, 其徒黨畢竟用法, 有若滅口而止, 人心不知懲畏, 王綱日漸墮壞, 今至於收拾不得之境矣. 虞 舜大聖也. 所恤者, 惟刑, 而猶曰怙終賊刑, 怙者有恃也, 終者再犯也, 今此星漢輩之倚依窩窟, 怙也, 戊己而不戢, 有乙丙, 乙丙而不戢, 有夏賊, 夏賊而不戢, 有復瑮, 復瑮而不戢, 乃有此星漢, 此不可但以再犯言也. 若使虞 舜而治之, 其不容貸也明矣, 乃殿下置而不問, 大臣三司, 據法爭難, 而不賜兪允, 耆臣泮儒, 投匭論斷, 而一例靳許, 以殿下動法堯 舜之心至於用刑, 何乃不相侔至此. 殊非平日所望於殿下者也. 雖然臣等之千里跋涉, 相率呼籲, 非直爲一星漢, 實是星漢 之窩窟根柢是憂, 非直爲窩窟根柢之是憂, 實睿誣之尙今未辨, 是痛是恨, 況殿下之眷念嶺南, 如彼其勤也, 禮待嶺南, 如彼其至也, 嶺南之搢紳章甫, 莫不有爲殿下捐軀以報之意, 如欲捐軀, 以報爲先世子辨誣, 斷然爲第一義理, 臣等何忍顧念身家, 不以幾十年結牆之懷, 拚一死直陳之乎. 臣等固知此言一出, 星漢徒黨驅之以逆臣, 而其爲忠爲逆, 殿下必洞燭之矣. 後世之秉蕫狐之筆者, 亦必有權衡者矣, 臣等又何畏焉. 臣等在野之臣也. 不聞疏體, 患在煩蕪, 而自附以一字一言, 皆從腔血中流出, 惟殿下, 另加留神, 明辨睿誣之由於讒賊, 頒示八路, 次正許多讒賊未及施之刑, 扶植倫常, 如星漢 之窮凶, 訊其窩窟根柢, 以絶禍本, 則宗社豈不幸甚, 臣民豈不幸甚. 臣等在道路之中, 又伏聞逆賊尹九宗發天地間所無之凶言, 嘻嘻, 此輩之怙終, 何若是愈往愈甚也. 星漢則其言也閃忽隱迷, 必待辨破而後可, 使其凶腸敗露, 至若九宗, 自其口直吐窮凶之招, 惟有用法而已. 九宗 星漢雖爲逆不同, 此輩之不忠於先世子, 大抵同然. 不忠於先世子者, 推而上及其不忠於景廟, 勢有所必然, 眞所謂一而二, 二而一者也, 何可以遲晩徑斃, 有所持難於孥籍之律乎. 伏願聖明, 亟從諸臣之請, 少雪神人之憤, 千萬血祝. 臣等不勝忠憤慷慨, 腐心痛骨, 謹昧死以聞. 讀未半, 日已曛矣, 遂張燭讀訖, 不聞天語者, 數頃矣. 仍命搢紳章甫, 解事者各數人, 陞殿聽敎, 余適在班首, 遂與姜世綸趨進上殿, 上曰爾等皆出入經幄之人也. 又因下敎, 招成彦檝
金熙澤 李敬儒 李憲儒 金是瓚於堂下, 而進伏, 時宮庭肅淸, 玉漏丁東, 寂然若無人, 上默然久之, 伏想天顔悽愴, 玉淚漫漶, 似有淚滴香案之聲, 仍命承旨, 修筵說, 下敎累千言, 筵說曰. (抄入. ) 上御熙政堂, 坐直承旨, 與疏儒入侍. 時左承旨林濟遠記注官李海淸假注書尹益烈記注官金良倜, 承膺祚進伏訖, 上敎于兩注書曰, 今日筵敎, 不忍聞不敢書之外, 詳細記注可也. 疏頭誰也. 濟遠曰, 姓名卽李㙖, 而故玉堂埦四寸, 故敎官光靖子也. 上曰儒生, 各奏族閥可也. 敬儒曰, 臣故判書奉朝賀觀徵之五代孫, 故參判沃之玄孫, 故校理萬維之曾孫也. 熙澤曰, 臣卽玉堂熙稷之再從兄, 翰東之再從姪也. 是瓚曰, 臣卽故司諫贈都承旨坽之六代孫也. 上掩抑良久, 敎曰心神無以收拾, 言語不能接續, 欲諭而無以爲諭矣. 又良久哽咽, 不成聲, 欲言而不能言, 如是者屢矣. 敎曰心旣抑塞, 語無次序, 欲言則恐有傷於遠儒瞻視矣. 又良久曰, 不忍以文字泚筆, 故欲面諭, 而亦豈忍聞爾等之言乎. 然而爾等千里裹足, 萬人聯名, 且事係莫重, 予豈以一見爲難, 而不賜一言乎. 若無一言, 則不但爾等之抑鬱, 嶺以南 幾萬人士, 將無以解其惑. 但精神迷錯, 難以盡諭, 當言其大略矣. 予之含哀忍痛者, 已經三十星霜, 踐位行禮, 亦近二十年, 許多歲月, 何日非銜恤之日, 而旣不敢以義理明言之, 又不能以刑政夬施之, 平日讀書, 非曰學力之有素, 而至於此事, 自以爲有躬行心得之效, 數十年講明者, 卽此箇義理也. 苟使大舜 周公易地, 則未知有何等透徹之見, 而以予識見, 亦不外乎素所講定者矣. 誠如爾疏中所云, 雖罪誅者, 不知其罪之爲何, 則一世之聽聞, 後人之傳聞, 將何以知予本心乎. 嶺南素稱詩禮, 列朝所以眷待者, 異於他道, 立國以來, 凡有大義理, 無不參涉. 戊申事, 雖爲一道之羞, 而此亦出於誤看義理, 不自知其歸於亂逆之科, 其時亦有誑惑煽動之輩, 甚於今日, 故誤了一道矣. 爾等之疏, 出於義理, 雖不能毫分縷柝, 而旣借方寸之地, 何可無一言乎. 自有天地以來, 有君臣父子之倫, 以予情事, 豈或有一分掩覆周遮之心, 而其事, 則至難言, 其言則不敢道, 天下事, 有經有權, 權之一字, 下聖人一等者, 不可遽議於達道, 而予於此事, 自有量度稱停者, 必欲盡言, 則亦有所不敢, 寧受天下後世之譏議, 豈敢盡其說乎. 尙魯則旣有 先朝下敎, 文女之罪, 與尙魯一般, 故踐阼之初, 一番處分, 蓋出於大體義理, 而其餘諸賊, 乙丙之間, 自干天誅, 幾皆伏法, 雖以麟漢處分言之, 旣在八議之科, 且其不必知三字, 便同莫須有等語, 而竟至致辟者, 不但以其時罪犯而已. 麟漢之罪, 正與復賊一般, 雖欲言之, 某年某日事, 予豈忍言乎. 至如禧賊一門之內, 父子兄弟男女老少, 至於奴婢之屬, 無一不伏法者, 自有誅討以來, 所未有也. 此無異於漢之三族法矣. 昔日离筵, 嘗有指禧賊爲江充之敎, 禧賊之罪, 卽此可知. 雖以丙申秋罪惡言之, 稱兵犯闕, 詬罵天日, 古或有之, 而挾匕埋凶, 皆出於禧賊之家, 此則千古所未聞也. 麟與禧特其大者, 其餘可誅可殛者, 幾皆鋤治, 至於復賊, 則有孚於麟漢手磔口臠, 猶屬歇後語, 每一登筵, 心骨俱顫, 豈忍一日對其面, 而手握重兵, 其徒寔繁, 有不可遽然處置者, 故竟因事端而用法, 前後凶逆, 終不得聲罪致討者, 誠以事在先朝, 難於爲說故也, 而竊恐義理, 自此晦塞矣. 丙申春獄, 人或疑之, 而載翰輩之爲極逆, 已在於一疏之前, 公行貨賂, 締結宦寺, 況其締結者, 卽效忠國來等凶宦, 而禧魯諸逆之所嘗締結者也. 百般鑽剌, 多般慫惥, 或以甘言誘說之, 或以危語恐動之, 予雖沖年, 豈不知此輩之陰譎乎. 將欲仰奏先朝, 發渠奸情, 則又敢以廢立等語, 公肆詬詈, 渠等之腸肚, 不難知也. 大抵復之一字, 先大王臣子之所不敢言, 殺之一字, 奉朝賀處地之非可擬提設, 或大行誅討, 明言不諱, 則先大王在天之靈, 雖悅豫於冥冥之中, 而 景慕宮於昭陟降, 亦豈無怵惕不安之心乎. 苟如此, 則予於他日, 恐無歸拜之顔, 以親心爲己心, 則有不得不然者矣. 載翰輩, 不但予之罪人, 卽景慕宮 之罪人, 又不但景慕宮之罪人, 卽先大王之罪 人也. 丙申處分, 烏可得已乎. 南中之出道顯者, 蓋亦起疑於處分之外面粗迹, 而全昧本事本意而然. 爾疏中, 亦言李彝章 趙重晦等事, 此人予何可忘之. 向時旌褒之典, 不足以酬其萬一矣. 大凡情之所在, 理亦寓焉, 理無無情之理, 情無無理之情, 予之秉執, 自以爲不悖於情與理, 而亦安知事事而合於情理乎. 近日柳星漢事, 亦有商量者, 人君豈有私讎, 而古亦有君讎國賊之語, 星漢疏上款, 一如麟復之爲予讎與否, 終未的知, 故姑不用法者此也. 李趾永疏中翬晩事, 似不知本事, 申光綏則雖用追律, 而晩則未必 與其子同惡, 若以時相而不可貸, 則此又有不然者, 何異於益男之只論金領府乎. 翬良則請鞫羅賊之箚, 言人之所不言, 亦可見其心, 而辛巳秋, 非此人, 則事將不測矣. 予之本意, 除非讎賊, 則不欲追論於身後矣. 羅賊設鞫前, 已得凶書於掖庭, 盤問之時, 搜出一款, 無關於金吾郞矣. 三浦張帆, 卽陽澤 麟漢等所 爲, 而皆已伏法, 趾永亦何以盡知其時事乎. 予亦不能盡詳, 如四五十歲後生少輩, 無怪其不知也, 人旣不敢言, 予又不忍提, 誠恐歲月寢遠, 義理愈晦, 百世之下, 不知予之本心, 故近於諸臣章奏之提說, 不忍 聞不敢言處, 不能使之勿爲者, 誠萬不獲已而然. 或者以爲麟漢無不必知之說, 善復若或先斃, 則將無以正其罪, 此說似近, 而亦有不然者. 麟漢雖無乙未負犯, 豈無處分之道, 而善復亦何待其自斃乎. 嶺南 卽國家根本之地, 緩急有所恃, 予之望於嶺南者, 非比他道矣. 予之本意, 大略如此, 爾等須以予之本意, 歸語一路人士可也. 下敎之際, 有時玉音斷續, 有哽塞悽咽之音, 草野賤臣, 得借方寸之地, 而三十年不敢道不忍提之義理, 今始親承下敎, 不覺淚落如泉, 況夕水剌, 尙未進御, 惶蹙悶迫, 尤無可言. 疏首略陳疏中大義, 而五輩不但哽咽不能成聲, 夜鼓已深, 不敢更慼聖心, 竟不得以一言仰達, 仍命在庭諸人, 陞殿聽批, 遂與諸人, 退伏楹外聽批, 批曰省疏具悉, 爾等千里踰嶺, 跋涉叫閽, 其事則至敬至重, 莫大莫嚴, 其言則聽不忍, 見不忍, 不敢提, 不敢道也. 予寧或開口於絲綸之間, 有若循常賜批爲哉. 此所以致爾等於筵前面諭本意者, 哽咽呑塞, 言雖不能盡意, 大略似不外是, 爾等無憂義理之不明刑政之不擧, 而惟予本意之愈晦愈隱, 是懼而是恐, 交相告戒, 念念闡揮, 則爾等嶺土搢紳章甫之功也. 聽批訖, 遂捧批, 以次退出酉末而入, 夜己四鼓矣. 命留門出送, 又命左右捕廳, 弛夜禁, 相與含淚, 步行入泮, 鷄旣鳴矣. 二十八日曉, 命政院, 還收批旨, 塗改數處而下. (刊一萬五十七人六字, 改書出給. )當日政, 復除修撰, 牌不進. ○自數日前, 城中外知舊, 絡繹來訪, 充堂衍宇, 應接無暇, 可喜亦甚勞悴也. (知舊名帖, 煩不盡錄. )○自是以後, 連日違牌, 三牌後, 傳旨不下. ○復議再疏. ○是日, 正言韓致應啓論門將喉院阻搪嶺疏之罪, 承旨一幷罷職, 門將亦爲汰去.
五月初一日,
會疏廳, 寫疏錄. (自是日以後, 司直徐有隣兵判李秉模司直邊得讓大司憲趙宗鉉右相朴宗岳等, 連上疏章, 而辭意與嶺疏同. )
初四日,
差祭毓祥宮端午祭大祝, 受香後始罷職. (是日, 太學掌議, 永削兩班, 首永出齋, 蓋以不許謹悉故也. )
初五日曉,
歸泮齊會疏廳, 薦出再疏, 疏首復李㙖也. (日前再疏, 疏首以金是瓚薦出, 而初三日政穉春兄除懿寢郞, 士論以是避嫌, 金君固辭, 不得已以搢紳薦望, 畢竟穉春兄準點出座, 蓋李兄迫於端午大享, 不得已出肅, 而罷祀後, 卽爲徑出旬呈也. ) ○韓主簿大裕折簡疏廳, 助以二十緡. (其書曰, 僉尊之秉忠踰嶺, 可質神明, 吾儕之鳴膽聳賀, 豈比尋常. 旅榻凡節, 能無艱乏, 玆呈二十緡阿睹, 仰助一時酒盃, 莫曰無名, 寔出同志云云, 一座嘉其義而受之, 是後卿宰之餽遺相續, 而以儒設疏, 亶出於闡明義理, 則延攬卿宰) (之餽, 近於貨之, 故其餘則一切謝遣, 所受者惟知舊若而人, 而左揆五十緡, 權判書@五十緡, 李光州 鼎運三十緡, 李安岳 益運五十緡, 其餘以紙筆問者, 煩不盡錄. ) 初七日, 封疏詣闕, 名帖爲一萬三百八十餘人, 大槪筵敎之下, 感泣無地, 忠憤所激, 按住不得, 更陳悲鬱之忱, 乞降闡明之命, 事呈于政院, 政院卽爲捧入. 其疏曰, 伏以臣等猥將咫尺之書, 敢瀆九五之尊, 其義則雖是建諸天地, 其言則罔非慼我宸衷, 一則冤淚盈睫, 二則惶汗浹背, 乃蒙我聖上推羹墻之思, 感草野之言, 特命捧入於喉院退斥之際, 仍卽賜對於文陛深嚴之所, 自顧蟣蝨螻蟻之微, 何敢以此自期於夢寐之頃乎. 悚息屛氣, 相率趨入, 瞻望天顔, 則悽愴而如有思矣, 承聆玉音, 則哽咽而不成聲矣. 漏籌轉深, 聖語愈勤, 其所以開示指導, 殆若家人父子, 臣等頑非木石, 安得不眼血而腸摧也. 從以十行聖批, 嘉乃義理之正, 勉以嶺土之功, 臣等雖卽日滅死, 復何餘憾. 惟當手擎恩綸, 身歸鄕里, 生而爲講磨義理之人, 死而爲抱歸義理之鬼, 則於分足矣, 何敢更爲瀆撓之計, 而第念義理與事爲, 本非二致, 講說義理者, 欲以施諸事爲也, 決折事爲者, 必也本諸義理, 義理而在口而已, 則是 空言也. 三代以前, 義理在上, 三代以下, 義理在下, 此今古有識之士, 所共於悒者也. 今臣等之期望我殿下者, 不在三代之下, 而乃殿下欲使義理二字, 在於嶺土而止, 臣等若默無一言而退, 則是不幾近於吾君不能者乎. 殿下之敎, 臣等非不恭聽也, 殿下之心, 臣等非不仰認也. 臣等終有所不能釋然者, 不得不冒萬死, 申暴義理, 惟殿下, 恕其狂妄, 試垂察焉. 嗚呼, 天下義理, 雖曰蠶絲牛毛, 若其大經大法, 撑天亘地者, 亦不難知, 爲人臣子, 則願忠於君父也, 願忠於君父, 則推之而愛戴吾君之子也. 是故無事, 則有延頸之愛, 有事則效剖心之忠, 此箇義理, 非凶逆種子, 夫孰不同得於秉彝之天也. 臣等一路齊聲, 萬口相應, 裹足千里, 生死向前者, 誠以同得之性, 必欲辨睿誣於三十載鬱結之餘, 若夫誅討凶賊, 猶屬辨誣後次第事耳. 臣等雖生長遐土, 鼎鐺尙有耳, 亦豈無日邊消息之眞正入耳者乎. 惟我莊獻 世子, 睿學日就, 令聞夙著, 自承代理之命, 每當賓對之筵, 儀容整肅, 酬酢簡當, 諸臣之嚴敬謹畏, 無間於大朝筵席, 至於酬應庶務, 大者微稟大朝, 餘皆親自裁決, 無不曲當事理, 此朝廷之所共知也. 及夫讒說播煽人心疑眩之際, 有溫宮臨幸之擧, 而或慮一事之貽弊, 或恐一夫之不獲, 申申焉管束, 眷眷焉慰恤, 億兆士民之瞻望羽旄者, 莫不攢手感泣, 至今三四十年之間, 湖西父老, 言及舊事, 往往流涕者有之, 此京外之所共知也. 以嶺人故說書權正忱 伊日日記見之, 方其(此下有天地震蕩之時, 擧措婉順, 處置雍容十四字, 而以御筆刊. )務在感回天心, 未見幾微言, 面禍變之際, 非睿學操存, 何以有此. 此臣等之所共知也. 彼蒼者天, 何故而生出許多梟獍, 以震主之權, 結在內之援, 無言不讒, 無事不幻, 抄忽毫芒, 變爲泰山, 子虛烏有, 化作眞境, 其機至密, 其謀益急, 畢竟魯禧之計成, 而宗社幾乎無托, 嗚呼, 天曷故焉. 今之秉義理者, 皆以誅討之尙今未擧, 爲腐心痛骨, 而臣等以爲辨睿誣爲急, 誅討次之, 誠使睿誣, 謂以不敢道不忍言, 而因仍置之不思, 所以嚴辨竭論, 昭示來許, 則在後千百歲, 手秉史筆者, 將何所依據, 洗滌讒誣, 大書眞蹟, 使先大王止慈之德, 先世子至孝之行, 竝耀齊光於宇宙之間哉. 萬有一如是, 則雖今日刑政, 倂與群凶之黨與, 而劓殄滅之無遺育, 亦無補於臣子至痛至恨之情矣. 雖然, 誅討, 所以討其誣也, 誣之者見討, 則誣及之地, 不待辨而自辨, 必然之勢也. 以此言之, 誅討之典, 其何可以次之於辨誣, 而不爲之盡分也哉. 伏承聖敎, 若曰設或大行誅討, 明言不諱, 則先大王在天之靈, 雖悅豫於冥冥之中, 景慕宮於昭陟降, 豈無怵惕不安之心乎. 苟如是, 則予於他日, 恐無歸拜之顔, 以親心爲己心, 則有不得不然者矣. 殿下此敎, 非不毫分縷柝於義理微妙處, 而臣等死罪, 竊以爲不然. 先大王之悅豫誅討, 誠有得於視於無形, 聽於無聲之義, 臣等固不勝欽服萬萬, 而以先世子於昭之心度之, 其所以喜且幸者, 理在無疑, 又安用怵惕不安爲哉. 殿下以親心爲心, 則先世子, 亦必以親心爲心, 以先王悅豫之事, 先世子之以爲怵惕不安, 臣等未見其理之然矣. 嗚呼, 先世子, 以英廟爲 父, 以殿下爲子, 天下之無憂, 未必多讓於文王, 而今乃使臣等, 不能辨誣之是憂, 涕泣齊籲於殿下之前, 殿下必先卞睿誣, 次擧誅討, 使義理無所欠缺, 然後先世子眞可以無憂於於昭陟降之所矣. 殿下誠慮及此, 其所亟允於臣等之言, 何待畢其說耶. 嗚呼, 人世之日月廻薄, 新寢之音容渺邈,
臣等之當此月, 訴此冤, 天意人事, 實有不期然而然者, 伏願殿下, 特降哀痛之綸, 備說先世子被誣之由, 頒示八路, 繼又以前修撰李趾永疏中所論諸賊, 或施孥籍之律, 或施追奪之典, 以樹倫綱, 星漢之究覈窩窟, 九宗之亟行追律, 幷允臺請, 無或一日稽遲, 則臣等始可以義理之大行, 歸詑父兄宗族, 兼以質諸鬼神, 勿以人廢言,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少選承旨尹弼秉奉批出, 批曰省疏具悉, 爾等今日之疏, 尤何忍忍抑賜答乎. 然萬餘章甫之論, 卽一國之公論也, 公論所同, 可見天理之大公, 則予豈可以一己之情私, 無一語於爾等乎. 爾等所謂頒示之請, 予不能從之者, 不惟不敢, 而不忍予言, 卽予一人之言, 近於私, 豈比爾等萬人之言, 則予於此, 乃敢更容一辭乎. 前修撰李趾永疏中諸賊之孥籍, 或追奪事, 至今有若靳持然者, 揆以恒情常理, 寧或無所 以而然哉. 翬晩事, 外庭之所聞, 異於予所知, 外此者, 亦有事實之不敢不然, 不得不然者存然, 一則有故宮官柳脩, 入對時下敎矣, 一則揭示訓辭, 手澤煒煌, 予果急於宣揚, 守而莫敢違, 其詳在起居註, 尾陳近日事, 或旣悉及於耆臣疏批, 或因先朝成憲, 而未施, 爾等須知予自來本心之斷然有所執守, 皆出於明先志, 而彰先休. 嗚呼, 血腔如沸, 貫徹胸肺, 而皇天后土, 照載上下, 陟降神明, 質之臨汝, 予何敢以予一人一時之言, 言之於爾等萬餘章甫也. 仍傳曰, 今因嶺土多士, 申籲衷懇, 不得賜批, 兼及欲言未能言之數件事, 大抵近日章奏之語, 到此事者, 一味受, 而見之者, 卽向日筵敎之意也. 今於嶺批之後, 未知者, 庶皆知之, 然且聒然, 則是豈諸臣事予之道理乎. 記昔先王, 以圓顱方趾四字之用於奏牘功令之文者, 輒置重典, 此豈追先之聖念. 或有所一 毫未盡酌量, 而有是也. 此意先自政院知悉, 遂奉批而出, 辭旨之惻怛懇切, 有加於初疏, 批旨奉讀, 感泣又倍於前也. 是日大雨達夜, 初疏批下後亦雨, 久旱之餘, 再得甘霈, 天意亦不偶然, 此後連日會疏廳, 更議三疏諸意, 必欲於十一二間更呈, 而但再疏之後, 意盡辭竭, 且聞南學設疏, 欲爲觀勢徐圖之計, 往議美閤, 亦以爲然, 遂議過齋後, 封疏計. ( 景慕宮齋日, 在是月. ) 初九日, 夜三更, 以前望, 除修撰, 十日, 爲皇壇望拜禮, 而玉堂闕員, 陪班無人, 不得已承牌入朝房, 以
疏儒未退之前, 不得供仕之意, 往復于政院, 以言以書, 凡數次, 政院辭以方有上候膈氣之症, 時未就寢, 以待諸侍臣, 出肅牌來去, 勿爲呼望, 此非言私之時, 且其情勢不合於辭職云. 夜將向晨, 不得已入肅. 初十日曉, 參皇壇望拜禮, 陪班玉堂, 則只余一人也. 罷歸入館, 申時修呈省記, 陳疏徑出. 其疏曰, 伏以臣嶺人也. 目見義理之日晦, 亂逆之層生, 彝天所同, 忠憤弸激, 竊附一道士論之後, 敢暴積年鬱結之忱, 而半夜筵前, 辭敎惻怛, 再承批下, 旨意鄭重, 方與 嶺外多士, 徊徨旅次, 相對掩抑, 不意玉署新命遽下, 此際庚牌嚴臨, 催召甚急, 更鼓轉深, 情私莫徹, 章皇出肅, 趨進陪班, 瞻望耿光, 粗伸義分, 而第臣區區情勢, 終有所按抑不得者. 蓋臣自鄕上來之日, 亦承除命, 而含默而待, 必自托於章甫之疏者, 欲以士論爲重, 而不欲以官職自居也. 嶺中人士, 雖甚輕淺, 所秉者, 百世之大義理, 所言者, 一國之大義理, 章甫首發, 而搢紳聯參, 則臣亦疏中一人, 義理未伸之前, 何敢晏然以官職承膺乎. 且伏念千里踰嶺, 相率而來, 瀝盡腔血, 未蒙允兪, 而疏儒未及退還, 臣獨 供職如常, 不但道理之所不然, 抑亦分義之所不敢, 百爾思量, 無路仍冒, 玆敢冒入文字, 徑出禁扃, 伏乞聖慈, 俯垂鑑諒, 亟賜刊改, 仍治臣瀆撓擅離之罪, 以安微分, 以肅朝綱, 千萬幸甚. 仍命還給疏本, 更爲牌招, 而一次違牌, 得蒙罷職. 十一日朝, 自政院書報, 有賤臣與疏頭, 走馬進來, 聽傳敎之命, 遂與馳往, 余則從宣仁門入, 先入政院, 疏首從敦化門入, 承旨微稟金翰東來待矣. 以司謁口傳下敎, 上段則書給金翰東, 出示諸儒, 來告諸儒去就, 下段則書給李㙖云. 下敎若曰, 凡今諸臣,
必知余近日模樣, 疾病則猶屬餘事, 見嶺儒疏批之後, 若以不忍聞不敢道之事, 復有章疏之擧, 是豈道理之所敢出乎. 設令當此可言之會, 眞有一陳之心者, 在京何未, 而觀望却, 顧見嶺疏假借之擧, 然後不顧苦心, 不會至慟, 看作茶飯說話, 互相紛然者, 尤豈可成說乎. 近日三司章疏, 及所謂方外儒生之疏, 萬萬未安, 此所以隨呈還給者也. 今番一二疏章之酬應, 卽萬萬不獲已之擧也. 大抵柳星漢無知妄作之擧, 必因年來過加忌諱, 後生少年, 無以知本事之所重, 故以生道示人之意, 忍而酬應矣. 若於嶺疏後, 擧必曉然知予意之所存, 一味如此, 則反有屑越而瀆䙝者, 着帽者, 有李得臣例, 儒士則又有先祖圓臚方趾處分, 以人情天理言之, 自上所以處之者, 豈不若群下而然哉. 此非付門將阻搪之事, 諸臣皆有族黨焉, 有知舊焉, 自當轉相告諭, 設有必欲爲之者, 涕泣而止之, 期於初無來呈者, 雖以政院言之, 以此事陳章者, 豈可開見乎. 此非形諸絲綸之事也, 又非分付有司之事也. 令諸臣知悉, 前玉堂金翰東之昨日徑出聞, 由於嶺儒之尙不下去云, 嶺儒再疏之後, 又有何加於此之言乎. 圓臚方趾之敎, 已悉於批旨, 而今此
下敎之申申, 寔出於待士之意, 前玉堂金翰東, 雖在罷散中, 使之冠帶, 常與疏頭李㙖, 招致政院, 以此敎詳細傳之嶺儒, 嶺儒聞此, 必當當日, 捲歸本鄕, 令賑廳給回糧, 參奉李㙖之辭官, 其意可尙, 一番副其意遞給, 從後收用, 亦無不可, 此意亦令言于銓官, 卽爲草記遞給, 近來除職, 不出石竇之外, 外方人才, 何以知之, 而適因封章上來事見之, 陞堂諸儒中, 金熙澤 李敬儒, 擧止容貌, 決非草草人物, 分付銓曹, 次次收用, 此則異於李㙖之除職渠輩焉敢辭官. 辭官則此大關紀綱, 嶺儒自嶺儒, 國綱自國綱, 當有別般嚴處,亦令知之. 奉敎而退, 曉諭諸儒于疏廳, 夕間自賑廳, 爲頒回糧, 蓋上敎也. 答以不敢受之義, 賑廳草記後, 仍又命給留糧, 申後入政院, 承旨微稟金翰東 來告曰, 諸儒旣承朝者下敎, 又承給糧之敎, 卽宜退去, 而抑有所抑鬱者, 適値此時, 惟願姑竢, 念晦間去就云矣. 使司謁口傳下敎曰, 今則日已暮, 明日開門時, 來待也. 十二日曉, 又向政院, 先入朝房, 以罷散官中, 冠帶常仕, 昨則有命, 而今則經夜, 於義未安, 未安之意, 往復政院, 則答以昨旣有命, 今何有異云. 故卽入政院, 諸承旨, 持公事先入, 俄而有賤臣入侍之命, 卽詣閤外, 隨承史而入, 累日公事, 酬應甚煩, 侍伏食頃許, 命賤臣進前下敎曰, 昨給諸儒留糧, 果何以爲之. 賤臣起伏對曰, 諸儒承此命, 惶蹙悶迫, 不知所以爲計, 臣亦無以仰對矣. 上曰諸儒欲留何爲. 對曰昨朝伏聞下敎, 退與搢紳章甫, 齊會一處, 曉諭聖旨, 則終日相對, 掩泣無言, 臣以爲日已暮矣. 來告有命, 使各言志, 諸生掩淚而言曰, 聖敎至此, 雖不敢時月久留, 如初來時, 計適値此月, 惟願少須臾無歸, 以過念日後, 去就云矣. 上曰欲過齋 日而下去耶. 對曰然矣. 上曰諸儒之意, 苟如是, 則何必强迫, 而此亦有不然者, 留在更無可言者, 須宜卽歸也. 對曰終日曉諭, 終日商確, 而諸儒之意, 終始如一, 無以强使退去也. 上悽然有間曰, 然則不得不更諭一番矣. 予於此事, 豈有一毫不誠而然哉. 本意固如此, 且有極難處之端, 誠難如諸儒期望之意, 且於甲申春, 有先大王手敎, 予亦有質言仰對者. 予時年少, 未知或有所未盡者, 而寧有是也. 義理本自如此而已. 昨筵有所下敎於重臣(藥院提擧鄭昌順. ) 者, 出而問之可也. 大抵義理如日月, 日月無言而明, 今之義理大明, 實嶺儒倡明之功也. 如向日方外之疏, 何足爲言乎. 賤臣起伏對曰, 小臣出入近密, 親承諭敎, 猶不無疑晦, 況遐土儒生, 何以詳悉聖意. 所以掩抑, 而不忍遞歸也. 上曰昨日留糧資給之敎, 實欲使之歸也. 蓋山林隱逸之士, 朝家之所以優待者, 或以資給留糧之事, 而豈非山林之士, 則安敢晏然承受乎. 且以國綱言之, 君賜之物, 稱曰儒生, 而不受回糧, 是豈道理乎. 大關紀綱, 欲爲處分, 而特以嶺儒之故置而勿問, 仍給留糧, 諸儒生旣不敢受, 則勢將退歸而已, 須以此意, 更加開諭可也. 仍敎曰, 嶺 人之閉塞, 今幾年矣. 對曰嶺人間, 或有陞用者矣. 上曰此事自癸亥以後, 勳貴之所沮排者, 其前則嶺人爲朝廷之主, 豈可曰間間見用乎. 仍又厲聲敎曰, 京漢輩, 有許多逆賊, 而爲其切族者, 依舊顯達, 嶺儒則以戊申一二詿誤之賊, 至於積年枳塞, 此豈事理乎. 今則嶺人門閥, 不可以高曾以下論, 當以高曾以上論也. 對曰嶺中古家世族, 高曾以下, 擧皆無官爵, 下敎誠然矣. 上顧左右曰, 嶺人其將如此而已乎. 朝廷之或爲收用者, 非李世李鼎哥, 則初不擧論, 實未曉其故也. 先朝擢用權相, 一至副學, 甚盛德事也. 又曰李㙖聞今日許遞筵敎, 必快活矣. 對曰李㙖除拜, 適値祭享, 求遞不得, 暫出供職, 而呈旬屢日, 未有發落, 方自悶迫矣. 幸蒙聖意曲念, 旣遞其職, 又悉其情, 其爲感泣惶蹙, 臣亦無以仰諭矣. 又曰向日陞殿諸儒, 如金熙澤 李敬儒, 皆非庸常人士也. 使之調庸見窠可也. 在庭諸生, 亦有如陞殿者乎. 對曰數三儒生, 適在前先陞, 其餘不得陞殿, 承敎擧皆抑鬱矣. 又曰金是瓚, 是金坽 溪巖之後孫, 而是癸亥反正後, 中路下去之金某乎. 對曰然矣. 末職爲司諫矣. 上曰肅廟朝, 特贈都承旨, 甚盛典也. 此人甚是奇偉人也. 又曰諸儒可歸, 而汝則不可卽歸矣. 對曰諸儒未歸之前, 雖不敢歸, 諸儒盡歸之日, 亦當隨衆同歸矣. 上曰然則不欲供職於玉堂乎. 日昨徑出, 誠是過擧, 到今不仕無義, 遂爲行公可也. 仍爲厲聲下敎曰, 勿爲如此如此, 起立之際, 又敎曰, 須以敎意, 出語鄕儒, 使之速歸也. 賤臣俯伏對曰, 雖百般曉諭, 惟願留過齋日, 終始如一, 臣無以仰對矣. 上曰須更曉諭, 此後則以書札往復政院可也. 仍退出, 歷入藥院, 見提擧鄭昌順問之, 則彼曰昨日果承下敎, 而槪是不得大行誅討之意, 其中亦有拈出名字云, 不復究問而歸, 午後有特敎還收, 給糧政院, 以筵敎書報曰, 金翰東聞朝者, 下敎傳之, 諸儒果何以爲之云也. 朝聞諸儒必欲過齋, 日後下去云, 故助給留糧矣. 更思之, 諸儒心無受之之理, 而强給留糧, 非待士之本意, 雖以諸生之處義, 受留糧而留在, 非士子道理, 不受留糧而留在, 亦非臣子分義, 過齋日後下去, 雖諒諸生之誠, 此則猶是人事上事, 聞此下敎之後, 豈可許久留滯, 不念分義道理乎. 以此以彼, 只當卽日治歸, 以此更爲詳細曉諭於諸生事, 書報金翰東事云云. 答書曰, 伏承筵 中下敎, 歸與諸生, 屢屢開諭, 則諸生皆以爲聖敎若是嚴重, 揆以義分, 固當卽日退歸, 而惟是區區抑菀之私, 一道同心, 千里裹足, 謂可以一伸百世之大義理, 而忱誠淺薄, 未蒙允兪, 群情之掩抑, 固無可言, 況値此月此時, 尤不勝悲菀徊徨, 願少須臾無歸, 以過齋日後去就, 此則翰東之所已告達於朝筵者也. 最是惶懍者, 下給留糧一事, 旣不得祗受回糧, 則留糧之祗受與否, 尤非義分之所敢論, 方與聚首兢惶, 罔知攸措. 翰東敢不詳細曉諭, 而諸生之意, 終始如一, 只伏切惶恐隕越之至云云. 日暮後, 有留糧還收之命, 是日政又除副校理李敬儒, 除懿陵郞, 此後連日會議三疏事. (南學儒生, 果於十二日呈疏, 十三日, 南學疏首 朴夏源, 來示疏草, 而原疏則洗草云矣. ) 十九日, 往來美閤, 議疏事, 期以二十二日差晩呈疏, 欲觀朝廷事機也. 二十二日, 自政院來報, 有早早來待之命, 遂曉入謝恩, 大臣諸宰, 入問安, 俄而退出閤外, 免冠待罪, 蓋大臣微發言端, 而有不忍聞之下敎故也. 日午後, 上命承旨, 口傳下敎於大臣以下閤外待命處, 傳曰頑不死滅, 忍過昨日, 則此時豈或開口 容喙於生世事, 而一日生在地上, 君臨卿等, 則其可忍爲無倫忘讎之人哉. 予雖不肖無狀, 其孝親尊先之心, 衆人所同, 則萬古天下, 豈有一毫歇後於天常人紀所當然之事, 而當爲而不爲, 含恤茹冤, 三十年如一日乎. 卿等亦須思之. 自予御極以後, 於某年義理, 不敢一番明言洞諭, 而其誅之也, 因他事, 其討之也, 托他條, 敢怒而不敢言, 敢言而不敢詳者, 予果眞箇匿怨忘讎, 義理之可明, 而不可明, 懲討之可施, 而不施乎. 此箇義理, 爲今日東土臣庶, 以鍮匙抣飯者, 孰不知予隱忍之本心, 而爲之悲苦傷痛乎. 此無他,大王許多丁寧之諭, 嚴截之敎, 幷姑不敢提說, 最是甲申二月二十日, 召大臣諸臣於眞殿門外, 有御筆手書, 口奏萬言文字頒示之擧, 而其槪略, 卽某年事之或有以某有何罪, 某犯何事, 提起於將來者, 則母論其事之如此如彼, 此以予謂如此如此也, 以不忍言, 不忍聞, 不忍提, 不忍見, 不忍道之句語結之, 曰以聖躬當之, 諄諄申申, 至以語到此事者, 斷以耉輝鏡夢之律, 其下又有不忍承當之敎, 而又若曰如是然後, 可以明汝未暴之先志, 而予之慟惜之心, 可以有辭世臣, 又可次次知予之本心及先志, 又知予之此意, 而汝亦爲孝於祖之孫, 孝於父之子爲敎也. 又召大臣以下齋殿, 下宗統綸音, 其時事實, 皆入於丙申上疏後洗草中, 惟綸音及口奏眞殿之文字, 尙在史庫及政院日記, 口奏文字, 雖不敢奉出而見之, 至於政院日記, 一按可知也. 予於伊時, 因下詢, 質言於前席, 則若於先朝賓天之後, 爲可以惟意所欲爲, 一反甲申之對, 則是豈事死如事生之意乎. 且況聖敎中, 痛惜二字, 卽追悔之聖意, 予奉而銘肺, 將爲死且瞑目之端, 然不可抑者, 至慟也, 不可遏者, 至情也. 大倫所在, 血讎在彼, 於是乎參前倚衡, 求權於經, 千思萬慮, 焦腸煎肝, 先之以乙未誅討, 以身替當, 而必欲及於先朝在宥之時, 而次又翌春丙申, 以陳情之疏, 泣籲於代聽庶政之後, 獲蒙天地罔極之恩, 特命以不忍之文字, 竝付之洗草. 及其洗草之日, 聖敎若曰, 此擧勝於思子之臺望子之宮, 予有歸見地下之顔, 其下又有感頌掩泣之敎, 予豈忍盡誦乎. 仍命行百官之賀, 而書下錫號之綸音, 及御製諭書御筆銀印, 而予初則抵死不敢承當, 尋有還收錫號之命, 及諭書中, 嘉奬句語刪去之敎, 故予不得已祗受, 又 其後御殿受宴, 命予往申展省之禮, 今雖欲百番編書, 萬番揄揚, 豈有過於先大王甲申追悔之敎, 丙申洗草之命乎. 此其先朝本意之大略也. 先朝聖恩, 自先朝聖恩, 予之至痛, 自予之至痛, 自丙申丁酉以後, 屢起之逆獄, 無不本之於某年義理, 雖知我者知之, 不知我者不知, 而予之所執, 政在於外, 而形跡之不露, 內而義理之自伸, 外而甘受忘讎之譏, 內而默運致討之方, 上而不負聖恩, 下而不@吾顙, 而要之歸趣, 不越乎次第酬雪而後已. 向筵嶺儒所奏中, 誅討之不以其罪, 取比於里克, 里克之時, 獻公若有遺戒, 里克之事, 孔子豈有貶議. 此則嶺儒跡疏初, 雖未悟聞, 此敎不待多言, 必當立解矣. 但近日庭臣之北面於予, 而跡不疏外, 識其裏面者, 於此若有一毫謂予有未盡分處, 殆若乙亥以前之誅討者, 非亂賊乎. 逆臣乎. 乙亥以前, 則先大王以事屬聖躬, 過加靳持, 而在今時, 則予果忽於不反兵之義, 抛却不共戴之讎, 故致此近日爻象乎. 此所以九日齋居, 如不欲生, 而不欲對, 卿等臣隣者也, 蓋以三十年含茹之本心, 豈欲忍言於絲綸, 忍見於章奏, 而星霜浸遠, 事實漸晦, 以不忍提, 而後生不知莫重之義, 以不敢道, 而世人不識莫嚴之事, 而左相以素所秉執之人, 抗陳一箚, 不得不措語賜答, 伊後卽欲禁其紛然, 至於諸臣章奏, 或不賜批, 或令還持去者, 此非前後之矛盾, 一則象魏懸法, 一則生道示人也. 其後嶺儒之來也, 召見賜批, 亦出於急於曉諭, 又以嶺儒入侍時筵話, 卽令頒示中外, 尤可見予意之所在, 則領會者, 見必痛泣, 迷昧者, 聞當戰慄而已. 凡今血氣之倫, 頂天立地者, 寧或有他意於其間哉. 此而或反於是, 萬一有見批旨與絲綸, 而不知冤酷之意, 聞面諭與筵本, 而未見痛泣之容, 敢於不忍言不 敢道之撑天蟠地, 罔極之事, 謂予忘先而背本, 則此果何許心腸. 外此皆屬於不覩不聞, 姑不索言, 而前乎千古, 後乎千古, 豈有若不忍言不敢道之某年大義理, 則予之本來所執之上段縷縷云者, 果若有未盡分處, 則雖至尸諫, 無所不可, 又或所謂未及懲討之類, 各自有委折, 而細細斟酌料定者, 予於此其可無端恬然乎. 設有未知予意者, 但當紬繹本意所在, 期於自歸無疑而已, 爲今日臣子, 忍於此爲逞私之端, 爲藉此挾雜之計, 以匿讎忘怨, 隱然歸之於上, 而乃敢托以懲討不稱量, 無倫脊, 不當入而入, 當入而 不入之類, 茶飯說去於公私話頭, 則惟今朝鮮世界, 所謂君長者, 果何如人也. 俄筵先以二字, 下敎於卿等, 非激也. 予雖不學, 不爲任情之說焉. 徹天窮地之至痛, 猶不敢任己私任予意, 況對臣隣, 豈爲此蔑理悖常之言乎. 人而無人倫, 不得爲人, 國而無人倫, 不得爲國, 況君人而御國者, 若於孝親尊先之事, 有一毫未盡分之歎, 而爲廷紳之所抵掌容喙, 則國非其國, 卿等豈待筵敎而知之乎. 有人倫, 然後爲國, 卿等之半日免冠, 只曰俟命, 果何益於大義, 而何益於予乎. 其所闡揮之方, 卿等思之. 於是大臣諸宰及三司, 始更入, 仍有賤臣入侍之命, 進詣閤外, 隨承史而入, 進伏筵末, 大臣諸宰退出後, 命賤臣進前敎曰, 今則義理大明, 嶺儒不必留, 俄筵有左相所奏, 出門于大臣, 詳傳于諸生, 聞左相言, 則諸生願得退修學業之批云, 須依賜批例, 口傳于諸生曰, 前留 糧, 雖不承受, 今給回糧, 必不敢不受, 幷以開諭可也. 承命退出之際, 敎曰玉堂雖單直, 勿拘出去, 治送嶺儒可也. 承命退出, 歷入賓廳, 左相及領府事李福源領敦寧洪樂性藥院提擧鄭昌順同座矣. 入拜左相, 報以筵敎, 左相欲言而未卽發口, 座中諸宰, 以次辭去, 左相曰, 俄筵奏曰, 臣於向日箚子中, 請下哀痛之敎, 頒示八方, 嶺儒再疏中, 所請亦在於此, 今日下敎, 卽哀痛之綸音也. 伏況下敎中, 先大王追悔之意一句, 卽爲辨睿誣之大關捩, 嶺儒抱此下敎而歸, 志願畢矣, 必將退歸矣. 上曰果卽歸乎. 對曰必歸也云云, 遂入泮, 詳告諸儒, 爲撤還計. 二十三日, 朝自政院, 來報金翰東來待, 馳進則命謄去昨日下敎也. 又命承旨李晩秀, 謄一本給嶺儒. 二十六日, 齊會疏廳, 議曰前後絲綸, 自上特命, 持往安東宣諭一道, 傳爲寶藏, 則此意當先通, 故遂發文于四長官, 以八月初三日, 定道會于安東鄕校. 二十七日, 疏頭以下搢紳章甫, 皆發還, 而吾輩三十年抱持之義理, 今始一番洞卞於咫尺文陛, 死復何恨, 而吾則縻於館職, 不能携手同歸, 殊可悵也. 遂吟贈行詩二律, 詩曰一封腔血草茆臣, 泣訴幽冤徹蒼旻. 惻愴絲綸傍有鬼, 肅淸宮禁夜無人. 東方百世知君父, 北面三朝幾搢紳. 從古大論吾嶺出, 鳶天造 化一番新. (右) 春秋讀盡卅年來, 一國公言萬口雷. 忍使人彝終斁絶, 從知天道有傾培. 高懸白日朝鮮界, 遠屛妖魔嶺海隈. 父老山南扶杖聽, 涕洟交滴鬢毛皚. 八月初二日, 會安東鄕校, 一番宣諭, 元本藏于本校藏敎閣. 臥隱先生文集卷之四
53세 때인 1792년(정조 16)에 홍문관 修撰으로 재임하면서 올린 상소문과 관련하여 엮은 기록이다. 사도세자를 비방하는 상소를 3월 18일에 柳星漢이 올렸다. 그러자 영남지역에서 윤4월 27일에 영남지역에서 10,057명의 사람이 연명하여 유성한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면서 상소를 올린 사건이 있다. 일명 영남만인소로, 소두는 李㙖이다.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게 되면 승정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成均館으로 들어간다. 成均館에서 올려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져야만 비로소 승정원으로 들어가고 국왕에게 보고된다. 이 과정에서 당시 老論세력이 가득한 성균관에서는 영남만인소를 올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현직 관료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면 별로 상관이 없다. 영남만인소가 저자인 金翰東의 이름으로 올라가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임금은 영남만인소를 읽고 저간의 사정을 안 뒤에 소두인 이우를 직접 데려오라고 하였다. 국왕이 상소를 올린 유생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고금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소행일록을 기록한 날짜는 윤4월 4일부터 8월 2일까지이다
와은선생문집권지오
雜著
사행일록 ( 仕行日錄 )
始余蔭仕, 六七年隨行逐隊, 別無可記, 自釋褐以後, 備嘗世味, 略記于左. 辛丑臘月, 大政首擬敬陵參奉蒙點, 壬寅正月, 趨肅敬陵, 卽德宗大王陵, 王妃祔于左崗. 甲辰四月, 內遷中部奉事, 秋被薦桂坊副擬侍直未蒙點, 丙午臘月, 大政陞尙衣院主簿, 當日移除
司憲府監察.
丁未
正月二十一日人日製居魁直赴殿試, 余自少屢中初解而不利貢院, 今則老矣. 無意榮途而偶入試場, 得捷嵬科, 還可愧也.
○二月初一日, 以祭監往參孝昌墓朔祭, 蓋將遞歸而小祥時, 更難上來, 故求差祭監也. 或云唱榜尙遠, 本職不必辭免, 而余意則已決遞歸, 呈辭單于憲府, 移文吏曹, 因以入啓遞職, 積年旅遊之餘, 脫出樊籠, 浩然可想也. 己酉正月晦日, 約會試應赴, 諸儒發行西上, 蓋式年唱榜時, 直赴故也.
○四月初十日, 入觀殿試題, 則觀豊閣銘也. 製呈而退. ○十二日有入侍命與同榜入春塘臺, 午時始入, 侍甲科三人先入而退, 乙科以次進, 乙科中二人, 不來五人列侍而余適居中, 上曰居中者是金翰東乎, 賤身逡巡未及對, 承旨李時秀問曰果否, 對曰然, 仍命退出, 槪之於他人, 無所俯詢, 而天語獨及於微臣, 不勝惶感. ○十三日, 唱榜以權停禮設行於仁政殿, 差晩而出, 歷謝門內外五六長老而歸. 蓋孤露之餘, 無意隨衆遊街也. ○十四日謝恩. ○十五日謁聖. ○十七日, 晩後成均館吏, 持典籍望筒, 落點而來謁, 蓋於昨政首
擬蒙點也. 招掌務吏爲書謝恩單子, 俄而騎省, 吏持望筒, 來仍口傳首擬騎郞而蒙點也. 仍飭曹吏書呈謝恩單子, 且飭勿爲懸入, 入直省記槪本曹郞謝恩後, 卽爲入直, 而余於本曹無意仕進故也. (蓋以先府君帶是職喪蹄也)○十八日謝恩. ○十九日本朝草記, 入啓遞差. ○八月望後, 自嶺營得見洪承旨仁浩書有曰初六日, 次對大臣備局堂上, 引見入侍時, 下詢嶺南人材, 右議政蔡濟恭曰以科目中論之, 金翰東地處人材, 文學俱是可合收用之人也. 其世閥則金翰東之曾高祖, 俱經玉署而曾祖金聲久則曾爲關東伯, 其七代祖, 卽故副提學宇宏號爲開巖而故名臣宇顒之同生矣. 上曰唱第時一見己知不草草, 今聞卿言果然矣. 欲爲召見承旨以此筵敎書報嶺伯, 使之起送可也. 嶺伯洪檍書, 又繼至胎送筵敎而有曰聖意旣不 偶然, 又當國家大禮, 白衣踰嶺, 恐不當嫌, 竊想不 日登途云矣. 顧此草野疏逖之蹤, 鹵莽湔劣, 最在人下, 而大臣之誤, 薦朝家之謬, 恩如是, 鄭重惶恧悚蹙, 不知措身之所也. 特敎旣以一見爲辭, 不敢違傲, 且伏聞永佑園遷移定在十月新園定於水
原, 一國臣民, 擧切愴幸, 雖草野儒生, 山谷愚氓, 皆願趨哭於廞衛之下, 方謀嶺中散官, 約往參班此際, 又承起送之, 命進退不得,
九月九日, 束裝西上.
○ 十月日, 與嶺中親知數十人, 往參破舊園哭班, 發靷日, 又參哭班於楮島江郊, 是月設庭試, 因入格儒生, 入侍時, 有賤臣臺通之敎前, 次來留泮村已久, 遷園大禮已過濡滯無義, 方謀還鄕, 日政首擬持平而蒙點, 一次牌不進適, 値三司合啓, 因爲出肅, 傳啓日朝講與大司諫, 李明俊 入侍, 上以合啓, 方張頗厭聞之先爲出送玉堂, 上下番, 以是被推大諫, 引嫌而退, 出上命賤臣傳啓賤臣進前奏曰三司旣不得合啓, 諫院引嫌而退, 則小臣何可獨傳府啓乎. 上笑而微咈之, 承旨左右微喝之方, 欲請推之際, 左相金鍾秀奏曰諫院憲府自是一體臺臣, 處義甚得臺體矣. 上曰然則避嫌可也. 賤臣啓曰臣以庸愚, 無似初登筵席, 專昧體例諫長避嫌之際, 未及同參而兩司自是一體, 其所處義, 宜無異同, 臣於諫長被推之下, 有不敢晏然者, 何可一刻冒膺於臺次乎. 請命遞斥臣職, 上曰勿辭, 亦勿退, 待仍命傳啓, 傳啓而出, 將出之際, 上命賤臣進前命擧顔, 仍敎曰何間上來乎, 對曰趁顯隆園遷奉之期, 上來而留滯已久矣. 又敎曰何間欲歸乎, 對曰臣有狗馬之疾, 且來滯已久, 本職遞免, 後當卽還歸矣, 仍爲退出憲府直房, 以兩司不備, 不得傳啓, 日暮時, 與僚臺留門啓請, 而同詣臺廳, 夜四更, 始傳命而合啓, 翌日始爲退出政院啓曰兩司詣臺, 臺臣昨旣留宿臺廳, 而今日不爲傳啓而出, 持平金翰東 稱以朝筵傳啓, 昨夜與詣臺諸臣渾入於留門之後, 請推去云云, 翌日違牌遞差, 卽爲還鄕.
庚戌
四月以前望, 除正言, 以在外蒙遞.
○六月十三日, 政特除副校理, 仍爲馹召草野疏逖之臣蒙此曠絶恩數感悚惶恧, 不知攸措○二十七日, 聞有國家大慶, 元子誕降矣, 八域顒祝之餘, 臣民蹈抃, 曷有其極, 賀班必在, 近日爲發路文.
○七月初六日, 入泮, 九日曉, 入闕先參, 三七日賀班, 仍爲謝恩. ○初十日, 搆呈辭疏. (疏見上)○十八日朝, 以司謁, 口傳下敎政院, 曰遠人久直, 欲爲召見, 召對爲之, 卽向政院入侍, 命下承旨, 已向閤門外, 吾與上番隨入參贊官, 李敬五閣臣鄭大容史官許鞏
白慶楷注書, 趙台榮以次進所講, 卽貞觀政要也. 遂進講貞觀三年, 李大亮章上曰加講, 又講, 貞觀八年, 陝縣丞皇甫德三章訖, 上曰陳文義, (文義見上) 講畢, 上顧謂賤臣曰中批之意, 意有在焉, 聞爾不 特文詞, 頗有學識云, 義須敷衍, 文義不特文義至如袞闕朝政之大小可言者, 邑弊民瘼之巨細可聞者, 一一洞陳焉, 賤臣再次起伏對曰小臣新從下土來朝政之闕, 遺姑未及聞所居窮僻, 民邑弊瘼, 亦未詳知倉卒之間, 無以仰對矣, 上曰今年農形何如, 對曰臣本在鄕, 食力備知稼穡事, 嶺鄕則頗有有秋之望, 有間退出格外, 恩命方切惶懍之際, 特念鄕人之新入, 有此不時召對之命, 筵中下敎, 又極鄭重螻蟻, 賤臣何以得此於聖明之世也. 感泣無地, 後數日出直. ○八月初一日, 有宗廟景慕宮展拜之命, 入館, 中隨駕詣宗廟行禮後監試試官, 望出吾亦末擬, 蓋元子定號慶科初試, 在初二日也. 大駕向景慕宮, 諸侍臣, 方倚馬板廛橋傍, 以待上馬令, 忽有入侍命, 趨進上御步輦落點, 一所試官, 望參試, 卽賤臣也, 命除謝恩敎曰科場事, 必善爲之. ○初二日, 開場懸題, 一飯之頃, 先呈 太多而無足觀, 士習可笑, 是日考千餘丈. ○初三日, 考三千餘丈. ○初四日, 開場後, 自上催促, 明朝出榜, 所作雖無可觀而忙中瞥過, 恐有遺珠之歎. ○初五日, 出榜詣闕, 留門入肅而退. ○初十日夜, 方有身病, 呻吟已數日矣, 摘奸宣傳, 來問病情對之, 以實有頃以司謁下敎, 政院使之, 出直. ○九月初二日朝, 後聞畿伯狀啓, 到院而鄭妻擅離棘圍, 仍卽還送云云, 事極驚駭, 趨詣閤外則大臣及諸承宣已先詣矣. 隨後班請對啓辭批曰事已妥帖, 卽爲退去云云, 俄以責以久, 不退罷出, 諸承宣兩司繼至請對, 仍又盡罷之承宣, 卽空大臣曰承旨皆罷退, 勢當出去, 諸玉堂隨而出到館, 與諸僚陳箚, (箚見上) 夜深後, 入啓特下, 箚本命洗草. ○初三日, 與僚官陳箚, 徑出闕直數日, 違牌四五次特命竝遞之, 獨賤臣移除修撰. ○初九日, 親臨春塘臺, 菊製以對讀官, 進參連日入直製進各陵告由文. (文見上)○十一月二十三日, 政拜校理. ○十二月初五日政又除校理以在外遞. 辛亥正月二十三日, 政以前望除修撰, 二十五日下諭, 行到幽谷聞以在外遞, 仍卽還歸. ○五月十八日, 伏承, 十二日, 所下諭旨, 更除副校理也. ○二十五日, 發行. ○六月初四日, 始入泮, 蓋本職纔遞而元子宮誕辰, 不遠, 旣到近畿, 不敢徑還, 留數日, 因大臣陳達特敎, 遠來侍從付軍銜錄, 始知入城之爲得計也. ○十五日以以軍銜坐參, 貶坐于內兵曹, 日前本曹貶坐時, 不進而特敎, 不進軍銜人別, 又參貶坐也. ○十八日誕辰問安, 以無職, 不得參瞻望攢賀, 無間於參與不參也. ○十九日, 治發將還鄕, 俄而館吏奉召牌而至, 以前望除副校理隨牌入肅. ○二十五日入直, 上俯詢賤臣曰嶺南
近日無爭競之端乎, 對曰近日則稍定矣, 上顧語大臣曰嶺南之向時紛紜, 只緣無宿, 德無位望以鎭安之因與大臣語及賤臣至有千萬過分之褒, 而天顔溫, 酬酢如響, 有時玉音, 低微不得詳聞, 其中可記者, 有曰此儒臣嶺人也, 嶺人例稱鄕闇而此儒臣有異馬, 蓋以其曾有蔭路履歷, 而其得免鄕闇可嘉也. 嶺人多不識時務, 或受京洛人侮弄, 至於取敗者多矣. 此儒臣不然, 京洛人焉, 敢侮弄予以是嘉尙矣. 因及嶺俗曰大抵嶺人皆純直, 故雖所執, 或有偏處, 必以所主義理, 無所移易, 至於取敗而亦不悔, 此俗可嘉, 予於此儒臣, 深有所期待焉, 大臣奏曰此儒臣不但學識有餘, 其世閥甚赫矣. 上曰金宇顒之後孫乎, 大臣奏曰然賤臣起伏對曰金宇顒卽小臣之七世傍祖也. 上曰然則金宇宏之後孫乎, 拈出諱中下字以詢之大臣曰果是也. 顧語小臣曰爾祖末職副提學乎, 對曰然, 上曰予潛邸時, 取見宋元綱目, 至今有之乎, 其本在何處乎, 對曰後孫家藏進覽本亦已下去矣, 上屢下不堪當之敎, 仍敎大臣曰大體觀人之法, 先見其色相, 而年前李某之來, 洽聞其名, 不覺失望, 予非以貌取人, 此儒臣見其色相, 亦可知其人盛名之下, 相亦不爲無助也, 大臣奏曰云云然矣, 仍爲傳敎曰應敎不是華銜, 仍爲傳敎曰應敎不是華銜, 如此儒臣, 固宜速擬待長銓出仕, 卽爲擧行如此儒臣之年老, 速擬可也, 曾見嶺人之某某, 至宰列者, 而此儒臣當出其右, 速擬遷陞然後, 可以漸次至緋玉雖銓任, 必可堪矣, 雖銓任必可堪矣, 必須久仕然後, 可以練習朝事矣, 大臣奏曰嶺俗以白衣踰嶺爲恥, 遞職卽歸, 何以久仕乎, 上曰其俗固好如此儒臣, 不必速歸, 必須練習而後可也, 上命大臣退備局, 諸宰以次退出, 賤臣意謂待諸宰盡退, 方欲起出上曰姑徐姑徐顧, 見備局二員, 尙未起矣, 又敎曰何間欲歸乎, 對曰姑留供職遞免後, 卽歸矣, 敎曰必勿速歸, 仍爲退出賤臣之庸陋, 鹵莽最出人下, 而咫尺前席, 特蒙如天之恩, 惶感悚蹙, 無以爲心. ○七月二十四日, 政除咸鏡道都事, 蓋以監試掌試特敎時, 任玉堂幷擬也, 時方入直申後謝恩而出. (此後見北遊錄) ○十月初十日, 始還遞歸, 聞大臣於八月次對時, 因潦雨奏關北掌試, 必難及期, 上敎亦以爲念, 仍請 關北都事前期數月差, 出仍爲定式云矣. ○十一月 十三日, 政除獻納, 伏承下諭, 到豊基陳辭疏, 而還. (疏見上)○十二月初三日, 政除修撰晩承下諭. ○二十四日, 到豊基, 見朝紙, 前除已遞, 而十六日, 又除副校理下諭不來矣. 壬子二月初二日, 伏承. 正月十八日, 所下諭旨, 前除見遞, 末擬修撰蒙點矣. ○初十日發行, 行到聞慶聞本職已遞, 而又初三日, 政除修撰, 方以宇鎭事有三司懲討之擧, 不但屢違召命, 極爲惶悚, 聲討方張之際, 不敢徑還, 仍爲西上. ○十六日, 入城, 出肅後以監會試官, 望出不得已承牌謝恩,出往一所, 余卽四試官也. ○十八日曉開場, 日暮時, 暗行史官出道奉命, 入場而着儒巾, 作應試儒生樣, 終日出沒場中矣. ○二十日開場史官終日出沒, 又如前日場也, 出榜後日暮歸泮館. ○二十九日, 以講經會試, 試官望落點, 承牌開場, 諸試官太半, 留意於嶺儒, 而嶺儒之以實才稱者, 皆見屈, 可謂不 能者天也. ○三月初六日, 出榜詣闕入肅, 三更後始出. ○初十日, 設三製于春塘臺, 以對讀官進參懸題後, 回鑾收券後科次入侍于便殿, 初更始出榜來. ○二十二日, 在直將與下番遞直之際, 有館錄當日內, 會圈之命, 仍爲陳章徑出, 蓋館規以中批差除, 則不得參會圈故也. 俄而還下疏辭責敎嚴峻, 不得已與上番同入, 會中論圈事, 四月初四日發還. ○閏四月初四日, 又承下諭以前望除修撰, 再從姪熙稷亦同除, 故館吏奉下諭而來, 將欲緩緩發行, 行到嶺底封章而還矣, 卽見京書則 柳星漢以正言投, 進凶疏語逼景慕宮大是不道, 翌日晨, 往三溪書院, 以唱一道, 叫閽之擧, 約會近地同志, 發文道, 內將與搢紳章甫, 合疏聲討, 期以念後西入. ○十二日, 與公叔發行, 到丹陽公叔封章而歸, 余卽趲程入泮, 不出仕, 姑待嶺人齊到與之合疏, 遂蟄伏泮邸, (此後在疏行日錄)疏儒罷歸後, 連帶本職而積憊之餘, 又潻暑症, 無以强作, 且不入於牌招中, 故不爲就直而上番久空, 方自惶蹙, 自政院來, 促就直, 蓋上意也, 遂馳進入直. ○六月初十日, 政特遞前敎, 授李肇源 鄭東榦等外, 補是日除, 南學敎授, 旣在闕中, 卽爲謝恩, 連日在直, 聞因暑濕, 有獄囚疏, 放之命, 柳星漢之父, 師文亦入, 放中師文, 亦以在家亂, 言收繫已久, 不但爲星漢之應, 坐而忽遣, 假承旨李彙有此擧行極爲駭憤, 遂入玉堂,與諸僚聯箚, 請還, 收師文放出之命, 論假承旨率爾奉行之罪, 而批旨不允. ○十三日, 以敎授往參春曹, 貶坐午還直所. ○十五日, 以別兼春秋例, 承命摘奸西部城內人家頹壓處, 與兵曹郞洪秀晩同往分洞, 契看審終日夜冒炎沾雨, 極甚憊瘁. ○十八日, 入參問安班, 今日爲惠慶宮元子宮誕辰也. 自惠慶宮頒下, 靑囊一部, 拜受而退. ○二十二日, 大政以掌令首擬蒙點, 違牌許遞, 午後以副應敎末擬蒙點, 已過一望而逡巡, 不敢出肅矣. ○ 七月初七日酉時, 因館直之, 久未交替, 飭敎嚴重, 因命出肅, 未肅人一竝從重, 推考牌招入直. ○七月十九日秋, 到記儒生科試, 時以對讀官落點, 卯正上親臨仁政殿行禮, 懸題後還宮, 收券後, 科次入侍, 便殿儒生, 三百九十餘人, 只取次上一人, 餘無可觀, 依先朝舊例, 將爲更試而試官因用, 故余因入直. ○二十日, 上御熙政堂懸題後, 還御便殿, 諸試官退, 待收券後入侍, 便殿諸生所作, 又不滿意, 只取十人將以待晴更試, 蓋當日大雨故也. ○二十一日, 皇壇望拜, 禮以侍臣參陪班, 退歸本 館, 欲爲遞直而名以試官往來泮邸, 亦恐有嫌, 因爲 入直. ○二十二日, 有三試之命, 親臨懸題, 依更題例, 爲之收券後入侍, 命賤臣對讀時, 欲交遞少休則又命仍讀曰予欲聞此儒臣讀書聲也, 讀至終券, 咫尺前席, 益覺悚蹙而有時下敎曰儒臣讀書聲, 眞讀書人也. 自省又覺愧恧及定等第時, 上命諸試官, 各陳所見, 鄭判書昌順奏曰對讀官素習策工, 可質問矣, 上曰好矣, 臣起伏對曰賤臣素無知識, 且廢策工已久, 何以仰對乎, 然聖問之下, 不敢終嘿, 略有所陳, 而仍爲坼名, 卽周姪也, 榜出後進前取試券, 退出賓廳, 出榜寫呈, 正書榜目, 而退. ○八月 初五日, 呈疏, 首陳李柱國事, 尾附還鄕之義, 政院退送. ○初八日, 差南壇終獻官, 六日齋宿成均館, 七日陪香往還. ○十一日, 移拜太常正, 蓋特敎也. ○ 十二日, 出肅入政院, 見趙令錫穆密言, 昨日入侍時, 特問金翰東以時任應敎不入, 承宣望何也, 對以未經準職矣, 翌朝太常正李日運以前, 望移除正言下敎, 吏曹以玉堂中, 未經判事者, 檢擬太常正, 仍有是除云莫非恩數, 尤極感悚. ○二十日政移除副應敎. ○二十一日, 謝恩仍參常參禮, 卯初入侍, 以長官參三司合啓, 孔聖後裔, 收用 事收議對曰大聖人後裔, 來住我東, 誠是異事, 雖異於闕里之世嫡, 東來以後, 亦自有嫡長, 況又故名臣 孔瑞麟後孫則自朝家收用, 甚是盛德事也. 如其可堪仕宦則特爲錄用, 如或不堪則依中國世襲之例, 其嫡長孫, 世世給復以表, 殊異之典, 恐合事宜矣, 午末始退. ○九月初五日以前, 望陞拜同副承旨, 自顧空疏, 荐蒙曠恩, 益切惶感, 違牌卽遞. ○十二日, 光陵幸行, 回鑾時以散班, 紙迎方謀數日間 還鄕. ○十三日以前, 望除同副申後出肅. ○十四日曉, 入政院, 與左副朴奎淳入侍, 以嶺營査啓安寵事下詢于朴僚曰今見嶺伯査本則安寵之手, 犯於奉安傳敎之@, 自歸脫空向日疏論, 得無爽實乎, 朴僚對曰臣別無, 從他風聞得見, 嶺儒之大學通文事, 極駭悖, 故有所論罪仰達矣, 仍下詢於賤臣曰同副遠滯洛中, 必不詳知矣, 賤臣起伏對曰臣果久留洛中而得見泮儒之自鄕來者, 頗詳聞矣, 安寵事, 豈必曰渠自手犯乎, 犯者新鄕而新鄕本無賴何敢干預, 鄕事都是寵之所嗾, 而致此悖擧也, 大抵安東爲一道之根本, 鄕校爲多士之依歸, 而不 幸數十年來爲寵輩所冒, 據渠輩不過數三姓不能自立, 嘯聚新鄕, 無賴之輩, 作爲爪牙, 締結官長, 濁亂鄕中, 無所不至, 一鄕儒士, 不欲與之爭較, 任他已久矣, 往在戊申年, 所下傳敎, 嶺南人士之所共感泣而當初倡義, 實在安東鄕校, 故嶺士齊會宣諭傳敎, 仍欲奉安于校@, 則安寵輩百般沮遏, 不得已退而權安於鄕中書院矣, 今夏疏擧後, 前後筵敎, 批 旨及口傳下敎, 絲綸惻怛, 義理嚴重, 尤宜奉安於安東, 故, 疏儒罷歸之時, 約以八月初二日一道衿紳, 齊會于安東一番, 聽受一番曉諭, 仍爲奉安之計, 則寵輩自聞此報大生不平之心, 出沒府校綢繆謀議,募得素所爲爪牙中, 最親切者, 數十人啗之, 以利脅之以威, 畢竟做出無前變怪, 是則新鄕輩之手犯, 卽是寵輩之所犯也. 臣未知嶺査, 果何以勘罪而事實則如此矣, 若以新鄕手犯人, 爲首從則是無首而有從也, 上默然曰出見嶺査啓本也, 仍問曰爾今年幾何, 對曰五十三矣, 上曰與右副同庚而同陞, 亦可異矣, 少選命退出, 仍爲坐直公事紛沓, 達宵不成睡. ○十五日曉, 有菊製, 當日設行之命, 同副待弘文提學, 承牌同詣春塘臺近處, 仍爲趨進, 拱辰門外, 弘文提學, 徐有隣俄又來, 待少頃, 上乘軒出門, 仍命同副承旨, 持此御題與提學偕往, 泮宮試, 取以來命開門, 集春門出送, 烽火時, 收券畢, 初更入闕, 科次入侍, 弘文提學徐有隣藝文提學 李秉模直閣南公轍玉堂尹致性宋翼孝同爲入侍, 二更末出榜而退, 或書傳敎, 又書草榜, 又坼號榜, 儒姓名時, 上笑敎曰同副以嶺人而初入喉院諸般擧行, 殆若鍊熟, 深庸嘉尙, 必因蔭仕而然矣, 徐有隣奏曰然矣. ○十六日, 與右副李庚運入侍, 又有縷縷恩敎, 末又敎曰嶺人之枳塞久矣, 今日廷臣必欲獨爲好官, 是豈事體乎, 予欲更張而不欲爲過激, 故, 姑此遷就此後則當漸次更張矣云云. ○ 十七日抄啓, 文臣親試製, 射設行於春塘臺, 命開集, 春門招泮, 儒設食堂于臺上, 自上進食, 堂饌入侍諸臣, 一飯兼二人侍食, 時下敎曰予性遲緩, 諸臣須勿速飯, 恐予將爲曹司矣, 泮齋食堂, 遲飯者, 號稱曹司, 故, 設此戲語也. 蓋規模一從泮齋, 食堂例小童歌鹿勸飯等, 節極其齊整矣, 泮儒應製試, 取後仍, 又賜饌酒肉餠果甚豊, 皆盡醉而罷, 侍臣等亦皆宣饌而環坐, 侍食之際, 適有左相箚子, 賤臣進讀, 將書批答敎曰嶺人好讓, 宜使飽饋, 告食承宣遞來書批答可也, 右副徐榮輔進寫命賤臣退食, 又敎曰餠果諸卿須勿獨食裹給嶺南承宣, 使之出泮, 分與嶺人可也, 仍命多賜厚紙, 使注書, 裹封恩眷隆重, 榮感俱深矣, 抄啓文臣試射, 後命諸閣臣及新舊抄啓聯句, 閣臣徐有防奏曰同副旣入侍, 宜令同爲製進矣, 上曰然矣, 賤臣對曰臣旣非抄啓, 又非閣臣應製, 恐無前例, 且臣素不閑詞, 律無可應製矣, 敎曰承宣豈不可與閣臣同爲應製乎, 仍拈下豊字少選製進曰弛張, 大道亭名德遊豫宏謨, 閣有豊, 跪伏寫讀訖, 敎曰好矣, 詞致如此, 而乃曰不閑詞律云乎, 諸閣臣皆曰然矣, 申後回鑾, 仍爲退出, 以大臣箚批, 徑先頒布, 事有禁, 推命未到, 禁府卽有分揀之命, 仍不遞差, 嶺外疏逖之蹤, 初入近密之地事, 多生受而自上隨處提敎, 至有同副, 是嶺人之敎, 與李庚運入侍則敎曰今日初, 入嶺南承宣, 使予酬應可苦云, 與朴奎淳入侍, 則敎曰今日年老, 承宣嶺南, 承宣入侍, 予將替行, 承宣事亦苦矣, 仍戲笑, 節目間不審處, 則隨事呼書, 仍敎曰我朝制度節目煩瑣, 此不 過使如同副之居, 在嶺外而不練朝例者, 欲不得供職, 甚是怪事云云, 又敎曰遠人之初入者, 率多齟齬, 則群議聚笑, 使之踽踽然, 曾聞魏昌祖橚角拲之說乎, 此等處甚可怪云云. ○二十九日以前, 望除同副, 隨牌詣待漏廳, 開門後入肅. ○十月初一日夜, 以安寵事, 搆疏寫置. ○初二日廳坐後, 仍爲呈疏, (疏見上)蓋頃日筵對時, 有出見査啓之敎, 而其時連値多事, 未及一疏, 故, 今始爲之疏, 本半日留中, 仍命從當下批, 留置啓板. ○初三日朝入侍時, 都承旨朴祐源史官翰林及刑判沈頤之同爲入侍, 以昨日上疏, 命賤臣書傳敎有曰職 在邇列, 有懷無隱, 別無禁涉之端, 況其疏語, 亦無指的深緊, 然安寵事則安寵事也. 登諸章奏文字, 異於筵席奏對, 其爲屑瀆, 宜有警勅, 同副承旨金翰東 推考事實, 旣不相反, 則道査近於習杖如是, 而其可使無訟乎, 道伯之題於儒狀句語, 承宣旣云目覩, 則亦可謂不審刑判適入侍, 以此關問如果然也, 道伯推考命寫時, 至安寵事下詢, 曰如疏中言, 則向時嶺査爽實乎, 對曰然矣然則安寵果手犯乎, 對曰寵指使無賴輩作此變怪, 則實爲首罪也, 指使果有明證乎, 對曰詬辱道儒蹴破粧鎖者, 皆是寵之切 親及切隣, 而寵自聞道, 會宣諭之期, 出沒城府, 嘯聚徒黨做出變怪, 則寵之首罪, 實爲明白臣, 又得見査庭證辨文字, 則情狀節節昭然矣, 然則査時何以得脫乎, 對曰中間機關, 臣實不知, 而寵雖爲首一番平問, 渠何必自服乎, 敎曰安寵是安鍊石之孫乎, 對曰然矣, 敎曰自其祖先淆亂, 鄕中如同副者得無積嫌而痛疾而然耶. 對曰臣於此事, 豈敢一毫逞私於其間哉. 蓋以査事爽實義理, 將晦一道多士, 莫不抑鬱, 故, 爲此陳疏矣, 敎曰安鍊石亦有聲聞其 所變趨世, 或有稱譽者矣, 然, 終是失其本來面目者也, 院任差何人也, 對曰差出李時白云矣, 安寵果差出乎, 對曰臣雖不知寵之所獨爲, 而必是渠輩相議差出, 爲此酬勞也, 作拏者獨一安寵乎對, 曰渠輩無非綢繆共議, 而寵是校任, 故, 爲首罪也. 上微敎曰百里往還, 日子相左可疑也, 若治一寵則嶺儒更無紛紜之擧乎, 對曰寵輩徒黨亦多, 而罪首正罪, 則足爲懲一勵百之道, 多士或可少洩憤惋矣, 更何敢有言乎, 寵之爲首, 旣爲明的, 則嶺伯處置何如是乎, 對曰嶺伯之意, 雖未可知, 臣得見道儒呈文題辭及査庭答問謄本文字, 則有曰指嗾査實傳敎外事, 若有更査之命, 則當嚴査云云矣. 上顧刑判曰嶺伯事可怪, 若劈破根本, 明其無罪, 則己旣知其有罪而推托於朝廷, 是豈道理乎, 刑判對曰然矣. 上曰刑判須以此意, 關問其委折使道儒而搆毁, 則用反坐律寵果有罪, 則豈可如前容貸乎, 少選退出, 仍 命還給原疏. ○十月晦日, 次對時, 刑判沈頤之所啓, 頃因承旨金翰東陳疏有關問該道有, 則推考之命矣. 臣奉承傳敎關問該道矣, 卽伏見慶尙監司鄭大容回移則其事實與金翰東之疏大相反, 道臣推考一款, 何以爲之乎, 上曰然則今姑置之, 不炊之堗烟, 豈自生嶺儒輩雖欲挾私, 若無執言之端, 豈有拈出皮肉, 不干之安寵一人, 惹起至此乎, 無論本事干涉與否, 其渾歸一套而來也. 偕來去也, 偕去之狀, 明若觀火, 且況本事所關何如, 則道臣未免逐鹿而不見泰山, 寵則終始無@過矣, 先以不能別白立跡, 被人容說之罪, 令道伯嚴加照律狀聞如是, 而嶺儒中猶以爲不愜, 更或發一口氣者, 勿問曲直, 施以刑配之律, 痛禁爭端可也. ○十一月初三日夜, 以司謁口傳下敎曰五日次對進定於明日欲爲兩大臣, ( 蔡及 朴宗岳 )和諧之計, 兩大臣處進不進, 卽爲受來以進, 如或不然, 日前以酬酢之煩, 致有膈氣藥房提調, 直爲待令以此通于兩大臣, 則皆曰來待矣. ○初四日朝次對時, 差晩又有同副承旨入侍之敎, 仍爲入侍則, 朴之所告, 有和諧之意, 左相則專爲引咎矣, 朴末乃曰左相以尹永僖事似有營護之意, 是爲慨然矣, 於是藥房提擧徐有隣先立進前備局諸宰及諸承宣幷進前起, 伏請罪, 左相極其紛拏, 左相奏曰臣當出外處義矣, 其後諸宰以永僖事聲討甚嚴, 最末賤臣亦起伏上曰同副又何起伏乎, 仍趨進對曰請罪, 大臣之際, 小臣無起伏之事, 而至於尹永僖事, 臣亦安敢不起伏乎, 上曰請罪乎是慨然之意也, 大臣出諸宰幷罷出, 獨余留侍三司盛陳尹永僖事而不及大臣命, 皆罷出呼, 寫遞差傳旨訖奏曰三司諸臣一幷罷出, 處分無或過重乎, 上曰勿爲時體也, 仍退出, 下殿呼而下敎曰同副推考矣, 歸院則備局諸宰及院僚, 皆以大臣事陳疏, 院僚問余同參與否, 辭以各陳, 俄以他疏捧入, 事遞差而出方搆獨疏未及進呈. ○二十二日以前望除, 同副承牌出肅, 仍又入直泮直, 右承旨金孝建也, 夜以尹永僖捧供後, 白放事坐直將聯疏, 疏本則渠輩已於申退前爛, 商搆置而金若自搆呼寫吾, 則急於擧行, 凡節任使爲之矣, 呼寫過半, 見一句語, 有筵席肆營護之說, 宗社有綴旒之危, 蓋侵斥美閤語也, 反復爭難, 欲爲拔去, 這句語而彼終不肯, 不得已割名爲各疏計, 呼寫未畢, 夜已四更矣, 待開門入啓. (疏與批見上)○二十七日, 坐直, 昨夜堂后失章服, 以司謁口傳下敎, 責承旨之耽, 睡不檢勅, 坐直下位, 現告而勿問, 感悚感悚. ○ 十二月初八日, 聞蔡判府朝者入侍, 而呈袖箚, 箚中意則討逆之義, 而江島事也, 承旨李季受 ( 益運 )讀 奏未半, 上命捧納, 箚本使承傳色藏置, 季受奏請頒示而不允, 判府, 仍又口奏箚中意, 上命退出下階碎首, 以爭之, 上促命左右扶以送之, 其日卽次對大臣諸宰, 皆進參而重臣鄭昌順徐有隣略陳袖箚頒示之意, 而其外大臣以下, 皆無一言及聲討, 李季受奏曰今日國事可謂痛哭, 必是言出, 蔡判府故一二重臣, 外滿朝諸臣, 喑無一言討逆, 亦有偏黨乎, 上命遞出云諸議, 不勝憤惋, 遂爲聯疏之擧, 李台幼文爲疏, 首權台以綱李令邦榮李檢討幼祖姜侍讀忱權校理坪崔校理獻重權持平儐沈持平奎魯韓正言致應及余合之爲十一人, 皆以軍銜參焉, 韓光植 李錫夏以當日入侍三司, 故, 二人聯疏, 沈正言達漢獨疏. ○初十日呈疏後, 命焚疏, 疏頭削職. ○十一日, 往來館峴, 蓋吾儕中搢紳四十餘人, 又爲聯疏也, 數日詣闕門外而不得呈, 蔡判府, 又進箚子而不得呈. ○十三日, 傳敎命, 聯疏人竝放逐鄕里. ○十四日, 始聞之而大雨終日, 不能卽發. ○十五日, 始發還. 癸丑正月初九日, 見營關則前月二十七日, 特命放逐人, 皆蕩滌矣, 伏承下諭. ○十六日以前, 望除右副承旨, 以在外許遞而有申勅, 上來之敎, 其後見李季受書及李監役公宅 ( 仁行 )書云, 其前又有除命, 而卽遞聖敎, 如是勤摯而洛中知舊, 皆以爲宜卽上來云, 此實特恩也, 諸議又如此, 偃處私室, 極爲惶懍, 而不但脚病難動, 終未免白衣踰嶺之嫌, 答以此意, 而分義則惶蹙矣. ○初十日, 除同副. ○十六日, 除右副. ○三月初七日, 除同副. ○二十五日, 除右副. ○四月十二日, 除同副. ○二十三日, 除同副. ○五月初一日, 除同副. ○二十二日, 除右副. ○二十八日, 除同副, 皆以在外遞. ○ 五月十六日, 伏承下諭, 初一日, 除同副承宣之在外, 下諭實是罕有之事, 而自春至夏, 除拜頻頻, 下諭又再矣, 不得已作扶病趨召之計, 入泮出肅, 與洪元伯 ( 仁浩 )伴直閉門後, 領相蔡方在 水原上辭疏, 而疏義更申, 昨年大義理也, 余以該房捧入, 下嚴批於領相原疏, 卽爲封還, 使家人父子之間勿爲傳示. ○二十九日, 早朝入侍, 有筵敎, 若曰同副嶺人也, 嶺南自是禮義之鄕也, 其俗素純善, 其見識秉守, 必異於流俗貿貿之人者, 似能知予之本心矣, 昨年嶺儒疏擧, 特以世多詿誤之流, 故, 爲世 道慮予乃忍爲提說而到今復提, 豈是臣分之所敢安乎, 昨日領相, 以有素所秉執, 敢爲尋常說到千古以下一句語, 尤豈成說乎, 昨夜下批時, 臆塞不成辭意者久矣, 大抵義理, 本自如此, 不特仰遵先大王遺意, 予於此亦有別般執守, 領相非不知予之苦心, 而乃復無難而形諸文字, 極爲慨然, 以待大臣之故, 只曰慨然而已, 下段兩件云云, 亦謂有秉執而都不過出於鉗制之意也, 夫於敵以下, 苟有受知之深, 則豈不有酬報之道乎, 嶺南專委於同副, 須以此意相與曉諭, 俾各洞知予之本意可也, 苟或於今日義理, 有所未盡闡明, 則末流之弊, 將不免爲無父無君之朝廷, 雖同副立朝, 何爲乎, 賤臣起伏而退, 夜以都承旨遞罷牌招入直, 初更傳諭, 左相金鍾秀于禁府待命, 所與之偕入, 左相將以明日趨朝, 修上書啓, 仍宿漏院. ○晦日朝, 左相入侍筵敎盛言, 領相疏語之非, 至以凶逆, 目之攙, 及嶺人搆揑無餘地, 槪是積憾於昨夏, 嶺疏欲以他罪, 驅之語極陰慘, 仍以領相上疏, 捧入事論斥, 余甚峻上敎有該房欲爲處分, 而於領相有欲入閉門之嫌, 故, 不爲之云云, 元伯入侍親聽, 故, 先爲陳疏徑出, 吾亦陳疏徑出,特敎甚嚴, 命封給辭, 疏勿爲出牌, 催促入直, 坐直承旨李書九屢書促就, 不得已更入, (辭疏見上)左相又爲陳箚, 大斥領相, 備堂齊會, 事將叵測, 特命左相, 疏洗草下, 嚴敎敎有曰此後若有傳播, 左相箚中一句語者, 自備堂以下, 當施極律諸臣, 章奏中有及蔡相字者, 亦當同律矣, 其夜領相入侍. ○ 六月初一日, 領相左相, 兩罷之, 又申退. ○十四日朝, 入侍, 守令同爲入侍, 下詢曰嶺南麥事何如, 對曰初則有豊登之漸矣, 竟爲潦雨旱蝗所損爲大歉矣. 市直何如, 對曰百錢二斗矣, 敎曰必是自春艱食之致也, 對曰然矣. 敎曰民事可悶矣, 對曰嶺南之民, 才經大歉幾死而生春間所恃, 惟在麥事, 而麥事又如此, 各邑穀簿已罄, 賑濟無以爲生, 語未畢, 俯詢曰右副曾經守令乎, 對曰未也, 又下詢曰嶺南農形何如, 對曰臣之上來時, 移秧殆盡, 而雨暘適中, 頗有前頭之望, 但癘疫饑饉, 民力未盡, 或未得及時鋤治, 然, 目下所見, 旣如是, 此後若無旱潦之爲害, 則秋事或無慮矣, 敎曰何時新穀可登乎, 對曰八月可登矣, 敎曰然則七月民食必艱, 可悶, 對曰不待七月六月亦然矣, 誠爲可矜而可悶也. ○十五日早朝, 以褒貶開坼諸承旨, 同爲入侍, 同副林道浩有做錯拿罷兵議, 洪仁浩以前望爲其, 代方在禁直入來, 差遲敎曰新除承旨必以交代致此, 遲延兵議, 前望入之以金翰東爲之前, 此不入該曹望中, 故, 以他望單子改擦受點, 仍爲退出, 謝恩坐直西省. ○二十一日以前, 望除右副, 謝恩坐直. ○二十二日, 入侍問嶺南農形, 對以近無上來人未及詳聞矣, 以闕里祠聖像陪進儒生擧案事先退. ○二十九日以前, 望除右副承牌, 謝恩. ○七月初三日, 有上候, 自明日受針事下敎, 申退. ○初四日 卯初, 受針後問安. ○初五日辰初, 受針問安, 申退. ○初六日, 以入直修呈省記矣, 特敎以爲左副 金孝建右副洪仁浩推委直次於年老, 同副卽爲牌招入直, 同副則老矣, 處暑前, 勿爲入直, 恩數到底隆重, 惶感無地. ○初七日, 呈病不進, 巳時有諸承旨禁推照律之命, 蓋金判府附奏於史官, 而昨日之疏, 初不涉禁云, 故, 以不涉禁而退却, 相疏爲承宣之罪也, 自上下律名, 而初則以詐不以實, 後則改以不應爲之律, 與諸承宣同往禁府照律, 時暫爲就理以杖贖勘放, 午後出來, 此後無職而欲爲還歸. ○八月十四日, 以順陵秋夕祭, 獻官受香, 終日冒雨而行. ○十五日, 罷祀後, 發還. ○十二月二十五日, 與公叔發西行, 蓋國有大慶, 大妃殿五旬, 惠慶宮六旬, 稱慶, 定以元朝也. ○晦日, 入城則二十七日除右副承旨, 以在外卽遞矣. (別行次)元朝參賀班. ○甲寅正月初四日夜, 政除順天府使. ○初五日, 謝恩. ○初八日, 有促敎與下直守令入侍, 諸守令退出後, 命入侍, 有嚴敎, 此實匪怒之敎, 不勝惶感, 且本是無形之浮謗, 至於上徹則卽席發明無言可執, 亦涉唐突無一言, 退出直往美閤細陳下敎, 仍決不赴任之計, 美閤曰旣已, 辭陛無由仰, 徹且下敎, 實爲匪怒, 伊敎只宜下去姑竢 日, 後爲自明之道云云, 百爾思量, 無意南下, 對以雖由此得罪, 決決不赴任云, 答曰令意如此, 則姑竢旬日, 似有登筵之便, 可以仰奏實狀. 仍曰向來知舊中譊譊之說, 誠是意外, 令之於洪( 秀輔 ), 不能永絶, 勢固 然矣. 令之本心, 吾所深信, 秋間下鄕, 時一書甚好, 而所謂知舊, 每以己所不堪之事, 責之於人, 畢竟致此極, 謂咄咄云矣. 歸後細量則下敎旣出, 然, 疑慨惜之意而朋友四面之責, 無路解惑, 自顧雖無愧怍, 世道亦可危怕, 作書於洪元伯, 蓋洪令家爲儕流中擯斥已久, 吾亦丙午以後, 心絶之而特以姻婭之誼, 不 忍永絶, 昨夏以後, 浮言四動, 皆是無理無根之說, 究其意思則假借不絶, 洪之端以爲搆揑之計, 不知實情者, 相與浮動, 欲使我先絶, 彼其意, 亦險矣. 不但構成彼罪, 自我先絶, 有所不忍, 無端搆陷以恐動之者, 亦可憤激, 所以含默至今而今則至於此, 境. 故不得已爲告絶之書耳, 翌日更拜美閤美閤曰知舊中以令之逗留不發爲失計, 吾意亦然矣. 對曰士夫立朝, 不信於朋友, 至承日前筵敎, 豈不暴情事而徑自退歸乎, 不赴任之罪, 較輕於此, 雖得重罰, 萬無下去之意答曰令意如是牢執第當竢間仰奏, 姑竢之翌日卽新園行, 幸留在城中, 有所不敢卽出, 城外旅店. ○十五日回鑾後, 美閤移書, 促發, 蓋有暴白之端矣午後治發. ○二月初九日, 到官先行, 望賀禮, 乙卯四月, 畢賑後, 受由歸家以御史鄭晩錫書啓, 論罷有特敎, 促還辭單還送. ○六月, 又有特敎, 使嶺營, 囚家僮完營促行, 不得已還, 發更赴之行. ○ 臘月, 大政內擬承宣發還. 丙辰正月初五日, 除同副. ○初六日, 陞右副, 因坐次單子, 書下左承旨實曠恩也, 不勝感蹙. ○二月二十三日, 除右承旨, 卽遞. ○三月十一日, 除右承旨, 卽遞. ○五月初六日, 除左副, 卽遞. ○二十七日, 除左副, 卽遞. ○六月初五日, 除右承, 旨卽遞. 其間下諭, 亦三四次矣. ○初八日, 在家, 伏承前月二十七日下諭, 又以前望除右承旨, 以司謁口傳下敎曰金翰東外任遞來, 後屢次除拜, 而一不上來, 今番則雖徑遞, 必爲上來事分付, 不勝惶悚, 十八日慶辰不遠, 必欲趁期入城. ○十二日, 冒雨發行. ○十九日, 始入泮, 其間連有除拜而皆以在外遞. ○二十三日以前, 望除右承旨承牌入院, 院規一從履歷升降, 而春間坐次以左承旨書下, 故, 因以施行云, 恩數雖極感悚, 而私義實爲難安, 初昏時入侍, 敎曰上來何日對曰今月十二日, 發行路, 遇潦水, 十九日入城矣. 又敎曰嶺南潦水何如, 對曰潦水則數次水漲而以無暴雨, 傍川沙築間多被害, 而其外則別無受傷處, 又敎曰所經穡事何如, 對曰自春及夏, 雨暘調和, 農不失時, 幾乎茁茂矣, 所經三道, 農形同然矣, 又敎曰嶺南故家多有亂, 前書籍之可觀者乎, 對曰嶺南書籍, 本來不備絶無稀貴冊子, 槪是財力不贍, 不得廣取藏置, 獨於故文穆公鄭逑家, 山房藏書數千卷, 未知其中, 或有可觀書籍乎, 敎曰鄭逑是桐溪 鄭蘊之族親乎, 對曰非同姓也, 敎曰其後孫有立朝者乎, 對曰無之, 奉祀蔭仕之絶, 亦已二世矣, 敎曰今年農形無旱熱所損乎, 嶺南湖南之熱, 甚於京洛云, 果否纔經湖邑亦何如, 對曰嶺南右下道之熱, 果甚於京洛矣, 欲奏湖南事及次第陳對而同副柳匡天同爲入侍, 勦說先對, 余則不敢竝達而於心介介矣, 仍以退出. ○ 二十七日朝, 有入侍命, 書傳敎, 遞罷同副, 柳匡天施以不敍之典, 以入侍有命, 未卽待令也, 又下嚴敎, 以爲日前奏對, 多有怠慢, 率爾之意而特以鄕人之故, 姑爲容忍矣, 今日入侍, 稽緩極甚無嚴, 須以此敎出院, 嚴責可也, 始知日前勦說之對, 果已俯燭矣, 申退, 其前二十六日, 李季受入侍時, 以周禮冊子, 以亂前書帙仰奏, 仍有使賤臣通報輸來之命, 蓋周禮, 是琴胄伯家藏而翰林公所儲也, 與季受酬酢矣, 受台仰達, 故, 有此敎也, 且有嶺南故家及校院書籍錄謄來之敎, 故, 卽爲裁書於三溪虎溪道南檜淵玉山各院, 使, 之錄上, 又作書於
奉化倅及琴胄伯家, 使之輸送. ○七月初六日, 以前望, 除左副洪宜浩以右承旨在院, 故, 以甥姪壻應避再牌不進, 末又呈疏批下該曹, 該曹以異姓則無相避考例以奏, 仍又牌招不得已入直, 移陞右承旨, 夜入侍便殿. ○初八日朝, 入侍時, 移拜兵曹參議, 謝恩後, 就直三日. ○十七日, 以前望除左副, 午入侍便殿, 下詢曰鄭宗魯前銜何官, 對曰以禁都一番謝恩, 而歸矣. 敎曰見之否, 對曰所居稍間, 彼又深居, 未及相面矣, 其年幾何, 對曰殆滿六十, 敎曰其人何如, 對曰家有淵源, 自少飭行, 實爲嶺中之重望也, 敎曰予固聞之大臣之言, 亦然, 然則果爲嶺中第一人乎, 對曰當爲嶺南第一人也, 曰是文莊公奉祀孫乎, 對曰然矣, 敎曰文莊公文集謂何, 對曰愚伏集也, 曰幾卷乎, 對曰七八卷, 而未及刊者亦多矣, 敎曰年前進覽謄本矣, 敎曰鄭宗魯果爲嶺中第一流, 則雖有某除拜, 嶺中無異辭乎, 對曰小臣之心旣然, 嶺人亦必恰然同心矣, 仍命書傳敎, 有鄭宗魯當日甄復之命敎曰左副雖鄕人, 事事不下於人, 院僚必不侮視也, 起伏對曰臣本鄕人, 全不及事事, 院僚雖或相恕, 自反恒切愧恧矣, 敎曰豈其然乎, 何所不堪也, 敎曰左副於宇顒爲幾世孫乎, 對曰從七代孫也, 敎曰續綱目曾爲進覽而印刊見之乎, 對曰初未之聞也, 原本在於本孫家, 而力薄, 無以鋟梓, 方以爲悶, 至於自, 上命刊全未聞知矣, 敎曰怪事怪事, 刊出其書, 而其後孫不知, 是豈成說乎, 當賜下二件, 一則左副奉受, 一則奉莊于書院, 院號爲何, 對曰本以檜淵書院, 與文穆公鄭逑幷享而賜矣, 因士林間事端分享于晴川書院矣, 金宇顒諡號爲何, 對曰文貞公也, 曰文貞公極是韙人以私家謄本至於進覽而開刊, 則其事固韙而豈非以其人之韙而其書之韙乎, 又敎曰鄭宗魯所居何處, 對曰尙州也, 曰右道乎對曰然矣, 曰左副所居是左道也, 左道則使左副主之, 起伏對曰小臣無似, 何以堪當乎, 又敎曰順天下去時, 有責勉之敎, 而其時爻象, 極爲乖常, 故, 出於調停之意, 非有他也, 又有一句玉音低微, 不能詳聽矣, 曰何時下去乎, 對曰臣逖違之餘, 不 敢卽還, 姑此遲留, 暫且供職卽當還歸矣, 敎曰勿爲歸計, 姑爲久留可也, 又敎曰書籍事果爲通報乎, 對曰頃因李益運所達周禮冊子, 輸來之事, 遍通嶺中校院及士友家使之一一謄送矣, 敎曰須爲廣通可也. ○八月初九日, 以前望, 除左承旨, 出肅入直泮, 直同副尹光顔也. ○初十日申退. ○二十六日早朝, 以前望, 除右承旨, 承牌入肅尙衣, 副提調亦落點坐直. ○九月初一日, 持公事入侍時, 以嶺南書籍錄稟, 達敎入之坐直. ○初五日朝, 以司謁口傳下敎, 以書冊錄事, 有議處事, 右承旨來往于監印所, 仍爲入侍於便殿, 下敎曰近以文靖公金麟厚陞廡事, 多有紛紜之端, 渠輩始請三臣( 金集 趙憲 )幷擧, 末乃單擧文靖而若非予之沮抑, 誰能抑三, 歸一乎爾, 聞古昔金堉之獨排衆論乎, 若如古之士氣則雖爲斥享之疏, 無所不可, 到今爲南人者, 宜亦有快活之心, 而聞以疏中有宋相說話, 南人一幷携二, 欲爲各疏云, 今此單擧, 文靖寔出予之指敎, 則疏中雖有些說話, 何足論乎, 以文靖陞廡而以予敎歸一, 則於此而敢爲異, 論是豈成說乎, 於此而聯名同參於南人, 豈不有豪氣乎, 起伏對曰賤臣亦知今番事, 寔出於我聖上闡發之盛德至意, 故泮儒疏中, 若無大段礙逼, 句語則務相和同, 以爲揄揚聖德之意, 已爲言及於嶺儒數人矣, 敎曰承旨何 其能解事之至此也, 年前順天辭陛時責敎, 非有他意, 其間似有自下節拍, 而此何足爲心也, 此後承旨每聽予言可也, 大抵南人輩, 不解事, 每有事機, 多有狂攘之弊, 承旨則必從予言可也, 又曰承旨於嶺南儒生, 則以周章, 而於京洛儒生, 亦有權力可以勸沮乎, 對曰臣於京洛, 許多儒生實無權力, 可以周旋矣, 敎曰退出速圖可也, 對曰申退, 後可以相議矣, 敎曰今日會疏明日封疏云事急矣, 豈待申退, 須從宣仁門緣, 故, 出以書籍錄相考事出去爲言, 第往圖之, 卽爲退出入泮, 與諸儒相議則已聯疏敦定矣, 更爲申托於諸友, 翌日呈疏, 果皆聯參而疏中亦無大段礙逼語矣. ○初七日早朝, 入侍連問, 入侍注書姓名, 蓋有微意於聯疏事也. ○初十日入侍, 下詢退溪祠, 板入城日子, 蓋以永柔倅( 李志淳 )內行, 今方下去, 祠板亦爲陪往奏達而日前左承旨李益運因言端又奏有祠板入城之日, 遣禮官押班而館學儒生祗迎於江頭, 遣承旨致祭而朝廷搢紳同爲參班之敎也. 巳末又入侍. ○十一日坐直. ○十二日申退. ○十三日爲英廟誕辰, 政院及大臣同爲齋宿參班而 今番自內行事, 故, 命勿齋宿, 余以致祭, 承旨受香祝出來泮中, 午後行事, 自大臣以下通朝皆參班, 雖因下敎, 而亦可見尊尙之誠, 擧世同然, 衿紳濟濟, 軒軺塡街, 此實古今所未有之盛典也, 何幸吾身親覩而押班禮官, 又是周姪吾家叔姪俱膺特遣之命, 與有榮耀矣. ○十四日申退, 呈病蒙遞. ○十月二 十五日, 除大司諫, 以末擬蒙點, 屢日違牌. 景慕宮親享, 在十一月初一日, 三十日, 不得已出肅, 以導駕參班, 仍又違牌毓祥宮展拜, 又在初六日, 初則違牌, 以有嚴敎, 回鑾時, 陪班而歸, 仍又違牌呈疏而終未免. ○十七日, 違牌傳旨, 凡五六日而始下, 仍以治疏呈納, 以政院之多事, 未卽捧納. ○十八日午後, 呈納(疏與指旨見上)疏中, 以有銓選之不厭, 人心等語吏判( 沈渙之 )引義連日違牌. ○二十三日, 冬至大享親祭永僖殿, 牌招不進, 使司謁口傳下敎于政院曰嶺人亦欲謀避乎, 仍爲惶悚, 隨牌詣闕下, 往復政院, , 四五次, 又有下敎曰毋論情勢有無, 此時豈可違傲乎, 不得已進納牌而出. ○二十四日, 祗迎後, 連日違牌而終未蒙遞, 尤極悚悶, 其間違牌不知爲幾 十次, 而只有只推之命. ○十二月二十日, 大政, 又違牌, 特以許遞, 其日以成川府使首擬蒙點, 順天遞來, 纔及周歲, 而又有此除, 必非銓曹之意, 且成爲八路中江山勝處地僻事簡, 又非難治之地, 吾儕百餘年來, 所未得除拜者, 榮感當如何哉, 但去家爲一千二百里家, 眷無以團會, 且方有感氣, 彌留三冬, 或慮遠役添劇, 欲爲遞免而亦涉好高, 且有些礙掣之嫌, (時自上有末銓檢擬之意而竟爲時輩所沮)去就俱難, 還可愁惱. ○二十一日, 自政院牌招, 諸守令使之謝恩, 而累月違牌之餘, 不敢卽出, 因病不進, 巳末又有再牌催促, 不得已出肅, 其後見曹兵使學, 臣則當日入侍時, 有成川府使緣何不肅, 卽爲催促之敎云耳. ○二十五日曉, 又自政院牌招, 使之當日辭朝, 差晩入闕下, 直見時原任大臣, 烽火時, 始還. ○二十八日自泮中治發, 日前李季受台方以承宣, 聞吾欲遞之意, 使都令公宅( 李鼎揆 )台書報云, 西邑之除, 自上用意, 而聞有實病行止, 知入云云, 故, 以實狀答之, 其日逢受台詳聞, 則上敎若曰予於成倅, 特命除拜, 渠必爲榮而但聞有病以遠道爲難云, 强令赴任爲何, 對以金翰東病狀依前, 而成旣是名勝水土, 亦佳最宜調病, 頗有榮感之意云矣, 蓋上意終無許遞之意, 對以如此, 今則勢當往赴, 姑留半年, 或一周年, 豈有久外之理云云矣. 丁巳正月初一日, 宿松都新延下, 人始到修家書送宦隸. ○初六日, 到平壤延命. ○初八日, 到衙行, 望賀禮○. 五月十二日, 政以湖南伯, 末擬蒙點, 因李台得臣補外完伯, 且以方在西邑迎送, 有弊命, 仍任本職, 乍除旋遞, 俱是恩數, 且有追恩之例, 榮感無地. ○十一月, 由還. 戊午二月十一日, 內移承旨卽遞. ○三月初八日, 政除大司諫, 以身病縣道封章. ○四月初二日, 以過限遞差辭疏, 以言事入啓疏, 批追後下來. (疏與批旨見上)○二十六日, 除右副, 以在外遞. ○六月十一日, 除左副遞. ○二十二日, 除右承旨, 卽遞. ○八月十三日, 除左副卽遞. ○九月二十六日, 除右承旨卽遞. ○十月十九日, 除左副. ○十一月初三日, 伏承下諭而病未卽發, 仍見遞報將發旋止累除之下, 一未趨朝, 雖緣實病, 方切悚蹙. ○ 二十二日見周姪書則十一日, 又除左承旨下諭, 有未安之, 敎曰每番除拜, 輒稱在外, 雖非金翰東豈無可爲之人乎, 卽爲遞差云云分義, 尤爲惶懍, 方謀卽發而病意無減寒事, 又緊可悶. ○十二月十八日, 除右承旨卽遞. 己未正月十八日, 除右承旨, 二十八日, 伏承下諭, 而時添輪感幾危, 而僅蘇, 方委頓呻吟, 萬無運動之勢, 逐月除拜, 一未承膺, 已周一年, 分義惶懍, 益復罔措, 今年輪疾, 自去臘始發於關西, 轉至京都, 歲初及於嶺南, 無處無之而得之者, 十亡八九矣, 關西尤甚, 京都亦然, 大臣卿宰以下, 至末班文蔭武死者 四百餘人, 民人死者不知其數, 甚於兵燹云矣, 美閤亦以正月十八日, 捐館, 吾儕無首領矣, 朝廷失柱石矣, 痛矣奈何. ○三月除右承旨遞. ○四月初六日, 除右承旨. ○十四日, 除右承旨幷遞. ○二十六日除右副發行而到順興, 見佐郞書, 則下敎曰嶺俗雖曰無職, 名不踰嶺歲飜, 後雖鄕長老例有問安之禮, 堂上侍從與他自別焉, 敢不來, 仍爲遞差, 前望單子入之, 又除左副承旨, 敎曰亦云在外, 禁推傳旨, 捧入禁府依例拿來草記, 敎曰若聞此則豈待府吏之下去, 後就理乎, 此草記置之可也, 屢違之餘, 不勝惶感, 自順興早發, 五日而入城, 病意倍添可悶. ○二十三日, 入禁府, 呈囚單子, 仍有放送之令, 午歸泮, 晝夜痛楚. ○二十六日, 又除右副承旨, 卽出肅. ○五月初二日, 以惠陵端午祭獻官, 特爲改書下. ○初四日, 受香到東大門外, 有許遞之命, 蓋承旨數三人差祭故也. ○初六, 日持公事入侍時, 下敎曰柳相祚上來乎, 對曰不來矣, 敎曰承旨何以經年坐違乎, 賤臣起伏對曰臣則有實病, 不得上來, 而柳相祚之上來, 亦不可必矣, 敎曰何謂也, 對曰嶺南之俗, 以無職踰嶺相戒, 雖承下諭遞報幷至其無職名一也, 以此有難上來矣, 敎曰遞報何謂, 對曰遞職之分撥也, 敎曰承旨豈可 多日曠闕, 勢不得不然矣, 對曰臣亦知之, 而旣遞之後, 上來無名, 雖欲上來, 親知四面之責, 又從以起矣, 笑敎曰親知皆責之乎, 對曰無職上來, 則必將誚責矣, 蓋嶺南先輩遺風殆乎壞盡, 而後生之所遵守者只此一事惟存, 分義則雖甚惶悚, 此風則實非後生之所敢毁壞也, 笑敎曰予亦豈欲必使之毁壞也, 但久不來故云耳, 敎曰柳尋春何如人也, 對曰臣所居稍間久未相見, 其近來成就不得的見, 而此人家學世傳操行謹愼, 已自幼少時有近道資質也, 敎曰河回爲好家居云, 果否, 對曰然矣, 自故相至今子孫世居一村矣, 敎曰柳尋春不居此乎, 對曰移居已數世矣, 敎曰承旨家安在, 對曰乃城也, 距府幾何, 對曰百里也, 敎曰安東文科幾人, 對曰十五六矣, 小科幾人, 對曰七八十矣, 敎曰文科何其 少也, 古亦如是乎, 對曰古則達官亦過於此數也, 然, 則何以如此乎, 對曰似是人材不及古而然矣, 敎曰安東人材, 豈不及京洛乎, 京洛亦豈有人材乎, 必是癸亥以後轉轉沈屈而然矣, 敎曰所居距李埦 居幾何, 對曰亦百餘里也, 敎曰其家有科第乎, 對曰登第者無人, 而其子方爲蔭仕矣, 敎曰金熙洛 上來乎, 對曰上來久矣, 敎曰承旨家近來科第不至, 沒沒文科幾人乎, 對曰臣與熙周 熙洛殿下已俯鑑, 而又有從姪一人金熙成也, 敎曰已通淸乎, 對曰未也, 敎曰嶺儒寄齋者, 有鄭藎者, 知之乎, 對曰不知也, 仍問於注書, 柳台佐, 台佐對曰云云, 敎曰承旨居鄕而奏對如此, 豈不好乎若在京則何官不做而特以下去不來之, 故, 尙止於此矣, 又詢農形昨年歉荒市直事. ○五月十二日, 又除承旨, 使傳諭于右相. ○十五日宗廟奉審, 毓祥宮奉審事, 出直. ○二十日, 以祈雨祭, 獻官, 往來北岳, 冒雨而還. ○二十九日, 又除左承旨, 以病出. ○六月十八日, 參問安班. ○十九日, 不仕進遞. ○七月初四日, 除諫長. ○初七日, 以正言任㸁疏事, 陳疏承批, 後仍違牌. (疏與批見上)其後修撰趙得永 投進論劾疏, 仍爲留中傳敎, 若曰爻象不佳, 固非一端而四時行焉, 由於不言, 近予體而行令則甚矣, 逐波如漚者, 迷不知津, 弩劍非爲鼷蠅之具, 而酬應則有煩疏, 宜還給, 今之時, 非渠從祖輩當銓行政時 風習, 今時自有一副, 當修道之爲敎之規模, 其所不能宣揚之責, 當問諸阿誰, 又因次對戶判趙鎭寬入侍時, 承至嚴之敎. ○二十日, 以未肅拜, 違牌許遞, 遞後還鄕. 庚申正月初八日, 始聞冊禮定於二月初二日, 二十二日, 發西行. ○二月初二日, 參賀班, 初六日, 發還. ○二月十一日, 政特除侍講院弼善. ○二十六日, 發肅行. ○三月初三日, 謝恩. ○初四日, 入直上番也, 下番司書李寅采出直文學金子野 ( 㙆 )也. ○ 初五日, 進參藥房問安. ○初六日, 出直入直兼輔德尹光顔也, 晝講, 在初八日而宿憊特甚, 不得入參, 可恨, 至六月, 連爲入直侍講, (文意見書筵講義)其後因日熱停, 講自六月望後, 有上候症, 似年前癤患. ○十八日未明, 行賀禮, 自十九日癤患漸成腫患, 日日添重, 焦慮無已, 侍藥廳設於萬八門外, 大臣及藥房提調入直連日進參於朝夕問安. ○二十八日, 上候猝重未末竟至昇遐, 臣民之痛普率惟均而如小臣者數十年來偏蒙肉骨之恩, 莫效涓埃之報, 遽遭此境, 如喪之痛, 倍切于人耳, 奈何奈何. ○七月初二日大斂. ○初三日, 成服, 成服後, 新上卽位於仁政門, 受百官朝賀禮, 旋入重熙堂王大妃殿垂簾, 受百官賀禮, 因山卜定於水原 顯隆園東崗, 蓋於春間園幸時, 立標石, 卽其地, 吉日初定於十月矣, 因一老臺諫請改卜, 乃改以十一月五日, 初聞從兄監役公訃情地無可言而以帶春坊, 不敢呈由奄遭天崩之痛, 悲惶罔極, 不暇顧私, 因山適退, 期月餘, 其間自可往還, 遂爲暫還計. ○十月過從兄窆禮, 卽與遠近文蔭散官數十人, 相約同行, 進參於因山, 靷發之日, 差門橋祭官虞卒畢後自念衰病, 萬無供職之勢, 遂盡載朝具而還.辛酉月, 除左承旨, 月又除承旨, 或承下諭而以病重無由趨朝矣, 月除敦寧都正, 數月不遞, 月又除承旨, 以在外遞, 月又除敦寧都正, 病勢萬無趨肅之望, 連除連遞, 不勝惶悚, 因縣道上辭疏, (疏見上)月承批旨疏辭下該曹稟處. 壬戌月, 又除承旨, 病勢一味沈重, 無以强起惶蹙.
관직생활을 한 이후 관직에 임명이 된 날짜와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였다. 기록 시기는 敬陵參奉으로 임명된 1781년(정조 5, 42세)부터 벼슬을 그만 둔 1802년(순조 2, 63세)까지로, 총 22년간의 관직생활 기록이다. 1802년에 正言 鄭彦仁의 誣告로 함경북도 明川에 유배를 가면서 관직생활은 끝이 난다. 중요 관직과 사건들을 알아본다. 1781년(정조 5, 42세)경릉참봉에 임명되다. 1789년(정조 13, 50세)4월 13일 과거 급제를 하다. 17일에 성균관 전적이 되다. 우의정 번암 채제공이 영남의 인물로는 김한동이 재주와 학문 모두 뛰어나니 거두어서 쓸만한 인재라는 말을 임금에게 말씀드리다. 1791년(정조 15, 52세)6월 25일에 입직하여 임금과 대면하였다. 대신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학식이 뛰어나고 집안도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金宇顒(1540~1603)의 후손인가?”, 하자, 내가 “김우옹의 방계 7대 후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金宇宏(1524~1590)의 후손인가?”라고 물으시자,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1792년(정조 16, 53세)동부승지가 되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동부승지는 영남 출신이다. 승정원에 처음 들어왔는데도 여러 가지 행동이 익숙하니 가상하게 여긴다.”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다. 1793년(정조 17, 54세)우부승지가 되다. 6월 14일 임금과 더불어 영남지역의 농사 형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또 지방 수령을 지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지낸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1794년(정조 18, 55세)1월 4일에 順天府使로 임명되다. 1796년(정조 20, 57세)3월 23일에 임금이 “영남 지역의 古家에 서책이 많이 남아 있는가.”라고 묻자, 寒岡 鄭逑의 집에 많이 남아 있다고 대답하다. 임란 이전에 간행된 『周禮』를 琴冑伯의 집에서 찾아 임금께 전달하다. 10월 25일에 大司諫에 임명되다. 1797년(정조 21, 58세)호남관찰사로 임명되다. 1799년(정조 23, 60세)1월 18일 번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들은 首領이 없다. 나라에서도 기둥을 잃었으니 안타깝다고 하다. 5월 6일에 임금이 “柳尋春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자, “가학이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며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은 사람이고 소문난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安東 출신으로 文科에 급제한 사람의 수효를 물어보다. 1800년(정조 24, 61세)2월 11일에 世子侍講院 弼善이 되다. 6월 28일에 임금의 환후가 갑자기 심해져 마침내 昇遐하다. 1801년(순조 1, 62세)敦寧府 都正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다. 1802년(순조 2, 63세)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부임하지 못하다
북유일록서재원집중 ( 北遊日錄序在元集中 )
辛亥七月二十四日, 政除咸鏡都事, 蓋以監試, 掌試特敎, 時任玉堂幷擬也, 時方入直, 申後謝恩而出入政院, 見權承旨以綱言排望, 時備說此人年老家遠, 北道則太遠云, 而銓長以爲旣已留京奈何云矣, 試日爲八月十九, 前路爲二千一百六十里, 試邑, 蓋在鍾城也, 値此無前潦水, 必有不及期之患, 故, 爲呈遞, 而亦涉憚勞之嫌, 不得已爲黽勉計. ○二十八日陛辭. ○二十九日大雨午, 後發行, 奴病不能從裁家書付之, 使歸泮人安三得從行金宗憲臨發請從欲觀關嶺海山之勝也, 其志尙可嘉, 出東小門, 溪流已及馬腹, 積水如海, 雨勢飜盆, 北望雲山, 慘憺周遭, 令人煩惱, 暫憩樓巖店暮宿, 西屹郞驛店, 楊州地也. 支待吏不來阻水也, 夜大雨不止, 殊覺夢魂不寧, 是日行五十里. ○八月初一日, 大雨不止, 冒雨晩發, 小溪淺流, 皆沒馬背, 平陸官道無非深涉, 十步九顚, 殆不能行, 乘暮始抵市街店, 抱川地也. 支待吏隔溪不能來, 待逢咸興人戴星行, 卽韓瑞興 栢林之弟, 而 瑞興曾於部官時, 有僚契者也. 往弔之, 分付越川軍, 使之扶護焉. 咸昌 蔡友@聞余至倒屣, 來見此友, 以鄕事爲主倅, 羅烈所搆揑, 至有此行配, 所卽利城吾之, 此行便是謫去, 又逢謫客相視大笑, 裁書于主倅, 洪若浩爲蔡友行事有關由於沿路邑也, 見答書, 所請不諧而助送蔡友行資, 其意亦不偶然, 與蔡友別道以非久宥還之意, 約與北地相見, 歸路同還而其行事極可念也. 乘門筏渡前川, 川水沒人肩矣, 夜二更, 始到梁文店, 支待吏不來, 是日行八十里. ○初二日, 乍雨乍晴, 平明永平吏曳舟溯流而至, 乘舟而渡峽, 流山湧船行箭疾, 令人損神午秣豊田驛店, 鐵原 地也. 支待吏不來, 申後到金化邑底生蒼店, 主倅洪益烈出見聞前路, 水險不能前進, 日尙早而仍爲留宿, 是日行九十里. ○初三日, 載陽載陰早發中火眞木驛店, 金城地也. 支待吏不來, 又中火昌道驛店. 午後大雨, 冒雨到麥陂, 兩峽如束, 中有蓮松浦峽水, 如建瓴聞之, 蒿工纔一次放舡, 而甚危云, 進退不得, 乘舟而渡船舶處, 津人簇立呼耶, 可怕投宿新安倉舍, 日已初昏矣. 淮陽地, 支待吏不來, 夜大雨如注, 愁惱不成眠, 是日行百二十里. ○初四日, 朝雨午陰, 聞前有虛空橋, 橋斷水深, 竢水落, 午後始發, 申後到淮陽, 前有西津江, 江水甚駛, 舟行甚危, 轉到銀溪驛店, 而日已向夕, 鐵嶺在前, 不敢作前進計, 仍爲留宿鐵嶺, 卽北界仰見山高如天, 俯視壑流成江千峯匝沓, 萬木陰翳, 戀闕思家, 終宵繞壁, 夜深後乍寐夢, 入侍筵席, 上顧語賤臣曰北行難矣, 笑語亹亹覺則一夢也, 古語云有思則夢, 潦水間關不敢回首, 都門之思, 思發而爲夢歟, 抑或因此潦雨, 俯念賤臣行事而然歟. 枕上口占一律以志感意, (詩見上)是日行三十里. ○初五日, 朝雨夕霽, 曉發上鐵嶺雨甚, 殆不能行境上, 迎待無一人來者, 乘淮陽藍轝而下轝, 杠中坼跌墜峻坂, 行色可笑, 雨中不可以徒行乘馬, 下坂極可危怕, 嶺據關嶺之交, 岌嶪雄壯, 松檜藤蘿, 蔽日干天, 石逕雲棧, 逶迤屈曲, 入山之初, 若平坦而及其北下, 若自天而下, 其高峻可想, 午秣高山驛乘門扉渡前川, 川水幾沒, 頂危如蓮松浦舟行矣. 韓棘人踵, 至使之扶護, 以渡作帖沿路津渡, 使之隨處護行而蔡謫客不至必是阻水而然, 恨吾行甚忙, 不得與之携手也. 夕後到龍主院, 川渡水廣, 曾不容舠, 而峽流急漲, 如懸瀑, 水色靑黑, 如深漆, 必是危地. 還送越川軍回馬而行覓山路, 水源有橋處, 下吏輩, 頗不肯若少余㤼水意, 而予則以其不知命, 爲可笑也. 投宿安邊地, 內坪村, 村前有木橋云, 村人不知余行爲何客, 皆辟易走匿, 且村中癘氣, 火熾無一片淨處, 蓋自畿嶺以來, 歷路無處, 非癘而此地爲尤甚, 擇不病家一房留宿, 是日行九十五里. ○初六日, 微雨晩晴, 到龍主院, 有老嫗少婦, 當路哭擗云, 是昨日越川軍一人日暮時, 爲濟安邊, 迎候營吏, 營吏則生到而渠則溺死, 嫗其母婦其妻也. 雖非由我而死, 不勝慘惻, 若使余昨日强渡而目擊其死, 其慘尤當如何, 始覺昨日回馬, 若有神誘吾衷者然, 到南山驛則所謂安邊延侯諸吏, 始到略加刑訊移囚, 鄕所及三公, 兄又 治營吏妄涉之罪, 勅官吏使齊發尋溺人屍, 午過元山店, 店是海沿勝處, 滄溟浩淼, 島嶼縈廻, 魚舟商舶, 槳帆簇立米賈馬, 儈往來踵接, 又是關北一都會也. 申後到德源留宿, 裁書咸興通判李泰懋, 卽舊僚也. 要使轉稟營家, 欲爲換易試所計而試期已迫, 未可必也. 是日行百二十里. ○初七日, 小雨中火, 文川驛亭, 到高原主倅金得海, 出見暮宿, 永興主倅徐有臣 卽出見夜暫入回謝. 是日行百二十里. ○初八日晴, 早發渡龍興江, 江是永興地也. 永是藝祖外鄕, 藝祖誕降于外鄕, 故, 名以龍興江之上流, 有璿源殿, 中火金陂院, 又中火定平主倅鄭觀采, 出見到咸興則日已夕矣. 初昏延命于客舍, 咸州自是關北, 形勝豊沛, 舊地群山四輳海門前拱平原曠野, 四望無際, 登樂民樓而望之, 則周廻可七八百里, 國中地廣處, 當以是爲第一也. 兄江上萬歲橋廣, 可八九里, 亦創見也. 南望本宮, 在平野中佳氣蔥籠, 宜其爲興王地也. 城雉雄偉, 閭閻櫛比, 宜其爲北門鎖鑰也. 余不及見箕都, 未知孰爲優劣, 而至如雄渾氣勢, 則必不如是矣. 是日行百三十里. ○初九日晴, 入見巡使李台文源與吾同庚, 而同蓮榜, 頗以行事之忙迫 爲念晩發, 借小轎于通判舍馬, 而轎憊脚少蘇中火 德山驛店, 踰咸關嶺, 嶺之高比鐵嶺倍之, 北望群山, 巉巖天齊, 倍覺愁殺, 乘暮到洪原, 主倅丁兄志元也. 直入東閣, 暫話而出, 夜丁兄出見打話, 從容曾無一面而無異舊僚臭味之相求, 有如是耶. 是日行九十五里. ○初十日晴, 主倅朝又出見發行, 中火平浦驛店, 到北靑南江, 江水有三派, 深則舟, 淺則轝, 涉危而行到靑府以前路差遠, 仍留宿. 是日行九十里. ○十一日晴, 早發, 中火居山驛店, 歷蔓嶺侍中臺, 臺在路 傍而忙未登玩, 可悵中火利城主倅成夏鎭有舊情,絶地相逢, 不勝驚喜, 利邑小如斗而前臨萬里滄海, 岸有二十里, 松林蒼翠, 蔽日淸陰, 爽襟說者謂平海月松亭, 風斯下矣云. 夕到谷口驛, 日已酉矣. 前有摩雲仍留宿谷口, 卽是居山郵丞之, 居前臨大海逈挹島嶼, 有卯島者, 凡立海中, 亦一奇勝也. 是日行百四十里. ○十二日晴, 曉發踰摩雲嶺, 嶺之高且危, 比咸關又倍之, 海色天, 容心開目明北來, 愁緖乍覺少舒舟渡南江, 中火端川府主倅李周鳳出見舟渡, 加應津津, 渡之危, 似南江矣. 暮宿摩谷驛店, 是日行百三十里. ○十三日晴, 早發踰摩天嶺, 嶺之高且險, 比摩雲又倍之, 儘是名不虛也. 到嶺上有海山亭, 吉州支待吏設帷帳供酒饌而不得暫住, 使之撤來, 隨後忙意可想中火城津鎭, 鎭是海山奇絶處, 一點孤山, 截入海中, 雉堞樓觀之勝, 如畫圖中粧點也. 其地最是海路衝要, 眞所謂當路塞而吉牧, 殆至百里之遠, 無雄藩以節制之陰雨之備, 恐或疏漏, 又中火臨溟驛亭, 乘昏投宿, 吉州府主倅沈鑏出見, 是日行百六十里. ○十四日晴, 早發中火古站驛, 到明川日未夕, 以前路差遠留宿明川, 是從大父檢討公僦居之地, 問之邑中年老者無知者百年間事無怪, 其無徵也, 不勝感懷, 謹次花字韻占一絶, (詩見上)主倅以差備官已向試所衙中, 有金生識文字, 可與語, 日行八十 里. ○十五日晴, 曉發到鬼門關, 關之欹斜囏險, 似蓮松浦麥陂而水色黝黑, 石逕盤紆自上而下, 如入地中, 行名以鬼門者此也, 中火朱村驛亭, 暫秼永康驛亭, 暮宿鏡城, 是日行百五十里. ○十六日晴早發, 中火輸城驛亭, 到富寧日尙早憊甚留宿, 主倅以差備官先向試所冊, 房人崔生頗淳厚識文字, 可與語, 是日行百里. ○十七日晴, 曉發踰茂山嶺, 嶺在兩寧之交, 不甚高峻而兩峽壁立一路, 如懸林木參天溪澗,盤曲, 殆至四十里許, 正是兵家火攻之地, 亦一關坊之所也. 中火古豊山堡到會寧日纔未矣, 憊甚留宿, 謁東岡, 從先祖院宇, 蓋先生以宣廟, 庚寅謫居于此, 壬辰宥還, 而二年之間, 誘腋北士, 至今有彬彬之風, 豆滿一帶, 自是靺鞨, 舊墟距彼境, 纔隔一葦, 而尙能習服, 文敎朝家菁莪之化, 固甚盛矣. 而君子過化之敎, 信不誣矣. 韓西平以北伯, 倡議立祠後人, 又以李石潭金荷潭追享矣, 但院宇在鄕校傍祭享, 自 校中設行數間祠宇之外, 無復黌堂廚庖頹垣破椽, 殆不成樣, 是爲慨然而興感處也. 爲懇主倅期以來 春修理, 未知果能如約否乎. 主倅許任也, 是日行百二十里. ○十八日晴, 早發中火, 防垣堡, 到鍾城日纔未矣. 追思鐵嶺以南, 潦水中, 濡滯間關之時, 意謂必不及期, 而幸賴王靈之曁, 今得到此, 曾是不意, 但積憊之餘, 如經大病, 筋力殆難支, 吾點檢行裝衣裘器物, 亦多腐爛破落, 可笑也. 主倅梁垸照訖官明川 倅, 鄭宇鵬錄名官, 富寧倅李汝節收券官, 穩城倅趙岱預差, 慶興倅李鎭宅副試, 茂山倅金履成, 參試鏡城倅鄭澤孚, 入見明川 慶興告別而歸, 午後以試場勿早呈券之意, 揭榜知委, 是日行百十里. ○十九日 晴, 曉起, 開坐引諸生入場, 可五百餘人可笑, 懸題賦則請保障, 詩則讀皇矣, 詩歎精神氣像, 見於林木之間, 以勿早呈之意, 申勅儒生, 未末收券所製, 不滿意, 僅僅充數. ○二十日晴, 編次初場試券. ○二十一日晴, 曉起, 開坐引諸生入場, 其數比初場, 五之四所製, 亦多失意, 僅僅充數, 初昏發榜, 招見入格儒生, 則皆是有文翰, 容止亦不失規度, 始知我東文敎之曁朔南不讓於有夏也. ○二十二日晴, 參副試及諸差備官, 皆以官事先歸獨坐空館, 不勝愁, 絶戲占一絶, (詩見上)○二十三日, 陰而風, 與主倅登受降樓, 樓在城中而三層, 複閣高可數十丈, 平臨豆滿俯瞰胡山, 亦勝觀也. 設三絃具酒饌而風冷不堪, 久留暫罷. ○二十四日晴, 試券榜目謄書畢, 卽爲治發, 中火防垣堡 暮宿, 古靈鎭欲轉入西水羅而東堂, 期迫不得已徑歸, 可恨. ○二十五日晴, 取山路歷觀皇帝塚, 塚在會寧北華楓山下南, 距五國城三十里窮山柸土, 不成帝王陵墓之地, 未知五國從行之人, 亦有習熟堪輿術者而然耶. 爲占一律, (詩見上)千投會寧留宿, 吳掌令鵬南吳持平泰彦 會寧人也. 有舊面, 入去時暫話於豊山堡, 今又書邀相會穩敍, 是日行五十里. ○二十 六日, 微雨晩發, 中火古豊山暮宿, 富寧主倅迎見, 驚喜, 人情固如是耶. 是日行百二十里. ○二十七日晴, 被主倅苦挽留滯, 主倅爲設妓樂煖爐, 會終日盡歡而罷, 有楊月者善歌舞, 有涵月者能琵琶, 主倅牽送一小駒, 辭不得. ○二十八日晴, 早發, 主倅爲設餞席于兄弟巖巖, 在富寧南二十里許, 川流之上, 一巖高拔壁立, 一巖乍, 低南者高北者低若有兄弟之序, 川流澄泓渟滀, 可以容舠, 有八角小亭, 在盤石上, 亦一關北佳處, 使涵月彈琵琶, 楊月輩數小妓歌舞, 足以盪滌遠愁, 日已晩, 前路遠, 酒酣罷會, 因與主倅別, 別懷黯然, 中火輸城驛, 暮到鏡城, 入見通判, 迎笑甚款, 如營裨沈公約來謁來時, 城津鎭暫見也, 是日行百 里. ○二十九日晴, 被主倅苦挽留滯, 北兵使尹得逵 出見飯後回謝, 營中樓觀壯麗可觀也. 城津僉使李新莅任適到營下來見, 卽曾經安東營將人也. 通判爲設妓樂, 仍作煖爐會兵使僉使同之日暮而罷. ○三十日晴, 中火永康驛宿, 朱村驛亭, 是日行八十里. ○九月初一日晴, 早發到明川留宿, 是日行七十里. 夜主倅設妓樂有雪中梅, 旣望月者能歌舞. ○ 初二日晴, 早發歷入七寶山, 山在明川東七十里許, 過十餘里, 山路峻險, 乘肩輿而行登高而望白頭以南歷歷在眼, 前槪是北來第一壯觀也. 歷金莊菴入開心寺所經皆沿溪而行, 楓葉初紅, 如行錦屛中往往多泉石之勝山, 自鷹峯東, 迤爲玉胎峯, 又迤爲金剛峯, 峯之下, 有金剛窟最高, 爲千佛峯與金剛對峙, 其下爲鍾閣峯, 其西爲萬獅峯 羅漢峯萬獅之下, 爲滿月臺, 北有危巖, 曰藥胎峯, 金莊之下, 有高臺, 曰歡喜, 此一山之大槪也. 開心之後, 有下馬臺, 開心之西, 有 開心臺, 登二臺則盡一山之觀, 而周廻, 約可三四十里許, 奇形怪狀, 簇立萬, 千或立而如人, 或翔而如鳥, 或似虎蹲, 或似獅伏, 寺巖之如覆屋, 船巖之如駕壑, 冊巖之如積軸, 若大若小, 或橫或起, 難可形狀, 北望海色如靑嵐, 俯視諸山, 如丘垤, 槪是北關名山, 但山高而石黝, 洞狹而溪淺, 古人以無水爲七寶之瑕信矣. 余將遊楓嶽自北, 而遊楓嶽者, 必先登七寶爲是, 小底楓嶽而亦爲升高自卑之意也爲. 吟一絶, 曰欲問金剛路, 先尋七寶山, 金剛眞面目, 應似此山, 看山靈有知應許, 我知君也, 宿開心寺, 寺僧饋以木茸山葡差覺爽口, 是日行七十里. ○初三日晴, 早發, 肩輿出山, 過四十里, 始乘馬而行, 山之深僻可推而知中火 牙倉, 午後到吉州, 吉卽東堂試所也. 副試鏡判及參試 洪原丁兄, 是日行九十里. ○初四日晴, 設場使諸生, 先製後講, 講生纔二三人. ○初五日晴, 設場夜大雨, 終日設妓樂盡歡而罷, 考試閒歇可想. ○初六日, 大雨終日. ○初七日, 大雨終日, 設場策題, 所作無可取, 可笑. ○初八日晴, 發榜表策則無可取, 只取疑一人賦, 五人川水大漲. ○初九日晴, 鏡判先還, 仍與洪原倅同行南還, 宿臨溟驛, 是日行六十里. ○初十日晴, 早發舟渡前川, 中火城津鎭, 歷觀海上營觀, 信奇勝也. 暮宿摩谷驛, 歷登海山亭, 東北望滄海, 殊覺爽懷, 來時掠過, 又覺一笑, 是日行九十日. ○十一日晴, 早發, 中火端川, 府神氣, 甚不平留, 宿是日行四十五里. ○十二日晴, 早發, 中火谷口驛, 宿利城縣聞蔡謫客, 纔到敎鍊官, 先到促還嶺, 營軍校繼到促還一宿, 使宥還, 蓋因言端而上徹, 特罷咸昌倅推考, 嶺伯因使畿伯, 別遣敎鍊官率還云. 差强意也, 是日行九十里. ○十三日晴, 早發, 歷登侍中臺, 卽尹侍中瓘駐馬處也. 蔓嶺一支, 走入海中, 有若長鯨吸水, 東南海天, 極目無際, 儘壯觀也. 來時忙, 甚不登, 亦覺一笑, 中火居山驛亭暮宿, 北靑巡使, 北巡適到夜入見爲請由還, 是日行百十里. ○十四日晴, 入別巡使歷見南兵使李晩發, 中火平浦驛, 到洪原, 夜已二更矣. 聞朴正言吉源謫過夜深, 不能往見, 送人傳語, 宿于東軒, 是日行九十里. ○十五日晴, 被主倅苦挽留宿. ○十六日晴, 又留夜, 玉堂吏奉下諭而至, 初八日以前, 望除副修撰也. ○十七日晴, 早發, 中火德山 驛初昏, 到咸興, 歷見通判, 是日行九十五里. ○十八日晴夜雨, 留夜通判來話韓瑞興之子瓚來見. ○ 十九日, 朝雨晩晴, 飯後往見擊毬亭, 亭在海上絶頂, 爲是藝祖馳馬之臺, 立亭以識之也. 歸路入本宮展, 拜奉審殿內, 有弓劍冠具四百年寶莊, 在是億 萬年洪基, 由此眞是豊沛地也. 殿後有藝祖手植古松五樹, 而年久枯落, 一樹猶存, 蒼幹如虯龍焉, 說者云, 壬辰之亂, 賊以刃斫松, 松身流血淋漓, 賊懼, 而止, 至今有劍痕矣. ○二十日朝雨晩晴, 飯後往弔 朱杜 韓瑞興, 午歸直上樂民樓, 通判設妓樂以待矣. 仍與從容申後肩輿, 上北山樓, 樓在山北高絶處, 比 樂民樓所見益高而廣, 殊覺胸次爽然, 薄暮下來, 夜通判來, 設煖爐會, 夜分而罷. ○二十一日, 晴而風, 晩發, 午後到定平留宿, 因撥便見館吏所報, 十三日, 以徐領府議諡事在外, 玉堂許遞, 吾亦蒙遞矣. 是日行五十里. ○二十二日, 晴而風, 早發, 中火楚原驛店郵, 丞李基恒出見, 蓋有舊面也, 午後渡龍興江, 橋斷不 可渡, 風急不得泊舟, 少憩江上旅店而風勢不止, 仍使長索挽舟而濟薄暮, 入永興主倅, 卽出見夜回謝之, 是日行八十日. ○二十三日, 晴而風, 晩發, 中火高原暮宿文川, 主倅洪樂淵出見, 與吾同庚, 同月而異日, 只爭二時, 分初見而甚款, 如是日行九十日. ○二十四日, 晴而風, 早發, 歷見主倅中火德源, 主倅趙@ 出見亦同庚也. 暮到安邊, 夜入見主倅韓光綮, 打話從容, 主倅送酒饌, 是日行九十五里. ○二十五日晴, 早發, 送玉堂吏取歙谷路, 中火大燈驛店, 日已申風, 甚獰留宿, 臨發主倅出見盛言, 海上道路之難而旣發路文改路, 亦近銷刻, 遂竝海而東道中, 望見國島, 島在海中, 四面皆石, 環島皆竹也, 望之一團, 靑嶼浮在層濤中, 儘是奇妙說者云, 勝似叢石未知果然否, 風不可舟, 不得往登爲甚恨也. 是日行五十里. ○二 十六日, 晴而風, 歷觀鶴浦, 到歙谷主倅丁兄載運景行以試事, 出往扞城, 見所留書悵懷, 一般留宿, 見壁上題詩, 卽夏間李兄東沆崔兄弘鎭東遊時歷入相與唱酬者也. 遂次其韻留題以道悵失之意, 是日行五十里. ○二十七日晴, 早發, 到叢石亭, 有山橫截海中四面皆巖石, 石面皆有稜廉如刀削叢, 然環附最高而特立者, 有四峯, 如石柱, 高可數十丈, 名爲四仙峯, 其餘橫臥直立者, 都是稜石, 雖使石工磨琢, 必不 如也. 海水環繞, 澄漾海中之石可數, 而又皆叢石, 未知桑瀛千劫, 水嚙風磨而然歟. 抑造化翁, 逞得一番巧技於石斷水激之處而然歟. 泛舟仰觀, 則所見益奇, 而風不可舟, 舍舟而輿自高俯臨, 亦足以盡探其奇也. 午到通川留宿是日行三十里. ○二十八日晴,中火朝珍驛歷甕遷遷, 路甚危, 遂步過暮宿新溪寺, 卽金剛外山也, 未到新溪數十里, 忽見山色麤白, 如戴微霰而殊異乎他山者, 問之從者, 曰此乃金剛云, 不覺心神恍然, 歷望萬物草而不得上九龍淵, 在三十里而不得入, 以路艱而脚澁故也, 可恨, 是日行百十里, 送馬于灑嶺路. ○二十九日晴, 早發, 歷入三日浦登四仙亭, 湖之周, 可數十頃, 湖中有巖如龜伏, 亭在其上, 乘舟而入, 令人蕭然有塵外, 想海口隔一小麓四面, 石峯或起或偃, 世稱三十六峯湖中又有小巖, 巖面題南石行述郞徒丹書六字, 而皆漫漶云, 午入高城登海山亭, 東入七點石峯, 浮在海中, 西有新溪, 石巒環拱, 案前槪是神仙窟也. 海金剛在七星峯 下, 而日暮而風不得入海而見爲可恨也. 是日行三十里. ○十月初一日, 或雨或晴, 晩發, 中火京庫, 卽楡店, 僧外庫也. 水碓家舂, 山僧雜處, 蓋楡店, 路險牛馬不通, 四十餘里故及時舂米, 負上以備冬糧, 寺僧生理之艱, 可想也. 聞鉢淵寺廢, 不堪遊賞, 遂直向楡店自是盡送郵馬乘輿而行到獐峴, 肩輿僧前者引索後者, 手擎以上, 若懸崖蟻附, 令人損神, 冒雨入楡店, 日已暮矣是日行七十里○初二日晴早起歷觀寺觀法堂有小金佛五十三軀, 安于楡木, 枝有如列仙散坐木, 山僧言佛師浮海, 東來現化于楡木上, 故以楡名寺, 以楡枝安佛像云, 有烏啄, 井甚冽, 見大鍾, 乃光廟時所鑄, 寺屢經燬而猶存云, 溯溪西, 行六七里, 入船潭, 潭水泓渟, 溪石奇古可愛也. 轉而北行五六里, 上隱仙臺臺甚高, 望見海色如黛十二瀑羅列 于前, 如練布, 然越溪而西十餘里, 歷七寶臺上, 內水站站, 交內外山之交, 東望諸峯, 羅絡奔騰者外山也. 西望諸峯, 競秀巉巖者內山也. 北望一山, 儼然獨尊者毗盧峯也. 自毗盧而出沿溪而下, 路峻險踏, 石角緣木抄而下十餘里, 皆此類也歷見妙吉祥長丈餘摩崖成像云, 是義湘佛像也, 到摩呵衍菴菴占地, 幽而高一山之勝, 可太半領略也. 南曰穴望峯北曰迦葉峯, 西則大小香爐峯也, 庭畔有老樹狀, 如膩檟僧言桂樹誕矣. 北有白雲臺而路甚峻, 脚力澁不得上毗盧可望而亦不得上, 遂步下八潭有壁立千仞, 頂戴石狀類獅子, 其下曰火龍潭, 其下有石形如船者曰船潭, 其下有臺, 臺下水落散珠者, 曰眞珠潭其下水噴如下雪者, 曰噴雪潭, 其下又有龜潭碧霞黑龍靑龍等潭摠之爲八潭, 眞珠之東有普德窟, 石广安佛像上, 庇半簷瓦, 屋下竪銅柱以承之, 大槪洞約十許里, 蒼壁削立, 如環屛, 白石盤陀, 如凝脂千巖萬壁, 若大若小, 綿絡充斥, 殆難形狀八潭之尾, 萬瀑之首, 有 玉川趙先生題名摩挲遺跡, 令人起敬而起感也. 欲刻名其傍而皆是他人所刻, 無一片石, 空處遂於相望處, 稍高巖面題刻, 步下萬瀑洞, 洞比八潭, 倍覺寬曠, 雄渾盤石, 可數畝白而滑, 坐不茵, 有楊蓬萊所寫, 蓬萊風嶽元化洞天八字, 蜿蜿如龍蛇形, 又覺奇狀久坐盤桓, 日已夕矣僧言金剛之勝, 盡在正陽寺 歇惺樓及天逸臺而樓臺之觀, 竗在夕陽, 今行正値夕陽時哉, 不可失也, 遂上正陽寺登樓而望之, 槪是一山之會, 萬二千峯歷歷在眼前, 毗盧中立半露, 西角其下森森如列戈鋋, 璨璨如編瓔珞者, 衆香城也, 削立巉然者, 迦葉峯也, 直聳而上圓者, 大小香爐峯也. 衆香之北, 高揷而上尖者, 須彌峯也, 迤而西特立於樓之北者, 安心養心淨心三臺也, 崛起於樓之西者, 拜嶺之峯也, 毗盧一支, 南迤而止, 上圓下方者, 東爲日觀, 西爲月觀峯也, 圓竅而上通者, 穴望峯也尖頭而最高者望高臺也, 豊而圓崒乎高, 者釋迦峯也, 穴望之南, 尖上而豊下者, 帽峯也, 又南爲白馬之峯, 西爲大小觀音三峯, 與拜嶺如拱而揖, 對峙於萬瀑之下, 而爲山之門戶也, 其餘遮日, 馬面牛頭之峯, 閻羅藏經遯道諸峯, 或高或低, 或起或伏, 難以枚擧, 大抵一山之勝, 怪怪奇奇, 千溪萬壑, 或寬或狹, 如無而有, 如有而無, 雲霧蟠空, 嵐烟鎖谷, 藤蘿楓檜, 掩映而蔽天, 怪獸幽禽, 交跡而爭噑, 萬峯千巖, 嶔巇屈曲, 或蹲或踞, 或立或臥, 或橫而走, 或直而竪, 或如銀城粉壁, 或如劍幕戈營, 或如萬馬千兵, 突然而奔馳, 或如白鶴孤鳳, 翩然而軒翥, 或如仙官拱立牙簪, 或如老釋趺坐禪榻, 或爭掃螺鬟, 或半吐蓮萼, 或往而復, 或奔而止, 或高而復下, 或下而復高, 重重崢嶸, 疊疊巑岏 千態萬狀, 無非奇巧, 儘覺化工, 亦多事矣, 樓楣有樊老一律云, 高樓一嘯, 攬蓬壺天備看山別作區, 無數飛騰, 渾欲怒有時尖碎, 不勝孤夕陽到頂, 光難定淺雪粘鬟態各殊, 香海蒲團, 唫哢穩謝公, 登處笑全愚殆寫景逼眞矣, 暫憩天逸臺臺之觀如樓然, 日已昏矣, 下宿表訓寺, 寺在天逸臺之下, 是日行五十里, 而逶迤來往, 又將數十里, 雖乘小輿而遇險, 輒步終日行步者, 半入寺, 便頹臥展, 四肢如醉人, 然, 渴甚淮陽官, 酒不至, 呼僧沽白酒, 和山蜜痛飮一大椀, 神氣少蘇矣. ○初三日晴, 晩發, 表訓欲上毗盧, 躡白雲, 探須彌洞而脚軟不能步, 悵望出洞, 暫憩白華菴, 歷見鳴淵石逕滑而仄蹇脚, 十步九顚, 可怕也, 東入靈源洞釋迦峯削立于左, 中有黃泉溪, 蓋一山之水, 皆淸白而此水獨黃, 到玉鏡臺, 臺皭然鏡明, 下臨澄潭, 鏡面蘸水, 如搖蕩, 然臺之左, 有石門如城址, 問之僧, 僧言洞之窮處, 卽靈隱菴, 菴卽新羅太子逃隱處云, 噫, 太子國破家亡, 不忍屈膝於人哭, 入此山麻衣草坐以終焉, 其北地王之流耳, 何其烈哉, 玉鏡皎潔削立, 遊人之過此者, 亦足以想像太子於千載之下矣. 步下百川洞, 歷見如斗小, 屋子掛在危石上, 僧言一老衲寄在於此屋修業云, 噫, 甚矣, 人之好怪也, 若以大刹紛擾厭煩而就靜則何不向普德菴入定也, 見老衲亦非古釋之流, 晩入長安寺, 寺在一山洞門境界, 寬閒亦可觀也, 寺久頹廢, 關東伯尹台師國請于朝, 得空名帖自備, 又多頹圮者, 修之荒廢者, 新之建御室及神仙樓, 樓閣改觀, 用力甚多, 登樓而望衆香, 諸山雖不可見而釋迦以南蔚然乎, 東北隅亦可賞也, 留宿夕後淮陽, 支待吏始來待. ○初四日, 郵卒不 至留宿. ○初五日, 或雨或陰, 郵卒終不至, 乘咸興馬而發, 中火新院踰斷髮嶺, 嶺之高可與鐵嶺等雲霧晦塞, 不得望見金剛, 馳到通口驛店, 夜已深矣, 是日行七十里. ○初六日陰, 晩發, 中火昌道, 午到金城主倅鄭東輔, 有舊面, 被苦挽留宿, 是日行六十里. ○初七日晴, 早發, 中火金化主倅洪益烈傳語, 中路要入東閣, 設酒饌以待之, 暫入打話, 暮宿豊田驛店, 是日行百里. ○初八日晴, 晩雨, 中火梁文店, 永平地也, 永亦山水鄕多可遊處, 而不特行忙, 一覽金剛衆山, 無可開眼, 遂掠過焉冒雨入抱川直入東閣見主倅仍留宿是日行七十里○初九日雨, 冒雨晩發, 宿西屹郞店, 是日行五十里. 今行初以雨出, 今又以雨還其亦始終條理耶, 可笑. ○初十日晴, 早發入泮, 是日行五十日. 彬奴以疾不歸, 九月九日死于泮村, 慘矣. 噫, 昔劉安仙去而鷄犬皆從, 吾方上金剛, 遊萬瀑自顧如羽化塵外而今不能少延一奴之命, 還覺塵緣之未盡祛也, 聞大臣於八月初, 次對時, 因潦雨奏關北掌試, 必難及期, 上敎亦以爲念, 仍請北關都事前試期數月, 差出, 仍爲定式云, 始信銀溪夜夢, 非偶然也, 前後往還, 凡四千數百餘里, 七十日而歸. 臥隱先生文集卷之五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엮은 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고 1791년(정조 15) 함경북도 鍾城에서 실시하는 지방시 시험관으로 임명되어, 시험감독을 마친 후에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둘러보고 온 것이다. 8월 1일 서울을 출발하여 10월 10일 도착하였다. 70일 간의 왕복 일정은 아래와 같다. 8월 1일비가 그치지 않자 비를 무릅쓰고 저녁에 서울을 출발하다. 8월 5일새벽에 출발하여 鐵嶺을 넘다. 8월 13일새벽에 摩天嶺을 넘다. 고개가 높고 험하다. 8월 18일종성에 도착하다. 8월 19일500명의 유생이 참여하여 시험을 치다. 8월 21일합격자를 발표하다. 8월 23일고을 수령과 受降樓에 오르다. 8월 29일종성을 떠나다. 고을 수령이 兄弟巖에서 송별연을 베풀다. 9월 1일함경북도 明川에 도착하다. 9월 3일함경북도 吉州에 도착하다. 9월 4일길주에서 과거를 치르다. 9월 26일鶴浦를 구경하고 歙谷縣에 도착하다. 9월 27일叢石亭에 도착하다. 9월 29일三日浦에 도착해 四仙亭에 오르다. 10월 2일楡店寺‧隱仙臺‧妙吉祥을 구경하다. 滿瀑洞에서 蓬萊 양사언이 쓴 ‘蓬萊風嶽, 天化洞天’ 8글자를 보다. 스님이 금강산의 절경은 正陽寺의 歇惺樓와 天逸臺에 있다고 말하다. 表訓寺에서 숙박하다. 10월 3일玉鏡臺를 보다. 옥경대 근처의 靈隱菴이 신라의 麻衣太子가 은거한 곳이라고 하다. 10월 10일서울에 도착하다. 왕복 4천 수 백 리이며, 70일 간의 여행이다
와은선생문집권지륙
說
서묘설 ( 鼠猫說 )
余之僑寓家苦多鼠, 畜猫, 猫不能盡鼠, 夜聞有鼠嚙空甕, 聲喞喞, 開甕視鼠, 入甕已久, 毛長而皮欲乾, 捷如飛猱, 磨牙搖目, 如有求焉, 遂放之走入, 鼠群中群鼠爲其鼠也, 不疑忌鼠乃左攫右觸, 食群鼠甚於猫, 不日鼠, 群空而鼠亦斃, 於猫北方古多, 此類稱之曰鼠猫噫是豈鼠之性哉. 方其群處也, 出入相隨, 穿嚙與同相生, 無相害也, 緣飢餒欲死反爲猫, 畢竟爲猫之食, 其亦可哀, 亦可惡也, 傳曰獸相食, 且人惡之旨哉, 聖人之言也.
고양이처럼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 같은 쥐에 대한 이야기이다. 항아리 안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 있어 가 보았더니 며칠 굶은 쥐가 있었다. 쥐떼가 있는 곳으로 풀어 주었더니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동료 쥐를 잡아먹었다.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짐승들이 자기 동료를 서로 잡아먹으면 사람들도 미워한다고 하였다. 아! 슬프다는 내용이다
견묘설 ( 犬猫說 )
犬猫異族也, 其相遇輒狺怒狼噬摶逐如仇讎, 蓋相畏猜而不相狎也, 雲巖公家畜犬猫同處, 墻窬戶闑之間, 而相視若同類然, 喣喣歡集, 噫, 其異事也, 江州之犬, 犬之和者也, 北平之猫, 猫之義者也, 然, 犬與犬相和而已, 猫與猫爲義而已, 今此犬猫, 乃以猜怒仇視之性而能作群處和集之態, 其必有所感者乎, 雲巖公仕退居家, 家道乃行孝而友, 和而睦, 家庭之間, 雍雍如也, 僮僕輿儓愉愉如也, 夫心和則氣和, 氣和則人和, 人和則天地之和應之, 人與物一氣也, 豚魚可孚, 況犬猫同畜哉, 使雲巖公家政旣修, 移于國事, 推孝友和睦之心, 而贊中和位育之化, 則將見化龍蛇爲赤子, 轉仇敵爲腹心, 其所感應, 豈特一犬猫而止哉. 遂爲之說.
개와 고양이는 서로 다른 종족이다.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원수처럼 지낸다. 그렇지만 雲巖公의 개와 고양이는 사이좋게 지낸다. 이것은 화목한 운암공의 가풍을 짐승이 본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온화하면 기질이 온화하게 되고, 기질이 온화하면 사람이 화목하게 되고 천하가 화목하게 된다는 등의 내용이다
포작설 ( 捕鵲說 )
癸亥暮春之初, 自北而南, 僦居于鶴林之東村巷湫隘道路諠闐悄然無會心處, 庭前有小溝, 溝邊有二 柳樹, 樹上有鵲巢, 鵲生雛哺以虫, 煦煦然相樂也有時散步, 樹下樂其一般, 春意悠然, 有山梁時哉之感, 足以消遣閒愁也, 一日朝起見二鵲繞樹噪噪, 又有群鵲滿樹群噪, 怪問之村童, 曰鷹人爲飼鷹, 攫雛去鵲之, 噪是也, 乃招鷹人于庭而語之, 曰吾不忍鵲之噪噪也, 舍之以雀易之, 不者吾且去鷹, 鷹人遂還其雛于巢, 二鵲若驚若喜, 出入巢, 噪噪群鵲, 又噪噪來聚, 二鵲又忙忙, 飛拾虫蛆來哺其雛, 倍於前日, 吾亦憐其死而生, 危而安, 盡日耽看, 若將與群鵲同其樂也, 因是而有感於心者, 夫禽鳥之樂, 亦猶人之樂, 安之則得其樂, 危之則失其樂, 安之危之天也, 死而生之者, 亦天也, 觀於鵲, 可以知萬物之情也, 亦可以見 天地之心也, 彼捕鵲者, 知鷹而不知鵲, 必欲危之而使不得樂其樂者, 抑何心哉, 噫, 二鵲之噪慈也, 群鵲之噪義也, 鷹人之捕鵲利也, 見利而忘義, 可以人而不如鳥乎, 詩曰維鵲有巢, 維鳩居之讓也, 語曰覆巢破卯, 鳳凰不栖, 其林仁也, 如鷹人之毁其巢, 而取其子者, 其亦不讓不仁者哉, 夫不讓不仁, 不知物之樂焉, 知人之樂, 又焉知人與物之同其樂也哉, 遂敍其事, 以警其人系之詩, 以戒鵲. 維鵲有巢, 在樹間兮, 維鵲生雛, 春一般兮, 維鷹在鞲,人所使兮, 維人養鷹, 以求雉兮, 非鷹求鵲, 人無良兮, 有兔雉罹, 詩所傷兮, 我戒鷹人, 毋相侵兮, 爾雛旣長, 飛入深林兮.
1803년(순조 3) 봄, 내가 64세가 되던 해 함경북도 유배지에서 강원도 歙谷縣으로 배소를 옮겼다. 거주지 주변에 버드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으며 그 위에 까치집이 있었다. 까치가 새끼를 낳아 먹이를 먹이면서 화목하게 살았다. 하루는 까치 떼가 모여서 깍깍 울부짖었다. 동네아이를 불러 물으니 鷹人(매사냥꾼)이 까치 새끼를 매 먹이로 잡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주위의 모든 까치들이 모여서 깍깍 짖어댄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사냥꾼을 불러 참새를 잡아 매 먹이로 하고 까치 새끼는 그냥 놓아두라고 하였다. 까치떼가 동료를 살리기 위해 짖는 것은 義이다. 매사냥꾼이 까치를 잡는 것은 利이다. 利을 보고 義를 망각하였으니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序
북유록서신해 ( 北遊錄序辛亥 )
余素縳塵纓, 晩嬰䆠祿, 未遂桑蓬之志, 金剛是中國人之所願見, 而幸生東土, 尙未一躡, 徒有仇池之夢, 耿耿于中, 今因試役踏盡關山周覽, 海岳雖適値, 潦水屢經, 危險而生平, 宿債粗得少償, 殊覺快活, 第以膚淺之見, 未得風土山水之要領, 略記萬一, 以爲暮境臥遊之資, 大約北關自是一路形勝, 形如展布, 然, 西傍長白東邊大海, 通魚鹽之利, 有毛革之㜫, 銅銀鉛鐵, 往往山出天嶺, 以南宜稻黍, 以北宜麻其民朴而淳, 其俗儉而野, 其服麻布毛革, 其食粟米黍稷, 其屋或板或石, 間以瓦覆土瘠, 而民貧男黑而女晳, 風雨時, 多霜雪, 早降地寒, 故, 穀易痒水冽, 故人不病, 儘是我東之精兵處也, 但今武略不競邊, 備太疏豆滿水淺不及馬腹則沿, 江殘堡便同兒戲, 北閫冬戍, 自出將幕茂山嶺, 爲火攻之地而富寧力單不足以備禦城津鎭, 爲當路之塞而吉牧, 路遠, 不足以節制, 南北營閫軍需無儲, 則不足以勸武士, 端川以北, 錢貨不通則不足以資飢民此數者實爲一路之大患, 而當變通者也, 山水之勝, 北關當以七寶山爲勝區, 咸興不特爲勝區, 當以關防咽喉國島之精妙, 叢石之工巧, 三日浦之, 幽閒海金剛之奇怪, 互有長短, 至若金剛眞仙窟耳, 山自鎖嶺揷天而來, 東迤爲萬物, 草西迤爲毗盧峯東爲九龍淵, 西爲萬瀑洞萬二千峯, 包絡于其中, 摠之周, 可八九百里, 淸秀奇怪, 渾厚雄偉, 不知天台三十六洞, 天果能有是否乎, 嘗觀十洲記曰瀛洲在東海中, 地方四千里, 生神芝仙草, 又有玉石, 高且千丈, 出泉如酒, 味甘風俗, 似吳人山川, 如中國云, 今通川有叢, 石原州古有酒泉, 春川又有紫芝山, 然則瀛洲其眞在是也, 夫顧余願見久矣, 而長道之餘, 憊甚矣, 且王程有限, 不敢盤遊, 不得躡毗盧而窺九龍, 凡支峯裔壑, 又不得窮搜而足踏之, 此爲可恨, 然, 嘗聞邵氏之言, 凡人做事, 當於七分上, 止今吾之遊得於邵氏云爾.
1791년(정조 15) 8월 19일에 함경도 鍾城에서 실시되는 地方試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서울에서 종성을 오고가면서 느낀 일에 대한 서문이다. 원문은 권5에 「北遊日錄」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8월 1일 서울을 출발하여 10월 10일 돌아왔다. 오고가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금강산 주변에 관련된 기록이 많다
송이학사정운부연서 ( 送李學士鼎運赴燕序 )
僕生苦晩且限, 以一衣帶, 鴨水學而皆中國也道而皆中國也, 詩書禮樂, 皆中國也, 而顧耳目不一涉其境, 豈不慨然, 於中者乎, 今學士李公, 以冊禮謝恩膺儐价之命, 涉遼碣過醫巫閭虔淸聖之廟, 訪劉安之墟而渡易水, 北顧長城, 丈夫此行, 亦榮矣, 然, 今之中國, 復有如昔之中國者乎, 衣冠之所在乎, 文物之所歸乎, 公之行遇, 一老人如丁令威者, 試一問之, 歲殘臘窮, 風雪動天, 寒冰塞途, 行矣珍重, 良食自愛.
1784년(정조 8) 12월에 李鼎運(1743~?)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게 되자 전송하면서 지은 글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중국, 詩書禮樂도 모두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대가 가게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하였다. 당시 정사는 朴明源, 부사는 尹承烈이다. 『왕조실록』 1785년 4월 19일 기사에 귀국한 후에 이정운이 보고한 기록이 있다
記
광주유집처이씨효렬정려기을묘 ( 光州柳潗妻李氏孝烈旌閭記乙卯 )
君子之尙論, 古今忠節者, 以從容就義爲難, 臣之於君女, 之於夫, 同一義也, 孝烈李氏, 士人柳潗妻也, 幼有異行, 八歲受讀小學書, 以爲日用閨範, 事父母盡誠孝, 及筓而歸, 事夫子, 以禮事舅姑, 以敬婦道, 以修其得於小學之敎者多矣. 歲壬子, 夫遘癘瘧疾, 李氏手自扶護湯餌糜粥, 必嘗而進, 日夜不懈, 卒莫之救, 時夫年二十七, 李氏年二十五, 於是, 李氏之志決矣. 時姑繼染李氏極意救護, 如夫病, 日夜祝天, 請以身代, 姑遂得瘳, 人皆謂誠孝之感, 方夫之殮, 水醬不入口, 三日及其殯, 日夜在柩傍, 粥飮亦不下咽, 及其葬, 伺家人不守, 遂飮藥以絶, 噫, 李氏之志, 蓋有待而其隱, 忍以至此, 亦以老姑病也, 姑病蘇, 夫葬完, 乃決意下, 從此非所謂從容就義者歟. 就一行論, 殆不讓於荀, 令女陳孝婦, 況兼有之乎, 使君子而論之, 必以爲難也, 李氏卽臨瀛大君之後世, 以儒素傳夫家, 卽夏亭相公之後世, 以淸白聞, 李氏之孝且烈, 固是生質之美, 而其濡染薰陶於兩家之間者, 又可見矣, 朝 廷以奬節褒行, 爲首先務, 因道臣狀, 聞特命棹楔, 以旌之, 余遊湖邑聞之甚詳, 遂爲之記.
열녀 이씨는 선비 柳潗의 아내이다. 8살에 『소학』을 읽었다. 시집가서는 남편과 시부모를 잘 섬겼다. 남편이 학질에 걸려 1792년(정조 16)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남편은 27세, 이씨는 25세였다. 시어머니도 학질에 걸리자 정성스런 간호로 다행히 시어머니는 병세에서 회복되어 살아났다. 시어머니가 살아나자 이씨는 음식을 끊고 남편을 따라 세상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이씨의 행적을 가상히 여겨 정려문을 만들어 표창하였다. 저자가 1795년(정조 19)에 지은 글이다
효자한석내정려비음기 ( 孝子韓碩乃旌閭碑陰記 )
今上之十八年秋, 因歲旱, 大行疏鬱, 進覽禮部所錄孝烈特命旌孝子閭, 甚晠典也, 縣人樂爲之鳩材聚糧, 官亦助其役, 不旬月工訖, 十月四日棹楔成, 於乎此韓孝子之閭也, 孝子名碩啓下, 以碩乃 因以名, 其先淸州人, 襄惠公之耳孫, 府使後琦之七世孫, 士人德麟之季子, 自幼至行, 不離父側, 行必隨居, 必侍坐父母, 有疾憂形於色, 躬執㸑, 以具粥, 飮父母不食, 亦不食父母, 一飯亦一飯, 家素貧身, 傭作得米穀, 藏庋伺罄乏, 供具每朝夕, 食舍半貯毋鉢以食之, 身若自飽而執其事不懈, 蓋其素性然也, 歲辛亥季夏十七日, 父以供祭, 入水將求魚時, 潦雨水盛, 孝 子諫不聽, 遂隨而往在岸上, 上流大至, 父竟渰沒, 隣人房生素壯健, 在近渚, 援以手, 力不及同, 溺, 孝子方擗踊水濱, 尙冀有賴於房生之力, 而房生又至此乃 呼天而哭, 曰父兮已歿, 我生何爲, 以袖掩面, 投水以從之, 時年十六, 遠近憐之, 上下尋其屍, 僅得父屍而孝子之屍, 竟莫尋, 以衣招之, 葬其墓側, 噫, 人子之孝 於親者, 終古何限, 而以童穉之年, 不有其身, 視死如歸, 如孝子者, 幾人, 抑有所感焉, 朝家旌表之典, 事體甚重, 雖有卓行懿蹟, 或多積久始發, 而今此孝子之事, 一經睿覽, 旋降恩典, 固可謂誠孝攸徹而玆豈非旌淑樹風之治, 逈出今古耶, 烏頭焜燿, 使過 而式者, 咨嗟而聳動焉, 則孝子之靈, 於是不死而是閭之關於世敎, 豈少補也哉.
효자 韓碩乃을 위해 세운 정려비의 음기(陰記: 비석 뒤에 새긴 글)이다. 한석내는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1791년(정조 15)에 6월 17일에 아버지가 풍어제를 지내기 위해 물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려 물에 휩쓸려갔다. 한석내가 아버지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으나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채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는데 당시 16세이다.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효자로 표창했다는 내용으로, 저자가 56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지었다
경양당기정사 ( 慶讓堂記丁巳 )
射爲六藝之一, 古之人, 生而設弧矢以示, 四方之志 長則從事於六藝之敎, 有不學, 學則莫不射也, 自六藝之敎弛而文 武之道岐, 人或以射爲恥, 此則俗之蔽也, 西關卽我東之燕代, 俗習弓馬, 自古間出, 異人建奇功樂爲時用朝廷之重, 西陲寔在於此而顧近俗, 好矜厭棄, 本分事武藝之精妙, 多不及古, 是豈天之生才, 有古今之殊而然哉, 方今聖明在上文武幷用, 飭道帥臣, 課試拔擢, 用其尤者, 以嘉奬之, 西之人, 其將焰焰而起矣, 前衛將金君精允, 間嘗語余曰成亦大邑也, 邑多武士而獨無講習之所, 殊非奬勸之道, 蓋爲之經始焉, 余曰亟之朝家飭勵之意, 敢不奉承焉, 於是金君謀於同志, 鳩材聚瓦, 不旬月工告訖, 堂凡二楹五架, 邑之士, 足以依歸, 於斯肄業, 於斯觀德, 於斯金君之敏於事, 固可尙, 而士之肄射者, 苟能仰體奬勉之敎, 一乃心力, 盡其精妙之術, 出而爲時用, 則古之異人者, 安知不復見於今而朝廷重待之至, 意斯可以不負也, 成之人其勉之哉. 遂以慶讓名堂, 蓋取射義中語, 以寓勸戒之意云爾.
옛적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에 쑥 화살 6개를 쏘아 천하를 경영하겠다는 포부를 나타내었다. 근래에는 활 쏘는 풍습이 많이 사라졌다. 衛將을 지낸 金精允이 활을 쏠 수 있는 경양당을 만들었으므로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지은 글이다
헐성루좌유기신해 ( 歇惺樓坐遊記辛亥 )
予自八潭步下, 萬瀑洞, 愛其洞, 天爽朗水, 石盤陀且 有楊蓬萊八字大書, 蜿蜿如蛇龍偃水, 玩賞盤桓, 不 覺日之已夕, 僧之從者, 言金剛之勝, 盡在正陽寺之 歇惺樓 天逸臺其觀妙在夕陽而此山多雲霧, 得夕陽難矣, 今日適其時, 不可失也, 余乃攝衣而上, 上正陽寺, 問所謂歇惺樓而坐焉, 樓在山之絶頂, 而槪是一山之摠會處也. 夕陽在山, 山影凌亂, 閃照怳惚, 難可模捉坐久神, 定心開眼, 明萬二千峯歷歷可數毗盧中立半露西角, 其下森森, 如列戈鋋璨璨, 如編瓔珞者衆香城也, 峭立巉然者, 迦葉峯也, 直聳而上圓者, 大小香爐峯也, 高揷而上尖者, 須彌峯也, 迤而西特立於樓之北者, 安心養心淨心三臺也, 崛起於樓之西者, 拜嶺之峯也, 毗盧一支, 南迤而止, 上圓而下方者, 東爲日觀, 西爲月觀峯也, 圓竅而上通者, 穴望峯也尖頭而最高者, 望高臺也, 豊而圓, 崒乎高者, 釋迦峯也, 穴望之南, 尖上而豊下者, 帽峯也, 又南爲白馬之峯, 西爲大小觀音三峯, 與拜嶺如拱而揖對峙於萬瀑之下, 而爲山之門戶也, 其餘遮日, 馬面牛頭之峯, 閻羅藏經, 遯道諸峯, 或高或低, 若大若小, 難以枚擧, 大抵一山之勝, 怪怪奇奇, 如入波斯之國, 羅列 璣珠錦繡, 觸目眩曜, 移步換形者, 然, 千蹊萬壑, 或寬或狹, 如無而有, 如有而無, 雲霧蟠空, 嵐烟鎖谷, 藤蘿楓檜, 掩映而蔽天, 怪獸幽禽, 交跡而爭噑, 列峀層嵒, 嶔㸍屈曲, 或蹲或踞, 或立或臥, 或橫而走, 或直而竪, 或如銀城粉壁, 或如劍幕戈營, 或如萬馬千兵突然而奔馳, 或如白鶴彩鳳翩然而軒翥, 或如仙官拱立牙簪, 或如老釋趺坐禪榻, 或淨掃螺鬟, 或半吐蓮萼或往而復, 或奔而止, 或高而復下, 或下而復高, 重重 崢嶸, 疊疊巑岏, 千態萬狀, 無非奇巧, 儘覺化工, 亦多事矣, 夫遊山如讀書, 然, 讀者不特玩索字句, 須要提挈綱領, 領略旨趣而後, 高下淺深, 融會貫通, 此讀書法也, 方吾越水站下八潭也, 攀藤緣崖, 左顚右躓, 費盡多小, 氣力汨沒, 於一山一水, 眞所謂廬山中, 不見眞面目也, 今乃休筇歇脚倚樓, 縱目一山之勝, 列在几案, 吾足未嘗及山而吾目未嘗無山處高, 故高者低, 望遠故, 遠者, 近浩浩茫茫, 怳若身游, 混沌之天而親見融結之初, 正如讀書之提挈綱領旨趣而高下淺深融會貫通, 殆乎游之至也, 其視向之勞筋疲精, 役役於絶磴斷岸之間, 玩細娛而忘遠, 觀其大小高下, 閒忙勞逸, 又何如也, 古之好遊者老, 則臥, 遊今吾爲坐遊, 坐遊以目, 臥遊以心, 心之所到目亦至焉遂爲坐遊記, 以備臥遊之資.
1791년(정조 15) 8월 19일에 함경북도 鍾城에서 실시된 지방시험에 감독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 10월 2일에 금강산 正陽寺 歇惺樓를 보고 느낀 점을 쓰는 기록이다. 헐성루는 산 정상에 있으며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가 뚜렷하게 눈에 가득히 들어온다고 하였다
와은암기 ( 臥隱菴記 )
菴以臥隱名, 因地名也, 昔有訥隱先生居此山, 號以訥, 臥與訥音雖殊, 而釋之則俱不失爲地名, 遂以名吾菴人有問於予曰異哉, 子之名菴也, 子之臥, 吾固知之, 子之隱, 吾未之聞也, 予笑曰子知吾之臥, 而不 知吾之隱焉, 知吾之醉乎, 夫醉與臥, 同情同行, 而隱在其中, 知醉而不知臥, 知臥而不知隱, 則其可以語隱乎哉, 古之以隱名者多矣, 山林之隱, 隱之小也, 城市之隱, 隱之大也, 君平以廉隱藏名也, 方朔以官隱薄遊也, 阮之醉酒, 袁之臥雪, 各得其一而未得隱之至也. 獨有淸風, 北窓醉臥, 羲皇五柳先生之樂得其眞也, 吾欲學之而未能焉, 則醉吾酒, 臥吾菴嘐嘐然, 古之人而已, 斯菴也, 雖無山水之勝, 遊觀之樂而宅幽勢阻無, 道路車馬之喧, 有林壑松桂之幽, 前有奇嵒屹立, 山麓蜿蜒, 下有小溪, 淙淨潺湲, 可以淸纓濁足, 九峯之朝暮烟雲, 霏霏靄靄, 鶴山之翠黛晴嵐, 如
拱如揖嵒花澗鳥, 交影而和聲, 山月林風, 揚輝而徐吹, 種種佳景, 耳目與謀, 此菴之勝也, 茅茨十數家, 鷄犬相聞, 風雨時行, 桑麻日長, 農歌在野, 野黍油油, 村童野老, 共遊康衢, 蒔花種竹, 花竹秀野, 藜杖芒鞋, 婆娑其間, 不知何樂, 可以代此, 此菴之趣也, 趣與勝會, 心與境適, 或舒嘯林臯, 或散步郊墟, 乘興而往, 興盡而歸, 歸入吾菴, 有書滿架, 提綴神心, 對越聖賢, 間抽武侯, 出師表讀, 數過想像, 臥龍山中, 抱膝長嘯, 底氣像山外塵嚚, 不入於耳, 閒中意味, 無人可語, 此又菴居之樂也, 讀書旣已取甕中秫酒, 引滿數三盃, 便頹然醉臥, 熙熙如陶, 令不知五柳之春, 此吾所以臥隱也, 我醉欲臥, 君且去矣, 人乃笑而謝曰樂哉, 子其隱矣, 噫噫, 我知之矣, 遂敍其問答, 爲菴之記, 又從以謌之. 山之中, 維我之菴, 菴之奧, 可以睡, 而甘菴之幽, 可以醉, 而酣可以醉, 可以臥其樂且湛, 如有從我遊者, 只在水北山南.
이곳은 뛰어난 경치가 없지만 술에 취하고 나의 집에서 편히 누워지내기에는 넉넉하다. 꽃과 대나무를 심고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기도 한다. 가끔은 제갈공명의 「出師表」를 읽으면서 臥龍이 산중에 있음을 상상하여 본다. 글을 읽기를 마치면 항아리에 담긴 술 서너 잔을 마시고 곧 취해서 쓰러지니 이것이 바로 내가 臥隱이라 지은 까닭이라는 내용이다. 56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지었다
운암사기갑인 ( 雲巖祠記甲寅 )
勝國之季, 多名節, 如鄭圃隱吉冶隱諸先生最著顯, 而雲巖車先生與之齊焉, 論其心則夷齊之採薇, 而論其迹, 則箕子之陳範甲視之則嚴陵之還山, 而乙視之則商皓之定儲是其孤忠毅烈, 澟澟乎撑天亘宇者, 不特爲勝國之節士, 密贊大業, 羽翼儲宮, 大有功於我聖祖, 億萬年基命, 顧又何如也, 然, 爲孼臣所搆誣, 畢竟有松麻之禍, 余每閱稗史, 至此未嘗不竦然而敬, 繼之以歔欷者久矣, 日先生後孫錫周 圭鎭訪予于昇平之府軒, 袖示一冊, 子泫然曰此吾祖文節公, 遺事也, 雪冤錄出而先生之忠烈白矣, 懼夫久而泯也, 裒稡國朝記, 聞諸賢所錄及當世諸名勝, 所敍記, 合成一帙, 爲不朽之圖, 近嘗營建祠廟, 於後孫所居之傍, 以時享祀之, 以傍祖延川公配焉, 延川, 卽先祖之從子, 而坐謫, 鏡城遭李施愛亂以先鋒將罵賊殉節, 忠節固有淵源, 而公議必欲幷享也, 夫以先祖之貞忠大節可與日月爭光, 而禍變酷而時世遠, 不得搜集, 平日遺文字以廣其傳, 又不得竝列於圃冶諸先生之祠, 以樹風聲, 此寔後孫之所慟恨也, 願得一言之賜, 以記其實, 予聞而悲之, 敬受而奉翫, 槪先生之心與跡, 可較然覩矣, 於乎, 先生高麗臣也, 生而與圃冶諸先生齊名, 沒而與圃冶諸先生竝列, 雙原化碧, 百世流風則先生之靈不亡矣. 列聖朝崇奬之典, 曠絶今古, 諸名賢, 記註之辭, 闡發幽隱則先生之名不磨矣, 時移事遠, 崇報禮缺, 顧不 得建一廟於雙原之間, 侑以㟣陽之酒薦, 以烏山之薇誠爲志士之所慨恨而於先生何憾焉況先生之靈, 如地中之水, 無往而不在, 因其後嗣之居, 以爲妥靈之所, 則數楹祠廟, 便是小雲巖中土屋耳, 風馬雲車, 結轖於松麻之間者, 其將翩然大荒, 往來於雲山洛水之邊, 而秋水明玉之神, 冰雪淸霜之操, 僾然如見於籩豆芬苾之餘, 則後生輩尊尙景仰之誠, 何間於崧陽烏山之祠也哉. 一門雙烈, 同廟幷享, 山高水長, 遺風澟然而後之人, 過而式者徘徊, 指點想像乎, 先生之風, 又知先生之家, 有延川公, 豈不韙哉, 遂爲之記.
고려 말에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는 圃隱 鄭夢周와 冶隱 吉再가 가장 뛰어났다. 그리고 雲巖 車原頫(1320~?)도 이들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내가 1794년(정조 18) 順天都護府使로 순천에 머물고 있을 때 하루는 선생의 후손인 錫周와 圭鎭이 찾아와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 완성되었다고 記를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의 사당을 지나치는 이들은 선생의 풍모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급시동분암기 ( 及時洞墳菴記 )
墳菴之設昉於置戶守墓而我東士大夫家, 尤致力焉, 所以供蘋藻禁蒭牧而盡誠於報本追遠之道者也, 府治之北才山縣, 及時洞, 卽我五代祖考贈左承旨, 公妣淑夫人琴氏, 高祖考, 贈參判公, 妣貞夫人柳氏墓所, 而先妣貞夫人墓祔于右, 後麓, 子孫之祔葬於左右, 岡者亦多矣, 展掃之時, 諸孫各備奠需, 期日會奠而時有事故, 而不與祭, 又或貧無以爲祭, 三從兄望雲公, 主參判公祀, 嘗慨然, 於是諗于族人曰祭於一山之內, 而豊約各殊香火, 有不及後屬疏遠, 自祖先視之, 則均是子孫, 得無惕然矣乎, 其議所以合享焉, 僉曰善遂經紀, 略干祭田, 志未就而遽棄世, 公之允學士君繼成之, 每歲春秋, 定有司一員, 取祭田所收, 以三月十月之旬辦備奠需行事, 則先昭後穆, 祔墓, 則各自分奠, 旣齊會飮福于齋菴, 於是乎祭品均而香火無闕, 此實吾家之盛事也, 墓下古有菴舍處, 以緇徒而年久頹圮, 又甚狹小, 辦備之際, 不無簡褻之患, 三從兄僉樞公, 追念望雲公遺意, 經理數年, 易以新之, 而稍廣其制, 中爲五架房舍, 爲僧寮前爲回廊, 層樓廚庫之屬, 後爲四架房堂, 爲辦需齋宿之所, 制度完緻, 而規模略成矣, 噫吾宗後孫, 凡幾人僉樞公, 乃以七耋之年, 獨辦百年未遑之事, 合享之, 規模從此克備, 苟非篤於追遠, 能如是乎, 菴旣成名之曰及時菴, 蓋仍其舊名而取諸時之義也, 易曰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 其祭時也, 邠風七月, 以祭祀, 以時爲第一義, 祭不及時, 非禮也, 嗣後諸孫, 苟能顧名思義, 盡心盡誠, 春雨露旣濡, 及時而瞻掃, 秋霜 露旣降, 及時而奠獻, 歲以爲常, 勿替引之, 又能追合享之義, 一心精潔, 毋敢忽怠, 又能體經紀之意, 以時 脩治, 毋敢毁壞, 則尙不負二公之心, 而庶乎無憾於報本追遠之道也, 諸孫其勉之哉. 附約戒一禁護松楸毋敢私自斫伐一顧恤菴僧毋或貽弊一毋殖財利貽弊居民
안동부 才山縣 及時洞에 墳菴(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무덤 근처에 지은 집)을 지었다. 조상들의 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후손이 각자 제수를 마련하여 짓지만 사고가 생기거나 혹은 가난하여 제수를 올리지 못할 경우가 있다. 같은 산 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合享하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분암인 及時菴을 지었다는 내용으로 56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이 글을 지었다
識
칠봉집권후지갑자 ( 七峯集卷後識甲子 )
惟我先祖七峯先生遺文放失於兵燹流落之餘, 先父兄收輯詩文若干篇, 藏于巾衍, 我從兄監役公, 旁搜補遺, 刪正訛誤, 聯入於世稿, 以待事力久矣, 顧全篇, 篇帙浩穰, 幷刊未易, 乃先以先祖遺稿及開巖先祖遺稿, 付諸剞劂氏, 謀所以傳諸後, 二旬而工告訖, 數百年未遑之事, 始擧, 於今日可但爲子孫之幸而已哉, 獨其文字之零星, 狀銘之闕漏, 雖可恨, 然, 慕齋 先生以考官得先生對策一篇, 知其爲儒者之文, 東岡先生嘗撰次言行錄而詳載南冥 河西 眞樂堂諸先生所嘗推重之語, 則先祖文章學術, 厚德淸操, 亦可以得其大槪矣. 是役也, 不肖方纍居關東之歙, 谷深以不得, 致身於蕫事之末, 以寓羹墻之慕, 爲痛恨諸族, 千里走書曰不可無卷末一言, 遂略記顚末, 如右云.
1804년(순조 4) 강원도 歙谷縣 유배지에서 七峯 金希參의 『七峯集』에 쓴 발문이다. 선생께서 남기신 글은 난리통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없는데 다행히 남아 있는 시문 약간을 모아 문집으로 간행하였다. 선생의 아드님인 東岡 金宇顒(1540~1603)이 편찬한 언행록과 南溟 曺植‧河西 金麟厚 등 여러 선생께서 보낸 글이 있으니 칠봉공의 문장과 학술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유배지인 歙谷縣에 있어 문집간행에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
하당집권후지경오 ( 荷塘集卷後識庚午 )
荷塘先生文集凡十卷, 其元集八卷, 訥隱先生所編次有序文, 矣續集二卷, 南野先生所校正也, 中間因喪禍不遑鋟梓, 藏在巾衍久矣, 今年夏, 先生之後孫 載德, 謀於諸親, 始付剞劂氏, 實先生易簀後, 九十二年也, 嗚呼, 先生以冰玉之姿, 純深之學, 唱道東南, 蔚 然爲斯文盟主, 吾縣最被扶掖之敎, 號爲文獻之鄕而百年之間, 遺風漸邈, 士趨不古, 景慕賢範, 感慨不 歇, 今先生之遺文, 始出, 是先生之敎, 將復行也, 先生之敎, 復行則吾縣之文獻, 將復振矣, 先生文章之顯晦其, 將爲斯文盛衰之候也. 與役旣完, 主事諸君以卷後之識, 來屬顧此蔑識耄病不敢承當, 辭謝再三, 而其請不已, 翰東仍念先生之與吾祖八吾公道義相交, 世爲潘楊之契, 今於諸君之請, 有不敢終辭者, 遂敢略敍顚末於後, 仍寓景仰感慕之思云爾.
1810년(순조 10)에 荷塘 權斗寅(1643~1719)의 『荷塘集』에 쓴 발문이다. 총 10권 5책으로 元集 8권 4책, 續集 2권 1책이다. 서문은 訥隱 李光庭(1674~1756)이 썼으며, 1810년에 간행되었다. 금년 여름에 하당 선생의 후손이 와서 책을 간행하고자 하였는데 하당 선생이 돌아가신 지 92년이 된다. 선생의 문집이 간행되면 선생께서 남기신 가르침이 우리 마을에 널리 퍼질 것이다. 지금 간략히 전말을 기록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보낸다고 하였다
괴담자권후지 ( 槐潭子卷後識 )
昔我從兄素巖公, 常稱槐潭裵君有好姿地, 看文字善思索, 眞篤志好古之士, 將爲鉅儒, 時其年弱冠爾, 余知其幼有異質, 順於父母, 好讀書, 或代父母之勞, 輒執冊以從於井臼之間, 固已奇之, 己酉春訪余于京邸, 與之處數日, 觀其擧止之安詳, 辭氣之謹勅, 儼然法家規範, 問其業則謙謙若無有, 夫無而若有, 俗學之大病, 而今有而若無, 其有可量乎, 於其歸, 益勉以遠大之業, 謂將刮目而待其成也, 數月而歸, 則槐潭子遽不幸, 得年纔三十, 噫以彼之才, 不得卒究其業, 而竟夭而閼, 此不能無憾於造化之天, 而傷惜之懷, 未嘗不往來於中也, 日槐潭子之子顯斗袖遺篇來示余, 繙閱其文, 如見其人, 重爲之, 一欷也, 蓋其爲圖爲說敷衍經旨折衷衆說, 凡天人性命之原, 河洛 象數之奧, 日月星辰之運行, 山川草木之變化, 靡不潛心, 極意而窮其妙, 若以初學入頭而言, 則蓋不是急先務, 而此實妙年索居時, 獨得之妙也, 及其就正於大山先生門下, 遂專意於古聖賢性理之書, 以語孟庸學爲根基, 以濂洛關閩爲階, 級至我東先儒, 論辯講劘之義, 亦莫不參互而攷訂, 於是有纂要焉, 有鎖錄焉, 俯讀仰思, 反復沈潛, 孜孜不懈, 古所謂篤志 力行之士, 殆庶幾焉, 始知素巖公所推詡, 誠知之深而惜乎見其秀而未見其實也, 顯斗以藐然之, 孤能收拾遺文, 遍乞文字於當世之大方家, 方謀鋟梓而壽其文, 其文壽則槐潭子將壽於世, 噫, 槐潭子有子矣請余一言以識卷末, 不忍辭, 略敍平日悼惜之意, 如右, 若其行誼之勤, 篤學業之淺深, 諸君子之論備矣, 不容贅焉.
나의 사촌형인 素巖 金鎭東은 항상 槐潭 裵相說이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이 독실하다고 칭찬하였다. 1789년(정조 13) 봄에 나를 찾아와 만나 보았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그가 돌아간 지 며칠 후 잘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의 아들 顯斗가 아버지가 남긴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고자 나에게 글을 요청하므로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1808년(순조 8)에 이 발문을 쓴다고 하였다
속자치통감강목발 ( 續資治通鑑綱目跋 )
宣廟庚寅, 文貞公東岡金先生, 續資治通鑑綱目成, (規模節目一遵紫陽綱目而視成化本詳略不同權衡或異)鄭文穆公曰節續綱目闡幽揚邃, 將裨世敎, 張文康公曰眞事業之辦, 又專在於續綱目之作, 則子朱子所以繼素王之業, 立萬世之經者, 公有以得其權衡, 矣許文正公曰續綱目二十卷, 又惓惓於斯道斯民者, 能紹述前古, 歷敍治亂, 闢邪說, 正人心, 開眎勸戒勤, 亦至矣, 正宗大王乙巳致祭時, 傳敎曰文貞公金宇顒, 卽穆廟朝出入經幄之人, 聞師受先正李滉而所編續綱目, 予在春邸時, 就見原本, 仍令宮僚校正, 謄出進講, 於胄筵, 丙辰夏, 臣翰東以左承旨入侍時, 又下敎曰續綱目曾爲進覽, 以活本印出, 知之乎, 以私家謄本 至於進覽而印出, 豈非以其書之甚韙, 而其書之韙, 豈非以其人之韙乎, 庚申四月, 晴川移額時, 又下敎曰其所編冊子, 將欲刊印廣布, 予所曠感, 尤出尋常, 當宁八年戊辰, 士林始倡議刊印于本院, 先生手編, 本十二卷而篇帙重大, 每卷分爲上中下三篇, 凡三十六卷, 凡例無先生手定, 故不敢撰錄而起例, 則於首篇分卷處, 輒書起, 某甲某帝, 盡某甲某帝, 如紫陽綱目例, 此書無弁識, 可攷據, 故謹摭諸先生說及先朝傳敎三條錄之, 篇後因幷略付刊印顚末戊辰八月下澣, 從七代孫翰東謹錄.
東岡 金宇顒(1540~1603)이 저술한 『續資治通鑑』에 7대 후손이 되는 저자가 1808년(순조 8)에 발문을 쓴 것이다. 『續資治通鑑』은 1590년(선조 23)에 완성된 이후, 寒岡 鄭逑‧旅軒 張顯光‧眉叟 許穆 같은 분도 뛰어난 저작이라고 많은 칭찬을 하였다. 1796년(정조 20)에 내가 좌승지로 있을 때 임금께서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활자본으로 인쇄되어 간행되었는가 물어보신 적도 있다. 1808년(순조 8)에 星州의 晴天書院에서 36권으로 간행되었다. 근거가 될 만한 서문과 발문이 없으므로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눌은집권후지 ( 訥隱集卷後識 )
英廟丙子, 先生歿, 縣之父老, 以禮葬之, 相與議曰先生之文, 不可以無傳, 遂區畫若干, 資而息之, 以備刊, 須旣又編輯遺文, 就正於兩大家, 約之爲二十一卷, 以留待後人, 今上戊辰, 始付剞劂氏, 實先生易簀後五十三年也, 嗚呼, 先生之文行, 而先生之道將以復明於世, 則先父兄經紀之苦心至意, 於今可見, 而苟非先生德義風韻, 有以浹人深者, 安能有此哉, 第其篇帙, 浩穰存拔, 務從精約篋中遺珠, 已不啻十之二三, 其見漏於原稿而未經勘定者又甚多, 固宜編爲續稿幷傳於後, 而顧事力不逮, 姑未暇焉, 所刊者亦未廣布, 雖甚可恨, 然, 學者誠能讀先生之書而講先生之學, 尤加反覆於居齋節目, 勸諭等文體, 先生擧似眷眷之意, 則豈非斯文後學之幸也, 與若其續成之圖, 廣傳之責, 又在後人用力之如何耳, 役旣訖, 先生之孫師勛甫, 訪予於黃田之寓, 曰先集成矣, 子盍一言以記其始終, 予辭以不敢, 而其請益勤, 主事諸公又責之不已, 仍念翰東昔在童穉, 亦嘗隅侍先生而未及執經, 請業爲恨, 今衰老, 濩落孤寄於薖軸之墟, 彷徨遺躅, 益不勝山仰之盛, 玆不敢固辭, 略識 顚末, 幷書所感于中者, 如右云爾.
訥隱 李光庭(1674~1756)의 『訥隱集』에 저자가 1808년(순조 8)에 쓴 발문이다. 눌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어언 53년이 되었다. 마을 어른들이 선생이 남긴 글을 오래 전하게 하고자 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간행된 뒤에 선생의 후손인 師勛이 찾아와 발문을 써 주었으면 하고 요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쓴다고 하였다
서김효자행록후 ( 書金孝子行錄後 )
予少日, 嘗從鄕里長老之後, 聞月朝之論, 皆稱金某孝子人也, 予心敬之, 及孝子之子, 時鐸從吾遊, 得聞其家庭之間, 日可見者, 頗詳悉間, 嘗來往, 竊觀其事親之道, 持喪之禮, 誠有大過人者, 予益心敬之, 今孝子之歿, 居然數十年, 孝子之子繼又奄忽俛仰, 疇昔 居常興嘆而顧吾儕無力不能張大而闡發之, 使其志行, 至今泯沒, 爲可恨日, 孝子之次子時鈺, 以諸君子所記行蹟一冊來示余, 謹受而繙閱, 卽平日耳目之所覩記, 無一事溢美語, 蓋其三朔糜粥杖而後, 起不脫衰經敝而改爲掃雪拜墓, 晨昏不廢, 哀慕之見於外者也, 鶖之墮雉虎之避路, 猪之投挺, 藥水之夢, 告誠意之感乎物者也, 至於國恤時, 月朔輒西向而拜, 又是孝之推而移於忠者也, 噫其, 眞孝子也, 夫諸君子記行之筆, 可謂無愧, 而鄕長老奬詡之言, 信而有徵, 噫, 其眞孝子也, 夫方今聖明在上, 以孝治天下, 凡係卓行無隱而不燭孝子之行, 其將有褒奬之日矣, 然, 亦豈孝子之志哉, 孝子之名潛字而昭宣城人, 故太宰文節公諱淡, 十世孫丙子戰歿, 義兵將 諱鈒, 玄孫忠孝家傳, 源遠而流長, 亦可見矣, 時鈺遍乞賢士大夫之言, 以表異之, 殆錢虞山, 所謂袁子之自旌者也, 遂識卷末以寓感嘆之意云爾.
효자 金潛은 자가 而昭, 본관은 宣城이다. 조선 초의 명신 金淡(1416~1464)의 10대 후손으로 매우 훌륭한 효자이다. 그의 아들인 金鈺이 아버지의 행적을 두루 기록하여 글을 지어주기를 부탁하므로 삼가 짓는다는 내용으로, 1808년(순조 8)에 지었다
고성주목사제말사적지 ( 故星州牧使諸末事蹟識 )
嘗聞星州居故察訪鄭儒文章之士也, 自言昔在丙辰春, 參別試初試, 其時本州牧使之子, 亦發解要與講工於冊室夜三更房堗甚熱, 欲爲迎風而散步於庭除, 仍出中門外, 轉至客舍, 階前是日, 卽正月十四日也, 月色如晝, 忽聞後園竹林有䔩䔩聲, 有一紅袍人身長八尺, 面亦長, 眞是好箇男子也, 相與揖而言 曰我非陽界人而姓名卽諸末也, 壬辰倭亂時, 以本州牧使, 戰亡于本邑, 骸骨在竹林中, 至今暴露, 無人收痤, 且伊時戰亡事蹟, 世無知者, 雖在冥冥之中, 亦不無抑鬱之心, 君須轉言, 于在朝, 公卿因得上聞則幸矣, 今番會試, 君必大闡, 遂唫贈一絶曰天長雲共遠山逈月, 同孤寂寞, 星山館幽魂有也, 無仍忽揖而去, 還入竹林中, 遂獨立蒼茫而已, 歸冊室太守之子, 問其酬酢, 答以無有, 彼引知印目見者, 以質之不能終, 諱遂詳言之, 翌日取考本州先生案, 則果有諸公名又於國朝榜目, 有諸公名鄭果參會試云, 自釋褐之後, 每念幽明之間, 受此付托, 寤寐耿耿, 時對卿宰, 大人囁嚅不發者, 以其事涉荒唐也, 一言於豊原君, 豊原聞而奇之, 錄置一通, 又言故判書洪重徵, 判書之孫克浩, 爲予言之壬子夏, 忽自上敎玉堂, 有博攷諸事蹟, 贈諡旌墓之命, 予方帶東壁, 當主其事而文獻無徵, 逢人輒問諸公事, 洪兄又詳此說, 錄在星湖, 僿說云, 噫, 諸公當板蕩之秋, 以一隅孤城, 不能抗豕突之鋒而乃能舍生取義, 以身殉國, 何其烈哉, 我朝兵燹之後, 文籍蕩然, 以公之烈而骸骨無人收事蹟, 無人知寂寞幽篁之中, 抱冤鬱而長終數百載之後, 始遇一鄭生以告之其魄, 亦不死矣, 何其毅也, 我聖上崇奬節義之化, 無幽不燭, 而諸公之事, 始顯未知, 乙夜燕涓之際, 看取何許文字, 而知此人不知之事蹟也, 猗歟盛哉, 諸公果贈美諡命, 道臣築其墓而旌之, 諸公之姪, 某亦同其死, 故幷與贈典, 又是盛德事也.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諸末(1567~1593) 장군의 행적에 관한 글이다. 鄭儒는 학식이 있는 선비이다. 1736년(영조 12)에 星州에서 성주목사의 아들과 함께 과거공부를 하였다. 정월 14일 달 밝은 밤에 대숲을 혼자 산책하니 갑자기 신장 8척의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諸末이라는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竹林에 시체가 있는데 아직도 거두어 가는 사람이 없다. 저승에서도 원통하다. 그대가 조정에 알려다오, 그대는 이번 과거에 급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임금에게 알려져 그의 무덤을 찾아 묘를 만들어 표창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현재 제말장군의 묘는 경상남도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는 경상남도 마산시 진동면 다구리에 있다. 제말장군은 또 漆原諸氏의 시조이다
上樑文
순천동문루상량문을묘 ( 順天東門樓上樑文乙卯 )
戎垣之鎖鑰, 有壯戒存, 苞桑譙樓之廢興無常, 喜見飛革, 以待暴客, 毋侈前人, 眷玆昇平, 州治槪是, 南沿 要阨, 壤界接嶠嶺之右, 都護府四百年形勝, 介水陸之間, 大瀛海千萬里, 民物殷富繁華, 稱小江南島嶼周, 遭關防爲大都會, 惟其咽喉之所最軫, 袽襦之須望海臺, 前羞宜懲, 設險千堞, 節制使中權自在, 擊柝重門, 爰有東城門樓, 乃爲上雨壞破, 黃樓之槌碎已久, 幾歎鶴訴上天西關之掌鑰, 太疏莫徵, 鷄鳴出客, 詢于父老, 咸曰改諸已乎, 訊之梓人, 僉謂時則可矣, 二載居職, 愧乏修擧之方, 三秋告成, 幸値亨和之際, 山輸海運, 摠是連雲, 干霄鬼劈神, 礱奄觀茂松苞竹, 何論魯府之仍舊, 不讓滕閣之重新, 惟玆不日而成,
莫非同心之致, 高壓喚仙之閣, 名勝聳瞻傍通燕子之樓, 壘壁增彩, 陰雨先備, 誰敢侮予, 北辰遙望時, 遊與客或興或廢, 縱關一理之虧, 盈之翰之, 屛長期百世之盤, 泰方擧梁麗, 將見百尺脩虹用勸呼邪, 恭陳六偉善頌兒郞, 偉抛樑東祥輝, 直接扶桑, 東此間定有文明氣鍾, 出奇材, 震大東, 兒郞偉抛樑西, 黌堂絃誦, 玉溪西, 峴山墮淚, 今猶古興, 學碑前落日西, 兒郞偉, 抛樑南, 茫茫大海, 經其南淫盲捲盡鯨波, 穩白雪山鷄, 來自南兒郞偉, 抛樑北, 連天大道, 松山北, 金鑾一夢, 五雲處, 獨上危欄, 望直北兒郞偉, 抛樑上, 淸時歌舞, 接臺上, 遊人且莫高聲語, 帝座遙遙, 臨在上兒郞偉, 抛樑下, 關人抱鐸眠亭下, 河淸海晏昇平地, 不 必深深魚鑰, 下伏願上樑之後, 棟隆有吉, 風雨攸除, 有譏無征, 民風丕變, 從新舍舊, 節制申明, 百里桑麻, 均霑雨露之澤, 一樓架曲, 共樂湖山之春.
1795년(정조 19)에 順天都護府使로 있을 때 東門樓를 완성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순천은 남쪽 지역의 요충지이고 물자가 풍부하다. 城 동문의 누각이 비가 새고 무너져서 새로 지으니 唐나라의 滕王閣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산서원이건상량문 ( 文山書院移建上樑文 )
天下無家, 獨占一區, 杜谷山中, 立廟共仰, 百世高風, 制度粗完, 瞻聆俱聳, 恭惟杜谷, 洪先生乾坤正氣, 河岳精英, 德秉陽剛, 松柏之姿, 冰霜之操, 家傳淸白, 坡翁之伯, 晩爺之孫, 瓌奇拔俗之標, 累協非常之夢, 雄渾活國, 之手早播, 驚人之詞, 衿期則萬里鵬摶, 氣槪則千仞壁立, 罹群壬之奇禍守正而不撓, 際橫庚之昌辰, 鞱光而自靖, 屬當丙丁之喪亂, 奄見滄桑之變, 更避地南遷, 高臥太白深處, 號天北望, 獨爲大明, 遺民有親, 在堂忍蹈魯連之海無處托跡, 謾採首陽之薇, 謝徵辟於明時, 不是離群而絶俗, 全性命於亂世, 莫非扶綱而植倫, 所以聞風而共尊, 至於歷世而彌篤, 九峯之尸, 祝遽撤, 可使井廢而地荒遺墟之片石, 獨存, 但見山高而水潔久矣, 儒林之抱鬱, 迺於文山而建祠, 蕉荔馨香, 縱喜瞻依之有所堂齋, 狹隘尙欠, 規橅之未遑, 爰因薖軸舊墟, 載營增廣新制林壑, 寬閒而幽邃, 自在, 乃城洞天澗, 溪潺湲而淸漣, 別是塵寰淨地, 不煩靑烏之改, 卜略倣白鹿之遺規, 梓匠趨風而效能若神相者, 縫掖釋經而敦事不日成之, 齋廚整齊, 可備, 灌薦升降之節, 房闥淸淨, 實合絃誦, 揖讓之場, 黌舍之儀, 始成景行之慕, 愈切想氣節之巍卓, 文殊高聳, 天心挹潔懷之淸瀅, 玉溜淨瀉鏡面溪山爲之動色衿紳, 於是展誠將擧修樑, 敢陳善頌, 抛樑東, 扶桑曉旭, 影曈曨, 祥雲捧出, 先天色來照明宮, 太白中, 抛樑南, 釣臺高處水如藍一絲, 扶鼎人誰識 鬃笠羊裘宇宙男, 抛樑西, 五更山月, 杜鵑啼, 雲車彷彿, 時來往, 終古棒嶺, 望美兮, 抛樑北, 層峯矗立, 撑天極, 風聲百代, 幷崢嶸, 山不蹇兮, 石不泐, 抛樑上, 靑天曠朗, 無纖障, 昭乎日月, 不爲明, 須識先生這氣量, 抛樑下, 涓涓澗水, 淨如灑, 慇懃直去, 海東朝, 敬誦遺詩眞境寫, 伏願上樑之後, 儒風丕變, 棟宇長新, 綠水靑山, 遡風韻而增感, 黃花泂酌, 奉香火而罔愆砥行, 立名, 不啻若親炙入孝出恭, 永有所則儀,
경상북도 奉化郡 文殊山 杜谷(현재 봉화군 鳳城面 桐陽里)에 은거한 杜谷 洪宇定(1593~1694)을 모시는 문산서원 상량문이다. 두곡 선생은 형조판서를 지낸 洪可臣(1541~1615)의 손자이다. 병자호란 때 난리를 피해 두곡에 들어와서 절개를 지키며 한 평생을 살았다. 저자가 68세 때인 1807년(순조 7)에 지었다
와은암상량문 ( 臥隱菴上樑文 )
幾年心上經營, 居然我泉石, 今日眼前, 突凡不負, 吾靑山逝將老焉, 亦苟完矣, 睠玆臥隱一曲, 實爲吾縣名區, 水抱山廻, 怳如盤旋之谷, 村深境僻, 自是小有之, 天前控鶴, 山晴嵐, 飮食起居相接, 左引虯巖奇勝, 朝暮烟雲, 與同地傳先祖胥宇之原, 九峯山在村連訥爺考槃之軸, 八卦亭, 留欲居南村, 可愛風俗之近古信美吾土, 亦喜桑梓之入望, 玆營林壑之棲, 獲遂漁樵之計, 幾畦杞菊, 自是草草, 生涯一枝, 鷦鷯何須渠渠廈屋, 或醉或睡, 自稱酒仙, 臥仙於市於山誰道大隱小隱, 家傳詩禮, 無忝百世, 箕裘日長桑麻, 聊樂一區, 烟月爲疏, 短引用助修樑.
년을 지은 끝에 눈앞에 우뚝 서 있다. 앞으로는 鶴山, 좌측으로는 虯巖을 끼고 있어 경치도 좋다. 가끔 취해서 자기도 하니 酒仙이라 불러도 좋고, 臥仙이라 불러도 좋다. 와은암은 저자인 김한동이 머무는 곳으로, 56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건물을 짓고, 상량문도 지었다
백록리사정관루상량문 ( 柏麓里社靜觀樓上樑文 )
士林有所依歸, 瞻廟宮而仰, 止黌舍不能容, 庇喜樓閣之巋, 然匪多前功, 要備, 後觀竊惟柏麓社, 藏修之所, 寔是六先生腏享之祠樹, 百代之風聲, 文章, 道學, 闡一方之名敎, 忠孝睦婣, 立朝而殫, 謇諤之誠, 淸名直節, 無間然矣, 處鄕而任, 導迪之責, 流風餘韻, 有存焉者, 間百年而迭興猗歟. 魯多君子, 環一縣而共 慕允矣. 社祭先生頃以衙洞之地, 偏乃於縣村而移搆占平衍而拓基址, 齋廚整齊, 捨湫隘而就寬閒山川擁衛, 第緣事力之不逮, 尙此樓觀之, 未遑章甫, 揖讓之時, 顧無周旋之地, 闤市喧囂之處, 合有遮截之方, 閱幾年而經營, 自今秋而規畫, 寫材則遠邇交輳, 可見詢謀之僉同, 蕫工則老少齊聲, 寔出尊尙之不 已, 竹之苞而松之茂, 制度粗完山, 若高而水, 若深觀瞻, 俱聳學舍之規模, 始定衿紳之遊息, 攸寧敬老之修約, 猶傳憶粲讙而興感, 溪院之絃誦, 相聞, 喜講習而交修平挹滿野, 風烟政好, 觀理活處, 高壓撲地, 閭舍須要求靜動中, 卽地興懷, 敢忘訓迪之懿範, 顧名思義, 益懋涵養之眞工, 將擧修樑, 庸贊善頌, 抛樑東, 瑞旭朝昇, 柏嶺東, 孕出人材, 尋舊緖, 終敎文物, 冠吾東, 抛樑西, 畏影遺墟大野, 西一變, 誰知君子化, 當時漁獵, 水東西, 抛樑南, 松澗涓涓, 幷水南看, 取細流能學海盈科日夜, 放于南, 抛樑北, 忠定公祠臨水, 北留與後生模寫之高名, 星斗齊天北, 抛樑上, 魚躍鳶飛, 形下上遐, 不作人無古今, 君王壽考, 臨之上, 抛樑下, 吹面光風, 楊柳下解, 識聖門, 吾與嘆冠童携手, 舞雩下, 伏願上樑之後, 以文會友, 誦讀課試之勤, 孜飭躬 攝儀, 揖讓升降之齊, 肅勿以小, 故而爭較, 曲直合思 大道而交致作成, 是謂保佑而自天申之, 亦必陟降而有陰隲者.
柏麓里社와 靜觀樓 상량문이다. 몇 년을 걸쳐서 완성하지 못하다가 금년에 완성되었다. 백록리사는 사당이지만 또한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내용이다. 백록리사에는 李宗準‧李弘準‧鄭惟一‧洪俊亨을 모시고 있다. 저자가 71세 때인 1810년(순조 10)에 이 글을 지었다
臥隱先生文集卷之六
와은선생문집권지칠
북천시전말 ( 北遷時顚末 )
壬戌十月日, 持平鄭彦仁上疏, 大槪云云, 前承旨金翰東被家煥之豢養. 甲寅一疏, 爲家煥立幟爲邪術 護法. 再昨夏身在京輦, 奄遭天崩之慟, 而因山之前, 無端決歸, 大小祥祀, 中月禫禮, 偃然在家, 一不來參, 潛懷怨懟, 不顧臣節, 爲先施以島配之典云云. 答曰當詢大臣處之, 備局回啓, 前後臺章之論, 金翰東者屢矣, 未有如此, 疏之指陳罪狀, 極其嚴峻, 渠之受恩於先朝如何而天崩之際, 身旣在京, 不待因山, 遽卽還鄕, 遂至終祥, 一不來參, 他事固無論, 卽此一事焉, 逭重律. 前承旨金翰東亟施竄配之典, 以謝嶺士何如. 傳曰允(自該曹定配所于明川 )其曰甲寅一疏者, 誠是孟浪. 甲寅正月初一日, 以軍職往參陳賀禮. 初四日, 除順天府使. 初八日, 仍爲辭朝, 至乙卯冬, 始遞. 二年之間, 長在外方, 雖辭職上疏. 初非可爲之職而謂之甲寅一疏, 是何所據耶. 其曰因山前下來, 果有是事, 從兄葬禮在近而適値因山, 退期月餘, 故暫爲下來時八月十二日也. 才過虞卒, 仍與隣近罷散朝官, 數十人同爲馳發進哭於因山前, 朔祀卒哭畢後, 以無實職, 仍爲還鄕, 留住輦轂之下, 殆滿一年於私家, 變故適在其間, 必欲一訣於窀穸之前自是人情之所同然. 況且吾之於從兄, 情是兄弟, 恩幷師父, 疾病殯殮, 漠然在外, 臨穴一慟, 尤是人情之所不可已者. 第以奄遭天崩之慟, 不敢一日離違, 欲歸未歸, 趑趄月餘, 人情終不可忍耐而因山之禮, 中遽退期, 旣無實職, 暫伸私情, 數旬之間, 乍往乍還, 執此爲罪驅之於無端決歸, 一不參哭於祥 禫之班, 俾爲千萬古無臣節之罪人, 則似或冤矣. 暫來則固可罪也. 卽還容或恕矣. 幷與卽還而漫漶之, 旣還而參哭於因山, 一國之所共知, 況於靷發之日, 見差門橋祭官, 偃然在鄕之人, 亦有差祭之例乎. 祥禫哭班未得參哭, 特緣實病之沈痼而然, 猶不知實狀, 執此爲罪, 則雖被誅戮, 豈有分毫之有介於心乎. 但吾東之人, 不習於禮, 往往有年老疾病之人, 或未得一參於國喪, 三年之內在山, 則哭於山, 在野則哭於野, 又是吾嶺先輩, 遺規四百年來未聞以此論, 勘以吾被遇, 不敢以常例論, 以吾淺劣,豈敢擬先輩事, 而揆以法典, 則借此搆罪, 誠所未有. 未知金石之典, 或有時而輕重耶. 臨行略記, 留在家藏, 以待後之守法者. 十月初四日夜夢有入侍之命, 以冠袍趨入, 則先大王御禁苑樹陰中間僻處, 庭壇之上, 左右無侍臣, 不知爲誰, 而獨有一大臣侍坐, 命賤臣進前, 天笑爲新, 有若平日談笑, 如家人不起言端而多少下敎, 殆近半日矣. 顧視晷影, 特命進前敎曰方有出使之事, 而事甚緊急, 無他人可送, 爾雖老矣, 可堪此行, 須爲速發, 暫往卽歸, 賤臣夢寐之間, 却忘分義, 起伏對, 曰下敎如此, 而臣之病勢, 萬無行役之望, 唐突起伏而請辭者屢矣. 上笑曰予非不 知爾, 實可堪乍往乍還, 必不添病, 勿辭速發, 顧語大臣曰此承宣, 似不下直而出矣. 大臣曰速爲下直, 賤臣又起伏對曰章服在外, 冠袍非下直之具, 上又笑曰何以冠帶不爲持入耶. 日已向晩, 須爲覓入而辭去, 忽見繕工下隸一人在近, 使之出門外持章 服而來, 仍爲改服, 服畢忽然睡覺, 乃是一場夢事仍以自怪于心. 初八日夢, 有客來, 稱以金吾官曰有同爲出去之事, 爲是而來當卽偕往耳. 數日之間, 夢兆至再可甚怪也. 數年以來, 言者不熄, 必有事端前夢之屢, 屢恩敎, 實非偶爾, 惶懍感悚, 病伏恭竢十二日得見金吾郞李斐彦 ( 頤淳 )書則前月二十六日鄭彦仁疏中, 多般搆揑, 指無謂有作一罪案, 至請島配始知夢中事, 非虛也. 十五日見寧海倅書, 則又有大臣覆奏竄配允下之命. 十六日府吏持該府公事而來配所, 則明川而爲一千六七百里之地, 罪重罰輕, 匪譴伊恩感泣無地. 仍聞配所入啓, 在初一日而允下. 至初六日云, 始覺初四之夢, 發於配所欲下未下之際矣. 方以三年內, 不一參哭得罪而 先大王於昭降臨, 先事下敎若是, 丁寧無狀, 賤臣蒙此恩, 數於冥漠之中, 恨不得卽地, 溘然以遂褥蟻之誠, 臨行泣識留作家中銘恩寶帖. 癸亥七月二十五日, 展謁時, 伯子熙益擊錚, 後刑曹判書蔡弘履啓曰再昨日動駕時, 安東幼學 金熙益擊錚於衛外, 故取見其原情, 則爲其父鳴冤事也相考金吾配案, 則翰東以家賊之豢養, 爲家賊立幟爲邪術護法. 而庚申因山之前, 無端決歸, 大小祥事, 中月禫禮, 偃然在家一不來參, 許多罪犯, 俱係罔赦, 以渠罪犯善地量移特出寬典, 則肆然縱子張皇爲說唐突鳴金驚動天聽之狀, 萬萬痛惡, 原情置之金熙益不可以爲父鳴冤, 有所容恕, 自臣曹考律嚴勘何如. 傳曰允勘律置之可也. 八月十六日, 元陵行幸時, 上言後刑曹判書李義弼啓曰再昨日動駕時, 安東幼學金熙益, 爲其父鳴冤事也. 其父於庚申因山之時, 因臺言竄配, 明川府今春邦慶量移歙谷是如上言辭緣帖, 連爲去乎. 特蒙天恩, 望良爲白乎旀. 渠之負犯臺言之嚴斥, 備局之決案, 不啻峻嚴而善地量移, 特出恩典, 則月前鳴金, 今又 上言尤極, 猥越金熙益自臣曹考律嚴勘何如. 傳曰允如此煩瀆雖甚駭然係是爲父稱冤之說勘律安徐. 甲子三月十五日, 次對時, 判義禁趙鎭寬啓曰臣於昨年待罪, 本府時, 以定配, 罪人金翰東事, 有所論執, 而今叨前任於關東, 放未放啓本中, 又以此罪人請置, 仍秩者, 蓋以年前一疏關係至重故也. 然其所犯與聲罪不無混圇者. 金翰東曾於庚申在京成服, 其後下鄕, 不赴於因山, 及小祥爲渠罪目, 而渠旣受服下去, 則與初不奔問有異只其悖疏, 卽渠斷案, 而但罪名中陳疏年條相左( 鄭彦仁疏中甲寅一疏云者以己未疏誤陳年條故也)有非核實之道, 臣意則上款一事, 不必擧論, 下款年條, 令政院考出釐正, 則名與罪相合而義理爲益嚴, 故敢此仰達下詢大臣處之何如. 上曰大臣之意何如, 判府事李 時秀曰本事臣未能詳記, 而今聞重臣所奏, 似出於公論矣. 右議政金觀柱曰因山不參, 古亦有先正臣李滉已例, 而下款事, 果如重, 臣所奏則釐正, 恐宜矣. 上曰釐正可也. 因敎曰其子屢次鳴冤, 可知其冤矣.
乙丑月日, 上進參大王大妃殿, 昏奠卽席, 因命入禁府徒流案落點, 特爲放還
63세 때인 1802년(순조 2)에 함경북도 明川으로 유배가게 된 전말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1802년 10월에 持平 鄭彦仁이 상소를 올리기를 “前承旨 金翰東은 李家煥의 영향을 받아 邪術(천주교를 말함)을 옹호하였습니다. 1800년에 정조대왕이 승하하였을 때 국장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있었으니 섬으로 유배 보내야 합니다.”라고 하니, 純祖가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한동은 정조대왕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승하하였을 때 국장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다른 일은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빨리 유배를 보내어야 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함경북도 명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를 가게 되는 원인은 둘이다. 첫째는 이가환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옹호한 점 둘째 정조 국장 때 참석을 하지 않았다는 점. 이 두 문제에 대해 저자가 사실과 다름을 조목조목 반박함이 주된 내용이다
선조가의대부행호남도병마절제사부군갈 ( 先祖嘉義大夫行湖南道兵馬節制使府君碣文(庚申) )
府君諱用超姓金氏新羅敬順王子錫受封義城, 子孫以爲貫. 後至太子詹事諱龍庇有大功德於民, 縣人立祠祀之, 公其玄孫也. 曾祖諱英判典客寺事. 祖諱之銳草溪郡守. 考諱修德判事贈吏曹參判. 嗚呼, 今距公之生四百餘年, 無狀碣文字家牒, 只載文科佐. 我太祖爲開國原從功臣, 嘉義大夫湖南道兵馬節制使而已. 其表德登科仕宦, 生卒年月, 雖不 可詳, 據麗史恭愍二年, 幸長湍, 駐駕龍遁野觀射, 以 李沃 金用超善射, 各賜鞍馬, 白文寶獻詩, 略曰駕前虎賁皆少年, 張弓發矢百步穿. 箇中兩雄金與李, 精力拔萃何翩翩. 今載東文選, 恭讓二年, 倭寇楊廣道密直副使金某等, 從我恭靖大王討之, 遇賊于寧州 道高山下, 斬百餘級. 四年以趙浚 南誾等爲節制, 分掌其道戎馬, 於是, 鄭道傳 尹紹宗金某等十三人, 皆得除拜, 有差此其大槪也. 府君自星州內基, 移居于知禮柳川村, 後葬于後崗龍馬飮水形之山中間. 子孫摧殘, 所居稍遠, 遂被人隱諱, 任其頹廢者久矣. 肅廟丙寅, 始尋識之, 英廟癸巳, 從兄鎭東與諸族議遂相與改封, 而修歲事焉. 貞夫人玉山張氏世系不傳, 墓在星州蔓里, 東岡公墓後. 公有三男一女, 男 和進士鑑鏡, 皆水使女韓卷校理進士公. 子宗師 贈參議, 參議公四子, 貴孫副司直. 仲孫 允孫亦副司直. 季孫修義校尉, 伯司直公之孫關石參奉, 享德泉祠. 子聃壽參奉, 號西溪配享晴川. 生員重聲卽丙寅尋得公墓者, 司直公之五世孫也. 季司直公之玄孫汝權號觀瀾齋. 校尉公之孫, 希參歷中書三司, 贈冡宰, 號七峯, 享川谷東別祠, 七峯公四子, 宇弘府使, 宇宏副提學, 號開巖享涑水院祠. 宇容監察. 宇顒吏曹參判, 號東岡, 享晴川院祠. 其後八九代, 多偉人淸宦, 而不能盡錄. 翰東校尉公之後也. 曾在昇平任. 所以如干俸餘付觀瀾公後致寬等殖之, 不多年治石將立索文於翰東, 翰東非其人, 何敢焉. 特嘉其誠, 謹敍其大槪如右.
조선조 開國原從功臣 嘉義大夫 湖南兵馬節制使를 역임한 조상 金用超(?~1406)를 위해 지은 碑碣文으로 61세 때인 1800년(정조 24)에 지었다. 돌아가신 지 어언 4백년이 되었다. 구체적인 관직 이력과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 근거하면 1353년(공민왕 2)에 활을 잘 쏘아 말을 하사 받았는데, 당시 白文寶가 지은 시가 『東文選』에 실려 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定宗大王과 함께 楊廣道(충청도와 경기 남부)에 쳐들어온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만년에 星州에 은거하였다. 부인은 玉山張氏, 슬하에 3남 1녀가 있다는 등의 내용이다. 왕조실록 1406년(태종 6) 1월 13일 조에 “전 충정도 병마절제사 金用超가 卒하니, 殯所에 賜祭하였다. 김용초는 義城縣 사람인데, 성품이 質朴하고 곧으며, 武才가 있었다. 아들이 셋이니, 金華‧金鏡‧金鑑이다.”이라고 하였다
눌재선생묘비음 ( 訥齋先生墓碑陰 )
嗚呼此訥齋李先生之墓也. 先生諱弘準字君式, 月城人. 中成化丙午司馬. 慵齋先生之弟, 自金溪移寓 乃城縣. 戊午禍後, 不復以進取爲心. 杜門求志, 奬勸後學, 依藍田約設鄕規, 縣風丕變, 縣爲君子, 鄕先生之力也. 縣人追慕之, 與慵齋先生幷享于柏麓里社. 墓在乃城北銀峯東西, 向之原墓, 前有短碣, 只刻先生所著, 碣銘陰記, 剝落殆盡, 先生平日行蹟, 無以徵焉. 雖甚可恨, 然觀於家訓及碣銘, 可以見先生之大略, 奚多乎哉. 舊碣旣虧缺, 外裔諸孫, 相與經紀, 鑱石改竪, 主其事者, 成宗魯權思訥也. 追刻自著碣陰略記, 子孫於後先生配咸昌金氏主簿諟敬之女, 觀察使爾音之玄孫, 生一男五女, 男德璋黃山道察訪. 女適李希侗生員, 余漢瑾 琴椅, 府使鄭穆蕃. 參奉李麟德, 璋娶豊山柳氏進士子溫之女, 生四男一女, 男艿 茹 葎早歿, 苞參奉, 女適李薰, 生員李希侗, 五男一女, 男文魁進士, 文台生員, 文斗生員, 文奎參奉, 文井參奉, 女適郭河余漢瑾一男, 夢得 琴椅二男, 應鍾奉事, 應賓生員, 鄭穆蕃, 一男一女, 男惟一大司諫, 女適李淑仁, 進士李麟, 四男三女, 男忠寬 士寬 克寬 順寬, 女適南好善, 李碩幹, 參奉, 南好禮
訥齋 李弘準의 묘비 陰記이다. 묘비가 오래되어 글자를 읽기 힘들어 외가쪽 후손인 成宗魯‧權思訥 등이 새로 비석을 세웠다. 선생의 자는 君式, 본관은 경주, 1486년(성종 17)에 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慵齋 李宗準(?~ 1499)의 동생이다. 무오사화 이후로 두문불출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부인은 咸昌金氏, 1남 5녀를 두었다는 내용이다
제진칠릉문경술○수찬시 ( 製進七陵文庚戌○修撰時 )
於皇藝祖, 克配天德, 萬年鴻基, 百世燕翼, 啓佑後人, 景命申錫, 篤棐陰庥, 無疆維曆, 喬山展慕, 霜露增惕, 敬伸攝儀, 冀賜歆格. 右健元陵於休聖德, 夙宣義問, 二載功化, 萬世程訓, 聖妣同祔, 有鬱仙寢, 松梓入瞻, 霜露增感, 儀遵攝將, 誠缺躬薦, 降監微忱, 以佑以眷. 右顯陵天挺聖姿, 於赫中葉, 亹亹令聞, 煌煌宏業, 有侐靈寢健元之傍, 二妣陟降, 左右洋洋, 展拜象設, 僾然若臨, 祗伸攝儀, 冀垂顧歆. 右穆陵溫溫坤儀, 配我長陵, 寶冊光膺, 徽音昭升, 陰功風著, 篤慶長流, 有鬱仙寢, 遙望珠邱, 松梓縱隔, 佳氣相連, 瞻望怵惕, 替陳豆籩. 右徽陵於顯聖祖, 晟德嵬勳, 克協維夏, 無憂其文, 鬱鬱崇岡, 先后同原, 衍祉毓慶, 永裕後昆, 瞻望松柏, 怵惕霜露, 攝將虔享, 祗伸追慕. 右崇陵天佑聖祖, 大曆無疆, 承哉文謨, 遺我寧王, 小子嗣序, 夙夜兢惕, 寔賴冥庥, 衍慶申錫, 喬山有鬱, 聖妣同祔, 祗瞻松梓, 替伸感慕. 右懿陵有事元陵, 密邇崇岡, 松梓入望, 感慕深長, 俔天之德, 恭聞內則, 陰功夙著, 寶齡還嗇, 懿陵遙連, 神理攸宜, 冀垂歆顧, 敬伸攝儀. 右惠陵
51세 때인 1790년(정조 14)에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일곱 개의 왕릉에 대해 지은 축문이다. 健元陵(太祖)‧顯陵(文宗)‧穆陵(宣祖)‧徽陵(仁祖繼妃莊烈王后)‧崇陵(顯宗)‧懿陵(景宗)‧惠陵(景宗妃端懿王后)이며, 이들 능은 모두 경기도 구리시 東九陵에 있다
제진홍릉고유문 ( 製進弘陵告由文 )
墻瓦有漏, 宜亟改修, 玆因令辰, 祗告事由.
弘陵(英祖妃 貞聖王后)의 기와가 허물어져서 좋은 날을 택하여 수리한다고 하였다. 53세 때인 1792년(정조 16)에 지었다
제진육상궁의소묘문희묘문 ( 製進毓祥宮懿昭墓文禧廟文 )
時維仲秋, 日値令辰, 深增感慕, 兼薦苾芬. 右毓祥宮 中元令節, 仲秋吉朔,
兼薦淸酤, 仰冀來格. 右懿昭墓 氣流時遷, 吉朔令辰, 愴念深切, 侑酌兼陳.
右文禧廟
가을 한가위 때 毓祥宮(영조 생모인 淑嬪 崔氏)‧懿昭墓(英祖 世孫인 莊祖, 3세 사망)‧文禧墓(정조 후궁인 宜嬪成氏 소생) 세 분의 무덤에 올리는 축문이다. 좋은 길일에 사모하는 마음을 올린다고 하였다. 51세 때인 1790년(정조 14)에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이다
변효자분황시고유별축문대본손작 ( 邊孝子焚黃時告由別祝文代本孫作 )
伏以, 恭惟府君, 行篤天倫, 佩服經訓, 孝友是先, 昔在辛亥, 歲侵盜起, 縱橫山野, 劫掠鄕里, 盜夜入室, 親老在堂, 守殯倚廬, 聞變蒼茫, 齡纔十八, 手無寸鋩, 挺身冒刃, 大呼衆中, 爾寧@我, 毋近吾翁, 身貼親背, 左遮右防, 抱父扼虎, 今古潘楊, 被數十瘡, 一臂已斷, 盜猶知感, 遂自退散, 鄕里來觀, 咨嗟涕洟, 溫被獲全, 創毒阽危, 閱日僅蘇, 經時彌痼, 醫言割斷, 可尋生路, 絲聲峻責, 其言妄耳, 體受歸全, 寧死敢毁, 精發宵寐, 神人來告, 有上帝命, 爲孝子勞, 龍䐉靈餌, 對症良方, 惟疾何憂, 其後必昌, 誠之果然, 親心乃寧, 誰無父母, 見聞皆驚, 地主撫痕, 將欲陳達, 欿然懇辭, 遂晦其跡, 聞風者敬. 好是懿德, 多士聯章, 于府于伯, 猗歟先朝, 以孝治國, 儀曹以聞, 王曰嘉乃, 褒典將擧, 事且有待, 聖明繼述, 闡發幽隱, 遂加特恩, 庸錫崇典, 府君贈童蒙敎官, 朝奉大夫, 祖妣從職, 贈令人寶誥, 煒煌榮曜, 重泉非府君志於世敎然慶溢寒門感激孱孫宣敎焚黃式遵儀文族親咸聚知舊來將焄蒿怳惚陟降洋洋惟是音容, 久而愈邈, 奉此恩榮,
悲喜俱極改, 題恩秩, 受天明佑, 謹以酒果, 用伸虔告謹告.
도적이 밤에 들어와 부친을 해치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부친을 감싸고 상처를 입었다는 변효자에 대한 축문이다
인계서원이건봉안문 ( 仁溪書院移建奉安文 )
恭惟先生, 氣鍾純剛, 質稟淸直, 孝成于家, 忠移於國, 抗言斥佛, 職事諫爭, 知幾遜荒, 介石惟貞, 時丁革命, 矢死罔僕, 節彼秋嶺, 我所爰得, 葬不表隧, 圃老同岡, 風聲澟烈, 世遠彌章, 儒林景慕, 腏食廟宮, 廟堂聳聽, 祀典益崇, 舊地湫隘, 新卜寬敞, 月岫高峙, 玉溪入望, 院宇更新, 儀節稍備, 俶簡良辰, 敬薦蕉荔, 精靈如水, 庶賜歆格, 永康禋祀, 百世無斁. 右桑村 恭惟先生, 淸粹之氣, 卓越之資, 早聞大方, 從遊愼齋, 就正溪門, 篤信師道, 潛心講究, 惟期深造, 暫試朝籍, 不屑進趣, 蕭灑芝窩, 恬靜自守, 川老潭翁, 講劘麗澤, 餘事文章, 得臻妙極, 泣血守制, 親友之嗟, 從治無槨, 先師是嘉, 風範永垂, 士林爭慕, 爰曁桑翁, 合食同廟, 舍舊營新, 玉溪之東, 制度粗完, 祀秩旣崇, 簡玆吉辰, 恭奉縟禮, 願言顧享, 永世勿替. 右芝山
인계서원을 이전하면서 桑村 申欽(1566~1628)과 芝山 曺好益(1545~1609)를 모시면서 올린 봉안문이다. 좋은 날을 가려 모시고자 하니 영령들은 흠향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봉안문은 神主나 畵像을 받들어 모실 때 올리는 글이다
문양리사봉안문 ( 文陽里社奉安文 )
恭惟先生, 孝寧華胄, 淸白家聲, 天資朗邁, 趾美紹光, 操履峻潔, 衿韻蕭散, 聰穎超詣, 博洽墳典, 發爲文章, 涵泓演迤, 早闡科第, 非心營利, 短律言志, 江海漁竿, 飄然鴻擧, 遂家龍門, 圖書自娛, 隴畝將終, 運値橫庚, 俊乂彙征, 奮起荒野, 羽儀明庭, 歷試郞署, 不擇崇庫, 出典郡邑, 氷櫱自持, 隨處盡職, 可驗素養, 佩玦元老, 守正俟命, 麗澤群賢, 道義相仗, 維學之力, 何試不可, 邊報日急, 奏對嫺雅, 西陲對壘, 戎務整暇, 治成三郡, 天褒屢加, 公山羈的, 頻問其來, 眷註日深, 進塗將開, 淡泊名利, 已判內外, 急流勇退, 非果忘世, 爰得我所, 大嶺之南, 絶意名關, 宜棲嵌巖, 婆娑松桂, 吟弄雲烟, 優遊卒歲, 永矢無諼, 夷考內行, 孝友惟則, 滫瀡盡誠, 祭祀致慤, 推以接物, 和氣由由, 淸風颯爽, 百世長留, 文殊之陽, 杖屨之所, 多士景仰, 遺孫感慕, 祧祀將薦, 祠廟新成, 賢祖有孫, 合享同堂, 歿而可祭, 其在於斯, 有踐籩豆, 有馨醴齊, 嗣孫有慶, 衿紳來相, 共仰風猷, 穼深感愴, 焄蒿怳惚, 陟降洋洋, 舍舊從新, 以安以寧, 恭薦吉蠲, 庶賜歆格. 右雙溪 恭惟先生, 退爺之孫, 溪翁之世, 善慶之積, 奎璧之會, 天稟雋邁, 德性堅貞, 內膄外榮, 貌黯神淸, 玉雪衿懷, 松鶴風標遊心古初, 脫迹塵表, 家庭奉敎, 斷念名利, 明窓淨几, 左圖右史, 閒中今古, 卷裏聖賢, 上窺羲周, 下逮洛閩, 玩頤玄微, 溯洄眞源, 旁通貫穿, 而百家言, 咀嚼英華, 茶飯義理, 文詞古雅, 簸掃糠粃, 宜裨世敎, 黼黻笙鏞, 蘊而不發, 在家爲政, 怡愉養志, 喪祭以禮, 友愛之篤, 睦婣之摯, 接物由由, 和氣春溫, 誘掖後進, 誨誘諄諄, 懿厥淑行, 自有淵源, 函丈聞道, 三字元符, 葛翁傳訣, 誠關夢覺, 金蘭結社, 山中四老, 磨礲道義, 寤寐鄒魯, 間以嘯詠, 宮商相宣, 靑霞水石, 燁然如仙, 修身有方, 君子道三, 居家垂訓, 十六嘉箴, 百世遺風, 山高水長, 儒林矜式, 後孫羹墻, 有翼新祠, 文山之麓, 杖屨剩馥, 澗阿遺躅, 禮因祧遷, 儀倣社祭, 旣崇賢祖, 同祀一體, 籩豆有踐, 醴齊惟馨, 風儀若接, 謦咳如承, 駿奔將事, 衿珮蹌蹌, 焄蒿肝蠁, 陟降洋洋, 俯監誠衷, 庶幾歆格, 啓佑後人, 報祀無斁. 右茅山 常享祝文淸操懿行, 光前啓後, 克享明禋, 永垂陰佑. 右雙溪 德修于身, 光顯于世, 斂而不施, 後人是惠. 右茅山
두 분 雙溪‧茅山 선생을 문양리 사당에 모시고서 올린 봉안문이다. 세상의 명리를 끊고, 밝은 창가에 앉아서 학문에 전심하면서 깊은 이치를 연구하였다. 지금 후손들이 합동으로 제사를 올리니 영령은 편안히 지내라고 하였다
구산리사봉안문 ( 龜山里社奉安文 )
恭惟先生, 天賦之豊, 承英烈緖, 襲文節風, 孝感禽鳥, 工深夜鍾, 驚座之筆, 超世之名, 同我三璧, 將翺將翔, 卷而懷之, 先見之明, 鴻蜚泮林, 何慕冥冥, 爰有林泉, 綠竹如簀, 小牖開陽, 碩人之軸, 候誰友矣, 惟忠定公, 爰曁群賢, 唱酬磨礱, 物外遐想, 天放逸民, 遺芬未歇, 起我後人, 於焉象設, 于藻之濱, 中間輕擧, 多士之責, 輿情所鬱, 載謀重復, 隣譽咸造, 新廟有侐, 重惟三棄, 同原一堂, 遺墟片石, 獨戴崇禎, 亦粵霧爺, 尸祝曾幷, 隱德高風, 允矣合享, 荔丹蘋芬, 衿珮@@, 不顯其光, 範我一方. 右竹窓
恭惟先生, 氷玉令姿, 松柏貞操, 生長仁里, 薰陶庭敎, 從遊老成, 宿儒皆服, 居家制行, 惟孝之則, 生死葬祭, 竭誠致力, 推而之國, 忠焉可移, 時値昏朝, 彝倫斁夷, 二舅欲奪, 掛冠南歸, 丙丁喪亂, 乾坤易位, 北望號天, 西山採薇, 遂稱三棄, 絶意外慕, 林壑藏名, 山河灑淚, 維洛之涘, 我林我園, 携我同志, 斐然盈門, 對越在案, 洛閩遺篇, 潛心硏究, 獨到昭原, 有時放懷, 嘯傲林泉, 粥飯琴書, 永矢不諼, 嗣承零替, 此理誰問, 遺墟片石, 恩秩天隕, 後人景慕, 歷世穼勤, 藻溪一曲, 幷享三賢, 同門美匹, 外裔芳聯, 從前公議, 於今始定, 一堂薦苾, 百世山仰, 伏惟尊靈, 以妥以寧, 佑我後人, 報祀無疆. 右三棄堂
경북 奉化郡 物野面 龜山里에 사당을 짓고 竹窓 琴梧(1486~1573)와 三棄堂 琴是養(1598~1663)을 모시면서 올린 봉안문이다. 氷肌玉骨같은 자태에 松柏같은 지조를 가졌다. 지금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니 영혼은 내려오시어 흠양하시고 우리 후손들을 편안히 이끌어주시면 좋겠다고 하였다
문산서원봉안문 ( 文山書院奉安文 )
於惟先生,
情鍾光嶽, 氣稟純剛, 貞松志操, 瑞鳳文章, 風標脫俗, 吉夢協祥, 襟期灑落, 眺視塵繮, 少罹奇禍, 處困愈亨, 散跡林泉, 絶意浮名, 泰運橫庚, 園帛交賁, 惟意是適, 時行時止, 丙丁喪亂, 桑海變易, 奉老南徙, 白下深谷, 迹類商皓, 心實魯連, 豈欲忘世, 爲是扶倫, 鬃冠野服, 混跡漁釣, 傷時念國, 發於吟嘯, 百世風節, 萬古彝常, 後人景慕, 終不可忘, 九峯撤祠, 多士抱鬱, 無秉彝, 永世深切, 迺於文山, 妥靈如故, 輿情稍慰, 瞻依有所, 儒林誠淺, 規橅未遑, 地勢偏空, 齋舍難容, 惟玆杜谷, 杖屨遺芬, 斷麓烟花, 一區王春, 稍移舊祠, 載營新搆, 前臨墟碑, 傍通玉溜, 衿紳殫力, 制度始立, 山若增高, 水若增潔, 地是薖軸, 靈應是寧, 舍舊從新, 報祀無疆.
소나무처럼 곧고 올바른 지조와 뛰어난 문장, 세상을 벗어난 탈속한 모습을 가져 세상의 부귀영화에는 뜻이 없었다. 병자호란의 난리를 피해 절개를 지키며 살았으니 秦나라 때 은거한 商山四皓와 비슷하다. 경상북도 奉化郡 文殊山 杜谷(현재 봉화군 鳳城面 桐陽里)에 은거한 杜谷 洪宇定(1593~1694)을 모시면서 올린 봉안문이다
제문
제진증찬성이묘치제문이즉선희궁부○임자수 찬시 ( 製進贈贊成李墓致祭文李卽宣禧宮父○壬子修撰時 )
噫噫惟靈, 宣禧之親, 粵自先朝, 贈秩推恩, 有事西郊, 路過遺阡, 楸梧入矚, 停蹕愀然, 命甄後孫, 俾承其祿, 伻官酹酌, 庶幾歆格.
찬성으로 추증된 李某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이모의 이름은 당시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暎嬪 李氏의 아버지이다. 즉 정조가 자신의 외증조할아버지를 찬성으로 추증하면서 김한동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한 것이다. 저자가 53세 때인 1792년(정조 16)에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에 지었다
제진충원임장군경업사치제문임자○교리시 ( 製進忠原林將軍慶業祠致祭文壬子○校理時 )
東海義士, 大明摠兵, 氣塞宇宙, 誠炳日星, 時丁板蕩, 手扶倫綱, 地褊心遠, 目明膽張, 抽矢去金, 神鬼在傍, 擊劍登舟, 海天蒼茫, 名動華夷, 國重鼎呂, 烈烈風聲, 永垂來許, 眷言遺祠, 達水之上, 怒濤嗚咽, 英魂颯爽, 風泉激愾, 鼙鼓興想, 葺廟旋里, 豈曰崇奬, 今見雲孫, 緬懷典型, 嘉乃榮歸, 克世簪纓, 玆遣禮官, 酹以泂酌, 翩然廣漠, 庶幾來格.
지금 林慶業(1594~1646)의 후손을 보니 장군의 훌륭한 풍모가 생각난다.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니 장군의 영혼이 내려오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1792년(정조 16)에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에 지었다
기우제문갑인○재승평시 ( 祈雨祭文甲寅○宰昇平時 )
惟社稷神, 爲生民極, 厚載宅五, 美制播百, 民之休戚, 神其保佑, 有祈必應, 有願必遂, 嗟今之旱, 浹月爲虐, 火旺水涸, 土焦金鑠, 田疇滌滌, 秧苗煏煏, 惟春曁夏, 雨暘時若, 方占大有, 遽憂極無, 三農失望, 四野齎吁, 忝玆守土, 不職招災, 責在守耳, 何辜民哉, 式稽祀典, 曰有神庥, 順時成歲, 惟神之休, 蘇枯潤涸, 惟神之權, 須臾轉移, 沛然同雲, 虔用粢盛, 敢祈冥隲, 明幽雖間, 聲氣相徹, 惠我甘霈, 滋我嘉穀, 庸修虔祀, 庶賜歆格. 右社稷
嵩高維岳, 鎭玆南服, 元氣所鍾, 神靈攸宅, 雲雨時行, 山陵自出, 功施斯普, 永綏民物, 今玆一旱, 已浹二旬, 下泉皆涸, 烈炎如焚, 忝稷稻梁, 焦枯藝黃, 我稼卒痒, 我民誰將, 民曰嗚呼, 南山之神, 民依於神, 神依於民, 旱澇祈禳, 感應捷桴, 玆循輿情, 尙冀冥佑, 二氣流通, 一霈霑注, 蘇我枯苖, 惠我田夫, 轉災爲祥, 神永有辭, 庸修虔祀, 庶幾歆止. 右南山
北山之靈, 南土所仰, 氣通江海, 德主生養, 興雲致雨, 澤物利民, 禦災弭患 佑賁然,
嗟今之旱, 一何其酷, 焚如烈炎, 赫乎杲日, 雷工雨師, 久閟其澤, 田苗皆枯, 民命將迫, 十日無禾, 矧玆三旬, 無穀何民, 無民何神, 神如保佑, 轉移須臾, 默運冥欛, 沛下甘澍, 滋潤焦枯, 浹洽田畝, 三農有慶, 百世以報, 非我之私, 惟民之望, 庸修潔誠, 庶幾昭享. 右北山
嘻嘻亢旱, 已經旬朔, 丘塍焦燥, 泉澤乾涸, 節値胚胎, 苖則枯槁, 三秋無望, 萬姓皆嗷, 以祈以祀, 逌社徂嶽, 忱誠莫徹, 冥應愈邈, 眷玆龍浦, 惟神之所, 呼吸溟海, 吐納雲霧, 一陰一陽, 變化無極, 興雨致澤, 功利斯博, 苟未消患, 神亦失職, 水德勝水, 何災不剋, 虔誠潔幣, 冀賜神佑, 驅除旱魃, 沛注靈雨, 須臾用力, 惠賴深廣, 尙歆齊明, 以慰民望. 右龍浦
雨暘時若, 造化攸分, 天地之大, 不能獨運, 山川有神, 必授其職, 克承靈命, 以施利澤, 何神不惠, 有此久旱, 經月不雨, 挽近所罕, 庚炎酷烈, 田苗焦枯, 無望西成, 哀我農夫, 上山下水, 祈以齋沐, 靈應愈邈, 實由誠薄, 有嶷西山, 伊水出焉, 水以制火, 神實司權, 昨夕微雨, 先眎休徵, 及今沛下, 尙或勃興, 惟神之職, 俾民永賴, 潔誠虔告, 庶幾無悔. 右沙川
烈旱經月, 虔禱有日, 山川遍及, 牲幣旣卒, 胡聽之邈, 曾莫之恤, 我稼卒痒, 我民其㤕, 后土先嗇, 大德曰生, 生民維何, 百穀用成, 一日不雨, 四野無靑, 士女奔遑, 仰訴蒼冥, 至理流通, 無間幽明, 恭惟有神, 尙監輿情, 亟回天心, 以惠霈澤, 消災致祥, 蘇枯潤涸, 三農慰望, 百世思報, 非敢瀆告, 庶垂冥佑. 右后土
순천의 社稷‧南山‧北山‧龍浦‧沙川‧后土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올린 제문이다. 기도를 드리면 응함이 있고, 소원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준다. 지금 한 달 내내 가뭄이 들어 쇳덩이도 녹일 정도이며 땅이 바싹 말랐다. 그렇지만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린다면 큰 풍년이 드니 신들은 비를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55세 때인 1794년(정조 18)에 順天府使로 있을 때 지었다
제번암채상국문 ( 祭樊巖蔡相國文 )
嗚呼箕疇五福, 曰壽曰康寧曰攸好德, 而先生有之矣. 立朝五十年, 出入將相, 位極人臣, 聲名動于一世, 勳業垂于無窮, 先生之道, 可以行於世乎. 先生之道行, 則天下之義理, 可以明於世乎. 嗚呼小子, 蓋嘗登先生之門, 猶能髣髴其平生先生之所以爲先生者
在此, 先生之所以眷眷我小子者在此, 小子之所以慕悅先生而不能無憾於斯世者, 亦惟在此, 先生之靈其知之矣.
樊巖 蔡濟恭(1720~1799)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관직생활 50년을 하면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선생의 명성은 세상을 떨치고, 남기신 가르침은 세상에 널리 사용되었다. 나도 항상 선생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노력하였음을 선생의 영혼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제박원거한익문 ( 祭朴元擧漢翼文 )
嗚呼, 有生必死, 大耋猶嗟, 嗟君之死, 可哀何多, 君之稟賦, 得天者豊, 磊磊氣岸, 聳壑疏松, 昂昂風味, 避群孤鶴, 自在幼少, 屹如老宿, 餘事文章, 多積而發, 使之有爲, 何處不達, 入而在家, 鄕里可式, 出而處世, 做措必卓, 若可以爲, 胡止於斯, 到處抹摋, 韓鬼相隨, 斂其魁岸, 局以泥塗, 眉間霞氣, 逈出塵臼, 仙溪一曲 獨坐孤嘯, 收拾桑楡, 聊樂漁釣, 時我南出, 江海名區, 君曰可遊, 驅馬悠悠, 頭流之下, 矗石之傍, 觸境吟哦, 攬轡倘佯, 長路畏日, 忽祟奇疾, 呻吟旅舍, 短幅長說, 謂以輿來, 載以歸矣, 我心先動, 且驚且喜, 官守有境, 無路躬護, 替送奴隸, 轉託朴友, 顒俟來期, 危報相續, 可驗精神, 猶在簡牘, 晩後一札, 筆仄辭苦, 吏校纔發, 蘭書遽到, 天乎胡忍, 神亦無知, 呼臯村店, 魂氣何之, 四無親知, 家在千里, 弱子孤妻, 曷月空俟, 非我不來, 君死由我, 我心之慟, 尤復如何, 嗟君與我, 自幼同群, 命道相類, 志氣無分, 年來衰暮, 離多會少, 山河間闊, 片心相照, 今君之來, 爲是敍阻, 君今已矣, 我懷誰討, 病而未護, 死而未別, 斂而未親, 靷而未訣, 想君之目, 也應未瞑, 靈車載路, 山日欲冥, 一慟遙奠, 淚落懸泉, 魂兮歸去, 穉子候門, 嗚呼痛哉.
朴漢翼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인간에게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그대와 나는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다. 노년에는 헤어진 날이 많았고 만나는 날이 드물었다. 지금 그대가 세상을 떠났으니 누구와 회포를 푼단 말인가? 아아! 슬프다는 내용이다
제내구정공문 ( 祭內舅鄭公文 )
嗚呼, 我舅氏三祥已終, 而小子尙未能一進慟哭而歸, 小子其可曰生在世間乎. 明日之後, 几筵將撤, 而謦欬愈邈, 淳古淡泊之儀形, 慈諒寬裕之性度, 將何處追想寓慕, 而惓惓親愛之意, 懃懃敎誨之德, 將何時報答也. 小子今日之慟, 將何時可洩也. 韓昌黎有 言曰悲不幾時而不悲者無窮期, 小子將不久於世, 悲不幾時, 誠若斯言而未知三淸世界, 亦有親族子姪相與團會陪侍, 而復如此世之樂耶. 是未可知則小子之慟, 又何可已也. 嗚呼慟哉, 神精昏眊, 文不成語伏枕呼寫, 有淚懸泉, 伏惟尊靈, 尙或垂憐而歆格否.
나의 외삼촌 鄭公이 세상을 떠나 삼년상도 끝났는데 나는 아직 찾아가서 곡하지 못하였다. 순박한 모습과 너그럽고 관대한 성품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애통함을 어디서 풀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제외고숙인남양홍씨문 ( 祭外姑淑人南陽洪氏文 )
大賢之門, 閨範有閒, 爲後蓋難, 懿我外姑, 克嗣徽則, 坡老家法, 我從門楣, 竊覸家政, 惟孝且敬, 蘋藻旣潔, 吉主中饋, 有齊之季, 妯娌旣翕, 宗族以睦, 宜其家室, 至於婢僕, 御之有則, 無不懽悅, 組紝之暇, 略涉書史, 自列傳始, 中年晝哭, 賢子是從, 孟母義方, 屢奉專城, 人皆榮之, 有不屑而, 勉以淸謹, 戒以輕肥, 古聞玄暐, 惟德之基, 綏以遐福, 眉壽攸酢, 方祝岡陵, 遽促海籌, 何神不勞, 顧予小子, 偏蒙眷厚, 欲語先淚, 粵在壬午, 我哭我婦, 我家無主, 有女盈尺, 有子在襁, 無母誰將, 念其所出, 取以養之, 恩斯勤斯, 庶見成立, 責報于天, 以慰孤魂, 苗而不秀, 嫁而旋夭, 是何天道, 孤露餘喘, 又此畸窮, 無以爲生, 不我遐遺, 益加眷愛, 賴有依庇, 年來遠遊, 省候間闊, 我心如渴, 前秋來拜, 韶顔非昔, 我心憂惕, 豈意微痾, 遽棄天年, 神化如仙, 藥未手調, 殮未躬親, 此恨終身, 爲哭家忌, 及殯而至, 路人何異, 荏苒時月, 儀形漸邈, 拊感疇昔, 窀穸有期, 輀車載駕, 永隔脩夜, 爇我瓣香, 奠我泂酌, 有淚如決, 音容雖隔, 眷愛猶深, 庶幾鑑臨.
장모인 남양홍씨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장모덕분으로 집안이 화목하였으며, 노복들도 법도가 있게 통제하여 모두들 기뻐하였다. 지난 가을에 인사를 하고 왔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니 영령은 내려오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제자형유양권공사호문 ( 祭姊兄酉陽權公思浩文 )
惟公,
豈弟之姿, 慈良之性, 如玉斯溫, 詩禮家庭, 充養有素, 雪翁之孫, 惟孝與友, 旣睦且婣, 是爲家政, 施及鄕黨, 朋友偲切, 善與而敬, 不皺于眉, 誰切其齒, 乃古家風, 急人之急, 樂人之樂, 悉由情衷, 餘力而學, 博涉經史, 匠石之園, 斐然成章, 寧朴毋華, 吉人之言, 早事科臼, 終屈宏詞, 卷而懷之, 晩登薦剡, 蔭路栖遲, 有不屑而, 一命存心, 兩邑烹鮮, 咸惜少試, 解紱歸來, 水丘依舊, 松桂交翠, 巖亭石榭, 詩酒優遊, 復修初服, 收拾桑楡, 料理舊業, 永以爲樂, 積慶之門, 奇禍荐酷, 造物何猜, 再哭西河, 摠是封羯, 心腸盡摧, 又失菊翁, 塤箎無樂, 痛兼新舊, 由內鑠外, 冤結成廱, 扁倉莫售, 涉夏經秋, 遽促遐籌, 何神不勞, 雪齋琅玕, 風流寂寞, 行路嗟吁, 而我私痛, 未暇哭公, 欲語先淚, 小子不孝, 早歲孤露, 無所依庇, 賴有姊氏, 相與爲命, 慈母之愛, 及婦于公, 須臾不忘, 憂我昧昧, 以公之義, 憐我之獨, 愛我如姊, 及此同衰, 情愛愈篤, 眷眷不已, 一慟而訣, 多負于公, 自哭而止.
자형인 權思浩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자형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남의 급한 사정을 항상 도와주고 남의 즐거운 일은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오직 자형을 의지하며 성장하여 정이 더욱 두터웠다. 세상을 떠났으니 그리움이 그치지를 않는다는 내용이다
제중부서파부군문 ( 祭仲父西坡府君文 )
嗚呼痛哉, 惟我先父兄, 有十從兄弟, 學行文章, 萃于同堂, 蔚然爲門 戶之棟樑, 人稱八吾軒下多佳子弟, 不意天椓我家, 皆不克, 其壽十數年間, 零落殆盡, 我宗黨忽焉無所依仰, 譬彼大廈之剝落無支, 而幸我仲父在焉, 乃以先父兄之所嘗訓迪, 我後生者敎導我子姪, 凡門戶大小之責, 莫不振刷而倡導之, 我宗黨得有所依庇, 而矜式, 庶幾乎不墜家緖, 而天不憖遺, 復使我仲父遽棄後生, 哀我門戶其剝落盡矣. 嗚呼痛哉維公有剛毅之性, 寬和之姿, 孝友根於心, 敦睦素乎性, 持己治身之方, 又皆一遵繩墨, 燕閒之時而無放慢之氣, 倉卒之際, 無疾遽之色, 平居無事之時, 則必晨興盥洗淨掃堂宇, 終日端坐, 不釋聖賢之書, 爲文章, 必以理勝而不事雕琢, 訓子弟, 則務從寬柔而不以嚴厲, 與人交則淡然而不爲世人剌剌態, 是以居家則家庭落然, 在鄕則鄕黨悅服, 蓋公之得於天者, 有素而修於己者, 有方也, 倘使出而需於世, 則上之可以黼黻王猷, 次之可以扶植世道, 而卒乃 晩就廕路, 沈淹下邑, 而不得展布其萬一, 則天之施於公者, 又何其嗇也. 然, 公之厄於時, 實吾宗黨之幸也. 自公賦歸之後, 日與諸子姪商量門戶事, 至於行己處身之法, 敦親睦族之誼, 無不敎導而勉進之, 且 如今古聖賢之書, 百家微奧之旨, 無不辯析而訓誨之. 惟我子姪輩, 雖不能奉承其萬一, 而尙幸年紀不 甚衰耗, 精力亦甚康健, 得侍之日久而依仰之地遠 矣. 豈意口舌牽引之證, 沈淹一歲, 而使我公遽至於斯耶. 嗚呼痛哉, 天乎鬼乎, 只緣小子輩, 禍殃積躬, 誠意淺薄, 不能回高天感惡鬼而致有今日也. 嗚呼公於疾革之日, 已奄然無及, 而少無悲慼, 意惟門戶是念召諸子姪命之, 曰吾平日所自期者, 將與汝輩振刷門戶事, 今焉已矣. 汝輩各自勉旃盡力於奉先之節, 和同於族親之間, 無負予望, 言訖屛諸婦女, 命小子整衾, 遂斂袵拱手而終. 嗚呼, 於此可見公平日積學之力, 而其爲門戶勸敎之意豈, 小子輩之所可跬步而或忘哉. 公之沒, 纔一周歲而, 我家事如不繫之舟無所依泊, 則小子今日之痛爲, 何如哉. 此則門戶之痛而已, 抑小子別有無窮之痛焉. 公之靈想, 亦愴 然於冥冥之中矣. 小子不孝無狀, 罪逆深積, 七歲喪先, 妣九歲先君子, 棄背于京邸, 獨公扶櫬南鄕而我小子無恃無怙, 煢煢孑立, 無他兄弟, 可以依賴, 惟仲 父是依, 晝夜不離於側, 飢寒而撫之, 疾病而呻之, 性本愚頑而誘以導之, 不加鞭箠, 才甚魯莽而寬以敎之不加譴責辛勤顧撫, 至於成立, 則生我者父母, 而長我者仲父也. 敎我者仲父也, 仲父一日不見小子, 則輒悄然如失小子, 一日不拜仲父, 必廓然無所依歸, 今小子之不侍仲父, 已一期矣, 仲父尙忍棄小子, 小子將何以爲生耶. 嗚呼痛哉, 小子雖頑, 不死好過 時日, 有時忘却, 出門惘惘然, 若將升公堂, 入公室得侍, 公如平日也, 至於舊室之下, 但見素帷之披, 披則公果不可見矣. 遂呼天捫臆, 忽忽無生意, 恐將心思摧折, 便成喪心之人, 而以公愛我之篤, 曾無一言警敎之, 則嗚呼公其已忘我小子耶. 嗚呼, 惟彼書堂之役, 卽我先君子遺意, 而公之所嘗經始者也. 季秋之初, 移建于後山下, 廟宇之傍, 期於明春完役, 庶幾不 負我公之意, 而斯堂雖作敎導之責, 無所歸焉, 則小子今日之痛, 曷有窮已耶. 嗚呼, 日月有限, 初期奄臨 典型愈邈, 謦欬永閟, 此生何日復得侍我仲父耶. 況 明日之後小子, 又將釋絰變服而奄然作無故之人, 則小子窮天之痛, 又將何時可已耶.
중부는 西坡公 金景澈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뛰어난 재주와 학식을 가지고서도 나라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만년에 蔭官으로 시골 마을을 잠시 다스렸으나 자신이 가진 재주 만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임종시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우리 집안을 일으키기를 바랬는데 지금 나는 끝났다.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조상들을 잘 받들고 친족간에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어느 날에 다시 중부를 모실 수 있을 것인가?
제종형소암공진동문 ( 祭從兄素巖公鎭東文 )
嗚呼, 公何忍遽, 有此行耶, 公在而門戶有托, 宗黨有依, 公歿而門戶無托, 宗黨無依, 公何忍遽, 有此行耶. 嗚呼, 弟之於公, 少十三歲, 自弱冠以後, 未嘗一日不 在公側凡日用彝倫之間尋常酬接之際尙有竊覸而詳記者矣. 公稟慈諒, 豈弟之性有溫柔謹厚之資, 無疾言遽色, 絶浮靡俗態, 得於天者, 固已厚矣, 而濟之以矯揉之工, 不出規矩之外, 蓋自幼少時, 先府君 曁仲父府君以遠大期之付, 以門戶之責, 鄕里爲之矜式焉. 知舊爲之推奬焉, 雖素無雅契者, 皆知其爲有道氣像, 苟非積於中而著於外者, 有以孚於人, 豈能致此哉, 以之處宗族, 則盡其歡訓子姪, 則盡其誠, 至於待人接物, 亦莫不盡其情, 未知古君子踐履果何如, 而歷觀今世誠罕覯矣. 至於孝親奉先之道, 尤有大過人者, 侍側, 則盡其歡, 奉養, 則盡其方, 其有病患, 則憂形於色, 不解衣帶, 惟我伯母氏嘗語小子, 曰吾早歲孀居少無在世, 況味而幸, 有吾兒賴以爲命, 吾兒眞孝子也. 遺訓尙在耳, 至及居喪之時, 羸毁之容, 哭泣之哀, 斂殯奉奠之節, 誠有高人數等者, 我伯母氏遺訓, 尤可驗矣. 每日晨省家廟, 其遇節祭忌辰, 齋居淨掃, 蘋藻淸潔, 薦灌以禮, 至于年彌老而未或少弛. 凡係先代事, 隨處盡誠, 而嘗以屢世遺稿之未及, 裒稡刊行爲恨, 積歲經營, 費盡心力, 收聚遺文, 逸稿合之, 爲若干卷, 於是乎八九世, 世稿成矣, 但恨無力不能刊布, 弟於年前, 出宰于成刻, 得活字若干而歸, 公喜曰若得紙本工費世稿, 可以完矣. 荏苒數年之間, 未得成公之志, 而遽有今日未知何時了, 得此事以慰公於冥冥之中耶. 至於文藝, 卽公餘事而讀書必以經訓爲主, 爲文不以俗尙爲奇, 蓋得於家庭之間者然也. 早歲黽勉擧業而亦不屑爲也, 及累擧而不中, 則遂淡然忘之, 益自專意於古人之學, 日夕孜孜, 不知老之將至, 每以家居, 棼宂爲念, 晩卜一區於西山之素洞, 結茆屋數架, 名以素巖, 列植花卉, 籤牙整飭, 圖書靜暇蕭然有山林之趣, 公於是樂之, 日嘯詠其中, 村秀童冠及遠近從遊者甚衆, 而皆隨材而敎導之, 先之以小學灑掃之道, 次之以庸學語孟及朱子等書, 以故門無雜客. 左右多小學童子, 公之樂, 蓋在於此耳. 及夫晩年學益進德益高, 而有而若 無蘊而不衒, 言若不出口, 身若不勝衣, 惟恐聲聞之出於素洞之外也. 不意年前名登薦剡, 特蒙恩除, 至有道臣, 起送之命, 而公旣無意於世, 紀又老矣. 未卽一肅, 今年因邦慶增秩僉樞, 弟時自京而歸, 奉一觴而賀之, 曰公不求知於世, 而世自知公聲, 徹九臯秩登三品, 自天恩渥有若吾家之獨有公其壽而康耆而耄更增一秩, 卽是數年內事, 豈不榮且喜哉. 公亦于于而笑與座席賓友盡歡而罷, 豈意數年之間, 慶弔相仍, 遽至於此哉. 弟於仲春, 有春坊之命, 拜辭於公, 期以秋抄由歸春夏之間, 連有書牘, 每喜康寧閏月之晦, 忽得小札謂有惡寒之症, 辭意非復前日, 心頗驚憂, 夢寐之間, 怳惚若有異於前心益怪之, 五月八日朝, 就直之路, 訃使趨到, 嗚呼, 書辭夢兆, 先動於千里之外, 而湯藥殯殮茫然不知公, 則先使我知之, 而弟則只動於心而已, 悠悠此恨, 其將何時可已耶. 抑弟之別有深痛而難抑者, 小子不孝, 年纔七九歲, 遭終天之痛, 煢煢若失巢之雛, 無以爲生, 而惟我仲父是怙是恃, 亦維我公若昆若仲, 粵在壬申, 仲父旅宦于京, 益無依庇, 而維公是賴, 敎導若嚴師, 撫恤如慈母, 雖同氣友于無以加之, 而僅僅成 立至于老白首矣. 公之愛弟, 到老愈切, 離則思, 會則喜, 除非疾病出入之時, 無日不相守, 有疑則質問, 有事則論量, 一遵指敎, 而商確焉. 世間何樂, 可以加此, 況公之頤養有素神旺氣康, 庶幾百年, 永同此樂而弟於十數年來宦遊, 多時便作東西南北之人, 離違多而合幷少, 則前日所期有難, 如意常自悄然, 不樂公亦勉以早歸, 每念年已老矣. 氣已耗矣. 姑待明春將以賦歸, 陪遊於素菴之中, 從老於花樹之間, 不負前日之所期也, 今焉已矣. 將何以復得此樂耶. 承實之後, 卽欲由還一慟於素帷之下, 而又遭天崩之慟, 晩後始歸長號, 而不聞, 但見左右圖史之依, 然, 自在踽踽此世, 更將疇依, 腸摧淚枯, 寧欲溘然而無知也. 嗚呼, 禮月已過, 襄事未完, 今始占穴於文山之東麓, 山水明麗, 林壑幽䆳, 此公之所樂也. 公其知之否靈輀載駕, 音容漸邈, 一聲長慟, 千古永隔.
평소 친하게 지낸 사촌 형 素巖 金鎭東(1727~1807)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형이 있음으로 우리 집안과 우리 친족이 의지할 곳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독서를 하면 항상 經書를 위주로 하였으며 속된 문장을 짓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지자 마침내 담담한 마음으로 지내면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후진을 열심히 양성하였는데 각자가 가진 재질에 따라 가르쳤다. 『소학』‧『중용』‧『대학』‧『논어』‧『맹자』등의 순서로 가르쳤다. 만년에는 형의 학문이 더욱 높아졌다. 형이 나를 아끼고 사랑함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하였다. 지금 형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도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 장례식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이제 겨우 文山의 동쪽 기슭에 묏자리를 잡았다. 형의 음성은 더욱 멀어지고 앞으로는 영원한 이별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제재종질학사희락문 ( 祭再從姪學士熙洛文 )
天之生君, 夫豈無意, 慈諒其性, 淸粹其氣, 如玉之溫, 維石之介, 旣得其全, 而發也大, 自在幼少, 不資敎誘, 篤於人倫, 維孝與友, 鄕里咸稱, 謝家寶樹, 至於才藝, 又是天賦, 敏妙精詳, 自年八九, 及至丱冠, 老成縮手, 開口成章, 落筆驚人, 颯然風生, 辭意逼眞, 試之科臼, 箭箭中紅, 壬子之春, 小成其工, 天眷南嶺, 試士陶院, 拔其二尤, 君與其選, 選入奎閣, 職筆而密, 講義對製, 華袞曜日, 裒然爲首, 僚儕退服, 史官柏府, 隨處稱職, 官秩雖卑, 愈加寵奬, 方擬玉署, 先眷牲養, 乃界專城, 俾盡其誠, 恩造攸曁, 鄕邑爲榮, 然惟海曲, 瘴氣易祟, 調將失宜, 宿症交肆, 歸來數年, 漸入痼肓, 奈何乎天, 無賴扁倉, 想君平生, 何做不適, 大可笙鏞, 小可金石, 君之所偏, 蓋是太皎, 疾惡如湯, 秉直惟矯, 凡今之人, 鮮保其天, 惡方喜圓, 令色巧言, 君獨恥之, 骯然不移, 壬戌之冬, 余有恩譴, 鋒鏑四圍, 猰㺄狺狺, 族親儕友, 送者失色, 君獨笑別, 謂我母怍, 勉以行患, 喩以愈確, 頹波一世, 爾心如石, 病固無望, 所恃者此, 吾亦笑答, 庶無危矣, 會待歸時, 相仗餘日, 吾雖未還, 門戶有托, 曾未周歲, 遽見蘭書, 呼天一痛, 海雲慘如, 四年嶺海, 萬死今歸, 老少男女, 執手牽衣, 獨未見君, 素帷披披, 去時笑語, 如或聞之, 呼之不應, 我心非石, 冥冥有知, 亦必悲惻, 嗟君身後, 又何多哀, 有子先夭, 比兒承衰, 葬期將迫, 又遭大故, 幽明旣隔, 誰慰孺慕, 嗚呼許多, 抱負許多, 材具閉之, 九原荒草, 宿霧悲不, 幾時古人, 有言吾以自慰靈或知焉.
저자의 再從姪인 金熙洛(1761~1803)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했을 때는 어찌 의미가 없겠는가? 그대는 자애로운 성품에 청수한 기질의 사람이다. 1792년(정조 1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규장각에 뽑혀 들어가는 영광도 가졌다. 1802년(순조 2)에 내가 유배갈 때 다른 사람은 모두 걱정하였으나 그대만 유독 웃음을 머금고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유배지 생활을 4년하고 돌아오니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대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영령은 알고 있는가?
제장자희익문반구시 ( 祭長子熙益文返柩時 )
老父聞汝之至强, 起出郊則但見塊, 然一木汝果歸耶, 千里雖遠, 一氣相通, 魂氣則無不知也. 汝果歸耶, 近日吾病益篤, 不能迎哭, 且以救護吾病, 仲兒不可出避, 不得一日安, 汝柩於室堂, 以汝平日孝思似或無憾恨, 而吾腸之寸, 釘無計可拔, 然體還家山魂歸室堂吾旣在此, 汝將焉往, 以是吾知汝必歸矣. 酹以一杯, 以慰歸魂, 汝其知耶, 不知耶.
장남 熙益(1773~1809)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가 70세 때인 1809년(순조 9)에 장남이 객지에서 전염병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운구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자신도 병이 위독하여 운구를 맞이해서 곡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술 한 잔을 올려 돌아온 혼백을 위로한다고 하였다
제계자부공인연안이씨문 ( 祭季子婦恭人延安李氏文 )
嗚呼, 汝之爲吾家婦, 僅五朔矣, 不識舅一面, 何以識舅家門乎, 老舅在洛, 聞凶歸哭于商山之殯扶, 櫬而來, 葬于親山後麓, 嗚呼, 魂氣無不之也, 其有所憑依耶. 嗚呼, 汝之平日心行, 吾不及見面, 尙何所徵信, 而聞汝家人, 自幼孝友, 出於天家, 人不聞喜怒聲及䈂舅家無姑, 只有余老舅, 老舅旣病矣, 又有西行, 不卽往見, 新婦羞澁, 雖不得顯, 有阻鬱之意, 而遇急遽先備書者, 凡十許, 及其病革之日, 適有吾書自洛而來, 使傍人替誦而置諸腹上, 伺傍無人, 顧語老婢曰吾有何獲罪於神明, 而尙不及見舅面云, 蓋其至孝之根天, 於此可知, 而吾不及見使汝含冤而歸, 一壺酒之藏置, 已數月始開于哭殯之日, 余忍而酌一盃, 汝 其知耶, 汝其有知想有以歆格也.
시집온 지 5년 만에 사망한 둘째 며느리 恭人 延安李氏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내가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느라 너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내가 너를 보지도 못한 채 네가 세상을 떠났다. 너로 하여금 안타까운 한을 품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 한 잔을 올리면서 곡을 하니 신령이 내려와 흠향하리라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부록
만사. 정종로 ( 輓詞. 鄭宗魯 )
名祖賢孫, 聖考掄歷敡中外, 摠殊恩闡揚大義, 前多士, 剴切明時, 奏萬言, 四載佩蘭, 穼見節一朝埋玉, 不堪冤, 典型尙有, 兒孫在佇看, 他時食報殷, 英名半世, 飽聞來俊逸, 天姿鍊達, 才推轂久, 爲簪佩仰膺, 藩亶自吏民懷風, 情不獨臨財, 見意氣, 何曾歷險摧剛, 恨平生相識, 願白頭今日, 但題哀.
鄭宗魯가 저자를 위해 지은 만사이다. 명현의 후손이라 임금께서 뽑으셨네,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침도 모두 특별한 은혜이다. 평생토록 알기를 원하였는데, 오늘은 흰머리 늙은이인 내가 슬퍼서 애달프다는 글을 짓는다. 정종로 이하 金㙆‧李鎭東‧成彦根‧尹東壽‧黃龍漢‧鄭易簡‧李野淳‧李周楨‧姜世白‧柳尋春‧柳台佐‧李仁行‧金相溫‧鄭來成‧李家淳‧李頤淳‧盧尙樞‧姜橒‧李暎‧權思浹‧柳致黙‧柳徽文‧李祥發 등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은 만사도 있다. 그리고 1813년(순조 13, 연보에는 1812년으로 되어 있음) 2월 26일에 예조정랑 蔡弘韻을 보내어 故監司 金翰東의 영전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우. 김홍 ( 又. 金㙆 )
窮陰問大地急景忙擲梭忽忽意不樂, 杜門呻沈痾驚起剝啄聲報道公大歸無言復欹枕掩淚空永唏, 公是嶺之秀, 先王知之深, 拔擢歷華顯, 一除皆簡心, 若將爲之兆, 弓劍遽遺, 忽痛哭, 犇廞路褥, 蟻誠所竭, 萋菲成貝錦憯矣, 人罔極蒼茫, 賦鵩行邈矣, 塞東北吾道, 固如此, 天理豈終詘, 陽春返枯槁霈恩渙綸綍歸來臥故廬聖澤深於淵山岨復水, 曲歌詠樂, 餘年如何, 天不弔西河, 痛復纏, 固知恢達觀, 豈無中暗, 傷寢門一慟哭, 萬事都亡羊, 空詠疹瘁, 篇哀哀黃鳥章, , 世變固窮, 凶禍慘冤, 墳王章久已解, 讞獄何太齗, 置之不復道秪恐惱英靈, 而余生同鄕同祖, 又同庚, 余蒙愚且魯, 少無鄕閭名公姿出等, 夷華聞自妙, 齡智愚固殊絶, 情好, 無緇磷, 憶在歲壬子, 公在喉司辰, 排雲叫閶闔, 全嶺萬儒紳, 其間先後, 力孰非公勤辛州載輪困膽, 於是始吐咽, 惟此大義理, 公則是主人, 是時從祀章, 又自吾嶺發, 公曰此非時衆, 且謂沮遏, 惟余愚且昧, 一書有云云, 實出調停計那, 知益紛紜, 丹山一夜話, 洞豁兩心, 知大度元無競昧者, 謾自疑聖上簡, 胄僚不才濫, 附驥抱書登玉殿, 鳴佩出金門, 聯翩上下番綢繆, 意彌敦, 一自天崩後哭, 散各參商, 有時懷往蹟, 怳如夢一場龜之距, 高棲間以百里, 强各此蟄衰病未易, 一相訪, 迢迢暮雲外幾番勞夢魂, , 昨年兒過候, 爲傳悲涼, 言朋輩盡凋落, 惟吾二人存, 言訖因含淚, 臨退更慇懃, 此意那可忘, 不覺心不佳公, 今又棄歸而我竟何懷, 人物日以下, 何時更肧胎, 英姿與偉氣, 自是間世材文章, 袞可補, 志節瀾可廻, 吾黨失領袖, 大運窮南嶺, 嗚呼, 可奈, 何念之徒塞硬强疾, 題數語, 焉能盡心曲, 早晩相從, 在不須淚涑涑.
우. 이진동 ( 又. 李鎭東 )
南國多君子, 先稱我翰之, 錦腸無表, 襮玉質不磷, 淄標格千尋, 柏文章五色, 芝詞壇竪, 赤幟离席, 許明師紫殿, 通仙籍丹山覩鳳, 儀氷聲振汚俗, 玉色立瑤墀, 忠義根天賦, 誠忱植人彝, 卓乎義理主一, 嶺萬人摧斗血輪, 囷地千秋, 永有辭惟冀大義闡, 豈意好官縻, 第値風雲會偏, 承雨露滋三司, 名節譽, 兩邑去思碑, 稽首辭, 南臬知足, 退遐陲痛哭, 滄桑後, 蒼茫萬事, 悲孤臣千里, 遠君子卜明夷, 白玉雖無瑕靑, 蠅奈覓疵子, 瞻飯惠久正叔旋涪遲泣玦關, 時運賜環荷聖, 知丹忱終, 有感, 白髮勝前時經濟付花譜, 生涯任酒卮, 匣中藏寶劍, 櫪上伏良驥瀝血憂時語銜恩戀, 主悲神精, 雖不損疾病, 已難醫, 傳老乘箕尾, 黃公按鳳旗善人天奪速, 耆老不 憖, 遺遺愛悲, 舂婦師恩, 泣課兒, 嗟余尤不忍節節哭, 吾私如瞽失, 前相無龜莫稽疑, 他人已莫說, 吾命一何, 奇世念都灰日來棲北谷涯, 是非不到耳, 悲喜豈關思適, 與佳城近登眺, 不覺疲無由相遠, 紼有意寄長詞, 靑襟爭護轝白馬謾悲嘶, 此日無窮痛, 哲人嗟已萎.
우. 성언근 ( 又. 成彦根 )
鴻毛鵬翮遇風時, 碧海靑天萬里期, 玉署銀臺, 平地步, 虎符獜綰左遷, 知中途忽抱攀龍, 痛斜日那堪, 賦鵩悲歸拜, 仙陵如有問花山筵敎, 答何辭休, 道危章嫁禍深, 花山名節, 匪斯今百年, 始闡臨 門, 敎二老于光報國心, 舍去偏憐, 霜髮勝移來, 應惜水調吟靑冥垂翅何須慼, 從此聲華動士林, 歸來閒界草堂, 開訥老遺墟, 月滿臺內, 翰功名, 春一夢謫仙身, 世酒三盃可憐, 猿淚添奇祟那意, 菟裘反禍胎舊契人間餘白髮, 追惟萬事不勝哀,塊坐窮林, 涕下鬚, 招招暮道, 更誰須, 同聲應處, 情逾密大義, 扶時膽共麤英氣襲人欽, 不厭仁心及物愛, 咸趨歸逢孟曄應相樂, 倘說人間叔晦無.
우. 윤동수 ( 又. 尹東壽 )
璜池擢出瑞時, 琮寶彩煌煌, 九陛彤地, 步凌騰湖臬望天姿英俊, 嶺儒宗雲, 鄕莫白三年玦雪壑, 孤靑千尺松, 憂國病添失賢子, 靑山何處是非逢, 斂却頎然七尺身, 故人來哭漫傷神雲鄕此去幾千里歸, 拜先王舊近臣.
우. 황룡한 ( 又. 黃龍漢 )
瓊海鑾坡,足是非, 黃田秋色,白鷗飛, 君恩短髮霜華重, 世事春婆夢裏歸,
聞道文章,酒與在, 憶曾標格玉依稀, 山人老盡云亡淚, 遼鶴悲來露薤晞.
우. 정역간 ( 又. 鄭易簡 )
鶴庭詩禮大, 兒成文望淸 朝洛社英 循吏, 果然鄒魯士, 棠陰左次尙書星, 仙緣玉玦, 金剛路血淚華城杜宇聲, 吾黨百年, 今日痛黃田同說, 二先生氷壺戲局器, 崢嶸一粒, 金丹歲暮, 情東郭鯫, 生餘白髮, 鶴南飛曲, 又薤旌. 去年哭南巷, 今日哭西門, 惟對少連, 語餘慶殿中君.
우. 이야순 ( 又. 李野淳 )
吾黨曾衰矣, 人豪猶見之, 放還新寵渥, 隱臥舊監司,
大嶺幾斤重, 當年一擔持, 健陵歸拜日, 應有血襟披.
우. 이주정 ( 又. 李周楨 )
湖海風流, 宰相姿憶, 曾端冕拜, 瑤墀東方, 日月逢 嘉會南國衣冠, 屬盛時自有垂裳, 恭己舜那, 無擊石假鳴夔, 光明政 類崑山玉, 吾黨人人共護持, 蒼梧落日望雲輧, 萬事孤臣血涕零, 魏闕政, 須君子進楚江, 還有大夫醒筆端, 義理凌霜雪, 胸裏春秋, 炳日星, 帶去煌煌觀察, 字聖恩千古此旌. 銘
우. 강세백 ( 又. 姜世白 )
順風毛遇, 勢沛流魚, 涵澤觸物, 感玆理緬, 憶黃田客, 嘉會自弱齡衷, 言奉誰昔云, 從釋褐年, 際會何輝赫, 密勿帷幄, 謨彌綸, 啓沃策嘉乃天笑, 新往往虛前席, 往在黑鼠, 春獍孼肆兇臆, 主辱臣則死滿腔血沸, 赤彝衷激, 全嶺萬人, 齊躡屩宣室尺五, 天月星如晝白, 掩抑君臣, 際嚴明闡, 揮責亹亹, 奉恩綸揭之光, 史籍敡歷, 盡特簡進退, 安素適瀛, 亞與諫長湖臬曁仙伯倘來, 非僥得龍光, 遍舄奕居然哭鼎湖萬事桑瀾碧, 遂令莫須案翻, 爲惠州謫聖, 主知臣罪環歸, 故山僻言畢哭失聲, 余亦涕點滴, 君旣富文詞, 行亦忠孝, 積慷慨, 急人義, 爽闊凌雲, 翮啖薺, 晩飽肉, 俗陋易齷齪, 君乃蕩無累, 視財如土, 石晩卜一菟裘, 擬作千年宅, 峒戶須簡靜水石, 頗幽閴思君, 便相尋握手慰離, 索燭跋耿照懷鷄鳴吐, 開膈嬴博, 淚未乾, 君又厭世窄一別, 仍千古廓然, 餘華鶴, 況君身後事語難, 更我僕世 變無不有九原, 正難作昨春兒子歸, 報君夢歷歷, 客夏愚山宅懷君夢的的, 死生幽明, 感一理炯不 隔頹齡迫七旬, 脩道杳二百謾, 抱山陽笛尙遲, 巨卿哭長歌, 代誄文, 此恨彌千億.
우. 류심춘 ( 又. 柳尋春 )
南國名家, 蔚有聲公, 承恩遇邁, 群英絲綸, 擎出臨神, 祗義理明, 來指日星,
蚤負當年, 調鼎望空, 懷白首獻, 芹誠祗今 吾黨歸何 處殄瘁詩 吟倍愴情.
우. 류이좌 ( 又. 柳台佐 )
大嶺天回運名門聖得賢無言光二曜有淚澈, 重泉痛哭, 雲鄕遠飄, 零關塞邊, 萬人推領袖緋玉, 老黃田依仰, 公私切偏蒙眷誨榮, 銀臺仙直夜, 叢石海槎行未慰西河慼, 旋驚北隧, 旌龍亡空, 大澤鰌鱔肆(缺).
우. 이인행 ( 又. 李仁行 )
名門簪紱, 世蟬聯英, 邁風裁, 又踵前壬子, 忠謨天尺, 五甲寅危語, 海三千入參講, 肆心曾啓歸拜, 仙陵義不愆, 生老昇平, 寧復憾, 從來吾道, 固難圓.
우. 김상온 ( 又. 金相溫 )
孤騫風彩動朝端, 世道長消進退間 全嶺一疏撑宇宙, 北關三載泣喬仙,
時人孰紀甘盤遯, 後史應收化碧班, 歲暮衝波愁出脚, 意中先輩悵難攀.
우. 정래성 ( 又. 鄭來成 )
聳壑長松百尺崇, 山南夫子有斯容, 從知材大方支廈, 則哲先王早許公.
蹌步仙班衆莫先, 昌辰際遇舊承宣, 如何攬轡澄淸志, 只使西南二府專.
公歸吾黨更誰持, 遼鶴千秋杳後期, 怊悵百年相與意, 不料今日淚如絲.
우. 이가순 ( 又. 李家淳 )
髮短心長奎閣僚, 十年遭遇我勳姚, 力爭天鼎東京黨, 恩賞花魚北宋朝,
氣槪不隨, 楡景去, 奇都付藥鑪銷, 春秋獨抱歸何地, 星日西陵萬劫昭.
斯文崔魏許同遊, 泮水風光閱幾秋, 元祐碑高君實病, 黃閣賦罷子瞻愁,
循良聲績二千石, 忼慨風稜七十州, 鐵面錦心誰愛翫, 人間咳唾謾長流.
우. 이이순 ( 又. 李頤淳 )
屹如砥柱不傾欹, 中立頹波獨障之, 南國衣冠今日領, 北關霜雪昔時髭,
應催白玉脩文詔, 無賴玄龜告夢辭, 西望健陵雲欲暮, 十年餘淚露江湄.
우. 노상추 ( 又. 盧尙樞 )
淑氣扶輿太白巓, 南州幸得鍾文仙, 早登廊廟功名耀, 晩退邱園學業專,
望重先朝三達老, 風高吾黨一時賢, 憶曾京洛從遊事, 慟哭公私淚徹泉,
金玉精姿粹且休, 藉時光價有誰儔, 天長嶺塞傷時淚, 歲暮江湖戀闕憂,
千里哭兒嗟可忍, 一身樂命復何求, 短章不盡平生事, 佇見他時信筆留.
우. 강운 ( 又. 姜橒 )
灑落當年際遇奇, 丹心惟有聖明知, 雲鄕不盡於乎慟, 白首窮荒淚自垂.
論議堂堂衆所推, 一時名義賴扶持, 卽今浮世悠悠說 留與公心百世知.
末路榮途競利囮, 一官纔做便營家, 貴能散與千金盡, 依舊茅簷處士窩.
邇來世事足千變, 自在靑山亦是非, 慟矣西河當日淚, 九原應復不禁揮.
우. 이영 ( 又. 李瑛 )
蕭瑟寒燈影獨親, 緬公歸化暗傷神, 功名一枕邯鄲夢, 身世千秋元祐人,
正直皆稱山降氣, 精靈應識斗橫旻 題詩不敢分明語, 惟有雙行淚滿巾.
우. 권사협 ( 又. 權思浹 )
明州歸後臥松廬, 醉誦家藏學士疏, 鞍峴重埋剛正氣, 英名看取木天書.
秋水精神快鶻姿仍之瓊佩辮離離, 春塘臺下賓興日, 吾見人叢特立時.
江湖獨抱廟廊憂, 去國孤臣白滿頭, 酒自澆胸棊遣憫, 古松陰下水聲流.
有血在腔有涕眶, 賴公扶得剝中陽, 如今虎逝龍亡恨, 暗喟微吟只自傷.
餘生倏見劫灰飛, 酉海蒼茫夕照移, 人不可能天未定, 寰中消息報何辭.
우, 류치묵 ( 又, 柳致默 )
歷數先朝舊維公, 最傑然山河元氣, 毓圭璧令姿全夢 藪胸中蘊驚雷舌,
下頭文章堪黼黻, 材德竚陶甄鑾掖, 承蓮燭仙舟竝鶴, 錢范車澄塞路召,
茇及湖堧聖渥東, 溟闊鴻名北斗縣, 幾年腔沸血半夜, 淚登筵秉直心甘,
鑊鋤奸志射@義, 聲推領袖偉論合, 經權竊幸民彝敍, 胡寧國勢瘨涪州,
行且遠弓劍慟尤, 纏險易那移節窮, 通已任天關山千, 里返荒野十年跧,
安石雖民望君平, 亦世捐謾將碁度 日須用酒爲年特 立中流柱孤橫野
渡船离明方繼照 賁錦倘聯翩鳳鳥, 違珍木蟻群逐臭 羶沈淪廊廟器閱,
歷海桑田,嬴博吳 腸斷江湖杜涕漣 厭玆塵粃混乘彼 傳箕遄最惜洪鍾
閟重嘆大廈顚誰 堪靑史筆不失素 心傳祗使邦鄕士 共吟殄瘁篇在公寧
有憾,歸拜健陵前.
우. 류휘문 ( 又. 柳徽文 )
吾東盛際想先王, 領袖儒林臥隱堂, 玉漏三更,香案近錦城, , 千里璽書煌, 東濱快遂懸弧志, 北棧偏傷泣劍腸, 瞻望遲遲歸旐遠, 健陵斜日尙恩光. 大朝儒老春坊客, 擔持倫綱宇宙間, 瑣直泣承天語重, 琅函驚動侍臣, 班草綸西掖羅星斗, 竪幟南州捧血盤, 此日雲鄕歸拜路, 飛旋猶素寸心丹, 風流文采動朝紳, 白髮江湖臥病, 臣生出@塘黃太史, 恩深瘴海范純仁, 却看此日離家櫬, 猶似當年去國身, 一曲陽阿無限慟, 更將私契哭姻親.
우. 이상발 ( 又. 李祥發 )
臥隱先生一枕高, 經秋老鶚氣逾豪, 風期已矣喬山遠, 名姓還於酒國逃,
行自東歸淸議重, 爲誰西望寸心勞, 藻思翰業渾閒事, 終是危途立脚牢.
賜祭文維嘉慶十八年歲次癸酉二月二十六日國王遣臣禮曹正郞蔡弘韻諭祭于故監司金翰東之靈, 古家華胄南斗儁, 望風節豪邁言議, 峻爽少屈蔭塗遂, 騁雲衢亦有推轂.
寧考曰兪, 玉堂金馬, 眷注深篤, 義在難進, 就如徵辟, 曰有所秉, 一言格天, 來汝咸造, 如綍其宣, 績成西邑, 望隆南藩, 逮予受冊, 首選胄筵, 集福敷講, 有味 乎言, 慟結蟻蓐, 舌巧虎市, 蘭佩言旋, 林園永矢, 朝倚老成, 胡不憖遺, 玆命侑觴, 庶幾格斯.
제문
제문. 이진동 ( 祭文. 李鎭東 )
嗚呼哀哉, 大澤深山, 龍亡而虎, 逝矣廣廈, 喬嶽樑摧, 而山頹矣, 公爲義理之主, 而義理晦矣, 公爲吾嶺之秀, 而吾嶺虛矣, 公之壽已過稀年, 而吾則以爲夭, 公之位躋至二品, 而吾則以爲窮何也, 子産死於九十, 而鄭人以爲夭者, 惜其壽不滿德也, 歐公官至內翰, 而宋人以爲窮者, 恨其位不稱器也. 吾於公亦云, 然, 此乃公共之悲, 而吾之私悲, 尤有所難抑者, 顧余愚戇, 與世寡合, 靑山白雪和者無人, 齊瑟燕箏, 見者不好, 惟幸知我者公, 而許以心友憂我者公, 而規以病處百里之地, 肝肺相連, 尺牘之間, 點犀相照, 庶幾百年, 相依爲命, 今焉已矣. 余將疇依, 今日之悲非悲, 公之死也, 乃悲, 我之生也嗟乎, 自聞公訃了無世, 況去秋晦來, 寓於無名, 山上其地, 距公墓數十里, 登頂騁望, 如可神交而魂接, 此亦公我不偶之緣, 而吾將終於斯矣, 公之靈其肯翩然來, 我有如生時否, 今見此地山川, 奇秀景色爽朗, 覽物想公, 伊人宛然, 朝朝東天, 紅旭初昇, 則想我公之葵忱矗矗, 層巒羅列左右, 則想我公之氣節, 紫霞靑虹, 橫亘天際, 則想我公之文 章綠草, 紅花爛熳呈姸, 則想我公之容儀, 目寓心得朝暮相遇, 則公在世間矣. 吾何悲焉, 而吾亦俟 符不發者, 幾何不從於泉下, 而有無窮之樂耶. 公亦勿慼慼而歸也. 八十病筆, 不能長語, 只以數行 , 文州句詩, 聊寫我懷之萬一, 靈其知耶, 窮山之頂, 無物辦奠, 只以一雉一果, 借酒於本家而酹之, 此亦情耶, 嗚呼痛哉.
李鎭東이 저자를 위해 지은 제문이다. 아아! 슬프다. 깊은 산에 호랑이가 떠났다. 대들보가 꺾이고 산이 무너졌다. 공은 우리 영남의 우뚝하신 분인데 이제 없으니 영남이 텅 비었다고 하면서 슬퍼하는 내용이다. 이진동 이하 金是瓚‧李敬儒‧趙居信‧李彙寧‧李熙澤(再從姪)‧李熙璞(從姪)‧熙奮(從姪) 등이 저자를 위해 지은 제문도 있다
우. 김시찬 ( 又. 金是瓚 )
嗚呼哀哉, 罷牛之駕, 驥騏之恥, 瑚璉之擲, 燕石之以環嶠以南疇, 不公惜伊台之哭, 私迺公劇, 公於我祖 堂舅之嗣, 又與先子 邢衛之誼, 施及不肖, 亦特恩眡冬齋夜永, 春城朝榮, 霏霏談屑, 敎我周行, 敦門披腹, 奉袂三旬, 熙堂夜對, 躡後宵分, 千里關河, 短長其牘, 有一於此, 其不情篤, 害不百年, 吾黨於準, 竛竮此世, 尊屬零盡, 悠悠我慟, 曷定螴蜳, 嗟公之生, 若天有意, 炳炳其才, 英英其氣, 文矕龍虎, 佩姱蓀芝, 風檣陣馬, 一日百紙, 昕赴彭徵, 時未及髭, 仕有爲貧, 目無全犧, 遂擢嵬科, 受知先王, 省署匪屈, 經幄非敡, 彼睽目者, 有腸如鋩, 許多擭穽, 履若康莊, 戰蟻于北, 士曰無冤, 聽鹿于南, 人驚士亢, 獨持風裁, 張我直聲, 有蔀斯撤, 無人不評, 慷慨中激, 眉宇崢嶸, 義理剖判, 金石鏗@, 揎袖高颺, 四座盡傾, 耳徹之聰, 目徹之明, 心徹之通, 公實兼贏, 曷不以公, 曷不以卿, 湖弓一遠, 事大不然, 將無作有, 指白謂玄, 靑海氷天, 肅愼其壄, 宋宰殺蘇, 漢皇原賈, 三年澤畔, 髭髮猶昔, 七載林下, 門行誰劈, 山龍黼黻, 付之天上, 村翁野老, 爭席幽賞, 先憂之憂, 何日可忘, 黃昏望美, 竹棧蒼蒼, 粵戊之冬, 趨拜于床, 公曰女來, 張燭宵央, 拊掌亹亹, 時世家鄕, 間以所著, 謂可與詳, 寧知此別, 遂作長訣, 哀彼童烏, 客城奄休, 公迎匶返, 亦不怨尤, 曾未幾月, 台又窮獨, 心灰神謝, 作一僵木, 公病莫聞, 公訃遽告, 曳疾出戶, 大聲何及, 村氓之變又, 胡此沓, 周年淺土, 懟彼憸潝, 惟有一言, 相賀幽明, 天佑宗祏, 聖人疹平, 邦其自今, 永孚休禎, 洋洋如在, 想豫冥冥, 顧玆賤疾,
久而愈毒, 床玆二載, 頓軀如束, 聞公杭木, 違越䌇哭, 今至燧改, 無望匍匐, 追想平素, 大何何贖, 敬送薄物, 藉結煩言, 淚發於已, 哭徵寅君, 嗚呼哀哉.
우. 이경유 ( 又. 李敬儒 )
嗚呼, 公間氣也, 其族則嶠南之望也, 其人則一邦之彦也, 文可以煥猷, 才可以賁治, 況遭値聖明, 將以有爲, 那知時事一變, 譖人罔極, 白首投荒, 丹心未暴, 終焉歸臥田廬, 不能展其所蘊, 且遭罹慘毒嬴博之慟, 促其壽算, 嗚呼, 天乎賦公, 何厚, 而閼公何偏, 其理蒼茫, 儘不可諶也, 若余婚姻之好, 遊從之樂, 雖罄竹禿穎那能盡寫也, 第念四載京國奉而周旋, 春宵之短, 冬夜之長, 落月滿庭, 燈火靑熒, 擧酒相酬, 慷慨掀髯, 亹亹向我, 語者憂一, 副大義理, 或晦而不明也, 嗚呼已矣, 尙何言哉, 苫塊餘喘, 衰病嬰身, 不能一哭, 於三年之內, 今始替送兒姪, 具黃鷄淸醑, 侑于靈座之前, 公若有知, 謂我不 負公也耶, 未可知也.
우. 조거신 ( 又. 趙居信 )
嗚呼, 公晩際明聖, 歷敡華貫, 位躋諫長秩登, 方面如公, 不可謂不遇於世而然, 猶未也, 公文足以 華國, 識足以決機宜, 辭命足於專對, 才器足於折衝, 而蹟公之立朝, 履歷三司之選, 雖若太中之超遷, 兩府之寄, 不過武城之割鷄耳, 況宵人之讒, 卒入左腹, 又使之顚沛困頓於塞垣, 嶺海之間者哉. 雖然, 士之遇不遇, 命也, 達人之胸, 顧何足介滯於中, 惟我撑天地亘, 古今殄滅, 他不得者, 卽所謂一副, 當義理而公爲山南人士之盟主, 屹然若頹波之砥柱, 入而論思經幄, 所以闡揮者, 此也, 出而臥 閤州府, 所以秉執者, 此也, 雖顚沛困頓於塞垣, 嶺海之間, 亦何嘗食息少弛也, 是以神明所扶, 五官 愈王及其天霈渙汗, 浩然南歸, 則黃田別墅, 蒔花種竹, 酣觴賦詩, 頌聖恩而娛餘年者, 何莫非講明義理之日, 而吾黨之所以有恃而無恐也. 何天之不憖, 二老俛翁先逝公, 又繼之, 使全嶺之士, 遽有撤藩之悲也, 公之冠屨以一陽南至之月, 入地, 吾知公炯炯之精, 必不與物同, 凘盡或高揖列仙朝先王於地下耶, 或俯視稷下甘陵之世, 一噱於雲門之上耶, 不然, 歸講一部春秋於漆燈之宵乎, 是未可知也. 不佞居信自是桑海餘生, 每荷公眷係之, 至有時慷慨雪涕, 聲色俱厲, 而如今已矣. 顧今世知音者誰也, 寒谷中呴噓暖律者誰也, 此猶不佞之私懇, 何必覼縷最是西河之悲, 公我一般而近聞嬴博之葬, 復出陽界, 是何等變怪也, 然, 煩言及此, 胸中炎炎, 若宿火復挑, 又何必泚余筆, 而戚我公長逝之魂魄也, 嗚呼已矣, 自今吾輩, 未死之責, 惟當收拾敗殘之餘緖, 益究未熟底義理, 以有辭於千秋萬世而已, 我言止此, 公其聞乎, 不聞乎.
우. 이휘녕 ( 又. 李彙寧 )
嗚呼, 我觀嶺之南, 故家世族, 盛衰與時運, 相上下尠有數百年, 能繼其業者, 惟聞韶氏之門, 自開巖作焉, 八吾述焉, 而至我公張大之簪組, 蟬聯門闌焜耀, 能使數百年世其家, 而不特爵祿爲然, 其執守志節, 又能有以傳襲而不墜焉, 公當健陵文明之世, 主張義理, 契合昭融, 淸議動朝廷, 直節勵時俗, 將使頹波復振, 世道丕新, 及其時, 移事遷退, 縮田野而尙不能動撓, 其心變易, 其守遂被, 箕貝之禍, 竄逐之厄, 而不悔, 由是吾道益尊, 吾黨益重, 將有辭於來世, 而不泯, 則其所以光大門戶, 繼述志業, 爲吾嶺最重者, 豈但以區區簪紱, 以世家而止耶, 不幸天不使復有意於斯世, 隱臥十餘年, 遭罹嬴博之慘, 刃割受傷, 理遣無賴, 卒至有不憖遺之痛, 而身後變怪, 捷如影響, 一身存沒, 關係不少, 因此一室之事, 而擧斯世可以推知, 則吾黨無望之慟, 當復何如哉. 公贅于弊門與家先大夫, 兩世綢繆之義, 以若不肖後生, 尙能追念而體仰, 不啻若幈幪之依, 而今無地矣, 孤露餘情, 何所瞻倚, 窀穸之訣, 有拘未遂, 單杯之蕆, 始趁練夕, 慙負幽明, 痛塡胸臆, 伏惟尊靈, 尙亦有以歆監于玆.
우. 재종질희택 ( 又. 再從姪熙澤 )
昔在先王, 登崇俊良, 公時策名, 眷倚非常, 歷敡淸顯, 金馬玉堂, 諫長重望, 甲觀難選, 旣典二州, 又陞方面, 中批皆出, 恩榮孰先, 況抱義理, 不顧鋒刃, 判生死關, 爲嶺士倡, 登陛奏讀, 特立疆抗, 恭承溫批, 趨出留門, 公曰諸君, 我是何人, 扶綱植義, 敢言不言, 握手抆涕, 賦詩頌恩, 咸曰嘖, 嘖惟公是多, 大義中天, 宵人磨牙, 逖矣北塞, 幾載逐斥, 定力素固, 髭髮如昔, 金鷄旣鳴, 汀鷗遽尋, 臥我林泉, 樂我琴書, 多年沈屈, 一方維持, 天胡奪之, 而不憖遺, 朝野嗟惜, 親戚慟悲, 矧惟熙澤, 情誼尤別, 二載年齒, 再從叔姪, 連墻分居, 隨事質疑, 晩又筮仕, 同食京師, 薄宦羈窮, 是賴是依, 我及歸田, 公又還山, 輞川縱間, 花車臻憂樂, 與俱出入侍隨如此過者, 又幾年玆今, 又返櫬, 雖是故宅, 音容永絶, 萬事陳 迹, 一再過門, 摧割肝膈, 踽踽獨存, 閱盡滄桑, 公旣棄我, 少兒亦亡, 心腸寸斷, 世念都灰, 公或有知, 能不我哀, 盃慟哭, 嗚呼哀哉.
우. 종질희박 ( 又. 從姪熙璞 )
嗚呼, 念昔離違, 一月三候, 三候猶間, 歸心惄如, 今不候公, 星霜一周, 音容漸邈, 瞻仰何及, 昨冬卽遠, 役事窀穸, 蒼茫數語, 一未展幅, 今將排布, 心胸哽塞, 孰無諸父, 惟賢最樂, 公性薑桂, 公質氷玉, 愷悌子諒, 孝友敦睦, 天旣賦豊, 又資學力, 汗血之才, 奪胎之詞, 早遊璧沼, 華聞膾灸, 幾年蠖屈, 庸玉以成, 晩果大闡, 名徹九重, 契遇曠絶, 恩造深傾, 歷敡淸顯, 俱自宸衷, 感激圖報, 義理撑持, 爲倡多士, 瀝血封奏, 天顔淚濕, 匪人骨驚, 十行溫綸, 星月復明, 抱而南歸, 孰不欽仰, 惟公樹立, 抑有大者, 往在丙丁, 孼臣復橫, 不有勅敎, 敢計先嘗, 公又奮起, 隻手扶正, 百歲有辭, 月照寒氷, 屈指當世, 辦此誰能, 名節所萃, 蜮弩候隙, 龍馭纔賓, 貝錦旋織, 北 塞三千, 嶺雪崢嶸, 風謠土性, 儘非其鄕, 君子素履, 戒我狹躁, 酒薄猶寬, 詩拙勉和, 爲賦鸎遷, 勉我先歸, 天涯別離, 我懷伊何, 恩移關河, 雷雨繼下, 邀拜仙境, 髭髮依舊, 歸臥菟裘, 親朋相賀, 公曰報國, 此行庶幾, 兩忘署門, 永矢終老, 蓋公平生, 身名俱全, 位躋仗節, 一無扳援, 邑典二繞, 未見嬴餘, 爲置義莊, 宗黨煦仁, 先世廢墜, 一一修擧, 施及窮交, 乃至焚券, 當事直截, 恢恢游刃, 十載潦倒, 淸德彌高, 尙冀遐齡, 鎭我門戶, 今焉已矣, 奈何頹俗, 鄕失蓍龜, 家無樑脊, 顧余小子, 更何依庇, 小子不肖, 難施雕朽, 念王考托, 敎導猶子, 我性浮淺, 勉以沈正, 我心躁擾, 戒以寬容, 不@不訶, 必誦先訓, 自失怙恃, 憂及寒飢 , 始也分甘, 終焉割財, 功令小技, 有進輒喜, 眷愛之深, 謬冀有做, 今焉白首, 又此惸獨, 嗒然長歎, 特加矜惻, 每賜慰解, 諄諄後事, 江湖棄雁, 顧何數齒, 嗟彼冤柩, 尙掩淺土, 經寒涉暑, 雪憤無期, 一區新莊, 狐兔荒涼, 公靈有知, 豈不長痛, 小子無狀, 辜負辜負, 不昧者存, 庶賜歆顧.
우. 종질희분 ( 又. 從姪熙奮 )
嗚呼痛哉, 自公徂逝, 南人有言, 臥隱云歿, 巷無居人, 豈無居人, 不如公賢, 爲此言者, 哭以全嶺, 我則不暇, 哭我門屛, 嗚呼吾家, 可失吾公, 城誰掃堞, 屋可無樑, 公懷曠達, 公性子良, 急人之義, 勵世高風, 天賦奇才, 襲造化功, 秉拂文苑, 誘我章甫, 一經品題, 如化時, 雨吾家門闌, 匪公誰光, 際遇昌辰, 俯就功名, 歷敡華, 顯金臺玉省, 愷切封章, 累回重瞳, 雪涕登對, 玉音凄, 切曰予有心, 惟爾是察, 俄哭蒼梧, 時事風飜, 一封爲崇, 玦路三千, 三秋關塞, 旋蒙宥恩, 歸臥鄕山, 弄我兒孫, 誰復揶揄, 遽奪家督, 我自達觀, 處若嬴博, 落拓何懷, 世事雲浮, 有局忘機, 有酒排愁, 我家邇來, 運値陽九, 幸公巋然, 望若星斗, 門戶啙窳, 公實憂之, 後輩浮薄, 公實鎭而, 門族貧窶, 公焉是惻, 倣古義倉, 捐金置糴, 賴免涸轍, 莫非公極, 矧我小子, 別有痛憶, 公曁吾父, 情同骨肉, 我猶及見, 視以猶父, 及我孤露, 惟公是怙, 無疑不質, 無事不詢, 公亦子之, 不以堂親, 憐我孤煢, 憫我愚衷, 或引而進, 或激而揚, 或付後事, 敎我申申, 小子雖愚, 尙知感鐫, 省視起居, 敢不晨夕, 中間胥㝯, 漭蒼相隔, 繼我在疚, 行跡多掣, 時省或曠, 悵慕如缺, 點候精力, 恃而無懼, 昨年以來, 殊異常度, 拜輒驚喜, 別則惄焉, 或接以事, 挽止者頻, 心焉憂懼, 如隕淵壑, 沈淹數朔, 竟有今日, 公則何憾, 哀我門闑, 矧公易簀, 吾父同晨, 同堂瞑道, 若不偶然, 痛切新舊, 淚落懸泉, 嗚呼痛哉, 塞北雪路, 關東春草, 掩淚辭歸, 尙難爲抱, 矧今此別, 不易前期, 煢我獨兮, 將誰依歸, 嗚呼冤哉, 比隣醜類, 竟禍冤墓, 變實罔測, 憤冤欲死, 按法復雪, 爲人沮抑, 醜虜何說, 世道罔極, 讐地可去, 言就故室, 十年遺躅, 抱作棄物, 辜負遺意, 情理悲絶, 由玆兆宅, 到處不利, 蹉過禮月, 載罹冬緖, 念昔庚申, 亦此光景, 時公周章, 賴而克 襄, 今皆不然, 慕公深急, 今玆幽宅, 杖屨攸及, 左祖右孫, 奄成昭穆, 幽明無間, 昵侍歡樂, 三架墓屋, 實公所營, 奉柩一宿, 感涕先零.
행장 ( 行狀 )
全羅道觀察使臥隱金公行狀
公諱翰東字翰之姓金氏。其先義城人也。世系官閥。俱載鶴陰公墓碣。鶴陰公諱景泌。官兵曹佐郞贈吏曹參判。卽公之皇考也。妣贈貞夫人西原鄭氏。貞簡公琢之六世孫士人周賢女。以英廟庚申五月日生公于永嘉之海底里。姿狀丰秀。警悟絶人。五六歲能屬文。讀生文如熟。未十歲連遭考妣喪。持服哀毁如成人。事仲父知縣公如父。不違矩度。受曾史至成湯放桀。輒掩卷卻坐曰天下有大變。又嘗問孤字義。知爲幼無父之稱。因泣下。未成童。知縣公以登千萬丈高峯。憶千萬古英雄。命題作古風。揮筆成百句。詞藻燦然。自是隷程文。踔厲疾捷塲屋藉甚。癸未中司馬。辛丑冬除敬寢郞。甲辰夏遷中部奉事。冬陞平市直長。丙午陞尙衣主簿。卽移司憲府監察。丁未魁人日製。直付殿試。己酉春始唱第。尋除成均館典籍。因移兵曹佐郞。以先公莅是職。喪歸不忍復莅。不肅焉。八月上下詢嶺南人才誰當爲最。右相蔡公濟恭以公對。上曰向見其人。已知不草草。今欲更見。承旨報嶺伯使起送可也。公以白衣趨召爲嫌。而旹値永祜園遷厝。不得已赴焉。十月拜司憲府持平。庚戌四月除司諫院正言。六月除弘文館副校理。公以特除辭不允。七月蒙召對。講貞觀政要李大亮章曰。大亮以藩臣。密表進諫。誠非易事。然使之能諫者。以太宗從諫之美也。伏願省念焉。上可之。九月移修撰。十一月還校理。辛亥正月除修撰。五月除副校理。皆旋遞。六月又除副校理。因次對入侍。上顧語大臣曰嶺人純直。不易其所守。此俗可嘉。予於此儒臣。深有所期待。因傳曰曾見嶺人某某至宰列。而是當出其右。雖銓任可堪。速擬應敎可也。因出爲咸鏡道掌試官。未復命除副修撰。十月又除。適引嫌辭遞歸。十一月除獻納。從縣道上疏辭。兼陳荒年糴政煩苛。民生流離之苦。上嘉納之。十二月連除館職。壬子正月又赴召。差會試試官。試畢入直。以事遞歸。四月又再除修撰赴召。時星漢疏逼景慕宮語至凶。公約本道搢紳章甫。合疏共討。及治疏將上。太學不許謹悉。喉院又以無謹悉阻搪。公上短章陳其狀。卽命捧入。又命搢紳章甫同入侍。又命儒臣數人陞殿聽敎。公以班首。率疏儒上殿。遂承十行哀痛之批。翌日除修撰。違牌罷職。五月嶺疏又上而終未蒙允。方擬三疏之際。以前望又除修撰。時適値皇壇望拜禮隔宵。而玉堂闕員。黽勉出肅參陪班。卽陳疏徑出。略曰臣之情勢。必自托於章甫之末者。欲以士論爲重。而不以官職自居也。嶺中人士雖疎賤。所秉者百世之大義。所言者一國之公論。章甫首發而搢紳聯參。則臣亦疏中人也。義理未伸。何敢以官爵承膺乎。且伏念千里踰嶺。相率瀝血。未蒙允兪。而臣獨供職。道理分義。俱所不敢也。因違牌蒙罷。自政院急傳下敎曰。前玉堂金翰東之徑出。聞由於嶺儒之尙不下去云。何以加於再疏後言乎。圓臚方趾之敎。已悉於前批。而今此申申。寔出於待士之意。金翰東雖在罷散中。使之冠帶常仕。疏首李㙖招致政院。以此下敎。傳之嶺儒。必當日捲歸矣。翌曉承命入侍。上敎曰諸儒留欲何爲。公對曰聖敎至此。故諸儒雖不敢久留。而願少須臾無歸。過齋日後去就云矣。上悽然曰不得不更諭一番矣。予於此事。豈有一毫不誠而然哉。自有極難處之端。誠難如諸儒期望之意耳。甲申春有先朝手敎。予亦有仰對者。義理本自如日月。而今日之大明。實亦嶺儒之功也。公對曰小臣親承諭旨。猶爲疑晦。况遐遠儒生。何以詳知。所以掩抑而不忍遽歸也。上曰諸儒可歸。而汝則不可歸矣。公對曰諸儒退歸之日。亦當同歸矣。上又敎曰須以敎意出語諸儒。使之速歸。公又對曰雖百般曉諭。終始如一。臣無以仰達矣。旣退政院以筵敎書問諸儒去就。公答書略曰當初所以一道同心。千里足者。謂可以伸百世之義理。忱誠淺薄。未蒙允兪。羣情抑欝。咸願少須臾無歸。此則翰東之所已告達者也。最是下給糧米一事。實非義分之所敢當。方聚首惶懔。罔知攸措矣。盖自上給糧於疏儒。而疏儒不受。上敎嚴重。辭受固難。故幷陳之。俄有糧米還收之命。是日除副校理。承命入侍。上敎曰今則義理旣明。嶺儒不必留。俄筵有左相所奏。出問大臣。詳傳于諸生可也。盖蔡相所奏有曰聖敎中先大王追悔一句。卽辨睿誣之大關捩。嶺儒抱此而歸。志願畢矣。請以今日哀痛之敎。頒示八方。上可其奏。故有是敎也。翌日又自政院命公謄出去昨日下敎。又謄一本使給諸儒。公遂退與疏儒寢三疏議。以上面敎不得與諸儒歸。以詩餞別曰惻愴絲綸傍有鬼。肅淸宮禁夜無人。東方百世知君父。北面三朝幾搢紳。俄除南學敎授。六月陞掌令。旋拜副應敎。尋移太常正。旋除副應敎。九月陞拜同副承旨。違牌遞。尋又連除同副。並因事遞。復除同副。時嶺儒以五月聖敎。藏于安東校宮。校長安寵縱其徒。蹴破奉敎櫃。驅逐諸儒。儒呈本營。營査乖實。公疏辭尾及安寵事而劾之。上嚴敎嶺伯施寵竄配之典。冬又除同副。癸丑正月。由同副陞右副。以在外遞。三月除同副移右副。四月連除同右副。五月趨召見遞。旋除同副。出肅捧入蔡相疏。疏卽復申大義理者也。上嚴敎封還。因敎曰嶺俗純善。見識秉守。必異於流俗。似能知予苦心矣。嶺南則專委同副。須以此意。相與曉諭。俾各洞知可也。右相金鍾秀大言領相疏語之非。至以凶逆目之。因斥公捧疏之失。上曰該房欲爲處分。而於領相有欲入閉門之嫌。故姑置之矣。公遂陳疏徑出。六月除左副。俄移兵曹參議。又還右副。以伴直交遞。降爲同副。上特敎曰同副老矣。處暑前其毋入直。冬又除右副。甲寅正月除順天府使。順州鉅以劇。素稱弊邑。公到卽蠲除海役。時値大無。捐俸金設賑。一境賴活。嚴戢奸胥。豪民不法者數事及由還。繡衣鄭晩錫受其嗾。誣啓論罷。上不允。特敎促還。不得已還任。乙卯冬以承旨遞還。丙辰正月連除同右副。因坐次單添書陞左承旨。二月除右承旨。三月又除。五月再除左副。六月再除左承旨。皆旋遞。而特下召。遂承命還朝。旋除右承旨。七月連除承旨。旋移兵議。尋還左副入侍。上問文貞公所撰續綱目曾進覽印刊見之乎。公對曰未也。上又問文貞院號曰文貞極是韙人。私家謄本之刊。豈不以是乎。因命所印二本一賜本院一賜公。而竟寢不行。八月除左承旨。旋除右兼尙衣提調。十月除大司諫。疏陳時弊。略曰恭惟我殿下躳行儉德。率勵羣工。將以風動一世。而功化所及。一切相反。奢侈之俗。日滋月盛。上自公卿下至匹庶。轉相慕效。擧世靡麗。於是乎貪官汚吏之掊克生靈。以自封殖者。輒皆藉賣權貴。以誑愚俗。臣恐殿下淬勵之志。久而或懈。奮發之氣。漸不如初。卒莫能允升于大猷也。又曰自古爲國盡節之士。能輕爵祿重名義。自任以天下之重。故不以溫飽爲意。而今之所謂處淸要者。未聞有一箇恬雅之守。東華軟塵。逐逐汩汩。一經腴藩。富埒陶猗。按使而行販買之術。牧守而效吏胥之奸。轉換糓簿。孶孶爲利。此我殿下端本出治之功有所未至而然也。試於乙夜危坐之際。惕然提警。湛然澄澈。則萬理畢照。物無遁形。凡今日救藥之方。灼然可見也。又曰刑獄審理之政。是殿下苦心至德之所在。而牧民之官。乃敢恣行威怒。濫殺無辜。諸路皆然。而嶺南尤甚。此黨論壞之也。苟其趨向不同則文致其罪。陰售厲虐。噫。無辜之士。遇酷吏之嗜殺而枉隕性命。有罪之守宰。遭殿下之恤刑而得保安逸。同仁一視之中。豈容有幸不幸之異哉。又曰銓選之法。國之大政。殿下以革舊習改舊觀爲務。夙夜嚴恭。董正羣下。而任其事者不能仰體聖念。黜陟或欠稱停。激揚不厭人心。若使一任泄泄。竊恐世道朝象。無丕變之日。今宜申加飭勵。以懋遠圖也。又曰朱子曰帝王之學。雖與韋布不同。其所以講明義理。存體應用則一也。夫義理之在天地間。如飮食裘褐。而只緣講習無漸。眞妄相渾。不能致吾知於高明之域。而卒無以立大本而行達道也。是以古之聖賢。必汲汲於講明。而爲修齊治平之本。夫經傳義理之淵藪也。張橫渠曰書所以維持此心。一時放下則一時德性有懈。朱子亦曰讀書之法。當循序而有常。致一而不懈。此皆講明之要法。而其於義理之源。庶可以盡之矣。又曰今之爲士者。工聲病爭新巧。徒爲速化之計。至於攝儀飭躳。不以爲意。究厥弊俗。專由於蒙養之不端。禮敎之不行。此朱子所以深致意於小學之敎。而橫渠敎人以禮爲先。亦以是也。夫小學卽大學之根基。而童稚講習。方無扞格之患。故昔我先大王眷眷乎培養之敎。而惟是書爲先。我殿下亦嘗遵而守之。申明講規。今宜更勅有司。嚴立課條。內則使敎官會講于公廨。外則擇其文望者爲之塾師。不專尙乎句讀之末。而隷之以應對進退之節。則其於治化。豈云小補哉。其餘臺選之不淸。經筵之久曠。掖隷之恣橫。均廳貿米。壯營積弊。復貢擧抑躁競。擧鄕飮成禮俗。首尾凡萬餘言。上優批曰爾言多實用之可採者。當隨處而試之。仍命各道校院行鄕飮禮。吏判沈煥之以公疏中論及銓選。引義違牌。上嚴責之。公亦引嫌違牌數十次得遞。十二月出爲成川府使。丁巳五月除全羅監司。以荒歲迎送有弊。旋遞仍本職。州有藍田縣。公因名思義。倣呂氏鄕約設敎條。俾行於坊曲。又因朝令與儒生行鄕飮禮。民喜曰不圖弓馬之鄕。始見禮儀。戊午二月以承旨召還。三月除諫長。從縣道陳疏。首言年凶民散。而以正軍制均還糓嚴籍法。爲救瘼之急務。中言明正學以懲邪說。愼通擬以嚴隄防。終言忠良子孫往拜北庭。歸參壇享。義理甚缺。請勿復差北使。以敦風敎。右參贊金文淳自以忠良之孫。嘗膺使命。上章發恚言。公亦控疏辭遞。自四月至十二月。除左副者四。右承旨者三。左承旨者一。而皆病不能赴。己未春連除左承旨皆徑遞。四月又除前職。未及拜命。上以前此屢召不來。命拿處。旣就理卽放。俄除左副入侍。上曰承旨何經年坐遞。公對曰嶺俗以無職踰嶺相戒。故雖承下諭。遞報傡至則其無職一也。所以不敢上來。分義雖甚惶懔。而先輩遺風。亦不敢毁壞也。上笑曰予豈欲毁壞嶺風也。但久不來故云耳。五月再除承旨。七月又除諫長。時正言任㸁疏斥李剡溪潛。至以賊稱之。校理朴吉源當議蔡相諡時。突入擅斷。謂忠字不可。故公陳疏略曰李潛事。先大王當日臨門勅敎。懇惻嚴重。實是大義理關係處。其後四十餘年之間。無敢有更說道者。渠是何人。乃敢若是。請施刊改之典。故相臣之平生秉執。孰不知其爲忠。而吉源乃以爲惟沈奎魯一人知之。此而不知則其可曰今日之臣子乎。請施竄配之典。批下㸁依施。吉源以已經處分靳之。修撰一時流反劾公。被上嚴敎者再。時朝象潰裂。齮齕日甚。公遂盡載朝具而歸。庚申二月特除侍講院弼善。赴召入對。講孟子離婁首章。公進曰詩云不愆不忘。率由舊章。遵先王之法而過者未之有也。盖先王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典章法度。於是乎備焉。遵而勿失則爲治也易故也。今我祖宗之法。卽堯舜之法。而先儒言欲法堯舜。當法祖宗。亦孟子此章之意也。又曰天之方蹶以下。專就臣道上說責難之意。盖人主之爲治。不能獨運於上。必君臣同德。上下協恭而後。可以行堯舜之政也。又晝講齊人有一妻一妾章。公進曰戰國之時。阿諛苟順之徒。得志橫行。驕人於白日之下。由君子觀之。其可羞可賤。有甚於墦間之乞。孟子此訓。一以警流俗。一以警時君。向使時君因此開悟。枉道循人者退之。直道守己者進之。豈不能變其俗哉。此等處伏願深省焉。又講山木章。進曰章末所引。最是千古心學之指南。盖心體本靜。豈有出入。而惟其外物所誘。走作無常。纔有走作。不知所在。然其出非自內而出。舍之而亡也。其入非由外而入。操之則存也。操舍二字。特留神焉。世子問聖人亦有夜氣歟。公對曰聖人純是浩氣。不以晝夜而有加損。故曰聖人無夜氣。夜氣之說。當以衆人論。又講無惑乎王之不智章曰。章下程子之訓。最是人主之龜鑑也。夫人主生長深宮之中。日進於左右者宦官宮妾而已。則其逢迎將順。足以養成人主傲惰之習。爲人主者誠能頻接賢士。列於左右。論道講學。則自然有涵養薰陶之益矣。今日書筵特使讀此章註者。臣不勝欽歎。而文義之外。竊有所懷。程子此訓。盖亦宮官時也。我邸下睿質夙就。講筵日開。政延接賢士之時。而如臣愚魯。備員而已。雖今人才不及古旹。求之林下。豈無其人。伏願延訪而布列焉。世子又問涵養當用何工。公對曰敬字最好。邸下誠能此工夫則何有於成德哉。六月正廟昇遐。當宁卽位。八月除承旨。十一月進參因山。製進輓詞。辛酉二月除右承旨。四月除左副病不赴。七月除敦寧都正。八月遞拜承旨。九月還都正。壬戌二月除左承旨。庚申以後時事大非。院相煥之用事。公無復當世念。遂卜築于黃田山中。種菊蒔竹。自號臥隱。客至惟以棊酒相娛。時洛下一知舊過公曰當今之時。雖義理上事。不必太露圭角。不爾恐有塞外之行。盖知柄臣意也。公厲聲曰吾寧作塞外行。可忍爲媕婀態乎。十月臺臣鄭彥仁果以公己未疏爲罪案。又以因山不參構誣。煥之素嫉公秉執。至是請曰他事勿論。只因山不參。難逭重律。遂竄關北之明川。時公年老病痺。杜門久矣。送者皆涕洟。公略無幾微色。怡然就道。處惡地如善。日以書史自娛。癸亥春因邦慶特命放釋。右相徐龍輔持不可。量移關東之歙谷。公曰比明川無異鄕關。此亦天恩也。凡無聊不平之懷。一寓諸詩以自遣。時洪羲運依附權要。頗作威福。伯子煕益於鳴寃行。爲之一見。公怒叱曰吾寧作嶺海鬼。豈可藉力於臧氏子乎。甲子春判義禁。一時宰。以公己未疏時。其姪之反劾公。被上譴。及於其先。深銜之。至是謂鄭彥仁駁公疏。誤以己未爲甲寅。請釐正年條。實所以重其案而修前郄也。上敎曰其子累鳴寃。可知其寃也。乙丑特命還。仍命敍用。公棲遲林泉。養痾自遣。壁上題商山紫芝歌和詩以寄意焉。己巳伯胤赴省試遘痘歿。公擧數聲哭而止。櫬歸拊而呼者三而已。其婦翁權上舍思晦悼甚不忍來見。公貽書勉之曰我且耐過。公何過焉。邀與相慰。不復大慽。然素有脾膈之病。又中傷於塞外風霜。遂轉輾沉鑠。以辛未五月日考終于寢。享年七十二。十一月葬于春陽面鞍峴負坎原。士林會者數百人。訃聞自上遣官吊祭如儀。公天資卓犖。志節高亢。剛果而子諒。英邁而謹厚。昂昂乎其氣槩也。燁燁乎其風采也。自少聲望蔚然。先生長者便皆許交。所到莫不望風虛座。性嗜酒。每被酒談論。披露性靈。風流動人。人無賢愚。隨遇盡情。和氣藹然。見其有不是處。則亦質責不饒。旋復賜顔。人亦不甚怨之。平生以早失怙恃爲至痛。遇喪餘號哭如袒括。又以貞夫人之喪。幼未持衰。當遭喪周甲。終其年若持心喪然。嘗於成童時。叔父知縣公宦遊在京。貽書勉公以勤學體先之意。公終身佩服。考終後得其書於囊中。紙面如新。其懷簡之誠有多如此。事二姊曲有情愛。遠者偵便問訊。迨無虛月。近者省視如同閈。得旨味輒割送。事從父兄上舍公曁監役公如親兄。日省候不廢。視諸姪如子。訓誨勅勵。各盡其方。處門族恩意周至。而於孤㷀者尤致意焉。値壬癸大侵。門族嗷嗷。公使人貸子母錢百餘緡。貿粟以救饑曰。早晩倘得一麾。吾且償之。及爲順天。又加送百緡。貿谷別峙。爲荒年不虞費。因令增其式。廓置田宅如范家故事。宗族至今賴之。捐俸置先代墓田。俾永香火之奉。外黨之貧不能祀者。亦爲之立廟置田。知舊求貸者。相繼雜沓。而醻接如流。散累千金。後因財匱。家人欲徵之。公度貧不能償者焚其券。其可償者亦令勿促也。有貸數百緡者以垈券歸之。公曰汝多子姓而俱在羈丱。若無此則無以嫁娶。待畢昏蓄力以償之未晩也。聰敏絶人。順俗健訟。或日至千數。遠近書疏又堆案。而公目覽訟牒。手執牋筆。筆翰如流。門無滯訴。答無留時。贈遺存問。殆遍一道。下至賤隷緇徒之可念者。亦無遺焉。急人之義。出於誠心。人有不虞事變。輒先人倡救。不以自己利害爲趨舍。李台在簡罪廢身死。其親知亦畏連累。莫肯往來。公以先公之喪。受恩於其家。將造吊。人多戒之。公曰吾不忍畏累而忘恩。遂往吊焉。平生儉約自守。幼而伶仃。長又三遭盆慽。家甚貧窶。槖饘屢空。人不堪其苦。而不沮不挫。處之泰然。筮仕初弊鞍具。至官達然後改之。而亦惟苟完而已。衣服不取華侈。在官次禁家僮衣苧布。廳妓着錦鞋甚嚴。解官歸。戒家衆勤於藨蔉曰。欲令子孫不失農家本色。常以常調自處。凡有除召。未嘗無故坐違。然至關廉隅處。亦不苟趨。銀臺時天眷隆洽。有擬銓之命。而公時適還鄕。李台益運以上意貽書促還者屢。而皆不赴。後以承旨赴召。李曰令何不早來。公笑曰固將赴召。令書尼之。李至今稱歎。嘗主試者屢矣。門子姪應擧者亦多矣。而未嘗以關節自累曰。吾不欲以父兄枉了子姪。伯胤將赴夏課。嶺伯卽公舊要也。請公得一書。公叱卻曰縱使汝由此得高官。吾不爲也。宦遊京洛數十餘年。而公故之外。脫巾守舘。不曾浪跡追逐。壬子以後尤擔負義理。一邊圖所以念念闡揮。永不負先王惻怛之敎。及時事一變。悲憤抑欝。往往扼腕蹶起。憤涕盈睫。方其寢疾。隣倅尹東壽來問。語及國事。公爲之下淚。尹出語人曰令公之疾劇矣。炳炳丹忠猶如此。令人敬服。於人雅愛淳實。甚惡修飾邊幅。嘗戒子姪曰士君子志當高潔。不可苟慕非分。又曰人之渾厚固好。而太渾厚亦非嘉。則須稍存稜角。方可自守而正人。又曰士夫之爲士夫。自有道理。徒文學不可。徒科宦不可。徒高談不可。爲其所當爲。行其所當行。然後可以爲士夫。吾家素貧寒少宦達。而世之稱之以士夫家者。以守得士夫規模也。近觀家風不古。換作豪華相。甚可懼也。雅性有恒。日用攸爲。常有節度。袵席嚮趾。不易故常。至疾革亦然。居常不喜著述。或有述作。惟以辭達理暢爲主。有乞幽竁之文。輒牢謝曰自有玄晏。代斲血指。吾所羞也。有詩集疏箚若干卷藏于家。配眞城李氏縣監世德之女。文純公八世孫。有一女適士人鄭燧。全州柳氏泰源之女。順天金氏聖鎰之女。襄景公承霔之後。有二男一女。男長卽煕益。嗣子在欽。次煕復三男二女。長卽在欽。餘幼。女適士人柳致翊。四男三女箕鎭,家鎭,魯鎭,餘幼。余於公生並一世。居又同道。艶聞公夙矣。公又謬眷於無似。當丙辰濫恩之降也。承上問。奏對旣過實。又欲與之一面。行至中路。病而還。余亦欲造門而老未能。盖精神之相映徹久矣。而方公之在世也。又約爲昏姻。公之孫在欽。卽余之孫女婿也。尤以公未及見成禮爲恨。今者煕復以公從姪煕奮所撰遺事。屬余爲之狀。感念存歿。益不勝後死之悲。遂撰次如右。以冀秉筆者之採釋云爾。通訓大夫前行司憲府持平晉陽鄭宗魯謹狀
절친한 친구인 鄭宗魯가 지은 행장이다. 저자의 이름은 翰東, 자는 翰之, 본관은 義城이다. 신라 敬順王의 아들인 錫이 시조이다. 조선 개국공신 用初, 중기의 宇宏(동생이 宇顒) 등이 직계조상이다. 아버지 景泌은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淸州鄭氏이다. 1740년(영조 16) 5월 3일에 安東府 乃城縣 海底里에서 태어났다. 10살 이전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어 仲父를 아버지처럼 모셨다. 50세가 되는 1789년(정조 13),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조가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남 출신의 인재로 누가 뛰어난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채제공이 金翰東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정조가 과거 급제자가 알현하러 왔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다고 하였다. 1790년(정조 14) 司諫院 正言을 시작으로, 1800년(정조 24)까지 홍문관 부교리‧수찬, 사간원 헌납, 좌승지, 사간원 대사간, 순천부사, 전라도관찰사, 세자시강원 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두어 차례 지방에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앙의 淸要職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관직생활 중에 한 큰 일은 영남만인소를 대신해서 올린 일이다. 1792년(정조 16) 윤 4월 27일 이우가 영남사림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은 상소인 영남만인소를 올린다. 사도세자를 모함한 柳星漢의 兇疏에 격분하여 올린 것이다. 보통 유생의 상소는 임금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이나 승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에 의해 거부되자, 金翰東을 통해 대신 올리도록 한 것이다. 1800년(순조 즉위) 2월에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어서는 주로 『孟子』를 주로 강의하였다. 이 해 6월에 정조가 승하하였다. 沈煥之를 위시한 노론 일색으로 권력이 집중되자 세상에 뜻이 없어 黃田山에 臥隱菴을 짓고 국화와 대나무를 심고 바둑을 두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에 鄭彦仁이 정조 국장 때에 장례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탄핵하였다. 그리고 평소 심환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63세의 늙은 몸으로 함경북도 明川에 유배를 간다. 1803년(순조 3)에 강원도 歙谷縣으로 배소를 옮기고, 1805년(순조 5)에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된다. 이후 은거 생활을 하다가 평소 위장 계통의 질병이 있어 1811년(순조 11) 5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春陽面 鞍峴에 안장하였는데, 향년 72세이다. 조정에서는 부음 소식을 듣고 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선생은 평소 술을 즐기고 숨김이 없는 솔직한 성격이어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친가와 외가 친척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항상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사대부는 고상하고 깨끗한 뜻을 세워야 한다. 분수에 넘치는 일이나, 구차하게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사대부는 사대부로서 할 도리가 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다음에 사대부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첫 부인 眞城李氏(1762년 사망)에게 딸 한 명, 둘째 부인 全州柳氏(1767년 사망)는 자식이 없었고, 셋째 부인 順天金氏(1781년 사망)에게 2남 1녀가 있었다. 차남인 熙復이 찾아와 행장을 지어주기를 요구하므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면서 쓴다고 하였다
通政大夫全羅道觀察使卧隱金公墓碣銘 幷序 a_298_091a
公諱翰東。字翰之。姓金氏。號卧隱。羅王子錫。食采義城。在麗。有諱龍庇。廟食鎭民。其後有諱希參。以經術。顯我仁明之世。號七峯。生諱宇宏。副提學。號開巖。東岡文貞公之兄也。德位幷峙。曾祖諱聲久。官江原道觀察使。號八吾軒。祖諱汝鏜。進士贈吏曹參議。考諱景泌。佐郞贈吏曹參判。妣淸州鄭氏。周賢女。貞簡公諱琢后。贈貞夫人。皆以公貴也。英廟庚申公生。姿狀英異。眼如曙星。未齔。讀生文。如素熟。受曾史。至湯放桀。掩卷卻坐曰。天下有大變。早喪怙恃。讀幼而無父曰孤。掩抑不成聲。仲父知縣公。甚加矜恤。敎誨之。爲程文。踔厲風發。癸未。中司馬。正宗辛丑。除敬陵郞。歷職八年。大闡。明年己酉。唱臚。除成均典籍。移兵郞。不拜。頃之。上問大臣。嶺人誰可大用者。右揆蔡濟恭。擧公名對。卽拜持平。庚戌。除正言。尋除弘文館副校理。自是除拜無虛月。歷徧至應敎。間爲獻納,掌令。出掌關北試事。壬子。陞拜同副承旨。轉左右副。移兵曹參議。甲寅。除順天府使。乙卯。遞拜承旨。丙辰。轉至左右承旨。又移兵議,大司諫。出爲成川府使。丁巳。陞拜全羅道觀察使。旋遞仍本職。戊午。以承旨召還。又拜諫長。自後屢爲承旨。己未。復除諫長。庚申六月。正廟昇遐。純宗嗣位。間拜前職。或移敦寧都正。卜築黃田山中。爲終老計。壬戌。責關北之明川。癸亥。量移歙谷。乙丑。放還。辛未。考終于寢。享年七十二。葬春陽縣鞍峴負坎原。上遣官弔祭。配眞城李氏。退溪先生後。縣監世德女。全州柳氏。士人泰源女。順天金氏。士人聖鎰女。二男煕益,煕復。二女鄭燧,柳致翊。煕益嗣男在欽。煕復四男。在欽承公祀。在九,在鏞,在一。二女成鍾震進士,趙起文。柳致翊四男。箕鎭,家鎭,魯鎭,楨鎭。在欽四男。萬銖,億銖,五銖出,百銖。在九二男。大銖,文銖。在鏞以五銖嗣。在一二男。斗銖,泳銖。公天資英邁。志節亢高。聰明器局。又足動人。出身之初。已爲君相所眷倚。當官盡職。無所屈撓。嘗以玉署。徑投短章。闢金門。捧儒疏。以訟先世子冤。爲諫長。上疏。歷詆貪官汙吏冒行販鬻。刑獄謬濫。銓選淆雜。末言聖學之所以立大本。學校之所以成禮俗。吏判沈煥之。以論及銓選。引章。上下嚴敎曰。臺閣之下手於當路頂門者誰。葢許公敢言也。又言忠良子孫。往拜北庭。歸參壇享。義理隳壞。右參贊金文淳。自以嘗膺使命。對章發恚。又以正言任㸁。詆斥李剡溪潛。校理朴吉源。沮戲蔡樊巖議諡。卽奮曰。此輩必欲乖亂義理。請幷施刊削之典。每一疏上。時流皆嫉之。未嘗挫焉。在講院。請博訪讀書之士。以輔養睿質。爲順天。束吏裕民。威制豪強。爲成川。行鄕約鄕飮禮。以觀示之。每當劇務。裁決聽受。兼聽幷用。悉皆贍擧。其掌試。或言可惜某某見屈。公擧其文各數句以辨之。言者驚曰。公鑑別亂軸。一何晣也。庚申以後。時事一變。有以柄臣意。怵公以勿露圭角。公厲聲卻之。竟論以遷謫。行到原州。子弟將西上。公呵之曰。爾輩欲我回面求生乎。禁不得行。到配日。以詩酒自娛。旣宥還。書揭商山紫芝歌。且和之。興致悠然。葢雖知遇感激。亦恥爲僥冒。嘗在鄕。上欲除公淸要官。京舊書示之。公不應。及後入洛。曰。吾書出上意。公不來。何也。公曰。固將赴召。令書尼之。言者大服。公退。輒引枕吟病。遇鄕舊。呼酒命觴。徧屬諸在座者。引甌倒飮。談論灑淅。有時宰以罪死。公以有先故恩義。往弔之。其超脫自在如此。幼而孤貧。幷日而食。不以意。進塗初闢。未有廩。貸人萬錢。以周周親凶年之飢。及有厚祿。又規置義錢。以備後日。知舊假貸。不吝應副。及後或言可責還以贍用。公曰。官廩。非錙銖積聚者比。安可責報乎。有以垈券來償者。還之曰。爾無家。嫁娶安得售。吾所未忍也。常以早抱風樹之感。當先妣喪周甲之歲。終其年若心喪。每遇先忌。如袒括之日。始知縣公在官。有書勉以勤學。考終後得之囊中。紙面如新。處姊妹。事從父兄。皆可以示法人。是其德之本也。致明孩提有識。已知公名。晩更承眄睞。被眷愛。及猥托婚好。則已後公之世矣。未嘗不懷舊愴今。其於顯刻之托。有未敢終辭者。謹按狀。而間以所睹聞者第次。而系之以銘曰。
英邁之資。高亢之格。不以利隨。不爲威慽。自我行住。不問寵辱。任爾弩眼。惟義語默。談笑揮卻。嶺海衽席。芝歌一曲。浩不羈束。疏金共惠。范庄收族。葢公平生。一是名節。英英不昧。緬懷如昨。我儀圖之。庸爲顯刻。
嘉義大夫, 前行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完山柳致明謹撰 .
定齋 柳致明(1777~1861)이 지은 묘갈명이다. 저자의 이름은 翰東, 자는 翰之, 호는 臥隱이다. 신라 敬順王의 아들인 錫이 시조이다. 조선 중기에 부제학을 지낸 開巖 宇宏은 文貞公 東岡 宇顒의 형이다. 아버지 景泌은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淸州鄭氏이다. 1740년(영조 16)에 安東府 乃城縣 海底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幼而無父曰孤(어려서 아버지가 없으면 고라고 한다.)”를 읽으면 책장을 덮고 더 이상 읽지 못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50세인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1790년(정조 14) 司諫院 正言을 시작으로, 1800년(정조 24)까지 홍문관 부교리‧수찬, 사간원 헌납, 좌승지, 사간원 대사간, 순천부사, 성천부사, 전라도관찰사, 세자시강원 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1800년 6월에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였다. 돈녕부 도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02년(순조 2)에 함경북도 明川에 유배를 가서 1805년(순조 5)에 풀려나고, 1811년(순조 11)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이다. 조정에서는 부음소식을 듣고 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첫 부인 眞城李氏(1762년 사망)에게 딸 한 명, 둘째 부인 全州柳氏(1767년 사망)는 자식이 없었고, 셋째 부인 順天金氏(1781년 사망)에게 2남 1녀가 있었다. 유배지에 있을 때 장남 熙益이 권문세가에게 청탁을 하려고 하자 꾸짖기를 “관직에 있는 사람이 유배를 감은 일상적인 일이다. 세도가의 힘을 부탁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유치명] 어질 적부터 와은공의 명성을 알았으며 성장해서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 묘갈명 글을 부탁받고 사양하지 못하고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가지고서 이렇게 쓴다고 하였다
발 ( 跋 )
我六代祖考臥隱府君遺文, 自前世收輯成帙, 累加梳洗整頓, 得十數卷極意, 營刊而家窶, 世亂因循未遑也, 頃年擧家流寓漢城, 値庚寅兵亂, 沒入於灰燼, 先君夙宵, 痛恨歸鄕里, 復收拾散草, 視舊本未之半焉, 先君奄捐背不肖識滅力絀, 又此掩弆, 堂廡諸父兄與同憂, 懼鳩聚若干物力, 幾年經紀, 幷附錄, 合爲四冊, 而始付石印, 今工告訖, 於乎, 府君德學風節, 受知於正考右文之世, 際遇之隆, 將大有爲於世, 而國朝自黨議來, 柄用在於一邊, 直言讜論, 例見排擯以君相之眷注而未能用賢, 惟意使府君, 只止於諫諍, 喉舌之職, 而及至暮年, 竟不免, 嶺海之行而歸, 隱於嵌巖之下, 僅得令終則浮榮得失, 固不足加損於府君, 而寧非世道之可慨也歟. 且遺文之壽世, 是後孫之責, 而沈湮百年, 竟未得全保, 尙誰咎哉. 今幸賴闔門共力, 年譜則族兄玄沙公所編纂, 而昌鳳氏始終監役, 得以略傳實, 亦有數焉, 愴欣交至, 謹書刊事顚趾于下方, 丁巳復月日, 六代孫昌燮敬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