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제
[咸豊帝 ]
청나라 제9대 황제(재위 1850~1861). 태평천국군의 난징 점령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하는 만주인 관료를 물리치고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톈진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 ·프랑스군이 베이징에 칩입하자 러허[熱河]의 이궁으로 피난, 병사하였다.
출생-사망 | 1831.7.17 ~ 186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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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왕조 | 중국 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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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1850년 ~ 18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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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시호 현황제(顯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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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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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현황제(顯皇帝). 묘호 문종(文宗). 도광제(道光帝)의 제4자. 즉위 직후에 홍수전(洪秀全)이 광시[廣西]에서 거병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선언하였고, 이어 염당(捻黨)의 반란, 나아가 북방에서 러시아의 진출이 시작되는 등 나라 안팎으로 다사다난하였다. 1853년 태평천국군이 난징[南京]을 점령하였으나, 만주인 관료는 당파싸움 등 이기적 행위에 몰두하여 무력 또한 약체화되었다. 이에 대영단으로 만주인을 물리치고 증국번(曾國藩)·쭤충탕[左宗棠] 등의 젊은 한인관료를 기용하는 등 치정에 애썼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 중인 1856년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무력진출을 개시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었는데, 다시 1860년에는 동 조약의 비준문제로 분쟁이 일어 영국·프랑스군이 베이징[北京]에 칩입하자 러허[熱河]의 이궁으로 피난, 다음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제(帝)를 대신하여 동생 공친왕(恭親王)이 교섭을 맡아 톈진조약의 비준·교환과 베이징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때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개설되어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의 공사가 베이징에 상주하게 되면서, 구미 세력의 중국 진출이 강화되었다.
함풍(咸豊)은 청나라 문종(文宗)의 연호로 함풍년간은 태평천국운동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함풍원년 (1851년)에 다른 이전의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함풍통보” 엽전을 발행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편전쟁과 열강의 침탈 및 태평천국운동의 발생으로 주전국들은 이미 정상적으로 주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일부 주전국들은 실제적으로는 기능을 멈춘 곳도 많았다. 또한 일단, 주전명령이 내려지자 원료를 빼돌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하여 함풍통보는 정확하고 정교하게 발행된 것이 적고, 난잡하거나 조잡한 것들이 매우 많다.
또한 대부분 규정보다 크기가 작고 철전, 납전 등 동을 대신한 재료로 만들어 진 것도 많다.
앞면에 해서체로 함풍통보라 쓰여 잇고 뒷면에는 뒷면에는 만주문자로 주전국명이 기록되어 있다.
寶源, 寶泉, 寶河, 寶德, 寶東, 寶伊, 寶濟, 寶晋, 寶陝, 包鞏, 寶蘇, 寶浙, 寶昌, 寶福, 寶台, 寶武, 寶南, 寶廣, 寶桂, 寶川, 寶雲, 阿克蘇,
寶黔 등 24개 주전국명이 있으며, 그 중 寶臺, 寶德, 阿克蘇 등은 매우 희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