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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韓山李氏)
◀ 이 색(李 穡)의 영정 <1328(충숙왕15)∼1396(태조 5)> -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字)는 영숙(潁叔), 호(號)는 목은(牧隱), 시호(號)는 문정(文靖). 한산(韓山)은 충청남도 서천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인데 신라 때 가림군(嘉林郡 : 임천)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초에 한산으로 고쳤다. 1175년(명종5) 감무(監務)를 두었고 홍산(鴻山)을 겸임, 후에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되었다가 조선때 한산군(韓山郡)이 되었으며, 1913년 서천군으로 병합하여 지금은 한산면으로 남아있다. 한산 이씨의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한산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윤경(允卿)의 묘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는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縣監)이 앉는 널판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의 6세손 곡(穀)이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스승인 이제현(李薺賢)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했으며, 충렬·충선·충숙 3대왕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한 후 백이정·우 탁(禹 倬) 등과 더불어 경학(經學) 대가로 손꼽혔다. 곡(穀)의 아들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여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던 목은(牧隱) 색(穡)은 익재(益齋 : 이제현)의 고제로 14세 때 성균시 십운과(成均試十韻科)에 합격하고 1351년(공민왕 2) 등과(登科)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공양왕 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에 봉해졌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는 격동기에 풍운이 격심한 일생을 살면서 다섯 차례나 유배(流配)를 당했던 목은은 뛰어난 학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명망을 떨쳤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목은을 불렀더니 목은은 태조를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고 옛날처럼 서로 읍만 하였고, 태조는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써 대접하였다. 잠시 후 시강관(侍講官)이 열지어 들어오므로 태조가 왕좌에 올라 앉자 목은은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고 하자 태조가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겠으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하였다. 목은은 "망국의 대부(大夫)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다 죽게 된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에 묻을 뿐이요"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색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종덕(種德)과 차남 종학(種學)도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을 마다하고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모두 매를 맞아 죽었다. 두 아들을 잃은 목은이 여주에 물러가 살았는데, 하루는 그의 옛 제자가 찾아와 뵙자고 하자 아무말도 않고 앞장서서 깊은 골짜기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큰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 목은은 이태조(李太祖)와 태종(太宗)과의 친분이 있어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초대되어 궁안에 드나들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 대절(大節)을 이루었다. <인정이 어찌 물(物)의 무정함과 같으랴(人情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偶向東籬差滿面), 꽃은 진국화(眞菊花)요 사람은 거짓 도연명(陶淵明)이다(眞黃花對僞淵明)> 하는 그의 시에는 슬픈 마음이 담겨 있다. [월정만필]에 의하면 고려 말에 길재가 목은에게 거취를 물었을 때 대꾸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 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 하다"고 말하고, 길재가 돌아갈 때 인사하러 들르자,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는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종덕의 아들 맹균(孟畇)은 세종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세업(世業)을 이어받아 글씨와 시문으로 문명을 떨쳤으나 부인이 질투하고 사나운데다 아들이 없어 가화(家禍)로 불우했다. 그가 아들이 없음을 슬퍼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사람이 생긴 때로부터 아비 자식대를 전해와 이 몸까지 이르렀네(自從人道起於寅父子祖傳到比身), 내 무슨 죄로 하늘이 돕지 않아 아비 소리 못들은 채 귀 밑에 흰털만 새로워라(我罪伊何天不未爲人父髮絲新)>. 색(穡)의 증손이며 계주(季疇)의 아들이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개(塏)이다. 1436년(세종18) 문과에 급제했던 개(塏)는 시문이 절묘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저작랑(著作郞)으로 [명황계감(明皇戒鑑)] 편찬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도 참여했으나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직제학(直提學)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일찌기 단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로 매서운 절개를 나타내었던 개(塏)는 몸이 여위고 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엄한 형벌에도 얼굴 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고 [추강집(秋江集)]이 전한다. 목은의 현손으로 홍귀달(洪貴達)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고 대담한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했던 예견(禮堅)은 만년에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문학과 절행으로 당세에 소문났었다. 연산군 때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자(예견의 아들)는 감찰을 지내고 천추사(天秋使)의 서장관(書壯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희대의 간신 김안로(金安老)는 동서지간이면서도 항상 자를 해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에 성묘하러 왔다가 용궁(龍宮)에 있는 자의 집에 일부러 들러 친선을 빙자하여 염탐을 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알아차린 자( )는 괴화탕(槐花湯 : 홰나무의 꽃을 달인 물)으로 얼굴을 씻어 늙어 보이게 하고 이불을 둘러 쓴 채 김안로를 맞았다. 안로는 손을 잡고 은근히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고 나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음애(蔭崖 : 자의 아호)는 이제 고만이다. 염려할 게 없다"고 하였다. 그 후 자는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벼슬에 올라 교리(校理)와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거쳐 수원 통판(水原通判)을 지냈던 치(穉)의 아들 지함은 흙벽돌을 찍어 축대를 쌓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토정선생(土亭先生)으로 더욱 유명했다. 복서(卜筮)·지리(地理)·음양(陰陽)에 능통했던 토정은 선조 때 탁행(卓行)으로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직,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밤에 책 읽을 때 켤 등기름 살 돈이 없어 처자들이 낮에 산에 가서 관솔을 떠어 올 지경으로 청빈하게 살았다. 그밖에 한산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 : 지함의 형)의 아들로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던 산해(山海)와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된 산보(山甫 : 지무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산해의 아들 경전(慶全)은 광해군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후 한평부원군(韓平府院君)에 진봉되어 인조 때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형조 판서(形曹判書)에 올랐던 현영(顯英)과 함께 명망을 떨쳤다. 한편 <고집통 긴수염의 재상>으로 불리웠던 기조(基祚 : 현영의 아들)는 효종 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에 광주 쌍령(雙嶺)에서 선두에 나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절한 의배(義培)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취병(聚兵)하여 전장에 나가면서 집사람으로 하여금 백주(白紬)로 형전과 청금띠를 만들게 하여 두르고 떠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장에 죽어 썩은 시체더미 속에서 식별하기 좋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결심하고 전쟁에 임했다. 한말에 와서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항거하다가 아들과 함께 살해당한 남규(南珪)와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으로 민비와 함께 살해된 경직(耕稙)이 유명했고, 근대한국의 정신적인 지주로 일컬어진 월남(月南) 상재(商在)는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에 신명을 바쳐 학문과 충절의 전통가문인 한산 이씨를 더욱 빛냈다 |
한산이씨 |
조선 중기 청주 8대姓 성장… 학자 대거배출
목은 직계 8세손 이주이도 수름재에 정착
청주에서 진천방면으로 가다보면 주성동 고개 갈림길에 긴 돌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수름재라는 글씨가 박힌 고갯마루 표지석이다. 지금은 잘 닦인 도로로 고개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개발이 되었지만, 이곳은 한때 수름재 이씨라고 불리울 정도로 집성촌을 이룬 한산 이씨의 세거지다.
조선중기 청주에 입향해 청주 8대성으로 성장한 이들은 유교적 가풍 속에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며 선비집안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수름재에 얽힌 일화로 청주시 향토문화전자대전을 살펴보면 "입향시조인 이도가 아들 이덕흡, 조카 이제와 함께 이 고갯길에서 참살당한 후 한산이씨의 원수의 고개라는 뜻의 수리재(讐李재), 또는 슬름재 또는 술재로 변환되었다 하며, 술재를 한자로 주성이라 표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주에 뿌리내리기까지 문중의 숱한 이야기들이 고갯마루처럼 이어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서천 한산마을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이들이 청주로의 입향이 만만치 않았던 이유에는 조선 개국과 관련이 깊다.
한산 이씨의 연원을 찾아보면 시조인 이윤경이 지방 토착세족으로 향직의 우두머리맡아 5대에 걸쳐 호장을 세습하며 명문의 기틀을 다진다. 그리고 중시조 이곡은 문신인 목은 이색의 아버지로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주요 요직을 맡아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약하는 등 가문의 번성을 주도한다.
하지만 고려말 국운의 혼란기 속에서 맞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한산 이씨가 중앙무대를 접고 낙향하는 계기가 된다. 고려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조선을 세울 때 절친했던 목은 이색은 고려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뜻을 꺾지 않는다.
회유와 압박에도 이색의 마음에 흔들림이 없자 태조는 결국 유배와 옥살이로 남은 생을 살게한다. 선조에 대한 탄압에 염증을 느낀 후손들은 낙향해 재야에 묻혀 선비로 살아간다. 이때 목은의 직계 8세손 이주와 이도가 1576년 청주 수름재로 낙향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룬다. 청주 낙향 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며 창의한 의병장 이봉해와 독립운동가로 구국의 의지를 불태운 이상재 등의 족적은 한산 이씨가 지역에 뿌리내리며 보여준 의로운 행동으로 지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집성촌으로는 주성동과 주중동, 내수읍 구성리와 묵방리 등이며, 구성리에는 목은 영당을 모신 주성영당이 있다. 숙종 1714년에 세워진 주성영당은 주성강당이 충청북도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유적의 역사와 함께 문중의 정신을 이어가는 현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 인물 & 인물
불사이군 뜻 꺾지 않은 '이개'
훈민정음 창제 참여… 집현전 학자로 절의 지킨 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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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은 이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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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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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중앙공원에는 천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가 있다. 뿌리가 오리발처럼 생겼다 해서 압각수로 불리는 은행나무다. 나무 앞에는 압각수비가 있는데 이 비문에는 "고려말 공양왕 때 목은 이색, 이숭인, 권근, 이종학 등 충신 여러분을 아무 죄도 없이 청주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갑자기 대홍수가 일어나 옥사가 유실되어 이분들은 이 나무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는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의 기록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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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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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이씨의 목은 이색과 관련된 글이다.
고려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은 청주에 기거하지 않았지만, 청주옥과 압각수와 인연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중국에서도 목은 이색 연구회와 세미나가 열릴 정도로 사상적 깊이가 깊었던 그는 용정동 신항서원에 봉안되어 후대에도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써 빛낸 인물이다.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했으며, 성삼문과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이개는 집현전 학자로, 절의를 지킨 선현으로 기억되고 있다. 토정비결의 작가 이지함은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다 하여 '토정'이란 호가 붙었다고 한다.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토정이 1년 신수를 봐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지었다는 토정비결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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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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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 이상재를 들 수 있다. 그는 신간회 활동과 신사유람단 등 일제강점기에 놓인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또 청주근60년사화에는 이명구 전 충북도지사이자 신명의원장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청주 최초로 의원을 개업한 그는 참된 인술을 베풀었으며, 1950년에는 충북도지사로 취임 2년간 재임했다.
대대로 학자출신이 많았던 가문답게 현재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학계에 두루 포진되어 있다. 이택원 전 충북대총장을 비롯해 이명복 전 서울대의학과장, 이충구 충북대 학과장, 이동규 충북대 공과대 교수, 이재복 경의대 한의대 박사, 이규원 인하공대 교수, 이해원 충북대 물리학교수, 이재준 충북대 농학과 교수, 이동복 전 청주대사회학과 교수 등이 있다.
또한 이종원 충북농촌진흥청 농학박사, 이혁구 전 제천부시장, 이현원 KBS 사업국장, 이대원 전 문화방송 이사장, 이명복 청주 시청과장, 이완복 청주시의원, 이양남 전 단재교육원장, 이봉구 청주대종회장, 이영복 대한노인회청주지회이사, 이성복 육군소장 등 각계에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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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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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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