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은 낡은 관습에 저항하는 새로운 정보여야 하는가
동시대 사진의 저항·감각·상상력에 관한 고찰
[1] 질문의 정확한 의미
“사진에는 새로운 정보가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사진 속에 낯선 대상이나 많은 사실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존의 낡은 관습과 신화적 의미를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 굳어진 지각을 흔들고 잊힌 상상력과 감각을 다시 움직이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건부로 긍정할 수 있다.
모든 사진이 새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증명사진·보도사진·가족사진·과학사진은 정확한 기록과 전달을 위해 기존의 형식을 반복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예술이 언제나 사회적 관습에 저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에는 기록·기억·애도·돌봄·놀이·아름다움·공동체 형성의 기능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동시대 예술로 제시하면서 관객의 지각과 사고를 변화시키려는 사진이라면, 기존의 이미지와 의미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익숙한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하는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2]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가
인간은 대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보지 않는다. 사람은 언어, 교육, 미디어, 종교, 성별, 계급, 국가, 사진의 관습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학습한다.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① 일몰과 꽃은 아름답다.
② 폐허와 흑백사진은 쓸쓸하다.
③ 웃는 가족은 행복하다.
④ 낮은 각도로 찍은 사람은 강해 보인다.
⑤ 화려한 도시 야경은 발전을 의미한다.
⑥ 초점이 정확하고 구도가 안정된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이다.
이러한 규칙을 공통 코드라고 한다. 공통 코드는 사진을 쉽게 이해하게 하지만 반복될수록 생각과 감각을 자동화한다. 관객은 사진을 오래 바라보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이름과 의미로 분류한다.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는 이러한 상태를 지각의 ‘자동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술의 역할이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만들어 감각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술은 새로운 사물을 반드시 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물을 다시 보게 해야 한다.
(출처: Viktor Shklovsky, 「Art as Technique」)
https://www.paradise.caltech.edu/ist4/lectures/Viktor_Sklovski_Art_as_Technique.pdf
[3] ‘잃어버린 본연의 감각’은 무엇인가
예술이 잃어버린 감각을 깨운다는 표현은 설득력이 있지만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인간에게 사회와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본래의 감각이 따로 존재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지각은 처음부터 몸, 언어, 기억, 문화와 함께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이 해야 할 일은 문명 이전의 순수한 감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생활과 이미지에 의해 자동화된 지각을 중단시키고, 대상을 다시 느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감각’은 완전히 사라진 감각이 아니라 사용되지 않아 둔화된 감각을 뜻한다. ‘잃어버린 상상력’도 본래의 상상력이 소멸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이미지와 해석에 의존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능력이 약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4] 바르트의 신화론과 사진의 저항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게 신화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신화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가치와 질서를 마치 원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의미작용이다.
광고사진에서 고급 승용차와 성공한 남성이 계속 결합되면 소비와 성공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보인다. 가족사진에서 부모와 자녀가 가지런히 서서 웃는 모습이 반복되면 그것이 정상적인 가족의 본래 모습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르트는 신화가 ‘역사를 자연으로 바꾼다’고 설명한다. 사진은 현실의 흔적처럼 보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관습과 권력을 자연스럽게 위장하는 데 특히 강한 힘을 발휘한다.
동시대 사진의 비판적 역할은 이 자연화를 깨뜨리는 데 있다. 사진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① 누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재현되는가.
② 어떤 몸이 아름다운 몸으로 인정되는가.
③ 어떤 가족이 정상가족으로 제시되는가.
④ 누구의 노동과 고통은 보이지 않는가.
⑤ 어떤 풍경이 발전이고 어떤 풍경이 낙후라고 불리는가.
이때 사진의 새로운 정보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믿었던 이미지가 사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신화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출처: Roland Barthes, 『Mythologies』 중 「Myth Today」)
https://www.uv.es/~fores/programa/barthes_myth.html
[5]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단일적 사진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으로 구분했다.
스투디움은 관객이 문화적 지식과 공통 코드를 통해 사진을 이해하는 영역이다. 전쟁사진을 보고 전쟁의 비극을 이해하고, 선거사진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읽으며, 가족사진에서 가족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스투디움이다.
스투디움은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관객은 사진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진이 스투디움에만 머물면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데 그칠 수 있다.
바르트는 현실을 하나의 분명한 의미로 강조하면서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나 흔들림을 허용하지 않는 사진을 ‘단일적 사진(unary photograph)’이라고 불렀다. 단일적 사진은 강하게 외칠 수는 있지만 관객을 예기치 않게 찌르지는 못한다.
전형적인 보도사진이 ‘전쟁은 비극이다’라는 의미를 모든 요소로 강조하거나, 광고사진이 ‘이 제품을 소유하면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조직한다면 관객은 의미를 즉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이해는 기존의 생각을 확인할 뿐 새로운 감각과 질문을 만들지 못할 수 있다.
바르트에게 플루서와 동일한 ‘잉여 사진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드화된 스투디움만 반복하며 하나의 의미로 완결되는 단일적 사진은 플루서의 잉여적 사진과 가까운 성격을 가진다.
[6] 푼크툼은 관습을 깨는 새로운 정보인가
푼크툼은 스투디움의 질서 속에서 특정 관객을 찌르고 상처 내는 우연한 세부이다. 낡은 신발, 어색하게 놓인 손, 구겨진 옷깃, 배경에 우연히 들어온 사람이 관객의 개인적인 기억을 깨울 수 있다.
푼크툼은 사진가가 의도적으로 넣은 새로운 메시지와 다르다. 사진 안에 이미 존재하던 작은 세부가 관객의 기억과 만나면서 새롭게 작용하는 사건이다. 같은 세부가 다른 관객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관습을 깨기 위해 무조건 기괴한 장면이나 충격적인 대상을 넣는다고 푼크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제작된 충격은 ‘충격을 주는 예술사진’이라는 또 다른 코드가 될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은 사진의 새로움이 새로운 사물의 양이 아니라 사진·시간·세부·관객 사이에서 생기는 예측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처: Roland Barthes, 『Camera Lucida』 개념 해설)
https://csmt.uchicago.edu/annotations/barthescamera.htm
[7] 플루서의 잉여적 사진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중복적 사진(redundant photograph)’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했다. 한국어로는 잉여적 사진 또는 반복적 사진으로 번역된다.
플루서에게 카메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프로그램을 가진 장치이다. 카메라에는 초점, 노출, 색, 렌즈, 구도, 자동보정 등 수많은 가능성이 미리 들어 있다. 사진 한 장은 그 프로그램 안의 가능성 하나를 실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사진을 반복한다. 관광지에서는 전망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서고, 인물은 카메라를 보며 웃고, 일몰은 붉고 화려하게 보정한다. 사진마다 사람과 장소는 다르지만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은 같다.
플루서는 이미 실현된 가능성을 반복하는 사진을 잉여적 사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진은 화면에 사람·건물·색·사건 등 많은 정보가 들어 있어도 장치와 사회가 이미 예상한 결과를 되풀이하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없다.
(출처: Vilém Flusser, 『Towards a Philosophy of Photography』)
https://ajourneythatwasnt.org/wp-content/uploads/2022/01/w04_selection-from-towards-a-philosophy-of-photography_flusser-1983.pdf
[8] 플루서의 사진가는 무엇에 저항하는가
플루서가 말하는 사진가는 세 가지 프로그램에 저항해야 한다.
1. 카메라의 기술적 프로그램
자동노출, 인물모드, 풍경모드처럼 카메라가 미리 권장하는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사진산업의 프로그램
더 선명하고 화려하며 높은 해상도의 사진이 더 좋은 사진이라는 산업적 기준이다.
3. 사회문화적 프로그램
여행지에서는 기념사진을 찍고, 결혼식에서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가난과 폐허는 흑백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관습이다.
이 프로그램을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카메라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치가 원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능인(functionary)’이 될 수 있다.
플루서가 말하는 진정한 사진가는 카메라의 규칙을 이해하고 그 규칙에 맞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장치와 놀이하면서 장치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이미지를 발견한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는 희귀한 장소나 기이한 대상을 촬영하는 데 있지 않다. 희귀한 장소도 전형적인 방식으로 찍으면 잉여적이다. 반대로 매일 보는 아파트·주차장·출근길도 기존의 사진적 관습을 흔드는 방법으로 촬영하고 배열하면 정보적 사진이 될 수 있다.
[9] 새로움은 곧 새로운 스타일인가
플루서의 새로운 정보는 이상한 구도, 흔들림, 흐린 초점 같은 특정 스타일을 뜻하지 않는다.
흔들린 사진, 기울어진 구도, 무표정한 인물, 데드팬 풍경도 처음에는 기존 미학에 대한 저항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을 이유 없이 반복하면 그것 역시 새로운 관습이 된다.
새로운 형식은 만들어지는 순간 장치와 예술제도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어제의 저항은 오늘의 유행이 되고, 오늘의 유행은 내일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의 필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가에게 필요한 것은 한 번 새로운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방법이 다시 공식과 관습으로 굳어지고 있는지를 계속 의심하는 태도이다.
[10] 벤야민: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사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사진이 확대, 순간 포착, 연속촬영 등을 통해 인간의 눈이 의식하지 못했던 구조와 움직임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시각적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에게 사진의 새로움은 단순히 더 많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시각이 놓친 현실의 층위를 드러내어 기존의 지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낯선 화면만으로 사진의 비판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벤야민은 사진에 붙는 제목, 캡션, 배열과 정치적 사용을 중요하게 보았다. 같은 사진도 광고에 놓일 때와 역사적 증언 속에 놓일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는 사진 한 장 내부뿐 아니라 사진과 글, 사진과 사진, 사진과 사회적 현실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출처: Walter Benjamin, 「Little History of Photography」)
https://www.artforum.com/features/walter-benjamins-short-history-of-photography-209486/
(출처: Walter Benjamin, 「The Author as Producer」)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benjamin/1970/author-producer.htm
[11] 들뢰즈: 예술은 정보보다 저항에 가깝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예술가가 빈 화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화면은 광고, 사진, 기억, 상투적인 형상과 클리셰로 가득 차 있다. 창작은 빈 곳에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화면을 점령한 클리셰들과 싸우는 과정이다.
이 점은 사진이 낡은 관습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예술작품이 정보 전달의 수단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보는 사회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달하는 명령체계가 될 수 있다. 예술은 그 체계에 새로운 내용을 하나 더 보태기보다 체계의 정상적인 작동을 중단시키는 ‘저항의 행위’에 가깝다.
따라서 예술사진에서 말하는 ‘새로운 정보’는 엄밀한 통신 정보가 아니다. 기존의 지각과 사고가 자동으로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는 감각적·비판적 차이이다.
(출처: Gilles Deleuze, 「What Is the Creative Act?」)
https://deleuze.cla.purdue.edu/lecture/lecture-01-21/
(출처: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The Logic of Sensation』)
https://www.upress.umn.edu/9780816643424/francis-bacon/
[12] 랑시에르: 사진은 보이는 것의 질서를 바꾼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사회가 무엇을 볼 수 있고, 누가 말할 수 있으며, 무엇이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는지를 나누는 질서를 ‘감성의 분할’이라고 설명한다.
예술의 정치성은 정치적 주장을 직접 전달하는 데만 있지 않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장소를 보이게 하고, 하찮다고 여겨진 일상을 중요하게 제시하며, 소음으로 취급되던 목소리를 의미 있는 발언으로 들리게 하는 것도 정치적 작용이다.
이 관점에서 사진의 새로운 정보란 새로 발견된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가 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을 사진이 새로운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출처: Jacques Rancière, 『The Politics of Aesthetics』)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The_Politics_of_Aesthetics.html?id=k0juAAAAMAAJ
[13] 반복과 관습은 모두 제거해야 하는가
관습에 저항한다고 해서 모든 공통 코드를 제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코드가 완전히 사라지면 관객은 작품이 무엇과 대립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새로움은 기존 코드와 비교될 때만 인식된다. 인물사진의 관습이 있어야 뒤돌아선 인물의 의미가 생기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전통이 있어야 훼손된 산업풍경이 가진 비판성이 드러난다.
반복도 그 자체로 잉여는 아니다. 베른트와 힐라 베허(Bernd and Hilla Becher)는 비슷한 산업시설을 같은 거리와 구도로 반복 촬영했다. 한 장씩 보면 단조롭지만 여러 사진을 배열하면 시설들의 미세한 차이와 산업사회의 규격화, 사라지는 건축의 역사가 드러난다.
이 경우 반복은 관습의 무비판적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발견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반복의 유무가 아니라 반복이 무엇을 보이게 하는가이다.
[14] 동시대 사진의 새로운 정보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동시대 사진에서 새로운 정보는 여러 층위에서 발생한다.
1. 대상의 전환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 사람·사물·장소를 사진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2. 시점의 전환
기존의 권력적 시선과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3. 관계의 전환
익숙한 대상들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4. 맥락의 전환
기존 사진을 새로운 제목·배열·장소·역사적 문맥에 놓는 것이다.
5. 시간의 전환
과거의 평범한 사진을 현재의 기억과 상실 속에서 다시 읽게 하는 것이다.
6. 감각의 전환
무엇인지 즉시 알아보게 하기보다 색·표면·거리·흔들림·침묵을 먼저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7. 관객 위치의 전환
관객을 수동적인 해독자가 아니라 비교하고 상상하며 의미를 만드는 참여자로 바꾸는 것이다.
8. 제도의 전환
누가 사진가가 될 수 있고 무엇이 전시될 수 있는지에 관한 예술제도의 기준을 질문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새로운 정보는 화면에 들어 있는 대상의 수가 아니다. 익숙한 대상과 코드 사이에 이전에는 없었던 차이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15] 그렇다면 사진에는 반드시 새로운 정보가 있어야 하는가
모든 사진에 새로운 정보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진은 관습을 반복하면서도 기억과 관계를 보존한다. 기록사진과 과학사진은 정확하고 공통적인 형식을 통해 정보를 전달한다. 이러한 사진의 가치는 예술적 새로움과 다른 곳에 있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사진이 관객의 감각과 사고를 변화시키겠다고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차이가 필요하다. 기존의 아름다움, 구도, 주제, 사회적 신화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관객의 지각을 새롭게 깨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움만 있으면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기괴함, 충격, 기술적 효과는 잠시 시선을 끌 수 있지만 새로운 이해를 만들지 못하면 또 하나의 자극적 상품으로 끝난다.
따라서 동시대 사진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신기함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정보이다.
기존의 관습이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지 드러내고, 익숙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정보이다.
[16] 결론
사진은 반드시 세상에 없던 대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로서의 사진이라면 이미 수없이 반복된 대상을 다시 찍는 이유와 그 반복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코드가 사회적 신화를 자연스러운 현실로 위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투디움에만 머무르는 단일적 사진은 기존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지만 관객의 인식을 흔들지 못할 수 있다. 반면 푼크툼은 사진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세부와 시간이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일으킬 가능성을 보여준다.
플루서는 카메라와 사회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실행하는 사진을 잉여적 사진이라고 보았다. 정보적 사진은 희귀한 대상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장치의 프로그램에 맞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찾는 사진이다.
벤야민은 사진이 시각적 무의식을 드러내어 기존 지각을 확장할 수 있다고 보았고, 들뢰즈는 예술을 정보 전달보다 클리셰와 명령체계에 저항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랑시에르는 예술이 무엇이 보이고 누가 말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적 질서를 다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진이 새로운 정보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낡은 관습과 신화에 저항하고 굳어진 감각과 상상력을 깨우려는 동시대 예술사진이라면, 기존 코드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고 흔들며 재구성하는 새로운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때 새로운 정보는 화면에 낯선 내용을 많이 넣는 것이 아니다. 작은 세부, 반복, 침묵, 배열, 시점, 시간, 맥락의 이동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사진은 새로운 대상을 보여주는 사진만이 아니다. 낡은 눈으로 보던 익숙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사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