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물은 문화재 와 발행인 이기웅의 " 서원"자료임을 밝혀둡니다.
상헌묘,내삼문,정학당, 동재, 서재, 읍청루, 고직사 등의금호서원 전경.
시민제 현판이 걸려 있는 정학당 우물마루 앞이 훤히 보인다.
동. 서재를 좌우에 거느린 정학당 정면에 읍청루가 보인다.
서원의 뒤 쪽에서 앞을 내다 보고 촬영한 것입니다.
내 삼문입니다. 뒤 상현묘에는 서를 상으로 하여 길재.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을 모셨습니다.
금오서원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에 있는 서원으로,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 60호로 지정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초응룡(崔應龍)과 김취문(金就文)등이 부사(府使) 송기충(宋期忠)에 청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야은(冶隱)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 위해 구미 금오산(金烏山)아래 길재 생전의 강학처에 창건하였다. 이곳응 길재의 출생ㅈ이인
해평(海平) 봉계리(鳳溪里)와 인접한 곳이다.
길재는 고려말 과거에 급제하여 경세(經世)에 뜻을 두고 관직에 나갔으나, 고려왕조가 기울자 은거를 결심하고 1390년 선산으로 낙향해 금오산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지금 그 터에는 채미정(採薇亭)이 서 있다. 채미정은 중국 주(周)나라 때의 전설적 인물인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은(殷)나라가 망하자, 인의(仁義)에 벗어난 행동을 한 주나라 무왕(武王)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캤다는 고사에서 빌려 온 이름이다.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의 대표로 꼽는다, 길재는 고려말의 대 성리학자 이던 이색, 정뭉주, 권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叔滋),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에게 조선 최초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 주었다. 성리학의 성격을 이론과 실천의 양면으로 나누어 본다면, 길재는 고려말 조선초 격동의 시기에 이론 자체보다는 가치로서의 덕목을 실천한 선비로서, 조선 성리학의 발판을 다지는 주역이 되었다.
유가적 정신세계에서 두 왕조를 섬기는 것은 치욕이었다.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일어서자.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은 바른 생각을 꺾지 않고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몸을 숨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야은 길재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여 “천지 강산이 변하지 않으니 그가 바로 내 벗이다”고 하여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으로 진실을 파악할 것을 말했다. 이방원(李方遠)이 세자가 되어 태상박사(太上博士)의 직을 제수했으나, 길재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신은 초래(草來)의 태생으로 위조(僞朝)에 신하되어 벼슬까지 받았으니, 다시 또 거룩한 조정에 출사하여 풍교(風敎)에 누(累)를 끼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하고 강학에만 전념했다. 권근은 일찍이 길재의 시에 서문을 짓기를. “고려 오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한 효과가 선생의 한 몸에서 수확되었고, 조선의 미래에 영원히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신하된 절개를 밝히는 근본이 선생의 한 몸에서 터를 닦았으니. 명교(名敎)에 유공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고 하였다.
금오서원은 1575년(선조 8)에 ‘금오(金烏)’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2년 지방 유림들이 부사 운천(雲川) 김용(金涌 ,1577-1620)에게 청하여 지금의 위치인 선산(善山)의 남산(藍山) 기슭으로 위치를 옮겼으며,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이건된 서원은 길재의 출생지인 봉계리를 향하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서로 만나는 물길이 보인다. 그 뒤 점필제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신당(新堂) 정붕(鄭鵬,1469-1512),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추가 배향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중의 하나이다.
서원은 남향을 한 경사진 대지에 주변 자연과 어울리며 들어서있다. 길재의 청풍고절(淸風高節)한 기품을 대하듯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상헌묘(尙賢廟), 내삼문, 동재, 서재, 정학당(正學堂), 누문인 읍청루(揖淸樓), 고적사 등이 있느데, 기본적으로 전면에 강학공간, 후면에 제향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사당인 상현묘는정면에 세 칸, 측면 세 칸의 단청을 한 맞배지붕의 건물로 뒷간은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내부에는 서(西)를 상(上)으로 하여 길재,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여섯 명의 위폐가 차례로 모셔져 있다. 앞마당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정학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강당 건물로, 중앙에 세 칸은 우물마루를 하여 앞이 트였다. 양측 각 한 칸으로 온돌방으로 동쪽은 ‘일건재(日乾齋)’, 서 쪽은 ‘시민제(時敏재)’ 현판이 걸려 있으며, 건물 전면은 툇간으로 트여 있다. 사당, 뒤에서 앞을 내다보면 내삼문, 강당, 문루를 가로지르며 멀리서 다가오는 전경을 통해 자여과 건축이 서로 합일하는 한 방식을 읽게 한다. 거기에는 자연과 조화하는 공간의 유동적인 흐름이 있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동재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 건물로, 모두 온돌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면에 툇간이 설치되었다. 서재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반 건물로, 강당 쪽 두 칸은 온돌방, 나머지 한 칸은 우물마루이며, 건물 전면 반 칸은 툇간으로 구성되었다. 누문인 읍청루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서 서원으로 통하는 위치에 자리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건물로, 아래층은 서원 정문인 문회문(文會門)을 설치해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위층은 누각 형식의 건물로 서원 쪽은 트였고 바깥쪽은 판문을 설치하였다. 서원 영역의 동쪽 밖으로는 고직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둘레 담에 설치한 협문을 통해 강당 앞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