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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1월 10일, GSL안동본부에서 강의한 월례 웰빙교양강좌의 강의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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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라부아지에’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우선 본 강의에 앞서 사이드 주제 하나를 먼저 다루어보겠습니다. 사진의 배경을 흐릿하게 하면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 피사체(被寫體)를 돋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조기법은 신경작용에서도 나타납니다. 감각신경은 정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위의 신경을 억제합니다. 주위를 둔감하게 만들면 자극받은 부위를 뇌에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경과학에서는 ‘측면억제’라고 부릅니다. 감각신경 억제는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픈 곳을 문지르면 촉각(觸覺)신경이 아픔을 느끼는 통각(痛覺)신경을 억제하여 덜 아파집니다. 가려운 곳을 아프도록 긁는 이유는 통각신경이 가려움 신경을 억제해서 시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각의 간섭작용은 유별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꽃향기를 맡을 때 눈을 감는 것은 시각의 간섭을 없애고 음악과 향기를 더 잘 느끼려는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연인과 키스할 때, 맛을 음미할 때 눈을 감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때 귀나 코를 막지는 않지요. 시각이 청각이나 후각보다 간섭효과가 심하다는 뜻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의 후각, 촉각, 청각능력이 정상인에 비해 월등한 것은 다만 학습효과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이것만 봐도 시각의 간섭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은 밤 시간대에 더 통증을 느낍니다. 원인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항(抗)염증성 호르몬이 밤에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고 통증도 수면처럼 일주기 리듬, 즉 서카디언 리듬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경과학에서는 이런 현상 역시 ‘신경간섭’으로 봅니다. 기본적으로 밤에는 낮시간에 통증을 간섭했던 여러 자극들이 줄어들어 더 아프게 느껴지고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밤 시간대는 시각의 신경간섭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멈추는 시간대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이같은 생리적 현상은 우리의 인지구조 안에서도 발생합니다. 엉뚱한 곳에 집중하는 습관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흘리고 다니는 현상입니다. 일종의 신경간섭 같은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생리적 신경간섭은 나름의 순기능적 요소도 있지만 인지구조에서의 이와 비슷한 현상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좋은 사례를 우리는 쓰기와 말하기의 오류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 교수출신인 전 법무장관은 광주 5,18묘지 참배 방명록에 ‘고히 잠드소서.’라고 적었습니다. ‘곱게’의 변형이므로 ‘ㅂ불규칙 용언’의 어간 뒤에는 ‘고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웬만한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식인의 이런 어법상의 실수는 그의 부실한 지적 내공을 드러내는 것이라 순식간에 체면을 구깁니다. 하긴 전직 대통령 MB도 ‘모든 것을 받치겠습니다.’라고 썼던 적이 있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고 물러난 후 양산책방 주인이 된 직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미국 백악관 방명록에 ‘대한미국’이라고 쓰긴 했습니다. 틀릴 걸 틀려야지 자기가 대통령인 나라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으니.....물론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고 맞춤법은 누구나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짧은 방명록 글 하나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장관, 대통령이 나랏일인들 바르게 할 수 있었을까요?
문제는 흔적이 남는 오기(誤記)만큼이나 오발음(誤發音)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틀렸다고 친절하게 직,간접적으로 알려줬는데도 그것도 자존심 때문인지 계속 고집스럽게 안 고치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이런 현상은 신경간섭 같은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의 경우 흔하게 듣는 잘못된 발음이 있습니다. 예컨대 ‘꽃을(이)’은 ‘꼬츨(치)’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꼬슬(시)’라고 발음하는 것입니다. 또 ‘빚을(이)’은 ‘비즐(지)’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비츨(치)’라고 발음합니다. 국문법을 떠나서 이런 발음을 고집하는 이유를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표준 발음법> 13항에는 ‘홑받침이나 쌍받침은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 접미사와 결합되는 경우 제 음가(音價)대로 뒤 음절의 첫소리로 옮겨 발음한다.’라고 되어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다중(多衆)을 상대로 말하는 사람은 늘 자신의 발음을 살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집중과 선택에만 익숙했던 우리의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의 사각지대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아니 알 수 없었던 인물, ‘기억의 일상적인 신경간섭’ 때문에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인물을 이제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여 년이라는 역사의 시간을 되돌려 인간 생명과학의 이론적 초석을 다진 어느 과학자를 함께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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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공화국은 과학자가 필요없다.’라는 판사의 선고와 함께 희대의 천재 과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Antoine Ravoisier)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에 분노한 군중들의 봉기로 엄청난 피를 흘린 세계사적 대사건입니다. 이후 인류에게 널리 회자된 혁명의 구호, ‘자유(自由), 평등(平等), 박애(博愛)’는 참으로 고상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밑뿌리를 들춰보면 엄청난 빈부격차에 대한 간절하고 거대한 절규, 그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의 1/3은 절대 빈곤층이었고 국부(國富)의 거의 전부는 전체인구의 3%도 안되는 상류층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나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그 나라가 뒤집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로 오늘날 대만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국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과학자들은 혁명세력들의 공격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과학자들은 본업을 다 가지고 있었고 그냥 호기심과 취미로 활동했습니다. 라부아지에 역시 세금을 걷는 일이 본업이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었고 이로인해 군중들의 공격대상이 된 것입니다. 혁명정부가 세금 관리들을 잡아들일 때 라부아지에의 재능과 업적을 안타깝게 여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사면을 탄원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판결문에 나온 말이 바로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본 프랑스의 유명한 수학자, 라그랑주(Joseph Louis Lagrange)는 ‘라부아지에의 머리를 베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프랑스에서 그런 머리가 다시 태어나려면 백년도 더 걸릴텐테.....’라며 통탄했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그럼 라부아지에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과학자로서 라부아지에가 남긴 영원히 기록될 가장 위대한 업적은 인류 최초로 물질이 타는 현상을 화학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잘 타는 물질인 석유, 석탄을 예로 들어 한 번 살펴봅시다. 이런 물질의 공통점은 연소하면서 열을 발생하는 것과 탄소 분자가 여러 개 엮인 화학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탄소가 여러 개 결합되어 있다는 말은 에너지를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뜻이고 연소를 통해 탄소분자들이 분해되면서 탄소 하나짜리 이산화탄소로 바뀌는 과정에서 열을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화학작용에 꼭 필요한 게 바로 산소입니다. 즉 그는 땔감의 연소를 산소와 결합하는 화학작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 논리로 완성할 수 있도록 이론적 토대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 바로 라부아지에입니다. 라부아지에는 우리 몸도 소화를 통해 음식물이라는 일종의 땔감을 연소하기 때문에 산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음식물 성분 중 탄수화물, 지방질은 석유, 석탄처럼 여러 개의 탄소분자가 연결된 구조로 되어있고 산소와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이산화탄소로 변하는 과정에서 열, 즉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산소를 끊임없이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야 하는 데 이를 일컬어 ‘호흡’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몸 안에서의 연소는 아주 작은 단위로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에 불꽃의 형태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당한 후 그의 연구업적을 계승한 위대한 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와인연구로 결실을 맺습니다. 그게 바로 효소의 발견입니다. 우선 와인을 주조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와인의 원료인 포도는 말 그대로 포도당이 많은 과일입니다. 포도당은 탄수화물의 기본 단위로서 모든 세포들이 가장 좋아하는 에너지원입니다. 와인업자들은 이런 포도를 적당량의 효모와 섞어 숙성시킵니다. 그 숙성과정에서 포도당이 서서히 분해되는데 만약 산소가 있는 상태에서 효모를 섞으면 포도당이 거의 완전히 분해되어 이산화탄소를 배출합니다. 하지만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숙성시키면 포도당이 조금만 분해되다가 멈춥니다. 이런 식으로 중간에 반응을 멈추면서 생기는 것이 바로 탄소 2개가 붙어있는 에탄올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취하게 하는 물질, 알코올입니다.
그럼 효모는 어떻게 포도당을 에탄올로 바꿀까요? 파스퇴르는 포도당이 와인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생명의 힘(Vital Force)’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효모는 섭취한 포도당을 분해해서 추출한 에너지로 사는 세포인데 에탄올은 바로 효모가 먹고 남기는 분비물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파스퇴르는 효모가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생명체만이 포도당을 알코올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도 산화라는 화학반응이 가능했던 이유는 효모 안의 그 무엇, 즉 ‘생명의 힘’으로서의 효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산소가 있으면 산화가 가능하지만 산소없이 효소만 있어도 산화를 포함한 모든 화학반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스퇴르가 증명한 것입니다. 화학반응의 촉매제로서 효소의 힘은 연소, 산화를 포함한 모든 화학반응의 필수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주장은 이후 독일 화학자 에두아르트 부흐너(Eduard Buchner)의 실험실에서 입증됩니다. 그는 박테리아에서 단백질을 추출하는 실험을 하는데 어려움에 봉착하자 효모를 갈아서 내용물을 분리하는 기술을 찾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효모 엑기스가 워낙 영양분이 많아 쉽게 상하는 것입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효모 엑기스 위에 정제된 설탕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는 것입니다. 완전히 갈아서 다 죽은 줄 알았던 효모의 엑기스가 위를 덮고 있던 설탕을 산화시키는 화학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포도당이 이산화탄소로 변하면서 가스가 나왔던 것입니다. 즉 효모 안의 그 무엇이 촉매로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촉매를 지칭하기 위해 ‘효모 안의 요소’라는 뜻의 ‘효소’라는 말이 이로부터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효모는 ‘자임(zyme)’ 효소는 ‘엔자임(enzyme)’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화학반응현상을 인체에 적용하는 ‘생화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생겼습니다. 게다가 우리 몸의 모든 화학반응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효소이다 보니 생화학의 가장 큰 연구의 본질 역시 효소가 된 것입니다. 요컨대 효모가 살아있는 생명체일 수 있는 것은 효소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효모는 포도당을 분해해서 나오는 에너지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효모가 이런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효소라는 작은 기계들이 있어 포도당을 분해하고 작은 단위의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후 20세기를 거치면서 효모 뿐만 아니라 수많은 효소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어원은 ‘효모 안의 무엇’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의 세포에 있는 각종 촉매들도 효소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세포를 작동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촉매제로서 효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세포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도 효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생명현상을 가동시키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산화과정의 재료인 영양분의 양을 지칭할 때 ‘칼로리’라는 용어를 씁니다. 이것은 원래 물리화학 용어인데 물 1g의 온도를 1도 올리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탄소가 여러 개 엮인 탄수화물이나 지방질은 에너지를 가장 많이 발산하기 때문에 열량, 즉 칼로리가 높은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산소 이야기를 자연으로 범위를 넓혀 보겠습니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흔하게 듣습니다. 석유, 석탄 같은 고에너지 물질을 연소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가 올라감으로써 온실처럼 태양의 빛 에너지를 지구에 붙들어 두려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에너지를 많이 쓰면 쓸수록 여러 기상재난의 원인이 되는 지구 온난화는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미 진행된 에너지 소비구조를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대안은 단 하나, 나무를 많이 심고 밀림을 보존하는 것뿐입니다.
빛 에너지를 이용해 포도당을 만드는 식물은 인간과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식물처럼 광합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기중 산소를 흡수하고 식물을 통해 포도당과 녹말을 섭취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에너지원을 얻습니다. 이를 통해 생명현상을 유지하면서 남는 에너지원은 지방세포에 저장하고 몸집이 불어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환상적인 자연과 인간의 공존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의 무분별한 파괴는 곧 인류 공동체의 파멸을 초래하는 자살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다루는 생화학이론에서 산소는 여전히 논의 핵심입니다. 탄소를 연소시키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필수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응급환자나 통증환자에게 고농도 산소는 생명을 찾아주는 기적의 물질입니다. 하지만 산소는 두 얼굴, 한마디로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적당량을 넘어서는 산소는 몸을 상하게 하는 위험한 물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서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화학반응 작용, 즉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 지방질을 필요 이상으로 연소시킨다면 당연히 세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사람의 몸 안에서는 언제나 정교한 화학반응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과다한 산소가 정교하게 구성된 세포 구조를 오히려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깎아둔 사과, 뚜껑을 열어 둔 병 속의 와인, 냉장고 밖에 둔 버터, 오래된 자동차의 부딪힌 자국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와 비슷한 조건이 만들어진다면 우리 몸 안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자신의 몸이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일상적으로 넘어서는 운동중독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직업적 운동선수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태초의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고 전해옵니다. 우주의 각종 먼지가 쌓여 행성과 태양이 생기고 그런 과정을 통해 45억년 전쯤 지구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다른 행성의 대기에는 암모니아, 수소, 메탄 등이 있을 뿐 산소가 없는 것을 보면 태초의 지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 지구대기의 산소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태초의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는 사실에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합니다. 27억년 전쯤 격변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남조세균, 즉 ‘시아노박테리아(Cyanobacteria)’라는 미생물이 출현해 광합성을 시작했고 그 부산물로 산소를 뿜어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겨난 산소는 당시의 생명체들에게 엄청난 공해였다는 사실입니다. 산소로 인해 원치 않는 마구잡이식의 무수한 화학반응이 일어났고 이것은 산소없는 환경에 적응한 생명체에게는 재앙 중의 재앙이었습니다. 미토콘드리아 진화연구로 유명한 린 마굴리(Lynn Margulis)는 자신의 책, 『마이크로코스모스/Microcosmos』에서 산소의 출현이 당시 지구상 생명체에게는 요즈음으로 비교하면 핵전쟁 이상의 재앙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후 혐기성, 즉 산소를 싫어하는 미생물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공기 없는 흙 속, 진흙탕 안, 하수구 등에서만 사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반면 시아노박테리아는 햇볕과 이산화탄소만 있으면 무한정 산소를 생산해 내는 성질로 인해 날로 번창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적응해 진화한 생명체들만이 지구를 뒤덮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늘어난 식물들 때문에 산소가 전혀 없던 지구는 3억년 전쯤에 이르러 산소가 지구 대기의 30%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치는 지금의 대기 중 산소포화농도 20%보다 10%가 더 많은 수치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천둥, 번개가 칠 때마다 대형산불을 일으키는 위험상황이 수시로 발생한 결과 산소가 줄어들었고 그로인해 현재 수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산소는 생명체에 있어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라부아지에의 연구에서 입증되었듯이 산소는 연소반응을 촉진하는 결정적 물질입니다. 또 그 연소반응으로 우리는 땔감을 태우고 에너지를 얻어 기계를 돌리며 우리 몸은 영양분을 소화시켜 에너지를 얻습니다. 생명을 지탱하는 산화작용의 중요성을 인식한 생화학자들에게 먹거리가 넘치는 오늘날은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다한 영양분의 산화가 가져오는 문제점과 이를 방지하기 위한 기전, 즉 우리 몸의 생체리듬을 사실상 지배하는 촉매로서의 효소 연구입니다. 효소와 산소가 오늘 우리의 몸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매우 각광받는 담론의 주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산소와 효소의 존재가치를 살펴보았습니다. 끝으로 논의의 진폭을 조금 넓혀 누구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환경문제 하나를 생각해 볼까 합니다. 저는 특히 이런 주제를 떠올릴 때마다 난 참 운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고 자괴할 때가 많습니다. 그게 바로 중국의 산업화 더하기 편서풍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우리에겐 악연 중의 악연입니다. 중국이 농업국가 상태로 머물러 있던 제가 어린 시절에는 겨울의 눈을 뭉쳐 먹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깨끗한 눈, 비가 내렸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살았습니다.
다 아는바, 지금 한반도의 서쪽바다는 10억 인구의 중국이 쏟아내고 뱉어내는 거대한 오물통입니다. 중국 대륙 동해안에 밀집한 온갖 거대산업시설에서 내뿜는 오염물질, 고비사막이 생산하는 황사는 또 어떻습니까? 중국발 공해물질을 가득 실은 편서풍의 직격탄이 우리의 맑은 하늘과 공기를 더럽힌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니다. 하지만 지척인데도 일본은 우리보다 운이 좋은 나라입니다. 일본에 내리는 눈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미세먼지 농도가 한국보다 낮은 이유는 미세먼지를 한국인들이 다 마셔줬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세먼지도 벅찰 판인데 더 걱정되는 게 바로 ‘플라스틱 눈’이라고 합니다. 버려진 플라스틱이 풍화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서 대기를 떠돌아다니다가 하늘 높이 올라가 눈과 함께 지상으로 내오는 것입니다. 지난해 10월 일본 와세다대 연구팀이 후지산과 오마야산 해발 1,300~3,776m에 있는 구름을 분석한 결과 각종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구름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구름 시료를 보니 1L당 6,7~13.9개의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 있었고 이중에는 수분을 빨아들이는 성질을 가진 플라스틱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물을 머금은 플라스틱 입자가 눈처럼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세 플라스틱은 5mm 미만으로 잘게 쪼개져 있어 공기나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 비뿐만 아니라 공기마저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우려는 이미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신생아가 태어나서 배설한 태변(胎便)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산모의 몸을 통해 태아의 소화기로 이동한 것입니다. 미국 뉴욕대와 중국 난카이대 공동연구팀이 뉴욕주 신생아 3명의 태변 샘플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이 가운데 2명에게서 태변 1g당 12,000ng(1나노그램=10억분의 1g)과 3,200ng의 PET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PET는 생수병에 사용되는 가장 일상적인 플라스틱입니다. 뉴욕대 연구팀은 생후 1년 유아 6명을 대상으로 대변 검사를 했는데 6명 모두에게서 1g당 5,700~82,000ng의 PET 성분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플라스틱 소재의 카펫에서 뒹굴거나 합성섬유를 빨고 씹으면서 미세 플라스틱 섭취가 많아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대안은 뭘까요? 실내 환기, 마스크 착용, 천연섬유 제품사용, 대기상태가 좋지 않은 날의 야외활동 자제, 눈, 비 안 맞기 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어른들은 어린이들만이라도 적어도 플라스틱 공해에서는 벗어날 수 있도록 보살피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강의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인간은 호흡을 통해 산소를 흡입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합니다. 그 산소로 섭취한 영양분을 연소, 즉 산화시키는 화학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얻어 생명을 유지합니다. 내뱉은 이산화탄소는 식물생태계가 받아들여 다시 산소를 생산합니다. 그런데 산소만큼 소중한 것이 바로 효소입니다. 효소는 산소가 우리 몸 안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촉매물질입니다. 또 세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물질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몸 안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화학반응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에서 이런 비유를 한 바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미국행 여객기가 이륙준비를 마쳤다. 승객도 탑승완료, 화물도 적재완료, 승무원도 정위치, 연료도 풀탱크, 관제탑의 이륙허가도 떨어졌다. 그런데 조종사가 없다.' 결론, ‘이 여객기는 절대로 이륙할 수 없다.’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 몸이 여객기라면 효소는 조종사와 같은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대부분 자체 생산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산소와 효소는 예외입니다. 오늘날 사람이 입을 통해 섭취하는 것은 식품, 의약품, 건강기능식품, 건강보조식품입니다. 효소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품, 즉 술을 포함한 발효식품, 각종 곡류, 야채, 과일, 육류 등을 통해 섭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화식, 즉 굽고, 삶고, 튀기고, 볶는 먹거리와 엄청난 종류의 가공식품을 주로 섭취하면서 우리 몸은 필요한 효소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선 모든 효소는 40도 이상 열을 받으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생식이나 날것만을 먹는 식생활을 일상으로 자리잡게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써 그렇게 한다고 결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을 거쳐나온 음식에 길들여진 인간의 유전인자, 온갖 향신료로 뒤덮인 가공식품 문화에 길들여진 입맛을 거슬러 생활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몸이 적정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물질을 별도로 섭취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효소를 몰라도 잘 살아왔는데?.....아닙니다. 더 좋은 몸 상태를 누릴 기회를 그동안 그만큼 놓치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또 우리 조상들은 효소를 몰라도 잘 살았는데?.....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조상들은 이미 높은 수준의 효소식을 했습니다. 치즈, 버터, 와인, 김치, 된장, 간장, 고추장을 늘 섭취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넘치는 패스트 푸드 가공식품이 전무(全無)한 온갖 발효식품, 천연 자연식품을 주식으로 하는 효소식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과정인 산화, 연소 화학반응의 원리를 인류 최초로 밝힌 천재 과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 그의 이론을 계승해 완성하고 특히 인간의 생명유지 필수품인 신비의 물질, 효소의 존재를 증명한 루이 파스퇴르의 발자취를 살펴보았습니다. 인류 문명사에 기여한 위대한 두 과학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