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해군 항공대가 날려버린 무사시노 공장의 피해상황이 그동안 B-29가 폭격한거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이 르메이 귀에
들어갑니다. 르메이는 아직 전략을 가다듬고 있었을뿐 이었죠. 그리고 2월 25일 드디어 실험적으로 B-29가 도쿄로 날아갑니다.
230kg 소이탄을 하늘에서 흩뿌렸지만 B-29의 고도가 무려 9000m였던데다가 때마침 불어준 바람때문에 원래 목표였던 공장과
노동자들의 목조주택에는 몇개 떨어지지도 않았고 대부분 동경만이나 외곽 농촌지역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요게 230kg짜리 소이탄 요안에 60cm길이의 네이팜이 든 원통이 들어있어서 순식간에 푸른화염을 내며 탄다고 합니다-
르메이는 확실히 고고도 폭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가 지휘했던 B-17편대는 대부분 1500m~3000m에서 공습해
오던 터라 B-29도 그만큼 고도를 낮추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전에 유럽에서 배운 폭격 전략을
실시하기로 합니다. 그에게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의 작전이었죠 -_-;
-누구겠습니까 아서 해리스 경이지-
제가 연재한 유럽 폭격전을 쭉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미육군항공대 지휘관은 아서 해리스의 폭격전략을 반대했습니다.
처음 제 8공군을 맡았던 스파츠장군이나 그의 후임자 이커 장군이나 둘리틀 장군이나 모두 아서 해리스의 전략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독일본토 공습할때 미군은 최대한 군수시설물이나 산업목표만을 노렸죠.
-어디까지나 영국공군과 비교해 보면 미공군은 최대한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르메이는 아서 해리스 대장의 전략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는 해리스 대장의 전략이 맞아보였습니다.
적 민간인을 대량살상하면 산업시설이나 경제를 복구할 능력이 없어질테니 말이죠. 당시 모든 기계는 사람이 있어야 돌아가는 것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도쿄의 산업시설이 아닌 도쿄의 중심부를 노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서 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야간 공습을 감행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둠에서 행해지는 공격은 공포감이 2~3배는 됩니다-
1945년 3월 9일 새벽부터 도쿄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불조심해야하는게 도쿄 시민
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그날밤 10시 반경 일본 국영 라디오 방송으로
남쪽에서 대규모의 폭격기 편대가 접근한다는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바로 사이판과 괌에서 이륙한 B-29의 편대를 일본
남쪽 오가사와라군도에서 관측하던 관측병들에 의해 계속 B-29의 위치가 생중계되기 시작합니다.
-마리아나 제도에 사이판과 괌이 있고, 저 빨간 동그라미가 전부 일본꺼였으니 대충 지도 보시면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죠??-
그리고 곧 대규모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도쿄의 밤하늘에 울려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밤 12시 제일 먼저 도착한 B-29기 1기
가 동쪽에서부터 접근하여 저공으로 230kg 소이탄을 투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 2번기가 1번기가 지나간 곧에서 대각선으로
진입하여 마찬가지로 저공으로 230kg소이탄을 투하합니다. 이렇게 1번기 2번기가 도쿄에 불의 X자를 만들었습니다. 곧 다가올
332대의 B-29에게 목표점을 알리는 거대한 등불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붙어 떨어지는 네이팜탄-
방공호와 미리 파둔 방화대로 대피한 도쿄 시민들은 불을 끄려는 노력과 함께 저멀리서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엔진음을
듣습니다. 매번 9000m상공에서 접근하던 B-29의 아련한 엔진음이 아닌 3000m고도로 접근하는 B-29의 엔진음을 들었던 것이죠.
지금까지 봐왔던 B-29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B-29가 대충 저만큼의 폭탄을 장착할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름다웠던 B-29는 잊어라-
불의 X표를 목표삼아 B-29 332대는 소이탄과 기름통 2200톤을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폭탄이 지상에 닿자마자 강하게 불어온
바람과 함께 불꽃은 30m높이로 치솟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불이 붙자 뜨거운 공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에 면한 도쿄의
특성상 바다의 차가운공기가 도심으로 유입되면서...... 독일에서 처럼 대규모 화염폭풍과함께 바람이 시속 65km/h로 불기 시작
합니다. 일본시민들은 미리 훈련받은대로 조직적으로 모여서 양동이 릴레이를 하거나 젖은 천으로 네이팜탄을 덮으려 했지만
미군이 기름통을 소이탄과 함게 뿌려댔기 때문에 물로는 막을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서 화염이 불을
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집어 삼켰습니다. 경찰들은 최대한 방공호나 방화대쪽으로 사람들을 유도했고, 소방대원들은 몇개
안남은 소화전으로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에게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이어서 경찰도 소방대원도 불에 타죽거나
불에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연기나, 화염이 산소를 집어삼키면서 질식해죽어갔습니다. 도쿄 동북쪽 시민들은 그 근처에 간논사
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숱한 도쿄의 화재속에서도 한번도 탄적이 없었던 절이었기에 그안으로 몰려들어가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빌었으나 -ㅅ- 목조 건물이었던 간논사도 네이팜의 위력앞에서는 한낮 장작더미에 불과했습니다. 간논사는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불타올랐습니다. 그 근처에는 요시하라라는 공창가가 있었는데 접대부의 탈주를 막기위해 철문으로 문을 막아놓아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말그대로 타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쿄 동북지역을 가로지르는 스미다강이 있었는데
-스미다강의 현재 모습입니다-
강에 있으면 안전할거라고 믿은 도쿄 시민들은 일로 뛰어들었으나, 강이 얕았던 데다가 물과 섞이지 않는 기름이 스미다강 표면을
덮어버려서 -_-; 강 양쪽 불의 열기와 스미다 강위에서 타오르는 불길때문에 스미다강 전체가 펄펄 끓어올랐고, 수많은 사람들이
삶아져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강 위에는 철교가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 불길을 피해 철교로 몰려든 사람들이 철교가
강한 열을 받아 뜨거워지자 스미다강으로 뛰어들수 밖에 없었고....... 결과는...... 2시간에 걸친 B-29의 폭격으로 동서 5km 남북
6km되는 도쿄의 중심부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경보가 해제되었고, 날이 밝자 처참한 도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진위쪽에 흐르는 강이 스미다 강이고, 그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가 앞에서 설명한 그 다리입니다-
-오른쪽아래에 보이는 둥그런 지붕의 건물이 스모 경기장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2008년도에 도쿄 놀러갔을때
저 스모 경기장 앞 호텔에서 지냈었는데, 이 사진을 보니 새삼 그때 기억이 떠오르네요.-
-폭탄이 떨어지는 도쿄 만의 모습입니다. B-29승무원들은 그때 처음으로 비교적 저고도 폭격을 했는데 뜨거워진 공기가
상승하면서 시체타는 냄새도 같이 올라왔다는 회고록도 있습니다-
-네이팜탄에 타죽은 모녀, 네이팜탄은 1000도의 고온으로 인체와 접촉하면 순식간에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타기때문에
미이라처럼 형태가 남는다고 합니다-
-불타버린 시체들-
-불타오르는 도쿄의 모습-
-도쿄 공습 전후....-
-빨갛게 칠한부분이 도쿄대공습으로인해 불에 탄 지역입니다-
-공습당한 지역을 돌아보는 일왕 히로히토,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2008년도에 방영된 도쿄대공습 드라마, 일본인들에게는 정말 끔찍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합니다-
3월 10일 아침이 밝자 일본의 경시청-즉 우리나라 경찰청-은 피해를 집계합니다. 주택과 건물 42만채가 불타서 사라졌고, 사망자
8만 8천 753명 부상자 4만 918명 총 합계 12만 9천 711명이라는 집계를 합니다(이중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도쿄만에 접한
조선소와 수리소에서 일하던 1만명정도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수치입니다).
게다가 시신 70%는 불에타서 신원은 커녕 남녀구분조차 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 군의관의 회고에는 '스미다강에 떠다니는 시체
들이 옷을 입었던 안 입었던 모두 검게 타 있었고, 흘러내려가는 검은 조각들이 탄 나무인지, 아니면 사람의 팔 다리이지 구분할수
없었다'라고 합니다. 이 단 한차례의 공습으로 도쿄 시민들은 완전히 겁을 집어 먹었고, 일본을 장악한 군부와 정치인들도 말 못
할정도의 처참한 피해에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3월 10일 오후가 되자 철도시설이 복구되었고, 도쿄에 집을 잃은 180만에 달하
는 시민들은 철도를 타고 도쿄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일본 정부는 피난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미 손을 쓰기에는 늦었습니다.
그리고 이 끔찍했던 도쿄 대공습이 마지막 공습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는 르메이와 B-29의 일본 본토 공습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첫댓글 아..... 원시시대 매니아께서 이제 게임을 시작하셨군요....
신호를 소이탄을 이용한 X자로 하다니;; 정말 비범한 발상이군요
그런데 왜 독일 쪽을 볼때보다 덜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까요...
222
전 적대감 땜에 불쌍하다고 안느껴지는듯..
아서 해리스... 깨깨끼!
2222
저렇게 민간인만 죽어나는건 정말 비극이죠. 그런데 저걸 '정부가 전쟁을 일으켯고 졋음에도 끝까지 발악해서 피해가커졋다'라는 결론을 내리는게 아니라 그냥 '미국 개객끼!'라는 결론으로 종결지으니 문제.(아니 뭐 미국의 잘못이 없다는건 아니지만 말이죠...)
역시 목조 건축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지라...사망자 비율이 엄청나는군요..소이탄의 위엄이란;;
일본인들은 이해가 안가는게 국민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죽게 만든 지도층에대한 비난은 하지 않음. 비판도 안하고..
자기들 당한 것 만 내세우니 당연한 결과 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식자층 많았습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아는것은 아니라서 콕콕 집어서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그리고 저 당시에는 군부독제 시기입니다. 정상적인 자정작용이 안먹히는 때죠... 또, 독일과 마찬가지로 집단쇄뇌의 영향이 크죠.
불쌍하다는 의견도 있고(무고한 민간인이!) 사필귀정이라는 의견(니가 한짓을 생각하시죠 'ㅅ')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군요. 그리고 나치 독일과 함께 국민들이 위정자의 실정을 방관하거나, 나아가서 적극적,소극적으로 동조할때 그 댓가를 누가 치르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라 무섭습네다. 사진속에 타 죽은 모녀도 그렇지만 부모의 부채는 자식이 갚는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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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의 복수극이 시작되는군요. ㅎㄷㄷ
무시무시하네요.
마지막 드라마 포스터를 보니...
원폭도 그렇고, 결국 자기들이 입은 '피해'로 '가해자'임을 덮으려 할뿐...
사람이란게 시간이 지나고 세뇌가 되면 망각을 하기마련이라,
요즘 일본 젊은이들을 보면 그게 은근히 효과가 있다고 보여지네요.
근데 사실
저 시대 폭격방식에서
기존의 고고도폭격은 심각하리만치 명중률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폭격기 항공대애들은 죽어나가고,
아서해리스가 저고도 지역폭격으로 전환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_-;;;
아서 해리스가 대장일때 르메이는 대령으로 영국공군과 같이 작전 펼치던 미8공군 소속이었으니 보고 배웠겠지요 ㅋ
지네가 미국 공습하다 전사한 남편을 생각하며 미국이 나쁘다고 말하던 일본 할망구 생각나네요. 근데 반대로 또 지네가 공습 당할 때도 피해자 코스프레 하겠지...참 알 수 없는 뇌구조를 가진 것들입니다
예전부터 생각해온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일본은 1차대전 후의 독일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전선은 치열한데 후방은 아무런 피해가 없는 그저 힘들게 일상을 이어나가는 정도의 고통뿐 독일과 좀 다른건 B-29가 폭탄을 뿌려댔지만 아마 정신적 스탠스는 그때와 비슷한것 같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덕분에 1차대전 패전후 내부의 배신자 이런게 먹혀들어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해서 또 그런짓을 벌였죠 하지만 소련이 독일을 제대로 참교육해주면서 독일은 이제 그런 생각은 못하게되었지만 일본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죠. 그게 현재 일본의 상황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