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까마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도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69년 5월1일자로 대방동에 있는 서울대방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의 첫 생활은 비만 오면 교문앞이 온통 진흙투성이로 발이 빠지고 벌레에 물려
발등이 붓는등,서울로 온게 아니라 시골로 온 느낌이었다.아스팔트 위에서만 살아온 나에게는
서울의 모습이 아니었다.
63년 첫 발령을 받은곳은 80여 학급에 6000여명의 학생이 있던 부산영선초등학교다.
부산교육의 제1인자 정정봉교장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교대 2학년때 현장학습으로 모두가
같이 한번 가본 학교이다.이 학교에 나 혼자 달랑 발령을 받아 조금 변두리로 가더라도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발령받은 친구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2~3년후 나혜정, 박명선, 박안자, 3반의 최평림이 발령을 받아와서 함께 근무하니 너무 좋았다.
서울에 첫 발을 디딘후 그 유명한 한강을 보고 나는 너무 실망했다. 부산에서 눈만뜨면 큰
바다를 바라보던 내게 한강은 너무나 작은 강이었다. 살아 오면서 한강의 참 모습을 보고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되었지만.
대방학교에 근무하면서 근처에 있는 공군본부, 해군본부에 소풍도 가고 어머니 교실 초대 강사로
오신 양주동 박사의 강의도 직접 들으니 서울온 실감도 좀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남편이 공군사관학교 교수였던 문운자 ( 귀순용사 고 이웅평장모)선생님을 만나
이후 40여년간 돌아가시기 전까지 친언니 처럼 지내왔다.
그 당시 서울의 교육 모습은 부산이나 다른 지방보다 모든 면에서 수준이 낮고 질이 떨어져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전근을 갈때마다 언제나 나는 달랑 혼자였다. 그럴때마다 고향 부산을 생각했다
부산에서 전근을 하게되면 어느학교로 가던 동창들이 있어서 좋을텐데 하는 마음 뿐이었다.
당시에 서울에서는 경상도 사람들이 귀했고 고향 까마귀가 아니라 고향 말씨만 들어도 얼마나
반갑던지.....
이후 고속도로가 뚫리고 고속버스도 등장하면서 차차 경상도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되었으며 간혹
학교에서 한, 두명이지만 후배도 만나게 되고 경상도 출신 교장닏도 모시게 되어 고향떠난
향수를 조금씩 잊어가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입구에 있는 원당초등을 거쳐 동부이촌동에 있는 신용산 초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동부이촌동 한강변 한강맨션단지는 압구정동이나 여의도 단지가 생기기 전이라 서울에서는 최고로
치는 아파트 단지였고 서울 아파트붐의 시조로 그 명성을 떨치던 곳으로 단지 안에 신용산초등이
있었다.가정환경 조사서를 받아보면 학부모 대부분이 서울대,연대, 이화여대 출신이고 매우 수준
높은 지역이었다. 교무실에 가면 선생님들이 받은 선물꾸러미 들이 모두가 고급품들 뿐이었다.
당시 서초동에 살던 나는 동부이촌동까지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우리반 학부형이었던 탈랜트 오현경씨가 아침마다 차를 가지고 와서 출근길에 나를 태우ㅜ
첫댓글 69년도에 서울 오셨으니 엄청 서울생활 오래 하셨군요^^ 물론 63년도에 교대졸업과 더불어 바로 발령받아 올라온 7명 동기들보다야 몇 년 늦어셨지만... 아무튼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곳곳에 벤 글을 읽으니 공감으로 가슴이 먹먹해 지는군요..
글이 중단 된 것으로 보아 2부가 계속되겠지요?...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기로 작정하신 것 같아 매우 좋습니다. 실타래가 풀리둣이 이야기가 술술 많이 재미있게 나오기를 기대 합니다. 이야기 속에 우리들의 추억의 단편들이 같이 묻어 나오는 군요. 지나간 옛 풍경들이 눈 앞에서 일렁 거려요.
곽형! 윗글에 고향까마귀 마무리 있어요...
정보와지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융합의 세상에 한 번뿐인 삶, 후회 없이 살아갑시다..
체험에 얻은 진솔한 이야기가 하나의 作品이 되지요. 여성은 통념보다 강한 존재입니다. 한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뇌 구조를 가졌다고 합니다.. 단원高 강교감 가족. 자녀가 교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 온 부모님들, 들어내 놓고 하소연 못하고 속으로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고, 올곧은 분들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어버이날 '우렁이' 이야기. 논에 사는 우렁이는 새끼를 낳으면 제 몸 안의 것들을 새끼가 다 파먹으면 엄미는 껍질만
남아 논 위에 둥둥 뜬다. 그걸 보고 "야' 우리 엄마는 헤엄 잘 친다." 하며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새끼가 탈 없이 무럭무럭 커 주기를 바라는 게 모든 아비 어미의 마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