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놀이를 마친 우리는 용닝으로 향한다. 버스에는 우리 일행 외에도 짜시와 마을 사람 둘이 더 탄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용닝인데 하루에 버스가 2회 밖에 들어오지 않고 시간도 잘 맞지 않아 우리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고 정군이 대신 양해를 구한다. 버스에 빈자리도 있는데 이들이 편리하게 이용한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에 모두 박수로 환영한다. 우리가 어제 온 호수 갓길을 되돌아 리커반도 위 전망대에서 잠시 쉬어 루구호를 바라본다. 전망대 앞쪽으로 내려가면 초르텐이 있고 내려가는 길을 따라 룽다가 바람에 휘날린다. 참으로 한적하고 평화스런 풍경이다. 일행들과 사진을 찍고 루구호 풍광에 빠져 있다보니 언준이와 언민이가 없다.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형제간에 뜀박질 시합을 하고 있다. 언준이가 앞서 달리다 걸어오는 틈을 타 언민이가 앞질러 올라온다. 언민이 녀석, 형을 이겼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언준이는 동생이라 봐 줬다고 우긴다. 내가 보기엔 형이 살짝 봐 준 것 같은데..... 녀석들 덕분에 한껏 웃어 본다.
버스는 고갯길을 오르더니 고개 중간에서 우회전한다. 험준한 산길을 한 시간 쯤 달려가니 토담에 나무로 지은 이족마을과 옥수수가 대부분 심겨진 밭이 이어지자 용닝 시장 입구에 도착한다. 용닝은 우리의 70년대 후반 시골 작은 읍을 연상케 한다. 동행한 마을사람들은 각자 일을 보러가고 우리는 시장 옆 식당으로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좀 어두운 식당 안엔 중국인들이 둥근 탁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시장 입구의 식당이라 그런지 매우 시끄럽고 지저분하다. 기름 냄새와 연기가 자욱한 주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주머니 둘이 가스불 앞에서 커다란 프라이팬에 돼지고기와 채소 등을 튀기고 볶느라 분주하고 주방 바닥은 요리하고 남은 채소, 고기찌꺼기와 밥 풀, 수저 등이 널브러져 있어 지저분해 보인다. 아마 우리 일행 중에 깔끔 떠는 사람이 주방의 모습을 보았으면 식사를 포기했을 정도로 위생상태가 불량해 보인다. 어쩌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이것도 문화체험이라고 생각하고 탁자 두 곳에 둘러 앉아 식사를 기다린다.
옆 테이블 중국인들은 식사를 끝내고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즐기는데 옆에 있는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고 떠든다. 우리 70년대 시골장터 식당 모습 그대로인 게 불편하다기 보다는 정겨워 보인다. 밥과 돼지고기 볶음 요리, 채소 볶음 등 몇 가지 반찬이 나왔지만 향채 냄새와 너무 기름진 음식 때문인지 일행들은 몇 젓가락을 들고 무얼 먹을지 몰라 망설이다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난 그런대로 먹을 만한 데. 그래도 커피 한 잔 했으면 하는 생각이 나던 차에 강여사가 원두커피 한 봉지가 남았다며 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타 조금씩 돌려 마신다. 한 봉지를 물에 타 8명이 조금씩 마셨으니 커피 생각이 더 절실하다. “이곳에도 어딘가 커피믹스를 살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야.”란 생각이 나, 정군에게 커피 살 수 있는 곳과 중국어로 뭐라고 해야 하는지를 물어 커피사냥에 나선다. 작은 가게는 아무리 둘러봐도 커피 파는 곳이 없다. 이곳저곳을 헤매다 시장 옆 수퍼마켓이 보이기에 들어갔더니 커피믹스가 있다. 커피믹스 큰 것 한 통(24元)을 사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수퍼마켓을 나와 버스에 오른다.
자메이사(扎美寺)는 시장에서 버스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최 작가가 이동 중 버스에서「티벳불교의 게루파(格魯派) 사원으로 티벳에서 두 번째로 큰 절로 본래 500여 명의 스님과 많은 전각들이 있었는데 문화혁명 당시 관음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파괴되었으며 최근 관광진흥 차원에서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전각들이 복원되고 있으나 지원이 건축에 한하고 있어 전각 유지와 보수에 어려움이 많다. 이 지역은 과거부터 티벳의 영향을 많이 받아 지역 토속신앙과 함께 티벳불교가 성행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가옥사이로 난 좁은 돌길을 따라 가니 골목 끝에 자메이사가 보인다.
자메이사(扎美寺) 현판이 걸린 사원 입구를 지나면 좌측에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채와 돌로 쌓아 올리고 금도금으로 장식한 스투파가 보인다. 정면에 사원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높은 담이 가로막고 있어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니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이 사원의 교육부장 직책을 가진 젊은 스님이 우리를 맞이한다. 광장 정면에는 대웅전(主법당)이 있고 좌우측에 전각이 있는데 스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측 전각이 문화혁명 시에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관음전으로 지은 지 400년이 넘은 이 사찰을 대표하는 전각인데 오늘 아침 지진피해로 전각이 기울고 위험해 들어갈 수 없단다. 관음전 안의 벽화는 보물로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지만 공정여행팀에게 만 특별히 공개했지만 오늘은 아침에 일어난 지진으로 무너질 연려가 있어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아침 지진이 그리 큰 지진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보기에도 군데군데 금이 많이 가고 상당히 기울어진 모습이다. 안타깝다. 벽화나 내부를 못 봐서가 아니라 수 백 년을 견뎌 온 문화재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위험에 처한 것이 안타깝다.
스님을 따라 들어간 대웅전은 TV에서 보던 티벳사원과 마찬가지로 실내가 어둡고 대웅전 앞 불상이 안보일 정도로 갖가지 천들이 천장에서 늘어뜨려져 우리 법당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법당 안 불전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불상 외에도 티벳불교를 혁신하여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게루파를 창시해 티벳불교의 주류로 성장시킨 종카파 스님과 그의 제자 판첸라마 및 게루파의 활불 등이 모셔져 있다. 중국정부의 압박 때문인지 종카파 스님의 큰 제자인 달라이라마는 사진조차 없다. 불전 함에 보시를 하고 대웅전을 나온다. 대웅전 밖 파란색 텐트 안에서 한 스님이 북과 징을 치며 독경을 하고 있다. 교육부장 스님이 지진으로 전각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 스님들의 독경과 수행은 밖에 텐트를 치고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대웅전 옆에는 오늘 아침 지진으로 벽과 지붕에서 떨어진 잔해들이 쌓여 있어 그 실상을 대변하고 있다. 스님을 따라 대웅전 옆에 마련된 마니차를 돌리며 지진으로부터 이 사원과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기를 기원해 본다.
스님이 안내를 따라 들어간 대웅전 좌측 5층 전각에는 1층에서 전각 천정에 닿을 정도의 금색 대불상이 안치되어 있고 대불상 앞에는 입적하신 게루파 큰스님들의 상이 놓여 있다. 전각 안 벽 쪽엔 목각으로 만든 엄청나게 커다란 사천왕상들이 무시무시한 얼굴과 무기를 들고 대불상을 지키고 있다. 전각 입구 우측엔 六道輪廻圖란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의 설명은 대충 다음과 같다.「염라대왕이 감싸고 있는 원은 각자가 살면서 지은 業에 따라 여섯 개로 나뉜 곳을 떠돈다는 윤회를 뜻하는 것으로 신들이 사는 천상, 인간 세상,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 지옥,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이 가득한 아귀, 그리고 畜生으로 구분된다. 한 가운데 작은 원안에 있는 돼지, 뱀, 닭 3가지 동물은 3가지 독인 욕심, 화냄, 어리석음을 뜻한다. 6개의 그림이 있는 원의 윗부분은 3개는 인간 세상, 천상, 아수라를 뜻하고 아래 부분은 아귀, 지옥, 축생을 나타내는데 각 계에는 관음보살의 화신인 부처가 있어 중생구제를 설법하고 있다. 원의 맨 가장자리를 12개로 나눈 것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의미한다. 육도윤회도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려면 일주일 내내 설명해도 부족하다.」
전각 옆에 마련된 마니차를 돌리며 여행의 안전과 재해로 부터 모든 만물의 안전을 기원한다. 전각 뒤에 폐허로 잡풀이 무성한 곳은 몇 년전 지진으로 완전 폐허가 돼 버린 요사채라고 한다. 관음전 앞에서 스님과 기념촬영을 마치자 진영아빠가 용닝시장에서 구입한 염주를 스님에게 건네주며 축원해 달라고 한다. 스님이 받아 합장 한 양 손바닥 사이에 염주를 쥐고 독경을 한 다음 진영아빠 목에 걸어준다. 티벳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활불이 축원해 준 염주를 평생 보물처럼 간직한다고 하는데 오늘 활불을 뵙지 못해 활불 대신 스님의 축원을 받은 염주도 커다란 여행 기념품이 될 것이다. 우리 일행 모두 스님께 고마움의 표시로 “짜시딸레” 하며 합장하고 헤어지는데 사원 밖 버스까지 따라와 손을 흔든다. 참으로 고맙고 정이 많은 스님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용닝시장으로 향한다. 시멘트로 건축한 문 위에 페인트로 “永寧農貿市場” 라고 쓴 시장 입구는 우리나라 6,70년대 장터를 연상할 정도로 낡고 지저분해 보인다. 각종 생필품을 파는 시장입구를 들어서자 이족 전통의상을 입고 등엔 바구니를 진 여인들의 모습이 가끔 보이고 상인들과 손님들이 물건을 사고파느라 가게 앞은 시끌벅적하다. 채소전에 나온 가지, 무, 고추, 당근, 호박 등은 우리나라 것보다 엄청나게 크다. 종자가 다른 것인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과채류들을 크게 키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만큼 맛이 좋을까? 이런 과채류들이 우리나라로 수입된다면 우리 농가들은 수입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장 한 구석 당구장에는 젊은 중국인 남자들이 당구에 빠져 있고 한가한 가게 한편에선 남녀가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우리 시골장터에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노천에서 당구나 고스톱을 치는 건 못 봤는데 중국인들은 정말 내기를 좋아하나 보다.
육류를 파는 가게에선 닭, 돼지를 가게 앞에서 직접 도축하고 있어 바닥엔 피가 흥건하고 비린내가 진동한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언민이와 언준이, 젊은 아줌마들은 질겁을 한다.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도 아직 닭은 시장에서 도축하지만 돼지는 허가된 도축장에서 위생적으로 도축해야 하는 것 아닐까? 털을 벗겨내고 내장이 드러난 채 커다란 칼로 돼지를 도축하는 모습이 잔인해 보인다. 이들에겐 이런 일이 일상이겠지만 우리 눈엔 끔찍하고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건 너무 우리만의 잣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
시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다 보니 불교용품 가게 앞에 우리 일행들이 보인다. 진영 아빠와 일행들이 룽다와 염주 등을 사려고 안주인과 흥정하는데 가게 앞에선 바깥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서너 살 먹어 보이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밥을 먹이고 있다. 누추한 옷과 씻지 않은 얼굴, 코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어릴 적엔 저랬을 거야.”란 생각이 든다. 가져간 풍선을 몇 개 불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자 아이들이 풍선을 날리며 좋아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 아직 너무 어려선지 풍선을 제대로 잡지 못해 아빠가 풍선을 잡느라 바쁘다. 그래도 풍선 덕에 아빠는 아이들에게 밥을 수월하게 먹이는게 다행이다. 어머니를 따라 가게에 온 10살 정도의 아이가 보이기에 준비한 볼펜을 꺼내 몇 자루 주었더니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고마워한다. 작년 라오스 배낭여행 시에도 아이들에게 볼펜과 풍선 나누어 주며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친근해졌는데 작은 선물이지만 낯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매개체이자 아이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는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된다. 아침에 시장에 같이 나왔던 모서인들과 시장 입구에서 만나 객잔으로 되돌아온다.
첫댓글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공정여행 블로그로 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