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에서 바른 용어 사용하기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무심코 내뱉는 하찮은 단어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고 했다(단어의 사생활, 사이, 2016, 21쪽). 또한 『말 그릇』의 저자 김윤나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담는 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크기에 따라서 말의 수준과 관계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세계관)을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목회자는 설교자로서 그 누구보다도 말의 사용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목회 현장이나 강단에서의 용어 사용을 보면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국문학자 최태영 교수는 말하기를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품을 반영하는 것과 동시에 말을 통해서 우리의 인품이, 인격이 형성된다. 바른 말, 선한 말만 하려고 애쓸 때 우리의 성품은 바르고 선하게 되며 비속하고 악한 말을 즐겨 쓸 때 우리의 인격은 고상해 질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항상 바른 말을 하려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고 했다. 설교자는 바르고 선하고 고상한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과 신앙을 향상시켜야 하며 또 다른 사람에게도 덕을 끼쳐야 한다. 이 지면에서는 앞선 연구를 바탕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1. ‘예배’와 관련된 용어
1) 준비 찬송 합시다
예배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예배 전에 준비 찬송 하자”라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준비 찬송’이라는 표현은 좋지 못하다. 찬송은 항상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행위여야 한다. “찬송이나 부릅시다”라는 말도 종종 듣는데, 이것도 좋지 못한 표현이다. ‘준비 찬송’ 대신 ‘예배 전 찬송’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 아니면 그냥 “찬송하시겠습니다”라고 할 일이다.
2) 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문장으로 요약해 담은 글이다. 사도신경에 근거해 사도신경을 따라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지, 사도신경을 하는 게 아니다. ‘사도신경 하심으로’가 아니라 “사도신경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3) 대예배
‘대예배’라는 표현은 그리 좋지 않다. 모든 예배는 다 중요하다. 주일 예배, 주일 오전 예배 주일 2부 예배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다. 사실 대예배실이라는 표현도 문제가 있으나 큰 예배실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으니 허용할 만하다.
4) 성경봉독할 때 잘못 쓰는 말
성경봉독을 인도할 때는 “몇 절에서 몇 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몇 절로 몇 절까지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이 표현은 글에는 안 나오고 통상적으로 구어로만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로부터’라고 해야 하는데 줄여서 ‘로’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법에는 분명히 안 맞는데 그렇게 쓰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성경을 봉독할 때 “성경 말씀을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설교 직전에 인도자가 그날 본문인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봉독’이라는 말 자체에 ‘받들어 읽음’(받들 봉, 읽을 독)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의미가 중첩돼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 그냥 “성경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다 찾으신 줄 믿고’는 성경봉독하는 사람이 흔히 하는 말이다. 회중이 본문을 모두 찾은 것으로 간주하고 봉독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은 좀 어색하다. “다 찾으신 것으로 알고” 이렇게 표현하면 된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이런 말을 하지 말고 다 찾았는지 한번 휙 둘러보아 확인한 후에 봉독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말은 안 하는 게 좋다.
6) 예배를 돕는 찬양대
사람들은 대표기도에서 종종 ‘예배를 돕는 찬양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러나 이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찬양대는 찬양의 직무를 담당하기 위해서 조직되어 그 일을 하기 때문에 단순히 예배를 돕는 기관이 아니다. 담임 교역자가 설교를 담당하듯, 엄연히 예배의 독립적인 순서 하나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런데도 ‘예배를 돕는 찬양대’라고 표현한다면, 이는 암암리에 성가대를 교인들의 예배 분위기나 돋우려고 봉사하는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기관으로 격하하는 셈이다.
7) 민초/서민/백성
기도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 위정자가 되게 하소서.” 이복규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백성’(民)과 ‘풀’을 조합해 ‘민초’(民草)라는 말을 만들어 써왔다. 백성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 비유한 말이다. 이는 일본식 한자어일뿐더러, 백성을 풀처럼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으로 들려 좋지 않다. ‘서민’(庶民)이라는 말도 오늘날의 민주사회에는 맞지 않다. 신분 사회에서 양반이 아닌 평민(平民), 혹은 상민(常民)을 가리키던 그 말을 지금도 쓴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국민’처럼 좋은 말을 두고 굳이 ‘민초’, ‘서민’이라는 말을 쓸 필요는 없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국민이다. 그 가운데서 선거를 통해 뽑히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성’이라는 말보다 ‘국민’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2. 바르게 고쳐 써야 할 용어들
1) 태신자
주로 전도하려고 늘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대상자를 태(胎)신자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신자는 ‘믿는 자’이다. 아직 믿지 아니하는 사람, 전도의 대상자를 태신자라 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태중에 있는 아기는 이미 사람이지만, 소위 ‘태신자’라는 사람은 아직 ‘신자’가 아니다. 태(胎)신자는 전도 대상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2) 제사, 제단, 제물, 성전
구약 시대 고유의 용어들을 신약 시대에 그대로 쓰는 것은 곤란하다.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대신 돌아가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영원히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제단도 필요 없고 제물도 필요 없다. 예수께서 단번에 구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성전도 그렇다. 신약 시대 이후의 교회당은 성전과는 개념이 다르다. 교회당을 성전이라 명명함으로써 교인들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한다. 성전 건축이니 제1 성전이니 이런 표현은 재고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구약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지만, “산 제물”(롬 12:1), “찬송의 제사”(히 13:15-16)처럼 비유적으로, 또는 복음으로 재해석하고 재문맥화하여 사용하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쓰는 것처럼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3. 정확한 발음이 필요한 낱말들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의미 전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동음이의어가 많아 뜻을 혼동하거나 시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사례 몇 가지를 제시한다.
좇아/쫓아(‘좇다’는 따르다. ‘쫓다’는 추격하다 혹은 배제하다)
빛/빗(‘빚’은 채무, ‘빗’ 머리 빗는 도구)
맺은/맺는(‘맺은’은 과거완료형, ‘맺는’은 현재진행형)
잊고/잃고(‘잊다’는 망각하다. ‘잃다’는 상실하다 혹은 분실하다)
나가다/나아가다(‘나가다’는 밖으로 이동하다 혹은 앞쪽으로 움직이다. ‘나아가다’는 앞이나 목적하는 방향을 향하여 가다)
4. 강단에서부터 교회 언어가 건강해야 한다
설교자가 서는 강단은 구별된 곳이다. 강단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깨끗하며 고상한 말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단 위에서 반말투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비속어나 은어도 피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담을 수 있는 말은 곧 바르고 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한 말이다. 말에는 말씀을 담을 수 없는 잘못된, 비속한 말들도 있다. 설교자가 단상에서 술어의 오용 또는 불쾌한 어감을 자아내는 말을 한다든지, 방언적 색채가 너무 두드러지는 말을 한다든지,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마구 남용한다든지, 표준발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특이한 발음으로 어휘를 구사한다든지, 비문법적 문장을 엮어내리든지 한자의 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엉뚱한 단어를 구사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없어야 한다.”(최태영 교수) 무분별한 언어 사용은 국어를 훼손함은 물론, 신앙 생활이나 복음 전파에도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최 교수는 “교회 언어가 바로 서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언어는 말하는 이의 생각과 세계관이 담긴 그릇이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 전체를 나타낸다. 생각이 깨끗하면 말이 깨끗할 것이요, 인품이 고상하면 고상한 말이 나올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강단에서 품격 있고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기 위해 진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추천도서
교회에서 쓰는 말 바로잡기, 이복규 지음, 새물결플러스, 2020
교회 용어 이대로 좋은가, 최태영 지음, 카이로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