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국립극장에서 신한은행 전국 지점 단위의 분기별 업적 시상식이 있었는데 이 식이 끝나면
곧바로 행원들을 위한 공연이 이어졌다. 이런것을 매 분기마다 한다고 했는데 우리 KBS관현악단(단장 김강섭)이
신한은행 공연사상 처음으로 팝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우리 이전에는 몇번 간단한 공연이 있었다고 했다. 그 후로도
수차례 국립극장과 KBS홀에서 이 행사에 출연했었다.
당시 일본에서 오신 이희건회장님은 항상 힘있는 목소리로 행원들에게 훈시를 하셨고 라응찬 행장님의 모습도 기억이 난다.
행원들에게 문화공연을 선사한다는것에 대해 당시 우리들은 이희건회장님의 선진적인 운영 마인드에 놀랬었다.
[조선일보 나지홍 기자 2011.03.24]
23일 오전 서울 남대문
본점 대강당. 주주총회가 끝날 무렵
신임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소식을 전한다. 이희건 명예회장께서 지난 21일 노환으로 별세하셨다"고
발표했다. 곳곳에서 "아" 외마디 소리가 터졌다. 500여명 주주·임직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묵념했다.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별세 소식을 이틀이 지나서야 알린 데 대해 한 회장은 "주총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알리지 말라는 유지(遺志)가 있었다"고 했다.
새 회장 체제가 출범하는 잔치 분위기가 망가지고 큰일이 겹쳐 직원들이 너무 바빠질까 봐 우려했다는 것이다.
신한은행 창립자이자 재일교포 사회의 대부(代父)인 이희건(李熙健·93) 신한은행 명예회장이
에서 별세했다. 1917년
의 가난한 농가에서 6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그는 15세 때인 1932년 돈을 벌려고 혼자 일본으로 갔다. 단순노무자로 일하면서도
부지런함과 명석함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하고, 1945년 오사카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
했다. 30세 때엔 교포 상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 상점가동맹(商店街同盟)이란 공제조합을 만들어 초대 회장에 뽑히면서 교포사회
리더로 떠올랐다. 1955년엔 일본 은행에서 돈 빌리기 힘든 교포 상인들을 위해 대판흥은(大阪興銀)이란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20여년 만에 일본 최대의 신협인 관서흥은(關西興銀)으로 키웠다.
그는 일본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모국의 경제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974년 모국에 투자하려는 교포들을 모아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고, 1977년엔 재일교포계 단자회사인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해 회장
을 맡았다. 제일CC 설립도 주도했다.
1982년 일본 전역의 교포 340여명으로부터 250억원의 출자금을 모집해 국내 최초의 민간자본 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설립을 둘러싼 유명한 일화도 있다. 당시 출자금은 일본 입장에서 볼 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번 이른바 '블랙머니'도 많았다.
이 명예회장과 교포 주주들은 일본 세관의 추적을 피해 이를 모두 지폐로 바꿔 가방에 넣어 한국에 가져오느라 가슴을 졸였다.
88 서울올림픽 때는 재일교포 모금활동을 전개해 540억원의 성금을 보냈다. IMF 외환위기 때도 교포사회의 송금운동을 주도했
다. 신상훈 전 신한금융 사장은 "'신한은행의 혼(魂)'으로 자처할 만큼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라며 "역대 대통령 취임식이나 서울올
림픽·한일월드컵 개막식에 꼭 참석할 정도로 나라 사랑도 각별했다"고 회고했다. 어릴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갑내기 친구였던 고
(故)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한국 방문 때마다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이 명예회장은 과거 국내 은행들의 고질적 병폐이던 대출사례금(리베이트)을 없앤 주인공이다. 신한은행은 설립 때부터 그의 엄
명에 따라 사례금을 받지 않았다.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은 "'일본처럼 깨끗한 은행을 만들라'고 주문하면서 '신한은행이 모범을
보이면 다른 은행들도 따라올 것'이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는 평소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며 직원들을 북돋아줬다.
이 명예회장은 근래 몇 년 노환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신한금융 안팎에선 "명예회장이 건강했다면 작년 신한금융을 극도의 혼란
으로 몰고 간 최고 경영진 간 내분도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유족은 신한은행 부설 신한종합연구소장을 지낸 승재(64)씨, 일본에서 사업하는 경재(61)씨와 융재(56)씨 등 3남이 있다. "분향소
를 차리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어 가족장으로 치렀다. 신한금융은 일본 현지 조문 대신 유족과 협의해 적절한 시기에 국내에서 추
모식을 갖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