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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교양 스크랩 역사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김경렬 추천 0 조회 9 11.12.13 17: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스크랩]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박경호 번역
조회 (45)
▣ 생각하는 램프 | 2005/10/22 (토)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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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게시판에서 박경호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박경호님의 말에 따르면 총32권의 이책은 2005년 11월에 한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첫번째 이야기
전 일어번역및 통역을 하고 있읍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서적을 자주 접하고 있지요...
흥미로운점은 일본학자들이 바라보는 이순신장군에대해서 몇 글자 적어볼까 합니다.
일본 역사가(대다수)들은 이순신 장군에대해서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아시아 역사를 뒤바꿔 놓은 장수로 기록하고 있다는점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없었다면... 그런 가정을 설정하였을때... (물론 역사란 가정이라는 설정은 없지만요)
 
[아시아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은 중국학자5명과 일본학자7명이 공동 저자가
되어서 쓴 책(총32권)입니다.
이책은 이순신장군의 개인기록부터 당시 중국.일본.조선.등 동북아시아국가의 모습을 기록해있읍니다..
또한 흥미로운점은 이 책에는 일본장수와 중국장수가 바라본 이순신장군에대한 내용도 있지요...
 
이 책의 주요핵심은 만일 이순신장군이 없었다면..전쟁상황으로 보아서 단 2달안에 조선은 이미 일본에게 항복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또한 명나라 역시 일본과 대적할 능력이 없었다는거랍니다. (중국학자도 인정)
 
당시의 명나라 군사수는 80만명정도 이며.. 조선국경쪽엔 약 10만정도가 있었으나 그당시 군기는 매우 어지러웠으며 10만명중 절반이 나이가 50세 가까웠다고 합니다.(참고로 그당시 나이 50이면 무진장 할아버지임 조선수군에 나오는 할아버지병사처럼) 또한 기록에 의하면 그당시 명나라는 10만명 병사중에 창.칼을 보유한 병사는 겨우 2만여명에 불과 했다는것입니다. (무기관리 엉망)
이러하니 만일 이순신장군님이 없었으면 조선은 두달만에 정복이되고 일본의 서해진출과 동시에 조선엔 일본의 25만명이라는 대군이 조총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바로 명나라로 들어가면 당시의 명나라의 수도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2~3달이면 함락된다고 한답니다.
명나라로서도 막을수가 없지요..
역시 기록으로 보더라도 만일 일본군 10만명이 조선정복하고 바로 넘어온다면 명나라가 3달안에 명나라 수도를 방어할수있는 병력에수는 약 30만명정도(조선국경10만명포함)이나...이 역시 무기 지참율은 50%정도 밖에 안된다는겁니다..
나머지는 뭐 죽창이나 농기구로 대항해야겠지요..
게다가 명나라군사역시 조선군사들처럼 조총의 위력에 혼비백산할것이며..가장큰 문제는 명나라장수들 역시 조총으로 무장된 일본군과 대적할 병법을 모른다는점입니다..
결국 그들은  조선의 신립이나 원균이 싸우고자하는 병법외엔 달리 선택이 없을테니깐요... 물론 명나라 역시 조총 비슷한게 있으나 그 숫자는 기록에의하면 1천자루 정도이며 게다가 성능도 많이 떨어졌다고 하네요...
오죽했으면 병자호란때도 청.조선은 거의 창.칼로 싸웠으니깐요..
중국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당시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정복은 못한다고 하네요..워낙땅이넓고..게다가 그넓은 땅의 지리를 일본이 다 파악못했으며 사막 같은 지역은 일본이 경험도 없으니.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일본이 중국의 만주를 포함해서..중국의 베이징과 산둥반도까지는 충분히 점령할수 있다고 하네요.... 그이후에는 아마 강화를 하겠지요...
그리고 또한가지...바로 청나라가생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첨부터 토요토미가 바랬던 목표중에 하나가 바로 드넓은 몽고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모든것은 기록에 의존해서 학자들이 연구를 해본결과입니다..
실제와는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분명한것은 이순신장군님이 일본군의 서해진출을 막음으로 전쟁은 장기화가 되었으며.. 이에 명나라도 어느정도 대적할 시간을 벌었다는것이지요..
 
또하나의 가설은 참 재미있더군요...
일본학자들이 그러더군요.. 만일 이순신장군이 조선장수가 아닌 일본장수였다면..
토요토미는 중국은 물론 지금의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정복할수 있었을거라고....
토요토미는 중국의 조조와 많이 흡사한 인물입니다..
머리가 매우뛰어나며 사람볼줄알고 인재를 등용하는법과 다루는데 뛰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순신장군이 자신의 수하였다면 아마 토요토미는 아시아의 알렉산더대왕정도 불리어졌을거라고 하네요....
 
저도 가정을 해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님이 왕이었다면 조선의 왕이아니라 통일신라나 고구려때 왕이셨으면 이순신장군은 아시아의 알렉산더가 될수있을거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이순신 장군님이 제 가정을 사양 하셨을겁니다..
이유는 바로 장군님은 정복자를 원치 않으실테니깐요....
정복자가아닌 만인이 행복해하고 자신의 꿈을 펼수있는 그러한 나라로 만드실분이기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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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2번째 이야기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5명과 일본학자7명 그리고 그외 일본사관학교 (육사.해사) 장교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 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번역된책은 없으며.. 저도 19권밖에 읽지를 못했읍니다.
 
이책은 크게 이순신장군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1500~1600년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7권으로 나누워진 책입니다.
 
이중에서 좀 특이했던것은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장군님에 관한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이였읍니다...
이순신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더군요...
우리가 잘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등 .....특히 이 두사람은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났읍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적이 있지요..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님 탄생때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일때랍니다..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많이좀 다릅니다..성격등이..
물론 우리가 바라보는것과 그들이 바라보는건 차이가 있겠지요...
아뭏든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읍니다..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 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중에 명장이기도 하죠..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네요...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전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중에 기억나는 문장이......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장군님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을 해뒀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싶은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아마 이러한 글긔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때 오나봅니다.
 
이순신.... 참으로 그분은 위대하신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학교에서 그리고 책에서도 그전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하신 분..
그저 그렇게만 알아왔읍니다...
하지만 이순신장군님은 아시아의 역사를 바꾸신분이셨읍니다......
적장이 제일로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죽이고싶은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제일좋아하고 흠숭하고 같이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으로 남겨진 분이시기도 하지요.
 
책을 읽다가 끝마디에 중국 어느 학자가 남긴글이 생각나네요...
나는 이순신인물 대해서 잘 몰랏었다.. 어느날 학자연구회를 통해 일본 학자들과 함께 그에대해서 연구하게 되었고, 그 연구를 통해서 이순신에대한 인물에대해서 자세히 알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역사학자로써 부끄러움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그 인물은 나의 30여년간 연구해온 동북아시아 역사관을 송두리채 바꾸어 넣은 인물이었다.....
만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없엇더라면 중국과 아시아의 역사는 어떻해 변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그여파로 수백만명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란것은 가설이 없다... 하지만 난 한번 가설을 해볼까한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없었더라면....만일 이순신장군이 일본장수였더라면....그것은 우리 중국5천년 역사에 크나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이민족이 우리 중국의 역사를 바꾼인물이 누군가라고 묻는다면.. 징키스칸도 아닌 대영제국도 아닌 나는 단연코 이순신 이라고 말할것이다.
...
... 생략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우리 학자가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된 책......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합니다....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해도 우리역사에대해서만큼은 더 알았음 합니다..
이책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순신장군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읍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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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세번째 이야기
 
이 책은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일본학자7명과 중국학자5명이 1998年(1990~1998년)에 총32권으로 8년간 준비해서 발간된 책입니다.
아직 번역이 안된 책이며..  마음 같아서는 제가 번역해서 다 올려 드리고 싶으나 현실이 글지 못한점을 양해 바랍니다..
 
"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읍니다.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해놓았더군요.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웟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웟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 명나라장군(人)이 본 이순신...  내용중에
 
어떤분들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장군님을 미화하는거 아니냐고 하는분도 게시지만, 이러한 글을 보면 장군님께서는 분명히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라 생각 됩니다...
제 개인적인 글을 잠 시 올릴까 합니다.. 간혼 게시판에 이순신장군님을 前 전두환.박정희 대통령과 비교하시는분 게시는데(물론 두분 잘하신거 많읍니다)..하지만 이순신장군님하고는 비교 자체를 안해주셨으면 좋겟읍니다....
적어도 장군님은 적의 목숨까지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이 책에 가설론에보면 중국.일본학자들이 왜 이순신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해봅니다...
물론 이역시 이곳 계시판에서도 상당히 널띤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죠.
중국.일본학자들은 중국사신인 운덕이 남긴 이 내용에서 해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 해답을 어렵지 않게 찾으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생명의 소중함이었읍니다.... 평화로울때는 그 소중함을 모를때가 많읍니다..
장군님께서는 그 소중함을 조선병사들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겁니다...
전쟁속에 서로를 죽여야 하는 그러한 상황이지만..끊임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생명은 소중하다 라는것을요....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는 이렇게 글을 남기더군요.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분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셧다.
모든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분 이셧다.
그러고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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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네번째 이야기
 
- 이 책은 중국학자5명과 일본학자 7명이 8년간(1990~1998년) 연구끝에 발간된 책이며,(총 32권) 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제가 읽은 부분 부분만 올립니다....양해 바랍니다.
 
중국에서는 이순신장군님 에대해서 거의 모른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민족이기도 하죠.
우리도 알고있는 초한지에 항우.유방.한신...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제갈량.조조.제갈공명.여포.......등등.. 그리고 손자병법에서의 손무.손자.등등.. 너무도 많아서 헤아릴수 없을정도입니다.
 
중국의 쟝웨이링 교수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역사학자이라고 합니다.
쟝웨이링교수 역시 다른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사 ..아니 쉽게 말하면 중화사상이 곧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로 알려져있읍니다.
(참고로.. 이분은  지금 중국에서 일고있는 고구려역사 조작에 참석지 않은분입니다.
유일하게 북경대 교수출신중에 참석을 거부한 교수 이기도 하죠.)
다음은 쟝웨이린 교수님이 이일을 하시게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연구하면서 느꼈던부분을 쓰신 글입니다... 중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함에따라 지역명이나 혹 약간의 글자가 틀릴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장수였던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해에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뿐.....
그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것이다..
더군다나 그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 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였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 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중국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 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모든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 1부끝  .................................................................   
* 참고로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 나셨읍니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셧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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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다섯번째 이야기
- 쟝웨이링교수 저서  머릿말중에서.. 2부-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는 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주인공 중심으로 돌아갈수는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어느 누구도 한 인물이 중심이 되어 그 역사를 해석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한 것을 일본학자들과 우리는 시도 하려 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는 왜 그리도 일본학자들이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매달리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옆에서  같이 연구를 하는 나로서는 그건 집착으로 까지 보여졌기 때문이다.
하루는 노무라 교수가 나에게 한가지 가설을 내놓은적이 있었다.
일본은 100여년의 내전을 통해 겨우 통일을 이루어 왔고 그 와중에 8살만 돼어도
무사가 될수 있을정도로  모든 일본군은 정예군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고,
그수는 총 40만명이 넘으며, 그중 30여만명은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는상태이며
함선또한 1300여척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을 침범하기위해서 5년이라는 시간을 더 훈련하고 준비해왔다.
그렇다면 쟝웨이링 교수님 께서는 조선이 이러한 우리 일본국을 막기위해서는 얼마의 군사와 배와 훈련이 필요로 하겠읍니까? 라고 물었다.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난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토대로해서 생각해보면, 조선은 적어도 500여척의 함대와 역시 5년정도 정예훈련을 받은 병사가30만명정도는 있어야 할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하자 (나중에 내가 안 사실이지만 조선은 1000여척의 배와 5년정도 훈련한 병사가 50만명정도 있어야 된다고 한다.) 노무라 교수는 그당시 조선의 군사수는 재대로 훈련받지않은 군사가 약 5만정도도 안돼며. 함선은 100척도 돼지않는다고 하였다.
게다가 조총은 단 한자루도 실전에서 보유 하지도 못한 상태....
그런데 이런 앞도적인 열세인 조선을 우리 일본국이 무려 7년동안 질질 끌었으며,
결국에는 섬하나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전쟁의 실패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는 앞서 말한것처럼 이 전쟁은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일본국을 물리친걸로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답을 하자.. 일본 노무라 교수는  그역시 한가지의 충분조건에는 되지만 필요조건엔 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는것이었다.
그 필요조건엔 바로 이순신 이 있었다.
이순신... 절대적인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단 1년정도의 훈련과 5천명도 안돼는 군사와 50척정도 밖에 되지 않는 함대로 어떻해 해서 그러한 일본국을 막아낼수 있었던 것일까?
바로 그것을 알기위해서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가 52세.... 교수가 된지 어느덧 33년이 다되어가고 있는 이순간, 나는 처음으로 한명의 인물을 연구 하고자 한다.
역사학자였지만 나도 몰랐던 또다른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  1991년 2월12일  쟝 웨이링 -
 
* 참고로 우리는 일본이 25~30만명 군사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일본국의 전체영주들의 군사수를 합친수 가 아닙니다.. 때문에 여기서의 40만명 군사수와 함대의 숫자가 차이가 나는것이기 때문에 오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 군사수에는 각 무사들도 포함돼어 있읍니다.. 당시 각 영주에겐 개별적인 무사를 두었으며.. 이들은 토요토미 영향권에서 벗어난 무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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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여섯번째 이야기
 
1996년 5월 쟝웨이링교수와 다른 학자들은  일본육사와 해사가 공동으로 실험한   임진왜란 모의전쟁에 참석을 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번역한 내용중 일부만을 기재한것이라서 내용이 많이 미흡합니다.
 그냥 수박 겉핧기식으로  옮겨 적은것이니 너무 상세히 따져보시면 곤란합니다.
 이순신장군이 임진때 있을때와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 였다면 일본군은 어디까지 대륙 진출을 할수 잇었는지 모의전쟁을 한겁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기록을 염두해둔겁니다.... 병사.무기등등...(단,기후.의병등 이러한 변수는 넣지 않앗읍니다) 순수하게 군인대 군인의 싸움시 입니다.
 
일본군 :    25만명(15만명의 조총부대).800여척의 함대.
조선군 :      5만명 40여척의 함대
명나라군 :  80만명(실질적인 군대수는 40여만명). 350여척의 함대
 
* 첫번째는 이순신 장군이 없었을경우 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조선은 30일 안에 일본군의 수중에 넘어가고만다.
 일본군은  원래 계획대로 5만명의 선두부대가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 도성과 평양을 점령하며, 수군도 곧바로 전라도를 점령.물자기지로 사용하고, 또다른 일본의 2진 10만명이 수로로 통해서 평양에 도착 선발진과 함께 합류하여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로부터 1개월후 완전히 재정비가 끝난 일본군은 가또장군(3만)을 선발대로 시작해서 압록강을 넘으며 고니시장군(2만)과 함께 요동까지  20일만에 점령. 명나라군은 10만의 병사가 조선국경과 요동에 있었지만 10만명중 무장한 병력은 2만에 불과 했으며, 또한 일본군의 조총에 놀라 조선군과 마찬가지로 속수무책 방어선은 무너지고만다. 지금의 선양지역 점령.선양과 북경의 거리는 약 800km  정도 거리. 이에 당황한 명나라는 급히 북쪽의 군사 10만과 지금의 텐진지역.난징. 남쪽 군사 15만명을 급히 모아 일본군과 맞서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은 고니시 와 가토의 5만 외에 와키자카등 으로 결속된 2진부대 15만명이 추가로 합류... 한편 일본에서는 이미 5만명의 군사를 보내 조선지역을 감시토록 하였다.
  명나라군은 35만명. 일본군은 20만명... 그러나 화력과 전투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일본군과... 그때까지도 명나라의 장수는 일본군과 전투시 어떠한 병법으로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명나라군은 조선군처럼 조총부대를 맞서 대항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큰 희생만 남기고 북경을 포기하고 만다..
결국 명나라 황제역시 조선의 선조처럼 몽진을 선택....불과 임진왜란 발발후 넉달도 안돼일이었다. 초고속으로 전진했던 일본군은 정비를 재정비한다.
 일본은 명나라의 선양.북경.텐진까지 점령. 한반도의 약 두배크기엿다.
 단 4개월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명나라는 약 20~30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난징과 지금의 상하이이에서 준비하고 있던 20만 병력과 잔여병력 10여만을 합쳐 약 30만명정도. 이제서야 일본군의 조총부대의 위력을 절감한 명나라.. 그러나 그것을 알았을때는 너무 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다.
 결국 명나라는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고만다. (이미 명나라는 전의상실)
 일본은 만주와 북경.텐진.지금의 황화강북부까지 점령한다.
 한반도의 약 5배 크기의 땅이였다.
 
*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 장수 였다면...
  
  마찬가지로 개전 1달만에 조선은 점령당한다...그리고 한달후 가토와 고니시는 선양을 점령... 명나라는 텐진의 병사를 급히 북경으로 모은다...
  하지만 이것은 명나라의 결정적인 실수가 돼고 말았다.
  텅빈 텐진지역..텐진은 바닷가에 접한지역이며 바로 밑으로는 황하강의 물줄기가 이어지는곳이었다.
  일본의 이순신과 도도는 화포로 무장된 함대를 이끌고 텐진의 명의수군을 격파 텐진을 점령.
  명나라는 앞으로는 선양에서 올라오는 가토 .고니시의 5만명과 와키자카등의 10만명.총15만명의 군사와 남쪽으로는 텐진에서 올라오는 도도의 군사5만명에 포위되고 만다...역시 명나라는 북경전투에서 패하고 황하강 남쪽으로피신 난징쪽으로 피신하기시작...
  하지만 이역시 명나라의 실수였다. 텐진을 점령하고 있던 이순신함대는 황하강을 거슬러 올라가 퇴로길을 막아버리고만다.
  결국 황제는 남쪽으로 가지못하고 서쪽고비사막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결국 명나라 황재와 명나라의 남쪽부대는 결합하지 못한채 끊어지고 만다.
  이순신 함대는 도도장군에게 황하강을 맡기고 300척에 달하는 함대를 이끌고 마음껏 난징과  상하이까지 진격.이곳은 바로 중국의 2대강인 양쯔강이 있는곳.
이순신함대는 다시한번  양쯔강을 마음대로 다니며 도도와 함께 중국을 삼등분하고 만다. 황하강과 양쯔강.. 옛부터 이곳을 차지하는자가 중국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이순싱 함대는 중국을 삼등분으로 틀어막아 결국 일본은 사막지역을 제회한 중국의남쪽지방까지 점령..... 그후로 3년후 토요토미는 완전히 중국을 재정비하고 이순신과 도도에게 지금의 타이완 필리핀.베트남 태국 점령을 명한다.
 이미 일본국은 동아시아 재해권을 완전히 장학하고 잇었다.
 
................ 물론 이것은 일본 육사해사가 모의 전쟁을 해본겁니다.
  아마 실제와는  많이 다를수도 있겟지요...예를들면 의병이라든가 그런 변수를 넣지 않았고.. 날씨등 기후조건도 넣지 않은 상태라서요....
그리고... 이내용은 제 개인 생각이 아니라 8년간 중국학자와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 육.해사관 에서 영구 모의전쟁을 토대로 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이 모의 전쟁을 한것은 바로 이순신장군님의 한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누구의 편으로 감에따라 전선이 어떻해 변하는것이었읍니다...
원래는 이내용의 양은 책으로 3권 분량입니다.. 그중 제가 가장 간단하게 옮겨 적은거라 많이 내용이 허슬 할겁니다.... 이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가설.... 역사란 가설은 없읍니다.... 하지만.. 정말 이순신장군임 없으셧다면.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어쩌면 정말 모의정쟁의 결과대로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책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위 책의 제목은 이 가상 모의전쟁의 결과를 보고 정한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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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일곱번째 이야기
 
주제: 임진왜란 모의전쟁
 
어떤 분들께서는 너무 허무맹랑한내용이라고 말씀을 하셨읍니다만....
예초에 그부분은 가설이라고 말씀드렸읍니다.
하지만, 그 가설은 7명의 일본학자와 5명의 중국학자.그리고 일본육사해사가 8년간 연구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만든 임진왜란 모의전쟁 입니다.
이부분 내용은 총 3권으로 되어있는 부분으로 그당시 명나라.조선.일본의 정치적형태와 무기.장수들의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한 사실적 접근인 가설 이었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또한 이내용에는 당시의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등... 객관적인 자료역시 기록 되어 있으나.... 제가 그것을 일일이 3권의 분량의 양을 다 적을 수가 없기에 그야말로 결론적인 부분만 옮겨 적은것이기에 .. 양해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
왜 학자들이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이순신장군을 중심으로 다루었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학자들이 이순신장군을 연구하던중 새로운 학설을 내놓은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순신장군 존재의 有無 였읍니다.
그리고 모의 전쟁결과 그 결과는 너무나도 엄청난것이었읍니다.
일본의 노무라 교수님은  이책에 이와같은 글을 남기셨읍니다.
 
"일본의 해군이 이순신 장군을 신처럼 떠 받는  이유는 단순히 임진왜란에서 거둔 승리만이 아니었다.  일본해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의 그 존재가 어떤것인엇나를 알고있었다.
일본의 어느 해군장교가 나에게 이런말을 한적이 있었다.
러일전쟁당시 우리 해군이 이겼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장군의 도움 때문이었다.라고
바로 임진때 사용한 이순신장군의 학익진등... 그러한 이순신의 병법을 해왔기 때문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었다고.....그러면서 만일 2차세계대전 즉 태평양전쟁당시 우리 일본해군에 이순신장군이 계셨다면 우린 미국을 꺽고 세계를 제패했을거라고.........  그 해군장교의 말은 바로 이번 임진왜란 당시 만일 이순신이 일본장수였다면... 하는 가설의 결과와 같은것이었다.
이순신..... 그는 단순히 조선을 구한 장수가 이니었다.... 그는 아시아역사를 바꾼 사나이였다 "
         ㅡ  1996.11.5  노무라 (아시아를 역사를바꾼 이순신 내용중에서) ㅡ
 
6번째이야기 글을 보시고 오해 하신분들이 계셨다면 그 오해가 풀리셨기를 바랍니다.
제가 워낙 글 제주가 없다보니.. 어떻해 오해가 풀리셨는지 모르겠읍니다...
전... 번역가이고 또한 책 내용에서 우리에게 듣기좋게 유리하게 글을 올릴수는 없읍니다.. 이책이 얼마나 투명성과 역사적 사실근거를 두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제가 할수 있는건 이 책 내용을 사실 그대로 번역해 이곳에 올리는것 입니다.
때론 미숙한 번역부분이 있더라도 양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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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여덟번째 이야기
 
※ 머릿말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 책은 중국5명.일본7명의 학자들이 8년간 (1990年~1998年)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입니다.
 
이곳 게시판에서도 열띤 토론을 가진 이순신장군님의 쿠테타 아니 혁명!
왜 장군님은  혁명을 하지 않았을까?
했다면 성공 하였을까? 실패했을까? 하는 토론을 하시기에 약간의 도움이 될련지 모르겠지만 이책의 내용중 일부를  올릴까 합니다.
다음의 글은 이케다 하야토 교수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몇글자만 옮기겠읍니다.
 
                   ★  혁  명  과   죽  음   ★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 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함께 조선의 멸(滅) 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수 있을 것이며. 혁명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 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 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것은 불가능 한 일 일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수밖에 없었다.(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이었음 알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런한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 이라도....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ㅡ 1996년 4월  이케다 하야토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내용중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 내용중에서 일부임.
 
 
위 내용은 원작에서 총 95페이지를 다룬 내용중 극히 일부만을 옮겨놓은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님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케(훗날 청나라)을 견제 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수 있었읍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노무라 교수님은 이와같은 말을 하셨더군요..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떨어지에 몰린 조선왕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되고 비밀협약을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 하지않앗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순신 이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 연구 할수록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란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 노무라교수님의 글을 읽고 한번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드라마를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이순신장군님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안고 내가 무엇을 해야된가를 정확이 아셨던분 이신것 같읍니다... 저도 마음속으로나마 물어봅니다... 장군님 당신은  다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죽음을 선택하신건가요? 2000년전의 한 청년처럼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건가요....당신앞에서 한줄기 눈물을 흘러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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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아홉번째 이야기
※ 머릿말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 책은 중국5명.일본7명의 학자들이 8년간 (1990年~1998年)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입니다.
 
  아래의글은 명나라도독 진린이 황제께 이순신을 거두어 달라는 서신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이글은 중국 쟝웨이링 교수님이 글을 옮긴겁니다.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이순신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그러했다. 지금의 명나라는 수년간의 가뭄으로 인하여 백성이 굶주렸으며,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이 잦았으며. 또한 조선과 왜국의 전란으로 인하여 나날이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도독진린의 이 서신은 쓰러져가는 명(明)국을 다시 일으킬수 있는 기회의 서신이기도 하였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에 따르면, 황제 신종은 바로 대신들에게 통제사 이순신이 대체 누구냐고 묻자 대신중 한사람이 나와 하는말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은 유방의 한신과도 같으며, 유비의 제갈공명과도 같다고 하자. 명나라의 황제는 급히 조선국으로 사신을 보내어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보존토록 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18부.명나라가 본 이순신... 내용중에서...쟁웨이링 
 
전 이 책을 보면서 참으로 조선은 복받은 나라라고 생각이듭니다.
일본학자들은 이순신장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천하를 재패했을거라 생각하고. 중국학자들은 쓰러져간 명나라가 다시 일어났을거라하고...
예전에 전 이순신 장군님을 난국에서 나라를 지키시는 분이라 배워왔읍니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읍니다.
내가 몰랐던부분.. 생각지도 못했더부분.. 우리는 그동안 이순신 장군님의 존재를 너무 가벼히 생각했던건 아닌지 생각 됩니다.
이글을 보면서 이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보이는 이순신장군님 그림이 마치 제 글을 보는듯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저리도 훌륭하신 장군님을 모셨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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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열번째 이야기
 
이 글은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저서에 동참하신 쟝웨이링 교수님의 쓰신 내용중의 일부입니다.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애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중 단한명 다시태어나 청나라를 구할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데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햇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내서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이유도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수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잇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댄..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 그자가 지켜낸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수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주엇다. 이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잇었던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병사들이었으나 그허약한 병사를 단1년만에 40만대군과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장군에대한 삶과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거북선.... 여러분 한강에 거북선이 있는거 아시죠?
매년 충무공탄신때마다 그거북선은 한강에 유유히 항해를 한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아이들을 태우고 항해를 하고..그러한 모습 여러분도 한번쯤은 보았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런데 어이 없는것은 (예전에 제가 올렸던 기억이 있네요)  그거북선을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
거북선은 소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배 인데...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왜선 안택선을 만든 나무가 바로 삼나무인데.... 그러한 삼나무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거북선을만들고... 그 거북선을 충무공탄신때 우리 아이들을 태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뿐입니다...
이 사실을 쟝웨이링 교수님이 아시면 안돼는데.....
정말이지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가 생각나네요...
거북선을 일본에서 수입한 삼나무로 만드는것은 이순신장군님을 두번 죽이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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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열한번째 이야기
 
※ 머릿말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 책은 중국5명.일본7명의 학자들이 8년간 (1990年~1998年)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입니다.
 
다음글 은 노무라 교수님의 일본인에게 알리는글..중에서 옮긴 글긔중에 일부입니다.
 
 
이순신.. 그를 연구하면서 우리는 안보이는 사람들과 하나의 힘겨루기도 있었다.
이순신. 그를 인정하는것은 바로 우리 학자들의 자국을 그만큼 폄하하게 만들기때문이기도 하기때문에....
하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알리는것이 학자로서의 도리이며, 또한 그역사를' 되풀이보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학설이 과연 옳은것이었나를 되집어보는것 역시 학자로서 마땅히 해야될 일이기에 우리는 이 연구를 계속할수 있었던것이다.
 
우리 학자들에게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전쟁의 영웅이었다면 아마 이 연구를 하지 않았을것이다... 비록 그가 아시아 역사를 바꾸었더라도... 때론 사람들은 왜 이러한 일을 하냐고 묻는사람도 있으며, 이해를 못하는 사람역시 많다.
 
역사란 그저 과거의 일을 아는것으로 끝나서는 안되는일이다.
역사를 보고 그 후손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되기도 하기때문이다.
이순신 그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시사해준다.
충.효.의.신.정.애(忠孝義信正愛)
 
그중에 나는 이순신의 신의에 대해서 잠시 말 할까한다.
이순신.. 그는 특히나 한국역사에서 보여준 힘있는 군인으로서는 유일무일하게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군인이라 생각된다.
한국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면, 힘있는 군인이란 바로 권력을 잡는 계기가된다.
(물론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나라가 그러하지만..)
 
고구려때의 연개소문. 고려의 무인의 난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현대사에 와서는 박정희의 5.16쿠테타와 전두환의 쿠테타... 한국은 끊임없이 힘있는 군인이 권력을 잡개되면 어떻해 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지만 혼란의 틈에서 힘있는 군인이 권력을 스스로 잡지 않은 인물은 이순신이 유일무일 할정도이므로.. 굳이 한사람을 더 말한다면 고려조때의 경대승 정도이다.
허나 고려조때의 경대승은 스스로 최고의 권력자는 안돼었지만, 그역시 권력을 휘들렀으며, 그 수하들이 경대승 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남용한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과의 큰 차이를 둘것이다.
 
조선의 왕 선조는 그러한 역사적사실때문에 끈임없이 이순신을 경계하였는지도 모른다... 바로 조선의 창립된것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즉 쿠테타로 이루어진 왕조이기때문이다.
여기서 우린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을 알수있다.
당시 이성계는 고려의 최영장군과 함께 고려의 충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조의 왕으로부터 명(明)을 치라는 명을받고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던중 당시의 임금의 명이 잘못된것이라 판단하고 위화도에서 회군을하며 쿠테타를 일으켜 새로운 이(李)씨의 왕조인 조선을 개국한다.
위화도 회군내용을 보면 이순신이 조선의왕 선조의 명을 받고도 출전치 않은일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것을 알수잇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천지차이를 보였으니.. 이성계는 고려왕의 명을 듣지 않으면 곧 죽음이라는것을 알앗기에 난을 일으키게되나, 이순신은 죽음이란것을 알면서도 조선의 왕에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이란 참으로 달콤한것이다. 때문에 권력을 잡은사람들은 그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한다.
당시 2만의 군대와 민심까지도 가진 그는 달콤한 권력보다는 쓰디쓴 신의를 선택한것이다... 이러한점이 바로 우리 학자들에겐 매우 이순신 이라는 인물이 다른 영웅과 비교해서 달리 보이는 점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대해  단순히 그가 임진왜란때의 전공과 그로인한 아시아의 판도가 바뀐 중대사만을 논한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 이순신. 충의를 지킨 이순신.바로 그러한 그를 논하고 싶은것이다.
 
어느 작가가 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를 그린 소설에 대해 몇글자 남길까한다.
작가는 어디에 시선과 관점을 두었냐에 따라 그 내용은 편이하게 달라질수 있다.
특히나 역사소설은 다른 소설과는 달리 사실에 근한 내용이기때문에 독자들이 사실을 왜곡돼게 받아들이게끔 해서는 아니 될것이다.
그런점에서 참으로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다른 이소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물론 토요토미는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웅이다.
하지만, 피의 냄새를 아름답게미화한 부분은 참으로 안탑깝기만 하다.
그리고 잘못된 지식으로 이순신장군을 평가한것에 대해서도 유감을 전한다.
개인적으로 그 소설을 쓴 작가는 이책이 출판될시 한번쯤 읽어봤음한다.
역사학자든 소설가든... 그 누구이든간에.. 역사라는 이름 앞에서는 편견과 선입견을 가져서는 아니될것이다.
역사가 나의 조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후손들에게 맡길일이다.
우리는 사실 그대로의 진실만을 말하면 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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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열두번째 이야기
 
※ 머릿말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 책은 중국5명.일본7명의 학자들이 8년간 (1990年~1998年)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입니다.
 
쟝웨이링교수님은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저서에 동참하신분 이십니다.
아래 내용은 쟝웨이링교수님의 북경대학에서 강의 하셨던 내용이며, 이내용은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저서의 일부 내용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 글은 얼마전에 올린 쟝웨이링교수님의 그 강의의 일부입니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제부터 오늘날의 중국이 있기까지 우리의 중국역사에는세계의 그 어느나라와 비교해도 가장 많은 영웅이 있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우리 중국역사에 조선장수 이순신 만한 영웅이 없었다는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의 이 발언이 너무 한쪽으로 기운내용이 아니냐며 물었으며, 우리중국역사에 그많은 영웅을 너무 천시하는거 아니냐며 묻기시작하엿다.
나는 재차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하고있는 중국의 영웅은 어떠한 영웅인가?
한나라의 유방을 위한 영웅인가? 아님 초나라의 항우를 위한 영웅인가?
아님 촉나라의 유비를 위한 영웅인가?
그대들이 생각하는 영웅은? 누구를 위한 영웅인가?
이질문에 술렁이던 학생들은 조용해졌고 , 나는 다시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엿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영웅은?
민족을 구한 영웅을 말하는것이다.
단순히 한시대를 호령했던 영웅호걸에대해서 논하고 있는것 아니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있었을때 수많은 영웅이 나왓던 우리중국에 왜 그러한 영웅이 나오지 못했던가?
우리 중국은 옛부터 대국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민족으로 부터 침입을 받은경우도 드물었다.
그러나 그 침입이 있었을때 우리 중국에는 민족을 구한 이순신 만한 영웅이 없었다.
몽고의 징키스칸 침입때도..청의침입에도 영국의 침입에도 일본의 침입에도 우리는 불행하게도 단 한번도 그 이민족에게서 구해준 영웅이 없었다.
나는 지금 그러한 영웅을 말하고 있는것이다.
민족을 구한 영웅.
우리 중국인의 자존심은 세계제일이라 생각한다.
과거에 우리조상들도 그러했고 나도 그러했고 또한 여러분들도 그러할것이다.
지금 세계제일의 나라를 미국이라 하지만, 우린 곧 우리가 그 세계제일의 나라가 될것이라 생각하고있다. 우린 중화민족이기때문에. 한민족이기때문에.중화사상을 지니고 있기때문에...
내가 왜 이토록 여러분들에게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는가?
나는 여러분들이 편견과 선입견을 버렸음 한다.
작은 나라라고해서 우리보다 작은 나라라해서 과거에 어떠한 이유여서 그 편견과 선입관을 가졌더라면 지금이순간 다 버리길 바란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가져왓던 편견과 선입견으로본 저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우리중국이 지금껏 있어보지 못한 민족의 영웅이 있는 나라이기때문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눈을 바다로 돌리라 말한적이 있다.
그와함께 한국을 보라. 그들의 역사를 보라 . 그들의 영웅을 보라.
그 가운데서 이순신을 보라.
여러분들은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했던 영웅의 모습을 보게 될것이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보지 못하엿던 충(忠)이 무엇인지..의(義)가 무엇인지.
효(孝)가 무었인지.신(信)이 무엇인지. 애(愛)가 무엇인지 .정(正)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이 모든것들을 이순신 그를 통해서 알게 될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순신 그에게서 조국과 민족에대한  충.의.효.신.애.정을 배울수 있기를 바란다.
................................................................................................... 중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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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열세번째 이야기
 
※ 머릿말 :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이 책은 중국5명.일본7명의 학자들이 8년간 (1990年~1998年) 연구해 총 32권으로 된 책이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입니다.
 
이내용은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 해군제독의 야마모토 이소로구제독에 관한 내용입니다...당시 야마모토 이소로구 제독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나는 이순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이순신을 흉내내고 있었을뿐이엇다. 내가 그사실을 알았을때는 내가 해전에서 지고 있을 때였다.)
 
아랫글은 [아시아 역사를 바군 이순신] 저서중 10부편중.. 일부입니다.
 
야마모토 이소로구 제독 1939년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일본해군의 수장이 된 자이다. 야마모토는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 미국의 산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일본에게 팔멸적인 직감을 예감하고 일본해군을 대표해서 계속 반대 하였으나, 일본정부를 쥐고 흔들었던 육군대장 도죠히데끼에 의해 1940년 9월27일 독일,이타릴아와 3국 동맹을 맺고.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야마모토 제독은 일왕 히로히토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왕이 야마모토에게 우리 일본해군이 미 해군을 제압할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처음 1년간은 분명히 두드러진 활약을 할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전쟁이 1년을 넘긴다면 아무것도 장담을 할수 없습니다.
 
미국의 산업능력을 잘알고 잇던 야마모토는 전쟁이 시작된지 1년후면, 미국은 엄청난 산업능력으로 군수물자를 쏟아낼것이고 이렇게 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것이다.
야마모토제독은 1년안에 미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를 맺는 것이 최대한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주만기습작전... 세계사 해전중 진주만기습작전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해전사중 최고의 전략과전술로 이루어진 해전이라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진주만 기습작전이 이순신장군의 한산도 대첩에서 착안된 작전이란 것을 아는이는  극히 드물다.
아니... 어찌 한산도 대첩 뿐이겠는가.....
당시 일왕은 야마모토제독에게 해군이 출전할 당시 어떤 작전으로 진주만을 칠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야마모토 제독은 저는 이번 작전에 조선의 수군장수엿던 이순신장군의 전략과 전술로 싸우고자 합니다.   이에 우리해군은 이미 1년 가까운 시간을 진주만에 대한 정보와 그리고 우리 해군의 함포사격능력 그리고 전투기의 폭격 능력을 향샹시켜왔읍니다.
 
학익진..
러일전쟁당시에도 이 학익진으로 일본해군은 러시아의 함대를 이길수 있엇다.
그런데 그 학익진을 야마모토가 또 한번 펼쳐 진주만 기습시 큰 효과를 볼수 있었다.
학익진에서 가장 중요한것중의 하나가 정확한 함포사격술 이었다.
이는 자칫 잘못 계산해서 함포를 사격할시 아군의 함대가 맞을수 있기때문이다.
또한 학익진 모습에서 이륙한 전투기는 미 전투기에 맞서 효율적으로 공격할수 잇었다.일본 전투기 조종사들은 하늘에서 나타난 미 전투기를 전부 볼수 있었으나 미 전투기들은 그러지 못하였다...
이 역시 학익진전략의 도움이었다.
특히... 이당시 일본해군은 해군의 전쟁은 함포대 함포로의 전쟁으로만  일관해왔었다.... 함포대 함포  이것만으로는 일본해군이 미해군을 이길수 없었다.
이에 야마모토의 저서에 의하면... (나는 뭔가 지금까지해와던 해전과는 다른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는 이 점에서도 이순신 그에게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창의적인 전쟁... 임진왜란당시잔까지만해도 일본.조선수군은 함대전이란 생각지 못햇던것이다.
그저 활이나 조총을 사용하며.. 적선을 나포에서 단접병을 해서 이기는것...
 
그런데  그러한 전쟁을 함대함전투라는 새로운 전쟁의 방식을 구사한 방법. 야마모토제독은..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던중.. 자신도 이순신처럼 지금까지 구사하지 않았던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아까 말한 학익진을 사용하는것이며 그리고 전투기를 사용하는 것 이엇다.
당시만해도 일본해군장성들은  해전을 고전적인 전함의 거퍼에 의한 해전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야마모토제독은 해전에도 항공의 시대가 왔다는것을 알리기 시작햇다...
바로 항공모함... 그것이었다. 
 
 ...중간 생략...
 
야마모토제독은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을 응용하며 연전연승을 할수 있었으나.. 결국 그도 쓰디쓴 참패를 겪을수 밖에 없었다...
역시 그의 저서에 의하면..
(나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덕으로 미 해군을 이길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순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이순신 그를 흉내 내었을뿐이엇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이미 전쟁에서 패전을 하고 있었을때였다. 내가 이순신 그가 아니였기에...그러했기에 우리는 해전에서 지고 만 것이었다.)
 
이순신....
그가 죽은지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일본해군해서는 이순신을 흠숭하며 그의 전략과 전술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야마모토제독 말.. 내가 이순신이 아니었기때문에 우리 해군이 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순신 그를 연구하면서 일본 해군장교들과의 만남에서 장교들이 말한것이 생각난다..
교수님들께서는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님이 생존 유무에따라 아시아 역사가 바뀌었을거라 생각하시지만... 우리해군은 태평양전쟁시 야마모토제독님의 말씀처럼 우리해군에 이순신장군이 있었다면 아시아 역사가 아닌 세계사의역사를 바꾸어 놓아을거라고......
 
target=_self> href=http://blog.empas.com/tara2000/>원본: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박경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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