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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8차 학회 간산 및 시산제 안내(2018년 3월 11일 진천지역)
우리 연구회에서 실시하는 제 58차 정기 간산 및 2018년 시산제 행사는 충청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진천에서 시행할 예정입니다.
진천은 천혜의 자연과 비옥한 농토가 많아 사람들이 살기 좋다하여 예전부터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번 시산제 행사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김유신(金庾信)의 태생지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이곳 진천지방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일으킨 속리산(俗離山, 1059m) 어름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을 분맥(分脈)하여 안성의 칠현산(七賢山)에서 북서쪽으로 진행하는 금남정맥(錦南正脈)과 남서쪽으로 진행하면서 진천과 조치원, 천안, 홍성 등지에 지기를 공급하는 금북정맥(錦北正脈)으로 나누어집니다.
남서쪽으로 진행하면서 기를 공급하는 금북정맥은 안성의 서운산과 천안의 성거산 중간 기점에서 만뢰지맥을 분지(分枝)하여 진천 땅에 기맥을 불어넣는데, 이곳 만뢰산(萬賴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김유신의 태생지에서 우리 연구회 2018년 시산제를 거행할 예정입니다.
나지막한 산자락이 어우러지면서 순한 국세가 일품인 진천 땅에서 수려한 평강룡(平岡龍)이 선사하는 음양기(陰陽氣)의 기운을 느껴보시기 바라며, 특히 풍수는 문외한이라도 역사나 유적지 탐방에 호기심이 많으신 분들의 참여도 가능하오니,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
특히 이번간산은 2018년 시산제를 겸한 답사가 되어, 우리 학회 임원들의 대거 참여 등, 좌석확보가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꼭 이곳 카페에 리필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1. 간산 일시
- 2018년 3월 11일(일요일), 08시 30분
▶ 태릉역: 08시까지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면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 양재역: 08시 30분까지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걸어오시면 서초구청 맞은편에 관광버스 대기(수도권에서 참여하시는 분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늦췄습니다)
2. 최종 집결장소
▶ 서울 : 양재동 서초구청 맞은편(수협은행 앞)
-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번 출구에서 걸어오시면 수협은행 앞 도로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08:30 까지)
※ 태릉역에서 출발하실 회원께서는 08:00까지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3. 회비: 40,000원 (교통비, 중식, 기타비용 등)
4. 답사 경유지 및 간산지 안내
서울 양재역 출발(08:30)→ 죽전 임시정류소(08:50) → 안성JC [평택 제천간 고속도로](09:30) → 북진천IC(10:00) → 송강 정철 묘소 → 보련산 보탑사 → 김유신 탄생지(시산제) → 중식 → 남지 묘소 → 청주이씨 이정 묘소→ 귀경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김명식 고문(010-2212-3494), 정철화 부회장(010-3475-2357)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5. 답사지 안내
1) 용 등(龍脊)에 올라탄 송강 정철 부부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인 정철의 묘는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 2월에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묻혔다가, 1665년(현종 6)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당시 노론(老論)의 수장이던 송시열(宋時烈)이 터를 정하고, 손자 정포(鄭浦)가 이장을 주도하였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에 한양의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아버지 정유침(鄭惟沈)과 어머니 죽산안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연일정씨(延日鄭氏)이며, 고려시대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의 12대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증조할아버지는 김제군수, 아버지는 돈령부판관을 지냈으나 정철이 출생할 당시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출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큰누나가 당시 세자이던 인종(仁宗)의 후궁으로 입궐하였고, 막내 누나가 계림군 이유(李瑠)에게 출가하면서 집안이 펴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벼슬길에 나아갔다. 정철 또한 이런 인연으로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왕자들과 친교를 쌓았고, 특히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는 친구처럼 정분이 매우 돈독했다.
그러나 정철이 9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의 보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아래 외척인 윤원형과 윤임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계림군이 죽음을 당하자, 정철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면서 맏형은 모진 고문으로,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둘째 형은 순천에 은거하였으며, 정철도 목숨만 겨우 건진 아버지를 따라 관북(關北), 정평(定平), 연일(延日) 등지의 유배지를 떠돌아다녔다.
1551년(명종 6)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정철은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에 정착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이 시기는 정철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시간이었다. 담양으로 내려온 이후 10여 년 동안 정철은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등과 친교를 맺었다. 17세가 되던 해에 김윤제(金允悌)의 외손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와 혼례를 치렀다.
1561년(명종 16) 25세 되던 해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파란만장한 벼슬길에 나선다. 1566년(명종 21) 30세에 북관어사가 되어 함경도 일대를 순시하였고,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면서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1580년(선조 13) 44세가 되던 해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이때 가사「관동별곡」과 시조「훈민가(訓民歌)」등을 지어 시조와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582년 도승지와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하였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으며, 1584년에 대사헌을 제수 받고, 총마(寵馬)를 하사받으면서 총마어사란 이름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의 논핵(論劾)을 받아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창평에서 은거하면서〈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등을 지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으며,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었고, 인성부군(寅城府君)이 되었다. 1591년 이산해의 책동에 빠져 건저(建儲, 세자를 세우는 일)하려다가 왕의 뜻을 거슬리고 ‘대신으로서 주색(酒色)에 빠졌으니 국사를 그르칠 수밖에 없다’ 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로 파직된 뒤에 명천· 진주· 강계 등지를 떠돌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석방논의 끝에 5월에 풀려나 평양에 있던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하였다. 관찰사가 되어 강화에 머무르다 1593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같은 해 12월 강화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정철의 일생은 사림세력과 훈구세력 간의 투쟁, 사림들 사이에 벌어진 당쟁과 사화, 임진왜란 등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침없는 행보를 한 정치가였다. 본래 성정이 곧아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던 탓과 서인의 영수로써 조정의 당파싸움에 연루되어 평생을 귀양살이로 얼룩졌다. 그러나 정철은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을 남겨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문인이다.
송강이 묻혀있는 이곳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이다. '어은' 이란 지명의 유래는 송시열이 이곳에서 묫자리를 구할 때, 지형(地形)이 마치 '고기' 가 숨어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어은(魚隱)이라 불렀는데, 정철의 묘는 지명의 뜻처럼 산 중턱의 능선에 몸을 숨기고 있어 묘지안내판이 없으면 찾기가 어렵다.
이곳 부부 묘는 주산인 환희산에서 남동쪽으로 진행하는 주룡의 용척(龍脊)에 올라탄 기룡(騎龍)처럼 보이지만, 혈을 맞이하는 영사(迎砂)와 역각(逆脚)이 전무한 과룡처에 불과하다.
봉분은 술좌진향(戌坐辰向)이며, 이곳처럼 터가 높은 고산지대에서 나가는 물길이 보이지 않으면 파구(破口)에 의한 향법(向法) 등은 응용하지 않으며, 대신 입수룡(入首龍)을 보고 양기(陽氣)를 수용하는 정음정양법 등을 사용한다.
<용 등에 올라탄 송강 정철 부부 묘소>
2) 보물 제404호인 백비를 간직한 보탑사
조계종 소속의 보련산(寶蓮山) 보탑사(寶塔寺)는 고려시대 절터로 전해지는 곳에 비구니 승려인 지광· 묘순· 능현이 1996년에 창건하였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3층 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 영산전· 산신각 등을 건립하였으며, 2003년에 불사가 끝났다.
다양한 불교문화를 체험하면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며 부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보탑사는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 목탑의 높이는 42.71m로, 상륜부[9.99m]까지 더하면 총 높이는 52.7m에 이르는데 이는 14층 아파트와 버금가는 높이이다. 목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모두 29개이며, 강원도 소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여 전혀 못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다.
보탑사는 1층 대웅전, 2층 법보전, 3층 미륵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웅전에는 사방불(四方佛)인 동방 약사우리광불, 서방 아미타여래불, 남방 석가모니불, 북방 비로자나불이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40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비인 ‘진천 연곡리 석비’가 있다. 거북받침 위에 비몸[碑身]을 세우고 비머리[螭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인데 비문이 보이지 않아 일명 백비(白碑)로 불린다.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얼굴 면이 손상되어 말머리 같고, 앞 발톱은 파손되었으며, 등 무늬는 정교하게 조각되어 단아한 느낌을 준다. 비 몸을 받치는 받침 부분의 연꽃무늬는 잎이 작으면서도 양감이 있어 아름다운 느낌이 들고, 이수(螭首)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이곳 보탑사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 수박을 불전에 올려 그해 동짓날(12월 22일) 나눠먹는 것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신비하게도 봄부터 여름장마를 거쳐 가을, 겨울까지 무려 7개월 보름 동안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보탑사 수박은 입소문을 타면서 동짓날이면 이 수박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부처님 전에 올린 수박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발을 받았으니 영험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보탑사를 일군 지맥은 금북정맥에서 분지된 만뢰지맥이 동쪽으로 진행하다가 만뢰산을 솟구치기 직전, 주룡(삼거리)에서 분지되어 남하하는 맥으로 이곳 터는 후면이 오목하고 평평한 양룡(陽龍)이 일군 입지에 사방의 산자락이 연꽃잎처럼 겹겹이 감싸고 아우르는 화심(花心)에 해당한다.
<연꽃의 화심에 터를 정한 보탑사>
3) 2018년 시산제, 만뢰산(萬籟山)아래 김유신 탄생지
김유신 탄생지의 진산(鎭山)인 만뢰산(萬賴山, 611.7m)은 만노산(萬弩山), 금노산(今奴山), 금노산(今弩山), 금물노산(今勿奴山)으로도 불리며, 고구려시대의 지명을 따 붙인 이름이다. 본래 고구려 땅이었던 진천 지역이 신라 땅이 된 뒤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이 만노태수로 부임하였는데, 북으로 고구려, 서쪽으로 백제군과 대치중에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평화롭게 지냈다 하여 붙인 산명으로 전한다.
이곳 탄생지에는 김유신 장군의 유허비가 있고, 계단 앞 비각 안내판에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 이란 표제와 함께,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화랑이 되었고,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와 문봉리' 일대에 있다는 생가, 연보정, 태실 등 김유신 유적이 '국가사적 414호' 란 사실을 명기해 놓았다.
뜻깊은 이곳 탄생지에서 2018년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시산제를 치룰 예정이다.
산을 지키면서 산과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을 산신령(山神靈)이라 한다.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精靈)이 있으며, 그 정령에 의해 생성(生成)이 가능하다고 믿은 원시신앙의 애니미즘에서 나온 것으로, 신체(神體)는 대개 호상(虎像)과 신선상(神仙像)을 이룬다. 산신에게 제사지네는 일을 산신제, 산제(山祭)라 하며, 요즈음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성껏 제수를 마련하여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데, 시산제라 한다. 우리 민족이 산신제를 지낸 연원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백제는먼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산곡신에도 미쳤다(先祠神祗及山谷之神)는 기록과,《삼국유사(三國遺事)》에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오악 삼산신(五岳三山神)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가야(伽倻), 신라, 고구려 등의 개국신화는 한 결 같이 하늘에 사는 천자(天子)가 높은 산에 강림(降臨)하여 산신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천신 → 산정강림 → 산신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신관(神觀)을 보여 준 것으로, 특히 고려시대에는 송산신사(松山神祠), 동신사(東神祠)를 비롯하여 각지에 산신당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동산(東山: 駝駱山)의 산신을 호국지신(護國之神)에 봉하는 등, 명산(名山)의 산신령을 호국지신으로 봉하였고, 주(州)․군(郡)에도 진산(鎭山)을 지정하여 산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전국으로 퍼져 동네마다 산신당을 마련하여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지금도 동제(洞祭)의 일부로 남아, 산신을 모시는 유풍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 탄생지는 만뢰산에서 태령산(胎靈山, 421m)으로 길게 남동쪽으로 진행하는 주룡(主龍)에서 남서쪽으로 낙맥하는 지룡(枝龍)이 터를 일구었는데, 이곳 시산제가 치러질 광장에서 보면 도로 앞 전방으로 전개되는 높은 안산이 압(壓)을 하는 형세이다.
<2018년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시산제가 거행될 김유신 탄생지>
4) 후룡(後龍)의 변화가 돋보이는 남지 부부 묘소
남지의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는 지숙(智叔)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조선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손자로,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개성유수, 호조판서, 좌의정 등을 지냈다. 문종 때, 좌의정에 있으면서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단종(端宗)의 안위를 부탁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의 한 사람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으로, 사돈인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사위인 안우직(安友直) 부자(父子)가 죽음을 당했으나, 그는 병(病)이 깊어 화(禍)를 면했다.
이곳 묘소는 장방형의 대형 분묘(墳墓)로, 봉분 아래에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상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및 묘표석이 배치되었다.
남지의 묘표석은 봉분 좌측에 1732년(영조 8)에 세웠으며, 비문은 8대손인 남구만(南九萬)이 지었다.
이곳 묘역의 용맥은 보름달처럼 둥근 무곡성(武曲星)의 양천산(凉泉山)에서 활발하게 이어지는 내룡(來龍)의 변화가 특이하다.
그러나 위쪽에 소재한 부인 묘는 지기(地氣)의 응결(凝結)이 어려운 과룡처(過龍處)를 점하였고, 남지의 묘소도 1〜2m를 앞으로 더 나가 실기(失機)한 것으로 보인다.
부인 묘는 술좌진향(戌坐辰向)을 놓았고, 남지의 묘는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우선수(右旋水), 진파(辰破)이다.
5) 국세(局勢)가 아름다운 이정 부부 묘소
이정(李挺)[1297~1361]의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춘길이며, 부인은 통례부사 김계초의 딸이다. 1326년(충숙왕 13)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봉거직장(奉車直長), 경상도찰방(慶尙道察訪)에 나갔다가 낙향하여 10년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 은거하였다.
1353년(공민왕 2)에 성균관좨주에 탁용(擢用)된 뒤 1357년 영록대부우산기상시(榮祿大夫右散騎常侍)로 집현전학사에 올랐다. 공민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으며, 1358년 형부상서를 지내고 향리인 사양리로 낙향하였다. 그의 가문은 이성계의 유력한 지지 세력이었으며, 특히 아들이 조선 건국에 공이 지대한 개국공신 이거이(李居易)다. 이정은 조선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곳 부부 묘는 선(線)이 분명한 용척(龍脊)에 상하장(上下葬)으로 조성되었으며, 뒤쪽에 이정의 묘가 있고, 아래에 부인 경주김씨의 묘가 있다. 두 사람의 묘소 아래에는 이정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비문은 권근(權近)이 짓고 이정의 아들인 이거이가 세웠다.
이정의 묘표석은 1361년(공민왕 10)에 조성된 후 현재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1994년 6월 2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94호로 지정되었다. 묘표석에는 ‘이서원백문간공지묘(李西原佰文簡公之墓)’ 라고 새겨져 있고, 경주김씨의 묘표석은 ‘변한국대부인김씨지묘(卞韓國大夫人金氏之墓)’ 라 새겨져 있다.
양천산(凉泉山, 養千山, 冷川山, 350m)이 일군 경사가 급한 음맥(陰脈)의 묘역에 부부의 묘가 위, 아래로 조성되었는데, 선(線)으로 이어지는 경사맥(傾斜脈)만 존재할 뿐, 기(氣)를 수용하는 평탄한 양면(陽面)의 흔적이 불명하여 실기(失機)하였다.
또한 우선수(右旋水)를 이루는 명당을 관쇄(關鎖)하거나, 역사(逆砂)를 이루어 기를 갈무리할 청룡이 빈약한 것도 흠결로 작용한다.
형세(形勢)에 따른 이기적(理氣的) 배합(配合)은 신좌을향(辛坐乙向)에 우선수 간인파(艮寅破)가 되어, 정양향(正養向)의 영롱한 양기(陽氣)를 봉분을 통해 내광(內壙)으로 공급한다.
6. 지참물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나경패철, 필기도구, 우천시 우산. 간식 등
7. 신청 방법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이름과 연락처를 아래 신청 등록란에 꼬리말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간산은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시산제가 예정되어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반드시 '다음' 카페에 리필을 요합니다)
8. 연락처
서울, 경기, 전국 : 정철화(010-3745-2357), 김명식(010-2212-3494)
대전 : 정부연(011-9800-0307)
충북(청주) : 김홍길 010-8001-002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충북 지부장)
중부(충주) : 이현철 010-3774-8854,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중부지부장)
경북, 경남 : 박정수 010-3530-2847,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상주 지부장)
전북 : 장원기 010-5638-6905,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북 지부장)
전남 : 손인호 010-6471-104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남 지부장)
첫댓글 간산 참여를 희망하시는 회원들과 벗님께서는 반드시 이곳에 리필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 현장답사, 간산지 선정 등 수고 많이 하셨네요.
동천동 환승센터에서 합류하겠습니다.
양재역에서 합승하겠습니다
전종혁 회장님 태릉역에서 이용합니다.
김채빈선생 양재
3. 11(일) 뵙겠습니다.
태릉입구역에서 탑습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양재역에서 합류 합니다
포항 손정호선생외2명 양재
경원 성원제 선생 죽전
상주쪽에서 오시는분들은 군청옆 국토정보공사 진천지점(진천읍 읍내리457-7) 근처에 주차하세요.
중식은 김유신장군 유허지에서 시산제를 하고 진천읍내 명품순두부에서 할 예정입니다.
정명채 위원님 양재역에서 합류합니다.
태릉에서 탑승합니다. 학회회원2명도 참석할 예정인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야초학회 저를 포함하여 3명 확정, 1명 추가예정입니다.(태릉2명, 양재1명, 추가예정 양재1명)
@野草 김석중 저를 포함하여 4명 참석 확정입니다.
김원규 사장님 참석합니다.
장원기교수와 김석중교수는 제자회원 5명 이상 참석 시킬것
부산에서 윤진성 선생 진천 모임장소에서 합류
김행기 선생 태릉
김홍길 사장님, 진천군청 인근에서 합류합니다.
양재 이응단선생
조찬성 고문님, 태릉역 이용합니다.
무안 손인호 위원님 참가합니다.
서민경 위원님 참가합니다.
하태주 위원님 참가합니다.
예병린 위원님 참가합니다.
현재 카페 댓글 신청자 25명입니다.
태릉 배영식회장 , 양재 이은실 위원장 외 2명
양재 장원기교수
8시50분 죽전휴게소,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冶丁 김명식 감사
정수옥 사장님 양재에서 합석합니다.
일심 전종혁태능서 출발합니다
김영찬외 1명 양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