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암 박윤선 박사> 주석․교육․설교 사역에 평생 바쳐
필자가 총회신학교 신과(오늘의 총신대 신학대학원 M. Div.과정)에 입학하였을 때 사당동 골짜기는 허허로움의 절정이었다. 상도동 숭실대학교 앞이 버스 종점이었고 그곳에서부터는 찻길이 없고 양쪽 소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에 오솔길이 나있었다. 그 길을 혼자서 다니기에는 너무 호젓하고 무서워서 찬송을 크게 부르면서 산을 넘었다. 그것도 장마철이 되면 길가에 물이 넘치고 계곡으로 흘러내려서 신학생들은 가마니에 흙을 넣어서 그 길을 메우기에 바빴고, 버스는 상도동 찻길 양옆에 흐르던 도랑이 넘처서 오늘날 이화약국과 장승백이로 가는 삼거리의 로타리까지만 운행을 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걸어서 숭실대학 앞을 지나고 오솔길을 걸어서 학교까지 통학을 했다. 학교의 건물은 말이 건물이지 건축하다가 중단한 완성되지 못한 본관 건물뿐이었다. 본관 건물은 아직 유리창이 없어서 비닐로 막았고, 바닥은 마무리 공사가 되지 않아서 울퉁불퉁하였고 운동장은 허허벌판이었다. 지하는 베니다판으로 막아서 남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고 학생들의 놀이터 겸 유일한 복지시설은 건물 뒤의 이름모를 무덤가의 잔디밭이 전부였었다. 그리고 본관 건물 앞의 운동장에는 야채밭을 만들어서 기숙사 학생들의 부식을 할 먹거리를 재배했다. 그런 건물에서 난방 시설도 없이 공부를 했으니 추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3월부터 5월까지 우리는 외투를 입고 다녔고 따뜻한 날은 언 땅이 녹아서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 때문에 장화를 신고 다녔다. 숭실대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경영하던 박집사님 가게에 코트와 장화를 맡겨놓고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그곳에서 코트와 장화를 바꾸어 신고 등교를 했고 하교시에는 다시 코트와 장화를 맡겨놓는 일을 해마다 5월까지 되풀이 했다. 또한 그때는 오늘날처럼 상대적 가난이 아니고 절대적 가난 속에서 전국민이 허덕일 때여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학생들이
극소수여서 점심시간은 본관 뒤의 수도꼭지에 메달려 물로 배를 채우고 도서관으로 가거나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배고픔을 이겨내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투쟁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신학 공부를 했다.
정암의 열정적 기도와 강의
정암과의 첫 만남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때 정암은 60세 전후였을 것이다. 성경신학을 강의하는 그는 열정적으로 강의하였고 그러다 보니 때로는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그는 강의뿐만 아니라 설교나 기도 역시 이 세상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심정으로 생명의 절규를 하였다. 정암은 때때로 학교 뒷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새벽이슬 맞은 모습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내려 오시곤 했다. 우리는 그 모습에 큰 은혜를 받았고 존경하는 자세로 수업에 임하고는 했다.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신학생들은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 정암의 설교와 강의에 힘을 얻는 연단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그를 바라보며 힘을 얻었고 말씀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헌신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의 많은 제자들이 그의 신앙 인격에 감복하여 그를
사랑하면서 그를 따라갔다.
정암의 젊은 시절
정암 박윤선은 1905년 12월 11일에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농사를 짓는 박근수와 김진신의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나라가 망해 가는 비극의 시대에 태어난 정암을 위해서 부친은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아홉 살된 정암을 서당에 보내어 한문을 배우게 하고 계속 공부하도록 격려하였다. 정암은 17세가 되던 해에 집에서 6km 떨어진 동문동에 있는 교회당에 처음으로 나가게 되었다. 1922년 정암의 나이 18세에 집에서 80리 떨어진 대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6학년에 입학하여 소학교 6년 과정을 1년에 마치고 졸업하였다. 산수와 일본어는 그가 처음 대하는 과목이었으나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었기에 성경 과목이 있었고 채플이 있어 정암의 신앙 정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암은 18세 때 겨울 방학에 부모가 정해준 규수와 혼인하였다. 신부는 15세의 김애련이었다. 전형적인 농촌 처녀였고 학교에 다닌 적은 없지만 한글을 깨친 정도였다. 신랑도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가야했다. 정암은 정주 오산(五山)학교를 거쳐 선천의 신성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들은 민족 지도자와 한국 교회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기독교 명문학교였다. 집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정암은 고학을 하며 지탱하였고, 이 시기에 신앙적 확신을 얻게 되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었다.
아내를 공부시키다
정암의 생애에서 놀랄만한 '로맨틱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정암이 누구와 연애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신성중학교 졸업을 앞둔 정암은 자기만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아내도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암은 추운 겨울에 선천에서 고향집까지 80리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며칠을 쉰 후에 자기의 뜻을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어른들은 며느리가 집을 떠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정암은 어른들이 잠든 밤중에 아내를 업고 집을 빠져나와 선천으로 갔다. 단칸방에서 고생스럽게 살았지만 아내를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켜 4년간 공부하여 졸업하게 하였다. 오늘날도 어려운 일을 그 옛날에 실천한 정암의 로맨틱한 다른 한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정암은 고학으로 자신과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이 부인은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고 1954년 3월에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떠날 때에 정암은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 유학중이었다. 정암은 그후 그해 11월에 이화주 여사와 재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필자는 이화주 사모가 신학교에 찾아와서 우리
학생들의 뒷자리에 참석하여 남편인 정암의 강의를 듣는것을 한 두 번 본 적이 있다.
전도자로 가는 길
정암은 1927년 23세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계속하여 고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숭실전문학교 학장으로 있던 모의리(E. M. Mowry) 선교사의 소개로 평양 철도호텔 종업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암의 영어 공부와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암은 기도생활에 열심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가량 걸어서 모란봉 산기슭까지 가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유택, 김철훈, 방지일, 김진홍 등이 함께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조기부대'(早起部隊)라고 불렀다. 즉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러 가는 그룹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학 때마다 전도대에 참가하여 만주 등 여러 지역을 순방하여 설교하고 전도하였다. 이것이 정암의 헌신적 사역의 바탕이 되었고 설교가 가장 소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정암은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학생이 1백 여명이었고, 교수진은 선교사 5명, 한국인 교수 3명이었는데
남궁혁, 이성휘, 박형룡이었다. 정암은 학생으로 공부하며 목회하였고 김진홍, 방지일 등과 「겨자씨」를 발간하여 문서운동을 하였다. 또 김린서의
「신앙생활」에도 10여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선생님이 잘 아시잖아요" 1934년 3월, 정암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8월에 나부열 교장의 추천으로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을 가려면 그 나라의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에 있었던 일을 방지일 목사는 우리 한국상담선교연구원을 방문하여 이렇게 회고하였다.
"박윤선, 김진홍과 내가 미국 유학을 가려고 비자를 신청하였지. 당시에 유학하려면 월 3백원을 후원한다는 재정 보증이 필요했어. 그 친구들이 어디서 그런걸 얻어 올 수 있나? 내가 다 구해 주었지. 우리 셋이서 평양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어. 새벽에 내려 5전 짜리 호떡을 사서 아침을 떼우고 정동교회에 가서 기도한 후 영사관으로 갔지. 우리 셋을 앉혀 놓고 영사가 서류를 보더니 재정보증서를 들고 '진짜 돈을 도와주느냐?'고 물었어. 그때 우리는 정말 난감했어. 아니라고 하면 비자를 못받고,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 하는 것이 되니 난감하였다. 그때 윤선이가 웃으면서, 윤선이는 웃을 때 약간 바보같잖아, '그것은 선생님이 잘 아시쟎아요'라고 말했어. 미국 영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맞아 맞아'라고 하며 여권에 비자 도장을 찍어주어 비자를 받았고, 둘은 미국으로 가고 나는 중국 선교사로 갔지." 필자는 방지일 목사의 회고담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대답을 주시는구나."라고 감탄하였다. 정암은 배편으로 태평양을 건넜는데 일본 고베(神戶)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17일이 걸렸다. 그는 배에서 요한계시록을
암송하기 시작했는데 하루 1장씩을 외워 모두 18장까지 암송하였고 나머지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암송하였다. 그의 주석 첫 작품이
「요한계시록」인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웨스터민스터에서의 열매
정암은 웨스터민스터에서 성경신학과 성경 원어 연구에 몰두하였고, 메첸의 지도를 받으며 신약학을 전공하였다. 「칼빈주의」에 대해 배우게 되어 그의 사상의 기조가 되었고, 정통장로교회(O. P. C)에 속한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과 클라스메이트로 만나 평생의 친구요 신앙과 사역의 동지로 함께 가는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정암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모두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 학교 기숙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것이 그의 일생의 나아가는 길이요 힘의 원천이었다.
정암과 성경주석
정암 박윤선이라고 하면 「성경주석」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는 신구약 66권 전부를 주석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신학석사(Th. M)학위를 받고 1936년 8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평양에 거주하며 평양신학교 시간 강사를 하면서 총회 교육부가 발행하는 「표준성경주석」을 위해서 일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사역이 40년동안 계속되어 1979년 10월 9일에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완간 감사예배」를 드렸으니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정암은 신학교 강의나 설교는 쉬어도 주석 집필은 계속하였다. 그때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는 방지일 목사가 지금은 없어진 루터교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새생명」에 실은 내용이다. 정암은 고려신학교를 떠나 동래 온천의 이재만 목사가 주선해준 허름한 방에서 주석을 집필하였다. 그 방은 침실, 식당, 응접실, 연구실 등으로 사용되는 다목적방이었다. 조그만 방에서 책상도 없이 밥상을 펴놓고 주석 원고를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 방에서 뛰어놀면서 시끄럽게 하자 "조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또 떠들었다. 몇 차례 이렇게 하다가 화가 난 정암은 아이들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그래놓고 보니 화를 낸 자신이 부끄럽고 송구하여 아이들을 둘러 앉혀 놓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그 속에 손을 넣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주석하는 손으로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자 아이들도 따라 울면서 자기들이 잘못하였다고 용서를 빌더라고 했다. 이것은 정암의 삶에서 그려진 하나의 삽화이다. 그는 순수 그 자체였다. 그것 때문에 남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하고 손해를
입기도 했으나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았다.
정암과 신학교육과 선교사역
정암은 한평생 성경주석과 함께 신학교육에 전념하였다. 평양신학교 강사에서 시작하여 만주신학교 교수, 고려신학교 교수와 교장, 개혁신학교, 총회신학교를 거쳐 합동신학교에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으니 길게 소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학교 교수를 하면서도 교회 강단을 맡아 계속하여 설교한 일이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목사가
없는 교회를 맡아 설교 사역을 하면서 살아있는 말씀의 선포에 전력을 기우렸다.
정암, 그 이후
정암은 1988년 6월 30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제자와 후학들이 「정암신학강좌」를 정기적으로 개척하여 그의 사상을 조명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서영일 목사가 정암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박윤선개혁신학연구」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됨). 서영일이 이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한 시간 거리인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그때 필자의 남편은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였다. 정암을 주제로 하여 박사논문을 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편은 "서목사, 자네는 한국에서 일할 거냐, 미국에서 일할 거냐?"고 물었고, 서목사는 "아내가 미국 사람이어서 한국에 갈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그렇다면 논문을 잘 써 보라."고 격려했다. 이러한 격려를 받은 서목사는 웃으면서 "사실은 여기에 오기 전에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를 만났는데 똑 같은 말을 하더라면서, 간하배 교수가 우리 집에 가서 조언과 자료를 구하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 친구도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정암 연구서는 후학들에게 큰 힘과 자극제가 되고 있으니 그 책을 통해서 정암과 서영일을 기억하게 된다. 또 김영재가 정암평전을 저술하여 정암신학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정암은 정이 많고 친절하며 하나님과 성경밖에 모르고, 세상 물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사당동 3층에서 강의가 끝날때 밖에 비가 내리면 학생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3층에서부터 바지를 걷어 올리고 우산을 들고 내려오신다. 정암을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이 우리가 아침에 등교할 때 학교 뒷산에서 새벽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시다가 내려 오시던 모습이며, 지금도 그 모습이 그립다. 필자는 총신에서 정암의 학생으로 그 밑에서 공부한 것을 자랑과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한다. 그는 우리에게 성경을 읽고 연구하라고 늘 강조했다. 어느날은 하교길에 상도동에서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필자의 이력과 신상을 자세히 기억하고 계시면서 불신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애로사항에 대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필자는 당시의 학생으로서 이름만 기억해 주셔도 감격할 일인데 그렇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는 정암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 몇 년이 지나 필자가 총신의 신참 교수로 임용이 되어 같은 학교에서 같은 교수의 반열에서 은사 교수의 모습을
닮아가며 함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하다. 정암은 또한 필자가 결혼을 할 때 결혼 주례를 해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결혼식 10여일
전부터 급환으로 갑자기 정동의 고려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어 주례를 하실 수 없게 되었다. 그후 10여년간 사당동 캠퍼스에서 필자를 만날 때마다
"정 교수, 정말 미안해. 내가 주례를 해 주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라고 하셔서 도리어 내가 미안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정암은 그런
분이었다.(필자는 1970년대 초반에 <일간 스포츠>의 요청으로 <나의 스승 박윤선목사>라는 제목의 글을 한페이지 특집으로
게재한바 있다). ◇ 필자 정정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