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만이 능사인가
곽 흥 렬
이혼이란 말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수다스런 아낙 서넛만 모였다 하면 화롯불에 군고구마 올리듯 이혼 이야기를 즐겨 화제에 올린다. 예전엔 쉬쉬하며 입에 담기조차 꺼려했지만, 이제는 공개된 자리에 나와서 자신의 이혼 사실을 당당히 털어놓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행복출발’이니 ‘듀오’니 ‘에코러스’니 하는 재혼 전문 상담 업소가 목하 성업 중에 있다. 바야흐로 이혼 천국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결혼이 모든 이의 축복 속의 출발이라면 이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다. 이혼이 그리도 떳떳한 행위인가. 이혼이 정말 내세워도 좋을 만큼 당당한 것이라면, 매스컴 같은 데서 보도를 할 때 굳이 본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사용할 까닭이 없다. 당자야 아니라고 극구 강변할지 모를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혼을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세계〜’라는 수식어가 붙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인 모양이다. 뭐든지 세계 최고니 세계 최대니 세계 최초니 하고 떠들어대길 좋아한다. 세계 최고층의 건물, 세계 최대의 불상, 세계 최초의 발명품…….
두 쌍이 결혼을 하면 그 가운데 한 쌍 꼴로 이혼에 이른다는 우울한 보도를 본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이 땅의 이혼율은 미국 다음으로 그 수치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개화기 이후 가장 단시일에 버금자리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런 추세로 나가다가는 이것마저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일도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단순한 이혼율 통계수치만을 놓고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선진 여러 나라들은 이혼에 따른 후속장치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서 높은 이혼율이 그다지 큰 사회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의 살인적인 이혼율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그 후속대책의 소홀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우리의 어두운 미래를 비추어 주는 것 같아 우울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참을성의 부족 탓이다. 네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왕자처럼 공주처럼 길러 놓으니, 서로 죽어지내려 하지 않고 조금만 수가 틀린다 싶으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심지어 신혼여행 도중에 틀어져 버려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 정작 주인을 잃고 쓰레기 신세가 되는 일까지 종종 생겨나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홀가분해서 어쩌면 다행인지 모른다. 부부가 남남으로 갈라서고 나면 그에 딸린 자식들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핏줄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관습상 입양 같은 방법도 쉽잖고, 또 설사 입양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정신적 충격이며 정서적 혼란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결국 부모의 앞뒤 재지 않는 경박한 행동이 애꿎은 자식들의 가슴에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자국을 남기고 마는 것이다.
이혼을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 마취제에 불과할 따름이다. 깨고 나면 참을 수 없는 쓰라림이 기다리고 있는 일시적 현실 회피의 수단, 이것이 이혼이란 이름의 당의정이 아닌가 한다. 충동적인 이혼은 그 당자로 하여금 더 큰 아픔으로 이어짐을, 상황이 종료된 뒤에야 깨닫고는 뒤미처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일일연속극 집필자들은 어찌 그리도 이혼 이야기를 즐겨 쓰는가. 그들은 마치 이혼에 걸신들린 사람 같다. 날이면 날마다 안방극장을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이 온갖 불륜관계를 중심 소재로 다룬 이야기들뿐이니 한심해서 하는 말이다. 이러다 보니 사회적 공기公器가 오히려 세상을 망가뜨리는 독소가 되고 있다. 그들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궁여지책이란 말을 변명처럼 늘어놓길 좋아한다. 어쩌면 자신들의 삶이 드라마 속의 내용 같지나 않은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텔레비전을 일러 ‘바보상자’라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바보라면 차라리 괜찮은 평가다. 바보는 자신의 무지로 인해 자기 한 사람의 피해로 끝나고 말지만, 텔레비전은 수많은 시청자들을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망가뜨리는 막대한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 이를테면 범죄에 무감각해지게 하고, 고운 심성을 죽이는가 하면, 은연중 불륜을 기리고 두둔할 가치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 따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보상자가 아니라 오히려 판도라의 상자라고 해야 옳겠다.
결혼식장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실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예’라고 대답을 해 놓고서,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약속을 식은 죽 먹듯 깨어 버리는 요즈음의 행태를 과연 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은 주례 앞에 한 언약이 아니라 그 날 모였던 수많은 하객 앞에 한 굳은 맹세가 아니던가. 부끄러운 줄 알 위인 같으면 애당초 불러 모으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혼 풍조는 브레이크 걸리지 않은 급행열차의 형국이다. 그 열차가 어떻게 되리라는 건 더 긴 말이 뭐 필요할까. 이혼을 옷 한 벌 갈아입듯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다. 오로지 내 한 몸 편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들에겐 주위에 딸린 식구들이 안전眼前에 있을 리 없다. 이혼법정에서 서로 자식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상대편에게 떠넘기다 보니, 정작 중간에 끼인 아이들은 네트 위의 배구공 신세가 되고 만다.
예전의 부모들은 짝만 지워 주면 비로소 한 시름 덜었다고 홀가분해 했다. 무거운 부모 노릇에서 해방되어 훨훨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요새 부모들은 짝을 지워 놓고도 늘 가슴 졸이며 산다고 한다. 언제 어느 때 느닷없이 이혼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불안한 까닭이다. 그래서 자식들 시집장가 보낸 부모에게 그 뒤의 일을 물어 보는 것은 큰 실례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부모 봉양은커녕 삐걱거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주는 것, 이것이 최대의 효도가 된 시대이다.
이러다가는 인류가 시행착오를 거쳐 이룩한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온전히 남아 있기나 할는지 심히 회의감懷疑感이 든다. 앞으로 초혼의 남녀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가족’은 천연기념물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 이는 우리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케케묵은 듯한 성구成句가 오늘날처럼 절실히 와 닫는 시절이 있었을까. 공들여 탑을 쌓듯 미운 정 고운 정 쌓아 가며 한평생 해로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훈장이라도 달아 주어야 할 세상이 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첫댓글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 이는 우리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 공감이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가 고심이 된다. 이런 현상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원인은 시대의 흐름인데 이런 현상은 언론이 부추긴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언론은 알게 모르게 시청자들을 세뇌시키는 작용이 엄청나다. 광고선전을 보면 알고도 남는다. 언론은 자중자애 해야 하리라. 아울러 우리 시청자들도 언론을 너무 믿지말고 중심을 잡았으면 한다. 언론도 심하게 말하면 장삿꾼이다. 장삿꾼 믿어 덕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