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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바이블1 신과 나눈 이야기1
월쉬(Neale Donald Walsh)가 지었고 조경숙님이 번역했다.
아름드리미디어 | 2011.12.10
book 1 내 인생은 모든 면에서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 날도 친숙한 노란색 종이철을 집어들어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모든 고통의 원천, 그 최대의 원흉과 직접 맞붙어 보기로 했다. 삶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였다. 내던지려 했을 때,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단단히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은 종이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1
1992년 봄, 내가 기억하기로는 부활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신이 당신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나를 통해서!
사연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 무렵 나는 사생활 면에서도 직업상으로도, 그리고 정서 면에서도 몹시 불행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생각을 편지 형식으로 적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에(그걸 부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원망스런 마음으로 마구 퍼부어댄 편지요, 혼란과 비틀린 심사와 비난으로 가득한 편지였다.
또한 그것은 한 무더기의 분노어린 질문들이었다.
왜 내 인생은 순탄하게 굴러가지 않는 겁니까?
잘 굴러가게 하려면 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행복하고 즐거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겁니까?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만져보는 일 같은 건 내 평생 한번도 없을 거란 말입니까?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힘주어 한 질문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늘 이렇게 고통스런
그런데 내가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는, 쓰디쓴 이 마지막 질문을 휘갈기고 나서 펜을
그러더니 갑자기 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떤 생각이 저절로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흘러나온 것은.......
너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받기를 참으로 원하느냐, 아니면 그냥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나는 놀라서 움찔했다....... 잠시 후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도 글로 적었다. 양쪽 다입니다.
나는 분명 푸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해답이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꼭sure as hell 듣고 싶습니다!
너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라고 하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살아서 꼭sure as Heaven"이라고 하는 게 더 멋지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어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 받아쓰기는 삼년간 계속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종이에 적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질문을 완전히 다 적고 나서 나 자신의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전에는 절대 내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받아 적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대답이 나오는 바람에, 그걸 쫓아가려고 마구 휘갈겨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란스러워지거나, 그 말들이 어딘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놓칠 때면, 나는 펜을 놓고 대화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영감-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그 상태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은 이것뿐이다-을 느꼈을 때, 비로소 노란 종이철 앞으로 돌아가 받아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이런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처음엔 그걸 믿지 않았고, 그 다음엔 나 자신에게 퍽 의미있는 대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을 만나는 당신들 모두를 위한 메시지다.
내 의문은 곧 당신들의 의문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이므로, 나는 당신들이 가능하면 한시바삐 이 대화에 뛰어들었으면 한다.
당신들을 여기로 데려온 건 바로 당신들의 인생체험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당신들 저마다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지금 이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리라.
자, 이제 내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한가지 의문, 즉 신은 누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하자 내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받은 대답은 이러했다.
GOD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언제나 말한다.
문제는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말을 귀담아 듣는가이다.
의아해진 나는 그 문제를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신을 이렇게 말했다.
먼저 말한다talk를 교류한다communicate로 바꿔보자.
뒤의 것이 훨씬 낫고 훨씬 충실하며 더 정확한 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즉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내게 얘기하려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말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 때문에 나는 말만으로 교류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말로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자주 쓰는 교류 형식은 느낌이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다.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자신에게 참인지 알고자 한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느낌이란 건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도 자주 있고.
그러나 네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것이야말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이다.
비결은 그런 느낌들에 다가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신에게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당장 원했던 것은 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좀더 완벽하고 충실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자주 영상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운송수단을 쓰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낌도 생각도 체험도 모조리 실패할 때, 나는 말을 쓴다.
사실 말은 가장 비효율적인 전달자이다.
말은 너무나 빈번하게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를 낳곤 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은 그저 입 밖에 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과 생각과 체험을 드러내는 소리.
말은 상징이자 ‘기호’이고 ‘표식’이다.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다.
너희가 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 앎을 주는 것은 체험이다.
물론 너희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앎의 다른 도구들도 주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도구들을.
그런데 여기서 최고의 역설은 너희가 ‘신의 말’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체험은 아주 하찮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 너희는 체험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있어서, 체험한 신이 말로 들은 신과 다를 때 아무 생각없이 체험을 버리고 말을 간직한다.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너희가 어떤 것을 체험하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로서 알고 직관으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말이란 오직 너희가 아는 것을 상징할 수 있을 뿐이어서 종종 너희의 앎을 어지럽힌다.
자, 이런 것들이 내 교류 도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그 자체로 교류 방법인 것은 아니다.
모든 느낌과 모든 생각과 모든 체험과 모든 말이 다 나한테서 나오는 건 아니기에.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빌어 많은 말을 해왔고, 많은 생각과 많은 느낌이 내가 직접 창조하지 않은 근거들의 뒷받침을 받아왔으며, 많은 체험이 그런 근거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도전은 통찰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신에게서 나온 메시지와 다른 출처에서 나온 자료의 차이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적용해보면 문제가 간단히 풀린다.
너희의 ‘가장 고귀한 생각’, ‘가장 명확한 말’, ‘가장 강렬한 느낌’은 항상 내 것이다.
그보다 덜한 모든 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다.
초심자조차도 가장 고귀하고 가장 명확하고 가장 강렬한 것을 확인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들도 주려 한다.
‘가장 고귀한 생각’이란 예외없이 기쁨이 담겨 있는 생각이며, ‘가장 명확한 말’이란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며, ‘가장 강렬한 느낌’이란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 느낌이다.
기쁨과 진리와 사랑.
이 셋은 서로 뒤바뀔 수 있으며, 하나는 언제나 다른 것들을 가져다 준다.
그것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이 지침들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가 내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인지 결정하고 나면,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닌가뿐이다.
너희는 내 메시지를 대부분 그냥 흘려버린다.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훌륭해서 진짜같아 보이지 않고, 또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어려워 따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많은 메시지들은 단순히 잘못 이해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다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메시지의 가장 강력한 전달자는 체험이다.
하지만 너희는 체험조차 무시한다. 아니, 너희는 특히 이것을 무시한다.
만일 너희가 자신들의 체험에만 귀를 기울였더라도 너희 세상이 지금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체험을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겪게 되는 것은 체험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내 의지는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늦든 빠르든 결국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너희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선택한 대로 할 수 있는 힘,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것을 너희에게서 도로 빼앗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너희가 우주의 어느 구석에 있든 나는 몇천 몇만 년을 두고 같은 메시지들을 너희에게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할 것이다.
너희가 내 메시지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들을 가까이 두고 너희 자신의 것이라 말할 때까지, 나는 끝없이 보낼 것이다.
내 메시지들은 몇백 만년에 걸쳐 몇천 번의 순간에 몇백 가지 형태로 올 것이다.
너희가 진실로 귀 기울인다면 그것들을 놓칠리 없을 것이며, 한번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교류는 가장 진지하게 시작될 것이다.
과거에 너희는 그저 나한테 이야기하거나 기도하거나 나를 중재하거나 내게 탄원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너희에게 답해줄 수 있다.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할 수도 있다.
이런 교류가 신에게서 왔다는 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내 멋대로의 상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냐구요?
그게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너는 내가 다른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네 상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쉽게 일할 수 있다는 걸 모르겠는가?
나는 어느 때라도 한가지 혹은 여러 가지 장치를 써서 그 순간의 목표에 정확히 들어맞는, 그야말로 딱 부러진 생각이나 말, 느낌 따위를 네게 줄 것이다.
네가 이제까지 자신의 힘만으로 이렇게 명확하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이 말들이 나한테서 왔음을 알 것이다.
예전에 이미 네가 이 질문들에 이렇게 분명하게 답할 수 있었다면, 아마 너는 이것들을 묻지도 않았으리라.
신은 누구와 교류합니까?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특별한 시기가 있는 겁니까?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고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람, 다른 때보다 더 특별한 때 같은 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은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사람들과만 교류한다고 믿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내 메시지를 훨씬 덜 받아들이며(이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말을 전부라고 여긴다.
너희는 내게 귀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서 온갖 주제들에 관해 듣고 있는 걸로 판단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에게 귀 기울여 들어달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이라고 전하는 것에만 귀 기울이면 되므로 너희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 차원에서 내 메시지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너희가 직접 내 메시지를 받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해석할 책임은 너희에게 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 너희가 충분히 잘 받아들일 수도 있는 메시지를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너희는 타인들(심지어 이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더 안전하고 훨씬 더 편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신과 교류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너를 초대한다.
그것은 양방향의 교류이다.
실제로 나를 초대한 건 너다.
왜냐하면 나는 네 부름에 답해서 지금 이 순간 이런 형식으로 네게 왔기에.
어떤 사람들, 예컨대 예수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의 메시지를 더 잘 듣는 것 같은데, 그건 왜 그런 겁니까?
그 사람들은 진실로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꺼이 듣고자 하며, 두렵거나 미친 짓같아 보이거나, 완전히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때조차도, 기꺼이 나와의 교류에 문을 열어놓고자 한다.
우리는 자기가 들은 게 틀린 것처럼 여겨질 때도 신에게 귀 기울여야 합니까?
틀린 것처럼 여겨질 때 특히 더 그래야 한다.
만일 너희가 매사에 자신이 옳다고만 여긴다면 신과 대화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냥 앞으로 나가면서 너희가 아는 바 그대로 행동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시작된 이래 너희가 줄창 해온 게 바로 그런 짓임을 잊지 마라.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라.
너희는 분명 뭔가를 놓쳐왔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너희가 이해하는 것은 너희에게 옳게 여겨질 것이다.
“옳다” 자체가 자신이 동의하는 어떤 것을 가리킬 때 너희가 쓰는 용어이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놓친 것은 처음에는 “틀린”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서 앞으로 나가는 단 하나의 방법은 자신에게,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옳다’면 어떻게 되는가?” 물어보는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누구나 이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 과학자는 기왕의 모든 가설들을 제쳐 두고 새로 시작한다.
모든 위대한 발견들은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의지와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바로 그런 의지와 능력이다.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을 알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을 알 수 없다.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의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는 너희가 나한테 너희의 진리를 말하는 짓을 그만둘 때까지는 내 진리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신에 관한 내 진리는 당신한테서 온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가?
다른 사람들이요.
어떤 다른 사람들?
지도자들. 목사들. 랍비들. 사제들. 책들. 거기다 성서도요!
그런 것들은 믿을 만한 출처가 못된다.
그것들이 믿을 만한 출처가 아니라구요?
그렇다.
그럼 뭐가 믿을 만한 출처인가요?
네 느낌에 귀를 기울여라.
‘네 가장 고귀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라.
네 체험에 귀를 기울여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네 선생들이 말한 바나 네게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다면, 말들 쪽을 잊어버려라.
말이란 건 가장 믿음직스럽지 못한 진리 조달업자이다.
당신한테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어째서 당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죠?
진실로 신이 존재하고, 당신이 바로 그라면, 왜 당신은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나는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그렇게 해왔으며, 지금도 또 한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아니고, 반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확연한 드러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컨대 바로 지금 제 눈 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어디 계시는데요?
네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
아니, 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식말입니다.
그게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는 건가?
너는 나를 어떤 형상, 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려는 거냐?
당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형상이나 모습으로요.
나는 너희가 이해하는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누구나 하나같이 자기네가 본 것이 신의 많은 형상이나 모습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형상이자 모습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가 보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자기네가 보는 대로의 존재인 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특정 순간에 화(化)한 무엇이 아니라, ‘위대한 보이지 않음’Great
Unseen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아닌 것이 나다.
나는 없음am-notness에서 나오고 항상 그것으로 되돌아 간다.
그럼에도 내가 특정의 형상, 곧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형상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그 형상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야 했다면, 앞서 나를 본 사람들은 이들에게, 나타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네에게 나타났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똑같은 것을 말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나일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 자신을 어떤 형상,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어떤 형상을 하든 반박할 수 없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입증해줄 행동을 한다면.......
.......그게 악마의 짓이라거나 그저 누군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들, 혹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전능한 신’,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드러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산을 옮긴다 해도, “그건 악마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통해 신 자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내면 체험으로 신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외부 관찰은 필요하지 않다.
또 외부 관찰이 필요하다면 내면 체험은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신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요청 행동 자체가 곧 신이 그곳에 없다는, 즉 신의 어떤 것도 지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에.
그런 진술은 그런 체험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생각은 창조력을 갖고 있고, 너희의 말은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생각과 말은 함께 어우러져 너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신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체험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청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말씀은 원하는 어떤 것도 청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것을 오히려 밀쳐낸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 되어 온 질문으로,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항상 답해주었다.
하지만 너희는 내 대답을 듣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용어와 지금의 언어로 그 질문에 다시 답해주겠노라.
그건 이러하다.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want는 너희의 진술은 정
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wanting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다.
너희가 현실에서 체험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미리 신에게 감사할 때, 사실상 너희는 그것이....... 실제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감사는 신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진술,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해주는, 하나의 확약이다.
그러므로 결코 간청하지 마라. 감사하라.
하지만 만일 내가 뭔가를 기대하고 신에게 미리 감사를 드렸는데, 그게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요?
그럴 경우 환멸과 쓰라린 심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텐데요.
감사를 신을 조종하는 도구, 우주를 기만하는 방책으로 써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너희의 정신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의 진실을 알고 있다.
만일 너희의 지금 현실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나 확실히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해주신 것에 신께 감사드립니다”고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신이 너희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너희에게 그것을 마련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냐?
신은 너희가 아는 것을 안다.
그리고 너희가 아는 것은 너희의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데, 어떻게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까?
믿음. 만일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산도 옮길 것이다.
그것이 있다고 내가 말했기에,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대답해주리라고 내가 말했기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너희가 이름을 댈 수 있는 모든 스승들을 통하여, 너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내 이름’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있게 되리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했고 또 말해왔기에, 너희는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 기도에 아무 응답도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기도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열렬한 진술이다.
따라서 어떤 기도도 응답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모든 기도, 모든 생각, 모든 진술, 모든 느낌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 기도를 얼마나 열렬하게 진실로서 지니는가에 따라, 바로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은 너희의 체험 속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기도에 응답이 없었다고 할 때에도, 실제로는 가장 열렬하게 품고 있는 생각이나 말, 혹은 느낌이 작용한다.
하지만 너희가 알아두어야 할 건, 생각을 조종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 뒤의 생각이란 점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이것을 ‘받침 생각’ Sponsoring Thought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걸하거나 간청한다면 너희가 선택하는 것을 체험할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진다.
그 모든 간청의 배후에 있는 ‘받침 생각’은, 자신은 지금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에, 그런 식의 받침 생각이 너희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뒤덮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받침 생각은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신은 틀림없이 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생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수는 아주 적다.
신이 모든 요구를 언제나 들어주리라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요구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이해할 때 기도하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된다. 그것은 결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의 진술이다.
기도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진술이라고 하실 때, 신인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기도 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기도가 만든 결과일 뿐이란 말씀입니까?
만일 너희가, 모든 기도를 듣고 어떤 기도들에게는 “그래”라고 하고, 다른 기도들에게는 “안돼”라고 하고, 그 나머지 기도들에게는 “어쩌면, 하지만 지금은 안돼”라고 말하는 어떤 전능한 존재를 신이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신이 그런 주먹구구식 결정을 한단 말인가?
만일 신이 너희 삶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존재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그리고 신은 너희가 삶을 살아갈 때 기꺼이 너희를 거들기 위해 옆에 서 있겠지만, 너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너희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는 건 신의 직분이 아니다.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닮은꼴로 너희를 창조했다.
너희는 신이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그 나머지를 창조했다.
신은 너희가 알다시피 생명의 과정과 생명 자체를 창조했다.
하지만 신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는 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선택권을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한 너희의 의지는 너희에 대한 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너희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신이 너희가 하는 일에 여러모로 마음쓰리라는 생각은 너희가 빠져 있는 크나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무척 서운하겠지만, 나는 너희가 뭘하든 마음쓰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라고 아이들을 밖에 나가 놀게 할 때 아이들이 뭘 하는지에 신경을 쓰는가?
그 애들이 술래잡기를 하든 숨박꼭질을 하든 흉내놀이를 하든, 너희에게 그것이 중요한 문제일까? 아니다.
아이들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걸 너희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을 편안하고 만사가 순조로워 보이는 환경 속에 놓아두었다.
물론 너희는 늘 애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애들이 다친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애들을 도와주고 치료해주며, 다시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다음날 다시 나가 놀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에도 애들이 숨박꼭질을 택하든 흉내놀이를 택하든 너희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너희는 애들한테 어떤 놀이가 위험한지 얘기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애들이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순간마다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현명한 부모는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그 결과에 마음쓰는 것을 결코 그만두지 못한다.
과정에는 그다지 마음쓰지 않으나 결과에는 무척 마음쓰는 이같은 양면성이 신의 양면성을 설명할 때 비슷한 예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은 결과에도 마음쓰지 않는다.
궁극의 결과에 대해서는, 궁극의 결과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결과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은 인간들이 품고 있는 두 번째 크나큰 환상일 뿐이다.
너희의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을 낳는 것은 궁극의 결과에 대한 이같은 의심이다.
너희가 결과를 의심한다면 너희는 창조주, 즉 신을 의심해야 하고, 신을 의심한다면 너희는 평생동안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신의 의도와 이같은 궁극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신의 능력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한시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단 한번이라도 진실로 평화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은 의도대로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이것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으려 한다(너희가 신의 전능함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너희는 신의 의지를 훼방놓을 방법을 찾아내려고, 신과 맞먹는 힘을 너희의 상상 속에서 창조해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악마”라 부르는 존재가 너희의 신화 속에 탄생했다.
너희는 신이 이 존재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상상까지 해왔다(신도 너희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너희는 신이 이 전쟁에서 실제로 질 수도 있다고 상상해왔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너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신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너희가 환상 속에 살고 있으며, 그 때문에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신을 의심하겠다는 너희의 바로 그 결심 때문에.
그러나 네가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들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 속의 법열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안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 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밖의 모든 개념들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른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며, 사람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너희가 지고한 사랑을 맹세하는 바로 그 순간 너희는 가장 큰 두려움을 맞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이하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토록 경이로운 장대함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존재에게서는 신조차도 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며, 엄청나게 못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신이 그토록 못난 존재라는 생각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온갖 것들에 대해서 너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해준 유일한 사람들, 즉 너희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이다.
이들은 너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째서 그들이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너희에게 이건 지나치고 저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너희는 그들이 너희를 바라보긴 하지만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느끼지 않았던가?
그들은 너희가 가장 충만감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종종 너희를 나무라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은 너희 더없이 분방한 상상 중 얼만가를 무시해버리도록 유도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받아온 메시지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기준에 맞지도 않고, 따라서 신(God)에게서 나온 메시지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들은 너희 세계의 신들(gods)에게서 나왔음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사랑이 조건부라고 가르친 사람들은 너희 부모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들을 숱하게 경험했다.
또 너희의 사랑하는 관계에서조차 이런 체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도 너희 부모들이다.
그것은 또 너희가 내게 적용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이런 체험에서 너희는 나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내며, 이런 틀 속에서 너희는 너희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신은 사랑의 신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의 계명을 어긴다면 그 분은 우리를 영원히 추방하고 영원히 단죄하실 거야.”
너희는 너희 부모가 내린 추방을 체험했고, 그들이 내린 단죄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것과 다르리라고 너희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조건없이 사랑받는 게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
너희는 신의 사랑을 체험했던 걸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세상에서 보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려 애쓴다.
너희는 부모의 역할을 신에게 투사(投射)해왔기 때문에, 너희가 한 짓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판한 다음,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의 신화에 근거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관(神觀)이다.
이것은 내 본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너희는 이렇게 영적 진리들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신에 관한 사유체계 전체를 만들어낸 뒤, 사랑을 둘러싼 실체 전체도 창조해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는 무서운 신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둔 실체이며, 두려움에 그 근거를 둔 실체이다.
그것의 받침 생각은 틀린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 너희의 신학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신학이 참으로 너희를 구원해준다 할지라도,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두렵지 않은 신, 심판하지 않는 신, 벌줄 이유가 없는 신이라는 개념은 그냥 너무나 근사해서, 신의 본질에 관한 너희의 어떤 거창한 관념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에 근거한 사랑의 실체가 너희의 사랑 체험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실 그런 체험을 실제로 창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받는 사랑이 조건부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같은 식으로 사랑을 주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자신의 조건들을 굳게 지키거나 물리거나 설정하는 동안에도, 너희의 한 부분은 이런 게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너희는 사랑을 펼치는 그런 방식을 바꾸기에는 무력하다고 느낀다.
너희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제까지 나는 확고한 사랑법을 배워왔다.
이제 또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사랑에 과한 너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너희는 자신에게 끝내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참된 나(神)를 끝내 알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영원히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화해하는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기에, 너희는 결국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내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박고 있다.
상업과 산업, 정치, 종교, 2세 교육, 너희 국가들의 사회문제, 너희 사회의 경제 목표에 영향을 주는 결정들, 전쟁과 평화와 공격과 방어와 침략과 항복에 관련된 선택들, 즉 탐낼 것인지 양보할 것인지, 쌓아둘 것인지 분배할 것인지, 합칠 것인지 나눌 것인지에 대한 결정들-너희가 지금까지 내린 이 모든 자유로운 선택 중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단 두가지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즉 사랑이라는 생각이나 두려움이라는 생각에서.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머무르고 드러내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다.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당신은 아주 쉽게 말씀하시나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두려움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하며, 가장 영리한 자가 성공한다고 들어왔다.
너희는 지고한 사랑의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너희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장 잘 적응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영리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치며,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이에 못미치는 것처럼 여겨지면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못미치는 건 곧 잃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너희는 두려움에 뒷받침된 행동을
너희가 이제까지 배워온 게 바로 그런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렇다.
너희가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할 때 너희는 생존 이상을 하게 될 것이고, 이기는 것 이상을 하게 될 것이며, 성공 이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Who You Really Are(이하에서 ‘참된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너희는 악의는 없으나 잘못 알고 있는 너희 속세 선생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다른 원천에서 나온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너희 중에도 그런 스승들은 많다.
너희에게 이런 진리들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깨우쳐주는 사람들 없이, 내가 너희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깨우쳐주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너희 외부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 내면의 소리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내가 첫 번째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내면의 소리는 너희에게 가장 가까우니 내가 말하는 가장 큰 소리이다.
그것은 자기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너희가 규정하는 식대로 참인지 거짓인지, 옳은지 그른지, 혹은 좋은지 나쁜지 말해주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방향을 정하고, 배의 진로를 잡고, 여정을 이끌어주는 레이더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읽고 있는 바로 그 말들이 사랑의 말인지 두려움의 말인지 당장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준다.
너희는 그 이야기에 따라 그 말들을 유의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당신은 내가 항상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면, 내가 누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거라고 하셨는데 이 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든 삶에는 단 하나이 목적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너희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한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밖에 너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모두 이 기능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너희의 영혼이 해야 하고, 너희 영혼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목적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끝남은 일종의 한계인데, 신의 목적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더없이 충만한 영광 속에서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 너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영광이 실현되기를 꿈꿀 것이다.
체험이 깊어질수록 너희는 더 깊게 체험할 것이며, 깊게 체험할수록 너희의 체험은 깊어질 것이다.
거기에 내재된 가장 심원한 비밀은 삶이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란 데
있다.
너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Who You Are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자’Who You want to be(이하에서 ‘되고자 하는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판단하도록 하라.
삶이 일종의 학교 같은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어 있으며, 일단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것들을 추구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너희 신화의 또 다른 부분이다.
삶은 학교가 아닌가요?
그렇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고요?
그렇다.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학교 얘기로 다시 되돌아가보도록 하죠.
저는 많은 선생들로부터 삶은 일종의 학교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당신이 그걸 부정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는 너희가 알고자 하는 어떤 걸 모를 때 가는 곳이다. 너희가 어떤 걸 이미 알고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앎을 체험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너희가 가야 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삶(너희의 표현대로)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이다.
이걸 하기 위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걸 기억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렇게 시작해보자.
영혼,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괸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오랫동안 사색해왔다.
너희와 내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세상 나이의 몇배나 되는 이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러니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로운지 족히 짐작이 가리라!
또 다시 뭔가 뭔지 모르겠군요. 당신 자신에 관한 당신의 체험이라구요?
그렇다.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마.
태초에 ‘존재’Is는 존재했던 모든 것all there was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 All ?That Is는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신비론자들이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다뤄온 저 위대한 ‘존재/부재Is/Not Is'의 등식이다.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장대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장대하다”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인 용어이기에 그런 체험은 불가능했다.
‘존재 전체’는 비(非)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말씀 계속하시죠.
좋다.
‘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가지는 자기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부재”, ‘있음-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했다.
이 에너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찰되지 않는, 따라서 다른 어떤 에너지도 파악할 수 없는 이 순수 에너지는 더없는 장대함으로 자신을 체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부분도 필연적으로 전체보다 못한 게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자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 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은 자신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영광스런 한 순간에 자신을 이것과 저것인 것으로 나누었다.
처음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존재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전체가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불현 듯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있지 않지만 여기와 저기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건 무nothing이고 공간을 지탱해주는 건 비공간이며, 부분을 지탱해주는 건 전체다.
이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 설명을 따라오고 있는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믿고 안믿고는 차치하고요.
당신은 아주 명쾌한 보기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셨기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더 앞으로 나가보기로 하자.
지금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이 무(無)를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이 아닌 어떤 것, 곧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있다는 걸 뜻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망라한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렇게 ‘위대한 보이지 않음’, 즉 ‘무’ 또는 ‘사이 공간Space Between'으로 설명하는, 동양 특유의 신에 대한 신비주의 정의 역시 신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규정하는, 서양 특유의 실용주의 설명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이제 신은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relativity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일찍이 신이 자신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relationship는 신이 일찍이 너희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나중에 상세히 논의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무’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났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너희 과학자들이 빅뱅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딱 들어맞는 영적인 사건이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앞으로 내달릴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니,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데 걸리는 기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너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비천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이 지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투쟁과 전쟁, 천사의 군대와 악마의 전사들, 선과 악의 힘, 빛과 어둠의 힘들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갖춘, 꽤 정교한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이 신화들은 인류가 그 영혼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그 정신으로는 좀처럼 인식하기 힘든 우주적 사건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생겼다.
신은 자신의 나눠진 변형으로 우주를 있게 하면서 순수 에너지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만들어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서 신은 물질 우주뿐만 아니라 형이상의 우주까지도 창조한 것이다. 존재/부재 등식 중에서 부재를 이루는 신의 부분 역시 전체보다 작은, 무한히 많은 수의 단위들로 폭발했다.
이 에너지 단위들을 너희는 영혼이라 부른다.
너희의 종교 신화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을 “아버지 신”이 많은 영적 자식들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는, 인간의 체험에 견준 이같은 비유는 현실에서 일반 대중에게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개념, 즉 “하늘 왕국”에 무수한 영혼들이 갑작스레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너희 신화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궁극의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전체를 이루는 무수한 영혼들은 우주적인 의미에서 내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내 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줬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서로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신은 특정 목적을 위해 택하는 물질 형상이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말은 우리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똑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같은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내가 영적인 자식인 너희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너희를 통하는 것 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에 대한 내 목적은 너희가 자신을 나(神)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너희 자신을 나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가 아주 미묘해질테니 내 얘기를 따라오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좋다. 이런 설명을 요구해온 건 너라는 걸 명심하라.
너는 여러해 동안 이것을 고대해왔다.
너는 신학 교리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속인(俗人)들의 평이한 용어로 이런 설명을 요청해왔다.
그랬죠-전 제가 뭘 요구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청해온 것이니 받아들일 것이다.
자, 이제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논의를 위한 토대로 신의 자식이라는 너희의 신화 모델을 이용해보자.
그것이 너희에게 친숙한 모델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인식이라는 이 과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내가 내 모든 영적인 자식들에게 자신들을 내 부분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그냥 그들에게 얘기해주는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혼이 자신을 그냥 신 또는 신의 일부, 신의 자식, 또는 하늘왕국의 상속자(또는 너희가 이용하는 신화가 어떤 것이든 간에)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내가 그랬던 꼭 그대로!).
개념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너희에게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합작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너희 모두가 나와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하에서, 순수 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가 맨 먼저 물질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 체계와 그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너희는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자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너희가 말랐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뚱뚱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체험할 수 없다.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너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uncreate 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 상태에 계속 머무르라.
물론 너희가 너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바로 그것(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너희는, 말하자면 성(城) 안에서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너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神)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신의 일부라는 얘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너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희가 내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잊을 수는 있다.
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rance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 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너희의 직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재구성하는(기억하는-옮긴이)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remind 것(즉 그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쓰는re-mind 것)이 너희의 직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유일한sole 목적이다. 다시 말해 너희 영혼soul의 목적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 단순하군요. 또 정말....... 대칭적이고, 제 말은 모든 게 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는 겁니다!
갑자기 모든 게 다 그렇게 맞아들어가다니!
지금 저는 예전엔 한번도 끼워맞춰보지 못했던 그림을 보고 있어요.
좋아. 좋아. 이 대화의 목적이 바로 그거니까.
너는 내게 대답을 청해왔고, 나는 네게 대답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너는 이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네가 할 일의 일부다.
자, 너는 인생에 관해 던질 많은 질문과 의문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기반을 다져놓았고,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을 깔아놓았다.
이제 다른 질문들로 넘어가보기로 하자.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이제까지 다뤄온 것들을 네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금방 선명해질 터이니.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
묻고 싶은 것들이 워낙 많아서 우선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들, 가장 두드러진 것들에서 시작해야 할 듯싶습니다.
예컨대 왜 세상이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나 하는 문제 같은 거요.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던진 질문들 가운데서 가장 자주 물어왔던 것이다.
인간은 그 질문을 태초부터 던져왔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너희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알고 싶어해왔다.
그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전형은 대체로 이렇다.
만일 신이 더없이 완벽하고 더없이 애정깊은 존재라면, 왜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지진과 회오리바람과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깊은 신비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 속에 들어 있다.
나는 너희 주변에 너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내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게 하여 내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사랑 아님not loving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너희에게도 내게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너희가 나온 곳도 거기이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 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물론 너는 신을 아버지-아들로서 설명하는 게 성(性)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너희의 가장 최근 경전들에 나오는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앞서 나온 경전들은 이 비유를 어머니-딸의 관계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너희 사고방식에서는 그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아니면 생기게 하는 것과 생긴 것 간의 관계로 보거나.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생기게 하는 것/생긴 것/존재하는 것.
이 ‘삼중의 실체’는 신의 표식이다
그것은 신성한 패턴이다.
하나 속의 셋은 숭고한 영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든, 신과 의식이든, 혹은 그 외의 다른 모든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너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너희는 삶의 모든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삶의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관계들 속에서 삼위일체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
너희 종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삼위일체 진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표현해왔다.
너희 정신과 의사들 중 일부는 초의식과 의식과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너희 심령주의자들 중 일부는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며, 너희 과학자들 중 일부는 에너지와 물질과 에테르(氣 또는 精氣를 말함-옮긴이)를 본다.
너희 철학자들 중 일부는 어떤 것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모두 진실일 때만 너희에게 진실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시간을 말할 대 너희는 오로지 세 가지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지각 속에는 전(前)과 지금과 후(後)라는 세 순간이 존재한다.
우주 속의 지점들을 다루든 자기 방 안의 지점들을 다루든 간에, 너희는 공간 관계의 면에서 여기와 저기와 이것들 간의 사이 공간을 인식한다.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너희는 어떤 “사이in-between”도 인식하지 못한다.
숭고한 영역의 관계들은 변함없이 3개조(組)인 반면 조악한 관계들은 언제나 2개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왼쪽-오른쪽과, 위-아래,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덥다-춥다, 그리고 일찌기 창조된 것 중에서 최대의 쌍인 남성-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쌍들에는 사이라는 게 전혀 없다.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나, 이 양극단 중 어느 하나의, 더하거나 덜한 변형(變形)일 뿐이다.
조악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어떤 개념도 그 대립물의 개념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너희의 일상 체험 대부분이 이런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미묘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립물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리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간다.
시간이 바로 그런 절묘한 영역이다.
거기에서 소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들은 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그것들은 대립물이 아니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요, 같은 개념의 진행들이며, 같은 에너지의 원들이고, 변치 않는 같은 진리의 측면들이다.
만일 여기에서 너희가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너희의 결론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점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 나중에 시간 전체 개념을 탐구할 때 훨씬 더 상세하게 이 문제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조악한 물질성의 영역 속에 있기 때문에 이와 달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과 태풍, 홍수와 회오리, 그리고 그 밖의 소위 자연재해라는 것들은 원소(element)들이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탄생-죽음의 전체 순환 역시 이런 움직임의 일부이다.
이 움직임은 생명의 리듬이다.
조악한 현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이 리듬을 따른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파동이고 진동이며, 존재하는 전체의 심장부에서 울려나오는 고동이다.
병은 건강의 대립물로, 너희 명령에 따라 너희의 현실에서 드러난다.
어떤 수준에서든 너희가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았는데 아파질 수는 없으며, 건강해지기로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한순간에 좋아질 수 있다.
개인의 극심한 불행은 그 개인 스스로 선택한 방응이며, 전세계의 재난들은 세계의식의 결과이다.
너희의 질문에는 이런 사건들을 선택한 게 나(神)이고, 내 의지와 바램 때문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들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너희가 그렇게 하는 걸 관조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건들을 막을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 의지를 방해하는 것이고, 너희의 신 체험, 곧 너희와 내가 함께 선택한 체험을 도로 빼앗는 것이 되기에.
그러니 너희가 세상에서 나쁘다고 말하는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너희가 그것의 어떤 면을 나쁘다고 판단했는지, 그리고 정녕 나쁘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라.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해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해 보라.
“지금 이런 재난을 당하면서 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가? 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불러내고자 하는가?”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 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이 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영혼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므로, 이 우주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으며 오로지 창조자들만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이 행성을 걸었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Masters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희가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그들 중 다수가 진실로 박해받았는데도 말이다.
하나하나의 영혼은 모두 선각자들이다.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유산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혼들은 있긴 하지만,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너희는 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한 죽음이 수천의 생명을 살릴 때 그 죽음이 과연 재난인가?
한 삶이 비탄만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과연 기쁜 일인가?
그러나 너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둬라.
이것은 남들이 도움을 청할 때 무시하라거나, 너희 영혼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걸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는 동안, 꼬리표 붙이기나 판단 내리기를 피하라는 뜻이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자신이 빛인 걸 아는 한 영혼이 있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영혼이어서 체험을 갈망했다.
그것은 “나는 빛이다. 나는 빛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것의 어떤 앎도, 또 그것의 어떤 말도 그것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생겨난 영역에는 빛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라.
너희가 창조하는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진술이기에.
내가 너희에게 작은 영혼과 태양에 관한 이런 우화를 들려준 건 세상이 왜 이런 식인지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본질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기억하는 그 순간, 세상은 한 찰라에 변화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지금, 인생은 학교이며 너희가 인생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들이 다 너희의 배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에도 이런 견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다시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너희는 배워야 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채 지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밝힘으로써 너희는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게 만들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거룩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나쁜 일들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말씀인가요?
이 세상이 재앙과 재난들조차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자신’의 대립물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는, 좀 덜 고통스런 방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은 없나요?
너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 하나하나가 다 좋은 질문들이다.
자, 그것들을 한번에 하나씩 다뤄보기로 하자.
아니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소위 나쁜 일들을 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각된 감각으로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너희 자신의 창조물들이다.
너희는 항상 창조하는 과정 속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일분일분마다, 그리고 날마다.
너희가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지금은 그것에 대한 내 이야기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라.
너희는 하나의 커다란 창조기여서 말 그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새로운 현상들을 드러내간다.
일과 사건과 조건과 상황들은 모두 의식에서 창조된다.
한 개인의 의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둘 이상의 의식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어떤 종류의 창조 에너지가 분출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중의식이라면? 우와! 그 힘은 너무나 막강하여 세계적인 중요성과 지구적인 결과를 갖는 사건들과 환경들을 창조할 수 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식으로, 너희가 그런 결과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만큼이나 너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 역시 나처럼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으로 네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희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너희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앞선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선각자들이 늦든 빠르든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부라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그따위 짓을 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자가 저 밖에 있다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할 때라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을 바꿀 힘을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기보다 훨씬 더 쉽다.
뭔가를 바꾸는 첫단계는 네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너희가 개인 차원에서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너희의 오성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는 어떤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노력하라.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뿐이다.
즉 우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것으로만.
삶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때 삶은 ‘자기’ 창조가 된다.
너희는 자신을 ‘자신’으로, 그리고 ‘항상 되고자 했던 자신’Who You've Always Wanted to Be으로 창조하기 위해 삶을 이용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딱 한가지뿐이다.
즉 그것이 더 이상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진술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
그것은 더 이상 너희를 반영하지 않고, 더 이상 너희를 대변하지represent 않는다.(즉 그것은 너희를 재표출re-present시켜 주지 않는다.......).
만일 너희가 정확하게 재표출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영원 속에 투영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 삶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은 너희가 선택한 것들이다.
잘못은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창조한 것이 너희 자신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런 꼬리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나쁘다는 꼬리표를 달기 보다는 그것들이 너희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너희가 세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바로 이 지적(知的), 영적(靈的) 부정직함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였다면, 혹은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만이라도 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같이 책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토록 완벽한 고통을 만들고, 그토록 신랄한 역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재해와 재난들, 즉 회오리와 태풍, 화산폭발, 홍수 따위의 물질적 소동들을 특별히 네가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창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들이 네 삶에 미치는 강도(强度)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분방한 상상력으로 네가 조장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류의 결합된 의식이다.
세상 전부의 공동 창조가 이런 체험들을 낳는다.
너희 각자가 하는 일은, 그것들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자신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것들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판단하면서 그것들을 경험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영적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또 개인으로 너희가 체험하는 삶과 시간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이런 과정을 좀 덜 고통스럽게 겪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부체험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겪는 세상 체험과 세상 사건들에서 연상하는 고통을 줄이려면, 너는 그것들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네가 외부 사건을 바꿀 수는 없다. (외부 사건은 너희 다수가 창조해낸 것이다. 집단이 창조한 것을 개인이 바꿀 수 있을 만큼 네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면 체험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삶을 깨닫는mastery 길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선각자들은 가장 쓰라린 고통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선각자들은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출처] http://blog.daum.net/zpzg4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