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석. 노년기 화강암의 심술


산악인들이 즐겨 오르는 인수봉의 옛 이름은 부아악(負兒岳)이다. ‘負兒’를 이두(吏讀)로 읽으면 ‘불두덩’ 즉 남성성기다. 인수봉이 남근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불임여성이 이봉에 빌면 아기를 얻었다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으니, 이는 고대 성기숭배 사상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생산과 풍요의 상징인 인수봉이 요즘 젊은 생명을 수없이 앗아가고 있다.
이상고온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때 이른 봄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3월 벚꽃’이 피는 이변이 일어나고 있지만 봄이라고 긴장을 풀고 허점을 들어 내놓기엔 아직 이른 계절인 듯하다.
암벽등반이 시작된 지난 3월 중순의 인수봉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단 한 차례의 낙석(落石)이 두 사람을 상하게 했으니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인수봉의 오아시스 주변에는 30여명의 산악인들이 몰려 따사로운 봄 날씨를 즐기며 등반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웠을 무렵 청천벽력 같은 굉음을 내며 인수봉 변형A코스 상단에서 500Kg 크기의 바위가 굴러 떨어지며 사방으로 바위파편이 튀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미쳐 낙석을 피하지 못한 사람 중 한 명은 중상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목숨을 잃었다.
낙석은 바위를 지탱하던 아래 부분의 얼음이 녹아 지반이 약해진 바위덩이가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지는 자연현상이다. 기온이 높아지는 해빙기나 우기에 자주 발생한다. 이때 낙석통로에 사람이 노출되어있다면 인명사고는 피할 길이 없다.
산에서 해빙기에 자주 발생하는 낙석사고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일이니 숨어있는 위험을 안고 산에 오르는 산악인들의 자중자애(自重自愛)를 바랄뿐이다. 등산은 거친 대자연과 마주하는 활동이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험과 직면할 수 있고 죽음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룰 수도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등산의 세계다. 긴장을 푼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1%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것이 등산이며 온전한 모습으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등산의 완성이다.
낙석은 등반의 달인이라 해서 피해가는 법이 없다.
프랑스의 유명 산악인 장 쿠지(Jean couzy)도 낙석에 맞아 희생됐다. 그는 1950년 인류최초로 8000m급의 안나푸르나를 초등한 프랑스원정대의 일원이었으며, 1958년 마칼루를 초등한 뛰어난 알피니스트였지만 낙석 한 방에 화려했던 등반활동을 접고 생을 마감한다.
그동안 국내산에서 여러 차례 낙석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1976년 설악산 울산암에서 일어난 고대와 홍대 팀의 낙석사고는 택시크기의 암괴가 떨어져 2명이 목숨을 잃었고 1명은 발가락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한국조난사상 유례가 없었던 대형 사고였다. 이 사고의 직접원인은 침니 양쪽 벽 사이에 끼어있던 직경 20cm크기의 쐐기돌(chock stone)을 제거하자 한 쪽의 바위가 균형을 잃고 기울면서 낙석을 일으킨 것이다. 택시크기의 큰 바위가 100m이상을 굴러 떨어지자 수 백 개의 바위파편들이 쏟아졌다. 당시 암반이 붕괴하는 진동음은 속초시내까지 들렸다한다. 이날 고대 팀이 낙석을 일으킨 사고루트 옆쪽 침니를 오르고 있던 홍대 팀의 등반 자는 낙석 파편들이 침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와 돌덩이와 함께 추락하면서 낙석더미 속에 파묻혀 사망했다. 승용차 크기의 암반이 붕괴된 이 사고는 낙석의 규모로 보거나 인명피해의 숫자로 보아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처참했던 사고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고대 팀의 선등 자 김 윤기는 암벽등반에 심취해있던 산악인이었지만 사고의 상흔을 치유치 못한 채 산과 결별한다.
1987년 7월에는 태풍 셀마의 영향으로 강풍과 폭우가 몰아치는 일몰 후의 악천후 속에서 울산암 후면(미시령 쪽)쪽으로 하강 중이던 충남대 산악부원 3명이 낙석사태에 쓸려 전원이 목숨을 잃는다. 이들이 선택한 하강지점은 해풍의 영향으로 침식작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암질이 불안정한 잡석지대로 낙석의 확률이 높은 장소였다. 이들의 시신은 실종 이틀 뒤 돌과 흙더미 속에서 발견한다. 이 사건은 일몰 후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한 사람의 목격자도 없었다. 이들이 왜 암질이 불안정한 울산암 후면을 하강루트로 선택하였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사고의 직접원인은 폭우에 의한 흙과 바위의 침식이 사태를 유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1991년 봄에는 인수봉의대길 테라스에 걸쳐있던 큰 바위가 붕괴하면서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992년 가을에는 한국 스포츠 클라이밍의 기린아로 급부상했던 여성
산악인 차선영이 인수봉 남측에서 휴식 중 아미동 상단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야구공크기의 낙석에 맞아 희생 되었다. 그녀는 1992년 4개의 전국규모 암벽등반대회에서 모두 우승. 명실상부한 한국 여성 스포츠클라이밍계의 1인자였다.
2001년 3월. 인수봉 대슬랩 에서 기초 암벽등반 훈련을 하던 광운대학교 산악부 1학년 여학생이 오아시스 위쪽 급사면에 얼어붙어있던 얼음과 돌이 높은 기온으로 녹으면서 쏟아져 내리자 낙석더미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했고 나머지 2명은 경상을 입었다.
산에서의 낙석은 공포 그 자체다. 올 겨울 설악산 천불동 오련폭포 위에 설치된 철제계단을 삽시간에 파괴한 것도 낙석 때문이다.
유독 인수봉에서 낙석사고가 여러 차례 반복되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 오르기 때문이다. 인수봉은 1억 3천만 년 전 중생대 지각 변동기에 굳어진 마그마가 지표로 솟아오르면서 생긴 노년기 화강암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잠재된 낙석의 위험이 많다.
예전에는 희귀했던 사고들이 요즘 다 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풍화 침식에 의한 불안정한 바위가 여러 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낙석은 암벽등반대상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일반등산로에서도 발생한다. 1978년 3월 정오 무렵. 도봉산장 위쪽 등산로에서 일가족 3명이 망월사를 향해 등산을 하던 중 계곡위쪽에서 쌀가마 크기의 바위가 앞서 가던 딸을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이를 목격한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딸을 밀쳐내고 자신은 피하지 못한 채 바위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살신모정(殺身母精)의 사고도 있었다. 친딸을 포주에게 팔아넘기는 인면수심의 어머니가 있는 요즘 딸의 죽음을 대신한 어머니의 죽음은 희미해져가는 모성을 되새겨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 진정한 모성은 삶과 죽음이 맞부닥뜨린 자리에서도 바른 길을 택한다.
이런 일련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마치 조난 기를 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런 재앙은 자연만 탓할 일이 아니다.
19세기 말 극적인 등산가로 이름을 떨친 오이겐 귀도 라머(Eugen Guido Lammer)는 ‘낙석과 같은 외적위험도 등반의 일부’라고 말한 것처럼 산악인이라면 낙석도 등반의 일부로 보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암벽등반 중에 일어나는 낙석사고는 자연적인 요인보다는 인위적인 실수가 원인이 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등반도중 불안정한 바위에 체중을 실거나, 잡아당기는 경우와 잔돌이 쌓인 스크리(풍화퇴석)지대에서 로프를 조작하거나 회수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한다. 특히 바위 틈새에 박힌 쐐기돌이나 큰 바위를 지탱하고 있는 버팀돌을 제거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한다. 낙석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관찰로 낙석예상지역을 판단하는 안목이 중요하다. 이번에 낙석이 발생한 지점도 평소 낙석발생의 개연성이 높았던 지점이다.
자연현상에 의해 발생하는 낙석은 계절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대체로 해빙기와 우기에 많이 발생한다. 이런 시기에는 협곡. 산비탈의 풍화퇴석 지. 폭우로 지반이 약해진 곳은 피해야한다. 하루 중 낙석의 위험이 가장 높은 시간대는 기온이 상승하는 정오 무렵이다. 이시간대는 밤사이 결빙된 얼음이 녹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 산에서의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사고사례를 거울삼아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첫댓글 -불조심 돌조심-
꺼진 불 확인 하고
널린 돌 다시 보자
외적 위험도 등반요소 중의 하나이다!
해빙기는 특히 조심해야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