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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묵은 상처를 치료하다
구효서의 〈풍경소리〉
상처 없는 영혼은 세상에 없다. 세상은 그리고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상처를 주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동시에 세상과 사람은 그 영혼의 상처를 치료하는 병원 또는 상담소와 의사이다. 세상 안에서 사람들로부터 치료가 되지 않거나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는 좀 더 전문적이고 특화된 곳에서 치료 받으며 치유해야 한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라고 적으니 어딘지 머쓱.” 이렇게 시작해, “나는 한 손을 높이 들어 성불사를 향해 흔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모두들. 바이.”로 끝나는 구효서의 〈풍경소리〉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얻은 인간적 상처를 가진 주인공 미와가 그런 특화된 상담소인 성불사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안고 사는 이야기이다. 성불사를 찾아 종교적 물음을 던지고 있음과 없음은 같다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렸다. 종교적 물음을 던지지만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문장들은 승무를 추는 스님의 고깔이 나비 되어 날아가는 것처럼 사뿐사뿐하다.
〈풍경소리〉에는 여러 소리가 등장한다. 미와가 연필로 노트에 적을 때 나는 소리는 ‘슥삭슥삭’이다. 팽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는 ‘스와와와’, 쓰르라미가 두개골을 뚫을 때는 ‘쓰쓰쓰스’, 좌자가 도마질할 때는 ‘탁탁탁탁’, 소심한 주승이 목탁을 칠 때는 ‘뜩뜩뜩뜩’, 수봉스님이 염불할 때는 ‘오이오이’ 소리가 들린다. 풍경이 흔들릴 때는 ‘풍탁퐁탁, 땡강땡강, 띵강띵강’ 같은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는 여러 소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풍경소리〉 겉으로의 주인공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하고 싶은 미와지만, 제목처럼 안으로의 주인공은 성불사에서 나는 여러 소리들이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해 성불사를 찾은 미와에게 성불사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준다. 소리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주변 경치나 정경을 드러내는 ‘풍경(風景)’, 처마 끝에 달린 종으로서의 ‘풍경(風磬)’, 불경을 읽는 ‘풍경(諷經)’이며 이것들이 모두 모이면 ‘대적(大寂)이다. 미와는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고양이 울음을 지우고 엄마의 죽음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도를 하며 남자친구와 이별한다.
이 소설에서 미와가 성불사에 가기 전까지를 이야기하는 분량은 짧다. 소설은 대부분 성불사에서의 사태들을 그린다. 그런데 미와가 왜 성불사로 갔는지에 대한 원인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양이 울음소리이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미와의 엄마는 서른이 넘어 미와를 낳았다. 미와가 크도록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미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고만 말했다. 엄마는 미와를 집에 둔 채 자주 급한 부탁을 받고 집이 있는 영동을 떠나 김천·대전 등지까지 가서 크림을 만들었다. 그 시간에 미와는 집에서 레고 블록을 쌓으며 24년을 고요한 침묵 속에서 지냈다.
미와가 서울에 있는 나노블록 회사에 취직해 자신의 품을 떠나자 뜨거운 양철 지붕에서 굴러 떨어진 고양이 새끼를 움켜쥐고 고양이에게 ‘상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비시니안 상철이를 혼자 보듬다가, 상철이를 좋아하게 된 웬 연하의 미국 남자를 만나, 상철이를 위해서라며 그와 결혼을 감행한 엄마는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엄마는 1952년 임진생이니 미국에 갔을 때 나이를 추정하자면 예순 살 안팎이다.
그곳에서 살던 엄마는 죽어서 와이오밍 주 텐 슬리프 메모리얼 파크에 묻혔다. 그 소식을 미와는 엄마와 결혼한 미국인 남자로부터 들었다. “죽어가면서도 엄마는 나에게 사정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미국인 남자는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리며, 알리지 말아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받았으나 이렇게 고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있노라 말했다”(28쪽).
미국인 남자는 결혼 전부터 엄마가 치료를 거부한 채 혼자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떠난 뒤 고양이가 밥을 안 먹는다고 전했다. 전화 통화에서 ‘고양이 상철의 울음소리’를 들은 뒤 미와의 삶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로키산맥 끝자락에서 울려오는 상철의 울음소리에 잡혀서 환청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때 친구인 서경이 말했다. “뭔가 달라지고 싶을 땐 성불사에 가서 풍경소리를 들어……”(31쪽).
미와가 성불사로 향한 것은 외견상으로는 상철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그러나 상철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것이 환청으로까지 들리게 된 까닭은 미와의 삶이 태어날 때부터 꼬였기 때문이다.
인생의 각 발달 단계는 이전 단계 위에 구축된다.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는 아동의 마음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안나는 유아기에서 청소년기까지를 여섯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의 특징들을 서술하는데 이전 단계의 경험이 이후 단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아버지가 없으며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엄마와의 대화도 없어서 엄마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등은 아동기의 미와에게 외상으로 작용했다. 집안에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엄마와의 대화가 없어 침묵 속에서 살았다. 들린 소리는 레고 부딪치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엄마는……, 엄마는 말과 동작, 동작과 동작 사이의 틈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사람, 그래서 말과 동작, 동작과 동작이 곧장 이어지지 못하고, 한없이 멀고 멀어지기만 하다가, 끝내는 서로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그런 사람이었던 엄마. (25쪽)
미와는 엄마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다. 돌봄을 받으려는 아동의 욕구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정서적 유대를 만든다. 안나에 따르면 부모들은 행동, 타인과의 관계, 심리적 방어, 문제나 외상적 사건을 다루는 방식의 본보기이다. 유아를 무력감으로부터 보호하려면 부모가 필요하다. 어머니와 아동의 관계에서는 ‘의존에서 정서적 자기-의존으로, 다시 성인의 대상관계’로 움직여간다. 이것은 아동기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성인기의 사회적 동반자로의 관계로의 이동이다.
안나의 보고서에 따르면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이 영국을 폭격했을 때 아동들은 어머니가 곁에서 침착하게 있으면 폭격을 맞아도 외상을 덜 입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스커드 미사일 공격에 대한 아동들의 반응을 세심하게 관찰했는데 여기에서도 안나가 조사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미와가 겪은 것이 이런 극단적인 불안은 아니지만 이것이 미와에게는 원초적 두려움으로 숨어 있다.
태어난 방에서 내가 24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레고, 내가 엄마의 배 속에서부터 끌고 나온 것만 같던 레고 덕이었다. (54-55쪽)
애착행동의 요소들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것, 미소를 짓는 것, 매달리는 것, 빠는 것 등 다양하다. 이것들은 모두 양육자에게 근접성을 유발하거나 유지하는 데 쓰인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울거나 웃는 것이다. 이런 소리들은 돌봄 행동으로서 이런 요소에 반응하는 성인에게 근접성을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 성인에게서 사랑하고 다정하고 보살펴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유아의 미소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그러나 미와는 고요 속에서 자랐다.
미와와 엄마 사이에서는 그런 애착이 드러나지 않는다. 미와는 방 안에서 “레고만 있으면 나는 배가 고파도 울지 않았고 늦어지는 엄마가 그립지도 않았어”라고 말할 만큼 엄마와 분리되어 있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제는 죽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타국의 언덕에 묻힌 여자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유아가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환경 범위에서 벗어나는, 냉대 같은 양육자의 행동들은 유아의 애착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그런 붕괴는 미와가 말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미와는 엄마를 객관화시켜 말한다.
어떤 여자가 있었어요.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 나이 서른이 넘어 첫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크도록 아이에겐 아버지가 없었어요. 없었대요, 라고 고쳐 말했다. 여자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딸애한테는 아버지가 없다고만 했대요, 라고.
미혼모라고 하면 될 것을 나는 좌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엄마라고 하면 될 것을. (26쪽)
애착 결핍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애착은 유아기나 청소년기 뿐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의 전 생애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정신 치료를 받으러 온 결혼한 여성이 남성 실험자의 손을 잡을 때보다 남편의 손을 잡을 때 정신은 더욱 안정된다. 모성의 박탈이 유아의 조절장애를 유발하듯이 성인이 애착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도 조절장애를 유발한다. 성인은 애착을 상실하면 병에 훨씬 더 잘 걸리고 사망률이 더욱 높아진다.
엄마가 미와의 아버지와 사랑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드러나지 않으나 아버지는 미와가 태어나기 전에 떠나갔다. 24년 동안 함께 있던 미와도 떠났다. 엄마는 현실에 짓눌려 미와를 보듬지 못했다. 떠난 미와의 자리를 상철이 대신 했다. 엄마는 미와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허전함을 달래야 했다.
상철이는 진짜 뜨거운 양철 지붕에서 굴러 떨어진 고양이 새끼였다. 내가 집을 떠나던 해 여름의 일, 엄마는 24년 동안 방 안에서 레고만 쌓던 내가 자신의 품을 떠나버리자 상철이를 움켜쥔 거였다. (27쪽)
엄마는 보듬지 못한 미와에 대한 대리만족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뜨거운 양철 지붕에서 떨어진 고양이를 보듬었다. 애완동물 가게에서 입양한 것도 아니고 추측하자면 길고양이가 낳은 새끼고양이이다. 그 고양이의 처지와 미와의 처지가 엄마의 눈으로 볼 때는 같았다. 성인들이 어린 동물들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애착의 한 보기이다.
서른 넘은 나이에 아비 없는 아이를 몰래 낳아 24년을 장물인 듯 숨겨 키우고, 그 딸이 품을 떠난 뒤에는 아비시니안 상철이를 혼자 보듬다가, 상철 이를 좋아하게 된 웬 연하의 미국 남자를 만나서, 상철이를 위해서라며 그와 결혼을 감행하고, 미국엘 가고, (29쪽)
미와가 서울로 떠난 뒤 엄마는 무슨 병에 걸렸다. “결혼 전부터 엄마는 치료를 거부한 채 혼자 병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애착 대상이 사라진 상태에서 온 병이다. 그 병으로 인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엄마는 자신이 보듬은, 혼자 놔두면 길고양이가 될 게 뻔한 상철이를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철이를 위해서 그 남자와 50대 중반이 넘은 나이에 결혼을 감행했고 미국으로 갔다. 엄마의 첫 번째 결혼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애착 대상을 지켜줄 사람과 이루어졌다.
엄마와의 애착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기에 미와는 혼자 있는 엄마를 두고 서울로 갈 수 있었으며, 엄마의 미국행을 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를 미국으로 데려간 남자에 대한 감정도 지극히 객관적이었다. 미와는 그 남자를 새로운 아버지로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 사람 역시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남자라는 것”도 미와는 잘 안다.
친구도 없이 방에서만 생활한 미와는 소녀의 ‘거세 콤플렉스’ 경험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엄마는 남근의 속성을 전해줄 수도, 여자 신체의 진정한 가치도 가르쳐줄 수 없었다. 미와는 거세 콤플렉스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를 경멸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성장기에 거세 콤플렉스의 미인지로 인해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으면 십대가 되어서 끊임없는 비난을 드러낸다. 미와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엄마를 비난하지 못하고 따라서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여길 기회도 원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사망했다는 전언을 듣고도 미와는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기껏 꺼낸 질문이 고양이 얘기였다. 그러나 “밥을 안 먹어요”라는 미국인 남자의 대답에 이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감정을 흔들었다.
자나 깨나 고양이 울음소리 환청에 시달렸다. 먼 미국의 로키산맥 끝자락에서 울려오는 상철이의 울음소리에 사로잡혔다. 나를 쥐고 흔드는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30쪽)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미와의 애착 본능을 유발했다. 그러나 미와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미와에게 애착은 의식 속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애착 본능은 저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의식의 세계 위로 상승하고 있다. 고양이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가 놓아두고 떠난 미아와 같은 처지이다. 하지만 미와가 성불사로 간 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였다. 미와는 “상철이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들어보려고, 그 소리 아닌 소리에 집중해 보려고,” 잘 구워진 차파티 지질의 노트를 샀다. 그러니까 미와는 죽은 엄마나 상철이를 위해 성불사에 간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간 것이다. 고양이 울음을 통해 자기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이다. 미와는 엄마를 애도하지 않았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 것은 성불사에 며칠 머문 뒤였다.
내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내가 쓰는 것이 소설도 아니지만, 오늘 나는 글에다 엄마의 죽음을 넣었던 것이다. 죽음, 누군가의 죽음 없이는 정 말, 글이라는 건 되지 않는 걸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엄마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32쪽)
주승은 미와가 이 글을 쓰기 전에 미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죽여요?” 미와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주승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소설이 돼요?” 미와는 죽이지 않는 소설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며칠 있다가 위와 같이 했다. 미와의 엄마에 대한 애도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풍경소리〉의 기원은 엄마의 죽음이지만 미와가 성불사에 온 것은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양이 울음소리로부터 자신의 과거가 연상돼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고양이 울음소리 대신 성불사의 풍경소리며 다양한 소리로 고양이의 울음을 지우고자 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성불사에 온 지 사흘 만에 자신에 대한 애도에서 엄마에 대한 애도로 전환하고 있다.
장두영도 지적하듯이 엄마의 죽음 이후 미와는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가 우울증에 빠진 까닭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애도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증〉에서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동일시하고 상호작용하는 부모와의 관계가 내재화되어 심리 구조를 형성하고, 그 결과 인간의 기본적인 성격이 만들어진다고 암시했다. 이때 대상은 우리의 내면세계와 그것의 심리 작용 안에 항상 존재하는, 강력하게 살아있는 부모 같은 인물이다. 프로이트는 대상의 상실을 성공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상 사이의 관계가 심리적으로 조화를 이루면 대상이 상실되더라도 성공적으로 애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심리 발달과 변형이 일차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발생한다고 암시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인간관계가 이별과 상실을 타협해야 하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슬픔과 우울증〉에서 프로이트는 부모 대상이 개인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울증 환자의 공격은 상실한 대상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인 동시에, 상실한 대상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지닌 객관적으로 나쁜 질적 요소 때문에 상실한 대상이 사랑보다는 증오에 더 집중돼 있는 상태로 남는다.
프로이트는 우울증 환자를 일컬어 스스로를 경멸하는 몰두 상태라고 말했다. 그런 몰두 상태는 우울한 자리에서 가지는 실망과 자책감과는 다르다. 그것은 실존적 죄책감과 비탄이 부재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위장한 채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강박의 한 형태이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에 대한 좋은 이미지의 상실과 대상 자체의 두려운 상실을 모두 막아버리는, 이른바 ‘도덕적 방어’를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의 대부분 분량은 성불사에 머무는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치료와 치유의 과정이다. 성불사에 온 지 사흘 만에 미와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성불사 사람들 덕분이다. 미와가 성불사에서 만난 이들은 주승, 수봉 스님, 좌자, 영차보살, 함씨 등이다. 37년생인 주승은 80세가 되었으나 “목소리나 그런 것은 소심한 여덟 살”이다. 노트북 컴퓨터와 이동전화를 가져가지 않은 미와에게 “핸펀도 안 써요?”라고 물어 보기도 하는 주승이 미와는 자꾸 귀여워졌다. 그런 “주승은 수봉스님을 걸핏하면 너, 인마, 라고 불렀다.” 미와는 아무리 “마흔 살 정도 아래라고 해도 승가의 법도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수봉스님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리고 좌자가 있다.
안정되고 곰살스러워 보이는 사람, 좌자. 엄마와 같은 임진생 용띠. 좌자를 볼 때마다 엄마에 관한 뭔가를 문득 짐작해낼 것 같았으나 금방 막막해 졌다. 엄마라면 언제나 막막해지고 말지. 엄마는 좌자와 너무 다른 사람 (25쪽).
미와는 무감하고 매정했던 엄마를 기억한다. “탄생을 캐묻고 원망하고 저항하고 소리를 질러도” 엄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이승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감각기관이 없”는 것처럼 미와의 “억지와 고집에 참 고요히도 무감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생크림과 휘핑크림 전문가’여서 “정확한 유지방률과 교반의 속도와 강도”로 크림의 색과 맛을 구별하는 능력이 훌륭했다. 그 휘핑크림을 “세상에 다시없는 맛”으로 좋아했던 미와는 자신의 입술에 묻혀주던 크림이 “백옥이라는 이름의 난초꽃잎 같았”다. 엄마는 나머지 크림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 날 새로운 크림 원료에 반드시 넣었다. 그렇게 ‘종자크림’을 만들어 삼십년 가까이 휘핑크림의 맛을 이어가며 모녀의 생계를 꾸려갔다.
“예쁜 귀신” 같은 영차보살이 제공한 ‘특별한 저녁 공양’을 받는 미와 앞에 주승과 수봉, 좌자와 영차가 마치 열병하는 군인처럼 도열한다. 네 사람은 엄숙하고 숙연하게 ‘진실한 배려와 관심’을 표명한다. 네 사람이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합창하자, 미와는 “서울에서요”라고 답한다. 그러나 곧이어 ‘객실, 서울, 충북 영동’ 등의 다른 장소를 떠올리다가 미와는 “내가 어디서 온 거지?”라고 자문한다. 자신이 떠나온 장소가 엄마인지 아버지인지 고민하다가, 자신의 출발지가 “알 수 없이 아득한 곳, 서울이나 그 어떤 장소보다 훨씬 멀고 막막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수봉스님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대적’이 “대단한 적막”이라고 말한다. 주승은 “소리가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이상하고 특별한 저녁 공양이 끝나 성불사에 밤이 온다. 주승도 잠이 들고 객만 홀로 깨어 적막과 너나들이 하는 그윽한 풍경소리를 듣는다. ‘풍경소리’가 자신을 위한 소리처럼 느껴지는 미와에게 ‘상철이의 울음소리’가 한결 편하게 들려온다. 풍경소리가 점점 맑아져서 풍경소리에 더 많은 것들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주승과 수봉, 좌자는 가족이다. “주승과 수봉과 좌자에게 성불사는 가정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아는 이는 풍경과 좌자 뿐, 주승도 수봉도 영차도 미와도 알지 못했다.
어미인 좌자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부처의 세상에서는 주승과 수봉이 부자지간보다 더 막대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수봉이 주승과 자신이 아닌 더 아득한 데서 기원했다고 여기는지도. 그리 여긴다면 좌자가 어찌 입을 열겠으며 무슨 얘깃거리가 되겠는가. (79쪽)
엄마와 미와는 모녀지간보다 더 막대한 관계이다. 미와 역시 엄마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아버지가 아닌 더 아득한 데서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특별한 저녁 공양을 할 때 절 식구들은 미와에게 “어디서, 오셨습니까?”를 합창했을 것이다.
엄마와 둘이서 꾸렸던 한 부모 가정에서의 고통스러웠던 나날, 남 같았던 엄마 죽음 소식과 함께 들려온 고양이의 울음소리, 남자친구의 집착과 거부감 등은 성불사의 소리들에 의해 조금씩 씻겨간다. 미와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탐문하며, 모녀 관계와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더 큰 이유”를 발견한다. 존재의 시원은 그런 데 있다.
꼭 엄마 때문은 아니겠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어딘가 세상이 몹시 쓸쓸해지면서 상철이의 환청이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56쪽)
절 식구들은 미와에게, 아니 성불사를 찾는 모든 내담자들에게 아주 잘 훈련된 상담자 조직이다. 주승은 치료의 방향을 정하고 수봉스님은 내담자를 직접 치료한다. 좌자에게서는 엄마와의 인연생기因緣生起를 떠올리고 영차보살에게서는 엄마의 솜씨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영과 공과 빵이다.
수봉스님이 미와에게 보여준 것은 대적광전 바깥벽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이다.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한 열 장의 그림이다. 여덟 째 그림에는 커다란 원이 자리한다. 초동이 소를 찾고, 소 등 위에 올라타서 피리를 불다가 소가 사라지고 초동도 사라진 자리에 “텅 빈 빵”이 자리한다.‘빵=영=공=원’이라며 수봉은 심우도를 본 대로 말하면서, ‘피리소리’가 어디로 갔을지를 묻자, 미와는 없어졌는데 어디로 가냐고 다시 되묻는다. 수봉은 “아주 없어지는 것 같지 않”다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신 “영, 공, 빵으로 있”다고 말한다. 수봉은 미와에게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돼버리고 말았겠지만 그건 우리가 들을 수 없게 됐을 뿐 어딘가에는 있다”라고 한다. 미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돌아간 것이 아닐지 되묻는다.
저 그림이요. 찾는 이도 찾은 소도 스윽 없어지고 마는 그림이잖아요. 그러면 저 피리, 피리소리도 없어지는 거잖아요. 어디로 갔을까요, 피리소리 는. (61쪽)
수봉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와는 ‘묘음존왕불’이 “밝은 달빛 아래 묘음”이라는 뜻이며, ‘묘음’이 ‘고양이 소리 부처’ 또는 ‘묘한 소리’라는 뜻임을 알게 된다. 미와는 “밝은 달빛 아래 묘한 소리의 부처”라는 말 속에서 ‘소리’가 ‘부처’임을 깨닫는다. 성불사에서 났던 모든 소리들은, 아니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소리의 부처”로 함몰된다. “소리의 부처”로부터 모든 소리들이 유출된다. 그것은 존재의 시원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 공, 빵의 소리”, 다시 말하면 영, 공, 빵인 것이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니 오온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모두 영, 공, 빵이며 그것을 바로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고액임을 알게 될 터이다. 미와는 지금까지 그것들에 매여서 괴로웠던 것이다. 깨침도, 깨쳤다는 법도, 깨쳤다는 사람도 없는 이것이 공이다.
수봉이 나를 영, 공, 빵이라 한들, 주승과 미와가 나를 대적이라 한들, 그것이 내 이름은 아니어서 영, 공, 빵 따위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으니…… 나는 다만 가끔씩 사람의 혼을 후려치듯 빼앗고, 잠에서 홀연 깨어나게 하거나 또한 꿈속에다 과격하게 빠뜨리며, 찰나일망정 세상이 소리이고 소리가 세상의 전부임을 두려워하며 겪게 할 뿐이다. (64-65쪽)
멜처는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에 대해 설명하며 나쁜 경험일지라도 좋은 인물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나쁘고 고통스런 경험들에 의해 종종 깨진다. 그들은 그 경험들을 수용하고 거기에 동화되어 가면서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진다. 동시에 우리는 “좋은” 경험들에 의해 깨어진 내담자들을 본다. 그들은 좋은 경험들이 과대망상에 불을 붙이거나, 또는 반대로 감당할 수 없는 감사와 빚진 느낌들을 발생시킴으로써 붕괴된 사람들이다.
미와는 마침내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 모두로부터 배우는 능력을 얻었다. 나쁜 경험들에 대해서도 엄마에게 원인을 돌리는 데에서 벗어났으며 동시에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30년의 상처도 짧은 시간 안에 치료되고 치유된다.
미와는 발견한다. 엄마와는 “세상에 다시 없었다던 휘핑크림의 맛, 그 백옥 난 같았다던 빛깔 하나로도 연화장의 인연”이었을 것이다. 자다가 난폭하게 깨어난 미와에게 “바람 한 점 없이 달빛만 교교한 밤이었으나 풍경소리를 들려주어 미와가 잠들 수 있도록 나는 허공에 주문을 넣었다.”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도 소리를 냈으니 이것은 공과 색이 같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와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성불사를 떠날 채비를 하게 된다.
소리를 듣는구나. 어젯밤 풍경소리도 들었겠구나. 그럼 잘 가시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