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 름
정 성 천
국민의 삶을 가난에 빠트린 한 나라의 경제 장관은 말한다. “국가 실물 경제의 흐름을 놓쳤습니다.” 팔리지 않은 옷의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도산한 의복 업체의 사장은 말한다. “패션의 최근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의 대표는 말한다. “우리는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뇌졸중으로 사망한 환자를 두고 의사는 이렇게 진단한다. “뇌혈관이 막혀 뇌로 가는 혈액의 흐름이 막혀 사망했습니다.”
‘흐름’, 이것이 도대체 뭐길래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원활하지 못하면 모든 일을 망쳐 버릴까? 무상천류(無常遷流), 이 세상이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흐름으로 채워져 있고 우리 또한 그 흐름 속에서 흐르고 있는 또 다른 흐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망(迷妄)된 눈으로 보면 너도, 나도, 세상도 고정된 실체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진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만의 속도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세세한 일은 그것의 흐름을 모르면 그 일만 망치면 되지만 자기의 몸과 마음이 그리고 자기의 삶이 흐르고 있음을 간과하면 행복을 놓치고 고통에 허덕이며 삶을 망치게 된다.
하늘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구름은 쉽게 이해되겠지만 감정, 생각, 의식으로 표현되는 내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흐른다는 사실은 쉽게 인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마음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껴 쉽게 이해가 간다. 고요함 속에서 자기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우리 마음도 요동치며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강물의 흐름은 쉽게 이해되지만 내 몸은 음식물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흐름이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며 흐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피부는 30일이면 완전히 새로운 피부로 교체되고 다른 부위도 대개 7년이면 우리의 몸은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어 물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외부 세계는 어떤가? 가장 최신 과학인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가 고정된 실체라고 여기는 모든 사물도 마지막 조각까지 쪼개어 들어가면 에너지 알갱이의 일종인 미립자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현대 과학계의 정설이다. 양자역학이 이 세상에 등장한 지 벌써 백 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나를 둘러싼 세상이 고정된 실체로 구성되어 있고 그 실체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고 착각한다.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닌데 나의 변화된 몸으로 경험하는 너와 그대 그리고 세상이 어찌 어제와 똑같을 수가 있겠는가?
흐름 속에서 흐름 그 자체가 되어 흐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잘 사는 삶이 될까? 잘 산다는 것은 잘 흐르는 것일 것이다. 즉 흐름을 타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의 삶을 강물에 떠내려가는 마른 나무토막의 흐름으로 비유하며 그것처럼 흐름을 타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노자도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며 물의 흐름을 본받는 삶을 권했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만 흐름을 알고 흐름을 타는 삶이 되겠는가? 흐름을 타려면 먼저‘지금’,‘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흐름에는 과거나 미래는 없다. 흐르는 현재의 순간만 있을 뿐이다. 흐름의 주체는 과거의 흔적이나 미래의 부딪침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냥 현재를 자연스럽게 흐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실제 삶은 언제나 눈앞의 현실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또 다른 하나는 집착이다. 삶의 와중(渦中)에 왜 좋은 것, 싫은 것들이 없겠냐 만은 좋은 것은 무리하게 붙잡으려고 하고 싫은 것을 억지로 밀쳐 내는 것이 집착이고 이는 흐름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표면 접착력이 좋은 끈끈한 액체일수록 가볍고도 원활하게 흐를 수 없는 것처럼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삶의 흐름을 가볍게 탈 수가 없다.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흐름을 원활하게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항시 몸과 마음의 흐름을 방해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흐름을 교란하여 몸과 마음에 질병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자기 긍정뿐만 아니라 타인 긍정으로 일어나는 사랑, 연민, 감사, 용서, 존중 등의 감정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생기는 흐름뿐만 아니라 세상의 흐름도 좋게 순화시켜 좀 더 밝고 가볍게 흐르는 세상을 만든다.
특히 현실 수용은 흐름의 본 모습이다. 흐름을 막는 바위가 앞에 버티고 있을 때 부딪쳐보고 안되면 그것을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돌아서 흐르는 게 흐름이다. 흐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진실은 흐름의 방향성이다. 흐름은 항시 낮은 곳을 향한다는 점이다. 흐름을 타면 항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내가 낮아질 때 내 삶의 흐름도 세상의 흐름도 원활하게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 마음과 몸 그리고 내 삶의 흐름을 호, 불호의 분별과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제대로 알아차림에 물들면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저절로 갖추어진다. 알아차림은 세상 모든 것이 흐르고 있지만 흐르지 않는 그 무엇의 작동이기에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고통을 여위고 평온한 행복에 머물 수 있다.
불교의 수행과정에는 ‘수다원(須陀洹)’이라는 말이 있다. 입류(入流)라는 다른 말로도 지칭하는데 ‘수행의 본류(本流)에 든 사람’ 혹은 ‘진리의 흐름에 든 사람(豫流果,sotapanna)’을 의미한다. 수행이 어느 정도 쌓여 해탈 즉 열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있으나 윤회를 벗어나는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한 사람 즉 진리의 흐름에 들어 다소의 이탈을 경험하겠으나 궁극적인 해탈인 열반을 예약한 사람이다. 흔들림은 있겠으나 흐름을 벗어날 사람은 아니다.
나이 칠십이 넘으면 불교 수행단계의‘수다원’처럼 삶의 본류라는 흐름에 들어 때때로 다소의 흔들림은 있겠으나 흐름을 거슬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흐름을 타고 오유지족(吾唯知足)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사람이 되어 삶을 즐기며 보내야 하지 않을까? 공자님도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거(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법도가 바로 삶의 흐름을 의미한다. 고 보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처럼 한바탕 즐겁게 노는 삶이 되지 않겠는가?
흐름의 영어식 표기는 ‘flow’이다. 최근 발달하는 긍정 심리학에서 ‘flow(흐름)’는 자신의 활동에 완전히 몰입하여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긍정적인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예술가나 운동선수들이 이 흐름에 들면 활력이 넘치는 집중력으로 완전한 참여 및 즐거움을 느끼는 정신 상태를 갖게 되어 행복 증가, 내재적 동기 부여 증가, 창의성 향상, 감정 조절 개선 등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영어 단어 ‘flow’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인 ‘er’을 붙이면 ‘flower(흐름을 타는 사람)’ 바로 ‘flower(꽃)’ 이 된다. 삶에 완전히 몰입하여 삶 그 자체의 흐름을 타는 사람은 삶에서 언제나 아름다운 꽃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