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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白基琓)과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 비화(祕話)
백기완(白基琓)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는 지금도 광주를 학살하고 있는 거야! 민주주의를 학살하는 거라고!” 1980년 광주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 논란이 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곡은 이명박 정부 2년차인 지난 2009년부터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공식 기념식에서 부르지 못하게 했다. 박근혜 정부가 광주 5·18 기념식 금지곡으로 묶어버린 것이다. 2016년 05월 12일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오마이뉴스> 10만인 클럽 회원이기도 한 백기완(白基琓) 소장을 만났다.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시 '묏비나리'를 지었던 때, 1980년을 되짚다가 눈시울까지 붉혔다. 유신 잔재를 청산하라고 거리에서 외치다가 1980년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보안사 (국군 기무 사령부) 서빙고에서 고문을 받을 때였다. "그건 내가 입으로 쓴 시야. 입으로 웅얼대면서 감옥 천장에 눈으로 쓴 시야!" '묏비나리' 시(詩)에서 ‘비나리’는 '빈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손을 모아서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 쯤의 의미가 있다.
● 감옥에서 웅얼거리며 감옥 천장에 '묏비나리' 시(詩)를 새겼다.
서울 보안사 (국군 기무 사령부) 서빙고에서 심한 고문으로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었단다. 그곳이 이불 껍데기나 무명실이 스쳐도 아플 정도였다고 했다. "죽음이 심장을 짓누르고 있던 때"였다. 고문실 천장에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툭툭 치고 지나갔단다. 때로는 축구하듯이 배를 발로 세게 걷어찼는데, 그때마다 목으로, 코로, 똥물이 흘러나왔다. 찬물을 끼얹어서 기절에서 깨어나면, 노란 액체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그걸 입으로 핥아 먹으라는 거야. 내 똥물을 혀로 핥아서 청소하라는 거야!" 1980년 5·18 광주에서 시민들이 학살 당할 때, 백기완 소장은 감옥에서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돌려라! 나는 죽지만, 산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 라고 한 것이다. "감옥에서 꼼짝없이 드러누운 채, 입으로 웅얼거리며, 감옥 천장에 새길 수밖에 없던 시(詩)", 그게 '묏비나리'이다.
● 감옥에서 5·18 광주 소식을 들었나요?
"광주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것 정도 밖에 몰랐어. 자세한 것은 몰랐지. 교도관들도 내용을 아니까, 비밀통신이라고 해서, 우리 도둑놈들끼리 연락하는 방법이 있어. 왜정(倭政) 때 독립군들이 했듯이. 그런 방법으로 5·18 광주 소식을 그렇게 들었지."
● 5·18 광주 정신이 '묏비나리'에 녹아있다고 봐야겠네요?
"그럼, 시대의 아픔이 녹아 있지!"
● 시(詩) 일부를 비밀 유인물로 퍼트린 '묏비나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1980년 그 때 '묏비나리' 몇 구절을 입으로 웅얼대다가 잊어 버리기도 해서, 깨알만한 글씨로 종이에 쓰기 시작했단다. 그것을 숨기려고, 시 몇 편을 적은 종이를 사타구니에 끼어놓고 지내다가 감옥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묏비나리'는 고문 현장과 감옥에서 완성된 시(詩)인 셈이다. 백기완 소장은 1980년 겨울쯤에 젊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그 시(詩)를 모아 '젊은 날'이라는 제목의 비매품 시집을 내려다가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서슬이 퍼런 때였다. '시를 발표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출판사가 만류했다. 그 대신, 시(詩) 일부를 비밀 유인물로 만들어서 돌렸다.
"그 뒤에 누군가가 내 시(詩) 구절을 따서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내 시(詩)가 맨날 싸우자는 건데, 뭔 노래를 만들어? 그냥 그런가 했지. 1982년 예장 기독교 청년들이 불러서 대구에 통일 강연을 갔다가 그 노래를 들었어. 2,000명이 들어가는 큰 교회에서 나를 소개한 뒤에 모두 일어나서 '산 자여 따르라!'를 부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1980년 전두환이 한참 까불 때인데, 그러니까."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백기완 소장의 '묏비나리'에서 따온 구절은 이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시(詩)는 한 번 쓰고 나면,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백기완 소장은 "내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사람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강기정 국회의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책을 쓸 때, '작사 백기완'이라고 적겠다고 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단다. "시(詩)는 그런 거야. 내가 만들었다고 한 적도 없어. 시(詩)는 한 번 쓰고 나면, 그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야! 그 때부터 여러 사람들의 것이야! 그건 민중의 것이야. 내 거라고 말할 수 없어."
●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첫 구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는 묏비나리와 일치하는데요, 어떤 심정으로 쓰셨나요?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도 초부터 '조상의 뼈다귀가 널려있는 산과 들, 메마른 땅에 목숨을 심자!' 라고 말하면서 나무 심기 운동을 했어. 그 때 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그거야! '사랑은 내 것이 아니야! 명예도 내 것이 아니야! 이름도 내 것이 아니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우리는 하나의 목숨이 되자!' 라고 말하고 다녔어. 내 입에서 늘 맴돌던 연설 구절의 하나야!"
● 마지막 구절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는 절규이자 외침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요?
"그 놈들이 내 똥물을 혓바닥으로 핥으라고 할 때, 죽는 순간까지 짓밟힌다는 생각을 했어. 나는 죽지만, 산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는 이야기야!"
●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을 앞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못 부른다,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심경이신지요?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만든 노래야. 박근혜 대통령이 부르지 못 하게 할 수는 없어. 박근혜는 지금도 5·18 광주를 학살하고 있는 거야! 민주주의를 학살하고, 역사를 학살하고, 정의를 학살하는 거야! 세계적 타살이 계속되는 거야!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지? 독재자 스스로 물러나든지, 안 물러나면, 끌어내려야 해."
●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이 노래는 죽지 않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표적인 민중가요이자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다. 이 노래가 오는 2016년 05월 16일 국가보훈처가 발표할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 기념식 식순에 들어갈 수 있을까? 5·18을 정부 기념일로 제정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공식 기념식에서 불렀던 이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질 수 있을까? 공식 기념식장에서는 부를 수 없지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살아 숨쉬기 때문에 이 노래는 결코 죽지 않는다.
● 백기완 소장은 '묏비나리' 끝부분 ‘대지의 새싹’을 떠올렸다.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무처럼"
노래도 새싹 같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가 잠시 금지곡이 된다고 해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입을 틀어막는다고 해도, 민주주의를 짓밟은 치욕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귀를 틀어막는다고 해도, 광주 학살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봄이 되면, 언 땅을 이고, 새싹이 일어서듯 매년 5월이 되면, 이 노래도 불끈거리며 일어난다.
■ 백기완 선생의 외침,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이라 여겼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나긴 군사 독재 여정은 끝장났다. 10. 26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여러 사람에게 다양하게 기억된다. 감옥에서 만세를 부른 이도 있었고, 어젯밤까지 두들겨 패던 학생에게 설렁탕 먹이며, “세상 바뀌면, 잘해 줘!” 라고 잽싸게 태도를 바꾼 경찰도 있었다. 그러나, 유신(維新) 군사 정권의 주인공 박정희 대통령은 차디찬 주검으로 서울 동작동에 묻혔어도 박정희 유신(維新) 군사 정권 체제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이를 참아낼 수 없었던 이들은 일단의 거사(巨事)를 준비했다. 하지만, 전두환 비상 계엄 시국 아래에서 모든 집회와 시위는 금지되었다. 무장한 계엄군이 산지사방에 널린 마당에 집회 뒤에 무슨 일을 겪을지도 고민이었다. 애초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자체가 성사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결혼식이었다. “신랑 홍성엽,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하오니...” 라는 청첩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9년 11월 24일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린다’ 라는 문구가 주먹만하게 박혔다. 당연히 청첩장은 가짜였다. 신랑 홍성엽은 진짜였지만, 신부 ‘윤정민’은 애초에 그들의 꿈이었던 민주정치, 즉 민정(民政)을 비튼 가공의 인물이었다. 예식에서 울려 퍼진 것은 결혼 행진곡이 아니라 날카로운 구호와 비명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가 닥쳤다.
체포된 사람들은 상상 이상의 고통을 겪었다. 유신(維新) 군사 정권의 끝물은 매섭고 독했다. 그 가운데 최상급의 특별 대우(?)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백기완(白基琓)이었다. 황해도 출신의 이 강건한 사내는 젊었을 때부터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운 반골이었다. ‘농민 운동’ 대장이었던 그였다. 백기완은 한일(韓日) 회담(1951-1965)을 반대하는 1964년 06월 03일 육삼 항쟁 시위 때부터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박정희를 두고 ‘밀수 왕초’라고 쏘아붙였던 장준하(張俊河) 국회의원의 최측근이었다. 박정희 정권(1961-1979) 18년 내내 머리 들이밀고 싸웠던 그였다. 깡다구도 보통이 아니었고, 웬만한 깡패들은 고개도 못들 만큼 주먹도 묵직했다. 말라깽이들이 득시글거리던 시절 체중 80킬로그램이 넘는 거한의 싸움꾼이었다. 그 백기완이 ‘또’ 걸려들었다. 이번에 그를 맡은 것은 단골이었던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보안사 서빙고 고문실 ‘군바리’(보안사 고문자들을 지칭)들이었다. 원기왕성한 이 군바리들은 백기완의 육신부터 영혼까지 박살냈다. 대관절 사람을 어떤 식으로 고문하면 체중 82kg의 거한이 몇 달 사이에 40kg대의 미라로 쫄아들 수 있었을까? 그 고문을 퍼부은 사람들은 지금도 벼락 맞거나 차 사고에 으깨지지 않고 살아 있을까? 백기완(白基琓)은 정신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피폐해졌다. 몸이 그 정도로 쫄아드는데 버틸 정신이 어디 있으랴! 전두환 계엄 당국도 이러다가는 정말 송장 치우겠다 싶었던지 병보석으로 풀어 줄 정도였다.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몸 안의 물. 기름. 피가 바작바작 말라가던 시간이었다.
그 참혹한 지옥의 시기에 백기완(白基琓)이 끝내 정신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의 시(詩)였다. 그리고, 그에게 동앗줄이 되고, 통풍구가 되어 주었던 것도 그의 시(詩)였다. “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백열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 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묏비나리’ 시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묏비나리’라는 시(詩)는 출옥 후, 요양 중에도 계속 백기완의 입에서 맴돌았고, 결국 그의 손에 의해 글로 쓰여져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 싯귀들의 몇 구절을 따고 다듬어 가락을 입힌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생사를 가로지르는 전기 찜질을 당하고, 매질로 그 몸을 깎아 먹으면서도 혀끝에서 놓지 않았던 시(詩)는 광주라는 또 하나의 어둠 같은 지옥에서 불타올랐던 ‘빛의 결혼식’ (당시 노래극 테이프 제목) 축가이자 송가, 그리고 투쟁가로 다시 세롭게 태어났다.
그 테이프 노래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은 테이프를 알몸에 휘감고 속옷을 걸쳤고, 신발 뒤축에 숨겨 다른 곳으로 전파했다. 콩나물 대가리로만 악보를 보는 음치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음을 짚었다. 딴다다다다디 딴 딴 딴다다단 따다단. 그렇게 노래가 어둠을 뚫는 빛줄기로 전국에 퍼지는 동안, 백기완은 다시 일어섰다. 거동도 전과 같지 않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는 하얗게 새어 버렸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슴을 움켜쥐는 유리 심장이 됐다. 하지만, 그의 기개는 여전히 멀쩡했고, 전두환이라는 절대 악(惡) 앞에서 더 높게 솟구쳐 올랐다. 부르는 곳은 어디라도 갔고, 필요한 곳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1983년 02월 대구에서 열린 기독교 청년 모임에서 백기완은 그 자신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였다. 그가 등장했을 때, 모세의 지팡이를 맞은 홍해 바다처럼 갈라선 청년들이 팔을 힘차게 뻗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백기완이 필사적으로 짓고 읊조리고 비명처럼 내질렀던 묏비나리를 원형으로 만든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이미 백기완의 노래가 아니라 광주의 외침이 되었고, 독재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의 함성이 되어 버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백기완은 펑펑 울었다. 감격스러워서만은 아니었다. 한일(韓日) 회담(1951-1965)을 반대하는 1964년 06월 03일 육삼 항쟁 시위를 비롯하여, 유신 반대, 긴급 조치 반대, 계엄 반대 그 모든 압제에 대한 반대로 일관했던 시절을 겪으면서, 자신을 팔아치운 사람도 있었고, 깃발을 떠나 버린 사람도 여럿이었다. 온몸이 망가져 숨만 붙은 병자가 되어 다시 1980년대 대머리 전두환 세상을 보았을 때,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 노래를 듣거나 묏비나리 시를 읊을 때, 그는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감옥 안 독방에서 춥고, 못 먹고, 얻어맞고. 그런 것들이 기억나서.”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닐 뿐 아니라 수백 명의 우렁찬 목소리가 노래로 그를 호명하고 있었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견딜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쥐어짜듯 태어난 시(詩)였다. 돌 매단 실낱처럼 위태로웠으나 끝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게 생명을 잡아맨 노래였다. 그 노래가 용기의 상징으로 솟았고, 다짐의 폭포를 이루어 그 물살에 자신조차 휩쓸리는 감동을 우리 역사 속에서 백기완 말고 누가 경험했을까? 봇물 터지는 울음 속에서 그 노래는 천사처럼 날개를 폈다. 그리고, 용기와 희망과 함께 그 노래는 어두운 역사의 허공을 날았다. 그는 노래를 만들었고, 노래는 다시 그가 되었다. 노래가 불리는 곳은 항상 그가 있음직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면, 반드시 노래해도 좋을 만큼 그 노래는 출렁였다. 마지막 구절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구절이 애절하다. 거꾸로 매달려 그 시(詩)를 읊조릴 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이렇게 속절없이 죽는구나! 나는 이렇게 앞서 가지만, 산 사람들은 살아서 싸워 주기를 핏덩이 머금고 기원했을 것이다. 이후, 이 가사는 사람들의 입 속에서 산 자들의 투쟁 의지로 부활(復活)했다. 살았지만 죽은 자들, 숨을 쉬지만 겁 속에 묻힌 자들, 그들을 향한 외침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노래는 좁은 한국땅을 넘어 용기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의 노래로서 세계를 향해 날고 있다. 2021년 02월 15일, 백기완(白基琓)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굽이굽이 험준했던 한반도의 항쟁 역사와 함께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나서 ‘임’이 되었다. 이제, 그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이렇게 노래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임을 위한 행진곡' : 백기완(白基琓) 선생의 '묏비나리' 시(詩)에서 가사를 따와서 소설가 황석영(黃晳暎)이 개사하였고, 광주 지역 문화 운동가인 김종률씨가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광주 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 도청을 사수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윤상원과 ‘들불 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겨울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때,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 형식으로 작곡되어 처음 선보였다. 이 둘은 1982년 5.18 묘역에 나란히 합장되어 완전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노래는 ‘넋풀이, 빛의 결혼식’이란 음반에 수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훗날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 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면서 민중의 깨우침을 위한 서시(序詩)로 널리 애창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광주 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낸 최초의 작품이라 하겠다. 광주 항쟁 직후인 1981년에 광주 항쟁은 '항쟁'으로서보다는 '대학살'로 다가왔다. 1980년 05월 18일 광주 학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죽음에 충격받았고,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을 겪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괴감, 죄의식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패배감과 자괴감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까지 진보적 지식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일찍이 그 열패감과 자괴감을 올바르게 극복해냄으로써 1980년대 새로운 노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묏비나리' 시(詩)에서 ‘비나리’는 '빈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손을 모아서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 쯤의 의미가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 가사의 원작자인 백기완은 1998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 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 라며 저작권 불행사 입장을 밝혔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가 한심한 이유로 잠시 금지곡 규제를 받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치욕의 역사는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 백기완(白基琓 1932-2021) : 1933년 황해도 은률군 출생이다. 해방 이후 월남했다. 한일(韓日) 회담(1951-1965)을 반대하는 1964년 06월 03일 육삼 항쟁 시위를 비롯하여 통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박정희 3선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1970년대 제3공화국 민주화운동에서 남다른 역할을 했다.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 명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최초로 구속되어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 형을 받았다. 복역 중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YWCA 결혼 사건'을 주도했고, 그 위원장을 맡아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80년 4월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복역 중,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민주화운동 외에도 1972년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1980년 해체될 때까지 소장직을 맡으면서 ‘백범어록’ 등을 출간했다.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직을 맡아 자신의 저작과 통일 및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책자들을 발간하고 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선거 2일 전 후보를 사퇴했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9년 계간잡지 ‘노나메기’를 창간했다. ‘노나메기’는 ‘나누어 먹인다’ 라는 뜻이다. 2000년대 이후로도 시민사회 운동에 동참해왔으며,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임명되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등의 저서를 썼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의 시(詩) ‘묏비나리’의 일부 구절을 황석영이 차용하고, 김종률이 곡을 붙여 만든 곡이다. 이후,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 다음은 '묏비나리' 시(詩) 전문(全文)이다.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 떼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 떼기에 언 땅을 들어 올리고
또 한발 떼기에 맨바닥을 들어 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 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 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 몸만
맴돌자 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저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려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음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 타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데나 내다 버려지려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 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라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정치꾼들은 모두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 터지는 소리 쩡쩡
그대 등때기 가르는 소리가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내려치는
주인 놈의 모진 매질 소리라!
천추의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찍 소리라
그 소리 장단에 맞춰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 그려
얼은 땅, 돌부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찍을 나꿔채
그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들이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을 몽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으고
그것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것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수셔 넣고
이런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 놈의 짓인 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 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바로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 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 따위는 여보게 그대 몸에
한 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 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고
부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물이 오르듯
민중의 생기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목지 몸짓이지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저 싸우는 현장의 장단 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뻘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새내기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한 춤꾼은 굽이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비록 저 이름 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껴,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 자들의 거짓된 껍질을 털어라
이 세상 껍질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져도 이기고 있는 노동자의 아우성
오, 우리 굿의 절정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몸으로 들이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 위에
희대의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무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1980년 12월. 백기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