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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I. 건국신화-미노타우르스 신화 ll. 그리스 문화의 시작-에게 문명의 역사와 문화 1-1)미노아 문명의 역사 1-2)미노아인의 문화 2-1)미케 네인의 역사 2-2)미케 네인의 문화 III.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i 폴리스의 성립 ii. 폴리스의 발전 1) 아테네의 제도 2) 스파르타의 졔도 iii.페르시아 전쟁과 아테네 제국 1.페르시아의 침공 2. 페르시아 전쟁 후의 상황 IV.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의 쇠퇴 i .펠로폰네소스 전쟁 ii .그리스의 쇠퇴 V. 핼레니즘 문화의 성립 i . 알렉산더 제국의 성립 ii. 헬레니즘 문화 *.로마의 건국 신화 <참고문헌>
들어가며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과거를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으로 현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통해 현재를 알고자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리스와 로마 문명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류 역사의 고대를 살핌으로써 그리고 그 문명들이 지금까지 흘륭한 유산으로 사람들에게 생각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두 문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I. 건국신화-미노타무르스 신화
그리스의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와 트로이센왕의 딸 아이드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아이게우스는 동명성왕이 유리에게 했던 것처럼 테세우스가 성장한 뒤 자신의 신발과 칼을 징표로 삼아 그에게 찾아오게 했다. 테세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오자, 그의 계모 메디아는 그를 독살하러 했지만, 발각되어 도망한다.
한편, 그 무렵 아테네에서는 크레타왕이 미노스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이 조공의 내역은 각각 7명의 소년과 소녀로서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의 밥이되기 위한 것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포세이돈의 저주로 미처버린 왕비 파시파에와 흰 황소 사이에서 태어난 아돌로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탄생에 관하여도 설화가 있는데, 미노스는 그의 어머니 에우로몌가 졔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3형졔중 장남이다. 미노스는 그의 계부 아스테료스왕이 죽자 크레타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제우스의 아들인 만큼 신들에게 소원은 빌면 무엇든 꼭 들어 준다고 자랑하면서 왕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우선 포세이돈에게 제단을 쌓고 빌기를 제물을 바쳐야겠으니 바다에서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과연 멋진 흰 황소 한 마리가 바다에서 헤엄쳐서 나왔다. 미노스는 흘륭한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 아까와서 다른 소를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포세이돈은 화가 나서, 그가 준 황소를 보고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욕정을 가지게 하는 벌을 내렸다. 그래서, 정을 통하게 되어 미노타우르스라는 반신 반우의 괴물이 태어나게 되었다.
또한, 미노타우로스는 힘이 세고, 성질이 거친 괴물로 섬을 돌아다니며 갖은 행패를 부렸고, 나중에는 미노스가 이를 부끄러이 여겨 그를 감추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에 가두어 사람을 잡아먹으며 살게하였다. 테세우스는 이 재난에서 국민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희생될 소년으로 가기를 자청했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아버지에게 갈 때는 검은 돛을 달고 가지만, 올 때 자신이 살아있다면 횐돛을 달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일행이 크레타섬에 도착해 미노스왕 앞으로 끌러 갔을때 이 자리에 참석했던 왕녀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게 칼과 실뭉치를 주어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미노타리우스를 무찌르고, 미궁을 나을 수 있었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아테네로 항해하던 중 나크소스에 머물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아테네 여신의 계시를 받아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나왔다. 아테네에 거의 다달았을 때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잊고 흰 돛을 달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검은 돛을 보고 자살하여서,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ll. 그리스 문화의 시작- 에게 문명의 역사와 문화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성립된 지중해문화로 에게문화를 들 수 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 그리고 크레타 섬을 잇는 세모꼴 속의 무수한 섬에 그리스 문화도 아니요 오리엔트 문화도 아닌 독자의 문화가 형성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문화를 양자의 중간형태요 과도기적 형태로 보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에게문명의 특색은 거대성을 지향하는 오리엔트 예술에 비해 그 건축, 조각 등의 규모가 적으나 실용과 균형, 그리고 색채에 있어 탁월한 수준을 보여 고전문화에 접근한 듯하나, 그 사회구조는 오리엔트의 관료제와 공납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도리어 오리엔트 전제국가에 더 가까웠다.
에게문명의 중심은 크레타 섬과 미케네(Mycenae) 그리고 트로이(Troy)다. 이 문명의 역사도 고대 이집트의 역사처럼 오래된 것들이다. 고고학자들이 시대구분한 바에 따르면 에게문명은 이집트의 고왕국시대에 해당하는 ① 초기(B.C. 3000년경부터), 중왕국시대에 해당하는 ② 중기(B.C.2000경부터), 신왕국시대에 해당하는 ③ 후기(B.C. 1500년경부터)로 나누어진다.
19c 중엽까지만도 전설상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은 슐리이만에 의해 1870년 소아시아의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로 지목되는 곳을 발굴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하였다.
1900년부터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는 크레타섬 북쪽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labyrinth)'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트로이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에반스는 크레타발굴에서 선상문자가 기록된 토판문서를 많이 발견하였다. 1952년 벤트리스는 선상 B문자(Linear)의 해독에 성공하여 미케네문명에 환한 연구가 획기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1-1) 미노아 문명의 역사
크레타를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아 문명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B.C. 3000년기 중엽에 청동기시대로 들어섰으며, B.C. 2000년을 지나서는 선상 A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문명의 담당자는 인도유럽 어족이 아니라 소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으로 생각되고 있다. 미노아문명은 B.C 2000년기에 접어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크노소스에서 미노스왕의 궁전이 건축되었다. B.C l6C에 두 번(1570및 1500 B.C)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이 궁전은 지진의 탓인지, 또는 이무렵 이집트에서 추방된 힉소스족의 침입의 탓인지 정확하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B.C 1450년 경에는 선상 A문자 대신 B문자가 나타나는 바, 이는미케네인이 크레타를 지배하게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3.C1400년경 크노소스 궁전은 파괴되어 다시 재건되지 않음으로써 미노아 문명은 종말을 고했다. 이 원인에 대해서는 1960년대의 새로운 발굴에 의해 테라섬의 화산폭발로 인한 화재와 대해일의 결과라고 생각되고 있다.
1-2) 미노아인의 문화
미노아인은 해상무역에 종사하고 도자기 제조슬이 뛰어났다. 미노아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달하고 유복하고 상류층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미노아의 예슬은 화려하고 생생하며, 인간성과 개성에 충만해 있다. 바다와 태양. 수목과 꽃, 축제와 스포츠에 도취되어 있었다. ' 위와 같이 미노아 예술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미노아 예슬의 대표적인 것은 궁전의 프레스코화이다.
2-1)미케네인의 역사
미케네문자인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미케네 문명의 담당자는 그리스인의 선조라는 것이 확인 되었다. 그리스인은 B.C 2000년경부터 남하하여 그리스 본토에 자리잡고 원주민과 혼합하였다. 그들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반도에 많은 소왕국을 건설하였고,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왕국중 '황금의 미케네'로 일컬어질 정도로 부강한 맹주격이 되었다. 미케네는 미노아 문명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
테세우스의 전설은 미노아와 그리스 본토와의 관계의 일단을 말해주는 것이다. B.C I5세기 중엽에는 미케네가 크노소스를 지배하게 된 것 같으며,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후에는 미케네가 에게해의 패자가 되었다. 트로이전정(1240'30 B.C; 일설에는 1260 B.C경)은 전설과는 다르게 강대해진 그리스 본토의 소왕국들이 미케네를 맹주로 결합하여 소아시아로 진출한 대원정이었다. B.C 12C 결국 그리스인의 이주자인 도리아족에 의하여 몰락하였다.
2-2)미케네인의 문화
미케네는 미노아와는 달리 상무적이며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정치적으로 기븐적으로 공납제에 의한 왕정으로 호메로스에 나오는 그리스왕들에 비하여 약한 평이었다. 공유지와 사유지가 공존해 있었고 공유지의 존재는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며 사유지의 존재는 평민이 경제적 자립을 누리고 있으며, 미케네의 국왕이 오리엔트적 전제군주화하는 것을 억제하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미케네인들도 제우스나 포세이돈 등의 후대 그리스 사람이 믿었던 신들을 믿었으나 미노아인들이 믿었던 뱀의 여신을 더 신봉했던 것 같다. 미케네의 사회구조는 국왕 밑에 귀족적인 전사계급이 있었고 다음에 관료인 서기, 그 밑에 상인과 농민이 있었으며 최하층에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미케네 사회는 오리엔트 사회와 그리스 사회의 중간형 이었다.
III. 폴리스의 성립과 발전
i 폴리스의 성립
그리이스에는 육지와 바다가 혼재되어 있고 에게해는 물결이 사납고 변덕스런 바다가 아니어서 좋은 날씨에는 소아시아로 바다를 건너갈수있다. 따라서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보다 발달한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이스 국토 자체는 바다의 침식과 산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는 거의 없다. 따라서 소규모 공동체가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구릉지대라도 각기 표고가 상이했기에 서로 상이한 농업을 가졌다. 이런 자연조건이 무수한 소규모의 Polis를 발달케 되었던 것이다.
미케네 사회가 붕괴된후 그리스 본토에는 3개 내지 4개부족으로 구성된 소왕국이 여기저기 나타났으며 현실적인 생활단위는 개별가족으로 구성된 촌락공동쳬였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미약하였으며 토지소유에 있어서도 미케네와는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Kleros, 분배지)의 소유자로서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폴리스 형성은 도리아족의 남하에 따른 혼란과 타국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고,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츤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을 형성하였다는 집주설이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호메로스 시대가 끝나는 B.C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외가 적지 않다. 그렇기는 하나 여러 촌락의 중심시로의 집주로 폴리스가 성립한게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스의 중심이 되는 도시는 대체로 해안으로 부터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하였으며, 도시는 폴리스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중심이었다. 도시안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건립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소구내지 산이 있으며 아크로폴리스에 인접해서 아고라tagora)라는 광장이 있다. 이 곳은 시장인 동시에 정치를 포함한 모든 공동활동의 장소이며 사고의 장이기도 하였다.
폴리스 성립 당시 중심시로 모여든 사람은 주로 귀족과 수공업자 내지 상인들이었고 농민은 촌락에 머물었으며, 귀족도 그 근거를 그대로 농촌에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스 성립이전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파괴되는 일이 없이 폴리스 전체가 하나의 시민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노예와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자유인과 재유외인(metics)도 완전한 의미의 시민은 아니었고, 오직 폴리스를 형성하는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내지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스스로를 헬레네스(Hellenes)라고 부르고, 이민족인 바르바로이(Barbaroi)와 구별하였으며, 헬레네스가 사는 곳을 본토와 식민시를 통틀어 헬라스(Hellas)라고 하였다. 폴리스들은 델피의 아폴로(apollo)신전을 중심으로 Amphictyony를 맺고, 기타 정치적군사적 동뻥을 맺기도 하였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B.C 776년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여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은 서로 전쟁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동족의식이나 부분적 결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쳬가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끝끝내 도시국가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ii- 폴리스의 발전
B.C. 8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이들 그리스인은 도시국가(Polis)를 이루어 특이한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을 '도시적 생물'이라 했지만 그리스의 도시정치는 당초 왕제였다가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으로 발전하여 동방국가의 전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학자들은 그 이유로 포도와 올리브 등 원예농업 또는 재배농업의 발전을 들고 있다. 이 농업은 곡물농업과 달라 해외수출에 적합한 포도주와 을리브유를 생산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촉구할 뿐 아니라 대규모의 노동노예제와 노예 소유주층의 대두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경제발전으로 특히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는 지중해 해안선일대에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농산품 뿐만 아니라 도기 등 수공업제품을 수출하고 그 대신 곡물을 수입하였으나 안으로는 자유농민의 빈곤화와 대상인, 대농장주의 대두를 초래하여 심각한 계급항쟁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국가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들 수 있다.
1.아테네의 제도
원주민 없는 아티카(Attica) 지방에 정착하여 여러 츤락의 집주(synoecismos drsymploiteia)로 이루어진 아테네는 폴리스 민주정의 대표적 사례다. 처음 왕제를 실시했던 아테네에서는 차츰 왕권이 쇠퇴하고 강력한 토지귀족이 대두하여 B.C. 7세기경까지 귀족정이 실기되어 왕을 포함한 9명의 행정집행관(Archons)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또 일반 중장보병으로 구성되는 민회(Ecclesia)에서 선출되어 그 임기가 1년으로 제한되고 장노회(Areopagus)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귀족정은 자본주의적인 재배농업과 화폐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유농민의 채무 노예화로 인하여 B.C. 594년 솔론(Solon)의 개혁을 단행케 하였다. 솔론은 절정에 이른 빈부의 차이와 그로 인한 사회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고리채 정리을 단행하여 채무 노예를 금하는 한편 (잉크가 아니라 피로 썼다)고 일컬어진 드라콘(Dracon)의 형법을 폐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재산소유에 따라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금권정치(Timocracy)를 실시하였다. 즉 모든 시민을 그 재산소유에 따라 제 1계급(500 메딤노스(통), pentacosiomedinnoi), ◎ 2계급(300메딤노스, 말 한 마리를 가진 자 Hippeis), 졔 3계급(200메딤노스, 소 두마리를 가진 자, Zeugitae), 그리고 졔 4계급(200메딤노스 이하 즉 무토지 무년수의 노동자, Thetes)으로 구분하고 전시에 말을 가진 중장보병(hoplite)으로 출진하여야 할 자는 1, 2계급에 한정하고 3계급은 말 없는 중장보병, 4계급은 경장보병으로 조수나 척후병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또 참정권(민회참석진)은 3계급 이상으로 한정하고 제 4계급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토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농민과 채권을 상실한 귀족 어느 편에서도 불만을 사게 되어 실패하고, 평민·귀족의 투쟁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B.C. 561년 페이시스트라우스(Peisistratus)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Despos 또는Tyranos)가 되었다. 아들 히피아스(Hippias)와 히파르쿠스(Hippuchus)에게까지 계승되어 510년까지 계속된 독재정(Tyranny)기에는 귀족세력의 억제와 토지재분배의 실시로 아테네민주정의 기초가 확립되었고 해외식민의 장려와 족외노예(extratribal slave)의 본격도입으로 노예제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은 B.C. 508년에 단행된 클레이스테네스(Kleistenes)의 개혁으로 완성된다. 그는 종래의 종족적 4부제를 폐하여 데모스(자치구, 모두 100 구) 단위의 지역적 10 부족제로 개혁하였으며 독재자의 출현을 예방하기 위한 도편추방제(Ostrakismos), 아르콘 9명을 포함한 행정위원(50인)을 뽑는 500인 평의회 등을 창설하였다. 또한 민회(ecclesia)의 입법권 강화와 민중재판소(heliaea)의 설치로 민주정의 초석이 놓여졌다.
2.스파르타의 제도
겨우 5분의 1이 평야인 그리스에는 크고 작은 도시국가가 성립되었다. 이들 도시국가는 대조적인 두 형태, 즉 아테네형 폴리스와 스파르타형 폴리스로 크게 나늘 수 있다. 스파르타는 가장 보수·군국·사회주의적인 도시국가로서 시종 왕제로 일관된 정치사, 변화없는 능업경제사회, 엄격한 군대식 사회제도 등으로 너무나 유영하다.
험산에 들러싸여 성곽이 필요없고 400년 동안 '에우로타스(Eurotas)강변에 적군의 캠프파이어를 보지 않았다'는 스파르타는 B.C. 650년경에 일어난 원주민(Messenian)의 반란에 자극 받아 류쿠르구스(Lucurgus)의 일대 사회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로써 모든 스파르타인을 직업군인이 되고 요람에처 무덤까지 구유재산으로 변했다.
스파르타의 신분구설은 ①스파르타 시민(Spartiatai, 약 1만), ②주변민(Perioikoi. 약 3만), ③농노(Heilotai, 약 1만)로 구분되어 1과 3은 공동지주 대 국유노예의 관계였다. 10배애 탈하는 피정복민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양왕제, 스파르타식 교육졔도, 비밀암살정책, 철화제도 등이 실시되었다.
왕은 두 왕족 중애서 각각 한 사람을 뽑아 두 왕이 서로 견재캐 하였으며 60세이상의 장노 30명으로 장노회(gerusia)를 구청, 재판과 입법권을 행사케 하였다. 또 30새 이상의 성년 스파르타 시인으로 구성되는 인피(apella)는 장노치의 선전, 강화 등 중요 의결사항을 승인하는 권리를 갖게 했고 감독관(Ephoros) 5명을 두어 행정을 감찰하였다.
토지는 시민각인에게 분할지(kleros)가 균분(Perioicoi에게도 적은 토지를 주다)되어 모든 시민이 일하지 않고 군사훈련에 충실토륵 만들었다. 빈부의 차이를 없애기 위하여 금·은화를 폐지하고 10개를 나르려면 이두마차를 아용해야 할 정도로 무거운 철봉화패를 유통시켰다.
모든 스파르타 어린이는 국유로서 출생아는 깊은 계곡에 던져져서 살아남는 아이만 유모에게 맡겨서 양육되었다. 7세가 되면 모두 학교에 입학하여 달리기, 씨름, 원반던지기, 군가합창 등 엄격한 교육· 훈련을 받았는데 여자도 남자와 뜩같은 훈련을 받아 수치심을 없에고 건장한 모체를 갖도륵 했다. 교육은 문답식으로 행해졌으며 최상의 대답은 간결하고 쇠돈처럼 무거운 말이었다.
스파르타는 노예의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암살정책틀 실시하였다. 이를 비밀정책이라고도 했는뎨 그 방법으로는 ① 피정복민에게 전쟁종군 희망자를 뽑아 종군하면 자유인으로 해밤시킨다고 선전한다. 어느 때는 2.000 명의 농노가 이를 지원하여 꽃다발을 목에 걸고 신전지하실로 행진해 갔으나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② 공공연하게 노예에 대한 선전포고가 고시되고 밤중에 젊은 스파르타 시민이 단검을 들고 노예를 살해했다. 3. 노예를 일렬로 새워 가장 강하고 용감한 자를 골라 죽였다고 한다.
III. 페르시아제국과 아테네제국
i. 페르시아의 침공
그리스의 지중해 진출로 오리엔트의 통일세력인 페르시아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리하여 전후 세차레에 걸친 페르시아군 침략이 감행되었으니 이 전쟁을 그리스인은 페르시안전쟁 (B.C. 500-479)이라 했다.
페르시아전쟁은 B.C.500년에 소아시아 서안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도시가 페르시아에 모반함으로써 일어났다. 이 이오니아 반란의 주동은 밀레투스(Miletus)시였고 600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353척의 이오니아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B.C.494년 6년만에 진압되었다.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Darius)는 그리스로 (흙과 물)의 사자를 보내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오만한 사자를 땅에 생매장하고 말았다. B.C.490년 다리우스는 20만 대군으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마라톤(Marathon)전쟁에서 대패하여 퇴각하였다. 이것을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이라 한다.
페르시아군을 격퇴한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주장에 따라 해군을 증강하고 피라이우스(Piraeus)군항을 건설하여 재침에 대비하였다. 페르시아에서는 크세르크세르(xerxes)가 즉위하여 8년간이나 원정을 준비하더니 마침내 헬레스폰트(Hellespont)의 선교를 거쳐 몸소 25만 병력을 거느리고 그리스에 재침하였다.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전투(B.C.480)에서 아테네해군에 패전하고 이어 플라타이아(Plataea)전투(3.C.479)에도 져 철수하고 말았다.
ii- 폐르시아 전쟁 후의 상황
아테네에서는 상공인의 경제적 지위나 발언권도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하여 기초가 마련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르시아 전쟁후에 더욱 발달하였다. 에피알테스는 아레오파구스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후에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시대가 완성된다(기원전 457'429경).
주목되는 것은 민회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500인회의 권한이 민회에 제출할 의안의 준비와 민회에서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다음으로 10명의 장군들의 권한이 확대되어 아레오파구스회의 권한을 완전히 누른것이다. 페리클레스가 30년 가까이 아테녜를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으로서 매년 민회에 거듭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수당제의 확대와 국고부담을 조금이라도 즐이기 위하여 페리룰레스는 부모가 다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만 한정하는 시민권 제한법을 만들었다(이는 로마와 아주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국고에 의한 수당제의 확대와 철저한 추첨제, 그리고 1년 임기제는 시민으로서 원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민회의 권한강화는 시민 누구나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적으로는 많은 수가 참여하는 민주제는 아니었으나 평등한 정신에 입각한 민주제였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을 경우에는 아테네식의 민중지배가 쉽게 혼란에 빠지고, 이른바 중우정치로 타락할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었다.
IV. 펠로폰네소스전쟁과 그리스의 쇠퇴
i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따라서 대립의 소지가 컸다. 아테네가 델로스 등맹을 발판으로 강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자 스파르타와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네가 코린트 및 메가라를 위협하면서 코린트 지협을 장악하는 동시에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려 하자 스파르타와 층돌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30년간 평화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던 아테네는 도시와 상업상 이해관계의 충돌에 있는 코르키라와 동맹을 하게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에 30년간이나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이 나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아테네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모든 해외 재산을 포기하며 많은 성들이 파괴된다.
ii .그리스의 쇠퇴
스파르타의 후원 하에 아테네에는 10인 참주 정치가 시행되나 그들의 공포정치는 반항을 불러 일으켜 얼마 안가서 민주정치가 회복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보다 고액의 공납금을 요구하고 마침 페르시아의 분쟁을 틈타서 소아시아에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를 틈타서 아테네의 제국들은 동맹시를 규합하여 테베를 증심으로 결합하였다.
아테네는 제2차 해상동맹을 결성하고 테베와도 동맹을 맺었으나, 테베의 급신장으로 등맹도 곧 깨진다. 메세니아가 해방되고 스파르타는 그 지도력을 상실하여 곧 테베가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테베는 아테네와 같은 재력이나 문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지도자의 전사로 곧 패권도 사라지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테베/스파르타 사이의 패권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결정적인 승리를 주지않고, 개별적인 폴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려는 분립주의 더욱 강화시키고. 이에 따라 폴리스 상호간의 대립과 분쟁을 격화시킴으로 그리스 정치정세를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혼란과는 달리 발달을 계속한 그리스의 문화는 로마문화로 이어지며. 그들의 철학. 역사. 과학, 문학은 유럽문명 뿐만아니라 지금의 모돈 세계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V. 헬레니즘 문화의 성립
i . 알렉산더 제국의 성립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쇠퇴하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때 북쪽에 인접한 전제적 후진국 마케도니아(Macedonia)가 일어났다.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Philip II, B.C.355-336)는B.C,338년 카이로니아(Chaeronea)전투에서 그리스연합군을 무찔러 마침내 그리스를 복속시켰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이 때 '드라마는 이제 끝났다'고 외쳤는데, 이 말은 폴리스의 최후를 상징한 절규였다.
아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은 20세의 약관에 즉위하여 B.C.334년 35,000병력으로 동방원정의 길을 떠났다. 소년시절 테베에 블모로 있을 때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장군으로부터 테베 밀집전법을 배웠으며 이를 개량하여 마케도니아 밀집전법을 개발한 그는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로 향했다. 도중 저항하는 섬도시 티이르(Tyre)를 공격하는 데 6개월이 걸렸으나 함락한 뒤 8,000주민을 학살하고 30,000을 노예로 팔았다.
무저항 상태로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건설하고 리비아 사막을 3각형으로 행진, 다시 돌아와 바빌로니아로 돌진했다. B.C. 331년 아르벨라(Arbela)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 ( Darius III )군을 무찌르고 바빌로니아에 입성, 무궁무진한 금은보화를 착취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의 피난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소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때부터 등양적인 전제군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그에 대한 암살 음모 사건이 일어났고 친구 클리투스(Clitus)를 죽여 크게 후회했다. 아프카니스탄 산악지대로 재진군한 알렉산더는 도처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인더스강구까지 도달했고 동서해로를 탐사하였다.
바빌로니아로 돌아은 알렉산더는 수도 바빌론에 정도, 동서상흔을 권장 스스로 두 아시아 여자와 결혼하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기본통치방침은 아리스토렐레스의 건백서에 따라 그리스인에 대해서는 통솔자(hegemon)요,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지배자(despotes)에 서는 것이었고 전자는 우인으로 대접하되 투자는 동식물과 같이 하대하는 것이었다.
B.C.323년 알렉산더는 나이 블과 31세에 숙병으로 횡사하여 원대한 제국건설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알렉산더의 사후, 제국은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쿠스(Seleucus)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안티고누스 고나타스(Jetigonus gonatas)의 세 전제국가로 삼분되었다. 그러나 3세기나 계속된 이 후계자시대를 헬네니즘시대(Hellaistic age)라 블러 그 문화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ii. 헬래니즘 문화
헬레니즘(Hellenism)시대는 알렉산더의 동방정복으로 그 영역을 동방으로 인더스강 유역, 서로는 이탈리아까지 확대시켜 그리스문화의 체계화를 가져왔다. 문화의 중심지가 그리스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갔을 뿐아니라 문화의 성격도 달라졌다. 고전적인 그리스문화는 폴리스와 민족의 제약을 받아 협소성을 면치 못하였으나, 헐레니즘문화는 폴리스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바탕으로 한 보편주의의 차원을 지향하였다.
이같은 헬레니즘문화의 특징은 철학과 과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헬레니즘 철학은 흔히 에피큐로스(Epicurus, B.C. 340-270)의 향락주의(ecureanig)와 제논(Zenon.B.C.340-270) 및 스토아학파(Stoics)의 금욕주의(Stoicia)로 대표되고있다. 이 두 학파는 서로 다른 극단을 강조하고 있으나, 경건과 애국주의가 사라진 이 시대의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개인의 생활을 합리화하고 행복과 만족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추구하는 수신처세의 인생철학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에피큐러스는 도피적 개인주의를 창도하고 제논은 마음의 평장과 세계시민주의를 재창하였다. 그에 따르면 영혼불멸이나 초자연적 힘은 없다. 따라서 내세란 실재하지 않으며 현세만 있는 것이며 인간의 행복은 최대한의 쾌락(maximm of pleasure)과 고통의 회피(avoidance of pain)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관능적 탐닉과 단순하고 조용한 정신생활을 누리자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본래의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성과' (Mahaffy)라 일컬어지는 금욕주의철학도 그 기본사상은 인간이란 이 국가 저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이요 신의 소산이라는 데 있으며 만족과 행복을 얻는 비결은 쾌락을 취하기보다 이성으로 욕정을 완전히 참아내는 데 있다고 주장한 데 있다. 세계는 자연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생의 목적은 이 자연법에 순응하여 생활함으로써 마음의 내적 힘과 평화를 얻는 데 있다. 이처럼 스토아 사상은 비록 개인주의적이나 반사회적이 아니라 세계주의적이다. 그래서 이 사상은 뒤에 로마법과 기독고 사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의 하나는 과학의 발전에 있다. 철착은 인간의 내적 세계, 즉 윤리문졔를 추구하였으나 과학은 인간보다 인간이 그 속에 사는 외적·현상적 세계를 추구하였다. 과학과 더불어 의학도 발전을 하였다.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Hippocates.B.C.460경 출생)는 (건강한 생활에 법칙이 있듯이 병에도 법칙이 있다)하여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사치하지 않으며, 지혜를 사랑하지만 나약한 의지에는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부론 개인적 과시의 수단이 아너라 공공의 봉사론 위한 도구로 간주한다. 우리는 가난은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단지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음을 수치로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이 개인적인 일뿐만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관여해야 한다고 믿거니와, 이는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사람은 무관심한 자로서 뿐만 아니라 쓸모 없는 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 『추도 연설」중 '아테네인의 이상'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동방의 사치를 모방할 정도로 열광했음을 인정한다. 나는 어떠한 위업도 심지어 전세계를 정복하는 일마저도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즐 모른다면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기」
* 로마의 건국 신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에네아스)에는 로마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트로이가 함락되던 그 밤. 트로이의 영웅이던 Aeneas는 전쟁의 와중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도 아버지와 아들과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과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가가스로 탈출하였다. 트로이를 다시 건설하기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의 일행은 트라키아. 델로스 등지를 거쳐 이타리아 근처까지 갔으나 풍랑을 만나 아프리카 해안까지 말려갔다. 그곳은 당시 티루스의 이민들이 그들의 여왕(Dido)의 지도하에 새로운 국가를 세워, 나날이 융성해가고 있던 터였다. 디도는 본래 티루스의 왕 베로스의 딸이며.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피그마리온의 여동생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쉬카이오스라고 하는 대단한 재산가였는데, 피그마리온이 재산에 눈이 어두워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디도는 많은 친구와 부하들을 데리고 몇 척의 배에 쉬카이오스의 재물을 가득 싣고 티루스를 탈출하여 이곳으로 온 뒤 주민들에게 한 마리의 쇠가죽으로 들러칠 땅이라도 좋으니 나눠 달라고 부탁했다. 주민들이 이 부탁을 받아들이자, 그녀는 쇠가죽을 길게 잘라 몇 개의 끄나플을 만들고 땅을 들러친 다음 그곳에 성을 세우고 비루사(쇠가죽)라고 이름 붇혔다. 바로 이 성을 중심으로 카르타고가 생겨난 것이다.
아에네아스 일행이 그 곳에 도착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디도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았고 환영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 때 벌어진 경기에서 아에네스의 솜씨에 반한 여왕은 그의 모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사모하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몇 달의 꿈같은 시간이 지난 뒤 아에네스는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어 디도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디도는 사정하였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아에네스는 이탈리아로 향하게 되었고 두 번씩이나 애인을 잃은 디도는 장작과 더달어 한줌의 재로 변했다.
아에네스가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가에 닻을 내렸을 당시, 그 곳을 지배하고 있던 왕은 라티누스(Latinus)였는데, 그에게는 라비니아(Lavinia)라는 딸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웃 나라 왕족들에게 구혼을 받고 있었다. 그 중 투루누스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뎨, 그는 라비니아의 부모에게 호감을사고 있었다. 그런데 라티누수라는 어느 날 꿈속에서 선친인 화노스로부터 라비니아의 남편은 다른 나라에서 건너 온 사람으로 정해야 하며, 그들의 후손이 전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계시를 받았다.
한편 아에네스는 자기가 도착한 곳에 어떤 종족이 살고 있으며 또 그들의 왕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백 명의 뛰어난 부하들에게 선물을 주어 마을로 보냈다. 이들을 맞아 자초지종을 들은 라티누스왕은 이 트로이의 영웅이야말로 장래의 사위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분좋게 동맹을 허락하고 많은 답례품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안 투루누스왕자는 낯 모르는 이방인에게 여자를 빼앗긴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에네스와 라티누스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편은 서로 간에 른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아에네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아네네스는 민족 간의 공고한 단결을 통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참고문헌>
서양 문명의 역사 I - E.M.번즈, R.러너, S.미첨, (1997년)
서양사의 이해 -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1996년)
유물을 통해 본 세계사 - Harvey Rachlin (1997년)
그리스 국가 - Ehrenbering Victor, (1991년)
고대 그리스사 - Antony Andrews (1997년)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토마스 볼빈치(1989년)
로마 제국사 - 인드로 몬타넬리(1998년)
로마 제국 흥망사 - Edward Gibbon (1991년)
http://myhome. netsgo.com/ksn119/default.htm
<< 참고문헌 >>
고대 그리스사 (학술총서 24), 앤토니 앤드류스, 이론과 실천
고대 로마를 찾아서(시공디스커버리층서 25), 클로드 모아티 ,시공사,
고전고대 로마사 연구의 재문제, 지동식, 고려대학교 출판부
고전고대 희랍사 연구의 재문제, 지동식 편역, 고려데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