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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의 유년시절 모습과 노년의 모습
☪ 호모 사피엔스와 과학적 사고의 역사
책 제목을 보면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어려운 과학이야기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내용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부제가 「돌도끼에서 양자혁명까지」인데 이 말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말하는 것일 테고 440쪽이나 되는 분량도 주눅 들게 한다. 저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이론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 현재는 캘리포니아대학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어렵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을까하는 바람을 가지고 첫 장을 넘기니 “자연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점점 넓어져왔다. 밀물과 썰물은 여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데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달의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별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하늘에 떠 있는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생각에서 졸업했다. 핵융합이 이루어지는 용광로에서 우리에게 광자를 보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몇 백만㎞ 떨어진 태양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고 있다. 또 우리 자신의 수십억 분의1 크기에 불과한 원자의 구조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우리가 많은 자연현상을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은 흥미롭고 장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이런 내용이라면 재미있기까지 할 것 같은데 괜히 겁을 먹었던가 하고 생각하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과거에 우리는 몸을 곧추세우고 두 발로 걷는 법을 겨우 배워서 맨손으로 열매를 따거나 뿌리를 캐먹으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비행기를 띄우고 지구 반대편까지 메시지를 실시간 보내고 우주초기의 환경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실험실에서 재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하려는 이야기다. 이것을 알아야 인간으로서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은 차이가 없고 평평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 간의 거리와 차이는 사라지는 반면에 오늘과 내일 사이의 차이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기원전 4,000년경 최초의 도시들이 건설되었을 당시 먼 거리를 가장 빨리 여행하는 방법은 낙타를 타는 것이었는데 시속 몇 십㎞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000∼2,000년 후에 마차가 발명되면서 시속 32㎞로 높아졌고 19세기 말 증기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시속 160㎞로 기록이 경신되었다.
인간이 시속 16㎞로 달리던 시절로부터 200만년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이 속도가 다시 10배로 높아지는 데에는 5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등장해 시속 1,600㎞로 날아다닌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우주왕복선은 시속 2만 7,000㎞로 날았다. 다른 분야의 기술도 이와 비슷하게 가속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로이터통신 뉴스 서비스는 도시와 도시 사이에 증권 시세를 전하기 위해 서신전달용 비둘기를 이용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전신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전화가 나타났다. 유선전화기 보급비율 75%를 돌파하는데 81년이 걸렸고, 휴대전화는 28년, 스마트폰은 13년이 걸렸다. 최근에는 전자 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전화통화가 누리던 위치를 거의 차지했다. 전화는 통신수단이 아니라 주머니 속 컴퓨터로서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과학의 발달과정이 바로 우리 인간의 발달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으로 인간의 신체조건은 최상이 아닐지 몰라도 인간만이 가진 본능에다가 이성을 제공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환경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것이 과학적 사고의 전제조건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두뇌와 독특한 재능’의 발달과정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Huma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호모 속(屬) 전체를 가르치는 용어이다. 그 안에는 호모 하빌리스(손쓴 사람),호모 에릭투스(곧선 사람)도 포함되지만 이들과 친척들은 모두 오래 전에 멸종했다. 진화란 패자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일종의 토너먼트 게임인 것이다. 다른 호모 종은 모두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정신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오직 우리 종만이 생존을 위한 도전을 모두 이겨내고 살아 남았다.(지금까지는 그랬다)
2001년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발견된 -인류의 조상인, 신장 109㎝, 몸무게
29㎏에 털이 많은 여성은 ‘우리들의 친척이라기보다는 침팬지에 가까워 보인다.’학자들이 ‘루시’라고 이름부른 이 여성으로부터 10만 세대가 지난 이후 200만년을 산 종을 과학자들은 호모 하빌리스 즉 ‘손쓴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모 하빌리스가 광활한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살던 시기는 숲이 적고 풀이 무성했는데 이 초원은 이들이 살기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엄청난 숫자의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은 호모 하빌리스와 저녁 식사감을 놓고 경쟁해야 했고 그보다 더 위험한 포식자들은 하빌리스 자체를 잡아먹으려 했다. 그러나 이 ‘손쓴 사람’이 살아남은 데에는 지적능력이 한몫했다. 자몽만하지만 예전보다 커진 두뇌를 가지게 된 덕분이었다.
각기 서로 다른 종을 비교할 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신체 크기에 대비한 뇌의 무게와 지적능력 사이에 개략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뇌의 크기를 근거로 손쓴 사람이 루시가 속한 종에 비해서 지적으로 발전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일한 종 내에서 뇌의 크기는 개인적 차가 상당히 크지만 뇌의 크기가 지능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예로 현대인의 뇌는 1.36㎏ 정도지만 영국시인 바이런 경의 뇌는 2.27㎏이었고, 프랑스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아나톨 프랑스의 뇌는 900g을 약간 넘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1.22㎏ 정도였고, 1907년 41세로 사망한 다니엘 라이온스라는 남자는 체중과 지능이 정상이었는데도 뇌 무게는 600g 밖에 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동일종 내에서 뇌는 크기보다는 구조 - 뉴런(뇌신경 세포)과 뉴런 그룹 사이를 연결하는 성질 - 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부터 인간의 사고과정은 점차 달라져 갔다. 그 변화의 정점은 약 1만 2,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 끝 무렵, 과학자들은 그보다 앞선 200만년을 구석기 시대, 이후 7,000∼8,000년을 신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이 말들은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두 시대는 모두 돌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바뀌면서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돌로 된 도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각하는 방식, 묻는 질문,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생존의 문제들이 달라진 것을 의미한다.
신석기 시대에 형성된 마을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터키 중부 평원에 위치한, 기원전 7,500년쯤에 건설된 차탈회유크라는 곳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동식물을 분석하여 거기 살았던 주민들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었다. 야생의 소, 돼지, 말을 사냥하고 야생의 덩이줄기, 구근, 볏과 식물, 도토리, 파스타치오를 채집했지만 아직 농경이나 목축은 없었다. 거주지에서 발견된 도구와 기구들은 놀라움을 낳는데 그것은 각자 집에서 살았으며 스스로의 예술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노동 분업 같은 건 전혀 없었으나 여기에 많게는 8,000명이 모여 살아서 대략 2,000가구가 있었던 곳이다. 이들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각자 자신들의 일을 했다.’차탈회유크의 벽화에는 이들이 소, 멧돼지, 곰을 괴롭히고 화를 돋우는 그림도 있는데, 이는 이전과 달리 사람과 동물이 파트너가 아니라 지배자로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잔가지를 이용해 바구니를 짜는 것과 비슷하게 동물을 이용의 수단이자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이런 태도는 결국 동물을 가축화하게 되고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처음 양과 염소가 길들어졌고 소와 돼지가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동물의 보호자가 되었고 가축화된 동물은 스스로를 보호해야할 필요가 없어지자 새로운 육체적 속성으로 진화되었다. 사람에게 길드는 형태를 보이고 뇌가 작아지고 지능이 낮아진 것이다. 또 식물도 인류의 통제 하에 놓이면서 채취인이 아닌 재배자의 관심사가 되었다. 밀, 보리, 콩 등이 대표적인 예다. 차츰 인간은 이제 식량을 사냥하거나 채집하는 일을 대체로 포기한 대신 아이디어와 지식을 사냥하고 모으는 일에 힘을 합치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이 독특한 점은 과거의 지식과 혁신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데에 있다. 어느 날 둥근 것은 구른다는 사실을 보고바퀴를 발명했고 결국 수레, 수차, 도르래, 그리고 롤렛을 만들게 되었다. 인간은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를 가르치며 옛 아이디어를 개선하려 애쓰며 통찰과 영감을 교환하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고고학자 그리스토퍼 핸실 우드는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에게 흰개미를 잡는 법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방법을 개선하지는 못한다. ‘이제는 다른 도구를 사용해서 잡아보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 할 뿐이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3,000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중 문자화된 언어는 100종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인류사를 통 털어도 쓰기까지 독자적으로 발명된 경우는 몇 차례에 불과하다. 쓰기는 문화의 확산을 통해 퍼져나가고 새로 발명되기보다는 기존의 쓰기 시스템을 빌리거나 조금씩 고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자 언어는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남쪽 수메르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외 문자체계가 독립적으로 발명된 분명한 사례는 거의 없다. 기원전 900년경 멕시코에서 문자가 만들어졌고 이에 더하여 이집트인(기원전 3,000년)과 중국인(기원전 1,500년)의 문자체계 역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아는 다른 모든 문자들은 이런 소수의 발명을 출발점으로 하여서 가지를 친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책의 내용이 어렵고 방대하여 이쯤에서 출판사 리뷰를 한번 찾아보았다. 책은 3부로 되어 있고 아직 1부도 채 읽지 않았는데도 지루함을 느꼈다고 할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오늘 5월 6일은 어제 어린이날이 일요일이어서 대체 공휴일이고, 둘째 손자 태원이의 생일날이기도 하다. 생일잔치를 어젯밤에 하고 생일선물로 우주전함마블을 주고 케익도 사서 파티를 했다. 아마도 어린이날을 대신해 오늘은 저네들끼리 놀고 있을 것이다.
“제1부 과학적 사고의 선구자”는 고대 세계의 과학적 사고의 탄생 및 배경을 다룬다. “제1장 우리의 알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아버지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죽음의 현장에서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알고 싶어 하는 욕구에 대해서 논한다. “제2장 호기심”에서는 우리 호모 종(種)의 진화과정과 어린 아이들이 가진 본능적인 호기심에 대해서 살펴본다. “제3장 문화”에서는 신석기 인류가 만든 믿겨지지 않는 건축물인 괴베클리 테페와 차탈회유크를 소개하며, 인간의 향상된 정신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4장 문명”에서는 도시가 출현하면서 문명이 시작된다. 수메르 문명은 인류의 최초 문자를 탄생시키고 이집트에서는 세금을 매기기 위한 기초적인 산술법이 만들어졌다. “제5장 이성”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탈레스는 자연세계의 근본적 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피타고라스는 자연에 수학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거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변화의 공통적인 요인을 찾기 위해서 질적으로 연구했다. 이런 시도를 물리학이라고 불렀다.
“제2부 과학”에서는 본격적인 과학발전의 시대가 열린다.“제6장 이성에 이르는 새로운 길”에서는 중세에 경제가 번창하면서 대학이 탄생하게 된다. 그곳은 종교가 아닌 “과학”을 다루는 곳이었다. “시간을 재다”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의 머턴 칼리지에서 운동에 대해서 연구한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체계적인 실험을 통해서 낙하법칙을 발견하고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무너뜨린다. “제7장 기계적 우주”에서는 뉴턴이 등장한다. 뉴턴의 삶과 연구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 살펴보고, 뉴턴의 물리학이 세계에 끼친 영향을 다룬다. “제8장 사물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는 화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대 이집트의 방부처리업자에서부터 연금술사 파라셀수스, 공기와 호흡에 대한 실험을 한 보일, 산소를 발견한 프리스틀리, 화학 분야를 혁신한 라부아지에, 화학의 계량적 언어를 최초로 창조한 돌턴, 주기율표를 개발한 멘델레예프까지, 화학의 선구자들이 소개된다. “제9장 살아있는 세계”에서는 현미경으로 생물을 관찰하는 생물학자들과 함께 다윈이 등장한다. 다윈의 생애와 그의 진화론에 대해서 알아본다.
“제3부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에는 뉴턴 이후의 물리학의 세계, 아인슈타인과 양자세계를 탐구하는 이들의 역사가 펼쳐진다. “제10장 인간 경험의 한계”에서는 플랑크는 양자의 존재를 알리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그동안의 인간 지각에 대한 관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제11장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구축하는 러더퍼드와 이를 수정하는 보어가, “제12장 양자혁명”에서는 양자이론을 증명해낸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엄청난 성과물 등 20세기 초반의 물리학 발전의 풍경이 펼쳐지며, 마지막에 히틀러를 피해서 유럽을 떠나는 물리학자들의 탈출기가 그려진다.
저자는 책에서 인류의 과학적 사고의 발현부터 역사적 흐름을 과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핵심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또한 과학의 발전은 그냥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그리고 한 사람의 끈질긴 인내심과 노력, 혁신적인 사고를 통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자 특유의 유머가 녹아 있는 책은 독자들이 흥미롭게 과학적 사고의 역사를 찾아서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한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들 “끝없이 이어지는 매혹적인 이야기”─「커커스」 “믈로디노프는 과학을 알기 쉽고도 흥미롭게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는 일이 결코 없다”─ 스티븐 호킹,『시간의 역사』의 저자 “믈로디노프는 방정식으로 생각하고, 일화, 비유, 때로는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설명한다… 결과는 환상적이다”─「포천」출처:인터넷 교보문고
기원전 2,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기록문화는 더욱 진화했다.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감정적 요소에 호소하는 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60㎞ 떨어진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판에 가장 오래된 ‘사랑시’가 새겨져 있는데 왕을 사랑하는 여사제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4,000년 전의 것이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생생하고 전달력이 강하다. 그 시를 보자.
「사랑스러운 나의 신랑이여,
당신의 미녀는 마음이 경건하고 꿀같이 달콤한 여인이에요.
당신은 나를 사로잡았어요.
떨면서 나는 당신 앞에 서 있답니다.
신랑이여, 나를 침실로 데려갈 거지요.
당신은 나에게서 기쁨을 맛보았지요.
어머니에게 말하세요. 당신에게 진수성찬을 차려낼 거예요.
아버지에게 말하세요. 당신에게 선물을 드릴 거예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동부 스타게로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 대왕)의 조부인 아민타스 왕의 주치의였고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기 위하여 17세 때 아테네로 가게 되었다. 플라톤 사후에 아카데미아는 배움의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지금도 그렇게 쓰이조 있지만 당시는 아테네 외곽에 있는 하나의 정원에 불과했다. 플라톤과 제자들은 이곳의 작은 숲에 자주 모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 아카데미아에서 20년간 머물렀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떠났으며,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교사가 되었다. 이때는 그가 아직 명성을 얻기 전이었기 때문에 필라포스 왕이 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들의 선생으로 정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솔솔한 급여를 받으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이어 세계를 정복해나갈 때 여러 가지 혜택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는 50세에 가까웠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13년간 작업에 몰두했다. 그를 유명인물로 만든 대부분의 저술은 이때 쓰인 것이다. 이후 다시는 알렉산드로스를 만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쳤던 종류의 과학은 자신이 플라톤에게서 배운 것과는 크게 달랐다. 그는 아케데미아의 모범생이었지만 스승의 수학을 강조하는 데에는 항상 불편해했다. 그의 취향은 추상적인 법칙이 아니라 자연을 상세히 관찰하는 쪽이었다. 이는 플라톤식 과학과도 오늘날 시행되고 있거나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과도 크게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변화는 사물 자체의 내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스러운 변화의 원인은 사물의 본성이나 구조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운동이라고 부른 변화, 즉 위치의 변화에 대해 모든 사물은 흙, 공기, 불, 물이라는 네 가지 기본요소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이 원소들은 이동하는 경향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데 돌맹이가 아래로 떨어지고 비가 바다에 내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땅과 바다가 이들의 자연스러운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돌맹이가 하늘을 향해서 날아오르게 만들려면 외부적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돌맹이가 떨어질 때 그것은 자신이 타고난 성향을 따르는 것이며 ‘자연스러운’운동을 실행하는 것이다. 자연스런 운동을 수행하는 데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흙과 물로 만들어진 물체는 떨어지고 공기나 불로 만들어진 물체는 올라가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거품은 물 밖으로 떠오르고 불길은 공기 중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운동은 수많은 자연스러운 과정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성장, 부패, 발효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스러운 변화가 취하는 다양한 형태는 원래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장작이 타거나 사람이 늙고, 새가 나르고 도토리가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념체계에서 자연스러운 변화란 우리의 일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 무엇이며,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그런 종류의 변화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자신의 시도를 물리학(Physics)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은 자신과 탈레스*가 남긴 유산을 연결 짓는 행위였다. 그의 물리학은 범위가 넓고 살아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모두 다루었으며 하늘과 자연의 현상을 두루 포괄했다. 그가 연구한 변화의 다양한 분야는 오늘날의 과학 분과 전체에 해당한다. 물리학, 천문학, 기후학, 생물학, 발생학, 사회학 등...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저작을 남긴 진정한 위키피디아였다.
*탈레스(B.C.640 - B.C.546)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투스 학파의 창시자이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일식을 예언하였고,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그의 제자였던 알렉산드리아(알렉산드 대왕)가 아시아 정복에 나서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고 불리는 학원을 열었다. 도로를 따라 산책하거나 정원을 걸으면서 그는 자신이 오랜 세월 배운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자연에 대한 명석한 관찰로 풍부한 결과물을 생산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에 대한 접근법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science)이라고 부르는 접근법과는 크게 달랐다.
물리학의 가장 초보적 내용을 배우는 학생들도 시속 100㎞ 달리는 차의 초속은 27.8㎞임을 알고 있다. 사과를 떨어뜨리면 시속 35.4㎞의 가속도가 매초 붙는다는 사실도 배운다. 당신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 의자가 당신을 멈추게 하는 몇 분의 1초 동안 척추에 가해지는 힘은 450㎏이 넘는다는 사실도 수학적으로 계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철학을 수학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당시에는 +, -, = 같은 기호는 발명되지 않았고 지금 같은 수 체계나 시속 몇 ㎞라는 개념도 물론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 62세 때 복부질환으로 사망했다. 죽기 1년 전에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고 나서 친마케도니아 정권이 무너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서 도망쳤다.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을 보냈지만 언제나 아테네에서 자신이 외부인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테네라는 도시에 대해 “똑같은 일이 시민에게는 적절하게 되는 반면 이방인에게는 부적절하게 된다. 이곳에 머물기가 힘들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아테네에 체류한다는 사실이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겨냥한 위험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것이 나쁜 선례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철학논쟁이든지 독약 한 컵은 강력한 반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나 깊이 사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순교자가 되는 위험을 무릅쓰느니 도망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고상한 이유를 둘러댔다. 아테네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에 대해서’죄를 짓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결정은 그의 삶 일반에 대한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망한 뒤 그의 사상은 여러 세대에 걸쳐 리케이온 학생들과 그의 저술에 논평을 더한 학자들에 의해 전수되었다. 중세초기에 쇠퇴하는 듯 했지만 르네상스기에는 아랍 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더 높였고 이후 서구 학자들은 이들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배웠다. 그의 사상은 약간 수정된 채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식 철학이 되기도 했다.
저자는 “인간은 이성을 이용해 우주를 분석하는 법을, 그리스인들을 통해서 배움으로써 우리는 과학이라는 영광스런 해변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앞으로 펼쳐질 과학탐구의 커다란 모험에 비하면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갈릴레오가 출간한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담론과 수학적 설명』은 인류문화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갔다. 이후 위대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아이작 뉴턴이었는데 뉴턴은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의 청사진을 완성했다.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뉴턴 이후 과학에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과학은 이제 수가 지배하는 피타고라스의 우주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자연은 관찰과 추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거대한 은유로 바뀌었다. 세상은 시계와 같으며 그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수의 법칙이며 법칙은 자연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는 인간관계 상호작용도 포함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역사에는 위대한 과학자들이 많고 그들로 인해 현대 과학이 오늘날처럼 발전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대에는 철학과 과학의 구분이 어려웠고 중세에는 과학과 의학, 종교가 분리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런 와중에 불행한 과거를 딛고 후세에 이름을 날린 과학자 중에는 뉴턴이란 인물이 있다. 만유인력을 발명한 과학자로만 알고 있는 그는 과연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민력을 발명한 것일까?
뉴턴은 1642년12월25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몇 달 전에 사망했고 어머니 한나는 뉴턴이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명백한 미숙아였기 때문이다. 80년이 지난 후 뉴턴은 조카사위에게 너무 작어서 1리터짜리 물통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 뉴턴의 상황은 너무 심각했다. 집안의 두 하녀는 물건을 사러가서는 일부러 게으름을 피웠는데 자신들이 돌아오기 전에 아기가 죽어 있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틀렸다.
뉴턴은 살면서 사람들을 곁에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에 대해 쓸모를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뉴턴이 세 살 때 한나는 부유한 목사 스미스와 재혼했다. 한나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았던 스미스는 젊은 아내는 원했지만 의붓아들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집안 분위기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는데 뉴턴은 나중에“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들의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회상했다.
뉴턴이 열 살 때 의붓아버지가 죽었으므로 할머니에게 의탁해 있다가 잠시 어머니와 스미스 사이에 난 세 동생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 살기도 했으나 스미스가 죽은 2년 후, 어머니 한나는 집에서 13키로 떨어진 그랜샘에 있는 청교도 학교로 그를 보냈다. 거기서 공부하는 동안 약재사이자 화학자인 월리엄 클라크의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클라크는 뉴턴의 재능과 호기심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이에 힘을 얻어 몸소 많은 실험과 연구를 해 생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힘으로 움직이는 풍차를 만들기도 했다.
뉴턴은 클라크와는 잘 지냈으나 급우들과는 그러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랐던 데다가 지적으로 우월한 것이 탓이었다. 뉴턴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오늘날과 같았다. 그를 미워한 것이었다. 소년시절 그의 삶은 외로우면서도 창조성은 뛰어난 것이었고 이로서 창조적이지만 고통스럽고 고립된 삶으로 이어졌다.
*만유인력의 법칙
아이작 뉴턴(1642.12.25∼1727.3.20.)의 새로운 역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운동법칙에 근거한다. 첫째,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둘째, 운동량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한다. 셋째,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
이 운동법칙으로 구심력을 계량적으로 유도해낼 수 있고, 케플러의 제3법칙을 대치할 수 있다. 그 결과로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의 운동뿐 아니라 지구나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운동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뉴턴은 태양계의 모든 천체운동을 지배하는 단일한 힘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력(gravitas:라틴어로 '무거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중력(또는 만유인력)은 혜성의 운동이나 조석현상의 설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출판으로 뉴턴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륙의 과학자들은 원거리(遠距離)작용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뉴턴의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기술적인 완벽함에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뉴턴의 뒤를 따랐고 그의 후원 하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그래샴칼리지 등 주요대학의 교수직을 이어갔다.
틀린 것과 올바른 일을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희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는지 모른다. 뉴턴이 그런 사람이었다. 유럽에 흑사병이 휩쓸 때 그처럼 상스러운 출발을 해놓고도 그는 잘못된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데에 삶의 많은 부분을 허비했다. 그의 업적을 연구한 후대 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아이디어 말이다. 시작은 아주 좋았다. 1667년 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문을 연 직후 뉴턴은 트리니티 칼리지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학교에는 선거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상황에 가끔씩 직면하게 된다. 개인적인 도전, 삶을 바꿀 수 있는 대학교나 전문대학원 입학시험 등. 24세로 젊은 뉴턴은 선임연구원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임용되었다.
뉴턴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선임연구원으로 선출되었으나 힘과 운동에 관한 연구를 크게 진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1680년대 뉴턴은 흑사병*이 돌던 1660년대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지식인이 되어 있었다. 수학적으로 더 성숙했으며 연금술 연구를 통해서 과학적 경험도 크게 늘었다. 일부 학자들은 연금술 연구 덕분으로 그가 운동의 과학에 돌파구를 열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 돌파구 덕분에 「프린키피아」를 쓸 수 있었다.
*흑사병: 중세 말 경제적 침체를 더욱 가공스럽고 세기말적인 것으로 만든 대재난은 흑사병이었다. 소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제노바 상인에 의해 1347년 말 이탈리아를 거쳐 마르세유에 도착하고, 다시 1348년경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당시 아비뇽은 흑사병을 사방으로 유포시킨 교차로 역할을 하였다. 흑사병이 할퀴고 간 도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농촌은 폐허가 되었고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흑사병은 1361~63, 1369~71, 1374~75, 1390, 1400, 1664~65년에 유행했으며 치사율은 지역마다 달랐다
*프린키피아: 지구의 공전 속도는 초속 30㎞. 탄알보다 100배 빠르지만 정작 우리는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중력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중력을 인식하고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였을까. 《프린키피아(Principia)》 발간 이후다. 원제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인 이 책이 나온 것은 1687년 7월 5일. 아이작 뉴턴이 왕립협회의 지원을 받아 라틴어 초판을 내놓았다. 핵심은 만유인력과 세 가지 운동 법칙. 관성의 법칙과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담겨 있다.
내용이 복잡하고 난해했지만 출간은 성공을 거두었다. 평생 관직을 원했던 뉴턴이 훗날 조폐국장에 오르는 데에도《프린키피아》의 저자라는 명성이 작용했다. 《프린키피아》 발간을 과학사 최대 사건의 하나로 꼽는 이유는 과학 혁명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이 수학적인 힘과 법칙에 따라 규명될 수 있으며 신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과학을 통해서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아무래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기는 힘들 것 같다. 양이 많고 과학관련 어려운 용어들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아서 아니면 책 빌린 기간이 14일이라서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은 초속 30㎞로 공전하지만 모르고 지내는 것처럼 과학에 대해서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주 많은 것 같다. 인간은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여 40여 차례의 분열을 거친 다음 마침내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존재다. 은하수보다 100배 더 많은 숫자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복잡한 과정을 마치 스스로를 분석하는 컴퓨터처럼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인식하는 것 또한 충격적이다. 컴퓨터에 지시를 내리는 어떤 프로그래머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것은 생명의 기적이다.
박테리아 같은 존재를 제외하고 오로지 핵이 있는 세포를 가진 생물의 숫자만도 지구에는 약 1,000만종이 존재할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이중 우리가 발견하고 분류한 것은 1% 정도에 불과하다. 개미만 따져도 최소 2만 2천종에 이르는데 인간 1명당 개미는 100만∼1,000만에 이른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수천 종의 회충, 수만 가지 유형의 박테리아들, 생명체는 지구 구석구석 어디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적으로는 먹지 않으려고 하는 생명체들을 계속해 섭취하고 있다. 브로콜리 한 접시에는 60마리의 진딧물과 진드기가 각각 혹은 합쳐서 들어 있으며, 계피가루 한 종지에는 400개의 곤충 조각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밥맛을 떨어뜨릴지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의 몸 자체도 외부 생명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각자가 생명체의 생태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당신의 팔뚝에서 44속이나 되는 종의 집단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생명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장 속에는 최소한 160종의 박테리아, 발가락 사이에는 40종의 곰팡이를 발견했는데 이들을 더하면 우리 몸의 체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미생물 세포가 우리 몸에 존재한다. 우리의 신체 부위는 각각이 서로 구별되는 서식지인 셈이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잉글랜드 슈르즈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읍내의 의사였고 어머니 수잔나 웨지우드는 그 이름을 가진 도자기 회사 사장의 딸이었다. 집안은 부유하고 저명했지만 찰스는 학업성적이 나빴고 학교를 혐오했다. 판에 박힌 듯한 학습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스스로를 낫게 평가했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사실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동일한 주제를 오랜 시간, 계속해서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심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질은 과학자 그리고 모든 혁신가에게 정말로 특별한 재능이며 다윈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다윈의 호기심과 과감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게임브리지에 다닐 때 그는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취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오래 된 나무껍질을 떼어내다가 나는 두 마리의 희귀한 딱정벌레를 발견하고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았다.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종류를 한 마리 더 발견했는데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른 손에 있던 한 마리를 입 속에 집어넣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따개비류에 대해 684쪽이나 되는 관찰의 글을 쓰는 집요함을 갖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런 성격을 소유한 소년이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다윈이 자신의 길을 찾아 여행하게된 것은 1825년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아버지는 자신과 할아버지의 길을 가기를 원해 의학공부를 시키려고 게임브리지가 아닌 에든버러 대학교에 보냈지만 다윈은 아버지에게서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유산을 물려받으리라고 확신하게 되면서 에든버러에서 의학을 배우려고 고생할 필요나 의욕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1831년부터 1836년까지 바글호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로 인해 자연과 지질을 관찰할 수 있었고 여행 후 일기를 책으로 만들고 또 자신이 수집한 동식물 표본을 분류하는 일에 시간을 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연간 400파운드의 돈을 받음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오징어 한 마리가 한 계절에 3,000마리의 알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만일 모든 알이 자라나 오징어가 된다면 7세대만에 오징어의 부피는 지구 전체의 부피와 맞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30세대가 되기 전에 관측 가능한 우주 전체를 알만으로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맬서스의 이런 시나리오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대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연은 막대한 숫자의 알과 후손을 생산하지만 경쟁을 통과해서 살아남는 것은 소수다. 평균적으로 보아 가장 잘 적응한 것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다윈은 이런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했다.
1859년 4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다시 정리해서 『종의 기원(On the Onigin of Species』이라는 걸작을 완성했다. 책은 짧았지만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존경받는 과학자였으나 책이 출간되면서 뉴턴의 프린키피아 이후 대중적인 명사가 되었다. 국제적 인정과 명망은 높았고 왕립협회에서 주는 코플리 메달을 받고 옥스퍼드와 게임브리지 양쪽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제안 받았다. 프로이센 왕으로부터는 메릿 훈장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과학 아카데미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두 곳의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모스크바 제국박물학자협회와 영국 국교회 남미선교협회 명예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다윈 본인은 우리 종의 표본은 아니었지만 그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지속적인 피로를 느끼기는 했으나 젊은 시절에 비해 건강문제도 개선되었다. 그는 끝까지 작업을 계속해서 1881년에는 마지막 논문이랄 수 있는 「지렁이의 활동에 의한 식생 토양의 형성」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 해 크리스마스 무렵에 심근경색을 겪은 뒤 이듬해 4월 18일 다시 심경경색이 도졌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라고 중얼거리다가 다음날 새벽 4시에 정말로 사망했다. 나이 73세였다. 그는 거의 마지막에 친구 웰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행복하고 만족할 만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네. 하지만 삶은 매우 피곤해졌네”라고 썼다.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