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파라나시의 미가다야는, 내가 처음으로 설법을 했던 곳이다.
그 땅을 생각해 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밖에, 각지의 정사랑, 그리토락구타도
너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자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을 슬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의 시체는 우파시카, 우파사카(재가)의 중생이 처치할 것이다.
너희들은, 정도(正道)를 모든 중생에게 설하고,
그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나에 대해서의 보은으로도 되는 것이다.
아누프리야의 숲이, 천지 이변에 덮쳐졌을 때.
암산은 갈라지고, 큰비가 쏟아져, 갈라진 암산은 계류로 변해 버렸다.
작은 동물들은, 도망갈 곳을 잃고, 우왕좌왕 큰 소동이 되었다.
그때, 한 마리의 도망칠 기회를 잃은 늙은 코끼리는,
그 산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도망갈 곳을 잃은 작은 동물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늙은 큰 코끼리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스스로 그 거체를 암산의 갈라진 틈에 들어가,
작은 동물들을 넓은 저 쪽 강가로 건네주고 죽었다.
너희들도 방황해서는 안 된다.
나를 그 늙은 큰 코끼리처럼 발판으로 해서,
많은 방황하는 중생을, 용기와 지혜와 노력을 가지고,
방황의 강가로부터 깨달음의 피안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윽고, 우리의 법은, 만데야, 데이샤(중국)로 건너고, 쟈브도우바의 켄토 마티로 전해져 갈 것이다.
나는 그때에는 많은 제자들과 함께 또다시 태어나, 이 길을 설하겠다.“
옆에 있던 마이토레야는, 붓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만츄리아 존자, 카차나 존자. 우파리존자, 스부티 존자에게
미래의 재회를 약속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아니룻타는 붓타의 선정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붓타가 마침내 9 선정에 들어가고, 열반된 것을 알자,
그 소식을 주위의 비구, 비구니들에게 알렸습니다.
비구들은, 그 소식을 듣자. 모두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 슬픔의 소리는, 숲의 적막을 깨고, 사방으로 퍼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파발마에 의해 베사리에서 설법하고 있었던
마하 카샤파랑 베르베나(죽림정사)랑 제다베나(기원정사) 마하베나(대림정사)로
차례차례 전해져 갔습니다.
마하 카샤파가 제자들과 함께 크시나가라의 땅에 도착한 것은,
일주일 뒤였습니다.
그 땅에서 화장을 하고,
그 재는 재가(在家)사람들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그 후, 마하카샤파가 중심이 되어,
아난다는 법을, 우파리는 계율을 중심으로 담당,
붓타가 입적한 후, 90일 째에,
베르베나 뒤의 동굴 속에서, 제1회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중의 지도자들은, 마하 카샤파, 우파리, 스브티, 마하 카챠나,
아사지, 만츄리아, 마이토레이야, 아누루타, 아난다, 테이샤,
우파시바등으로 모였던 비구, 비구니들은 총 476명이었습니다.
일부분의 비구는, 이미 소승불교에의 길로 들어가,
분열의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각각의 제자들은,
붓타가 45년간 설한 붓타 스트라를 암기하고,
그 지도(指導)를 문제는 있었지만 아난다가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 아난다도,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가 되어,
결집의 일원으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각 지방으로 각각 흩어지고
쟈부 도바에서 만납시다라는 암호를 남기고,
길을 설하러 갔었던 것입니다.
[ 참된 불교란 ㅡㅡ 팔정도의 실천 ]
이렇게 해서 불교는,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고,
철학화 되어, 어려운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승려는 타력본원의 대승불교로 들어가고,
타력본원만으로 밀고 나가게 되면서,
어느새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 승려는 죽은 사람의 공양이, 도(道)에는 없었을 터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방황하는 마음을 구제하는 것이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행위부터 개선하고,
팔정도의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불전을 읽어도, 실천 없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문도 같은 것입니다.
일반에서는, 사경 공덕이라든지, 경문 독송이라든지,
떠들썩하게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불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경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생활 속에 활용하지 않으면,
식당 윈도에 장식되어 있는 밀랍 세공의 음식 같은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불교는,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파의 분열, 같은 종파 속에서,
권력의 자리를 다투며 반목하고 있는 종교는,
사종(邪宗)이외에는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투쟁도, 파괴도, 가르치지 않고,
그것을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화석화한 종교로부터 탈피하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트리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조화한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종교가는,
지금 솔직하게 자신의 생활 행위를 반성하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 내에서, 여러 가지 부조화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은,
그 원인을 밝혀내지 않는 한,
그 괴로움으로부터 탈피는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치우친 중도를 벗어난 생각이 있어도,
그 원인으로 괴로움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