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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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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1.직접실재론
직접실재론은 우리의 상식에 부합하는 이론으로서, 그 핵심은 즉 대상의 존재방식(또는 실재, reality)과 대상의 현상의 방식(appearance)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식주체와 대상 간에는 어떠한 매개물도 없다는 점과 그리고 대상은 그것에 대한 주체의 생각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이러한 직접실재론의 내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긍하는 것으로서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명백한 비판에 따르면 직접실재론은 온당한 이론이 될 수 없다. 먼저 현상(how things look)이 실재(how things really are)에 대한 타당한 답이 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비근한 예로서 우리가 물 속에 막대를 비스듬이 넣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막대의 실재는 곧은 직선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꺽인 막대이다. 둘째, 주체와 대상간에 어떠한 매개물도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테면 대상과 주체 사이에는 시각체계(visual system)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지각의 내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렇듯 전통적인 직접실재론은 타당한 이론이 될 수 없는데 여기서 현상의 방식과 실재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표상적 실재론(Representative reality)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된다.
2.표상적 실재론(Representative realism)
표상적 실재론은 직접실재론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대상이 실재함을 인정하지만 직접실재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현상의 방식(how things look)과 실재의 방식(how things really are)이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의 대표자인 로크(John Locke)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사물의 성질을 제1성질(primary qualities)과 제2성질(secondary qualities)로 구분한다. 전자는 대상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대상 자체와는 분리될 수 없는 성질로서 크기,형태,무게 등이 이에 속한다. 반면 후자는 대상 자체에 내재하는 성질이 아니라 지각하는 인식주체 안에서 제1성질에 의해, 다시 말하면 대상의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부분의 크기,형태등에 의해서 다양한 감각경험(색,소리,맛 등)을 일으켜주는 힘이다. 이러한 제2성질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즉 제2성질에 의한 다양한 감각경험은 주관적이며 고로 현상과 실재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직접실재론은 몇 가지의 문제점 갖는다. 먼저 관념론자인 버클리(G. Berkeley)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는 로크의 견해에 회의를 가졌다. 이를 테면 형태(제1성질)없는 색깔(제2성질)이나 색깔없는 형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둘째, 경험론자인 로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물리적 대상(physical object)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관념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외부 세계(external world)에 존재하는 대상의 실재함을 확증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대상과 그 관념을 구별할 수도 없고 그 둘의 일치여부 또한 확증할 수 없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로크는 물리적 대상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며 넘어간다.요컨대 직접실재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념을 도입했지만 대상의 실재에 대한 문제가 새로이 부상되었다. 여기서 대상을 완전히 부정하는 관념론(Idealism)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된다.
3.관념론(Idealism)
관념론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버클리(G. Berkeley)는 존재하는 것이라곤 주체(나 자신:myself)와 관념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재론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물리적 대상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여러 관념들의 덩어리(collections of Ideas)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무를 인식한다고 할 때 실제로 인식하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 대한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버클리의 견해는 자신의 저서 「신시각이론」(A New Theory of Vision)에서 "Esse est percipi"(to be is to be perceived: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는 말로 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재론보다 더 극단적인 관념론은 두 가지의 명백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먼저 경험의 일양성(一樣性)에 근거한 비판으로서 이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책상을 불 때 누구나 다 그것을 책상이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책상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한다면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버클리는 신의 존재를 도입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신이 개입하여 우리가 일정한 관념을 갖게 한다고 하며 후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무한 정신인 신이 지각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따를 경우 감각적 경험의 대상이 아닌 신을 우리가 어떻게 지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새로이 부상하게 된다. 한편 관념론은 오직 주체와 관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므로 유아론(唯我論:solipsism)에 빠질 우려 또한 가지고 있다.
4.현상주의(Phenomenalism)
현상주의(Phenomenalism)는 신의 인식의 문제라는 난관에 처한 관념론(Idealism)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물리적 대상은 '실제적인 감각경험'(actual sense experience)과 '가능적 감각경험'(possible sense experience)의 묶음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현상주의의 시조인 밀(J.S. Mill)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감각가능한 것이다.(to be is to be perceivable)」 상술하면 현재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것 외에(관념론의 내용), 현재 지각되지 않는 존재도 'if-then'의 형식을 만족시키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옆방의 책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방으로 들어간다면(특정한 지각조건을 만족시킨다면)(if), 내가 그때(then) 그것을 지각할 수 있다는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대상은 감각소여의 영속적인 가능성(permanent possibility of sens-data)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결국 버클리식의 신의 존재는 도입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일견 타당해 보이는 현상주의도 크게 두 가지의 방향에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현상주의적 번역이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앞에서 든 가능적 문장에서, 인식주체인 '나'와 물리적 위치인 '방'도 감각소여의 덩어리로서 또다른 물리적 대상이 되므로 그 둘도 가언명제로 옮겨져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적 작용(mental act)을 하는 인식주체와 물리적 시공간은 감각소여만으로는 완전히 번역될 수도 없고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다른 물리적 대상이 나타나므로 현상주의적 변역은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두번째 관점은 보다 핵심적인 비판으로서, 감각소여에 대한 현상주의자들의 불분명한 논의를 공격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스크린상의 일정한 반점을 시공간상으로 T(A)에서 T(B)로 이동하며 볼 때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현상주의자들은 T(A)에서의 감각소여와 T(B)에서의 감각소여의 동일성 여부 그리고 반점의 동일성 여부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위치와 시간에 따른 감각소여의 동일성 여부가 판명될 수 없어서 감각소여는 불명료한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 이것과 비판과 더불어 감각소여에 대한 몇 가지 비판들이 더 있다. 첫째,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는 개념에 의하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존재의 수를 줄여서 설득력을 높여야 하는데 감각소여라는 새로운 존재가 도입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감각소여는 정신적 개체이거나 물리적 개체일 수 있는데 현상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셋째,현상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감각소여의 덩어리가 물리적 대상이라고 한다면 감각소여는 서로 다른 물리적 대상들 간의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무늬가 65대인 옷과 66개인 옷을 본다고 할 때, 감각소여는 그 둘의 차이를 실제적으로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현상주의는 관념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험의 직접적 대상으로서의 감각소여라는 개념을 도입하지만 그것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므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 결국 실재론으로부터 관념론을 거처 현상주의에 이르는 이론들 즉 act/object이론에 근거하는 주장들은 대상의 설정문제에 있어 딜레마에 빠지고 있으며 이는 그러한 도식을 넘어서는 부사화이론(Adverbialism)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5.부사화이론
부사화이론(adverbialism)은 act/object theory에 입각한 기존의 실재론,관념론 그리고 현상주의 이론이 인식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하자 그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이론이다. 부사화이론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 그 대상과 인식주체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지각경험을 경험함의 한 방식(a way of experiencing)으로 보자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She wears a smile)라는 문장에서, '미소'가 대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표정의 여러 방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문장을 부사화시키면 "She wears smile-ly"가 되며, 원래 문장에서 smile은 문법적 목적어이나 이 문장에서는 내용적으로 wear를 수식하는(modify) 부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요컨대, 부사화이론에 따르면 주체가 갖는 지각의 서로 다른 방식만을 인정하고 대상을 상정하지 않으므로 대상의 설정에 있어 딜레마에 빠졌던 기존의 이론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원래의 문장을 부사화시킨다고 해서 대상의 문제가 과연 만족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부사화이론은 대상의 실재여부와는 상관없이 대상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논리적인 비판에 의하면 부사화이론은 『다속성의 문제』(many property problem)를 또한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A:"I see blue triangle and red circle"이라는 문장과 B:"I see red triangle and blue circle"이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A와 B는 모두 삼각형과 원을 보고 있으므로 모양에서는 동일하나 그 색깔은 서로 바뀌어 있으므로 A와 B는 각각 의미가 다른 문장들이다. 만약 see의 문법적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들을 색깔과 모양을 분리하지 않고 부사화 시킨다면, A는 "---(blue triangle and red circle)-ly"가 될 것이고 B는 "---(red triangle and blue circle)- ly"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색깔이 따로 구분되지 않으므로, 실제적으로 다른 것들을 보고 있는 원래 문장 A,B의 차이점이 사라져 버린다. 한편 색깔과 모양을 분리시켜 부사화시키면 A는 "---blue-ly and triangle-ly and red-ly and circle-ly"가 되며 B는 "---red-ly and triangle-ly and blue-ly and circle-ly"가 된다. 그런데 이 두 문장은 여러 개의 부사가 "and"라는 접속사로 연결되 있는 형식으로서 부사의 순서상에 따른 의미의 차이가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부사화시킬 경우 서로 다른 의미인 원문장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보였던 부사화이론도 여러 가지 비판에 직면함을 알 수 있다. 「대상과 인식」이라는 문제에 대한 지각이론으로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보이는 부사화이론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에 한 분과로서의 인식론(epistemology)은 계속적인 비판과 대한제시를 통하여 보다 완전한 이론을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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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이성을 신뢰하고 지식의 원천으로서 이성을 경험보다 우위에 둔다. 그의 철학적 방법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연역적인 방법에 의거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가장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그러한 전제를 발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택하게 된다. 이에 의하면 감각기관에 의한 지식과, 수학.기하학에 의한 지식은 그 확실성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한다. 먼저 전자의 경우에 있어 기본적으로 감각기관은 자주 오류를 범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또한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것이 꿈속의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될 수 없으므로 감각기관에 의해 명증적 지식이 획득될 수는 없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있어, 수학적 명제에 대해서도 전능한 악령(Cartesian Demon)이 그것을 믿도록 우리룰 속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의심하는 연속 속에서 데카르트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의심함은 생각함이며 내가 생각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나 자신은 존재해야 하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석판명(明晳判明)한 제1원리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리 명석판명한 규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불완전한 신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의 명증성이 보장될 수 없으므로, 우리를 속이지 않는 성실하고 완전한 신(명증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의 존재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우리가 이러한 신에 의해 창조된다면 우리는 가장 확실한 본유관념(innate idea)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본유관념에는 원래 신의 관념이 내재해 있다. 즉 감각경험에 의한 일체의 지식을 부정하고 내성(內省,reflection)하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신관념을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신이 심어놓은 본유관넘에 의해 확실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위시한 합리론자들이 이렇듯 신을 도입하게 되는 것은, 지식을 필연적 연역에 의하여 논증하려는 그들의 인식방법을 따르면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러한 논증을 위해서는 논리적 추론을 초월해 있는 최후의 궁극적 원리가 정립되어야 할 것이고 이 때문에 결국 본유관념으로서의 신을 요청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완전한 신의 존재가 증명되더라도 우리는 판단의 오류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지성이 명석판명하다고 판단한 영역을 넘어서서 의지가 무절제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이른바 「정신지도의 규칙」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정신의 자연적인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2.로크
베이컨과 홉스의 사상을 계승하여 체계적인 경험론(Empiricism)을 확립한 로크(John Locke)는, 데카르트가 상정하는 생득적인 본유관념(innate idea)을 부정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어린이나 미개인들이 동일률이나 모순율 같은 추상적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생득적인 본유관념이 우리의 오성(悟性)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식의 타고난 형태는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백지(tabula rasa)이다. 그렇다면 오성이 가지게 되는 관념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관념의 기원에 대한 로크의 설명에 의하면 경험은 감각(sensation)과 내성(內省,reflection)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여기서 감각은 외적 대상에 대한 지각이요, 내성은 우리의 심적 작용에 대한 내부지각인데, 전자에 의해 외적 대상의 감각적 성질(물체의 크기,색깔,형태 등)에 대한 관념을 얻을 수 있고 후자에 의해 내부의 심적 활동(지각,사고,회의 등)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된다. 로크는 이처럼 두 가지의 경험에 의해 오성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념을 단순관념(simple idea)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단순관념을, 오성의 능동적 활동에 의해 단순관념이 결합함으로서 이루어지는 복합관념(complex idea)과 구별한다. 따라서 아무리 고원하고 추상적인 사상이라도 그것은 단순관념이 모여서 된 복합관념이므로 결국 경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본유관념으로서의 신 관념은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상과 같이 인식방법을 확립한 로크는 지식의 성립에 대해 얘기를 한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관념들 사이의 일치나 불일치 또는 연장성이나 모순에 대한 지각이라고 한다. 로크는 지식을 직관적, 논증적, 감각적 지식의 세 등급으로 나눈다. 먼저 직관적 지식(intuitive knowledge)은 우리가 관념들 간의 연관성을 그것들만으로 직접 지각함으로서 얻는 지식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직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흰색은 검정색이 아니며 3은 2보다 크다는 것을 지각한다. 둘째, 논증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은 관념들 간의 연관성을 지각할 때 매개하는 다른 관념들을 필요로 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는 명제는, 그것을 알기 위하여 삼각형의 세 각들과 같은 별도의 각들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감각적인 지식은 개별적 존재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로크는 관념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는 경험을 기본 전제로 하나 지식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논증과 같은 수학적 원리를 도입하므로 합리론적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흄
흄은 로크의 관념보다 훨씬 축소된 개념인 '지각'(perceptio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각은 우리의 마음이 갖는 모든 내용(mental content)으로서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단순관념)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인상은 모든 감각과 정서가 우리의 정신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상태를 의미하며, 관념은 우리가 사고하거나 추리할 때 인상들이 희미한 심상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곧 인상과 관념이 갖는 차이는 생생함(vividness)의 차이이며 그 둘은 유사성과 대응성을 갖는다. 그러데 흄에 의하면 우리는 인상이 없는 관념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관념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 각각의 인상과 관념을 결합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관념들이 결합하는 원리에는 유사성, 근접성, 인과성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이어서 흄은 인간 이성의 탐구대상에는 '관념들의 관계'(relation of ideas)와 '사실'(matter of fact)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전자는 사유의 작용으로만 발견될 수 있는 직관적으로나 논증적으로 확실한 인식대상들인데 수학적 명제가 이에 속한다. 그리고 후자는 직관적.논증적으로 확실한 인식대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관념들 간의 관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실"에 대한 확실성의 보장여부가 문제가 된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흄은 인과관계(the relation of cause and effect)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흄은 '사실에 대한 모든 추리의 근거'를 인과관계로 규정하고 그것은 반드시 경험에 의해 습득된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과관계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원인이라는 사건과 결과라는 사건 사이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건에 대한 인상을 시간상의 선후로 반복적으로 관찰함으로서 우리의 습관이 산출해낸 주관적인 성향(inclination) 의해 구성된다. 곧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인과론에 의거한다는 것이 흄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흄의 이러한 견해는 몇 가지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먼저 흄식의 인과관계에 대하여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만약 흄의 인과론을 따르면 객관적으로 확실한 인과관계와 단순한 상관관계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배트로 야구공을 쳐서 그것이 멀리 날아가면 이 경우는 확실한 인과관계이다. 그런데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종이 10번 쳤다는 경험을 우리가 반복적으로 가질 경우 흄대로 해석하면 단순한 상관관계인 이 경우도 인과관계가 되어버린다. 결국 흄의 인과론을 따르면 지식은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이는 회의주의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관관계를 보다 넓게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또다른 비판으로서, 물리적 대상을 주관적인 관념의 연합으로 규정한다면 하나의 대상이 그 형태를 달리할 때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대상으로 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4.칸트
칸트의 인식론이 의도한 바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인식이론을 조화시켜 가장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만을 따를 경우 경험적이면서 동시에 보편타당한 지식은 확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성론의 입장에 서있었지만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는 우리의 지식은 반드시 경험과 더불어(with) 시작하나 모든 지식이 그러하지는 않느다고 한다. 우리는 경험적인 내용을 제공하는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형식을 적용하여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따른다."는 종래의 규정을 버리고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는 새로운 규정을 내리는 것으로서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한다. 요컨대 능동적 인식주관이 새로운 대상을 무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재료에 대해 선천적인 형식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경험의 내용과 인식의 선험적인 틀이 결합됨으로서 경험적이면서도 보펀적인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감성(Sinnlichkeit)과 오성(Verstand)이라는 두 가지 인식능력을 갖는다고 한다. 먼저 감성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이 있는데 그것이 선험적인 이유는 우리가 대상을 시공간과 무관하게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감성의 질료는 이러한 형식에 의해 정돈되고 통일되어 직관이 된다. 그런데 직관에는 아직 감각적 다양성이 남아 있으므로 그것은 오성의 선천적 형식인 범주에 의해 종합되어야 한다. 즉 오성은 직관이라는 질료를 12법주라는 형식을 통해 정돈시켜 종합적인 판단을 내린다. 이 판단이 바로 칸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선천적 종합판단'이다.
그런데 서로 이질적인 오성의 범주가 직관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생산적 구상력이 필요한다. 생산적 구상력은 감성과 오성을 매개하는 능력으로서 대상이 현전하지 않음에도 대상의 직관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재생적 생산력과 구별된다. 이 생산적 구상력에 의해 도식이 산출되는데, 도식은 감성적인 직관을 오성의 범주에 적용할 때의 절차 또는 규칙을 의미한다. 칸트는 도식을 감성의 형식인 시간에 대한 자세한 규정으로 나타내는데, 시간은 모든 직관(내적, 외적)에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이므로 선험적이며 동시에 경험적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시간규정으로서의 도식을 범주의 순서(분량, 성질, 관계, 양상)에 따라 네 개(시간계열, 시간 내용, 시간순서, 시간총괄)로 구별하는데, 다시 말하면 도식은 범주를 시간작용으로 고쳐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규정으로서의 도식에 의해 범주가 경험적인 직관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식이 적용될 때는 직관의 공리, 지각의 예료, 경험의 유추 그리고 경험적 사고 일반의 공준이라는 네 개의 원칙이 필요한데, 이것들도 각각 범주의 네 양식에 준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