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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혜 문 학
오늘날 우리는 성경 안에서 지혜문학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지혜문학을 자세히 읽어본 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소위 지혜라고 일컫는 내용들 중에는 성경 안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유다 전승 안에서 지혜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혜가 성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본 강의를 통해 그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인격화된 지혜
지혜문학 발전역사 안에서 원래 지혜는 인격화된 의미가 아니었으나, BC 2-3세기경부터 점점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혜를 어떤 한 인물로 의인화시켜 받아들였다. 특히 지혜는 여성의 모습으로 의인화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 만연해 있던 플라톤 철학,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와 지혜문학
지혜문학의 지혜라는 말 대신 말씀(logo,j)이란 말을 넣으면 요한복음과 아주 유사한 면모를 보이며,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분에 지혜라는 말을 넣으면 지혜문학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곧 지혜문학은 신약성서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그러니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 (코헬9,7-9)
먼저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위의 말씀을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라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 생각한 것,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곧 계시이며, 이것은 지혜와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사람이 살다가 인생의 경험에서 얻은 삶의 지혜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다.
“누가 비탄에 젖어 있느냐? 누가 애통해하느냐? 누가 싸움질하였느냐? 누가 원망하느냐? 누가 까닭 없이 상처를 입었느냐? 누가 슬픔에 잠긴 눈을 하고 있느냐? 늦도록 술자리를 뜰 줄 모르는 자들 혼합주를 맛보러 온 자들이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와 같아진다. ‘사람들이 날 때려도 난 아프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도 난 아무렇지 않아. 언제면 술이 깨지? 그러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하고 말한다.” (잠언23,29-35)
과연 위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직접 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지혜문학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이 뭔가 직접 얘기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한 분이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앞뒤가 맞겠지만, 지혜문학을 실제로 보면 서로 상충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바로 언급한 잠언23,29-35의 말씀과 코헬9,7-9의 말씀만 봐도 서로 내용이 충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혜문학에서는 이것들을 지혜라고 한다. 과연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엄연히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지혜문학의 말씀은 대체로 하느님 말씀이라 하기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굳이 정리하자면 성경저자가 갑자기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말씀을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어떤 구체적인 삶을 반복적으로 살면서 그를 통해 깨달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반복적인 삶을 통해 경험한 것을 자기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다음 세대에게 전수한다. (실제로 인류역사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수된 것이 삶의 지식의 틀이 되는 지혜이다. 곧 지혜란 예부터 여러 인류가 살아오며 반복적으로 모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 지혜문학 전승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잠언23,29-35를 보면 과도한 술에 대한 경고 등 굳이 성경을 볼 필요 없이도 우리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한번쯤 할법한 말마디를 담고 있는 것이 지혜문학이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지혜가 100%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먹으면 아예 안 되지만, 어떤 사람은 술을 먹는 것이 나은 것처럼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지혜는 ‘항상 그러한 것’이 아니라 주로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된다!” 라는 인과 정식이 예로부터 전수되어 온 것이다. 잔소리처럼 굳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대게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들어왔던 내용들이 곧 지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혜문학에서 지혜라는 것은 이러한 반복적 삶을 통해서 얻게 된 깨달음이고, 그것을 우리가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함으로써 그것이 옳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삶으로 전해지는 지식들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원리원칙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굳이 이런 지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이나 격언도 이스라엘 지혜와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굳이 직접 해보지 않아도 위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진 것을 통해 대게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이 삶의 원리원칙이자 지혜인 것이다.
※이스라엘 지혜의 특징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원리원칙은 누가 만들었는가? 반복적 경험을 통해 대개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삶의 원리원칙이라면, 해가 동에서 서로 지는 것도 삶의 원리원칙, 곧 항상 반복적으로 흐르는 현상인데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것을 하느님께서 만드셨다고 본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고,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한다. 곧 삶 속의 반복적인 원리원칙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 때 담아놓은 것이라 믿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모세나 예언자들이 알려준 것도 아니고, 삶 안에서 깨달은 것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것조차도 하느님께서 삶 속에 담아놓은 것이라 본다.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지혜문학이 성경 목록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실제로 예수 시대의 지혜문학은 성경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계획과 연결되었고 결국에는 성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렌쇼우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지혜란
①하느님이 주는 우주 만물 속의 질서의 원칙
②일상생활 속을 지배하는 법칙
③관찰과 반성을 통해 발견하고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①이스라엘에서 지혜란, 하느님이 주는 우주 만물 속의 질서와 원칙이다. 오늘날 세계가 가진 여러 현상과 우리가 가진 신앙을 연결하는 접점에 있는 것이 지혜라고 보면 된다.
②이스라엘 지혜는 또한 일상생활 속을 지배하는 법칙으로 작용한다. 윤리, 법률, 경영, 상업 등등 인간의 삶의 다양한 영역과 하느님의 뜻이 지혜를 통해 서로 접점을 형성한다. 오늘날 성경이 생겼더라면 빅뱅이론 등이 지혜문학의 형식으로 성경 안에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2000년 전에는 이러한 것들을 몰랐기 때문에 적어놓지 않았다.
③개인 삶에서 관찰과 반성을 통해 발견하여 그것을 삶으로 적용시키는 것 또한 지혜이다. 이스라엘의 지혜는 모세나 예언자들이 알려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반복적 성찰 및 관찰을 통해 남게 된 교훈이다. 단순히 들어오기만 하던 지혜가 결국에는 구체적인 삶 안에서 내가 살아보고 실수도 해보는 등의 경험(praxis)을 통해 알게 될 때에 비로소 내 삶 안에서 하나의 원리원칙으로 적용할 수 있다. - (크렌쇼우, 『구약 지혜문학의 이해』)
성경 안에는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 등이 지혜문학의 범주 안에 속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성경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결국 그 안에 하느님과 관련된 속성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삶의 원리원칙이 하느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문학은 각자 삶의 깊이에 따라 읽는 이마다 상대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지혜문학이라는 것은 자신이 얼마만큼 경험이 있는가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혜문학의 글귀들이 항상 마음에 감동을 줄 수는 없다. 물론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어떤 상황과 직결된 글귀들은 순간적으로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대게의 지혜문학-시편은 지금 당장은 그곳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과 지금 나의 상황이 직결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상황에 맞아 그 말씀이 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지혜는 상대적이다. 사람의 삶이 워낙 다양하므로 많은 경험들이 지혜문학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지혜문학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항상 다를 수밖에 없으며, 모세오경과 예언서와는 읽는 방법조차도 다르다.(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줄줄 읽어서는 안 된다. 그날그날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이 낫다.)
대체로 지혜문학은 역사와 무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규범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러한 규범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에 귀결된다. 지혜문학에서 결국 삶의 원리원칙들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모든 삶의 원리원칙들은 그분께서 피조물 안에 담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경외함이다.
그런데 지혜문학 안에서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서로 상충하는 부분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삶의 원리원칙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혜문학은 단순히 적혀 있는 그대로를 지켜서는 안 된다. 항상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관찰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어떤 상황에 있든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이 계획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뜻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적혀있는 것을 모두 알고 모두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고 그 뜻에 대해 경외심을 갖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지혜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지혜문학적 흐름
“지혜문학적 흐름”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지혜문학적 원리원칙이 단순히 지혜서, 시편 등등의 지혜문학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문학적인 이 형식은 단순히 어떤 시대부터 명확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던 하나의 문학 양식이다. 모세오경 안에서도, 예언서 안에서도, 역사서 안에서도, 심지어 복음서 안에서도 지혜문학적 표현들이 드러난다. 욥기 등을 우리가 통칭해서 지혜문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혜문학은 성경 모든 곳에 조금씩 흩어진 채로 계속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동안 지혜문학적 흐름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혜의 근간
지혜의 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간단한 행동원칙 뿐만이 아니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만한 윤리적 원칙들, 삶의 문제와 직결된 모든 것이 지혜의 범주에 속한다. 원리원칙을 실행에 옮기는 것부터 복잡한 사념적인 것까지 모든 지혜문학의 출발점은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행위와 그 결과 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원인결과문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이 그 상황에 올바른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지혜의 근간은 크게 선(善)과 악(惡)으로 나눌 수 있다. 지혜문학의 많은 글귀들은 선에 대하여 뭔가의 질서가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내용을 풀어간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선한 행동을 하면 선한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동을 하면 악한 결과가 나올까? 적어도 잠언, 지혜서, 집회서 등에서는 주로 상선벌악을 표방하고 있다.
“그때에 의인은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자기를 괴롭힌 자들 앞에, 자기의 노고를 경멸한 자들 앞에 나설 것이다. 악인들은 의인을 보고 극심한 공포로 떨며 그 뜻밖의 구원에 깜짝 놀랄 것이다.” (지혜5,1-2)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가? 대게 지혜문학 전승에서는 하느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선이고, 하느님 뜻에 거스르는 것이 악이다. 선한 이들은 하느님께 복을 받고, 악한 이들은 하느님께 벌을 받는다. (이는 신명기 등 다른 성서 문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선하면 하느님 앞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지혜문학 안에서도 욥기나 코헬렛은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주님의 종, 창세기의 아벨, 사무엘기의 우리야 - 과연 선하면 행복한가?) 모세를 통해 계시 받은 바에 의하면 선하게 살면 복을 받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 코헬렛이나 욥기 등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항명한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림자처럼 보내야 하는 허무하고 한정된 생애에서 그에게 무엇이 좋은지 누가 알리오? 인간이 죽은 다음 태양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려 주리오?” (코헬6,12)
하느님이 전적으로 선하다면 악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스라엘 지혜문학 전승은 주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辯神論)을 펼치며 인간이 잘못해서 고통이 세상에 오게 되었고, 인간이 하느님께 잘 하면 다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태고부터, 창세기부터 쭉 이어져오는 이야기들이다.(실제로 창세기의 선악과 관련 설화는 이러한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나름대로 모두 고통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탐구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지혜문학들은 이러한 단편적 주제에 있어서 서로 다양하고 다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중에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단편을 바탕으로 문헌을 구성하고 있으며, 각각의 단편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욥기의 입장에서도 잠언이 마냥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지혜문학의 근간은 선과 악이라는 근본지식을 전제하고 있고, 지혜문학적 흐름은 이러한 선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의식, 선과 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원인을 규명하면서 후대에 이와 관련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편우주적 질서로서의 지혜
고대 근동에서 개개의 질서들은 하나의 전체적인 창조질서의 연속으로 드러난다. 곧 씨를 언제 뿌리는 것이 좋은지와 같은 개개의 질서는 보편적 질서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개개의 질서를 고대 근동에서는 개개의 신들이(혹은 보편적 유일신이) 부여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질서는 신들의 세계마저도 포괄하고 지배한다. 수메르인들은 이러한 신들과 세계를 조정하는 보편우주적 원리원칙을 ‘ME, 메’라고 하였으며, 이집트인들은 ‘Ra, 라’, 이스라엘인들은 ‘Ṣedāqāh, 처다카’(정의)라고 불렀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정의라는 말은 결국 세계 전체를 운영하는 원 질서와 연결된다. “하느님의 의로움, 뜻=처다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곧 정의이자 세상의 원리원칙이다. 역으로 세상의 원리원칙을 찾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과 연결되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따르는 이들이다.
지혜문학의 정의는 율법서와는 달리 하느님이 주신 계시라기보다는 삶을 올바로 살아내려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고 하는 인간이성의 표현이다. (지혜는 인간 이성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모세오경이나 예언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하느님의 뜻과 연결을 시키면서 삶의 답을 찾기 때문에 성경의 지혜문학은 단순히 일반 자연과학과 연결 지을 수는 없다.
이스라엘에서 지혜의 시작은 하느님을 경외함, 두려워함이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시작이다. 실제로 여러 지혜문학에서 자주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지혜의 뿌리는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의 가지는 오래 삶이다.” (집회1,20)
여기서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단순히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얘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지혜문학을 읽을 때는 <“제물로 바쳐라.” “왜 바쳐야 합니까?”> 라는 해석 또한 있어야 한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왜 그러해야 합니까?”라고 저항하는 사람도 많다. 지혜문학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지혜를 찾도록 이끌어주시는 분, 지혜의 뿌리에 있기에 인간 삶의 원동력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지혜문학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 합리성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곧 하느님께 대해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순명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표현을 빌려보면, 우리는 이스라엘 지혜문학을 실천적 이성에 대한 신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성의 본 목적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것,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삶과 직결된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로써 악을 멸하고 선을 증진시키는 분이라는 것은 지혜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상선벌악이나 낙천적이고 단편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삶을 통해서 인간 이성적 판단에 따른 삶의 보편적 원리원칙을 도출해내고, 그것을 전수하고(학문, 전통 등), 그것의 뿌리가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임(하느님이 담아놓은 세상의 원리원칙과 직결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문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각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원리원칙을 다루다보니 지혜문학 안에서도 서로 상충하는 것들이 많으며, 율법서나 예언서와도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이라는 관점에서도 서로 상충하는 면이 있다.
하느님을 경외함을 지혜문학의 근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지혜문학을 바라보아야 올바르게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 지혜문학을 아는 데에 있어서 다른 성경말씀이나 인문학과 관련된 접점을 잘 찾으면,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말해 구체적인 삶의 지혜에 대해 알 수 있다.
지혜문학의 지혜도 실제 삶 안에서 드러낸 것을 꼽다보니 어떨 때는 맞을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아닐 때가 있다.(특정한 말씀이 어떤 때는 득이 되고 어떤 때는 독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 다룰 때 항상 주의해서 들어야 하며, 신학교에서의 원리원칙을 사제가 되어서도 그대로 쓰겠다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정 공동체 안에서의 원리원칙을 다른 곳에서까지 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옳지는 않다. 이러한 규정들(교회법이나 전례규정)에 대해서 경직된 원리원칙을 유지하는 자세를 피해야 한다. (성체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굳이 남에게까지 강요할 필요는 없다 - 원리원칙이라기보다는 강요당한다는 것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혜문학에 나오는 많은 구절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어떤 계시와 같이 절대적이라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다. context가 얘기하는 다양한 내용들이 지혜문학에 담겨 있다.
2017년도 1학기 제1강의: 지혜문학 각 권 개론
1. 잠 언
수백 개의 금언들로 이루어진 잠언은 상당히 오랜 시대와 과정을 거쳐 형성된 작품이다. 솔로몬 시대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5-4세기에 완성을 보게 되는 문학적이며 교양적인 작품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지혜선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1) 구조
( 9개의 금언집이 발견된다.)
▪ 1,1-7: 표 제
▪ 1,8-9,18: 유배시대 이후 5세기경의 작품이다. 교육자로서의 아버지가 아들 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악한 동료들과 방탕한 여인들( 거짓 지혜)을 경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10,1-22,16: 9개의 금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분으로서 남 유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솔로몬 제1 금언집’이다. 윤리생활에 관한 376개의 금언을 담고 있으며 종교적 영감으로 충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22,17-24,22: 요시아 시대(640-609)의 작품으로 “현인들의 제1 금언집”이라 불린다.
▪ 24,23-34: 유배시대 직전의 작품으로 ‘현인들의 제2 금언집’이라 불린다.
▪ 25-29장: 히즈키야 시대(716-687)에 수집된 작품으로 북 이스라엘에에 기원 을 두고 있는 ‘솔로몬 제2 금언집’이다.
▪ 30,1-14: 비 이스라엘인 아굴의 금언집.
▪ 30,15-33: 수적(數的) 금언집.
▪ 31,1-9: 비 이스라엘인인 르무엘의 금언집.
▪ 31,10-31: 유배시대 이후 5세기경의 작품으로 제1 금언집 저자의 손에 의하 여 이루어진 작품으로 본다. 제 1금언집에서 ‘거짓 지혜’(방탕한 여인)를 멀리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참된 지혜’(현숙한 여인) 를 예찬하고 있다.
2) 메시지
인간세계
잠언에 나타난 인간세계는 지혜로운 세계와 어리석은 세계 이렇게 두 세계로 분명하게 양분된다. 지혜란 무지가 아닌 어리석음의 반대개념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참 뜻과 목적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
신앙은 윤리생활의 기초
지혜개념의 명확한 파악을 통하여 잠언서는 선행실천을 종용하고 있다: 자기억제, 근검절약, 언어자제, 솔직담백성, 결혼에 대한 성실성, 재판의 공정성, 자선행위 등.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행위보다도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도대체 모든 윤리 행위의 기초로 나타난다. 여기서 현인은 신앙인과 동일시되며, 어리석은 사람은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비신앙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그 자체가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요 원칙이기 때문이다 (1,7).
바로 여기서 잠언이 말하는 지혜와 이방민족들이 말하고 있는 지혜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발견된다. 인간의 품위를 간직하고 또는 현인들의 가르침을 숙고함으로써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통해서 비로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2. 욥 기
유배시대 이후 5세기경의 작품인 욥기는 지상생활에서의 상선벌악(賞善罰惡) 사상이 해결될 수 없는 실질적인 문제점에 봉착한 바로 그 순간 탄생한 작품이다. 이 작품뿐만이 아니라 지혜문학 전체를 옳게 읽어나가기 위해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후세계(死後世界)에 대하여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인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침울하고 불투명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לוֹא(se'ôl)로 내려간다. 여기서 모든 이들은 지상생활에서의 삶의 양식에 관계없이, 즉 부자였건 가난뱅이였건, 선한 사람이었건 악한 사람이었건 관계없이 동등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사후에 대하여 이런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순간은 지상생활일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선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복된 삶을 누려야 하고, 악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고통스러운 삶을 누려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체험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 또는 정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확인시켜 주지 않는가? 그러함에도 하느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믿어 고백할 수 있겠는가?
죽음 후의 상선벌악사상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 6세기 초엽이지만(예레 31, 29; 에제 18,2) 결정적인 단계는 역시 욥기의 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결국 기원전 2 세기 말엽에 가서야 정리된다(다니 12, 2-3; 2마카 7,15; 12,43-45).
1) 구조
▪ 1 - 2: 산문체 서언부분으로서 욥이 당한 불행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서술한다.
▪ 3 - 31: 욥과 그의 세 친구인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 사이의 운문체 대화 를 내용으로 한다.
3; 29-31: 욥의 독백
4-27: 대화(친구의 충고, 욥의 답변, 욥의 기도가 3번씩 반복됨)
▪ 32 - 37: 운문체 연사. 욥의 오만과 세 친구의 시원치 않은 논리에 의분 을 느낀 엘리후의 등장과 그의 운문체 연사를 소개한다..
▪ 38,1-42,6: 하느님과 욥 사이의 운문체 대화.
▪ 42,7-17: 산문체 끝말.
2) 메시지
상선벌악 사상
현세적, 전통적 상선벌악 사상에 도전하고 있다. 욥은 전통적 상선벌악 사상을 신봉하고 있는 세 친구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무죄를 천명하기도 하고 또는 유죄하다 하더라도 그 대가가 의롭지 못함을 끝까지 주장하고 나선다. 하느님의 정의까지 의심하고 나서는 욥의 집념이 돋보이나, 이는 욥 개인의 당면 문제이기보다는 욥을 대표로 하는 그 시대 모든 인간들의 문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마저 포기하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신비스러운 그분의 계획을 인정하면서 그 계획에 대한 한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고심하고 있을 뿐이다.
현세적 고통의 의미
결국 현세적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현세에서 맞이하게 되는 고통은 하느님의 저주의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그분 사랑의 또 하나의 표현이 될 수도 있음을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교육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은 당연히 이를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 욥서가 전달해 주는 보배로운 메시지이다.
3. 코헬렛
코헬렛(ת qōhelet)은 “집회에서 말하는 자”, 즉 사회자, 설교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나 이 작품에서는 거의 고유명사화하고 있다. 1장 1절이 코헬렛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과 동일시하고 있고 또한 1-2장이 솔로몬의 생애를 자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작품은 유배시대이후 대략 3세기경의 작품으로 본다. 비교적 후기 히브리어로 저술되어 있고 아람어적인 경향이 농후할 뿐만이 아니라 희랍사상까지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전통교의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나선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 작품은 초막절 축제시 사용되었던 전례용 두루마리이기도 하다.
1) 구조
▪ 1,1 : 표제
▪ 1,2-11 : 머리말 (사물의 주기적 변화노래)
▪ 1,12-2,26 : 코헬렛의 자기반성
▪ 3,1-6,12 : 영원성과 순간성을 노래하면서 인간의 부정적인 면과 능력의 한 계를 깨우쳐 준다.
▪ 7,1-12,7 : 비유법을 활용하면서 좋은 일들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으 로 시작하여 지혜론을 펼쳐나간다.
▪ 12,9-14 : 결어.
2) 메시지
코헬렛의 인생관
코헬렛을 염세주의자,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의 인생관을 철저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편견이다. 코헬렛은 의로우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인일 뿐(3,11.14-15; 8,17; 11,5) 그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또한 삶의 기쁨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2,24; 3,13; 5,18; 9,7) 오히려 쾌락에 대한 남용을 단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2,1-2; 11,8.10) 그는 쾌락주의자도 아니다. 코헬렛은 회의론에 대해 말하고는 있으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내맡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6,10; 12,7) 회의론자가 아님이 또한 분명하다. 그는 다분히 현실주의자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삶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즉 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작품을 통해 코헬렛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참된 인생관이다.
하느님의 섭리
코헬렛은 전통신학이 주장하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기계적인 개념을 배척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갚아야 할 것[借邊]과 가지고 있는 것[貸邊]을 엄격하게 대조해서 계산해 주는 회계사도 아니며 인간의 공로와 범죄에 비례해서 삶 또는 죽음, 행복 또는 불행을 의무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거래자도 아니다. 신앙인은 다만 열심히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겸손과 신앙을 갖추어야 한다(7,14; 8,17; 마르 14,36).
4. 집회서
희랍어 성서엔 Σοφία Σιρὰχ(시라의 지혜) 또는 Σοφία Ίησού υἱός Σιρὰχ(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라는 서명으로 나타나나(50,27), 라틴어 성서는 Ecclesiasticus라는 책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라틴말 서명에서 이 작품이 신자 또는 예비신자 교육을 위해 사용된 작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집회서의 실질적인 저술목적은 신심과 선행을 가르치는 일로서 희랍문화권에 접어든 세대를 교육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카베오시대 이전 대략 190-180년경 저술된 작품으로 본다. 원래 히브리어로 저술되었으나 -1896년부터 몇 년에 걸쳐 이집트 카이로의 옛 Synagoga 안에 위치한 Gueniza에서 집회서의 60%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필사본 5개가 발견됨- 130년경 예수의 손자 한 사람이 희랍어로 번역한 것으로 본다(집회서 머리말 참조).
1) 구조
▪ 머리말(희랍어 역자의 작품)
▪ 1,1-16,23 : 지혜의 본질과 그것이 주는 혜택
▪ 16,24-23,27 : 하느님과 창조, 인간의 도덕적 품행
▪ 24,1-32,13 : 가정과 사회 속에서의 지혜
▪ 32,14-42,14 : 정결한 삶
▪ 42,15-50,29 : 하느님의 지혜는 드러난다.
▪ 51,1-30 : 감사의 기도(51,1-12)와 맺음 시(51,13-30)를 담고 있는 부록
2) 메시지
- 전통교의를 비판하기보다는 존중하면서 작품을 전개시켜 나간다.
- 지혜와 율법을 동일시하고 있다(24,23-24; 15,1; 19,20 ). 또한 역사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인들의 덕망을 본받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42,15-50,29).
5. 지혜서
기원전 5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즉 Diaspora의 유대인 공동체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전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한 작품이다. 따라서 지혜서는 처음부터 희랍어로 저술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전통을 견지하면서도 희랍문화의 영향을 숨기지 못하는 작품이다.
1) 구조
▪ 1,1-15 : 머리말(정의, 지혜, 생명)
▪ 1,16-5, 23 : 지혜와 인간의 운명
▪ 6 - 9 : 지혜의 기원, 본성, 작용과 지혜를 구하는 방법
▪ 10 - 19 :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지혜
아담으로부터 이집트 탈출까지의 지혜의 역할(10,1-11,4)
제1 반대명제(11,5-14) : 물
하느님의 자비(11,15-12, 27)
우상숭배(13-15)
제2 반대명제(16,1-4) : 동물과 메추라기
제3 반대명제(16,5-14) : 메뚜기 - 파리떼와 구리 뱀
제4 반대명제(16,15-19) : 벼락 - 우박과 만나
제5 반대명제(17,1-18,4) : 암흑과 빛
제6 반대명제(18,5-25 ) : 맏아들
제7 반대명제(19,1-9) : 홍해
이스라엘과 이집트(19,10-21)
결어(19,22)
2) 메시지
- 지혜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전통의 하느님이시다.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만물의 주인이시며 지혜의 원천이시다.
- 지혜서의 하느님은 불사불멸하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다(2,23). 죽음 후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지상생활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6. 아가
주해를 둘러싸고 논쟁이 가장 심했던 그리고 심한 작품이다. 문제의 핵심은 아가가 지나칠 정도의 선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가는 그 저자로 솔로몬을 가리키고 있으나(1,1), 전도서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의 전승일 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아가를 구성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일부가 솔로몬 시대와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유배시대 이후 대략 4세기경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본다.
1) 구조
(작품의 절정인 8장을 향하여 5개의 시집이 열거되어 있다.)
▪ 머리말 : 1,1 - 4
▪ 제1 집 : 1,5 - 2,7
▪ 제2 집 : 2,8 - 3,5
▪ 제3 집 : 3,6 - 5,1
▪ 제4 집 : 5,2 - 6,3
▪ 제5 집 : 6,4 - 8,5
▪ 맺음말 : 8,6 - 7
▪ 부록 : 8,8 - 14
2) 주해방법
- 우의적 주해
전통적인 주해방법으로 신랑을 하느님, 신부를 이스라엘로 본다. 초기교회 때부터 흔히 이 방법을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 또는 그리스도와 각 개인의 영혼과의 관계를 노래하는 한 편의 시로 이해해 왔으나 이런 주해방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가서 자체가 우의적 작품임을 시사하는 바가 전혀 없으며, 이스라엘의 역사나 지명까지도 우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 자의적 주해
최근까지 위험시되거나 거의 무시되어온 방법으로서 현대 성서학계에서 점차 주장되기 시작한 주해방법이다. 선남선녀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서 받아들이자는 견해다.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하다는 편견을 떠나서, 순수한 인간적 사랑이라면 하느님의 은총 속에 펼쳐져 그분의 관심대상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주해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렇다면 과연 작품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가가 실질적인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승화시켜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를 묘사한 시로 읽어나간다면 히브리 성서의 책이름이 말하듯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들 중의 찬미가”(םיי רי)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이렇게 해서 지혜문학은 이제 지혜의 원천이신 야훼 하느님을 찬미하는 문학,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으로부터 참 지혜를 간구하게 하고 슬기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가는 탁월한 문학으로 성서 안에 자리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서의 지혜문학 작품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보고 그분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 “야훼를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 1,7; 2,5; 9,10; 14, 2; 15,33; 시편 111,10; 욥 28,28; 집회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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