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6. 희대의 쾌락주의자 아멘호테프 3세
1887년 텔 알 아마르나(현재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와 룩소르(고대 지명은 테베) 중간쯤에 위치함), 한 아낙네가 농사일을 하던 중 흙 속에서 82개의 점토판을 발견한다. 점토판은 주먹크기 정도였는데 매끄러운 표면에는 작은 점들이 깨알같이 찍혀 있었다. 원래가 까막눈인 그녀는 마을 이장에게 그것들을 보였는데 그도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던 지라 카이로로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카이로 골동품점은 이 점토판이 모조품이라 결론내렸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월리스 버지라는 영국인 고고학자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통용되던 설형문자군.......뭐, 그 지역에선 이런 점토판들이 종종 발견되니까.......내용을 읽어볼까? 이집트 속국 왕 니무리아가 상하이집트 국왕 아멘호테프 3세께~ 이럴 수가!!’
그가 내린 감정은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BC 14세기 중동 외교 언어였던 아카드어로 쓰여진, 이집트의 입장을 나타내는 “보기 드문” 외교문서였다. 여기서 “보기 드문”에 주목해보자. 월리스 버지의 말마따나 사실 이전에도 아카드어로 적힌 점토판 외교문서들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메소포타미아 측의 생각만 담고 있던 지라 당시 중동의 정치 외교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 국왕의 뜻이 반영된 이 점토판의 발견으로 이제는 이들 국가간의 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헐값에 이 점토판들을 샀고 즉시 이집트를 떴다. 그리고 그것들을 영국박물관에 소장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로 유물국은 뒤늦게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땅을 치며 비통해 했다 한다.
현재 이 점토판 유물은 영국박물관,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멘호테프 3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빼어난 외교술로 그의 치세 신왕국은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노라 호언장담하는 학자들이 있는가하면, 통치 38년간 주색잡기로 일관하며 조상들이 축적해 온 부를 탕진했다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 것인가?!한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후자의 평을 따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다음편에서 그의 아들 아케나텐을 한결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그곳은 금이 먼지처럼 흔하다.”
"이집트 누비아의 금을 얻기 위해 각국의 사신들은 파라오께 조공을 바쳤다."
-고대 중동의 기록-
아멘호테프 3세는(아멘호테프는 아문신이 만족한다는 뜻) 제 18왕조 9대 왕이었다. 위대한 투트모시스 3세의 계승자 치고는 너무나 평범한 삶을 살았던 아멘호테프 2세가 그의 할아버지였으며, 기자의 스핑크스 앞에 꿈의 비문을 남긴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치적이 없는 투트모시스 4세가 그의 아버지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에게 비범함을 전수할 능력이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은 그에게 막대한 부를 물려주었다. BC 14세기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이었다. 그는 평범했으나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가 처음부터 나태 했던 건 아니다. 소년시절 그는 승마와 사냥을 좋아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재위 5년째 되던 해에는 누비아로 원정도 나갔다. 그러나 이후로는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았고 유흥만 좇았다. 낮에는 궁정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밤에는 호화로운 연회장에서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는 어찌나 여자를 좋아했던지, 그의 하렘에는 수백 명의 미녀들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 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외국 여인들이었는데, 조부 아멘호테프 2세의 이국취향을 빼닮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미탄니 여인이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일 수도 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는 미탄니 국왕 알타타마의 딸 무테무이아였다.)
어찌되었든 그의 주변엔 늘 예쁜 여인들이 많았다하니 그의 아내 티예 왕비의 심정은 어땠을지........아쉽게도 왕비의 질투, 히스테리 그리고 부부싸움에 관한 일체의 기록이 없으니 이후의 이야기는 순전히 우리의 상상과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다. 참고로 당신의 상상을 돕기 위해 역사적 힌트 두 가지를 제시하겠다. 하나는 신왕국 시대 여왕들의 막강한 권한(그녀들은 아문신의 여제사장 직을 겸하고 있었다.)이고, 다른 하나는 티예 흉상의 강인한 모습이다.
“티예가 왕비가 되었다. 티예의 아버지는 <유이야>이고 어머니는 <투야>였다.”
-스카라베(풍뎅이 과에 속하는 쇠똥구리 모양의 작은 조각물)에 적힌 기록-
왕비 티예가 등장한 김에, 그녀 얘기를 좀 더 해 보자.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처럼 그녀도 미탄니 출신이었다. 그녀 일가가 언제부터 이집트에 정착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일설에는 그녀의 부모는 아멘호테프 3세의 어머니가 이집트로 시집 올 무렵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왔다지만 확실하진 않다. 어쨌든 이 평민의 딸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아멘호테프 3세의 정비가 된다.
자, 이쯤해서 고대 이집트 연재를 꼼꼼히 정독해 온 독자라면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평민 티티(티예)와 결혼한 아멘호테프 3세는 어떻게 파라오가 될 수 있었을까? (이집트 왕실에서 왕위 계승권은 왕의 적자가 아닌 제 1 왕녀에게 있다.) 이 시기 이집트의 이웃나라는 미탄니를 비롯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였다. 이집트는 이 호전적인 나라들의 협공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과의 관계 유지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왕실 법도에 위배되지만 미탄니 여인 티예가 제 1정비가 되었고 왕가의 여인이 제 2정비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왕비 간택에는 어머니 무테무이아의 입김도 반영되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녀는 동족 출신 미탄니 소녀 티예를 총애했고 엄청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여담이지만 아멘호테프 3세는 그의 못생긴 아내 티예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존중하긴 했나보다. 후에 그는 여가를 위한 별장 말카타 궁을 테베 서안에 짓는데, 이때 빌케트 하브라라는 뱃놀이용 못을 조성한다. 야사에 따르면 티예가 이 거대한 못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자 왕은 바로 다음날로 이 못을 완성시켜 왕비에게 바쳤다고 한다.
다시금 아멘호테프 3세에게로 돌아가자.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향락주의자였다. 그가 전쟁이 아닌 외교를 택한 건 따지고보면 오롯이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조 아흐모세부터 그의 아버지 투트모시스 4세까지 8대에 걸쳐 축적된 그 어마어마한 황금이 매번의 호화로운 선상 파티와 궁정 파티로 탕진되었다. 보다 못한 대신들이 잠시라도 정사(政事)를 보라고 충언하면 그는 시끄럽다며 화를 냈고 말카타 궁에서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이렇게 한 나라의 국왕이란 자가 자고 먹고 놀기만 하는데도, 어떻게 38년간 국정이 별 탈 없이 돌아갈 수 있었을까? 다행히 그의 치세 유능한 관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집트는 그럭저럭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아멘호테프 3세 시절 가장 뛰어난 재상을 꼽자면 이집트 4대 현인 중 한사람으로 불리는 하프의 아들 아멘호테프를 들 수 있겠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 4대 현인은 다음과 같다. 제 3왕조 2대 제세르의 재상 임호테프, 제 4왕조 2대 쿠푸의 재상 헤몬, 제 18왕조 9대 아멘호테프 3세의 재상 하프의 아들 아멘호테프, 제 19왕조 3대 람세스 2세의 4번째 왕자 케무아세트이다.)
아멘호테프 3세는 말년에 쾌락에 더더욱 빠져 아예 정치를 내팽개쳤다. 이때부터 왕비 티예는 게으른 남편을 대신하여 국사를 돌보게 되고 그에 따라 그녀의 지위도 격상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본래 마부 출신이던 그의 아버지에게 ‘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어머니를 여신관장으로 임명했다. 그녀의 친오빠 아이도 이때 고급관료로 등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린다. (아이는 아케나텐 시대엔 총리가 되고 투탕카멘 시대엔 왕의 후견인이 되며 투탕카멘 사후엔 파라오가 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신앙심의 변화도 이 다음장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니만큼 여기서 집고 넘어갈까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집권 초기는 스카라베에 적혀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 시절 그는 아문라의 사제들과 비교적 사이가 좋았던 듯하다. 그는 카르나크 신전에 웅장한 다주식 중앙홀을 증축했고 제 3탑문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룩소르 신전을 개보수 및 증축했고 신전에 풍성한 재물도 꼬박꼬박 바치며 신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그는 아문라 신이 수호하는 테베를 떠나 대부분의 시간을 말카타 궁에서 보냈는데 이는 아문라 사제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였다. 결국 아멘호테프 3세 말년 그와 아문라와의 관계는 완전히 깨지게 된다.
그의 왕성한 성욕은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했다. 나이 50즈음 그는 미탄니 출신의 젊은 계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고작 15살이었다. 그녀는 미탄니 제일의 미녀였다. 그러한 그녀를 얻기 위해서 그는 6년 동안 미탄니 국왕을 졸랐었다. 마침내 그의 지성(至誠)에 감복한(?) 미탄니 국왕은 막대한 황금을 받고는 그녀를 내주었다. 드디어 아름다운 소녀가 온다!! 왕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부랴부랴 마중 나갔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 젊고 아름다워서 보는 이들마다 그녀를 네페르티티(찾아온 미녀)라고 불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평생 산해진미를 과하게 즐긴 나머지 끔찍한 치조농루(이가 흔들리고 잇몸에서 고름이 나오는 병)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BC 1352년 제 1정비 티예와 귀여운 계비 네페르티티가 지켜보는 가운데 탐미의 왕 아멘호테프 3세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홀로 남겨진 네페르티티는 이때 겨우 17살이었다.
다음 시간엔 유일신 아텐신앙 신봉자 제18왕조 10대 파라오 아케나텐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첫댓글 지나치지않는다는게
참 힘든 일인가봐요.
특히,위정자들에겐~^^
재밌게 읽고 있고,
후속편 기대됩니다~^^
아멘호테프 3세, 아케나텐(아멘호테프 4세 )
그들 부자관계 완전 흥미롭죠
둘다 똘끼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