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31강
사두숫땅
Sādhusuttaṃ
좋음 경(S1:33)
사두(sādhu)는 부처님께서 항상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나 그리고 아난다 존자가 말씀하시고 나면 부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사두(sādhu)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훌륭한 일을 할 때 사두(sādhu)로 인정하셨습니다. 사두(sādhu)의 뜻은 선한, 선량한, 유익한, 잘, 철저히, 제발, 부디, 어서 오십시오, 좋다, 훌륭하다, 착하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재(善哉) 등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사왓티니다낭
Sāvatthinidānaṃ- 생략
2. 아타 코 삼바훌라 사뚤라빠까이까 데와따요 아빅깐따야 랏띠야
Atha kho sambahulā satullapakāyikā devatāyo abhikkantāya rattiyā
아빅깐따와나 께와라깝빵 제따와낭 오바세뜨와 예나 바가와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떼누빠상까밍수, 우빠상까미뜨와 바가완땅 아비와데뜨와 에깜 안땅
tenupasaṅkamiṃ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 antaṃ
앗탕수. 에까만땅 티따 코 에까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aṭṭhaṃsu. Ekamantaṃ ṭhitā kho ek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우다네시.
udānesi.
2. 그때 많은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어떤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다.
좋음 경의 내용은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은 다시 부처님을 만나러 와서 대화를 나눈 내용입니다. 사뚤라빠 무리가 풍랑을 만나 배 안에서 죽을 때 스승이 5계를 주면서 계율, 보시에 대한 중요성을 설했습니다. 이 과보로 700명이 모두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절에서도 공양을 올리기 전에 5계를 먼저 주고 공양을 올리는 의식을 행합니다. 지금 스리랑카에서도 유학을 간다거나 외국을 가는 등 특별한 날에 스님들을 집에 모셔서 공양을 올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천신들이 계율과 보시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들입니다. 엄청난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때 계율과 보시에 대한 법문을 듣고 천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분들에게는 아주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자신들의 스승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다낭 우다네시(udānaṃ udānesi)는 ‘감흥어를 말하다’입니다. 우다나(udāna)는 감흥어(感興語)로 마음에 깊이 감동되어 일어나는 흥취로 하는 소리나 말입니다. 그래서 기분 좋을 때 하는 감탄사, 소리, 시, 휘파람 등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흥어를 읊는 것입니다. 우다네시(udānesi)는 숨을 내쉬다, 발언하다, 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초의 우다나(udāna)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네까 자띠 삼사랑
Aneka jati samsāraṃ
산다위상 아닙비상,
Sandhāvisaṃ anibbisaṃ,
수많은 생의 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를 찾아 구하였건만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우다나(udāna)는 다음과 같습니다.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따.
Vayadhamma saṅkhāra appamādena sampādeta.
모든 것은 변하는 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하라.
이렇게 감흥어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변해서 무상하므로 열심히 노력해서 열반에 이르러 해탈의 자유를 얻으라는 간절한 당부이십니다. 이러한 결과만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감흥어는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뚤라빠 무리 천신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고따마 붓다라고 하였고, 이번에는 존경의 뜻이 담긴 마리사(marisa)라고 불렀습니다. 천신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는 ‘죽음을 초월 한 분’, 괴로움을 초월한 분’의 뜻을 가진 마리사(marisa)라고 하였습니다.
2. 사두 코 마리사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맛체라 짜 빠마다 짜 에왕 다낭 나 디야띠.
Maccherā ca pamādā ca evaṃ dānaṃ na dīyati.
뿐냥 아깡카마네나 데이양 호띠 위자나따띠.
Puññaṃ ākaṅkhamānena deyyaṃ hoti vijānatāti.
2.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인색하고 게을러서 보시하지 않습니다.
공덕을 알고 바라는 자는 보시해야 합니다.
다나(dāna)는 보시(報施), 자선, 증여, 베풂, 선물, 보시물, 관대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공덕을 남에게 베풀어서 갚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시 하지 않는 이유는 인색하고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공덕을 모르기 때문이고 그리고 두려움 때문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공덕에 대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미루고 게으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자기고 있는 재산이 죽을 때 쓰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한데 그것이 없어질까 두려워서 보시를 못합니다. 그러나 천신은 공덕의 과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공덕을 좋아하는 자는 보시하여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뿐냥 아깡카마네나 데이양 호띠 위자나따띠(Puññaṃ ākaṅkhamānena deyyaṃ hoti vijānatāti)’에서 뿐냐(Puñña)는 공덕이고, 뿐냥 아깡카마네나(Puññaṃ ākaṅkhamānena)는 공덕을 바라는 자,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 공덕을 짓는 것을 좋아하면서 한다는 뜻입니다. 아깡카마네(ākaṅkhamāne)는 의욕, 희망이라는 뜻의 아깡카(ākaṅkha)와 존경하다, 좋아하다는 뜻의 마네(māne)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좋아서 바란다는 뜻입니다. 데이야(deyya)는 보시를 받을만한, 보시물, 공양물입니다. 호띠(hoti)는 이다, 있다. 되다, 라는 뜻입니다. 위자나따(vijānatā)는 알다, 이해하다,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덕을 알고 바라는 자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입니다.
3.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우다네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udānesi.
3.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다.
사두 코 마리사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아삐 짜 압빠까스밈삐 사두 다낭.
Api ca appakasmimpi sādhu dānaṃ.
압빠스메께 빠웻찬띠 바후네께 나 딧차레,
Appasmeke pavecchanti bahuneke na dicchare,
압빠스마 닥키나 딘나 사핫세나 사망 미따띠.
Appasmā dakkhiṇā dinnā sahassena samaṃ mitāti.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아울러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적게 가져도 어떤 자들은 나누어 가지고
많이 가져도 어쩐 자들은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적게 가졌지만 베푸는 보시는
그 가치가 천 배는 됩니다.
우다나(udāna)에 대한 주석서의 해석을 보면 기름이 그릇을 넘쳐서 흐르는 것처럼, 비가 많이 오면 물이 호수를 넘치는 것처럼 기쁨의 언어가 가슴에 넘쳐흐르는 것을 나타낸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희열인 삐띠(pīti)가 너무 많아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감흥어인 우다나(udāna)입니다. 이때 매우 행복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꿋따까 니까야의 테라 가타(Thera gatha)는 장로 스님의 우다나(udāna)를 말하거나 비구니 스님들의 우다나(udāna)로 아라한 스님들의 행복한 깨달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테라 가타(Thera gatha)에서 테라(Thera)는 장노(長老), 상좌(上座), 연장자를 말하고, 가타(gatha)는 말하다, 암송하다는 뜻으로 경전을 암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을 암송할 때는 일정한 운율에 맞추어서하기 때문에 감흥어인 우다나(udāna)와 같은 감동을 줍니다.
우다나(udāna)는 행복한 감흥인데 매우 큰 행복감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습니다. 행복이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니고 잠깐의 행복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참 잘하고 있구나, 라고 말씀하실 때도 우다나(udāna)를 하셨습니다.
감흥은 이러한 기쁨이 넘치는 상태인데 기쁨, 희열인 삐띠(pīti)에는 니라미사 삐띠(nirāmisa pīti)와 라미사 삐띠(rāmisa pīti)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선한 니라미사 삐띠(nirāmisa pīti)입니다. 이는 조건이 없는 삐띠(pīti)를 말합니다. 그래서 니라미사 삐띠(nirāmisa pīti)는 자양을 여읜, 감각적 쾌락의 욕구가 없는, 무염오의, 무관심한, 정신적인, 출세간적인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음에 라미사 삐띠(rāmisa pīti)는 조건이 있는 삐띠(pīti)입니다. 니라미사 삐띠(nirāmisa pīti) 앞에 없음, 아님, 이라는 뜻의 니(ni)가 붙으면 반대가 되어 라미사 삐띠(rāmisa pīti)가 됩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악한 마음의 우다나(udāna)가 올라옵니다. 우리는 탐욕과 성냄과 아리석음이 있어 나한테 이익 되는 상황에서만 삐띠(pīti)가 올라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슬플 때도 시를 씁니다. 이것은 삐띠(pīti)가 아닙니다.
적게 가져도 베푸는 보시는 가진 것이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떠난 보시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부분을 떠나서 보시할 수 있습니다. 적게 가졌다고 보시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덕을 바라고 공덕을 아는 자는 가진 것에 상관없이 보시를 합니다. 보시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시물보다도 보시하는 자의 의도입니다. 이때의 의도가 선할 때 선업이 됩니다. 그러므로 보시물이 반드시 값진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4. 아타 코 아빠라 데와다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우다네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udānesi.
4.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다.
사두 코 마리사 다낭. 압빠스밈삐 사두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Appasmimpi sādhu dānaṃ.
아삐 짜 삿다야삐 사두 다낭.
Api ca saddhāyapi sādhu dānaṃ.
다난짜 윳단짜 사마나마후 압빠삐 산따 바후께 지난띠,
Dānañca yuddhañca samānamāhu appāpi santā bahuke jinanti,
압빰삐 쩨 삿다하노 다다띠, 떼네와 소 호띠 수키 빠랏타띠.
Appampi ce saddahāno dadāti, Teneva so hoti sukhi paratthāti.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아울러, 믿음으로 하는 보시도 좋은 것입니다.
보시와 전쟁은 같다고 말합니다.
적은 숫자라도 참된 사람이 많으면 이기기 때문인데
만일 적은 것일지라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이 때문에 저 세상에서 행복합니다.
여러 천신들이 부처님께 보시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 보시에 대한 법문을 듣고 천상에 태어나 뿌듯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보시에 대한 말을 부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보시를 할 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과 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할 때 업에 대한 결과를 알고 보시해야 합니다. 이 보시를 하면 이런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시할 생각을 할 때, 보시를 행할 때의 마음, 보시하고 나서의 마음, 이렇게 3가지가 똑 같아야 합니다. 내가 보시를 해서 받은 사람이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알레르기 있는 사람에게 내가 모르고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음식을 보시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정확히 알고 보시를 하면 나도 좋고 보시를 받는 사람도 해롭지 않은 보시가 됩니다. 대승에서의 보살은 바라고 보시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향해서 가기 때문에 공덕이 필요 없어 바라고 보시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바라밀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덕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보시로 인해서 천상에 가는 길이 있고, 보시로 인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보시를 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줄어들고 공덕을 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면 집착이 되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공덕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80대 아라한들은 모두 공덕을 쌓고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다고 서원을 세우신 분들입니다.
공부를 하면 공부하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바람이 있어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합니다. 시험에 합격한 후에는 공부가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고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공덕을 지어야 한다고 천신이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보시도 좋은 것입니다.’라는 뜻은 업과 업의 과보라는 결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이는 전쟁을 할 때 몇 명이 되지 않는 영웅들이 믿음을 가지고 적진에 돌진하여 수많은 상대를 정복하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자는 적은 보시를 하더라도 뿌리 깊은 인색함을 전부 부수고 많은 보시를 해서 그만한 과보를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또 ‘보시하는 것이 전쟁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목숨을 건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전쟁을 해서 이기면 보시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이기면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원래부터 있었던 말입니다. 뿌리 깊은 인색함을 쳐부수고 많은 보시를 하면 반드시 그만한 과보를 성취하게 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보시개념이 없어서 보시하는 것이 정말 전쟁입니다. 내가 왜 줘야지, 왜 내가 보시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보시의 공덕을 알면 보시를 계속합니다. 계속 보시를 하다 보면 나중에는 보시라는 개념은 사라지는데 공덕을 알기 때문에 보시를 합니다. 공덕을 모르면 보시를 한 두 번 하고 맙니다. 그래서 보시의 공덕을 알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보시를 한다는 것은 아라한이 되어서 바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안국동 전철역에 ‘100원 주세요’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1000원을 줬는데 900원을 돌려줬습니다. 그럴 때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덕을 알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공양보시를 하면 5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아유하(āyūhā)는 생명이 길어지는 이익입니다. 완나(vanna)는 피부색 좋은 피부를 가지는 이익이 있습니다. 수카(sukha)는 편안한 행복을 갖는 이익이 있습니다. 발라(bala)는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갖는 이익이 있습니다. 빤냐(pañña)는 지혜를 갖는 이익이 있습니다.
사실 주부들은 매일 남편과 자식한테 보시합니다. 그런데 보시라는 것을 모르니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면서 서운해 합니다. 보시의 공덕을 알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공덕은 집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덕을 쌓으면 집착이 사라집니다. 보시라는 것을 알면 공덕을 알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이 보시의 공덕으로 도과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공덕을 알면 보시하기가 쉽고 항상 청정한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시할 기회가 점점 사라집니다.
지금처럼 불법이 있고 보시 할 수 있는 시대에는 보시 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보시할 수 있는 승가도 정책도 없는 시대가 옵니다.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탁발행사를 정부에 신청했는데 거절 당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지금 탁발금지 상태입니다. 대신에 사원 안에서는 탁발이 가능하지만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사원 밖에서 탁발을 하면 경찰에 붙잡혀 갑니다. 싱가포르에 테라와다 사찰들이 많이 있고 신심이 좋은 중국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탁발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어떤 시대가 오면 탁발공양을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스리랑카 전통은 오늘이 6월 보름날 입니다. 6월 보름에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로부터 스리랑카가 불교를 받아들인 날입니다. 스리랑카 달력으로는 3월 보름입니다. 이날은 불교를 받아들인 공간에 백만 명 정도가 1주일 정도 머물면서 기도하고 축제를 합니다. 여기에 모인 불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공간이 있어서 모두 무료로 음료수와 음식을 공양 올립니다. 스리랑카 사찰에서 미국에 가서도 이 행사를 했는데 어느 날 미국 분이 그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서 그 분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결국 절에서 병원비를 계산하고 손해 배상을 해줬습니다. 그 이후 이런 보시 행사가 없어졌습니다.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음식에 좋지 않은 것을 넣을 수 있다고 해서 없어진 것입니다.
보시할 수 있는 기회가 갈수록 사라집니다.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마음이 같은 청정한 보시를 해야 합니다.
5.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우다네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udānesi.
5.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면전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다.
사두 코 마리사 다낭. 압빠스밈삐 사두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Appasmimpi sādhu dānaṃ.
삿다야삐 사두 다낭. 아삐 짜 삿다야삐 사두 다낭.
Saddhāyapi sādhu dānaṃ. Api ca saddhāyapi sādhu dānaṃ.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울러, 믿음으로 하는 보시도 좋은 것입니다.
요 담마랏닷사 다다띠 다낭 웃타나위리야디가땃사 잔뚜,
Yo dhammaladdhassa dadāti dānaṃ uṭṭhānaviriyādhigatassa jantu,
아띡깜마 소 와따라닝 야맛사 딥바니 타나니 우뻬띠 맛쪼띠.
Atikkamma so vataraṇiṃ yamassa dibbāni ṭhānāni upeti maccoti.
바르게 얻거나 힘써 노력하여 얻은
재산과 물건을 보시하는 사람은
지옥의 웨따라니 강을 뛰어넘어
죽을 때 천상으로 올라갑니다.
이 게송에서는 보시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내가 보시를 할 때는 청정한 보시를 해야 합니다. 청정한 보시란 내가 열심히 땀을 흘려서 번 재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사업을 하지 않고 얻은 재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얻거나 힘써 노력하여 얻은
재산과 물건을 보시하는 사람은’ 이라고 했을 때 바르게 얻었다는 것은 5가지 사업으로 얻은 재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재산과 물건을 보시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은 법을 얻고 법을 증득한 도과를 얻은 성스러운 제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바르게 얻은 재산이나 물건을 보시할 때 도과를 얻은 성자에게 하는 것도 좋다는 뜻입니다.
보시는 직접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프리카에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1만원 송금해서 보시한 것은 나중에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직접 보고 보시하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야 공덕이 됩니다.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 훌륭한 왕이 출중한 대탑을 세웠습니다. 많은 아라한들이 모여 있던 공간이었습니다. 이 왕이 불교를 다시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왕일 때 인도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나는 불교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했으나 나중에 아버지와 싸워서 도망갔습니다.
그분이 아버지께 쫓겨나서 돌아다니다가 탁발하는 스님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은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공양을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스님들께 뭘 드려야지 하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는데 딱 하나 아주 고급스러운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왕자였기 때문에 값이 나가는 신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발을 팔아서 스님들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나중에 이 왕이 스리랑카에 6개의 대탑을 세웠고 스리랑카에서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왕은 자신이 한 모든 선행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선행기록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어서 도리천에 태어났습니다. 스님들이 어떻게 해서 그가 도리천에 태어났는지 알아보니 신발 팔아서 스님들께 공양 올린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왕일 때 많은 보시를 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한 것이라서 큰 공덕이 안 되고 직접 한 것이 큰 공덕이 된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안 좋은 것을 많이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좋은 일을 기억할 수 있도록 직접 보시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담마랏다(Dhammaladdha)는 법답게 바르게 얻은 재물을 말합니다. 법답게라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사업을 하지 않고서 얻은 재물을 말합니다. 사람 파는 사업, 독약 사업, 무기 사업, 술 사업, 도살 업을 하지 않고 번 재물을 말합니다.
경전에 재산의 1/4은 보시와 먹고 사는데, 2/4는 사업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마지막 1/4은 위험한 때를 대비하는데 배분하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살면서 항상 보시를 생활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웃타나위리야디가땃사(Uṭṭhānavīriyādhigatassa)는 열정과 노력으로 얻은 것을 보시한다는 뜻입니다.
웨따라니(vetaraṇī)는 대지옥에 있는 잿물이 흐르는 강의 이름입니다. 이 강은 강한 독성의 물이 흐르는 강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이것을 좋은 물인 줄 착각하여 목욕을 하거나 마시려고 들어가면 강둑에 설치된 날카로운 칼이나 무기에 난도질을 당한다고 합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여기서 웨따라니 강을 언급한 것은 단지 비유하기 위한 것이며, 이렇게 바르게 보시한 자는 31개의 대지옥을 모두 다 건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띡깜마 소 웨따라닝(Atikkamma so vetaraṇiṃ)은 계율을 지키고 보시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딥바나 타나니 우뻬띠 맛쪼(Dibbāni ṭhānāni upeti macco)는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딥바니(Dibbāni)가 천상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 보시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올라갑니다.
6.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우다네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udānesi.
6.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습니다.
사두 코 마리사 다낭 압빠까스밈삐 사두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Appakasmimpi sādhu dānaṃ.
삿다야삐 사두 다낭. 아삐 짜 담마랏닷사삐 사두 다낭.
Saddhāyapi sādhu dānaṃ. Dhammaladdhassāpi sādhu dānaṃ.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삐 짜 위쩨이야 다남삐 사두.
Api ca viceyya dānampi sādhu dānaṃ.
위쩨이야 다낭 수가땁빠삿탕,
Viceyya dānaṃ sugatappasatthaṃ,
예 닥키네이야 이다 지와로께,
Ye dakkhiṇeyyā idha jīvaloke,
에떼수 딘나니 마합파라니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비자니 웃따니 야타 수켓떼띠.
Bījāni vuttāni yathā sukhetteti.
믿음으로 하는 보시란 참으로 좋은 것이고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보시는 좋은 것입니다.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도 좋고
잘 살펴서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뭇 삶에 대한 계행을 지키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잘 살펴서 보시하는 것은 선서(善逝)께서 칭찬하는 일입니다.
이 삶의 세계에서 보시 받을 사람에게
보시를 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므로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위쩨이야 다나(Viceyya dāna)는 잘 살펴보고 확인해서 보시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고려된 보시나 적절한 보시를 말합니다. 위쩨이야(Viceyya)는 고려하다, 떠보다, 은밀하게,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하는 보시가 아니고 내가 보시하는 보시물이나 보시 받을 대상에 대해서 면밀하게 고려해서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보시를 심찰시(審察施)라고 합니다. 이렇게 잘 살펴보고 하는 보시를 선서께서 좋아하신다는 말입니다. 수가땁빠삿탕(sugatappasatthaṃ)에서 수가따(sugata)는 잘 간, 바른 길로 가신 님, 선서(善逝), 행복한, 행복하신 님 입니다. 선서(善逝)는 여래십호(如來十號)의 하나로 부처님을 말합니다.
보시를 할 때는 두 가지를 구별하거나 식별해야 합니다. 구별하고 식별하는 것은 위찌나나(vicinana)라고 합니다.
첫째, 보시물의 식별(dakkhiṇā vicinana)
둘째,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선별(dakkhiṇeyya vicinana)
닥키나(dakkhiṇā)는 보시, 공양이고, 닥키네이야(dakkhiṇeyya)는 보시의 가치가 있는,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공양 받을만한, 공양물인지를 말합니다. 보시를 할 때는 보시물을 선별하고 보시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공양을 올립니다. 불편함이 생길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옛날에는 주로 음식과 가사를 올렸습니다. 음식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로 맛있는 것을 보시하고, 받는 자도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을 확인해서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자니 웃따니(Bījāni vuttāni)는 씨를 뿌릴 때 씨가 좋은 씨인지 확인해서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싹을 잘 틔울 수 있는 씨를 뿌리듯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우다낭 우다네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udānaṃ udānesi.
7. 그러자 다른 천신이 세존의 앞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습니다.
사두 코 마리사 다낭 압빠까스밈삐 사두 다낭.
Sādhu kho mārisa dānaṃ. Appakasmimpi sādhu dānaṃ.
삿다야삐 사두 다낭 아삐 짜 담마랏닷사삐 사두 다낭.
Saddhāyapi sādhu dānaṃ. Dhammaladdhassāpi sādhu dānaṃ.
위쩨이야 다남삐 사두. 아삐 짜 빠네수삐 사두 상야모.
Viceyya dānampi sādhu. Api ca pāṇesupi sādhu saṃyamo.
요 빠나부떼수 아헤타양 짜랑
Yo pāṇabhūtesu aheṭhayaṃ caraṃ
빠루빠와다 나 까론띠 빠빵.
parūpavādā na karonti pāpaṃ.
비룽 빠상산띠 나 히 땃타 수랑
Bhīruṃ pasaṃsanti na hi tattha sūraṃ
바야 히 산또 나 까론띠 빠빤띠.
bhayā hi santo na karonti pāpanti.
세존이시여, 보시란 참 좋은 것입니다.
적은 것일지라도 보시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도 좋고
바르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도 좋고
잘 살펴서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뭇 삶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참 사람은 존재하는 뭇 생명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으며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만용을 하는 사람이 아닌 삼가는 사람을 기리며
스스로도 삼가 하여 나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이 게송은 계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천신은 보시도 중요하지만 계율도 중요함을 부처님께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헤타양 짜랑(aheṭhayaṃ caraṃ)은 폭력에서 벗어나다는 뜻입니다. 또 폭력을 제어하다, 라고도 합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가기관을 제어하면 폭력을 쓰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문을 지키는 문지기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문을 지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도둑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지 못합니다.
뭇 삶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보시를 하는 것 외에 계행을 지킬 것을 말합니다. 특히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만용을 하는 사람이 아닌’이라고 했을 때의 만용은 사물의 이치를 분간하지 않고 함부로 날 뛰는 것을 말합니다.
8. 아타 코 아빠라 데와따 바가완땅 에따다워짜.
Atha kho aparā devatā bhagavantaṃ etadavoca.
깟사 누 코 바가와 수바시딴띠.
kassa nu kho bhagavā subhāsitanti.
8. 그때 어떤 천신이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누구의 말이 잘 말한 것입니까?
9. 삽바쌍 워 수바시땅 빠리야예나. 아삐 짜 마마삐 수나타.
Sabbāsaṃ vo subhāsitaṃ pariyāyena. Api ca mamapi suṇātha.
삿다 히 다낭 바후다 빠삿탕,
Saddhā hi dānaṃ bahudhā pasatthaṃ,
다나 짜 코 담마빠당와 세이요,
Dānā ca kho dhammapadaṃva seyyo,
뿝베 짜 히 뿝바따레 짜 산또,
Pubbe ca hi pubbatare ca santo,
닙바나메왓자가뭉 사반냐띠.
Nibbānamevajjhagamuṃ sapaññāti.
9. 그대들 모두 방편적으로 좋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말도 들어 보라.
믿음으로 보시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칭찬받지만
보시보다 진리의 말씀을 실천함이 더 뛰어나다.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참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통찰지혜를 갖춰 모두 열반에 이르렀다.
이상이 좋음 경의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천신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하시는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시보다는 법을 실천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법 보시의 목적은 법을 실천해서 열반을 증득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천신들에게도 이런 보시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법을 지켜달라고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법이 없으면 깨달음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과거 불들께서도 법에 의해서 통찰지혜를 갖췄다고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바시땅(bhāsitaṃ)은 말하다, 라는 뜻인데 앞에 수(su)가 붙어서 수바시땅(subhāsitaṃ)이라고 하면 훌륭한 말을 했다, 라는 뜻입니다. 담마빠당와(dhammapadaṃva)는 열반을 향하도록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이런 보시가 바로 법보시(法布施)입니다. 담마빠당와(dhammapadaṃva)에서 담마빠다(dhammapada)는 진리의 말씀, 법의 말씀, 법구경을 의미합니다. 이는 열반으로 가는 필요한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37조도품을 뜻합니다.
뿝베 짜 히 뿝마따레 차 산또(Pubbe ca hi pubbatare ca santo)는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참된 사람들이 있어, 라는 뜻입니다. 뿝베(Pubbe)는 이전에, 라는 뜻입니다. 과거에도 많은 천신들이 열반을 증득했으니 당신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십니다. 그래서 이전이란 과거 생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천신들은 자기들이 지계와 보시로 천신이 되었으므로 보시 지계에 대한 중요성을 계속 이야기했는데 부처님은 그것들도 방편으로 좋으나 나아가서 법보시를 통해 열반으로 지향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이 남을 돕는 보시를 하는 문제도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런 마음으로 보시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한 탐구입니다. 보시는 선한 공덕을 쌓은 일이고 깨달음으로 가는 토양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옥석을 가려서 하는 보시가 더 유익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두 경(Sādhu sutta)에서 부처님은 누구라도 옳은 이야기를 하면 사두(sādhu)로써 인정하셨습니다. 천신들은 수행은 할 수 없으나 법을 듣고 수많은 천신들에게 법보시를 할 수 있고 또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많은 설법 중에 인간들에게 이로운 것만 선별해서 결집에서 채용한 것입니다.