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배는 요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욕도 떨어져 살이 말라가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박영호가 그를 찾아온 것은 20여일 전쯤이다.
4년 가까운 세월의 풍파 속에서 영호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허여멀건 여자 같은 피부는 그대로이지만, 예전보다 많이 말라있으며, 몇 달 동안 햇빛을 못 본 사람처럼 얼굴색이 창백해 밀랍인형처럼 기름기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런 피폐해 보이는 얼굴 속에서 두 눈만은 먹이를 노리는 코브라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영호를 4년만에 다시 만난 것은 20여일 전쯤 로스엔젤레스 콤프턴 시에 있는 그의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였다.
몇 군데 소매상과 계약이 이루어져 납품명세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 그의 전용전화의 벨이 울렸다. 서무부서의 여직원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중년의 남자로부터 사장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고 물어왔다. 철배는 약간은 의아스런 마음 속에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바꾸라고 했고, 수화기 너머로 신분을 밝힌 남자는 그의 귀를 의심케 만든 인물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박영호였다. 철배는 가슴 속에 육중한 철근이 내리누르는 것 같은 놀라움에 온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오랫만이군, 철배. 설마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철배의 쿵쾅거리는 심장이 채 안정되지도 않았을 때, 영호가 냉소가 잔뜩 배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철배는 간신히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물론 그의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으...음, 그래 정말 오랫만이군, 영호.]
철배는 목구멍이 수축되어서 숨이 막히는 긴장을 사뭇 눌러내리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철배, 정말 반갑구먼. 근 4년만이지. 난 자네에게 할 얘기가 많은데,어떤가. 여기 자네 회사 앞 커피숍인데 지금 나올 수 없는가?]
[그래, 그러지. 잠깐 기다리게나. 옷 갈아 입고 바로 갈 테니.]
철배는 간단히 작업복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현장에서 직접 업무의 진척상황을 감독하는 일이 많아 사내에서는 항상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그 동안 잘 지냈나?]
철배가 커피숍 안에 들어가 차를 주문하고 나자 영호가 말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를 요리하기 전에 가학적인 희열에 실컷 도취되어 있는 오만한 고양이의 모습이다.
철배는 커피숍에 들어오기 전에 여러 모로 이 뜻 밖의 불청객의 방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봐, 뭐라구 말 좀 해봐, 철배. 예전의 자네답지 않구먼 그래.]
영호의 가느다랗게 웃고 있는 눈빛에 차가운 파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철배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영호의 목적은 뻔한 것이다.
[영호, 어쨌든 형식적이나마 자네에게 사과하겠네. 그 때는 정말 내가 돈에 눈이 뒤집혔었지. 자네의 용서를 바라네.]
철배는 고개를 들어 슬며시 영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사과..., 용서..., 하하, 그래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
철배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영호는 가증스럽다는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철배는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뻔뻔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그건 자네가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뭐 그야말로 풍비박산이었지.그 일이 있고난 후, 한동안은 집안 기둥이 무너져내린 꼴이었지. 하지만 다시 심기일전해서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혔어. 고향에서 빌딩 경비로 취직해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고 살지. 처음에는 세 식구가 하루 세 끼 먹기도 힘들 정도였지. 집사람은 애를 보육원에 맡기고 식당에 취직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정신없이 살았지.]
[그래도 기반이 잡혔다니 다행이군 그래.]
[그런데 철배, 자네는 그 후 어떻게 지냈는가? 물론 4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어떻게 그런 그럴듯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지? 내 돈 5천만원이 자본금 역할을 톡톡히 했나?]
[후....우]
철배는 계속되는 영호의 이죽거림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자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미국에 건너와서 한동안은 애를 많이 먹었어. 그리고 지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오로지 사업운영에만 몰두했지. 잠도 제대로 못자고 끼니도 거르면서 말이야. 지금같은 중소기업체를 거느리게 된 건 내 나름대로 노력한 성과야.]
잠시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은 담배를 뻐금뻐금 피워대기만 했다.
[날 경찰에 알리지 않고 찾아온 건, 물론 돈 때문이겠지. 그래, 나도 자네가 요구하는 액수를 처지가 되는 한 모두 들어주겠어. 제발 경찰에만 알리지 말게. 나도 이젠 처자식이 있는 몸이야. 나 하나라면 까짓 교도소행이라도 감수하겠지만.....]
[그래 자네 상황파악은 빨라서 좋구먼. 나도 자네를 고발하지 않고 찾아온 건 자네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어. 물론 생각 같아선 자네 가정이 박살나는 걸 보고 싶지만....아무튼 나로서는 당장 급한 게 돈이니까.]
[금액을 제시하게나. 빚을 져서라도 마련할 테니 말야.]
[금액이라.....글쎄 얼마를 부를까? 범죄를 덮어주면서까지 양보했으니, 백지수표라도 청구해 볼까?]
영호는 싱그시 웃어보이며 농담을 해댔다.
[그건 그렇고 자네 5천만원을 갖고 곧장 로스엔젤레스로 와서 자리 잡은 건가?]
[몰랐었나?]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나의 소재를 추적해서 알아낸 게 아닌가?]
[아니 결코 그런 일은 없네. 내가 자네의 소재를 알아낸 건 우연일 뿐이라구. 자네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만약 내가 자네의 행방을 뒤쫓았다면 왜 이제와서야 자네 앞에 나타났겠나?]
[그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뭐 간단하다네. 내 동생 있지 않은가.아마 자네한테 말했던 것 같은데?]
[아아, 그 쌍동이 동생?]
철배는 회상하듯이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그래, 쌍동이 동생이지. 그 영민이가 현재 모방송국 제작팀의 사원으로 근무하고 잇지. 거기서 해외연수요원으로 발탁돼서 방송국 경비로 이 곳 로스엔젤레스에서 3개월간 연수를 받게 됐지.그 애가 나를 이 곳에 초청했고, 우연히 이 곳 콤프턴 시에서 자네를 본 거야. 나도 어지간히 놀랬지만.......그 때 자네 뒤를 미행해서 거처를 알아낼 수 있엇지.]
[그랬었구먼.......]
철배는 한가닥의 의문의 빛을 두 눈에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참, 그 때 자네 밑에서 일하고 있던 호섭이란 친구는 아직 연락이 닿나?]
[호섭이?]
영호가 눈을 멀뚱거리며 반문했다.
[아 왜 그 때 자네가 등산을 좋아한다기에 내게 소개시켜 줬던 그 뚱뚱하고 키 작은 친구 말이야?]
영호는 잠시 머리 속에서 무언가 계산하듯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아아 호섭이......그래 그런 친구가 있었지. 이제야 기억나는군. 맞아, 키가 작고 뚱뚱한 애가 하나 있었어. 하지만 가게를 정리하고 직원 애들하고는 모두 헤어져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런가.......]
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 처음으로 영호의 얼굴을 직시하며, 무언가를 재빨리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호는 철배의 그런 태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 동안의 그의 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2>
그 사건이 있은 지도 벌써 3년 10개월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철배는 각종 금속가공품을 거래업체에 납품하는 회사 동서철강의 대표였다. 처음 2년 동안은 젊은 나이에 직원까지 세 명 거느리고 제법 넓은 평수의 가게에서 그런 대로 수지맞는 사업을 운영할 수 있었다. 원자재에 필요한 부속품들 중 절반 이상은 일본시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야마다 금속조립부품업체에 약속어음으로 수입을 하고 있던 철배의 회사는 갑작스런 부품비용폭등에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야마다 업체와 거래를 중지하고 타업체를 알아 보았자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더욱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수입을 해온 부품들은 거래업체들에게 공급하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결국 회사는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도저히 재기불능에 빠진 상태에서 철배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래업체들을 상대로 사기를 계획한 것이다.
다행히 그 동안 철배의 회사는 순탄대로를 걸어옸고, 관련업체에게 견실한 회사로 평판이 나 있었다. 또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 것은 불과 몇 개월 사이로 직원들조차 자세한 속사정은 알지 못했다.
계획의 첫 단계로 그는 먼저 도미수속을 밟았다. 미국에는 이미 여권이 발급되어 있었고 부동산이나 소소한 개인 물품들은 모두 깨끗이 정리해 나갔다. 당시 철배는 35살이었으나 미혼인 상태였고, 부모형제들과도 결별한 지 오래여서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 몸이었다.
먼저 야마다상사로부터 새로운 최신형 모델의 자재부속품을 몇 개 수입했다.
이어서 거래업체 중에서도 규모가 큰 거래를 하고 있던 세군데 업체로부터 최신형 모델 자재부속품을 보여주며 야마다 상사와 대량수입의 계약을 맺었으니 며칠 후 현물공급이 가능하다고 기만하면서 구입을 부추켰다.
거래업체들은 이를 믿고 서약한 자재인수시기와 맞물려 약속어음을 발행했다. 철배는 약속어음의 마감일자 며칠 전에 그 인수대금을 모두 쓸어버리고 미국으로 도피했다.
근근이 사업을 이끌어가던 거래업체 세군데는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맞은 꼴이 되어 경찰에 고소청구와 함께 강철배의 행방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이미 물 건너 간 뒤라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철배의 미국도피행이 경찰수사로 밝혀졌지만, 경찰로서도 미온적인 태도에 그쳤다.
그럴 것이 사건이 흉악범죄사건이나, 사기사건이라도 대규모의 거액사취사건이라면 인터폴에 협조를 구해 범인추적에 최대한의 물력, 인력을 동원할 테지만, 강철배의 사기행위는 연일 터지고 있는 일개 잡스러운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경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실제로 대대적인 범인검거활동을 개시한다고 해도, 해외로 도피한 사범들은 검거되는 확률이 희박한 점으로 볼 때 경찰의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해업체들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그 중에서도 여타 두 업체들보다도 그 규모면이나, 그 밖에 도의적인 면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업체가 영호가 운영하고 있던 현진정밀이었다. 5천만원이라는 피해액수는 며칠 안으로 회사를 문 닫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여기저기에 빚을 지어가며 원금을 메꾸기에는 정신이 없었다.
이런 경제적인 손실도 그렇거니와, 영호로서는 2년 동안 얼굴을 맞대며 허심탄회한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던 철배에게 그런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쓰라린 비탄에 잠기게 만들었다.
2년 동안 지내며 셀 수 없이 술자리까지 같이 했던 그 사람 좋아보이던 철배의 얼굴이 한 순간 간교한 악의 화신으로 자나깨나 두 눈 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영호는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던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으며,복수를 하고 싶을 때마다 미사참례로 고통을 달래었다. 영호는 그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가진 천주교신자였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갈등과는 상관없이 현실은 영호에게 잇달아 시련을 안겨주었다. 5천만원을 사취당한 후 그나마 아내와 자식 하나와 함께 전세로 살고 있던 방 두칸짜리 집을 처분하고 영호의 본가가 있는 고향 원주로 올라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3>
한편 그 사건 후 미국으로 건너간 철배는 당분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국에서 저지른 사기행위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경제적으로 힘든 면은 없었다. 그 동안 모아둔 재산에다가 거래업체 세 군데로 부터 사취한 2억에 가까운 자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에서는 지명수배가 내려졌겠지만, 지구상의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사는 대영토인 이 곳 미국에까지 수사의 손길이 뻗치지는 않을 것이라 낙관하는 마음이 있었다.
철배는 사전에 사기범죄에 대한 법의 처벌에 대해 면밀히 조사해 보았다. 사기에 해당하는 범죄는 그 성격에 따라 딱 집어 규정할 수 없게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기업형의 사기는 그 액수와 상관없이 의외로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각종 유가증권에 대한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사법당국이 이에 법률을 강화한 것이다.
철배가 형법관계의 서적을 들추어가며 알아낸 바로는 자신의 범죄행위가 공소시효 7년이며, 형량이 3~5년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런 냉엄한 법의 심판에서 벗어나려면 7년 이상을 법망에서 피해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7년, 철배로서는 한숨이 저절로 쉬어나오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결국 철배는 사기를 친 후 해외로 도피해서 영원히 머무를 작정이었다.
먼저 철배는 미국 오하이오 주 애크런 시의 한 외곽지대에 주거지를 정했다.그리고 6개월 후부터 서서히 햇볕을 보며 바람을 쐬일 수 있었다. 바깥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불안감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철배로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도 있었다. 철배는 우선 돈벌이가 되는 직업을 구해야 했다. 아직 자금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언제까지나 아무 일도 안 하고 도피자금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흔히 재미교포들이 그렇듯이 자영업에 손을 댔다. 여러 시장조사 끝에 그래도 적자는 면하고 근근히나마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육가공도매업소였다. 처음에는 업소를 설립하는데 드는 제반비용이 다소 부담이 되었으나,서서히 거래처가 증가하고 기반이 잡히는데 따라 안정성 있는 사업을 일구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동안을 운영하고 있을 무렵 철배는 그 곳 애크런 시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2세인 한국여성과 결혼을 했다. 교제가 이루어진 경로는 그가 거래하고 있던 슈퍼마켓 주인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상대여성은 그 주인의 딸로 당시 노트제조생산업체에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배의 이력이나 연고가 불확실해 석연치 않았던 상대여자측 가족들이었지만, 장래성 있어 보이는 사업체와 제법 넉넉한 재산을 보고 딸을 출가시켰던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남짓, 철배가 도미한 지 3년만에 철배일가는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했다. 철배의 육가공업소가 급성장하여 입지적으로 봤을 때 애크런 시는 더이상의 사업확장에 너무 비좁은 지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철배 개인적으로 로스엔젤레스에 입성하면 한인들을 상대로 보다 원활하고 방대한 사업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작용했다. 그리고 그런 사업적인 면을 떠나 주민들과의 유대관계면에서 그런 여건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철배는 처음 미국에 건너왔을 때, 전혀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그 동안 틈나는대로 혼자 공부를 하고,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라난 아내의 도움으로 기본회화 정도는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아직 법의 처벌권 안에 있는 몸으로서 로스엔젤레스같이 한인들이 붐비고, 따라서 신상이 그만큼 드러나기 쉬운 곳에 생활터전을 잡는다는 것이 다소 위험스럽기도 했지만, 철배의 과거에 대한 두려운 심정 또한 현저히 줄어들어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 놓고 현실에 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나 현재 거래처가 수십군데에 이르는 대규모의 육가공업체로 발돋움한 것이다.
그런 시점에서 느닷없이 수년 전 사기 피해 당사자였던 영호가 그 머나먼 한국에서 기나 긴 시간의 공백을 뚫고 눈 앞에 나타났으니 철배의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4년여 동안 전전긍긍하면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뼈를 깎는 고초 속에 이국땅에 일궈 놓은 사업과 가정을 손가락 하나 까딱여서 붕괴해 버릴 수 있는 심판자가 나타난 셈이다.
철배는 침대 이불 속에서 잠이 안와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곁에서는 아내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얕은 숨소리를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 침대 밑에서는 이제 만2살이 된 아들이 역시 세상 모르고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
영호는 사흘 전에 재차 찾아와 H산으로 등산을 갈 것을 제의해 왔다. 난데없는 등산얘기에 철배가 의아스런 기색을 나타내자 영호는
[자네가 등산을 좋아하고, 나도 그 동안 등산에 취미를 붙여 한국에서도 답답할 때 산에 오르는 것에 익숙해져 최종타결장소로 적당할 것 같아서]
라고 웃으며 말했다.
<최종타결>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영호의 요구조건과 그에 따른 절차를 의논하는 것을 뜻한다.<타결>이라고 했지만, 영호가 어떤 요구를 해도 철배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긴 어떤 요구라고 해도 결국 그 조항에는 돈 밖에 없을 것임은 뻔한 것이지만.
철배로서도 돈으로 만사가 끝나면 더 이상의 수월한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이 또한 현재 철배의 넉넉한 자금사정을 한 눈에 파악하고 있는 영호가 적당한 선의 금액 이상을 요구할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할 만 하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휴일도 아니고 평일에 등산을 가는 것도 철배로서는 드문 일이다. 어쨌든 오늘 안으로 모든 것이 결판날 것이다.
이 곳 로스엔젤레스 한인타운에는 등산 애호가들의 협회가 많았고, 등산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철배는 벌써 오래 전에 이 곳 협회에 가입하고 있었다.
오하이오 주에 있을 때는 낯선 땅에 대한 이질감도 있고, 여러 경황도 없고 해서 고작 몇 개월에 한 번 정도 혼자 가까운 산을 찾았었다. 하지만 로스엔젤레스에는 역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그런 규모가 큰 협회까지 생긴 것이었다.
하긴 규모가 크다 해도 모임은 격주로 일요일에 미리 회원들간에 정해 놓은 산을 오르는 일이 거의 전부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돌아가며 회원들의 집에서 식사를 하면 답사할 산을 예정하는 일 정도였다
<4>
H산은 철배가 살고 있는 콤프턴 시에서 열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곳에 있다.
해발 400미터의 콤프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인지라 주말에는 등산객들이 제법 많이 모인다.
하지만 고원지대이므로 지금 같은 한겨울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이 자주 내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 비해 등산객이 현저히 줄어든다. 더군다나 평일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산의 남단은 바다와 붙어있어서 약간은 아찔한 듯한 벼랑들이 곳곳에 돌투성이의 180도로 내려깎인 경사지대를 이루고 있다.
약속장소인 열차역에 철배가 도착했을 때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영호는 아직 안 나타나고 있다. 예상대로 등산객들은 가끔가다 한두 무리가 보일 뿐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기온이 더 떨어져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산 정상은 거의 영하로 떨어져내릴 정도였다. 열차역 대합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철배는 아무 생각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무실에서 제복에 모자를 눌러 쓴 사무원이 부지런히 무슨 도표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 얼핏 시야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매점 앞 벤치에서 등산복 차림의 두 서양인 중년여인들이 영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철배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시간보다 20분 가까이 경과하고 있다. 아마 1시 30분 도착열차에 몸을 실었나 보다. 철배는 다시 두 개피째 담배에 불을 붙엿다.
이런 평일에 등산을 하는 것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해와서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만큼 그는 바쁘게 살아왔다. 심지어 일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볼 때도 있었다.그런 시간과의 싸움 외에 그의 타고난 사업운영능력이 지금같이 누구도 깔보지 못할 업체로 부상한 원동력이다, 적어도 철배는 그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두 개피째의 담배를 다 태워가고 있을 때 영호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흔히 있는 완벽한 등산복 차림으로 영호는 웃으며 철배 앞에 나타났다.
[일찍 나왔군.]
영호는 늦게 나온 것에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철배에게 말했다. 이어서 영호는 철배의 의사는 무시하고 앞장을 서서 대합실을 나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영호가 카드를 쥐고 있었던 만큼, 철배는 아무런 자존심의 동요도 없이 영호의 뒤를 따랐다.
영호는 익숙한 태도로 매일 지나다니던 길을 걷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코스를 밟아갔다.
산에 오를수록 희뿌옇게 떠돌고 있는 안개자락이 눈 앞에 자욱하게 펼쳐졌다.
주위에는 고산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두 발가벗겨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침엽수들이 가득 차 있다. 이따금 꿩들이 나무가지를 스치우며 산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올라갈수록 다른 등산객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문명세계와는 격절되어 있는 것처럼 괴괴롭기만 하다.
영호와 철배는 거치른 입김을 토해내며 등산로를 밟아갔다. 영호가 이따금 일상적인 얘기를 했고, 철배 역시 거기에 대꾸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산의 정상이 눈 앞에 다가왔다. 먼저 영호가 허연 안개를 헤치며 걸음을 멈추었다. 출발한 지 3시간이 넘을 무렵이었다. 영호는 이 산의 정상을 협상장소로 정했다는 것을 내비추듯 아무 말없이 바닷가를 고즈너기 응시하며 담배를 한 개피 꺼내 피워물었다. 철배도 같은 동작으로 담배를 꺼내었다.
이윽고 영호는 아무 말없이 바닷가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어떤가 철배, 기분이?]
영호는 명랑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기분이 색다르구먼.]
[자네는 등산을 좋아하니까 이 산에도 몇 번 와봤겠지?]
[그....그렇지, 한 네다섯 번 말야.]
[으음]
[영호 자네야말로 익숙한 태도로 보아 이 산을 많이 와본 것 같은데?]
[아니, 오늘로서 두 번 뿐이야. 며칠 전에 이왕 미국에 온 김에 할 일도 없고 해서 한 번 와 봤을 뿐이야.]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말해보게 영호.]
철배가 나즈막히 말했다.
[등산을 즐기러 온 것도 아니고 나로선 즐길 마음의 여유도 없으니......자네의 그 요구조건을 들어보세.]
[요구조건?]
영호는 이렇게 되뇌이며 고개를 숙였다.
[글쎄, 얼마를 요구해야 직성이 풀릴까?]
[어서 말해보게나. 들어 줄 수 있을 만큼 들어줄 테니.]
[글쎄, 자네 현 재산이 모두 얼마나되나?]
영호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이것 저것 계산해 봐서 한 24,5억은 돼지.]
[24,5억이라,으음......그럼 딱 잘라서 절반만 요구해 볼까.]
영호가 장난치듯이 말했다.
[영호, 그렇게 빈죽거리지만 말고 요구사항이 있으면 말해보라구 말했듯이 내 능력 안에서는 모두 수락할 용의가 있으니까]
철배가 재촉하듯 말했으나 영호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는 고개를 숙여 황량하게 메마른 회갈색 흙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면에서 바람이 엉키어 귀곡성을 지르듯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 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몇 십분은 지난듯이 느껴졌다. 영호가 아무런 뜻도 내비추지 않자, 철배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철배는 땅바닥에 앉은 채 고개를 세워 샛노랗게 번쩍이는 태양빛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닷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영호는 그 바다를 등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철배]
[응]
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영호는 또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영호, 말해보게.]
[철배, 자네는 내가 영호로 보이나?]
[무슨 소리야?]
철배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봐, 철배. 나는 자네가 알고 있는 영호가 아니야. 난 말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쌍동이 동생이라구.]
[뭐...라.....구?]
철배가 뜨거운 것에라도 데인듯 몸을 움츠리며 내뱉었다.
<5>
[난 형의 동생 영민이란 말야. 얼굴만 비슷하지, 아니 똑같지 전혀 다른 사람이란 말야.]
철배는 멍청히 눈을 치켜뜨고 영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했나? 결국 나는 형의 복수를 위해 너와 함께 이 곳 까지 같이 온 거란 말야.]
영호, 아니 영민의 어깨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확히 3년 10개월전, 넌 우리 형에게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히고 미국으로 도피했지. 그 때 우리 가족이 얼마나 도탄에 빠졌는지 아나? 가족이래 봤자 당시 칠순을 넘기신 아버지와 형과 형수, 그리고 갓 돍을 지났던 조카 아들녀석이 전부였어. 너에게 사기당한 뒤 형수는 생활고를 비관해 가출해 버리고, 아버지는 치매증에 걸리셔서 도저히 혼자 계실 수가 없었어. 형은 형대로 어떻게서든지 다시 무너진 기둥을 일으키려고 동분서주했지만, 현실은 끝내 형을 외면해 버렸어. 그렇게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형도 자포자기가 되어 술과 도박에 빠졌지. 그리고는 간경화로 하직했어. 바로 10개월 전, 너에게 사기당한 뒤 정확히 3년째 되던 해에 말야. 아버지는 여전히 치매를 앓으시고 의탁할 곳도 없어. 이제 6살이 된 조카는 보육원에 맡긴 상태고. 이봐 너의 그 얄팍한 물욕 때문에 한 가정이 박살나 버린 걸 생각해 봤나?]
영민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었다.
[난 결심했어. 어떻게서든지 우리 가정을 하루아침에 파탄에 빠지게 만든 너를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고. 어떻게서든지 복수를 하겠다고 말야.]
철배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수그린 채 영호의 광기에 가득 찬 힐난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먹었어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더군. 그 때 나로서는 행운이 따랐다고나 할까. 그것이 신의 도움이란 걸까. 어쨌든 나는 너의 소재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그야말로 우연히 포착하게 됐지.]
철배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눈을 멀뚱거렸다.
[나는 이래뵈도 4년제 대학 방송학과를 졸업한 인테리라구.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어렵게 졸업할 수 있었지. 그래서 석사과정을 밟고 모방송국 사원으로 취직했지. 그렇게 9년이 지나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전문 프로듀서로 발탁될 예정이지. 아직까진 그냥 사원이지만 말야. 그건 그렇고 내가 현재 도와주고 있는 현역 PD선생님이 맡고 계신 프로그램 중에 다큐멘터리 형식의 시사프로그램이 있어. 어려운 역경을 딛고 마침내는 자수성가한 인물들의 일대기-- 말하자면 성공담을 제시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시사프로그램이지. 그런데 선배PD의 누님이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바로 콤프턴 시에 살고 있는데 그 곳에 재미교포로서는 드물게 규모가 큰 육가공업체를 운영하여 현재 순탄대로를 걷고 있는 보기드문 한국인 기업가가 있다는 것이었지. 게다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적은 자본금으로 혼자서 큰 사업을 일으켰다는 점이 바로 선배 PD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아주 알맞은 케이스의 인물일 것 같아 추천한다는 거였어. 그 후 얼마 안 되서 선배 PD가 로스엔젤레스로 갈 일이 생겼지. 선배PD는 잘 됐다고 생각하고는 그 누님이 가르쳐 준 육가공업체의 사장을 만나러 갔던 거야. 그런데 이 사장이란 인물이 그런 인터뷰는 절대사절이라면서 자세한 얘기는 듣지도 않고 선배 PD를 내쫓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거절해 버렸다는 거야. 미국에서 돌아 온 선배 PD에게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사람들 중에는 이상하리만치 타인들 앞에 나서는 걸 꺼려하는 특이성향의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야. 그런데 갑자기 어떤 생각이 머리 속에 스치더군. 과연 그 육가공업체의 사장이란 사람이 그런 일종의 겸손함에서 그 프로그램의 주인공자리를 거절했던 것일까. 선배 PD의 말로는 무언가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 듯이 처음부터 완강히 거절했다는 거야. <무언가 켕기는 것>. 만약 그 사장이란 작자가 실제로 그런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될 만한 사유가 있다면 그것은 혹시 범죄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러자 곧바로 네 생각이 떠오른 거야. 4년 전에 홀연히 미국에 와서 자수성가한 30대 후반의 인물. 난 성급하게도 그 막연한 부합에 너를 연결시킨 거야. 그건 막연하지만 확인해 볼만한 충분한 모티브가 있었지. 그리고 난 며칠 후 시간을 내서 확인을 해 봤던 거야. 물론 거기에는 꽤 많은 고생이 필요했지만.]
영민은 이야기를 끊고 상의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그리고 길게 담배연기를 토해내고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가늘게 지어보이며 철배를 바라보았다. 철배는 벙어리라도 된 듯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거치른 흙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바다바람이 소용돌이치듯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침내 나는 로스엔젤레스의 네가 운영하는 육가공업체를 찾아냈지. 과연 내 예상이 근거없는 비약이었을까, 그런데 그걸 확인하는 것이 나로서는 애를 먹을 수 밖에 없었지. 그럴것이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전무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가장 확실한 데이타로 얼굴을 알 수 없었으니말야. 하지만 형한테 네가 등산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었었지.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재미교포 등산협회 같은 것이 있나, 하고 알아보던 중 그런 단체가 존재하며 네가 거기에 가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야. 네가 문제의 인물이라는 사실에 상당부분 근접한 셈이지.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알아본 바, 너의 과거가 불확실하며 미국에는 전혀 연고자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 비약적인 추리가 마침내 확고하다고 할 만한 충분조건으로 현실 속에 나타난 거였지.
물론 여기까지만해도 네가 내가 찾고 있는 강철배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 어디까지나 정황증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도 없었고 결국 너와 만나서 확인하는 길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너를 전화상으로 접하자마자 너는 정체를 드렀냈지.]
영민은 그 동안의 고생담을 털어놓으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철배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영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해가 많이 기울어져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은 과연 네가 나를 형으로 오인하느냐 하는 것이었어. 어쨌든 나는 너에게 형이라고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 너로서는 동생이라면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녀석이 어떻게 나의 소재를 알았을까. 우연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우연이라면 어째서 형한테 알리지 않았을까. 이것은 분명히 나를 추적한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 알리지 않은 건 돈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를 살해하려고 다가선 것이다, 이렇게 너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하고는 형인 것처럼 가장한 거지.]
철배는 여전히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지난 날의 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라도 하듯이 힘겹게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형으로 위장하는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 그럴것이 형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얼굴은 물론 목소리나 행동거지도 비슷해 아무리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구별을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형과 나를 결정적으로 구별해 낼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었지. 즉 형의 왼쪽 눈 밑에 있는 점이야.얼핏 보아서는 눈에 안 띠지만 웬만큼 주의해서 보면 알 수 있는 정도의 점이야. 하지만 나는 낙관했어. 네가 우리 형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는 하지만 학창시절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도 아니고 단 2년간의 교제에다가 4년 가까이 떨어져 있던 공백기를 생각하면 그런 외모의 사소한 특징쯤은 기억해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야. 결국 예상대로 너는나를 형이라고 완전히 믿어 버렸지. 너는 사기 따위에는 비상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교활한 인간이지만, 그런 외모의 사소한 특징 같은 건 눈치채지 못하는 감수성 둔한 무식한 인간이었어. 자아, 이제 단념하라구. 네 앞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야.]
영민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켜 손을 뒤에 매고 있던 배낭 쪽으로 가져갔다. 그 때였다.
[으하하하]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철배가 느닷없이 주위가 떠나가라 웃어젖혔다.
[이봐 영호, 아니 영민. 그것이 자네가 말한 소위 명문대학을 나온 인테리의 감수성 판단 기준인가? 영민, 미안하지만 나는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영호가 아니라고 판단했어. 그래 바로 그거야. 눈 밑의 점. 나는 처음 본 순간 내 망막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던 그 옛날 영호의 그 눈 밑의 점이 없어졌다는 것에서 자넬 의심했어. 눈 밑의 점은 성형수술로 빼기도 위험할 뿐더러 나를 살해하고자 접근한 영호라면 더더욱 뺄 필요조차 없었다고 생각한 거야. 나로서는 자네가 나를 그런 감수성 둔한 인간족으로 오해한 것이 유감이네.]
영민은 사태의 급작스런 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철배의 너털웃음 속에 섞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자네의 외모나 태도를 관찰하고 있다보니 점점 영호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왜 그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커피숍에서 내가 예전 영호의 부하직원 호섭이에 대해 물어봤었지 않은가? 그 때 자네는 머뭇거리며 그 친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 이 봐, 호섭이란 부하직원 따위는 없었어. 내가 자네를 떠보았던 거 뿐이라구. 결국 자네는 보기좋게 넘어갔고, 나는 자네가 영호의 동생이라고 확신하게 된 거지.]
철배의 눈빛이 교활하게 이글거리며 쾌재의 웃음이 입가에서 출렁거렸다.
[이 봐, 나는 이 산은 몇 번이나 등산을 와봐서 산의 사정에는 정통해 있다구. 자네가 처음 이 곳에 등산을 가자고 제의해 왔을 때부터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자네한테는 뭣도 모르고 따라온 것처럼 연기한 거라구. 이런 한 겨울에 등산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또 있다손치더라도 총소리 정도는 새를 잡는 것 쯤으로 흘려들을 테니까 말야.]
철배의 입가에서 여전히 교활한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난 자네 같은 허여멀건 피부에 연약한 몸을 가진 놈들 쯤이야 몇이 와도 상대할 정도이고, 그렇다고 칼 같은 흉기를 갖고 덤비는 무모한 짓거리를 할 정도로 자네가 어리석다고 생각지도 않았어. 결국 총 이외에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거야.]
[뭐.....라.....구?]
영민이 두 눈에 핏발을 드러내고는 허겁지겁 등 뒤의 배낭으로 손을 가져갔다.
[자네 이걸 찾고 있었나?]
그러면서 철배는 천천히 등 뒤의 배낭 속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아까 자네가 산에 오르기 전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갔을 때 자네 배낭에서 슬쩍한 걸세. 자네 계략처럼 여기서 내가 자네를 쏜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구. 시체는 저 바다에 던져 버리면 그만이구 말야.]
[개......새........끼]
영민의 목젖을 타고 흘러나오는 야비한 욕설은 끝내 이어지지 못하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단말마의 비명으로 바뀌었다.(끝)
첫댓글 반전의 반전 이군요..근데 두 형제가 모두 당하다니..좀 불쌍한 생각이 드는걸요.
여하튼 악의 끝은 좀 있어야 하지않을까여..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소설이었네여.잼있게 잘 보구 갑니다.다음 작품들도 기대하구 있을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