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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오전 10시에 묘지석을 파냈다. 들어내고 보니 표면의 흙은 단단하고 매끈했다. 관리인의 말대로 흙은 원래 상태 그대로였고, 주변에는 검게 마른 장미꽃들이 널려 있었다. 피곤과 실망에 찬 요원들이 빈손으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노르망디의 앙젤베르 영감이라면 이 낙심한 요원들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아담스베르그는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사진은 제대로 찍어야 돼.” 아담스베르그가 주근깨투성이 사진사에게 말했다. 한데 붙임성 있고 재주가 뛰어난 사진사의 이름이 또 기억나지 않았다.
“바르트노입니다.” 과장의 사교적인 실수를 막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는 당글라르가 속삭였다.
“바르트노, 사진 여러 장 찍어요. 자세한 부분까지.”
“말했잖아요.” 인상을 찌푸린 관리인이 투덜거렸다. “그들은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바늘구멍 하나 내지 않았다니까요.”
“분명히 무언가 있어.” 아담스베르그가 대답했다.
과장은 파낸 묘지석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두 다리를 꼬고 턱은 두 팔로 괴었다. 르탕쿠르는 일어서서 멀찍이 떨어지더니 다른 기념비에 등을 기대고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붙일 모양이군.” 과장이 신참에게 설명했다. “우리 대원들 중에서 서서 잘 줄 아는 유일한 친구지. 한번은 르탕쿠르에게 요령을 듣고 다들 도전해 보았는데, 메르카데가 거의 성공할 뻔했어. 하지만 잠이 드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지 뭔가.”
“쓰러지는 게 정상인 것 같은데.” 베이렝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경사는 서서 자면서도 쓰러지지 않나요?”
“절대 아니야. 확인해 봐. 경사는 곧 잠들 거야. 큰 소리로 떠들어 봐. 경사가 일단 자기로 마음먹으면 난리가 나도 그 잠은 깨우지 못해.”
“변환이 핵심이지.” 당글라르가 설명했다. “저 여자는 에너지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변환시킬 줄 알아.”
“우린 아직 그 비밀을 제대로 몰라.” 아담스베르그가 당글라르의 말에 덧붙였다.
“그놈들이 오줌만 눈 것은 아닐까요?” 과장 옆에 앉아 있던 쥐스탱이 말했다.
“르탕쿠르 경사에게?”
“아니요, 이 무덤에 말입니다.”
“오줌만 누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고, 또 대가도 많이 들었어.”
“아 네, 죄송합니다. 기분 좀 풀려고 해본 말입니다.”
“자네가 잘못했다고 탓하는 게 아니라네, 부아즈네.”
“쥐스탱입니다.” 쥐스탱이 과장의 말을 정정했다.
“그리고 자네의 그 말로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네.”
“진정으로 기분이 풀리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웃거나 아니면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 어느 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억해 두겠네.”
“잠자는 건요?” 베이렝이 물었다. “자고 나면 한결 기분이 풀리지 않나요?”
“아니지, 형사. 잠자는 건 단지 쉬는 것일 뿐이야, 기분 푸는 것과는 달라.”
요원들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때 관리인이 돌아가도 좋으냐고 묻자, 과장이 대답했다. “네, 돌아가도 좋습니다.”
“묘지석을 들어 올릴 때 저 기중기를 이용하면 좋겠네.” 당글라르가 생각해 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해.” 팔에 턱을 괸 채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면 이 사건은 오늘 밤 마약과로 넘어갈 거야.”
“그 친구 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 친구는 여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데요.”
그러자 쥐스탱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면서 “세상의 어머니들이란…….” 하고 말했다.
“경사, 자네 너무 풀어진 것 아닌가? 어머니 말은 믿어야 해.”
실제로 깊은 잠에 든 르탕쿠르에게 가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면서 베이렝은 이따금 혼잣말을 하며 서성거렸다.
“당글라르, 저 신참 친구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잘 들어보게.”
공원묘지를 한 바퀴 돌고 온 당글라르 계장이 과장 옆에 앉았다.
“정말 궁금합니까?”
“저 친구 혼잣말이 분명 우리 마음을 풀어줄 거야. 내 장담하지.”
“아, 그래요? 저 친구는 지금 ‘오 대지여’로 시작하는 시를 읊고 있는데요.”
“그 뒤에는?” 약간 실망한 듯 아담스베르그가 물었다.
“오 대지여, 아무리 애원해도 말이 없구나.
이 끔찍한 밤의 비밀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구나.
너 스스로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너의 고통을 내가 못 듣고 있는가?
그다음은 제대로 못 들었어요. 그런데 누구의 시죠?”
“모르는 게 당연해. 저 친구의 시니까. 저 친구는 코 풀듯이 쉽게 시를 짓더군.”
“거참, 희한하네요.” 당글라르가 큰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희한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집안 내력인가 봐. 참, 그리고 아까 그 시구 다시 말해 봐.”
“대단한 이야기는 없던데요.”
“그래도 운이 맞잖아. 게다가 그 운이 무언가와 일치하는 것 같아. 다시 읊어봐.”
꽤 주의 깊게 듣던 아담스베르그가 몸을 일으켰다.
“저 친구 말이 맞아. 사정을 알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 대지야. 한데 우린 제대로 듣질 못하잖아, 그게 문제야.”
과장은 당글라르와 쥐스탱을 대동하고 아까 파헤쳤던 무덤 앞에 다시 섰다.
“소리가 나는데도 못 들었다면 그건 우리 귀 탓이야. 저 대지가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지금 우리에게는 전문가, 다시 말해서 대지의 노래를 듣고 해석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해.”
“그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되죠?”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쥐스탱이 물었다.
“고고학자야. 아니, 보잘것없는 것에서 귀중한 정보를 찾아내는 발굴자라고 부르는 게 더 낫겠지?” 휴대전화를 꺼내면서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그런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럼.” 과장이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말했다. “대단한 사람이지, 전문가야…….”
과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라진 흔적을 찾아내는 전문가죠.” 당글라르가 보완했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보다 더 들어맞는 말은 없을 거야.”
전화를 받은 사람은 예전에 냉소적이기로 소문났던, 은퇴한 형사 방두슬레였다.* 아담스베르그는 전화로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에 게임 끝이겠구먼,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말이야.” 방두슬레가 비웃듯이 말했다.
“아닙니다, 선배님. 그래서 제가 지금 전화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너무 놀리지 마세요. 한시가 아쉽단 말입니다.”
“좋아. 그래, 자네가 필요한 게 뭔가? 술 한잔인가?”
“아닙니다. 고고학자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지금 규석으로 둘러싸인 동굴 안에 있어.”
“그렇다면 거기서 나와 몽루주 공원묘지로 즉시 오라고 해주세요. 아주 급합니다.”
“기원전 1만 2000년의 깊이에 빠져 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그 사람은 바쁠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할 것 같은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티아스는 무덤에서 일어나지 않거든.”
“나 참, 방두슬레 선배님. 제발요! 절 도와주지 않으면 이 사건은 마약과로 넘어간다고요!”
“아, 그래?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곧바로 그 친구를 보내지.”
16장
“무슨 부탁을 했는데요?” 공원묘지 관리실에 앉아 따뜻한 커피 잔에 두 손을 녹이고 있던 쥐스탱이 물었다.
“신참의 표현대로 말하면, 대지의 비밀을 발견해 달라고 부탁했지. 베이렝, 자네의 12음절 알렉상드랭 시구도 꽤 쓸모가 있구먼.”
그 말에 주간 관리인이 베이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 사람은 시를 짓거든요.” 아담스베르그가 설명했다.
“오늘 같은 날에도요?”
“아니, 오늘 같은 날일수록 더 그렇죠.”
“그래요?” 관리인이 말했다. “시는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수록 더 잘 이해하나 봐요. 또 이해한 다음엔 사태를 단순하게 하고요. 결국엔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베이렝이 조금 놀란 듯 말했다.
그들과 다시 합류한 르탕쿠르는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과장이 다가가 손가락 하나로 마치 단추 누르듯,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녀가 깨어났던 것이다. 그녀는 관리실 창을 통해 몸집이 커다란 금발의 사나이가 길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았다. 옷은 대충 걸치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걸쳐 있었다. 허리춤에는 짧은 끈이 둘려 있었다.
“우리들의 해설자 선생이야.”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저 사람은 자주 소리 없이 웃는데, 왜 그러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로부터 5분 뒤, 마티아스는 무릎을 꿇고 무덤 근처의 흙을 살펴보고 있었다. 아담스베르그가 부하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지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았지요?” 마티아스가 물었다. “이 장미 가지들을 원래 자리에서 옮겨 놓은 건 아니지요?”
“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핵심인걸요.” 당글라르가 대답했다. “이 무덤 주인의 가족들이 무덤 주변에 장미 가지를 여기저기 뿌린 뒤 그 위에 묘지석을 놓았잖아요. 이게 바로 아무도 이 땅을 파지 않았다는 증거잖아요.”
“여기도 장미 가지, 저기도 장미 가지라.” 마티아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무릎으로 무덤 주변을 돌면서 비단의 품질을 검사하는 견직공처럼 손으로 땅을 더듬으며 주변의 장미들을 관찰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아담스베르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과장님도 보이시죠?”
아담스베르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장미 가지들은 따자마자 말라 죽었고 또 어떤 것들은 그대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것들은 모두 제자리에 그대로 있고요.” 묘지 아래쪽의 장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묘지 위에 있는 저것들은 옮겨 온 것들이에요. 이젠 아시겠죠?”
“네, 알겠어요.” 눈썹을 모으면서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바로 누군가 무덤을 팠다는 걸 뜻합니다.” 봉분 위에 있는 장미 가지를 조심스럽게 들어내면서 마티아스가 말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아래쪽과 마찬가지로 한쪽 부분의 것만 그랬다. “그리고 마른 꽃들이 가득 놓여 있는데, 무언가를 감추려고 이런 거예요. 곧바로 들키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한순간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마티아스가 말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어도 누군가가 장미 한 송이를 옮겨 놓았다는 걸 과장님은 아시겠죠?”
아담스베르그는 마티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큰 감명을 받았다. 가령 자신이 오늘 밤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꽃잎 하나를 건드리면 1000년이 지난 뒤에라도 마티아스는 그것을 알아낼 것 같았다. 모든 행동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고고학자가 뒷주머니에서 흙손 하나를 꺼내 손가락으로 닦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담스베르그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까다롭네…….” 마티아스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건 여기 흙으로 메운 구멍입니다. 그래서 잘 안 보였던 거죠. 분명 구멍을 파긴 팠는데, 그곳이 도대체 어디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아담스베르그가 물었다. 갑자기 걱정되었던 것이다.
“눈으로는 안 되겠어요.”
“그럼 어떻게 찾는데요?”
“손가락으로 찾아야지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으론 느낄 수 있지요. 비록 시간은 오래 걸려도 말입니다.”
“무얼 느낀다는 거예요?” 쥐스탱이 끼어들었다.
“구멍의 끝을 느끼는 겁니다. 가장자리가 끝나고 흙을 돋운 자리가 만나는 곳 말입니다. 흙과 흙이 만나는 곳이 분명 있거든요, 그곳을 찾아내야 해요.”
겉보기에는 똑같은 흙 표면을 마티아스는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끝에 무언가 걸렸는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장님처럼 땅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손가락에만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흙손으로 그어놓았던 직경 1.5미터쯤 되는 원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아담스베르그 과장님, 바로 여깁니다. 구덩이 내벽의 흙을 다시 퍼낼 테니까 과장님 부하들은 흙을 들어내도록 해주세요. 속도를 내서 말입니다.”
“바닥에서 25센티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셔츠를 벗은 마티아스가 구덩이 내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놈들이 무얼 파묻은 것 같지는 않네요. 우리가 너무 깊이 판 것 같아요. 놈들이 찾던 건 관입니다. 그리고 한 놈이 아니고 두 놈이에요.”
“그래, 맞아요!”
“한 녀석은 파고, 다른 녀석은 통으로 흙을 퍼냈군요. 그리고 여기에서 역할을 서로 바꾸었고요. 한 사람이 이 깊이까지 곡괭이질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마티아스가 흙손을 꺼내 다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관리인에게서 삽과 들통을 빌려 온 쥐스탱과 베이렝이 파낸 흙을 퍼 담았다. 마티아스가 회색 돌을 아담스베르그에게 내밀었다.
“구덩이를 다시 채우면서 길가의 돌도 같이 넣었군요. 곡괭이질하던 녀석이 지쳤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대충대충 마무리한 게 틀림없어요. 이 구덩이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원래 상태 그대로입니다.”
고고학자는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구덩이를 계속 파 들어갔다. 그동안 한 말이라곤 “여기서 다시 역할을 바꾸었네요.”와 “작은 곡괭이로 바꾸었군요.”라는 단 두 마디뿐이었다. 마침내 마티아스가 일어나 구덩이 가장자리에 몸을 기댔는데, 구덩이 깊이가 얼추 그의 키 높이쯤 되었다.
“장미의 상태로 보건대, 여기 매장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죽은 지 석 달 반 된 여자랍니다.”
“여기까지가 제 할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과장님이 찾아보세요.”
마티아스가 무덤가에 손을 대더니 훌쩍 뛰어 밖으로 올라왔다.
아담스베르그가 텅 비어 있는 구덩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까지 가지는 못했네요. 녀석들이 그전에 멈추었단 말인가요?”
“저는 관까지 파고 들어갔지만, 관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형사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르탕쿠르는 앞으로 다가갔고, 쥐스탱과 당글라르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관 뚜껑이 곡괭이에 찍히면서 떨어져 나가 관 속에 흙이 들어가 있었어요. 그리고 과장님은 흙을 봐달라 그랬지, 시체를 봐달라고는 하지 않았잖습니까. 저도 관은 보고 싶지 않고 말입니다.”
흙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마티아스가 커다란 두 손을 바지 엉덩이에 쓱 비벼댔다.
“과장님, 아저씨가 저녁 식사 하자고 늘 기다린다는 건 알고 있죠?”
“물론이죠.”
“요즘은 돈도 바닥났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오시기 전에 미리 알려 주세요. 아저씨가 포도주 한 병하고 그럴듯한 것을 준비할 수 있게 말이에요. 참, 과장님은 토끼 고길 좋아하지요? 아니, 새우를 좋아했나? 새우 맞죠?”
“그럼요, 두말할 필요도 없죠.”
과장과 악수를 나눈 뒤, 마티아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짧은 미소를 짓고는 한쪽 팔에 벗은 셔츠를 든 채 그곳을 떠났다.
17장
당글라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기에게 넘어온 뒤치다꺼리 일감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시체 발굴을 비롯해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을 수없이 겪은 그였지만, 악착스러운 발굴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열린 관 안쪽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는 한마디로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당글라르, 이 과자 먹어봐.” 아담스베르그가 권했다. “자네에겐 당분이 필요해. 그리고 포도주도 한잔 필요할 거야.”
“그 녀석들도 분명 들떠 있었을 거야.” 당글라르는 거의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관 속에 무얼 넣으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무얼 빼내려고 그랬을까?”
“무엇이든 간에요. 숨길 곳은 이 세상에 널려 있잖아요.”
“녀석들은 무척 바빴던 것 같아요. 아니면 관을 내리기 전에 관 안에 무얼 넣어야 했든지.”
“간 크게 석 달 뒤에 다시 찾으러 올 정도라면 정말 귀중한 것이었겠구먼.” 르탕쿠르가 한마디 거들었다. “돈 아니면 마약이겠지. 문제는 항상 이거라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이상한 점은 녀석들이 들떠 있지 않았다는 거야. 관에서도 시체의 다리가 아니라 머리 쪽을 선택했어. 그쪽은 빈자리도 많지 않은 데다가 다루기도 훨씬 힘든 곳인데 말이야.”
당글라르는 군말 없이 과장의 추리에 동의했는데, 두 눈은 과자와 포도주 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의 그것이 이미 관 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면.” 베이렝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직접 넣지 않았다면, 그래서 위치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예를 들면?”
“시체에 달려 있는 목걸이나 귀고리 같은 것이겠죠.”
“보석 사건은 정말 지겨워.” 당글라르가 중얼거렸다.
“계장,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게 바로 무덤을 도굴하는 이유라네. 이 여자의 재산 상태에 대해 알아봐 주게. 사망자 명부는 확인했겠지?”
“이름은 엘리자베트 샤텔, 미혼에 아이 없음. 루앙 근교 빌보스쉬르리슬에서 출생.” 당글라르가 낭송하듯이 읊어댔다.
“이럴 때 노르망디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나로서는 영 대책이 안 서는구먼. 참, 아리안은 몇 시에 온다고 했나?”
“아리안이 누군데요?”
“법의학자 말이야.”
“6시입니다.”
아담스베르그가 술잔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대고 죽 돌렸다. 그러자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났다.
“계장, 그 과자 먹어치워. 그리고 이 사건에 계속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과장님이 남으면 저도 남을 겁니다.”
“당글라르, 자넨 가끔 중세 사람들의 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르탕쿠르, 자네도 들었지? 내가 남으면 계장도 남겠대.”
르탕쿠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담스베르그는 다시 술잔에 손가락을 대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카페의 텔레비전에서는 축구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는데 아주 시끄러웠다. 과장이 잠시 쳐다보니 남자들이 잔디 위에서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식사하던 손님들이 포크를 든 채 고개를 쳐들고 화면 속 남자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열심히 뒤쫓았다. 아담스베르그는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골대에 공을 넣는 일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공을 막으려고 사람들을 세워두고 있는 것이지? 마치 실제 자연 상태에서는 우리가 골대에 공을 넣는 것을 막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르탕쿠르, 어쩔 셈인가? 자네도 남겠나? 아, 베이렝도 올 거야. 많이 지쳐 있을 거야.”
“전 여기 남을 겁니다.” 르탕쿠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있을 건가, 비올레트?”
말하는 아담스베르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뒷머리를 풀었다 다시 묶은 르탕쿠르가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과장님은 왜 르탕쿠르를 귀찮게 하세요?” 당글라르가 물었다.
“저 친구가 날 피하고 있잖아.”
“르탕쿠르가 과장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신참이지. 강한 친구야. 얼마 안 가서 르탕쿠르를 자기 맘대로 주무를걸.”
“희망 사항이겠죠.”
“물론, 그 친구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 친구도 분명 마음이 편치는 않을 거야. 어딘가로 공을 차고 싶기는 할 텐데, 어떤 공을 어디로 차느냐가 문제지. 하지만 이건 허를 찔려도 괜찮은 그런 시합이 아니란 말이야.”
아담스베르그는 수첩을 꺼냈다. 수첩 안에는 여러 장의 종이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과장이 이름 네 개를 쓰더니 그 면을 찢었다.
“당글라르, 시간 있을 때 이 네 사람에 대해 좀 알아봐 줘.”
“누군데요?”
“베이렝이 어렸을 때 그 친구 머리에 상처를 낸 친구들이야. 겉에 난 상처도 흔적을 남겼지만, 안의 상처가 더할 거야.”
“제가 알아봐야 할 것은요?”
“이 친구들이 잘 지내는지만 알아봐.”
“급한가요?”
“물론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전에는 다섯 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 다섯 명이었어.”
“그럼, 다섯 번째 사람은요?”
“뭐라고? 아 그래, 다섯 번째 사람은 말이야, 당글라르, 바로 나야. 내가 거기에 가담했었거든.”
첫댓글 이번의 장들은 비교적 길이가 짧아서 세꼭지를 싣는다.
으아 ~너무 멋지다 김교수~!!!
'저 대지가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시는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데 쓰인데... 또 이해하고 나면 사태를 단순하게 한다고 하고.. 와~
아담스베르그가 그 다섯 명속에 들어있었다고? 이런 걸 점임가경이라지 아마? 내부에서 다시 추리극이 벌어진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