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4월 2일 주일메세지 아산UBF
열 둘을 사도라 칭하셨으니
말씀 : 누가복음 6:6-19
요절 :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건너 간 청교도들은 제일 먼저 교회를 세우고 다음에 학교를 세우고 그런 다음에 자기들의 집을 세웠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원하였습니다. 절망의 시대에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경험한 유대사회는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희망 없는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오늘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예수님께 주목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얻고 예수님을 따르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 어느 것이 옳으냐
6절부터 11절에는 안식일에 일어난 다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거기 회당에 들어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른 손이 마비되고 말라 붙어 오그라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달픈 영혼은 안식일에 회당에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위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한 사람을 미끼로 여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성경선생입니다. 목자입니다. 이들은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양들에게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하였고 더 악독한 것은 예수님을 고발 하려는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불쌍한 한 인생을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마음 중심으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자들이 자기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양심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악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독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흉계를 아시고 그들의 그릇된 마음 중심을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 마른 사람을 회당 한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을 피하고자 내일 사람이 없을 때 다시 오도록 방향주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지극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무한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귀하고 보배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좋은 것을 받은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았으니 우리도 좋은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좋은 일을 계획하고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추하고 더럽고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을 때에 인내와 관용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말, 격려하는 말, 축복하는 말을 내놓아야 합니다. 선한 일, 살리는 일, 좋게 하는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의 안에 미움, 분노, 저주, 원망 이런 것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에 욕심과 미움과 분노와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나옵니다. 선은 선인에게서 나옵니다.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 한 손 마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 그에 대한 치료행위가 실행 되는지 훔쳐 보며 도사리고 있는 것들은 선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귀의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생명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일하는 것은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벌면 재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돈 버는 재미, 돈 모으는 것에 흥미가 생기면 멈추지 못합니다. 쉼없이 일하다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쉬게 하심으로써 육신의 생명이 잘 유지되게 하셨습니다.
근래 발표되는 각종 논문들과 연구발표에 의하면 사람의 몸은 6일간 일이나 운동 하고 하루를 쉬어 줄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쉴 때 건강이 유지되게 만들어 졌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살아나게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냥 일을 쉰다고 해서 몸은 좀 좋을지 몰라도 영적인 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 주심을 깊이 체험하여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날 오히려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각종 규례와 장로들의 유전들을 내세우며 사람을 숨막히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의 주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섬겨주어야 할 어린 양을 이용해 먹고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모든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오그라진 손이 놀랍게도 쭈욱 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손 마른 사람은 손과 함께 그의 내면의 고통도 나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양심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들의 귀는 막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완전히 멀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안식일을 범하다니 가만 둘 수 없다’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성하게 하셨습니다.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의 영혼도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왜 고발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고 분노가 나오는 것입니까?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선인에게서 선이 나오고 악인에게서 악이 나오는 법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선한 사람들이라면 선한 일과 살리는 일을 보고서 분노하는 마음,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택하신 유대민족입니다. 백성들의 목자로 세움받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선생으로 쓰임받는 서기관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명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일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보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아
2.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자기들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 상의하고 서로 댓글 달았습니다. 그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는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큰 일 났다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심각하다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주 어렵다고 하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 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전권대사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제자들이 어리고 부족하며 변화되어야 할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열 둘을 따로 택하셔서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이 열 둘에게 특별한 비젼과 소망을 두신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를 제사장 나라로 삼아 세상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유대인들은 특권만 자랑하고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더 타락하여서 예수님까지 대적하고 양들을 이용하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만민 구속역사를 다시 시작하시고자 하십니다. 세상만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역사에 쓰임받는 새 이스라엘 12지파로 12명의 사도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는 끝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0년 후 심판받습니다. 그들의 도시는 철저히 파괴됩니다. 그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과 그들과의 혈연적 유대적 관계로 모여 든 동족 1백만명이 전멸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이 심판은 단순히 한 두가지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완전히 메말랐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보다 욕심을 택하고 생명보다 돈을 좋아했습니다. 쉽게 이혼했습니다. 한 여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인간적인 약점이 발견되고 사는 것이 권태로워지면 주저없이 이혼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성전은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을 상대로 돈 장사, 비둘기 장사, 염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을 그렇게 만들었으면서도 성전은 기를 쓰고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없고 안식일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나라, 택하신 사람으로써의 존재의 의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쾌락이었습니다. 그들의 열정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고 자기들끼리 댓글 다는 것외에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자기들끼리 공감하는 것만 들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강력한 메시지로 온 유대가 들썩들썩 하게 하는 세례요한의 메세지에 대해서도 무감각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로마인들의 칼이었습니다.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정복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무자비하고 철저한 진멸의 심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느끼셨고, 보셨고, 아셨습니다. 종말이 다가온 유대, 종말 직전의 유대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기도하고 열 두 사도를 세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멸망을 눈 앞에 둔 유대에서 예수님께서 열둘을 택하셨습니다. 심판을 눈 앞에 둔 유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30년은 한 세대입니다. 유대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심판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몇년을 한 세대라고 합니까? 몇 년이 지나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까? 몇 년 차이가 되면 서로간에 가진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단절이 일어납니까? 옛날 처럼 30년 입니까? 10년 입니까? 요즘 심하게 말하면 6개월 차이만 나도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을 정도로 단절되는 시기를 넉넉하게 3년이라고 치고, 3년 후 이 나라에 전쟁이 난다는 것이 확실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3년 후 이 나라 백성들의 죄악이 극심하여 그 심판으로 전원 사망할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일어나는 심판을 앞에 두고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중하다고 보십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A.D 66년부터 시작된 유대전쟁은 상세한 역사기록으로 남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언제 어떻게 로마와 갈등을 일으키고 로마가 어떻게 유대 전역과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사람들은 진멸하였는지 그 과정이 역사기록으로 상세하게 남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 110만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로마군 제 5군단, 10군단, 15군단, 후에 합류한 12군단에 의하여 유대 전지역과 예루살렘은 철저히 진멸되었습니다. A.D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농성자들이 전원 자결하고 유대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할 것을 눈에 보는 듯이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종말의 유대사회, 종말이 임박한 나라와 그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우는 또 한가지는 ‘분노에 과한 것’입니다. 요즘 분노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노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 시켜놓았더니 나라의 똑똑한 인재들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허접하고 이상한 여자한테 의지했다’는 사실에 남녀노소, 좌우 가리지 않고 지난 몇달간 실망과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분노’를 잘 관리하여야 합니다. ‘분노’는 사단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굉장히 높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분노할 일이 많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잔뜩 도사리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분노할 대상들입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그들은 분노의 대상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하면 일하지 않습니다. 일을 해야 무엇하느냐며 분노 자체에 매몰됩니다. 격한 사람들은 분노 때문에 파괴적인 일을 합니다. 요즘 사회에 대한 분노로 자발적 실업 상태로 돌입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빽있는 사람이나 일류대 나온 사람들에게만 파이를 나눠주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우리 시대 많은 청년들이 이런 분노를 표하며 일하지 않습니다. 3포시대, 5포시대! 청년들이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며 그 결과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의 청년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분노’를 증폭시키지 말고 일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악독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겪으신 예수님보다 분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아래에서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조차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독한 마음을 품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분노’가 더 강해지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분노’를 누르셨습니다. 기도 하신 예수님께서는 ‘분노’대신 열둘을 불러 사도로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갇혀 버리는 일이 너무 빈번합니다. 우리는 ‘분노’에 머무르며 너무 많은 우리의 은사들을 허비합니다. ‘분노’를 핑계 하며 일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어둠의 시대에 열둘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의 시대에 열둘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난 후, 열둘은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세상에 남겨진 열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만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 죄와 운명의 속박을 깨고 우리 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드리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긴 열둘을 통하여 전해진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열둘을 남겨야겠습니다. 절망과 어둠을 핑계대지 말고 열둘을 남기는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열둘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분노에 자신을 맡겨두지 말고, 내게 주신 은사와 축복을 ‘분노’ 때문에 허비하지 말고 열둘을 세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남긴 열둘은 죄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열둘은 운명과 저주에 상처받고 가슴을 치는 영혼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가 열둘을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열둘을 세우고자 하면 예수님을 더 가까이 더 강하게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둘을 세우는 일에 힘쓴다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17~19절에는 예수님께서 시대의 양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섬기는 일에 사도들을 데리고 함께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님의 목자의 섬김, 예수님의 사랑과 기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일은 기도하는 일과 열둘을 키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지혜와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양성에 동참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