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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경북칠곡 답사자료 |
* 일 시 : 2016.02.24 (넷째 수요일) 07:30~18: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마산박물관(07:30) - 칠곡 송림사 -다부동전적기념관 - 칠곡호국평화기념관
--- 점 심 --- 청 록 식 당 ---
해은고택 - 성베네딕도왜관수도원 - 구상문학관 -가실성당 - 신동입석 -- -마산박물관(18:30)
* 답사인원 : 4 5 명
* 인 솔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섭외이사 : 김 인 국 010-3863-7570
마산박물관 문화유산답사회
경북칠곡 답사자료
경상북도 칠곡군은 경북 서남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군, 대구광역시, 서쪽은 김천시, 성주군, 남쪽은 대구광역시, 북쪽은 구미시와 접하고 있는 영남지방의 도로교통의 요충지이다.
낙동강이 칠곡군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고, 그 동쪽으로는 팔공산맥에서 뻗어내린 가산(902m)·유학산(839m)·황학산(714m)·소학산(622m) 등이 서쪽으로는 금오산(976m)·영암산(782m)·서진산(742m)이 솟아 있으며, 강 주변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하천은 팔거천과 이언천이 남류하다가 금호강으로 흘러들며, 그 밖에 경호천·두만천·서원천·한천·광암천 등이 낙동강에 유입하여 낙동강을 따라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칠곡의 명칭유래는 신라시대 팔거리현이 고려시대 팔거라 했고 달리 칠곡(七谷)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인조18년(1640) 가산산성이 축성되면서 팔거현이 칠곡도호부(七谷都護府)로 승격되면서 명칭이 변경되었다.칠곡(七谷)이란 이름은 팔거현의 명산 가산이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도 불리는데, 산정(山頂)에는 나직한 7개의 봉(峰)으로 둘러싸인 평정(平頂)을 이루고 골짜기도 사방 7개로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명칭을 따서 「七谷」이라고 했는데 그후 일곱 칠(七)자를 칠(柒)자로 바뀌어 「柒谷」으로 사용하다가 칠(柒)과 같은 자인 칠(漆)로 고쳐「漆谷」으로 다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옻나무가 많아서 옻칠(漆)자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 출처 : 칠곡군청 홈페이지 )
* 송림사
동명면 송림길 73
대한불교 조계종 전통사찰 87호
544년에 창건한 사찰로, 몽고 침입 및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86년 중건.
팔공산순환도로변에 있는 신라고찰로서 대구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절인데 조선 세종때에는 교종, 선종 36사의 하나에 포함된 사찰이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에 자리를 넘겨주고 그 말사가 된 절로서 544년(진흥왕5)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그 뒤 대각국사 의천이 1092년(고려 선종9)에 중창했고 1243년(고려 고종30) 몽골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30) 왜병들의 방화로 가람이 소실되었고 1686년(조선 숙종12)에 기성대사에 의해 대웅전 과 명부전이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대웅전 동쪽 약 50m지점의 도로변에는 기성대사를 기리는 높이 2m의 비석과 부도 4기가 있다.대웅전의 편액은 숙종대왕의 어필이며 대웅전안에는 3백년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3m의 향목불상 3좌가 있는데 이렇게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은 국내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며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된 중후한 건물로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명부전(절 안에 십왕을 봉안하는 집)은 대웅전 동편에 서향으로 있고,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오역(五逆)의 대죄를 범해 교화를 바랄 수 없는 무리를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밭 가운데에는 윗부분이 부러져 60×50㎝가량의 둘레로 90㎝정도만 남아있는 송림사 당간지주 2기가 서 있는데 송림사 창건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따라서 과거 송림사의 입구가 그 곳이었을 것이고 이것으로 보아 송림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해 주고 있다.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옆계곡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함께 대구 근교의 고찰을 찾아드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송림사 대웅전
유형문화재 제434호
도지정문화재 칠곡 송림사 대웅전(漆谷 松林寺 大雄殿, 2012년 2월 13일 지정. 동명면 구덕리 91-6)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건물에 관한 기록은 「팔공산송림사대웅전불상조성이필봉안기(八空山松林寺大雄殿佛像造成已畢奉安記」(1657, 효종8), 대웅전중수기(대웅전중수기)」(1775, 영조51),「칠곡송림사대웅전중수상량문(漆谷松林寺大雄殿重修上梁)」(1850, 철종1) 등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1597년(선조 30)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657년 중창하고 그 후 1755년과 1850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부터 서서히 회생한 불교건축은 17세기 후반에 맞배지붕의 다포 주불전 건물이 일반화되는데, 17세기 중엽에 중창한 송림사 대웅전이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로 공포의 형식, 배면의 창호, 신방목, 불단의 조각 수법 등은 당시의 건축 및 장엄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송림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보물 제1605호(09.02.23 보물로 승격)
송림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은 본존 석가모니불상과 좌우 협시의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의 3구로, 1657년의 조성 연대가 확인된 목조 불상이다. 협시의 지물(持物)과 보관(寶冠)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나 대체로 조성 초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중엽 조선 중기 목조 불상의 기준작이 될 수 있다. 2009년 2월에 보물 제1605호로 지정되었다.3구의 불상이 대체로 동일한 양식 성향을 보이는데, 간략한 옷 주름의 표현과 약간의 부피감을 지니는 불신의 표현, 안정감 있는 하체, 결가부좌한 다리 앞으로 길고 높게 흘러내린 부채꼴 모양의 법의 주름 등은 적당한 크기의 불두와 함께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성에 적당한 부피감과 사실성을 띠어 세련미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 송림사 오층전탑
보물 제189호
송림사 오층전탑은 형태와 재료,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에 피해를 입어 탑신이 북으로 기우뚱해졌는데, 1959년에 부분 보수 후, 다시 1961년에 전면 해체·복원되었다. 현재 송림사 경내에 대웅전 앞에 있다.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몇 기 안 되는 전탑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균형 잡힌 탑신의 세련미를 갖춘 빼어난 전탑이다. 또한 보륜의 일부와 수연이 소실된 듯 하나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일한 금동상륜부로 그 가치가 높다.
- 송림사 석조아미타여래 삼존좌상
보물 제 1606호(09.02.23 보물로 승격)
송림사 극락전에 봉안된 미타삼존상으로 본존에서 발견된 복장조성기에 따라 순치 12년(1655)의 정확한 연기를 지닌 상이다. 현재는 두터운 개금과 후대 보수로 인해 세부적인 분석은 어렵지만 대체로 조선후기의 안정된 구도를 보이는 상이다. 본존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약한 듯 하고 다리 , 중간육계가 있고 나발로 덮었다. 어깨도 약하게 각진 형태에 오른어깨로 대의 자락이 걸친 통견이다. 내의는 가슴 아래에 굵은 띠로 표현되었고 띠매듭은 없다. 양손은 다리에 얹어 촉지인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의 양식도 본존과 흡사해서 민머리의 지장보살 불두가 본존의 불두와 흡사하다. 석조의 대작에 속하므로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기준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송림사 명부전 목조시왕상과제상
유형문화재 제360호
송림사 명부전 목조시왕상과 제상(松林寺 횻府殿木造十王像과 諸像. 유형 문화재 제360호. 2004년 10월 14일 지정. 동명면 구덕리 91- 6)송림사 명부전에 봉안되어있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제상을 포함한 22구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목조시왕상 및 제상은 단순해 보이지만 얼굴과 손의 세부적 인 표현에 있어서 사실성이 돋보이고 신체의 비례와 배치 구성력 등이 뛰어나다.본존에 해당하는 지장 삼존(드尊)역시 보살을 주존으로 하는 지옥계 도상으로서 독특한 예에 속하여 불교신앙형태와 결부되는 중요한 예라 하겠다.지장보살의 협 시(脇侍)인 도명존자와 지지보살의 협시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을 통하여 조성연대와 참여한 화원을 알 수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 송림사 복장전적 (松林寺服裝典籍)
유형문화재 제366호
2002년 조계종 총무원의 조사 때 천장보살상 복장에서 천장보살상을 중수한 발 원문과 함께 총 21종 34책의 경전( 經典) ,타라니류(陀羅尼類) ,후령통( 喉鈴筒) 등 이 발견되었다. 중수발원문은 연대가 적혀있지 않아 언제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 지만 “모든 재해(災害) 가 사라지고 수복( 壽福) 이 증장( 增長) 하며 돌아가신 부모와 조부모를 비롯한 모든 영가( 靈駕) 들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 하며 천장보살상을 중 수한다는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다. 경전류( 經典類) 는 모두 21종에 달하는데, 홍치(弘治) 원년(1488) 고산 화암사 에서 개판된 금강반야파라밀경( 金剛般若婆羅密經) 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건융(乾隆) 18년(1753) 팔공산 동화사에서 개판된 불설아미타경(佛設阿彌陀經) 이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천상보살을 비롯한 삼장보살상의 조성은 상한을 175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 다부동전적기념관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6.25 전쟁 당시 북진의 계기를 마련한 '다부동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하였다.
중앙고속도로 다부 I·C에서 동쪽 아래 다부동고개가 시작되는 입구지점에서 25m 높이의 기념비와 탱크 모양의 전적기념관이 6·25 당시 격전지였던 유학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이 건물은 1980년 12월, 당시 다부동 새마을부녀회장인 정순덕 여사가 우리 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6·25전쟁시 다부동 전투의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전승기념관 건립을 호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방부에서 건립하게 되었다.국·도비를 지원받아 7억4천만원의 공사비로 1981년 7월 착공하여 11월에 완성한 이 기념관은 서울 남산 미술원에서 탱크모양으로 특별히 시공하였는데 외벽에는 격전 당시의 모습을 부조로 나타내고 내부에는 당시 전투에서 사용하였던 중화기와 소총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아래 부지좌측에는 4억1천만원(도비2억, 군비2억1천)의 공사비로 1995년 5월 준공한 2층 건물의 관리사가 있는데 1층은 사무실과 휴게실(매점), 2층은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5년 6월 24일 다부동전투 희생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행사시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신 가운데 구국용사충혼비 제막식과 함께 '구국관(救國館)'으로 명명되어 준공기념 행사를 가진바 있다.우리 군에서는 1979년 3월 1일 전적지관리사업소를 설치하여 왜관지구 전적기념관과 함께 이 기념관을 관리해 오다가 보다 더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1997년 2월 1일부터는 한국자유총연맹 경상북도지회에 위탁관리하고 있는데 학생, 군인, 일반인 등 연간 약 1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곳을 찾아 전쟁의 교훈과 자유수호 의지를 되새겨 가고 있다.어떻게 이 다부동이 격전지가 되었을까, 잠시 지난 역사의 현장을 되새겨 보면 팔공산 자락이 서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다 가산, 오계산 봉우리를 맺어 놓고 허리가 휠때쯤 주저앉은 다부동고개, 다부동은 팔공산이 일어서 황학산, 유학산, 소학산을 빚어놓은 틈새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그래서 다부동 고개는 숙명적으로 격전을 치른 요충지일 수 밖에 없었다. 신라 - 조선시대에 걸쳐 축성된 천생산성, 가산산성, 냉산산성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다부동고개의 험난한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달구벌과 관문(문경새재)을 잇는 유일한 통로, 일찍이 왕건과 견휜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곳이 바로 다부동 고개였고 병자, 임진 양난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곳, 가까이는 6·25 전쟁때 조국의 최후 보루지로서 꽃같은 생명이 처절하게 쓰러져 갔던 곳이다.조선시대까지 이 고개는 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1급 관도)이어서 경향을 드나드는 관원들을 위해 원이 설치돼 있었다. 역이 생기고 많은 관원과 행상인이 묵어가는 주막촌이 형성되면서 자연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이 때 돈많은 거상들이 몰려들면서 부자가 많은 곳이라 하여 다부원(多富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원들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다부동 고개는 전국의 여느 고개처럼 산적이나 맹수가 나타나 주민을 괴롭힌 적이 없다. 대신 부사, 목사 등 목민관의 선정비가 많았다. 하나 모두 전화속에 묻혀 찾을 길이 없다.수많은 전란이 다부동 고개를 거쳐 갔지만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화는 아직도 고개구비마다 또 인접한 유학산 곳곳에 서려 있다. 실제 '94년과 '95년, '97년, 2000년, 군부대(50사단)의 유학산 일대 수색에서는 유골 및 전쟁유품들이 많이 발견되어 전쟁의 참상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으며 수습된 유골들은 기념관 입구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구국용사충혼비를 세워 '95년 6월 25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참석하신 가운데 제막식과 추모제를 거행함으로써 이들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렸다.303고지(자고산 : 왜관읍 석전리) - 328고지(석적읍 포남리) - 숲데미산(석적읍 망정리) - 유학산(석적읍 성곡리, 가산면 학산리)을 잇는 방어선은 치열한 고지탈환전이 벌어졌던 곳이며 특히 유학산은 9번, 328고지는 무려 15번이나 고지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유학산은 다부동을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고 낙동강 동안에 펼쳐 놓은 것 같은 돌산인데 839m의 정상에 올라서면 적 포병이 대구시를 공격할 수 있는 요지이다. 따라서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처절한 죽음의 혈전을 벌였는데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9차례의 탈환전중 아군측 신병 병력이 하루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희생이 컸던 곳이며 당시 후방에서 신임 소위가 보충되어 오면 유학산 정상의 소대까지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당시 다부동 고갯마루에는 조그만 옹달샘이 있어서 12연대 1·2대대가 '자유천', '생명천', '구국천'이라 부르며 식수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없어졌다. 다부동 전투는 9월 24일 천생산(구미시 인동) 진지를 탈환할 때까지 5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북한군 2만 4천여명과 국군 1만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피해를 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북한군과 전차전이 벌어졌는데 볼링앨리 전투(포탄화구가 날아가 후방에서 폭발하는 상황이 마치 볼링공으로 핀을 넘어 뜨릴 때의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로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John.H. 마이켈리스대령(전 미8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미 제27연대는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소방대(위급한 전선에 항시 투입되어 불을 끈다고하여 붙여진 별명)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결과적으로 다부동전투는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사단에 비참한 패배를 안겨 주었고 특히 13사단을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북한의 적화야욕을 저지시켜 전세를 역전시키는 발판구실을 했던 것이다.조지훈 시인은 직접 종군하면서 격렬했던 다부동 전투의 참상을 1950년 9월 26일, 이렇게 시로 표현하였다. 이 시는 1995년 시비로 만들어져 구국용사충혼비와 함께 제막식을 가진 뜻깊은 글이다.
*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1951년 4월 1일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사단을 격멸한 백선엽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탁월한 지휘와 비상한 웅변으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당시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구국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1년 칠곡군민이 건립하였다.
* 구국용사충혼비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
6.25전쟁 때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가 순직한 경찰 197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2001년 6월 24일 경북지방경찰청에서 건립한 비석.
6.25 전쟁시 낙동강전선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산화 순직한 경찰관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배 경찰관들의 정신적 지표를 세워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다부동 전적기념관내 건립하였다. ※비문내용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그해 8월,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낙동강 전선에 전투력을 증강하여 총공격이 개시되면서 시내중심가에 포탄이 떨어지고 영천이 함락되는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자 정부를 비롯한 미8군사령부까지 부산으로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경찰도 철수하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당시 경찰 총수인 조병옥 내무장관은 "대구를 적에게 내주는 것은 나라를 내주는 것과 같다"며 우리 경찰만이라도 대구를 반드시 사수하여야 한다는 필사의 굳은 결의로 공포에 사로잡힌 70만 대구시민을 보호하고 군과 더불어 대구방어에 큰 몫을 다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 발판을 만들어 전쟁국면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구국경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우리 경찰은 낙동강방어전투에 15,000여명이 참전하여 그 중 전사자 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이 고귀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나라를 구한 "경찰의 대구사수정신"은 6.25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이리하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구국경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산 교육의 터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곳 다부동 전적지에 모든 경찰의 뜻을 모아 구국경찰 충혼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칠곡군 석적읍 석적로 226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 총반격의 계기가 된 낙동강방아선전투를 재조명하고자 건립되었다.추모와 체험, 교육, 여가기능을 갖춘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호국평화체험의 공간이다.
중앙로비 : 구멍난 철모와 55개의 탄피, 컨벤션센터와 4D입체상영관호국전시관 : 55일 낙동강방어선 전투 전시관, 전쟁에 사용된 실제 무기, 호국영령 유해발굴 현장 복원전투체험관 : 고지전 사격체험장, 천평계곡 전차전 시뮬레이터, 장병수첩, 군복체험 훈련소어린이평화체험관 : 빛과 소리가 나는 징검다리, 클라이밍과 미끄럼틀 놀이, 소원을 적어 거는 평화의 나무야외전시관 : 호국평화탑, 대형태극기, 낙동폭포
* 해은고택소재지 :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341
지정번호 : 경북문화재자료 제275호지정연도 : 1993년 2월 25일 시대 : 조선시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倭館邑) 매원리(梅院里)에 있는 이동유(李東裕:1768~1836)가 세운 고택.
크기 : 정침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 사랑채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곳간채 정면 6칸 측면 1칸, , 사당 정면 3칸 측면 3칸, 대문채 정면 3칸 측면 1칸 반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되었다. 숙종 때 대사헌을 지낸 박곡(朴谷) 이원록(李元錄)의 후손인 이동유가 1788년(정조 12)에 정침을, 1816년(순조 16)에 사랑채를 건립하였다.
사랑채·곳간채·정침이 ㄷ자집 형태이며, 정침의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반, 측면 1칸 반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곳간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대문채는 앞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매원 마을에서 건립 연대가 오래되고 규모가 잘 갖추어진 집으로 이수전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칠곡군 왜관읍 관문로 61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자들이 북한 덕원과 중국 연길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 이념 차이로 인한 당국의 탄압과 더불어, 6·25전쟁 당시 북한 정권의 박해로 피란을 오면서 1952년에 설립되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에 따라 깊은 신앙심과 성스러운 노동으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며 교육 ․ 복지 등 활발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1909년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5명의 수도자가 서울에 파견되어 교육사업을 펼친것을 시작으로 북한에서 선교와사회사업을 펼쳤다.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수도원이 폐쇄당하고 30여 명의 수도자가 피살, 옥살되어 박해를 피해 1952년 왜관에 자리 잡은 후, 교육, 복지 등 활발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피정의 집에서 피정 숙박을 할수 있기도 하다. ※피정이란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의 영신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어느 기간동안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묵상과 자기 성찰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것을 말한다.
* 구상 문학관 - 오늘속의 영원 영원속의 오늘을 추구한 시인 구상
칠곡군 왜관읍 구상길 191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반열에 오른 구상 시인을 선양하고 한국의 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고 시인의 삶과 문학,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이어가고자 설립함.
경북 유일의 문학관으로 구상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구상 선생(1919 ~ 2004)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여 22년간 왕성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으로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2층 건물로 1층 전시실과 관수재 2층 보존서고와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상 시인의 창작활동과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관수재가 있어 시인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1층 전시실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와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영상실은 시인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생생한 육성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어 또 다른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2층 보존서고는 구상시인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소장도서 뿐만 아니라 지인들이 기증한 도서 등 27,571권이 비치되어 있다.사랑방에서는 매년 문학창작교실을 개최하고 있으며, 지역민들에게 문학창작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관수재는 구상시인이 53년부터 74년까지 거주하셨다. 시인이 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은 ‘觀水洗心’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 왜관 가실성당
칠곡군 왜관읍 가실1길 1
유형문화재 제348호
도지정문화재 가실성당(佳室聖堂. 유형문화재 제348호. 2003년 4월 14일 지정. 왜관읍 낙산리 614, 615) 1894년에 설립된 경북지역 초기 천주교회 건물이다. 로베르신부 등이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에서 전교를 시작한 후 그 뒤를 이은 파이야스 신부가 낙산리 가실마을로 이주해 성당을 건립한 것이다.김천에 성당이 설립되자 김천지역이 분리되고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에는 대구교구에 소속되었다.1922~1923년에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으로 건축 양식은 신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설계자는 프랑스인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이다. 공사는 중국 기술자들이 담당했으며 붉은 벽돌은 현장에서 구워서 썼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 인민군이 이곳을 병원으로 활용하면서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배치는 동저 서고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지대가 낮은 동쪽에 지하실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삼랑식이며 열주의 아케이드와 천장에 의해 Nave(신도석)와 Aisle(통로)의 구별이 뚜렷하다. 현관은 동쪽 정면에 Porch(본 건물에서 달아낸 지붕 딸린 현관)를 두고 중앙에 1개의 종탑을 설치하였다. 사제관은 성당과 함께 지은 것으로 본당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가실성당의 웅장함과 내부의 화려한 장식 등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건축미로 근대 종교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2003년 유형문화재로 지정 · 관리되고 있다. 2005년부터 낙산성당洛山聖堂) 을 원래 이름인 가실성당(佳室聖堂)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 신동입석
칠곡군 지천면 심천로 5-7
경북기념물 제29호
높이 4.5m, 밑둘레 2m, 면적 897㎡
입석은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로서 주로 지역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신앙의 대상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석은 지석묘(支石墓)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선사시대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 입석은 높이 약4.5m 밑둘레 약 2m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입석가운데 큰 규모에 해당한다. 입석의 동편 주위를 개간할 당시 무문토기, 석기 등의 발견된바 있어 이 입석이 청동기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면의 남면에는 후대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각자한 글이 남아 있는데 이는 선사시대의 유적도 불교의 종교적인 대상물이 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 출처 : 칠곡군청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